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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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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udwig Wittgenstein 1910.jpg|thumb|350px|1910년대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File:35. Portrait of Wittgenstein.jpg|thumb|150px|Ludwig Wittgenstein (1929)]]
'''[[w: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lang|de|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삶을 보낸 철학자이다.
==출처 있음==
*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1.1
*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2.012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llang|de|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7.
* 한 낱말을 발화하는 것은 말하자면 표상(表象) 피아노에서 어떤 한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6
*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들과 광장들, 오래된 집들과 새 집들,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들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8
*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43
*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들을 주시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지만, 유사성들, 근친성들은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많이. 이미 말했다시피: 생각하지 말고, 보라!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66
* 철학은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오성(悟性)에 걸린 마법에 대한 하나의 투쟁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09
* 우리 언어의 형식들 속으로 수용된 비유가 잘못된 가상(假象)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 가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12
*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그것을 결국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24
*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들의 측면들은 그것들의 단순성과 일상성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29
* 우리의 역설은, 하나의 규칙이 어떠한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어떤 행위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일치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br>여기에 어떤 오해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고 과정에서 해석에 해석을 가한다―마치 각각의 한 해석이 우리의 이 해석 뒤에 또다시 놓여 있는 한 해석을 생각하기 전까지의 최소한 한순간은 우리를 진정시킨다는 듯이―는 점에서 이미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여 주는 것은 요컨대, 하나의 해석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규칙을 따른다"라고 부르는 것과 "규칙에 어긋나게 행위한다"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적용의 그때 그때 표현되는 규칙 파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201
*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br>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219
*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보여주는 것.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309
* 언어놀이들이 변하면 개념들이 변화하며, 또 개념들과 더불어 낱말들의 의미들도 변화한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65.
*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115.
* 나폴레옹의 존재를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겐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150년 전의 지구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이제 그는 우리의 증거 체계 전체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좀더 경청할 용의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 체계가 그 체계 내의 확실함보다 더 확실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게 된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185.
* 나는 어떤 철학자와 함께 정원에 앉아 있다. 그는 우리 근처에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나는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다. 제3의 인물이 다가와서는 그 말을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돌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철학하고 있을 뿐이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467.
== 출처 없음 ==
* 계산이라는 과정은 그저 직관을 일깨운다. 계산은 실험이 아니다.
*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 논리는 세계를 채운다: 세계의 한계는 또한 논리의 한계이다.
*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이러 이러한 것은 세계에 있으나 저런 것은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가능성을 제외시키는 것을 전제로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마땅한 경우라고 볼 수 없다. 즉 논리가 이 한계를 다른 측면에서 관찰해 본다면 논리는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말 할 수 없다.
* 철학에서 당신의 목표가 무엇인가? 파리를 보기 위해 병 밖으로 꺼내는 방식.
==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어록 ==
*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경제학 교수인 스라파와 함께 《논고》의 사상에 대해 여러 번 토론을 했다. 하루는(내 생각엔 두 사람이 함께 기차를 타고 있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명제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논리적 형식', 동일한 '논리적 다양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스라파는 한 손의 손가락 끝으로 턱밑을 한번 바깥쪽으로 쓸고는(이것은 혐오나 경멸을 나타낼 때 나폴리 사람들이 흔히 쓰는 제스처이다) "그것의 논리적 형식은 뭡니까?"라고 물었다. 스라파가 든 예는 비트겐슈타인에게 한 명제와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 동일한 '형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속에는 불합리한 점이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 명제는 문자 그대로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실재에 대한 '그림'이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 노먼 맬컴, 《회상록》 (이윤 옮김)
== 각주 ==
<references/>
{{기본정렬: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위키백과}}
[[분류:20세기 죽음]]
[[분류:오스트리아의 작가]]
[[분류:잉글랜드의 작가]]
[[분류:철학자]]
[[분류:유대인]]
[[분류: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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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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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Aristotle Altemps Inv8575.jpg|thumb|200px|아리스토텔레스]]
'''[[w: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llang|grc|Αριστοτέλης}}, {{llang|en|Aristotle}},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 어록 ==
* [[인간]]은 천성적으로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ref>정치학 1235a2f.</ref>
* 우리는 목표에 대해서가 아니라, 목표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이리 저리 궁리한다.<ref>윤리학, 1112b11f</ref>
*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혼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사회가 필요없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 틀림없다.<ref>정치학 1253a27</ref>
* 법은 질서이며, 좋은 법은 좋은 질서이다.<ref>정치학 3. 1326a29</ref>
*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
* 누구에게나 친구는 어느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니다.
* 희망이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 처음에는 [[진실]]과 조금 밖에 빗나가지 않은 것이라도 후에는 천 배나 벌어지게 된다.
* [[친구]]는 제2의 재산이다.
* 부끄러워하는 것은 청년에게는 일종의 진실이고, 노인에게는 일종의 불명예이다.
=== 《정치학》 ===
* 국가는 분명 자연의 산물이고 개인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전체에 대해 다른 경우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몸과 혼이 다르고, 들짐승이 인간과 다른 만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인간들, 말하자면 몸을 사용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되 그럴 경우 최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노예이며, 이들은 모두 앞서 말한 원칙에 따라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 남에게 속할 수 있고 그래서 실제로 남에게 속하는 자는, 그리고 이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성을 갖지 못하는 자는 본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탁월함은 '영혼의 좋은 상태' 또는 '올바른 행위' 등등이라고 일반화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그렇게 일반화한 정의(定義)보다는 고르기아스처럼 서로 다른 여러 탁월함을 열거하는 편이 훨씬 낫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사람들은 누구나 공유재산보다 사유재산에 더 관심이 많으며, 공유재산은 개인적으로 관련 있는 범위에서만 보살핀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다 소홀히 하게 마련이다.
** 제2권 (천병희 옮김)
* 사람은 세 가지를 통해 선하고 훌륭해지는데, 그 세 가지란 본성과 습관과 이성이다.
** 제7권 (천병희 옮김)
* 유아를 유기(遺棄)할 것이냐 양육할 것이냐는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양육은 법으로 금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 수가 너무 많아서 행해지는 유기를 사회적 관습이 금한다면 산아제한을 실시해야 한다. 부부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교합하여 아이를 가지면, 태아가 감각과 생명을 갖기 전에 낙태해야 한다.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태아에게 감각과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 제7권 (천병희 옮김)
* 아이들이 유용한 것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 유용한 것이라고 해서 다 배워서는 안 된다. 활동은 자유민에게 적합한 것과 자유민에게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양분되기 때문이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먼저 습관에 의해 교육되어야 하고, 마음 교육보다 먼저 몸 교육을 받아야 함이 분명하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몸과 마음을 동시에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노동은 상충된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저해하고, 정신노동은 육체를 저해한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수사학》 ===
* 수사학은 주어진 경우에 가능한 모든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제1권 제2장
* 말로 제시하는 증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고, 두 번째 것은 청중이 어떤 심적 상태에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세 번째 것은 말이 증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는 말 그 자체에 달려 있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릴 때 그는 성격을 통해서 설득한다. 우리는 대체로 매사에 정직한 사람을 더 기꺼이 더 빨리 신뢰하며, 정확성을 기할 수 없고 의견이 엇갈릴 때는 특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 제1권 제2장
* 심의용 연설은 어떤 일을 하라고 권유하거나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개인적으로 권유하는 사람들도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언제나 권유하거나 아니면 만류하기 때문이다. 법정 연설은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변호한다. 소송 당사자는 반드시 고발하거나 변호해야 하니까. 과시용 연설은 누군가를 찬양하거나 비난한다.
** 제1권 제3장
*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싶을 때는 그가 실제로 가진 자질과 비슷한 자질은 실제로 가진 자질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를테면 조심스러운 사람은 냉철하고 사려 깊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정직하고, 둔감한 사람은 점잖다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매번 누군가에게 그의 실제 자질과 비슷한 미덕을 덧씌움으로써 그를 이상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급하고 격정적인 사람이 솔직하고, 거만한 사람이 도량이 넓고 위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극단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미덕을 가진 사람이며, 대담한 사람은 용감하며, 낭비벽이 있는 사람은 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동기에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위험을 무릅쓴다면 고매한 일이라면 더욱더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고 여기고, 아무에게나 후하다면 친구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여길 테니 말이다. 미덕의 극치는 모두에게 잘해주는 것이니까. 또한 우리는 어떤 사람들 면전에서 칭찬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아테나이인 사이에서 아테나이인들을 칭찬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제1권 제9장
* 칭찬과 권유는 닮은 점이 있다. 누가 조언하며 권유하는 것은 표현 방식을 바꾸면 찬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하고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 때는 이런 앎을 권유로 받아들여 거기에 맞게 표현을 바꾸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운수 덕분이 아니라 자력으롯 ㅓㅇ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권유가 될 것이지만, "그는 운수 덕분이 아니라 자력으로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표현하면 이는 칭찬이 될 것이다.
**제1권 제9장
* 연설가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 증명과는 별도로 남이 나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세 가지 즉 상식, 미덕, 호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릇된 조언을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전부 때문이거나 그중 하나 떄문이다. 말하자면 상식이 부족해 그릇된 의견을 지니거나, 바른 의견을 지니지만 사악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않거나, 상식도 있고 성품도 고결하지만 청중에게 느끼는 호감이 결여되어 알면서도 가장 훌륭한 조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제2권 제1장
* 우리는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멸시당하면 특히 분노한다. 멸시에 대한 분노는 멸시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인데, 열등한 자들은 우월한 자들을 멸시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좋게 말하지 않거나 잘 대해주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분노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 더더욱 분노한다.
** 제2권 제2장
==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어록 ==
*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마음을 휘어잡는 능변을 발휘하거나 대담한 사상적 비상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냉철한 평정심, 현존하는 그 무엇도 놓치려 하지 않는 다소 냉정한 방식에서 그의 학설은 플라톤의 학설에 대한 불가결하고도 유익한 보완물이 된다.
**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각주 ==
{{위키백과}}
<references/>
[[분류:기원전 죽음]]
[[분류:그리스 사람]]
[[분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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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Aristotle Altemps Inv8575.jpg|thumb|200px|아리스토텔레스]]
'''[[w: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llang|grc|Αριστοτέλης}}, {{llang|en|Aristotle}},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 어록 ==
* [[인간]]은 천성적으로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ref>정치학 1235a2f.</ref>
* 우리는 목표에 대해서가 아니라, 목표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이리 저리 궁리한다.<ref>윤리학, 1112b11f</ref>
*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혼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사회가 필요없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 틀림없다.<ref>정치학 1253a27</ref>
* 법은 질서이며, 좋은 법은 좋은 질서이다.<ref>정치학 3. 1326a29</ref>
*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
* 누구에게나 친구는 어느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니다.
* 희망이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 처음에는 [[진실]]과 조금 밖에 빗나가지 않은 것이라도 후에는 천 배나 벌어지게 된다.
* [[친구]]는 제2의 재산이다.
* 부끄러워하는 것은 청년에게는 일종의 진실이고, 노인에게는 일종의 불명예이다.
=== 《정치학》 ===
* 국가는 분명 자연의 산물이고 개인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전체에 대해 다른 경우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몸과 혼이 다르고, 들짐승이 인간과 다른 만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인간들, 말하자면 몸을 사용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되 그럴 경우 최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노예이며, 이들은 모두 앞서 말한 원칙에 따라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 남에게 속할 수 있고 그래서 실제로 남에게 속하는 자는, 그리고 이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성을 갖지 못하는 자는 본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탁월함은 '영혼의 좋은 상태' 또는 '올바른 행위' 등등이라고 일반화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그렇게 일반화한 정의(定義)보다는 고르기아스처럼 서로 다른 여러 탁월함을 열거하는 편이 훨씬 낫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사람들은 누구나 공유재산보다 사유재산에 더 관심이 많으며, 공유재산은 개인적으로 관련 있는 범위에서만 보살핀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다 소홀히 하게 마련이다.
** 제2권 (천병희 옮김)
* 사람은 세 가지를 통해 선하고 훌륭해지는데, 그 세 가지란 본성과 습관과 이성이다.
** 제7권 (천병희 옮김)
* 유아를 유기(遺棄)할 것이냐 양육할 것이냐는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양육은 법으로 금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 수가 너무 많아서 행해지는 유기를 사회적 관습이 금한다면 산아제한을 실시해야 한다. 부부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교합하여 아이를 가지면, 태아가 감각과 생명을 갖기 전에 낙태해야 한다.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태아에게 감각과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 제7권 (천병희 옮김)
* 아이들이 유용한 것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 유용한 것이라고 해서 다 배워서는 안 된다. 활동은 자유민에게 적합한 것과 자유민에게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양분되기 때문이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먼저 습관에 의해 교육되어야 하고, 마음 교육보다 먼저 몸 교육을 받아야 함이 분명하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몸과 마음을 동시에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노동은 상충된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저해하고, 정신노동은 육체를 저해한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수사학》 ===
* 수사학은 주어진 경우에 가능한 모든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제1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말로 제시하는 증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고, 두 번째 것은 청중이 어떤 심적 상태에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세 번째 것은 말이 증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는 말 그 자체에 달려 있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릴 때 그는 성격을 통해서 설득한다. 우리는 대체로 매사에 정직한 사람을 더 기꺼이 더 빨리 신뢰하며, 정확성을 기할 수 없고 의견이 엇갈릴 때는 특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 제1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심의용 연설은 어떤 일을 하라고 권유하거나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개인적으로 권유하는 사람들도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언제나 권유하거나 아니면 만류하기 때문이다. 법정 연설은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변호한다. 소송 당사자는 반드시 고발하거나 변호해야 하니까. 과시용 연설은 누군가를 찬양하거나 비난한다.
** 제1권 제3장 (천병희 옮김)
*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싶을 때는 그가 실제로 가진 자질과 비슷한 자질은 실제로 가진 자질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를테면 조심스러운 사람은 냉철하고 사려 깊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정직하고, 둔감한 사람은 점잖다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매번 누군가에게 그의 실제 자질과 비슷한 미덕을 덧씌움으로써 그를 이상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급하고 격정적인 사람이 솔직하고, 거만한 사람이 도량이 넓고 위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극단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미덕을 가진 사람이며, 대담한 사람은 용감하며, 낭비벽이 있는 사람은 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동기에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위험을 무릅쓴다면 고매한 일이라면 더욱더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고 여기고, 아무에게나 후하다면 친구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여길 테니 말이다. 미덕의 극치는 모두에게 잘해주는 것이니까. 또한 우리는 어떤 사람들 면전에서 칭찬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아테나이인 사이에서 아테나이인들을 칭찬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제1권 제9장 (천병희 옮김)
* 칭찬과 권유는 닮은 점이 있다. 누가 조언하며 권유하는 것은 표현 방식을 바꾸면 찬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하고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 때는 이런 앎을 권유로 받아들여 거기에 맞게 표현을 바꾸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운수 덕분이 아니라 자력으롯 ㅓㅇ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권유가 될 것이지만, "그는 운수 덕분이 아니라 자력으로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표현하면 이는 칭찬이 될 것이다.
**제1권 제9장 (천병희 옮김)
* 연설가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 증명과는 별도로 남이 나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세 가지 즉 상식, 미덕, 호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릇된 조언을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전부 때문이거나 그중 하나 떄문이다. 말하자면 상식이 부족해 그릇된 의견을 지니거나, 바른 의견을 지니지만 사악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않거나, 상식도 있고 성품도 고결하지만 청중에게 느끼는 호감이 결여되어 알면서도 가장 훌륭한 조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제2권 제1장 (천병희 옮김)
* 우리는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멸시당하면 특히 분노한다. 멸시에 대한 분노는 멸시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인데, 열등한 자들은 우월한 자들을 멸시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좋게 말하지 않거나 잘 대해주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분노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 더더욱 분노한다.
** 제2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문체의 미덕은 명료성이라고 하자. 연설은 그 뜻하는 바가 분명하지 못하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문체는 적절해야지 저속해서도 안 되고 너무 고상해서도 안 된다. 시적 언어는 분명 저속하지 않지만 산문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우리가 하는 말이 이색적으로 들리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감탄을 자아내는 것들을 좋아하는데, 멀리 있는 것들이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운문에서는 많은 요인이 그런 효과에 기여하며, 거기서는 그런 것들이 적절한다. 운문에서 언급되는 인물과 성격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에서 그런 방법이 적합한 경우는 훨씬 드물다. 내용이 덜 고양되기 때문이다. 운문에서조차도 고상한 말을 노예나 새파란 젊은이가 사용하거나, 하찮은 일과 관련해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운문에서조차도 문체는 주제에 따라 적절히 하향 조정을 하거나 상향 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작가는 기술을 숨기고 자기는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말한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산문적 문체에는 일상적 어휘와 적절한 어휘 말고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만이 유익하다.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만약 연설가가 경의를 표하고 싶다면 같은 부류 가운데 더 나은 것들에서 은유를 빌려오고, 헐뜯고 싶으면 더 못한 것들에서 빌려와야 한다. 이를테면 상반된 두 가지가 같은 부류에 속하기에 구걸하는 자는 '비는' 것이고 비는 자는 '구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댱한다. 둘 다 요구하는 것이니까.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은유를 쓸 때는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유에 속하는 유사한 것에서 빌려와야 한다. 말하자마자 유사성이 금세 드러나도록 말이다.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다음에 말할 것들은 문체를 숭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사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정의 내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이라 하지 않고 '사방의 모든 점이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평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간결함을 위해서는 정의하는 대신 이름을 써야 한다.
** 제3권 제6장 (천병희 옮김)
* 문체가 적절하려면 감정과 성격을 표현하고 주제에 부합해야 한다. '주제에 부합한다' 함은 중요한 것을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 되고, 사소한 것을 엄숙하게 대해서도 안 되며, 평범한 낱말을 형용사구로 장식해도 안 된다는 뜻이다.
** 제3권 제7장 (천병희 옮김)
* 청중은 또한 '누가 모르겠는가?' '누구나 다 안다'처럼 연설문 작성가들이 지겹도록 사용하는 가교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청중은 남들은 누구나 아는 것을 자기는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창피해서 동의하기 때문이다.
** 제3권 제7장 (천병희 옮김)
* 수사학의 장르마다 적합한 문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문의 문체는 토론의 문체와 같지 않고, 토론의 경우에도 대중 연설과 법정 연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 제3권 제12장 (천병희 옮김)
=== 《시학》===
*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 제2장 (천병희 옮김)
* 플롯의 통일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무수히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중에는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행동이라도 하나의 통일된 행동을 이룰 수 없는 것이 많다.
** 제8장 (천병희 옮김)
*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며, 또한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 플롯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br>첫째, 점잖은 사람이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포의 감정도 연민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감만 주기 때문이다.<br>못난 자가 불행하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의 필요조건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즉 그것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도 없고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br>또한 극악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와 같은 플롯 구성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은 있을지 몰라도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고,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느낀다.) 따라서 이 경우는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 제13장 (천병희 옮김)
==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어록 ==
*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마음을 휘어잡는 능변을 발휘하거나 대담한 사상적 비상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냉철한 평정심, 현존하는 그 무엇도 놓치려 하지 않는 다소 냉정한 방식에서 그의 학설은 플라톤의 학설에 대한 불가결하고도 유익한 보완물이 된다.
**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각주 ==
{{위키백과}}
<references/>
[[분류:기원전 죽음]]
[[분류:그리스 사람]]
[[분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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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T06:02:02Z
Y-S.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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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학》 */
wikitext
text/x-wiki
[[그림:Aristotle Altemps Inv8575.jpg|thumb|200px|아리스토텔레스]]
'''[[w: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llang|grc|Αριστοτέλης}}, {{llang|en|Aristotle}},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 어록 ==
* [[인간]]은 천성적으로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ref>정치학 1235a2f.</ref>
* 우리는 목표에 대해서가 아니라, 목표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이리 저리 궁리한다.<ref>윤리학, 1112b11f</ref>
*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혼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사회가 필요없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 틀림없다.<ref>정치학 1253a27</ref>
* 법은 질서이며, 좋은 법은 좋은 질서이다.<ref>정치학 3. 1326a29</ref>
*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
* 누구에게나 친구는 어느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니다.
* 희망이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 처음에는 [[진실]]과 조금 밖에 빗나가지 않은 것이라도 후에는 천 배나 벌어지게 된다.
* [[친구]]는 제2의 재산이다.
* 부끄러워하는 것은 청년에게는 일종의 진실이고, 노인에게는 일종의 불명예이다.
=== 《정치학》 ===
* 국가는 분명 자연의 산물이고 개인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전체에 대해 다른 경우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몸과 혼이 다르고, 들짐승이 인간과 다른 만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인간들, 말하자면 몸을 사용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되 그럴 경우 최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노예이며, 이들은 모두 앞서 말한 원칙에 따라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 남에게 속할 수 있고 그래서 실제로 남에게 속하는 자는, 그리고 이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성을 갖지 못하는 자는 본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탁월함은 '영혼의 좋은 상태' 또는 '올바른 행위' 등등이라고 일반화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그렇게 일반화한 정의(定義)보다는 고르기아스처럼 서로 다른 여러 탁월함을 열거하는 편이 훨씬 낫다.
** 제1권 (천병희 옮김)
* 사람들은 누구나 공유재산보다 사유재산에 더 관심이 많으며, 공유재산은 개인적으로 관련 있는 범위에서만 보살핀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다 소홀히 하게 마련이다.
** 제2권 (천병희 옮김)
* 사람은 세 가지를 통해 선하고 훌륭해지는데, 그 세 가지란 본성과 습관과 이성이다.
** 제7권 (천병희 옮김)
* 유아를 유기(遺棄)할 것이냐 양육할 것이냐는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양육은 법으로 금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 수가 너무 많아서 행해지는 유기를 사회적 관습이 금한다면 산아제한을 실시해야 한다. 부부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교합하여 아이를 가지면, 태아가 감각과 생명을 갖기 전에 낙태해야 한다.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태아에게 감각과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 제7권 (천병희 옮김)
* 아이들이 유용한 것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 유용한 것이라고 해서 다 배워서는 안 된다. 활동은 자유민에게 적합한 것과 자유민에게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양분되기 때문이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먼저 습관에 의해 교육되어야 하고, 마음 교육보다 먼저 몸 교육을 받아야 함이 분명하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몸과 마음을 동시에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노동은 상충된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저해하고, 정신노동은 육체를 저해한다.
** 제8권 (천병희 옮김)
=== 《수사학》 ===
* 수사학은 주어진 경우에 가능한 모든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제1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말로 제시하는 증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고, 두 번째 것은 청중이 어떤 심적 상태에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세 번째 것은 말이 증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는 말 그 자체에 달려 있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릴 때 그는 성격을 통해서 설득한다. 우리는 대체로 매사에 정직한 사람을 더 기꺼이 더 빨리 신뢰하며, 정확성을 기할 수 없고 의견이 엇갈릴 때는 특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 제1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심의용 연설은 어떤 일을 하라고 권유하거나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개인적으로 권유하는 사람들도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언제나 권유하거나 아니면 만류하기 때문이다. 법정 연설은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변호한다. 소송 당사자는 반드시 고발하거나 변호해야 하니까. 과시용 연설은 누군가를 찬양하거나 비난한다.
** 제1권 제3장 (천병희 옮김)
*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싶을 때는 그가 실제로 가진 자질과 비슷한 자질은 실제로 가진 자질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를테면 조심스러운 사람은 냉철하고 사려 깊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정직하고, 둔감한 사람은 점잖다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매번 누군가에게 그의 실제 자질과 비슷한 미덕을 덧씌움으로써 그를 이상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급하고 격정적인 사람이 솔직하고, 거만한 사람이 도량이 넓고 위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극단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미덕을 가진 사람이며, 대담한 사람은 용감하며, 낭비벽이 있는 사람은 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동기에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위험을 무릅쓴다면 고매한 일이라면 더욱더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고 여기고, 아무에게나 후하다면 친구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여길 테니 말이다. 미덕의 극치는 모두에게 잘해주는 것이니까. 또한 우리는 어떤 사람들 면전에서 칭찬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아테나이인 사이에서 아테나이인들을 칭찬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제1권 제9장 (천병희 옮김)
* 칭찬과 권유는 닮은 점이 있다. 누가 조언하며 권유하는 것은 표현 방식을 바꾸면 찬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하고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 때는 이런 앎을 권유로 받아들여 거기에 맞게 표현을 바꾸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운수 덕분이 아니라 자력으로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권유가 될 것이지만, "그는 운수 덕분이 아니라 자력으로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표현하면 이는 칭찬이 될 것이다.
**제1권 제9장 (천병희 옮김)
* 연설가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 증명과는 별도로 남이 나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세 가지 즉 상식, 미덕, 호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릇된 조언을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전부 때문이거나 그중 하나 떄문이다. 말하자면 상식이 부족해 그릇된 의견을 지니거나, 바른 의견을 지니지만 사악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않거나, 상식도 있고 성품도 고결하지만 청중에게 느끼는 호감이 결여되어 알면서도 가장 훌륭한 조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제2권 제1장 (천병희 옮김)
* 우리는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멸시당하면 특히 분노한다. 멸시에 대한 분노는 멸시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인데, 열등한 자들은 우월한 자들을 멸시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좋게 말하지 않거나 잘 대해주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분노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 더더욱 분노한다.
** 제2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문체의 미덕은 명료성이라고 하자. 연설은 그 뜻하는 바가 분명하지 못하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문체는 적절해야지 저속해서도 안 되고 너무 고상해서도 안 된다. 시적 언어는 분명 저속하지 않지만 산문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우리가 하는 말이 이색적으로 들리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감탄을 자아내는 것들을 좋아하는데, 멀리 있는 것들이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운문에서는 많은 요인이 그런 효과에 기여하며, 거기서는 그런 것들이 적절한다. 운문에서 언급되는 인물과 성격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에서 그런 방법이 적합한 경우는 훨씬 드물다. 내용이 덜 고양되기 때문이다. 운문에서조차도 고상한 말을 노예나 새파란 젊은이가 사용하거나, 하찮은 일과 관련해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운문에서조차도 문체는 주제에 따라 적절히 하향 조정을 하거나 상향 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작가는 기술을 숨기고 자기는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말한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산문적 문체에는 일상적 어휘와 적절한 어휘 말고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만이 유익하다.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만약 연설가가 경의를 표하고 싶다면 같은 부류 가운데 더 나은 것들에서 은유를 빌려오고, 헐뜯고 싶으면 더 못한 것들에서 빌려와야 한다. 이를테면 상반된 두 가지가 같은 부류에 속하기에 구걸하는 자는 '비는' 것이고 비는 자는 '구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댱한다. 둘 다 요구하는 것이니까.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은유를 쓸 때는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유에 속하는 유사한 것에서 빌려와야 한다. 말하자마자 유사성이 금세 드러나도록 말이다.
** 제3권 제2장 (천병희 옮김)
* 다음에 말할 것들은 문체를 숭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사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정의 내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이라 하지 않고 '사방의 모든 점이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평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간결함을 위해서는 정의하는 대신 이름을 써야 한다.
** 제3권 제6장 (천병희 옮김)
* 문체가 적절하려면 감정과 성격을 표현하고 주제에 부합해야 한다. '주제에 부합한다' 함은 중요한 것을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 되고, 사소한 것을 엄숙하게 대해서도 안 되며, 평범한 낱말을 형용사구로 장식해도 안 된다는 뜻이다.
** 제3권 제7장 (천병희 옮김)
* 청중은 또한 '누가 모르겠는가?' '누구나 다 안다'처럼 연설문 작성가들이 지겹도록 사용하는 가교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청중은 남들은 누구나 아는 것을 자기는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창피해서 동의하기 때문이다.
** 제3권 제7장 (천병희 옮김)
* 수사학의 장르마다 적합한 문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문의 문체는 토론의 문체와 같지 않고, 토론의 경우에도 대중 연설과 법정 연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 제3권 제12장 (천병희 옮김)
=== 《시학》===
*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 제2장 (천병희 옮김)
* 플롯의 통일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무수히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중에는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행동이라도 하나의 통일된 행동을 이룰 수 없는 것이 많다.
** 제8장 (천병희 옮김)
*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며, 또한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 플롯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br>첫째, 점잖은 사람이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포의 감정도 연민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감만 주기 때문이다.<br>못난 자가 불행하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의 필요조건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즉 그것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도 없고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br>또한 극악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와 같은 플롯 구성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은 있을지 몰라도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고,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느낀다.) 따라서 이 경우는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 제13장 (천병희 옮김)
==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어록 ==
*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마음을 휘어잡는 능변을 발휘하거나 대담한 사상적 비상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냉철한 평정심, 현존하는 그 무엇도 놓치려 하지 않는 다소 냉정한 방식에서 그의 학설은 플라톤의 학설에 대한 불가결하고도 유익한 보완물이 된다.
**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각주 ==
{{위키백과}}
<references/>
[[분류:기원전 죽음]]
[[분류:그리스 사람]]
[[분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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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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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5T18:53:24Z
Laozi221
5061
/* 슈미트 관련 어록 */
wikitext
text/x-wiki
'''카를 슈미트'''({{llang|de|Carl Schmitt}}, 1888년 7월 11일 ~ 1985년 4월 7일)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어록 ==
=== 《정치적인 것의 개념》===
<small>김효전, 정태호 옮김</small>
*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 제 1장 국가와 정치
*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 제 2장 정치적인 것의 규준으로서의 동지와 적의 구별
* 정치적인 대립은 가장 강도 높고 극단적인 대립이다. 어떠한 구체적인 대립도 그것이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점점 정치적인 것이 된다.
** 제 3장 적대관계의 현상형태로서의 전쟁
* 극단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러한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을 드러낸다.
** 제 3장 적대관계의 현상형태로서의 전쟁
* 모든 정치적인 개념, 관념과 용어들은 논쟁적인 의미를 가진다.
** 제 3장 적대관계의 현상형태로서의 전쟁
* '''국가'''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더구나 결정적인 통일체라는 것은 국가의 정치적인 성격에 근거를 둔다. 다원론은 사회적 단체들의 연합에 의해 통일체에 이르는 국가의 국가이론이거나, 아니면 단지 국가의 해체나 부정의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 제 4장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와 다원론
* 적과 동지의 구별이 사라지면, 정치생활도 없어진다.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국민은 서약적인 선언에 의해서 이러한 숙명적인 구별을 피할 수는 없다.
** 제 5장 전쟁과 적에 대한 결단
* 어떤 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자신을 유치할 힘이나 의사를 잃는다고 해서 이 세계에서 정치적인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약한 국민만이 사라질 뿐이다.
** 제 5장 전쟁과 적에 대한 결단
== 슈미트 관련 어록 ==
* 슈미트의 중요성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이 어떤 일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20세기의 수많은 전쟁과 다양한 법-정치적 변동들을 16세기 이래의 정치변동과 사상사 속에 자리배김함으로써 거시적이고 근원적인 성찰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슈미트를 읽는 까닭인 셈이다. 물론 그 성찰은 때론 불편하고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진리'나 '당위'를 그 개념의 발전사 속에서 상대화하고 재검토하는 깊은 통찰은 '적의 혜안'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 김항, 〈옮긴이 서문〉(2010), 칼 슈미트, 《정치신학》
* 적과 동지의 구별은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가장 강도 높은 경우를 나타내며, 그 개념은 규범적인 대립이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대립도 아니며 은유나 상징으로서 해석해서도 안 되며, 구체적·존재적인 의미에서 파악하는 것이다.…전쟁은 슈미트 정치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비상사태의 극치에 해당되는 것이며,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전쟁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슈미트의 개념 규정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 책의 발간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적과 동지에서 구하는 발상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미 사물논리적으로 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는 [[신채호]](1880-1936)의 역사관에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 김효전, 〈옮긴이 서문〉(1992),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 나치에 협력했던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찾았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연원은 결국 피아(彼我)의 구분이라는 말이다. 권력정치의 관점이다. 그러나 정치란 설득과 포용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치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이 갈등을 최소화하고 관리하며 조정해 내는 것이 정치다. 권위주의 시대에 일상화되었던 정치적 배제는 탈정치에서 연유한다. 민주주의의 권력 원천은 투표다. 여당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한 원내대표를 몰아내려는 것은 또 다른 정치적 배제다.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비판은 또 다른 삼권분립 시비를 불러올 수도 있다. 탈정치와 정치적 배제는 군사권위주의시대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br>대통령과 집권당 원내대표를 대척에 두고 논한다는 자체가 한국적 대통령제에서는 가당치 않다. 더구나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를 대립 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한국정치에서는 비현실적이다. 메르스 정국에서 거부권 정국으로 쟁점 축 변경을 통한 국면전환이 진정한 승부수인지 무리수인지 권력정치적 관점에서 아직은 예단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배신의 정치’가, 적과 동지를 구별해서 그 적에 대한 ‘배제의 정치’를 하려는 것이라면 ‘승부수’와 ‘무리수’는 백지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 최창렬, 〈‘배신의 정치’ ‘배제의 정치’〉, 한국일보, 2015.06.30
* 칼 슈미트 등 일부 이데올로그들이 [[헤겔]]을 배격한 하나의 이유는 세습적 입헌군주정을 주장하는 헤겔의 논지가 히틀러의 평민출신성과 결정적으로 상치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큰 이유는 헤겔에 대한 칼 슈미트 같은 '정상급' 나치 이데올로그들의 컴플렉스였을 것이다. 이 점은 다음 절(節)에서 살펴보겠지만 칼 슈미트가 헤겔을 공개 배격하면서도 내용적으로 헤겔의 여러 논리를 훔쳐 쓰고 있는 점에서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 황태연, 《계몽의 기획: 근대정치사상 연구》(2004), p.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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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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