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7.0-wmf.9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해석 해석토론 초안 초안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행사 행사토론 개척자 0 36156 455015 351670 2026-07-03T13:07:23Z ~2026-37874-63 19536 /* 1 */ 오타를 고침 455015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개척자 |다른 표기=開拓者 |저자=[[저자:이광수|이광수]] |설명= }} {{목차숨김|2}} == 1 == === 1 ===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게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라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는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 2 ===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 찐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 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 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 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쭉 찐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 오는지 부르걷은 고 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 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 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잰즌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 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 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 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 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 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 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 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 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 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 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 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 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 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 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 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 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 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 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 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 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 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 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 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 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 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 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 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 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 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 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 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 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 차 스러졌다. === 3 ===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고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번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랴한다. 그런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 2 == === 1 ===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ㅍ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빋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 2 ===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 3 ===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 3 == === 1 ===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 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따.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 2 ===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 3 ===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 4 == === 1 ===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따.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따.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따.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 2 ===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 3 ===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 5 == === 1 ===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 2 ===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 3 ===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 4 ===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6 == === 1 ===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2 ===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 3 ===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 4 ===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 5 ===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 2 ===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 3 ===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 8 == === 1 ===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 2 ===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 3 ===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 9 == === 1 ===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 2 ===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 3 ===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 4 ===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 10 == === 1 ===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 2 ===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 11 == === 1 ===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 2 ===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 12 == === 1 ===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 2 ===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 3 ===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 13 == === 1 ===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 2 ===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 === 3 ===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 14 == === 1 ===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 2 ===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 3 ===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 4 ===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 15 == === 1 ===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 2 ===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 16 == === 1 ===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 2 ===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 17 == === 1 ===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 2 ===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3 ===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 4 ===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 18 == === 1 ===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 2 ===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 3 ===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 4 ===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 5 ===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 6 ===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 7 ===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 8 ===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 9 ===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 2 ===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 3 ===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 20 == === 1 ===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 2 ===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3 ===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 21 == === 1 ===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 2 ===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 3 ===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 4 ===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 5 ===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 6 ===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 7 ===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 8 ===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blockquote> <poem>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poem> </blockquote> <끝> {{PD-old-50}} [[분류:1917년 작품]] [[분류:한국의 소설]] hnihuj0nh1v3ocnxc3s3jjy6kyw2cca 455017 455015 2026-07-03T13:12:11Z ~2026-37874-63 19536 /* 2 */ 오타를 고침 455017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개척자 |다른 표기=開拓者 |저자=[[저자:이광수|이광수]] |설명= }} {{목차숨김|2}} == 1 == === 1 ===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게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라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는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 2 ===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진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쪽진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 === 3 ===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고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번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랴한다. 그런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 2 == === 1 ===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ㅍ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빋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 2 ===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 3 ===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 3 == === 1 ===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 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따.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 2 ===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 3 ===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 4 == === 1 ===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따.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따.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따.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 2 ===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 3 ===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 5 == === 1 ===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 2 ===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 3 ===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 4 ===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6 == === 1 ===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2 ===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 3 ===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 4 ===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 5 ===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 2 ===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 3 ===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 8 == === 1 ===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 2 ===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 3 ===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 9 == === 1 ===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 2 ===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 3 ===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 4 ===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 10 == === 1 ===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 2 ===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 11 == === 1 ===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 2 ===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 12 == === 1 ===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 2 ===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 3 ===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 13 == === 1 ===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 2 ===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 === 3 ===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 14 == === 1 ===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 2 ===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 3 ===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 4 ===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 15 == === 1 ===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 2 ===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 16 == === 1 ===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 2 ===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 17 == === 1 ===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 2 ===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3 ===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 4 ===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 18 == === 1 ===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 2 ===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 3 ===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 4 ===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 5 ===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 6 ===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 7 ===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 8 ===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 9 ===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 2 ===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 3 ===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 20 == === 1 ===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 2 ===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3 ===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 21 == === 1 ===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 2 ===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 3 ===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 4 ===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 5 ===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 6 ===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 7 ===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 8 ===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blockquote> <poem>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poem> </blockquote> <끝> {{PD-old-50}} [[분류:1917년 작품]] [[분류:한국의 소설]] 7dduf6ubg0x8kprz6uffgzfns6i1cim 455018 455017 2026-07-03T13:14:10Z ~2026-37874-63 19536 455018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개척자 |다른 표기=開拓者 |저자=[[저자:이광수|이광수]] |설명= }} {{목차숨김|2}} == 1 == === 1 ===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게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라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는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 2 ===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진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쪽진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 === 3 ===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반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래한다. 그러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 2 == === 1 ===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ㅍ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빋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 2 ===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 3 ===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 3 == === 1 ===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 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따.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 2 ===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 3 ===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 4 == === 1 ===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따.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따.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따.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 2 ===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 3 ===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 5 == === 1 ===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 2 ===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 3 ===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 4 ===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6 == === 1 ===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2 ===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 3 ===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 4 ===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 5 ===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 2 ===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 3 ===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 8 == === 1 ===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 2 ===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 3 ===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 9 == === 1 ===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 2 ===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 3 ===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 4 ===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 10 == === 1 ===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 2 ===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 11 == === 1 ===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 2 ===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 12 == === 1 ===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 2 ===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 3 ===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 13 == === 1 ===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 2 ===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 === 3 ===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 14 == === 1 ===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 2 ===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 3 ===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 4 ===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 15 == === 1 ===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 2 ===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 16 == === 1 ===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 2 ===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 17 == === 1 ===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 2 ===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3 ===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 4 ===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 18 == === 1 ===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 2 ===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 3 ===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 4 ===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 5 ===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 6 ===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 7 ===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 8 ===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 9 ===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 2 ===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 3 ===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 20 == === 1 ===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 2 ===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3 ===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 21 == === 1 ===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 2 ===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 3 ===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 4 ===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 5 ===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 6 ===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 7 ===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 8 ===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blockquote> <poem>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poem> </blockquote> <끝> {{PD-old-50}} [[분류:1917년 작품]] [[분류:한국의 소설]] qezo1lgqj1wati367a339a9bt2bixuo 455019 455018 2026-07-03T13:16:02Z ~2026-37874-63 19536 /* 1 */ 오타를 고침 455019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개척자 |다른 표기=開拓者 |저자=[[저자:이광수|이광수]] |설명= }} {{목차숨김|2}} == 1 == === 1 ===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게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라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는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 2 ===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진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쪽진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 === 3 ===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반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래한다. 그러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 2 == === 1 ===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게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믿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 2 ===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 3 ===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 3 == === 1 ===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 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따.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 2 ===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 3 ===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 4 == === 1 ===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따.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따.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따.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 2 ===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 3 ===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 5 == === 1 ===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 2 ===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 3 ===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 4 ===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6 == === 1 ===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2 ===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 3 ===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 4 ===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 5 ===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 2 ===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 3 ===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 8 == === 1 ===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 2 ===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 3 ===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 9 == === 1 ===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 2 ===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 3 ===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 4 ===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 10 == === 1 ===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 2 ===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 11 == === 1 ===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 2 ===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 12 == === 1 ===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 2 ===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 3 ===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 13 == === 1 ===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 2 ===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 === 3 ===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 14 == === 1 ===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 2 ===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 3 ===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 4 ===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 15 == === 1 ===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 2 ===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 16 == === 1 ===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 2 ===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 17 == === 1 ===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 2 ===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3 ===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 4 ===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 18 == === 1 ===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 2 ===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 3 ===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 4 ===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 5 ===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 6 ===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 7 ===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 8 ===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 9 ===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 2 ===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 3 ===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 20 == === 1 ===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 2 ===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3 ===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 21 == === 1 ===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 2 ===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 3 ===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 4 ===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 5 ===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 6 ===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 7 ===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 8 ===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blockquote> <poem>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poem> </blockquote> <끝> {{PD-old-50}} [[분류:1917년 작품]] [[분류:한국의 소설]] 817rrbnwwg7cwbogkewqtcpz66x68q4 455020 455019 2026-07-03T13:18:29Z ~2026-37874-63 19536 /* 1 */ 오타를 고침 455020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개척자 |다른 표기=開拓者 |저자=[[저자:이광수|이광수]] |설명= }} {{목차숨김|2}} == 1 == === 1 ===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게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라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는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 2 ===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진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쪽진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 === 3 ===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반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래한다. 그러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 2 == === 1 ===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게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믿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 2 ===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 3 ===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 3 == === 1 ===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다.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 2 ===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 3 ===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 4 == === 1 ===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따.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따.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따.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 2 ===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 3 ===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 5 == === 1 ===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 2 ===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 3 ===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 4 ===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6 == === 1 ===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2 ===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 3 ===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 4 ===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 5 ===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 2 ===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 3 ===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 8 == === 1 ===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 2 ===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 3 ===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 9 == === 1 ===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 2 ===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 3 ===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 4 ===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 10 == === 1 ===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 2 ===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 11 == === 1 ===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 2 ===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 12 == === 1 ===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 2 ===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 3 ===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 13 == === 1 ===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 2 ===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 === 3 ===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 14 == === 1 ===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 2 ===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 3 ===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 4 ===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 15 == === 1 ===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 2 ===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 16 == === 1 ===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 2 ===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 17 == === 1 ===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 2 ===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3 ===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 4 ===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 18 == === 1 ===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 2 ===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 3 ===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 4 ===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 5 ===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 6 ===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 7 ===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 8 ===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 9 ===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 2 ===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 3 ===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 20 == === 1 ===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 2 ===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3 ===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 21 == === 1 ===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 2 ===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 3 ===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 4 ===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 5 ===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 6 ===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 7 ===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 8 ===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blockquote> <poem>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poem> </blockquote> <끝> {{PD-old-50}} [[분류:1917년 작품]] [[분류:한국의 소설]] qtwf4f637aozmq4ac3cn4njqaxyl06u 455021 455020 2026-07-03T13:20:44Z ~2026-37874-63 19536 /* 1 */ 오타를 고침 455021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개척자 |다른 표기=開拓者 |저자=[[저자:이광수|이광수]] |설명= }} {{목차숨김|2}} == 1 == === 1 ===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게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건을 코에 대라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는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 2 === 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진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쪽진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오는지 부르걷은 고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차 스러졌다. === 3 ===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반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래한다. 그러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 2 == === 1 ===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게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믿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 2 ===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 3 ===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 3 == === 1 ===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다.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 2 ===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 3 ===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 4 == === 1 ===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다.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다.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다.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 2 ===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 3 ===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 5 == === 1 ===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 2 ===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 3 ===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 4 ===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6 == === 1 ===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2 ===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 3 ===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 4 ===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 5 ===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 7 == === 1 ===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 2 ===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 3 ===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 8 == === 1 ===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 2 ===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 3 ===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 9 == === 1 ===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 2 ===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 3 ===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 4 ===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 10 == === 1 ===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 2 ===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 11 == === 1 ===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 2 ===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 12 == === 1 ===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 2 ===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 3 ===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 13 == === 1 ===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 2 ===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 === 3 ===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 14 == === 1 ===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 2 ===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 3 ===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 4 ===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 15 == === 1 ===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 2 ===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 16 == === 1 ===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 2 ===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 17 == === 1 ===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 2 ===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3 ===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 4 ===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 18 == === 1 ===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 2 ===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 3 ===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 4 ===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 5 ===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 6 ===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 7 ===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 8 ===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 9 ===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 19 == === 1 ===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 2 ===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 3 ===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 20 == === 1 ===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 2 ===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3 ===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 21 == === 1 ===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 2 ===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 3 ===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 4 ===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 5 ===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 6 ===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 7 ===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 8 ===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blockquote> <poem>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poem> </blockquote> <끝> {{PD-old-50}} [[분류:1917년 작품]] [[분류:한국의 소설]] mk00w1ljhb6k4ehbl2sr55h36tvafc0 번역:동물 농장 114 112063 455029 454293 2026-07-04T02:35:48Z Danuri19 16656 455029 wikitext text/x-wiki {{번역 머리말 | 제목 = 동물농장 <ref>[https://gutenberg.net.au/ebooks01/0100011.txt|#] 프로젝트 구텐베르그(Project Gutenberg) 호주 지부(Australia) 영문판</ref> | 다른 표기 = Animal Farm | 부제 =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저자:조지 오웰|조지 오웰]] | 역자 = [[사:Danuri19|Danuri19]] | 이전 = | 다음 = | 연도 = | 언어 = | 원본 = | 설명 = }} Chapter I<br> 제1장 Mr. Jones, of the Manor Farm, had locked the hen-houses for the night, but was too drunk to remember to shut the pop-holes. With the ring of light from his lantern dancing from side to side, he lurched across the yard, kicked off his boots at the back door, drew himself a last glass of beer from the barrel in the scullery, and made his way up to bed, where Mrs. Jones was already snoring.<br> 매너 농장의 존스 씨는 밤을 맞아 닭장을 잠갔지만, 너무 취해서 닭들이 드나드는 구멍을 닫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등불의 불빛이 좌우로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비틀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뒷문에서 부츠를 벗어 던지고, 부엌 찬장에 있는 맥주통에서 마지막 맥주 한 잔을 따라 마신 후, 존스 부인이 이미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침실로 올라갔습니다. As soon as the light in the bedroom went out there was a stirring and a fluttering all through the farm buildings. Word had gone round during the day that old Major, the prize Middle White boar, had had a strange dream on the previous night and wished to communicate it to the other animals. It had been agreed that they should all meet in the big barn as soon as Mr. Jones was safely out of the way. Old Major (so he was always called, though the name under which he had been exhibited was Willingdon Beauty) was so highly regarded on the farm that everyone was quite ready to lose an hour's sleep in order to hear what he had to say. <br> 침실의 불이 꺼지자마자, 농장 건물 전체에 걸쳐 (동물들의) 소란과 분주함이 감돌았습니다. 낮 동안에 그 상급 '미들 화이트' 종 수퇘지인 늙은 메이저가 지난밤 이상한 꿈을 꾸었으며, 그것을 다른 동물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존스 씨가 확실히 방해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마자 그들 모두가 큰 창고에서 만나기로 합의되었습니다. 늙은 메이저(그가 가축전시회에 나갔을 때의 이름은 '윌링던의 미남'이였지만, 그는 항상 그렇게 불렸습니다)는 농장에서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었기에, 모두가 그가 할 말을 듣기 위해 기꺼이 한 시간의 잠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At one end of the big barn, on a sort of raised platform, Major was already ensconced on his bed of straw, under a lantern which hung from a beam. He was twelve years old and had lately grown rather stout, but he was still a majestic-looking pig, with a wise and benevolent appearance in spite of the fact that his tushes had never been cut. Before long the other animals began to arrive and make themselves comfortable after their different fashions. First came the three dogs, Bluebell, Jessie, and Pincher, and then the pigs, who settled down in the straw immediately in front of the platform. The hens perched themselves on the window-sills, the pigeons fluttered up to the rafters, the sheep and cows lay down behind the pigs and began to chew the cud. The two cart-horses, Boxer and Clover, came in together, walking very slowly and setting down their vast hairy hoofs with great care lest there should be some small animal concealed in the straw. Clover was a stout motherly mare approaching middle life, who had never quite got her figure back after her fourth foal. Boxer was an enormous beast, nearly eighteen hands high, and as strong as any two ordinary horses put together. A white stripe down his nose gave him a somewhat stupid appearance, and in fact he was not of first-rate intelligence, but he was universally respected for his steadiness of character and tremendous powers of work. After the horses came Muriel, the white goat, and Benjamin, the donkey. Benjamin was the oldest animal on the farm, and the worst tempered. He seldom talked, and when he did, it was usually to make some cynical remark--for instance, he would say that God had given him a tail to keep the flies off, but that he would sooner have had no tail and no flies. Alone among the animals on the farm he never laughed. If asked why, he would say that he saw nothing to laugh at. Nevertheless, without openly admitting it, he was devoted to Boxer; the two of them usually spent their Sundays together in the small paddock beyond the orchard, grazing side by side and never speaking.<br> 큰 창고의 한쪽 끝, 일종의 높여진 플랫폼(무대) 위에, 메이저는 들보로부터 매달려 있는 랜턴 아래의 그의 짚 침대 위에 이미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12살이었고 최근에 다소 뚱뚱해졌지만, 그의 엄니가 한 번도 잘린 적이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지혜롭고 자애로운 외모를 가진 위엄 있어 보이는 돼지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다른 동물들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서로 다른 방식에 따라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자리를 잡았습니다). 먼저 블루벨, 제시, 핀처라는 세 마리의 개가 왔고, 그다음에는 돼지들이 왔는데, 그들은 플랫폼 바로 앞의 짚 속에 정착했습니다. 암탉들은 창문 턱 위에 스스로를 앉혔고, 비둘기들은 서까래 위로 파닥거리며 올라갔으며, 양들과 소들은 돼지들 뒤에 누워 되새김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짐수레 말인 복서와 클로버가 함께 들어왔는데, 짚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작은 동물이라도 있을까 봐 매우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거대하고 털이 많은 발굽을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 내디뎠습니다. 클로버는 중년에 접어드는 뚱뚱하고 어머니 같은 암말이었는데, 그녀의 네 번째 망아지를 낳은 이후 그녀의 몸매를 결코 완전히 되찾지 못했습니다. 복서는 거의 18핸드(약 183cm) 높이에 이르는 거대한 짐승이었고, 합쳐진 어떤 평범한 말 두 마리만큼이나 힘이 셌습니다. 코를 따라 내려오는 흰색 줄무늬는 그에게 다소 어리석은 외모를 주었고, 사실 그는 일류의( 뛰어난) 지능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격의 꾸준함과 엄청난 작업 능력으로 인해 보편적으로(모두에게) 존경받았습니다. 말들 다음에는 흰 염소인 뮤리엘과 당나귀인 벤자민이 왔습니다. 벤자민은 농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동물이었고, 성격이 가장 나빴습니다. 그는 좀처럼 말하지 않았고, 그가 말을 할 때는 대개 어떤 냉소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이 그에게 파리를 쫓아내라고 꼬리를 주셨지만, 차라리 꼬리도 없고 파리도 없는 것이 더 좋았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농장의 동물들 중에서 홀로 그는 결코 웃지 않았습니다. 왜냐고 질문을 받으면, 그는 웃을 만한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는 복서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들 둘은 대개 과수원 너머의 작은 방목지에서 그들의 일요일을 함께 보냈는데, 나란히 풀을 뜯으며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The two horses had just lain down when a brood of ducklings, which had lost their mother, filed into the barn, cheeping feebly and wandering from side to side to find some place where they would not be trodden on. Clover made a sort of wall round them with her great foreleg, and the ducklings nestled down inside it and promptly fell asleep. At the last moment Mollie, the foolish, pretty white mare who drew Mr. Jones's trap, came mincing daintily in, chewing at a lump of sugar. She took a place near the front and began flirting her white mane, hoping to draw attention to the red ribbons it was plaited with. Last of all came the cat, who looked round, as usual, for the warmest place, and finally squeezed herself in between Boxer and Clover; there she purred contentedly throughout Major's speech without listening to a word of what he was saying.<br> 그 두 마리의 말이 막 누웠을 때, 그들의 엄마를 잃어버린 오리 새끼 한 무리가, 힘없이 삐약거리고 그들이 밟히지 않을 어떤 장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며 창고 안으로 줄을 지어 들어왔습니다. 클로버는 그녀의 거대한 앞다리로 그들 주위에 일종의 벽을 만들어 주었고, 오리 새끼들은 그 안에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 즉시 잠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존스 씨의 이인승 마차를 끌던 어리석고 예쁜 흰색 암말인 몰리가 설탕 덩어리를 씹으며 얌전 빼며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앞쪽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그것(갈기)에 땋아져 있는 빨간 리본들로 주의를 끌기를 희망하면서 그녀의 하얀 갈기를 살랑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고양이가 왔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 가장 따뜻한 장소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고, 마침내 복서와 클로버 사이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메이저가 말하고 있는 것의 단 한 단어도 듣지 않으면서, 메이저의 연설 내내 만족스럽게 갸르릉거렸습니다. All the animals were now present except Moses, the tame raven, who slept on a perch behind the back door. When Major saw that they had all made themselves comfortable and were waiting attentively, he cleared his throat and began: <br> 뒷문 뒤의 홰 위에서 잠을 자는 길들여진 까마귀인 모세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물들이 이제 참석해 있었습니다. 메이저가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고(자리를 잡고) 주의 깊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의 목청을 가다듬고 시작했습니다: "Comrades, you have heard already about the strange dream that I had last night. But I will come to the dream later. I have something else to say first. I do not think, comrades, that I shall be with you for many months longer, and before I die, I feel it my duty to pass on to you such wisdom as I have acquired. I have had a long life, I have had much time for thought as I lay alone in my stall, and I think I may say that I understand the nature of life on this earth as well as any animal now living. It is about this that I wish to speak to you. <br> "동무들(또는 동지들), 여러분은 내가 지난밤에 꾸었던 이상한 꿈에 대해 이미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꿈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먼저 말해야 할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지들, 나는 내가 여러 달 더 이상 여러분과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습득해 온 그러한 지혜를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느낍니다. 나는 긴 삶을 살았고, 나의 축사 안에 홀로 누워 있을 때 생각할 많은 시간을 가졌으며, 나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어떤 동물 못지않게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희망하는 것은 바로 이것에 대해서입니다. "Now, comrades, what is the nature of this life of ours? Let us face it: our lives are miserable, laborious, and short. We are born, we are given just so much food as will keep the breath in our bodies, and those of us who are capable of it are forced to work to the last atom of our strength; and the very instant that our usefulness has come to an end we are slaughtered with hideous cruelty. No animal in England knows the meaning of happiness or leisure after he is a year old. No animal in England is free. The life of an animal is misery and slavery: that is the plain truth.<br> "이제, 동지들, 우리들의 이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직시합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힘들며, 짧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우리의 몸속에 숨이 붙어 있게 유지해 줄 딱 그만큼의 음식만을 받으며, 그것(노동)을 할 능력이 있는 우리들 중의 이들은 우리의 힘의 마지막 한 원자(한 방울)까지 짜내어 일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용성이 끝에 다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끔찍한 잔인함과 함께 도살당합니다. 영국의 어떤 동물도 그가 한 살이 된 이후에는 행복이나 여가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의 어떤 동물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동물의 삶은 비참함과 노예 상태입니다. 그것이 명백한 진실입니다. "But is this simply part of the order of nature? Is it because this land of ours is so poor that it cannot afford a decent life to those who dwell upon it? No, comrades, a thousand times no! The soil of England is fertile, its climate is good, it is capable of affording food in abundance to an enormously greater number of animals than now inhabit it. This single farm of ours would support a dozen horses, twenty cows, hundreds of sheep--and all of them living in a comfort and a dignity that are now almost beyond our imagining. Why then do we continue in this miserable condition? Because nearly the whole of the produce of our labour is stolen from us by human beings. There, comrades, is the answer to all our problems. It is summed up in a single word--Man. Man is the only real enemy we have. Remove Man from the scene, and the root cause of hunger and overwork is abolished for ever.<br>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자연의 질서의 일부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이 땅이 너무 가난해서 그 위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괜찮은(품위 있는) 삶을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동지들, 천 번이고 아닙니다! 영국의 토양은 비옥하고, 그것의 기후는 좋으며, 그것은 현재 그것에 서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동물들에게 풍부한 음식을 제공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 단 하나의 농장만으로도 열두 마리의 말, 스무 마리의 소, 수백 마리의 양을 부양할 수 있을 것이며—그리고 그들 모두는 지금은 우리의 상상을 거의 초월하는 편안함과 존엄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비참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노동의 생산물의 거의 전부가 인간들에 의해 우리로부터 도둑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지들, 거기에 우리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됩니다—인간. 인간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진짜 적입니다. 장면(무대)에서 인간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굶주림과 과로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폐지됩니다. "Man is the only creature that consumes without producing. He does not give milk, he does not lay eggs, he is too weak to pull the plough, he cannot run fast enough to catch rabbits. Yet he is lord of all the animals. He sets them to work, he gives back to them the bare minimum that will prevent them from starving, and the rest he keeps for himself. Our labour tills the soil, our dung fertilises it, and yet there is not one of us that owns more than his bare skin. You cows that I see before me, how many thousands of gallons of milk have you given during this last year? And what has happened to that milk which should have been breeding up sturdy calves? Every drop of it has gone down the throats of our enemies. And you hens, how many eggs have you laid in this last year, and how many of those eggs ever hatched into chickens? The rest have all gone to market to bring in money for Jones and his men. And you, Clover, where are those four foals you bore, who should have been the support and pleasure of your old age? Each was sold at a year old--you will never see one of them again. In return for your four confinements and all your labour in the fields, what have you ever had except your bare rations and a stall?<br> "인간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그는 우유를 주지도 않고, 알을 낳지도 않으며, 쟁기를 끌기에는 너무 약하고, 토끼를 잡을 만큼 충분히 빠르게 달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동물들의 주인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그들에게 그들이 굶어 죽는 것을 방지할 간신히의 최소한(최저한도)만을 돌려주며, 나머지는 자신을 위해 보관합니다. 우리의 노동이 토양을 갈고, 우리의 배설물이 그것을 비옥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 중 그의 맨살(가진 것 없는 몸뚱이)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내 앞에 보이는 당신들 암소들, 당신들은 이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수천 갤런의 우유를 주었습니까? 그리고 튼튼한 송아지들을 길러내고 있었어야 마땅한 그 우유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의 모든 한 방울은 우리 원수들의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 암탉들, 당신들은 이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알을 낳았으며, 그 알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단 한 번이라도 병아리로 부화했습니까? 나머지는 모두 존스와 그의 부하들을 위한 돈을 가져오기 위해 시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당신, 클로버, 당신의 노년의 부양과 기쁨이 되었어야 마땅한, 당신이 낳은 그 네 마리의 망아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각각은 한 살 때 팔렸습니다—당신은 결코 그들 중 단 한 마리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네 번의 출산과 들판에서의 당신의 모든 노동에 대한 대가로, 당신의 간신히의 배급량과 축사 한 칸을 제외하고 당신이 가져본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And even the miserable lives we lead are not allowed to reach their natural span. For myself I do not grumble, for I am one of the lucky ones. I am twelve years old and have had over four hundred children. Such is the natural life of a pig. But no animal escapes the cruel knife in the end. You young porkers who are sitting in front of me, every one of you will scream your lives out at the block within a year. To that horror we all must come--cows, pigs, hens, sheep, everyone. Even the horses and the dogs have no better fate. You, Boxer, the very day that those great muscles of yours lose their power, Jones will sell you to the knacker, who will cut your throat and boil you down for the foxhounds. As for the dogs, when they grow old and toothless, Jones ties a brick round their necks and drowns them in the nearest pond. <br>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이끄는(영위하는) 비참한 삶들조차 그것들의 자연적인 수명에 도달하도록 허용되지 않습니다. 내 자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불평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내가 운이 좋은 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12살이고 400마리가 넘는 자식들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것이 돼지의 자연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어떤 동물도 잔인한 칼날을 피하지 못합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당신들 젊은 육용돈(젊은 돼지)들, 당신들 모두는 1년 이내에 도살대 위에서 당신들의 생명이 다하도록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공포로 나아가야만 합니다—암소들, 돼지들, 암탉들, 양들, 모두가 말입니다. 심지어 말들과 개들조차 더 나은 운명을 가지지 못합니다. 당신, 복서, 당신의 그 거대한 근육들이 그것들의 힘을 잃는 바로 그날, 존스는 당신을 도축업자(폐마 도축업자)에게 팔아넘길 것이고, 그는 당신의 목을 자르고 여우 사냥개들을 위해 당신을 삶아 버릴 것입니다. 개들로 말하자면, 그들이 늙고 이빨이 빠질 때, 존스는 그들의 목 주위에 벽돌을 묶고 가장 가까운 연못에 그들을 익사시킵니다. "Is it not crystal clear, then, comrades, that all the evils of this life of ours spring from the tyranny of human beings? Only get rid of Man, and the produce of our labour would be our own. Almost overnight we could become rich and free. What then must we do? Why, work night and day, body and soul, for the overthrow of the human race! That is my message to you, comrades: Rebellion! I do not know when that Rebellion will come, it might be in a week or in a hundred years, but I know, as surely as I see this straw beneath my feet, that sooner or later justice will be done. Fix your eyes on that, comrades, throughout the short remainder of your lives! And above all, pass on this message of mine to those who come after you, so that future generations shall carry on the struggle until it is victorious.<br> "그렇다면 동지들, 우리들의 이 삶의 모든 악이 인간들의 폭정으로부터 솟아난다는(비롯된다는) 것이 수정처럼 투명하게 명백하지(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오직 인간만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노동의 생산물은 우리 자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부유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 인류의 타도를 위해 밤낮으로, 몸과 영혼을 바쳐 일하십시오! 동지들, 그것이 여러분에게 보내는 나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반란입니다! 나는 그 반란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하며, 그것은 일주일 뒤일 수도 있고 백 년 뒤일 수도 있지만, 내가 내 발아래에 있는 이 짚을 보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머지않아 정의가 실현될 것임을 나는 압니다. 동지들, 여러분의 짧은 남은 삶 동안 그것에 여러분의 눈을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세대들이 그것이 승리할 때까지 그 투쟁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나의 이 메시지를 여러분 뒤에 오는 이들에게 전달하십시오. "And remember, comrades, your resolution must never falter. No argument must lead you astray. Never listen when they tell you that Man and the animals have a common interest, that the prosperity of the one is the prosperity of the others. It is all lies. Man serves the interests of no creature except himself. And among us animals let there be perfect unity, perfect comradeship in the struggle. All men are enemies. All animals are comrades." <br>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동지들, 여러분의 결의는 결코 흔들려서 안 됩니다. 어떤 주장도 여러분을 타락한 길로(잘못된 길로)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과 동물이 공통의 이익을 가지고 있으며, 한쪽의 번영이 다른 쪽들의 번영이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할 때 결코 듣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생명체의 이익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물들 사이에는 투쟁 속에서 완벽한 단결, 완벽한 동지애가 있게 하십시오. 모든 인간은 원수입니다. 모든 동물은 동지입니다." At this moment there was a tremendous uproar. While Major was speaking four large rats had crept out of their holes and were sitting on their hindquarters, listening to him. The dogs had suddenly caught sight of them, and it was only by a swift dash for their holes that the rats saved their lives. Major raised his trotter for silence.<br> 이 순간에 엄청난 소란이 있었습니다. 메이저가 말하고 있는 동안 네 마리의 거대한 쥐들이 그들의 구멍 밖으로 살금살금 기어 나와 그들의 뒷동서리를 대고 앉아, 그(의 말)를 듣고 있었습니다. 개들이 갑자기 그들을 포착했고, 쥐들이 그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오직 그들의 구멍을 향한 빠른 돌진에 의해서였습니다. 메이저는 침묵을 위해 그의 앞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Comrades," he said, "here is a point that must be settled. The wild creatures, such as rats and rabbits--are they our friends or our enemies? Let us put it to the vote. I propose this question to the meeting: Are rats comrades?" <br> "동지들," 그가 말했습니다, "여기 해결되어야만 하는 한 가지 논점이 있습니다. 쥐들과 토끼들 같은 야생의 생명체들—그들은 우리의 친구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원수입니까? 그것을 투표에 부칩시다. 나는 회의에 이 질문을 제안합니다: 쥐들은 동지입니까?" The vote was taken at once, and it was agreed by an overwhelming majority that rats were comrades. There were only four dissentients, the three dogs and the cat, who was afterwards discovered to have voted on both sides. Major continued: <br> 투표는 즉시 취해졌고(실시되었고), 쥐들은 동지라는 것이 압도적인 대다수에 의해 합의되었습니다. 오직 네 마리의 반대자들만 있었는데, 세 마리의 개와 고양이였으며, 고양이는 나중에 양쪽 모두에 투표했던 것으로 발견되었습니다(밝혀졌습니다). 메이저는 계속했습니다: "I have little more to say. I merely repeat, remember always your duty of enmity towards Man and all his ways.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And remember also that in fighting against Man, we must not come to resemble him. Even when you have conquered him, do not adopt his vices. No animal must ever live in a house, or sleep in a bed, or wear clothes, or drink alcohol, or smoke tobacco, or touch money, or engage in trade. All the habits of Man are evil. And, above all, no animal must ever tyrannise over his own kind. Weak or strong, clever or simple, we are all brothers. No animal must ever kill any other animal. All animals are equal. <br> "나는 더 말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단지 되풀이할 뿐이니, 인간과 그의 모든 방식들을 향한 여러분의 원수다움(적대감)의 의무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두 다리로 걷는 것은 무엇이든 적입니다. 네 다리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무엇이든 친구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대항하여 싸우는 와중에, 우리가 그를 닮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기억하십시오. 심지어 여러분이 그를 정복했을 때라도, 그의 악덕들을 채택(모방)하지 마십시오. 어떤 동물도 결코 집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되며, 침대에서 잠을 자서도 안 되고, 옷을 입어서도 안 되며, 술을 마셔서도 안 되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되며, 돈을 만져서도 안 되고, 무역(상거래)에 종사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모든 습관들은 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동물도 결코 그의 동족 위에서 폭정을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약하든 강하든, 똑똑하든 단순(어리석든)하든,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어떤 동물도 결코 다른 어떤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합니다. "And now, comrades, I will tell you about my dream of last night. I cannot describe that dream to you. It was a dream of the earth as it will be when Man has vanished. But it reminded me of something that I had long forgotten. Many years ago, when I was a little pig, my mother and the other sows used to sing an old song of which they knew only the tune and the first three words. I had known that tune in my infancy, but it had long since passed out of my mind. Last night, however, it came back to me in my dream. And what is more, the words of the song also came back-words, I am certain, which were sung by the animals of long ago and have been lost to memory for generations. I will sing you that song now, comrades. I am old and my voice is hoarse, but when I have taught you the tune, you can sing it better for yourselves. It is called 'Beasts of England'." <br> "그리고 이제, 동지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지난밤의 꿈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 꿈을 여러분에게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사라졌을 때의 있을 바와 같은 지구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것을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수년 전, 내가 작은 돼지였을 때, 나의 어머니와 다른 씨돼지(암돼지)들은 그들이 오직 그것의 곡조와 첫 세 단어만을 알고 있었던 한 오래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나는 나의 유아기에 그 곡조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래전에 나의 마음 밖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잊혀졌습니다). 그러나 지난밤, 그것이 나의 꿈속에서 나에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 노래의 가사들 또한 돌아왔는데—내가 확신하건대, 아주 옛날의 동물들에 의해 불렸고 세대 동안 기억에서 사라졌던 그러한 가사들입니다. 동지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그 노래를 불러 주겠습니다. 나는 늙었고 나의 목소리는 쉰 목소리이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그 곡조를 가르쳐 주고 나면,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더 잘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동물들'이라고 불립니다." Old Major cleared his throat and began to sing. As he had said, his voice was hoarse, but he sang well enough, and it was a stirring tune, something between 'Clementine' and 'La Cucaracha'. The words ran: <br> 늙은 메이저는 그의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했었던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쉰 목소리였지만, 그는 충분히 잘 불렀고, 그것은 '클레멘타인'과 '라 쿠카라차' 사이의 어떤 것과 같은, 마음을 뒤흔드는 곡조였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이 흘러갔습니다: <table> <tr> <td> Beasts of England, beasts of Ireland, Beasts of every land and clime, Hearken to my joyful tidings Of the golden future time. Soon or late the day is coming, Tyrant Man shall be o'erthrown, And the fruitful fields of England Shall be trod by beasts alone. Rings shall vanish from our noses, And the harness from our back, Bit and spur shall rust forever, Cruel whips no more shall crack. Riches more than mind can picture, Wheat and barley, oats and hay, Clover, beans, and mangel-wurzels Shall be ours upon that day. Bright will shine the fields of England, Purer shall its waters be, Sweeter yet shall blow its breezes On the day that sets us free. For that day we all must labour, Though we die before it break; Cows and horses, geese and turkeys, All must toil for freedom's sake. Beasts of England, beasts of Ireland, Beasts of every land and clime, Hearken well and spread my tidings Of the golden future time. </td> <td> 영국의 동물들이여, 아일랜드의 동물들이여, 모든 땅과 기후의 동물들이여, 황금빛 미래 시대에 대한 나의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조만간 그날이 오고 있으니, 폭군 인간은 타도될 것이요, 그리고 영국의 결실 가득한 들판은 오직 동물들에 의해서만 밟힐 것입니다. 고리들은 우리의 코에서 사라질 것이요, 그리고 마구는 우리의 등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재갈과 박차는 영원히 녹슬 것이며, 잔인한 채찍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부, 밀과 보리, 귀리와 건초, 클로버, 콩, 그리고 사탕무가 바로 그날에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영국의 들판은 밝게 빛날 것이요, 그것의 물은 더 맑아질 것이며, 그것의 산들바람은 더욱 달콤하게 불어올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바로 그날에. 그날을 위해 우리 모두는 노동해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이 밝아오기 전에 우리가 죽을지라도. 암소들과 말들, 거위들과 칠면조들, 모두가 자유를 위해 힘들게 일해야만 합니다. 영국의 동물들이여, 아일랜드의 동물들이여, 모든 땅과 기후의 동물들이여, 잘 귀를 기울이고 나의 소식을 퍼뜨리십시오, 황금빛 미래 시대에 대한 (소식을). </td> </tr> </table> The singing of this song threw the animals into the wildest excitement. Almost before Major had reached the end, they had begun singing it for themselves. Even the stupidest of them had already picked up the tune and a few of the words, and as for the clever ones, such as the pigs and dogs, they had the entire song by heart within a few minutes. And then, after a few preliminary tries, the whole farm burst out into 'Beasts of England' in tremendous unison. The cows lowed it, the dogs whined it, the sheep bleated it, the horses whinnied it, the ducks quacked it. They were so delighted with the song that they sang it right through five times in succession, and might have continued singing it all night if they had not been interrupted. <br> 이 노래의 가창은 동물들을 가장 격렬한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메이저가 끝에 도달하기 거의 전에, 그들은 그것을 그들 스스로 부르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들 중 가장 어리석은 이들조차 이미 그 곡조와 몇 개의 단어들을 익혔고, 돼지들과 개들 같은 영리한 이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몇 분 안에 노래 전체를 마음으로(암기하여) 가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번의 예비적인 시도 후에, 온 농장이 엄청난 일제히(제창) 속에서 '영국의 동물들'로 터져 나왔습니다. 암소들은 그것을 음매하고 울었고, 개들은 깽깽하며 울었으며, 양들은 매애하고 울었고, 말들은 히힝하고 울었고, 오리들은 꽥꽥하며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 노래에 너무나 기뻐서 그것을 연속으로 바로 다섯 번 통틀어 불렀고, 만약 그들이 방해받지 않았었더라면 밤새도록 그것을 계속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Unfortunately, the uproar awoke Mr. Jones, who sprang out of bed, making sure that there was a fox in the yard. He seized the gun which always stood in a corner of his bedroom, and let fly a charge of number 6 shot into the darkness. The pellets buried themselves in the wall of the barn and the meeting broke up hurriedly. Everyone fled to his own sleeping-place. The birds jumped on to their perches, the animals settled down in the straw, and the whole farm was asleep in a moment. <br> 불행하게도, 그 소란이 존스 씨를 깨웠고, 그는 마당에 여우가 있다고 확신하면서 침대 밖으로 튀어 올랐습니다. 그는 그의 침실 구석에 항상 서 있던 총을 붙잡았고, 어둠 속으로 6호 산탄 한 발을 날려 보냈습니다. 그 산탄 알갱이들은 창고 벽속에 박혔고 회의는 서둘러 해산되었습니다. 모두가 그 자신의 잠자리로 도망쳤습니다. 새들은 그들의 홰 위로 뛰어올랐고, 동물들은 짚 속에 자리를 잡았으며, 온 농장은 순식간에 잠들었습니다. Chapter II 제2장 Three nights later old Major died peacefully in his sleep. His body was buried at the foot of the orchard. <br> 사흘 밤 뒤에 늙은 메이저는 그의 잠 속에서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그의 몸은 과수원의 기슭에 묻혔습니다. This was early in March. During the next three months there was much secret activity. Major's speech had given to the more intelligent animals on the farm a completely new outlook on life. They did not know when the Rebellion predicted by Major would take place, they had no reason for thinking that it would be within their own lifetime, but they saw clearly that it was their duty to prepare for it. The work of teaching and organising the others fell naturally upon the pigs, who were generally recognised as being the cleverest of the animals. Pre-eminent among the pigs were two young boars named Snowball and Napoleon, whom Mr. Jones was breeding up for sale. Napoleon was a large, rather fierce-looking Berkshire boar, the only Berkshire on the farm, not much of a talker, but with a reputation for getting his own way. Snowball was a more vivacious pig than Napoleon, quicker in speech and more inventive, but was not considered to have the same depth of character. All the other male pigs on the farm were porkers. The best known among them was a small fat pig named Squealer, with very round cheeks, twinkling eyes, nimble movements, and a shrill voice. He was a brilliant talker, and when he was arguing some difficult point he had a way of skipping from side to side and whisking his tail which was somehow very persuasive. The others said of Squealer that he could turn black into white.<br> 이것은 3월 초순이었다. 다음 3달 동안에는 많은 비밀스러운 활동이 있었다. 메이저의 연설은 농장에서 더 똑똑한 동물들에게 삶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주었다. 그들은 메이저에 의해 예언된 그 반란이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했고, 그것이 그들 자신의 생애 내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명확히 보았다(알았다). 다른 동물들을 가르치고 조직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돼지들에게 떨어졌는데(맡겨졌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동물들 중에서 가장 영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돼지들 중에서 탁월한 이들은 스노볼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두 마리 젊은 수컷씨돼지들이었는데, 존스 씨가 판매를 위해 기르고 있는 중이었다. 나폴레옹은 크고, 다소 사납게 생겼으며, 농장에서 유일한 버크셔 종 수멧돼지였는데,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해내고야 만다는(고집을 관철한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스노볼은 나폴레옹보다 더 활기 넘치는 돼지였고, 말이 더 빨랐으며 더 독창적이었지만, 성격의 깊이가 똑같이 깊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농장의 다른 모든 수컷 돼지들은 (살을 찌운) 식육용 돼지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스퀼러라는 이름의 작고 뚱뚱한 돼지였는데, 매우 둥근 뺨, 반짝이는 눈, 민첩한 움직임,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달변가였고, 그가 어떤 어려운 논점을 논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쪽저쪽으로 깡충깡충 뛰며 그의 꼬리를 휙휙 흔드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쩐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동물들은 스퀼러에 대해 그가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These three had elaborated old Major's teachings into a complete system of thought, to which they gave the name of Animalism. Several nights a week, after Mr. Jones was asleep, they held secret meetings in the barn and expounded the principles of Animalism to the others. At the beginning they met with much stupidity and apathy. Some of the animals talked of the duty of loyalty to Mr. Jones, whom they referred to as "Master," or made elementary remarks such as "Mr. Jones feeds us. If he were gone, we should starve to death." Others asked such questions as "Why should we care what happens after we are dead?" or "If this Rebellion is to happen anyway,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whether we work for it or not?", and the pigs had great difficulty in making them see that this was contrary to the spirit of Animalism. The stupidest questions of all were asked by Mollie, the white mare. The very first question she asked Snowball was: "Will there still be sugar after the Rebellion?" <br> 이들 세 마리는 늙은 메이저의 가르침들을 하나의 완전한 사상 체계로 정교하게 발전시켰으며, 그것에 '동물주의(Animalism)'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밤마다, 존스 씨가 잠든 후에, 그들은 헛간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고 다른 동물들에게 동물주의의 원칙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시작 단계에서 그들은 많은 어리석음과 냉담함에 부딪혔다. 동물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존스 씨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말하거나, "존스 씨는 우리를 먹여 살려준다.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굶어 죽을 것이다"와 같은 초보적인 발언을 했다. 다른 동물들은 "우리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지?"라거나 "만약 이 반란이 어차피 일어날 운명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 일하든 안 하든 무슨 차이가 있지?"와 같은 질문들을 던졌고, 돼지들은 이것이 동물주의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임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들은 흰색 암말인 몰리에 의해 질문되었다. 그녀가 스노볼에게 던진 아주 첫 번째 질문은 "반란 후에도 여전히 설탕이 있을까요?"였다. "No," said Snowball firmly. "We have no means of making sugar on this farm. Besides, you do not need sugar. You will have all the oats and hay you want." <br> "아니오," 스노볼이 단호하게 말했다. " 우리는 이 농장에서 설탕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소. 게다가, 당신은 설탕이 필요하지 않소.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귀리와 건초를 가지게 될 것이오." "And shall I still be allowed to wear ribbons in my mane?" asked Mollie. <br> "그리고 내가 내 갈기에 여전히 리본을 착용하는 것이 허용될까요?" 몰리가 물었다. "Comrade," said Snowball, "those ribbons that you are so devoted to are the badge of slavery. Can you not understand that liberty is worth more than ribbons?" <br> "동무," 스노볼이 말했다,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그 리본들은 노예 제도의 상징(징표)이오. 자유가 리본들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소?" Mollie agreed, but she did not sound very convinced. <br> 몰리는 동의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납득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The pigs had an even harder struggle to counteract the lies put about by Moses, the tame raven. Moses, who was Mr. Jones's especial pet, was a spy and a tale-bearer, but he was also a clever talker. He claimed to know of the existence of a mysterious country called Sugarcandy Mountain, to which all animals went when they died. It was situated somewhere up in the sky, a little distance beyond the clouds, Moses said. In Sugarcandy Mountain it was Sunday seven days a week, clover was in season all the year round, and lump sugar and linseed cake grew on the hedges. The animals hated Moses because he told tales and did no work, but some of them believed in Sugarcandy Mountain, and the pigs had to argue very hard to persuade them that there was no such place. <br> 돼지들은 길들여진 까마귀인 모세에 의해 유포되는 거짓말들에 대응하기 위해 훨씬 더 힘든 투쟁을 해야 했다. 존스 씨의 특별한 애완동물이었던 모세는 스파이이자 밀고자였지만, 그는 또한 똑똑한 달변가였다. 그는 모든 동물들이 죽었을 때 가는 '설탕과자 산(Sugarcandy Mountain)'이라고 불리는 신비한 나라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세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하늘 위 어딘가, 구름 너머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설탕과자 산에서는 일주일 중 7일이 모두 일요일이었고, 클로버(토끼풀)가 일년 내내 제철이었으며, 각설탕과 아마인박(linseed cake)<ref>아마인박亞麻仁粕 아마의 씨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 사료로 쓴다.</ref>이 울타리에서 자랐다. 동물들은 모세가 밀고를 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설탕과자 산을 믿었고, 돼지들은 그러한 장소는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논쟁해야 했다. Their most faithful disciples were the two cart-horses, Boxer and Clover. These two had great difficulty in thinking anything out for themselves, but having once accepted the pigs as their teachers, they absorbed everything that they were told, and passed it on to the other animals by simple arguments. They were unfailing in their attendance at the secret meetings in the barn, and led the singing of 'Beasts of England', with which the meetings always ended. <br> 그들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은 두 마리의 짐마차 말인 복서와 클로버였다. 이들 두 마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단 돼지들을 자신들의 스승으로 받아들인 후에는, 자신들이 들은 모든 것을 흡수했고, 그것을 단순한 논거들을 통해 다른 동물들에게 전달했다. 그들은 헛간에서 열리는 비밀 집회에 변함없이 참석했으며, 집회가 항상 그것으로 끝을 맺는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의 제창을 이끌었다. Now, as it turned out, the Rebellion was achieved much earlier and more easily than anyone had expected. In past years Mr. Jones, although a hard master, had been a capable farmer, but of late he had fallen on evil days. He had become much disheartened after losing money in a lawsuit, and had taken to drinking more than was good for him. For whole days at a time he would lounge in his Windsor chair in the kitchen, reading the newspapers, drinking, and occasionally feeding Moses on crusts of bread soaked in beer. His men were idle and dishonest, the fields were full of weeds, the buildings wanted roofing, the hedges were neglected, and the animals were underfed.<br> 이제, 밝혀진 바와 같이, 그 반란은 어느 누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찍 그리고 더 쉽게 성취되었다. 지난 수년 동안 존스 씨는, 비록 가혹한 주인이었을지라도, 유능한 농부였으나, 최근에 그는 불행한 나날들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한 소송에서 돈을 잃은 후 크게 낙담하게 되었고, 그에게 이로울 것보다 더 많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번에 온종일 동안 그는 부엌에 있는 그의 윈저 의자(Windsor chair)에 털썩 앉아, 신문들을 읽고, 술을 마시며, 가끔 모세에게 맥주에 적신 빵 껍질들을 먹이곤 했다. 그의 일꾼들은 게으르고 부정직했으며, 밭들은 잡초로 가득 찼고, 건물들은 지붕 수리가 필요했으며, 울타리들은 방치되었고, 동물들은 먹이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June came and the hay was almost ready for cutting. On Midsummer's Eve, which was a Saturday, Mr. Jones went into Willingdon and got so drunk at the Red Lion that he did not come back till midday on Sunday. The men had milked the cows in the early morning and then had gone out rabbiting, without bothering to feed the animals. When Mr. Jones got back he immediately went to sleep on the drawing-room sofa with the News of the World over his face, so that when evening came, the animals were still unfed. At last they could stand it no longer. One of the cows broke in the door of the store-shed with her horn and all the animals began to help themselves from the bins. It was just then that Mr. Jones woke up. The next moment he and his four men were in the store-shed with whips in their hands, lashing out in all directions. This was more than the hungry animals could bear. With one accord, though nothing of the kind had been planned beforehand, they flung themselves upon their tormentors. Jones and his men suddenly found themselves being butted and kicked from all sides. The situation was quite out of their control. They had never seen animals behave like this before, and this sudden uprising of creatures whom they were used to thrashing and maltreating just as they chose, frightened them almost out of their wits. After only a moment or two they gave up trying to defend themselves and took to their heels. A minute later all five of them were in full flight down the cart-track that led to the main road, with the animals pursuing them in triumph. <br> 6월이 왔고 건초는 거의 베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하지 전날 밤(Midsummer's Eve), 존스 씨는 윌링던(Willingdon) 시내로 갔고, '레드 라이언(Red Lion)' 주막에서 너무 취해서 일요일 정오가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일꾼들은 이른 아침에 소들의 젖을 짰고, 그러고는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토끼 사냥을 나갔다. 존스 씨가 돌아왔을 때, 그는 곧바로 거실 소파에 누워 그의 얼굴 위에 '뉴스 오브 더 월드(News of the World)' 신문을 덮은 채 잠이 들었고, 그리하여 저녁이 왔을 때도 동물들은 여전히 먹이를 공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마침내 그들은 더 이상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암소들 중 한 마리가 그녀의 뿔로 사료 창고의 문을 부수어 열었고, 모든 동물들은 보관함으로부터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 존스 씨가 깨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음 순간, 그와 그의 일꾼 네 명은 손에 채찍을 든 채 사료 창고 안에 있었고, 사방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이것은 굶주린 동물들이 참을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비록 그런 종류의 일이 사전에 전혀 계획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제히 자신들을 괴롭히는 자들 위로 자신들을 던졌다(덤벼들었다). 존스 씨와 그의 일꾼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모든 방향으로부터 들이받히고 걷어차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황은 완전히 그들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들은 동물들이 이전에 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으며, 자신들이 마음먹은 대로 채찍질하고 학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생명체들의 이 갑작스러운 봉기는 그들을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겁먹게 했다. 불과 1~2분 후에 그들은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1분 후, 그들 다섯 명 모두는 동물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그들을 추격하는 가운데, 큰길로 이어지는 짐마차 길을 따라 완전히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Mrs. Jones looked out of the bedroom window, saw what was happening, hurriedly flung a few possessions into a carpet bag, and slipped out of the farm by another way. Moses sprang off his perch and flapped after her, croaking loudly. Meanwhile the animals had chased Jones and his men out on to the road and slammed the five-barred gate behind them. And so, almost before they knew what was happening, the Rebellion had been successfully carried through: Jones was expelled, and the Manor Farm was theirs. <br> 존스 부인은 침실 창문 밖을 내다보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았으며, 서둘러 몇 가지 소지품을 카펫 가방(여행용 가방)에 집어 던져 넣고는, 다른 길로 농장을 빠져나갔다. 모세는 그의 홰에서 뛰어내려 큰 소리로 까악까악 울며 그녀의 뒤를 파닥거리며 쫓아갔다. 그 와중에 동물들은 존스와 그의 일꾼들을 도로 위로 쫓아냈고 그들의 뒤로 다섯 가닥 가로대(가로 막대가 5개 있는) 대문을 쾅 닫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알기도 전에, 반란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존스는 쫓겨났고, '매너 농장(Manor Farm)'은 그들의 것이었다. For the first few minutes the animals could hardly believe in their good fortune. Their first act was to gallop in a body right round the boundaries of the farm, as though to make quite sure that no human being was hiding anywhere upon it; then they raced back to the farm buildings to wipe out the last traces of Jones's hated reign. The harness-room at the end of the stables was broken open; the bits, the nose-rings, the dog-chains, the cruel knives with which Mr. Jones had been used to castrate the pigs and lambs, were all flung down the well. The reins, the halters, the blinkers, the degrading nosebags, were thrown on to the rubbish fire which was burning in the yard. So were the whips. All the animals capered with joy when they saw the whips going up in flames. Snowball also threw on to the fire the ribbons with which the horses' manes and tails had usually been decorated on market days. <br> 첫 몇 분 동안 동물들은 자신들의 좋은 운(행운)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농장 전체에 그 어떤 인간도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을 완전히 확실히 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농장의 경계선들을 따라 다 함께 무리 지어 전속력으로 달린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존스의 증오스러운 통치의 마지막 흔적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농장 건물들로 다시 질주했다. 마구간 끝에 있는 마구 보관실이 부서져 열렸다. 재갈들, 코걸이들, 개 사슬들, 그리고 존스 씨가 돼지들과 어린 양들을 거세하는 데 사용하곤 했던 잔인한 칼들이 모두 우물 아래로 던져졌다. 고삐들, 굴레들, 눈가림 가죽(차안대)들, 굴욕적인 먹이 자루들은 마당에서 불타오르고 있던 쓰레기 불 속에 던져졌다. 채찍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동물들은 채찍들이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기쁨으로 깡충깡충 뛰었다. 스노볼은 또한 장날에 말들의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는 데 보통 사용되곤 했던 리본들도 불 속에 던져 넣었다. "Ribbons," he said, "should be considered as clothes, which are the mark of a human being. All animals should go naked." <br> "리본은," 그가 말했다, "인간의 표식인 옷으로 간주되어야 하오. 모든 동물들은 벌거벗고 다녀야 하오." When Boxer heard this he fetched the small straw hat which he wore in summer to keep the flies out of his ears, and flung it on to the fire with the rest. <br> 복서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파리들이 그의 귀에 꼬이지 않도록 여름에 쓰던 작은 밀짚모자를 가져와서, 그것을 나머지 것들과 함께 불 속에 던져 버렸다. In a very little while the animals had destroyed everything that reminded them of Mr. Jones. Napoleon then led them back to the store-shed and served out a double ration of corn to everybody, with two biscuits for each dog. Then they sang 'Beasts of England' from end to end seven times running, and after that they settled down for the night and slept as they had never slept before. <br>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동물들은 존스 씨를 상상하게 만드는(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러고 나서 나폴레옹은 그들을 다시 사료 창고로 이끌었고, 모든 동물에게 두 배의 곡물 배급량을, 그리고 각 개들에게는 비스킷 두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이어 일곱 번 불렀고, 그 후 그들은 밤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잡았으며 이전에 결코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But they woke at dawn as usual, and suddenly remembering the glorious thing that had happened, they all raced out into the pasture together. A little way down the pasture there was a knoll that commanded a view of most of the farm. The animals rushed to the top of it and gazed round them in the clear morning light. Yes, it was theirs--everything that they could see was theirs! In the ecstasy of that thought they gambolled round and round, they hurled themselves into the air in great leaps of excitement. They rolled in the dew, they cropped mouthfuls of the sweet summer grass, they kicked up clods of the black earth and snuffed its rich scent. Then they made a tour of inspection of the whole farm and surveyed with speechless admiration the ploughland, the hayfield, the orchard, the pool, the spinney. It was as though they had never seen these things before, and even now they could hardly believe that it was all their own.<br> 그러나 그들은 평소처럼 새벽에 깨어났고, 갑자기 일어났었던 그 영광스러운 일을 기억해 내고는, 그들 모두 함께 목초지 속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목초지 아래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농장의 대부분을 바라볼 수 있는(전망할 수 있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동물들은 그 꼭대기로 돌진했고 맑은 아침 햇빛 속에서 그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었다—그들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었다! 그 생각의 황홀경 속에서 그들은 뱅글뱅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고, 큰 흥분의 도약으로 공중으로 자신들을 던졌다(뛰어올랐다). 그들은 이슬 속에서 굴렀고, 달콤한 여름 풀을 입안 가득 뜯어 먹었으며, 검은 흙덩이들을 걷어찼고 그것의 풍부한 향기를 코로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농장 전체의 점검 투어를 정식으로 했으며(둘러보았으며), 말문이 막히는 감탄과 함께 경작지, 건초밭, 과수원, 웅덩이, 작은 숲을 살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이전에 이것들을 결코 본 적이 없는 것 같았고, 심지어 지금도 그들은 그것이 모두 자신들만의 것이라는 것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Then they filed back to the farm buildings and halted in silence outside the door of the farmhouse. That was theirs too, but they were frightened to go inside. After a moment, however, Snowball and Napoleon butted the door open with their shoulders and the animals entered in single file, walking with the utmost care for fear of disturbing anything. They tiptoed from room to room, afraid to speak above a whisper and gazing with a kind of awe at the unbelievable luxury, at the beds with their feather mattresses, the looking-glasses, the horsehair sofa, the Brussels carpet, the lithograph of Queen Victoria over the drawing-room mantelpiece. They were just coming down the stairs when Mollie was discovered to be missing. Going back, the others found that she had remained behind in the best bedroom. She had taken a piece of blue ribbon from Mrs. Jones's dressing-table, and was holding it against her shoulder and admiring herself in the glass in a very foolish manner. The others reproached her sharply, and they went outside. Some hams hanging in the kitchen were taken out for burial, and the barrel of beer in the scullery was stove in with a kick from Boxer's hoof, otherwise nothing in the house was touched. A unanimous resolution was passed on the spot that the farmhouse should be preserved as a museum. All were agreed that no animal must ever live there. <br> 그러고 나서 그들은 줄을 지어 농장 건물들로 돌아왔고 농가(본채) 문밖에서 침묵 속에 멈춰 섰다. 그것 역시 그들의 것이었지만,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잠시 후,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그들의 어깨로 문을 받아 열었고 동물들은 무언가를 흐트러뜨릴까 봐 두려워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걸으며 한 줄로 들어갔다. 그들은 속삭임보다 크게 말하기를 두려워하며 방에서 방으로 발걸음을 살짝 옮겼고, 믿을 수 없는 사치, 즉 깃털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들, 거울들, 말총 소파, 브뤼셀 카펫, 거실 벽난로 선반 위의 빅토리아 여왕 석판화를 일종의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들이 막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 몰리가 사라진 것이 발견되었다. 되돌아가서, 다른 동물들은 그녀가 가장 좋은 침실에 뒤처져 남아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의 화장대에서 푸른색 리본 한 조각을 취해(집어 들어), 그것을 그녀의 어깨에 대어 보며 매우 어리석은 방식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동물들은 그녀를 날카롭게(호되게) 비난했고,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부엌에 걸려 있던 몇 개의 햄은 매장을 위해 밖으로 꺼내졌고, 설거지방(뒷부엌)에 있던 맥주 통은 복서의 발굽에서 나온 발길질 한 번으로 부서져 열렸으나, 그 외에는 집 안의 그 어떤 것도 손대지 않았다. 농가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만장일치의 결의가 그 자리에서 통과되었다. 그 누구도(어떤 동물도) 결코 그곳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The animals had their breakfast, and then Snowball and Napoleon called them together again. <br> 동물들은 자신들의 아침 식사를 먹었고, 그러고 나서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그들을 다시 함께 불러 모았다. "Comrades," said Snowball, "it is half-past six and we have a long day before us. Today we begin the hay harvest. But there is another matter that must be attended to first." <br> "동무들," 스노볼이 말했다, "지금은 6시 반이고 우리 앞에는 긴 하루가 있소. 오늘 우리는 건초 수확을 시작하오. 그러나 먼저 처리되어야(돌보아져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소." The pigs now revealed that during the past three months they had taught themselves to read and write from an old spelling book which had belonged to Mr. Jones's children and which had been thrown on the rubbish heap. Napoleon sent for pots of black and white paint and led the way down to the five-barred gate that gave on to the main road. Then Snowball (for it was Snowball who was best at writing) took a brush between the two knuckles of his trotter, painted out MANOR FARM from the top bar of the gate and in its place painted ANIMAL FARM. This was to be the name of the farm from now onwards. After this they went back to the farm buildings, where Snowball and Napoleon sent for a ladder which they caused to be set against the end wall of the big barn. They explained that by their studies of the past three months the pigs had succeeded in reducing the principles of Animalism to Seven Commandments. These Seven Commandments would now be inscribed on the wall; they would form an unalterable law by which all the animals on Animal Farm must live for ever after. With some difficulty (for it is not easy for a pig to balance himself on a ladder) Snowball climbed up and set to work, with Squealer a few rungs below him holding the paint-pot. The Commandments were written on the tarred wall in great white letters that could be read thirty yards away. They ran thus: <br> 돼지들은 이제 지난 3개월 동안 자신들이 존스 씨의 아이들의 소유였으며 쓰레기 더미에 던져져 있었던 낡은 철자 교본(spelling book)으로부터 읽고 쓰는 법을 독학했다는 것을 밝혔다. 나폴레옹은 검은색과 흰색 페인트 통들을 가져오게 했고 큰길로 통하는 다섯 가닥 가로대 대문으로 앞장서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스노볼이 (왜냐하면 글쓰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스노볼이었기 때문에) 그의 앞발의 두 마디 사이에 붓을 쥐고, 대문의 맨 위 가로대로부터 '매너 농장(MANOR FARM)'을 페인트로 지워버렸고, 그 자리에 '동물 농장(ANIMAL FARM)'을 페인트로 썼다. 이것이 이제부터 앞으로 농장의 이름이 될 것이었다. 이 일이 끝난 후 그들은 농장 건물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큰 헛간의 끝 쪽 벽면에 세우도록 했다. 그들은 지난 3개월 동안의 자신들의 연구에 의해 돼지들이 동물주의의 원칙들을 '7계명(Seven Commandments)'으로 축약하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이 7계명은 이제 벽에 새겨질 것이며, 그것들은 앞으로 영원히 동물 농장의 모든 동물들이 그에 따라 살아야만 하는 변경할 수 없는 법을 형성할 것이었다. 약간의 어려움을 겪으며 (왜냐하면 돼지가 사다리 위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스노볼이 기어 올라가 작업에 착수했고, 스퀼러는 그의 몇 칸 아래에서 페인트 통을 들고 있었다. 그 계명들은 30야드 떨어진 곳에서도 읽을 수 있는 커다란 흰색 글씨로 타르가 칠해진 벽 위에 쓰였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았다. THE SEVEN COMMANDMENTS 1.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2.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3. No animal shall wear clothes. 4. 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5. 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6. 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7. All animals are equal.<br> 동물 7계명 1. 두 다리로 걷는 것은 무엇이든 적이다. 2. 네 다리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무엇이든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어떤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It was very neatly written, and except that "friend" was written "freind" and one of the "S's" was the wrong way round, the spelling was correct all the way through. Snowball read it aloud for the benefit of the others. All the animals nodded in complete agreement, and the cleverer ones at once began to learn the Commandments by heart.<br> 그것은 매우 깔끔하게 쓰였고, "friend"가 "freind"로 쓰인 것과 "S"자들 중 하나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철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했다. 스노볼은 다른 동물들을 위하여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모든 동물들이 완전한 동의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고, 더 영리한 동물들은 즉시 그 계명들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Now, comrades," cried Snowball, throwing down the paint-brush, "to the hayfield! Let us make it a point of honour to get in the harvest more quickly than Jones and his men could do." <br> "자, 동무들," 스노볼이 페인트 붓을 던져 내려놓으며 외쳤다, "건초밭으로(갑시다)! 존스와 그의 일꾼들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신속하게 수확을 거두는 것을 명예의 문제로 삼읍시다." But at this moment the three cows, who had seemed uneasy for some time past, set up a loud lowing. They had not been milked for twenty-four hours, and their udders were almost bursting. After a little thought, the pigs sent for buckets and milked the cows fairly successfully, their trotters being well adapted to this task. Soon there were five buckets of frothing creamy milk at which many of the animals looked with considerable interest.<br>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얼마 전부터 불안해 보였던 세 마리의 암소들이 큰 소리로 음매 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젖을 짜지 못한 상태였고, 그들의 젖통은 거의 터질 듯했다. 약간의 생각 후에, 돼지들은 양동이들을 가져오게 했고 꽤 성공적으로 소들의 젖을 짰는데, 그들의 앞발이 이 작업에 잘 맞았던(적응되었던) 것이다. 곧 거품이 일어나는 크림 같은 우유가 담긴 다섯 개의 양동이가 생겼고, 많은 동물들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What is going to happen to all that milk?" said someone. "Jones used sometimes to mix some of it in our mash," said one of the hens. "Never mind the milk, comrades!" cried Napoleon, placing himself in front of the buckets. "That will be attended to. The harvest is more important. Comrade Snowball will lead the way. I shall follow in a few minutes. Forward, comrades! The hay is waiting." <br> "그 모든 우유에 무슨 일이 일어날(어떻게 처리할) 예정인가요?" 누군가가 말했다. "존스 씨는 가끔 그중 일부를 우리의 사료(mash)에 섞어 주곤 했어요," 암탉들 중 한 마리가 말했다. "우유는 신경 쓰지 마시오, 동무들!" 나폴레옹이 양동이들의 앞에 자신을 위치시키며(가로막아 서며) 외쳤다. "그것은 처리될 것이오. 수확이 더 중요하오. 스노볼 동무가 앞장설 것이오. 나는 몇 분 후에 뒤따라가겠소. 앞으로(나아가시오.), 동무들! 건초가 기다리고 있소." So the animals trooped down to the hayfield to begin the harvest, and when they came back in the evening it was noticed that the milk had disappeared. <br> 그리하여 동물들은 수확을 시작하기 위해 건초밭으로 무리를 지어 내려갔고, 그들이 저녁에 돌아왔을 때 그 우유가 사라졌다는 것이 주목되었다(눈에 띄었다). Chapter III 제3장 How they toiled and sweated to get the hay in! But their efforts were rewarded, for the harvest was an even bigger success than they had hoped. <br> 그들이 건초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렸던가! 그러나 그들의 노력들은 보상을 받았으니, 왜냐하면 그 수확은 그들이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Sometimes the work was hard; the implements had been designed for human beings and not for animals, and it was a great drawback that no animal was able to use any tool that involved standing on his hind legs. But the pigs were so clever that they could think of a way round every difficulty. As for the horses, they knew every inch of the field, and in fact understood the business of mowing and raking far better than Jones and his men had ever done. The pigs did not actually work, but directed and supervised the others. With their superior knowledge it was natural that they should assume the leadership. Boxer and Clover would harness themselves to the cutter or the horse-rake (no bits or reins were needed in these days, of course) and tramp steadily round and round the field with a pig walking behind and calling out "Gee up, comrade!" or "Whoa back, comrade!" as the case might be. And every animal down to the humblest worked at turning the hay and gathering it. Even the ducks and hens toiled to and fro all day in the sun, carrying tiny wisps of hay in their beaks. In the end they finished the harvest in two days' less time than it had usually taken Jones and his men. Moreover, it was the biggest harvest that the farm had ever seen. There was no wastage whatever; the hens and ducks with their sharp eyes had gathered up the very last stalk. And not an animal on the farm had stolen so much as a mouthful. <br> 때때로 그 일은 힘들었다. 도구들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고안된 것이었고, 어떤 동물도 뒷다리로 서야 하는 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큰 결점(장애)이었다. 하지만 돼지들은 너무나 영리해서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들판의 모든 인치를 알고 있었고, 사실 그것은 잔디를 베고 갈퀴질하는 일을 존스와 그의 일꾼들이 과거에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돼지들은 실제로 일하지는 않았고, 다른 동물들을 지시하고 감독했다. 그들의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그들이 지도력을 맡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복서와 클로버는 그들 자신을 절단기나 말 갈퀴에 묶고(물론 요즘에는 재갈이나 고삐가 필요 없었다), 뒤에서 걸어오며 상황에 따라 "이랴, 동무!" 또는 "워, 동무!"라고 외치는 돼지와 함께 들판을 빙빙 꾸준히 걸어 다녔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이 건초를 뒤집고 그것을 모으는 일을 했다. 심지어 오리와 암탉들도 부리에 아주 작은 건초 더미를 물고 나르며 하루 종일 태양 아래에서 이리저리 힘들게 일했다. 결국 그들은 존스와 그의 부하들이 보통 걸렸던 것보다 이틀 더 적은 시간 안에 수확을 마쳤다. 게다가, 그것은 그 농장이 그때까지 보았던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낭비는 전혀 없었다. 암탉들과 오리들은 그들의 날카로운 눈으로 아주 마지막 줄기까지 주워 모았다. 그리고 농장의 어떤 동물도 한 입 거리만큼도 훔치지 않았다. All through that summer the work of the farm went like clockwork. The animals were happy as they had never conceived it possible to be. Every mouthful of food was an acute positive pleasure, now that it was truly their own food, produced by themselves and for themselves, not doled out to them by a grudging master. With the worthless parasitical human beings gone, there was more for everyone to eat. There was more leisure too, inexperienced though the animals were. They met with many difficulties--for instance, later in the year, when they harvested the corn, they had to tread it out in the ancient style and blow away the chaff with their breath, since the farm possessed no threshing machine--but the pigs with their cleverness and Boxer with his tremendous muscles always pulled them through. Boxer was the admiration of everybody. He had been a hard worker even in Jones's time, but now he seemed more like three horses than one; there were days when the entire work of the farm seemed to rest on his mighty shoulders. From morning to night he was pushing and pulling, always at the spot where the work was hardest. He had made an arrangement with one of the cockerels to call him in the mornings half an hour earlier than anyone else, and would put in some volunteer labour at whatever seemed to be most needed, before the regular day's work began. His answer to every problem, every setback, was "I will work harder!"--which he had adopted as his personal motto. <br> 그 여름 내내 농장의 일은 시계태엽처럼 정확하게 돌아갔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가능하다고 상상조차 못 했던 만큼 행복했다. 음식의 매 한 입 한 입이 강렬한 실질적 기쁨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인색한 주인에 의해 그들에게 배급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그들 자신에 의해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해 생산된 그들 자신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가치 없고 기생적인 인간들이 사라지니, 모두가 먹을 것이 더 많아졌다. 동물들이 경험은 부족했을지라도 여가 시간 또한 더 많아졌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예를 들어, 그해 말에 옥수수를 수확했을 때, 농장에 탈곡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대 방식으로 그것을 짓밟아 떨어내고 그들의 숨결로 왕겨를 날려 보내야 했다——하지만 돼지들은 그들의 영리함으로, 그리고 복서는 그의 엄청난 근육으로 항상 그들을(그들이 직면한것을) 헤쳐 나가게 해주었다. 복서는 모두의 감탄 대상이었다. 그는 존스의 시절에도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었지만, 이제는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의 말 같아 보였다. 농장의 전체 일이 그의 강력한 어깨에 얹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도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는 항상 일이 가장 힘든 장소에서 밀고 당기고 있었다. 그는 수탉들 중 한 마리와 아침에 다른 누구보다도 30분 일찍 자신을 깨워 주도록 약속을 해두었고, 정규 하루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가장 필요해 보이는 유기적인 자원봉사 노동을 하곤 했다. 모든 문제, 모든 좌절에 대한 그의 답변은 "내가 더 열심히 일하겠다!"였는데——그는 이것을 그의 개인적 좌우명으로 채택했었다. But everyone worked according to his capacity. The hens and ducks, for instance, saved five bushels of corn at the harvest by gathering up the stray grains. Nobody stole, nobody grumbled over his rations, the quarrelling and biting and jealousy which had been normal features of life in the old days had almost disappeared. Nobody shirked--or almost nobody. Mollie, it was true, was not good at getting up in the mornings, and had a way of leaving work early on the ground that there was a stone in her hoof. And the behaviour of the cat was somewhat peculiar. It was soon noticed that when there was work to be done the cat could never be found. She would vanish for hours on end, and then reappear at meal-times, or in the evening after work was over, as though nothing had happened. But she always made such excellent excuses, and purred so affectionately, that it was impossible not to believe in her good intentions. Old Benjamin, the donkey, seemed quite unchanged since the Rebellion. He did his work in the same slow obstinate way as he had done it in Jones's time, never shirking and never volunteering for extra work either. About the Rebellion and its results he would express no opinion. When asked whether he was not happier now that Jones was gone, he would say only "Donkeys live a long time. None of you has ever seen a dead donkey," and the others had to be content with this cryptic answer.<br> 하지만 모든 이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했다. 예를 들어, 암탉들과 오리들은 흩어진 알곡들을 모음으로써 수확 때 다섯 부셸의 곡물을 아꼈다. 아무도 훔치지 않았고, 아무도 자신의 배급량을 두고 투덜거리지 않았으며, 옛 시절에는 삶의 정상적인 특징들이었던 싸움과 물어뜯기, 그리고 질투는 거의 사라졌다. 아무도 꾀를 부리지 않았다—또는 거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에 서툴렀고, 그녀의 발굽에 돌이 박혔다는 이유로 일을 일찍 마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행동은 다소 기묘했다. 일을 해야 할 때가 되면 그 고양이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곧 주목되었다(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사라졌다가,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 시간이나 일이 끝난 후 저녁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아주 훌륭한 변명들을 해댔고, 너무나 다정하게 골골거렸기 때문에 그녀의 좋은 의도를 믿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당나귀인 늙은 벤자민은 반란 이후로 온전히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존스 시절에 했던 것과 똑같이 느릿하고 완고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했으며, 결코 꾀를 부리지도 않았고 추가 근무에 자원하지도 않았다. 반란과 그 결과에 대해 그는 아무런 의견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존스가 가버려서 지금 더 행복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오직 "당나귀들은 오래 산다. 너희들 중 누구도 죽은 당나귀를 본 적이 없다"라고만 말하곤 했고, 다른 이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답변에 만족해야만 했다. On Sundays there was no work. Breakfast was an hour later than usual, and after breakfast there was a ceremony which was observed every week without fail. First came the hoisting of the flag. Snowball had found in the harness-room an old green tablecloth of Mrs. Jones's and had painted on it a hoof and a horn in white. This was run up the flagstaff in the farmhouse garden every Sunday morning. The flag was green, Snowball explained, to represent the green fields of England, while the hoof and horn signified the future Republic of the Animals which would arise when the human race had been finally overthrown. After the hoisting of the flag all the animals trooped into the big barn for a general assembly which was known as the Meeting. Here the work of the coming week was planned out and resolutions were put forward and debated. It was always the pigs who put forward the resolutions. The other animals understood how to vote, but could never think of any resolutions of their own. Snowball and Napoleon were by far the most active in the debates. But it was noticed that these two were never in agreement: whatever suggestion either of them made, the other could be counted on to oppose it. Even when it was resolved--a thing no one could object to in itself--to set aside the small paddock behind the orchard as a home of rest for animals who were past work, there was a stormy debate over the correct retiring age for each class of animal. The Meeting always ended with the singing of 'Beasts of England', and the afternoon was given up to recreation.<br> 일요일들에는 일이 없었다. 아침 식사는 평소보다 한 시간 늦었고, 아침 식사 후에는 매주 틀림없이 거행되는 의식이 있었다. 첫 번째로는 깃발 게양이 있었다. 스노볼은 마구실에서 존스 부인의 오래된 녹색 식탁보를 찾아내어, 그 위에 흰색으로 발굽과 뿔을 그려 넣었었다. 이것은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농가 정원에 있는 깃대에 올려졌다. 깃발이 녹색인 것은 영국의 녹색 들판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발굽과 뿔은 인류가 마침내 타도되었을 때 일어설 동물의 미래 공화국을 의미한다고 스노볼은 설명했다. 깃발 게양이 끝난 후 모든 동물들은 '회의(The Meeting)'라고 알려진 총회를 위해 큰 헛간으로 무리 지어 들어갔다. 여기에서 다가오는 주의 업무가 계획되었고 결의안들이 제출되고 토론되었다.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은 언제나 돼지들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하는 방법은 이해했지만, 그들 자신의 결의안을 스스로 생각해 내지는 결코 못했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토론에서 단연코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이 둘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목되었다. 둘 중 어느 한쪽이 어떤 제안을 하든, 다른 쪽이 그것에 반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었다(틀림없이 반대했다). 심지어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난 동물들을 위한 휴식처로서 과수원 뒤의 작은 방목지를 따로 떼어 두기로 결의되었을 때조차—그 자체로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동물의 각 계층(종류)에 맞는 정확한 은퇴 연령을 두고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회의는 항상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났고, 오후는 오락(휴식)을 위해 바쳐졌다. The pigs had set aside the harness-room as a headquarters for themselves. Here, in the evenings, they studied blacksmithing, carpentering, and other necessary arts from books which they had brought out of the farmhouse. Snowball also busied himself with organising the other animals into what he called Animal Committees. He was indefatigable at this. He formed the Egg Production Committee for the hens, the Clean Tails League for the cows, the Wild Comrades' Re-education Committee (the object of this was to tame the rats and rabbits), the Whiter Wool Movement for the sheep, and various others, besides instituting classes in reading and writing. On the whole, these projects were a failure. The attempt to tame the wild creatures, for instance, broke down almost immediately. They continued to behave very much as before, and when treated with generosity, simply took advantage of it. The cat joined the Re-education Committee and was very active in it for some days. She was seen one day sitting on a roof and talking to some sparrows who were just out of her reach. She was telling them that all animals were now comrades and that any sparrow who chose could come and perch on her paw; but the sparrows kept their distance.<br> 돼지들은 마구실을 그들 자신을 위한 본부로 따로 떼어 두었었다. 여기에서, 저녁마다, 그들은 농가에서 가지고 나온 책들로부터 대장간 일, 목수 일, 그리고 다른 필요한 기술들을 공부했다. 스노볼은 또한 다른 동물들을 그가 '동물 위원회'라고 부르는 것들로 조직하는 일로 자신을 바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일에 지칠 줄 몰랐다. 그는 암탉들을 위한 달걀 생산 위원회, 암소들을 위한 깨끗한 꼬리 동맹, 야생 동무들 재교육 위원회(이것의 목적은 쥐들과 토끼들을 길들이는 것이었다), 양들을 위한 더 하얀 양털 운동, 그리고 다양한 다른 것들을 형성했으며, 읽기와 쓰기 수업들을 시작하는 것 외에도 그러했다. 대체로, 이 프로젝트들은 실패작이었다. 예를 들어, 야생 생물들을 길들이려는 시도는 거의 즉각적으로 결딴났다. 그들은 이전과 아주 비슷하게 계속 행동했고, 관대함으로 대우받을 때, 그것을 단순히 이용해 먹었다. 고양이는 재교육 위원회에 가입했고 며칠 동안 그 안에서 매우 활발했다. 어느 날 그녀가 지붕 위에 앉아 그녀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참새 몇 마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제 모든 동물은 동무들이며, 원하는 어떤 참새든 와서 자신의 앞발 위에 앉아도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새들은 거리를 유지했다. The reading and writing classes, however, were a great success. By the autumn almost every animal on the farm was literate in some degree.<br> 그러나 읽기와 쓰기 수업들은 큰 성공이었다. 가을 무렵에는 농장의 거의 모든 동물이 어느 정도는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As for the pigs, they could already read and write perfectly. The dogs learned to read fairly well, but were not interested in reading anything except the Seven Commandments. Muriel, the goat, could read somewhat better than the dogs, and sometimes used to read to the others in the evenings from scraps of newspaper which she found on the rubbish heap. Benjamin could read as well as any pig, but never exercised his faculty. So far as he knew, he said, there was nothing worth reading. Clover learnt the whole alphabet, but could not put words together. Boxer could not get beyond the letter D. He would trace out A, B, C, D, in the dust with his great hoof, and then would stand staring at the letters with his ears back, sometimes shaking his forelock, trying with all his might to remember what came next and never succeeding. On several occasions, indeed, he did learn E, F, G, H, but by the time he knew them, it was always discovered that he had forgotten A, B, C, and D. Finally he decided to be content with the first four letters, and used to write them out once or twice every day to refresh his memory. Mollie refused to learn any but the six letters which spelt her own name. She would form these very neatly out of pieces of twig, and would then decorate them with a flower or two and walk round them admiring them.<br> 돼지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완벽하게 읽고 쓸 수 있었다. 개들은 상당히 잘 읽는 법을 배웠지만, 일곱 계명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읽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염소인 뮤리엘은 개들보다 다소 더 잘 읽을 수 있었고, 가끔 저녁에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신문 조각들을 다른 동물들에게 읽어주곤 했다.<ref>드디어 근본적으로 '동물 7계명 THE SEVEN COMMANDMENTS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7. All animals are equal.'이 유린당하는 지식계급의 도구를 드러내는 대목을 묘사하고 있다. </ref> 벤자민은 어떤 돼지만큼이나 잘 읽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결코 발휘하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는,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클로버는 알파벳 전체를 배웠지만, 단어들을 조합하지는 못했다. 복서는 알파벳 D 글자를 넘어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발굽으로 먼지 속에 A, B, C, D를 밟아 그리곤 했고, 그러고는 귀를 뒤로 눕힌 채 그 글자들을 응시하며 서 있곤 했으며, 가끔은 앞머리 갈기를 흔들며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기억해 내려고 온 힘을 다했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실제로 몇몇 행사(경우)에서, 그는 E, F, G, H를 배우기도 했으나, 그가 그것들을 알게 될 때쯤이면, 그가 A, B, C, D를 잊어버렸다는 것이 항상 발견되었다. 결국 그는 첫 네 글자에 만족하기로 결심했고, 그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매일 한두 번씩 그것들을 써 내려가곤 했다. 몰리는 자신의 이름을 철자하는 여섯 글자 외에는 어떤 것도 배우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잔가지 조각들로 이 글자들을 매우 깔끔하게 만들곤 했고, 그러고는 그것들을 꽃 한두 송이로 장식하고는 그것들 주위를 걸어 다니며 감탄하곤 했다. None of the other animals on the farm could get further than the letter A. It was also found that the stupider animals, such as the sheep, hens, and ducks, were unable to learn the Seven Commandments by heart. After much thought Snowball declared that the Seven Commandments could in effect be reduced to a single maxim, namely: "Four legs good, two legs bad." This, he said, contained the essential principle of Animalism. Whoever had thoroughly grasped it would be safe from human influences. The birds at first objected, since it seemed to them that they also had two legs, but Snowball proved to them that this was not so.<br> 농장의 다른 동물들은 A까지밖에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양, 닭, 오리와 같은 덜 똑똑한 동물들은 7계명을 외울 수 없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고민 끝에 스노볼은 7계명이 사실상 하나의 격언, 즉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로 요약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동물주의의 핵심 원칙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원칙을 완전히 이해한 동물은 누구든 인간의 영향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들은 처음에 자신들도 두 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했지만, 스노볼은 새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A bird's wing, comrades," he said, "is an organ of propulsion and not of manipulation. It should therefore be regarded as a leg. The distinguishing mark of man is the HAND, the instrument with which he does all his mischief."<br> "동무들, 새의 날개는," 그가 말했다, "추진의 기관이지 조작의 기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리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구별되는 특징은 손(HAND)이니, 그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못된 짓을 저지르는 도구입니다." The birds did not understand Snowball's long words, but they accepted his explanation, and all the humbler animals set to work to learn the new maxim by heart. FOUR LEGS GOOD, TWO LEGS BAD, was inscribed on the end wall of the barn, above the Seven Commandments and in bigger letters. When they had once got it by heart, the sheep developed a great liking for this maxim, and often as they lay in the field they would all start bleating "Four legs good, two legs bad! Four legs good, two legs bad!" and keep it up for hours on end, never growing tired of it.<br> 새들은 스노볼의 긴 단어들(어려운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고, 모든 더 천한(낮은 계층의) 동물들은 그 새로운 격언을 마음속으로 외우는(암기하는) 일에 착수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FOUR LEGS GOOD, TWO LEGS BAD)라는 문구가 일곱 계명 위쪽의 헛간 끝 벽에 더 큰 글자들로 새겨졌다. 그들이 일단 그것을 마음속으로 외우게 되자, 양들은 이 격언에 대한 거대한 애착을 발달시켰고(매우 좋아하게 되었고), 들판에 누워 있을 때면 자주 그들 모두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고 매애매애 울어대기 시작하곤 했으며, 그것에 결코 지치지도 않은 채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것을 유지하곤(계속 울어대곤) 했다. Napoleon took no interest in Snowball's committees. He said that the education of the young was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that could be done for those who were already grown up. It happened that Jessie and Bluebell had both whelped soon after the hay harvest, giving birth between them to nine sturdy puppies. As soon as they were weaned, Napoleon took them away from their mothers, saying that he would make himself responsible for their education. He took them up into a loft which could only be reached by a ladder from the harness-room, and there kept them in such seclusion that the rest of the farm soon forgot their existence. <br>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위원회들에 아무런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 자란 이들을 위해 행해질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어린 자들의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침 제시와 블루벨이 건초 수확 직후에 둘 다 새끼를 낳아, 그들 사이에 아홉 마리의 튼튼한 강아지들을 출산하게 되었다. 그들이 젖을 떼자마자, 나폴레옹은 자신이 그들의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그들의 어미들로부터 빼앗아 가버렸다. 그는 마구실로부터 오직 사다리로만 도달할 수 있는 다락방으로 그들을 데리고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들을 완전한 격리 상태로 유지했기 때문에(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농장의 나머지 동물들은 곧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The mystery of where the milk went to was soon cleared up. It was mixed every day into the pigs' mash. The early apples were now ripening, and the grass of the orchard was littered with windfalls. The animals had assumed as a matter of course that these would be shared out equally; one day, however, the order went forth that all the windfalls were to be collected and brought to the harness-room for the use of the pigs. At this some of the other animals murmured, but it was no use. All the pigs were in full agreement on this point, even Snowball and Napoleon. Squealer was sent to make the necessary explanations to the others.<br> 우유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그것은 매일 돼지들의 사료(죽)에 섞이고 있었다. 조생종 사과들이 이제 익어가고 있었고, 과수원의 풀밭은 바람에 떨어진 낙과들로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동물들은 이것들이 당연히 똑같이 분배될 것이라고 추정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낙과를 수집하여 돼지들의 사용을 위해 마구실로 가져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다른 동물들 중 일부가 투덜거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든 돼지가 이 점에서 온전히 동의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스노볼과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스퀼러가 다른 동물들에게 필요한 설명들을 하기 위해 보내졌다. "Comrades!" he cried. "You do not imagine, I hope, that we pigs are doing this in a spirit of selfishness and privilege? Many of us actually dislike milk and apples. I dislike them myself. Our sole object in taking these things is to preserve our health. Milk and apples (this has been proved by Science, comrades) contain substances absolutely necessary to the well-being of a pig. We pigs are brainworkers. The whole management and organisation of this farm depend on us. Day and night we are watching over your welfare. It is for YOUR sake that we drink that milk and eat those apples. Do you know what would happen if we pigs failed in our duty? Jones would come back! Yes, Jones would come back! Surely, comrades," cried Squealer almost pleadingly, skipping from side to side and whisking his tail, "surely there is no one among you who wants to see Jones come back?"<br> "동무들!" 그가 부르짖었다. "우리 돼지들이 이기주의와 특권 의식의 정신 속에서 이것을 하고 있다고 여러분이 상상하지는 않겠지요, 제발? 우리 중 많은 이는 실제로 우유와 사과를 싫어합니다. 저 자신도 그것들을 싫어합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취하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건강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유와 사과는 (이것은 과학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동무들) 돼지의 웰빙(안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들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돼지들은 정신 노동자들(brainworkers)입니다. 이 농장의 전체 경영과 조직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낮과 밤으로 우리는 여러분의 복지를 관리하고(보살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우유를 마시고 그 사과들을 먹는 것은 바로 여러분(YOUR)을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 돼지들이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존스가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스가 돌아올 것입니다! 설마, 동무들," 스퀼러가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고 그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거의 애원하듯이 부르짖었다", 설마 여러분 중에 존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Now if there was one thing that the animals were completely certain of, it was that they did not want Jones back. When it was put to them in this light, they had no more to say. The importance of keeping the pigs in good health was all too obvious. So it was agreed without further argument that the milk and the windfall apples (and also the main crop of apples when they ripened) should be reserved for the pigs alone. <br> 이제 만약 동물들이 완전히 확신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존스가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한 관점으로 그들에게 제시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돼지들을 좋은 건강 상태로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논쟁 없이 우유와 바람에 떨어진 사과들(그리고 사과의 주 수확물이 익었을 때 그것들 또한)은 오직 돼지들만을 위해 유보되어야(따로 떼어두어야) 한다는 것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Chapter IV 제4장 By the late summer the news of what had happened on Animal Farm had spread across half the county. Every day Snowball and Napoleon sent out flights of pigeons whose instructions were to mingle with the animals on neighbouring farms, tell them the story of the Rebellion, and teach them the tune of 'Beasts of England'.<br> 늦여름 무렵에 동물농장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소식은 그 현(County, 군)의 절반을 가로질러 퍼졌었다. 매일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이웃 농장들의 동물들과 섞여서 그들에게 반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에게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의 선율을 가르쳐주는 것이 임무인 비둘기 떼들을 날려 보냈다. Most of this time Mr. Jones had spent sitting in the taproom of the Red Lion at Willingdon, complaining to anyone who would listen of the monstrous injustice he had suffered in being turned out of his property by a pack of good-for-nothing animals. The other farmers sympathised in principle, but they did not at first give him much help. At heart, each of them was secretly wondering whether he could not somehow turn Jones's misfortune to his own advantage. It was lucky that the owners of the two farms which adjoined Animal Farm were on permanently bad terms. One of them, which was named Foxwood, was a large, neglected, old-fashioned farm, much overgrown by woodland, with all its pastures worn out and its hedges in a disgraceful condition. Its owner, Mr. Pilkington, was an easy-going gentleman farmer who spent most of his time in fishing or hunting according to the season. The other farm, which was called Pinchfield, was smaller and better kept. Its owner was a Mr. Frederick, a tough, shrewd man, perpetually involved in lawsuits and with a name for driving hard bargains. These two disliked each other so much that it was difficult for them to come to any agreement, even in defence of their own interests.<br> 이 시간의 대부분을 존스 씨는 윌링던에 있는 '레드 라이온(Red Lion)' 주점의 선술집 방에 앉아, 한 무리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물들에 의해 자신의 자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자신이 겪은 그 괴물 같은(어처구니없는) 불의에 대해 귀를 기울이려는 누구에게나 불평을 늘어놓으며 보냈었다. 다른 농장주들은 원칙적으로는 동정했지만, 처음에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그들 각자는 어떻게든 존스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으로 돌릴 수(이용할 수) 없을지 은밀히 궁금해하고 있었다. 동물농장과 인접한 두 농장의 주인들이 영구적으로 나쁜 관계에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폭스우드(Foxwood)라고 불리는 그중 한 농장은 크고, 방치되었으며, 구식인 농장이었는데, 삼림으로 크게 우거져 있었고, 그것의 모든 목초지들은 황폐해졌으며, 그것의 울타리들은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었다. 그것의 주인인 필킹턴 씨는 계절에 따라 낚시나 사냥을 하며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낙천적인 신사 농부였다. 핀치필드(Pinchfield)라고 불리는 다른 농장은 더 작고 더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것의 주인은 프레더릭 씨였는데, 거칠고 기민한(영악한) 사람으로, 끊임없이 소송들에 휘말려 있었고 혹독하게 흥정하는 것(매정한 거래)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 이 둘은 서로를 너무나 싫어해서, 심지어 그들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일에서조차 어떤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려웠다. Nevertheless, they were both thoroughly frightened by the rebellion on Animal Farm, and very anxious to prevent their own animals from learning too much about it. At first they pretended to laugh to scorn the idea of animals managing a farm for themselves. The whole thing would be over in a fortnight, they said. They put it about that the animals on the Manor Farm (they insisted on calling it the Manor Farm; they would not tolerate the name "Animal Farm") were perpetually fighting among themselves and were also rapidly starving to death. When time passed and the animals had evidently not starved to death, Frederick and Pilkington changed their tune and began to talk of the terrible wickedness that now flourished on Animal Farm. It was given out that the animals there practised cannibalism, tortured one another with red-hot horseshoes, and had their females in common. This was what came of rebelling against the laws of Nature, Frederick and Pilkington said.<br>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 다 동물농장에서 일어난 반란에 철저히 겁을 먹었고, 그들 자신의 동물들이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을 막기를 매우 갈망했다. 처음에 그들은 동물들이 스스로 농장을 경영한다는 생각에 대해 비웃어 무시하는 척했다. 그 전체 일은 2주일(a fortnight)이면 끝장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은 매너(메이너) 농장(그들은 그것을 메이너 농장이라고 부를 것을 고집했으며, '동물농장'이라는 이름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의 동물들이 영구적으로 그들 사이에서 싸우고 있으며 또한 빠른 속도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시간이 흐르고 동물들이 분명히 굶어 죽지 않자, 프레더릭과 필킹턴은 그들의 태도(가락)를 바꾸어 이제 동물농장에서 번창하고 있는 그 끔찍한 사악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동물들이 식인을 일삼고, 빨갛게 달군 말편자로 서로를 고문하며, 암컷들을 공유한다는 소문이 유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들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것의 결과라고 프레더릭과 필킹턴은 말했다. However, these stories were never fully believed. Rumours of a wonderful farm, where the human beings had been turned out and the animals managed their own affairs, continued to circulate in vague and distorted forms, and throughout that year a wave of rebelliousness ran through the countryside. Bulls which had always been tractable suddenly turned savage, sheep broke down hedges and devoured the clover, cows kicked the pail over, hunters refused their fences and shot their riders on to the other side. Above all, the tune and even the words of 'Beasts of England' were known everywhere. It had spread with astonishing speed. The human beings could not contain their rage when they heard this song, though they pretended to think it merely ridiculous. They could not understand, they said, how even animals could bring themselves to sing such contemptible rubbish. Any animal caught singing it was given a flogging on the spot. And yet the song was irrepressible. The blackbirds whistled it in the hedges, the pigeons cooed it in the elms, it got into the din of the smithies and the tune of the church bells. And when the human beings listened to it, they secretly trembled, hearing in it a prophecy of their future doom.<br>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온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인간들이 쫓겨났고 동물들이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경영하는 경이로운 농장에 대한 소문들이 모호하고 왜곡된 형태들로 계속 순환(유포)되었으며, 그해 내내 반항함의 물결이 시골 전역으로 흘러갔다. 언제나 다루기 쉬웠던 황소들이 갑자기 사납게 변했고, 양들은 울타리를 부수고 토끼풀(clover)을 집어삼켰으며, 암소들은 양동이를 걷어차 넘어뜨렸고, 사냥용 말들은 울타리 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기수들을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무엇보다도,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의 선율과 심지어 그 가사까지 모든 곳에 알려졌다.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퍼졌었다. 인간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 자신들의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으나, 비록 그것을 단지 터무니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척하긴 했다. 그들은 심지어 동물들이 어떻게 그런 경멸스러운 쓰레기를 부를 마음을 먹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을 부르다가 붙잡힌 어떤 동물이든 그 자리에서 매질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는 억누를 수 없었다. 검은지빠귀들은 울타리 안에서 그것을 휘파람으로 불었고, 비둘기들은 느릅나무들에서 그것을 구구 구구 불렀으며, 그것은 대장간들의 소음 속으로 그리고 교회 종들의 선율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것에 귀를 기울일 때,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미래 파멸의 예언을 들으며 은밀히 떨었다. Early in October, when the corn was cut and stacked and some of it was already threshed, a flight of pigeons came whirling through the air and alighted in the yard of Animal Farm in the wildest excitement. Jones and all his men, with half a dozen others from Foxwood and Pinchfield, had entered the five-barred gate and were coming up the cart-track that led to the farm. They were all carrying sticks, except Jones, who was marching ahead with a gun in his hands. Obviously they were going to attempt the recapture of the farm.<br> 10월 초순, 곡물이 베어지고 쌓였으며 그것의 일부는 이미 탈곡되었을 때, 비둘기 떼가 공중을 빙빙 돌며 날아와 가장 격렬한 흥분 속에서 동물농장의 마당에 내려앉았다. 존스와 (그를 지지하는)그의 사람들이 폭스우드와 핀치필드에서 온 대여섯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섯 가닥짜리 나무문(five-barred gate)으로 들어왔고, 농장으로 이어지는 마차 통로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손에 총을 들고 앞장서서 행진하고 있던 존스를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막대기들을 들고 있었다. 분명히 그들은 농장의 탈환을 시도하려는 참이었다. This had long been expected, and all preparations had been made. Snowball, who had studied an old book of Julius Caesar's campaigns which he had found in the farmhouse, was in charge of the defensive operations. He gave his orders quickly, and in a couple of minutes every animal was at his post.<br> 이것은 오랫동안 예상되었던 일이었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농가에서 발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역(전쟁 출정)에 관한 오래된 책을 공부했었던 스노볼이 방어 작전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명령들을 신속하게 내렸고, 1~2분 만에 모든 동물이 자신의 위치(초소)에 정렬했다. As the human beings approached the farm buildings, Snowball launched his first attack. All the pigeons, to the number of thirty-five, flew to and fro over the men's heads and muted upon them from mid-air; and while the men were dealing with this, the geese, who had been hiding behind the hedge, rushed out and pecked viciously at the calves of their legs. However, this was only a light skirmishing manoeuvre, intended to create a little disorder, and the men easily drove the geese off with their sticks. Snowball now launched his second line of attack. Muriel, Benjamin, and all the sheep, with Snowball at the head of them, rushed forward and prodded and butted the men from every side, while Benjamin turned around and lashed at them with his small hoofs. But once again the men, with their sticks and their hobnailed boots, were too strong for them; and suddenly, at a squeal from Snowball, which was the signal for retreat, all the animals turned and fled through the gateway into the yard.<br> 인간들이 농장 건물들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스노볼은 자신의 첫 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서른다섯 마리에 달하는 모든 비둘기가 그 사람들의 머리 위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공중에서 그들 위에 똥을 쌌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처리하고 있는 동안, 울타리 뒤에 숨어 있었던 거위들이 돌진해 나와 그들의 다리 종아리들을 잔인하게 쪼아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약간의 혼란을 창출하기 위해 의도된 가벼운 소규모 접전 기동(교란 작전)이었을 뿐이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막대기로 거위들을 쉽게 쫓아냈다. 스노볼은 이제 두 번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뮤리엘, 벤자민, 그리고 모든 양들은 스노볼을 선두로 앞으로 돌진하여 사방에서 사람들을 쿡쿡 찌르고 들이받았습니다. 벤자민은 몸을 돌려 작은 발굽으로 그들을 마구 때렸습니다. 하지만 막대기와 징 박힌 부츠를 신은 사람들은 다시 한번 양들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스노볼의 비명 소리, 즉 후퇴 신호가 울리자 모든 동물들은 몸을 돌려 마당으로 통하는 대문을 통해 도망쳤습니다. The men gave a shout of triumph. They saw, as they imagined, their enemies in flight, and they rushed after them in disorder. This was just what Snowball had intended. As soon as they were well inside the yard, the three horses, the three cows, and the rest of the pigs, who had been lying in ambush in the cowshed, suddenly emerged in their rear, cutting them off. Snowball now gave the signal for the charge. He himself dashed straight for Jones. Jones saw him coming, raised his gun and fired. The pellets scored bloody streaks along Snowball's back, and a sheep dropped dead. Without halting for an instant, Snowball flung his fifteen stone against Jones's legs. Jones was hurled into a pile of dung and his gun flew out of his hands. But the most terrifying spectacle of all was Boxer, rearing up on his hind legs and striking out with his great iron-shod hoofs like a stallion. His very first blow took a stable-lad from Foxwood on the skull and stretched him lifeless in the mud. At the sight, several men dropped their sticks and tried to run. Panic overtook them, and the next moment all the animals together were chasing them round and round the yard. They were gored, kicked, bitten, trampled on. There was not an animal on the farm that did not take vengeance on them after his own fashion. Even the cat suddenly leapt off a roof onto a cowman's shoulders and sank her claws in his neck, at which he yelled horribly. At a moment when the opening was clear, the men were glad enough to rush out of the yard and make a bolt for the main road. And so within five minutes of their invasion they were in ignominious retreat by the same way as they had come, with a flock of geese hissing after them and pecking at their calves all the way.<br> 사람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대로 원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았고, 무질서하게 그들의 뒤를 쫓아 돌진했다. 이것이 바로 스노볼이 의도했던 바였다. 그들이 마당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마자, 외양간에 매복해 있었던 세 마리의 말, 세 마리의 암소, 그리고 나머지 돼지들이 갑자기 그들의 후방에 나타나 그들을 차단했다. 스노볼은 이제 돌격 신호를 내렸다. 그 자신은 존스를 향해 곧장 돌진했다. 존스는 그가 오는 것을 보고 그의 총을 들어 발사했다. 산탄 탄환들이 스노볼의 등 줄기를 따라 피비린내 나는 줄무늬들을 새겼고(상처를 내었고), 양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쓰러졌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스노볼은 자신의 15스톤(약 95kg)의 몸을 존스의 다리에 내던졌다. 존스는 똥더미 속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의 총은 그의 손에서 날아갔다. 하지만 모든 것 중 가장 무시무시한 광경은 복서였는데, 뒷다리로 일어서서 씨수말처럼 편자를 박은 그의 거대한 발굽들로 내지르고 있었다. 그의 바로 그 첫 번째 타격이 폭스우드에서 온 마구간 머슴의 두개골을 가격했고 진흙 바닥에 그를 생명 없이(죽은 듯이) 뻗게 만들었다. 그 광경에 몇몇 사람은 자신들의 막대기를 떨어뜨리고 달아나려 했다. 공포가 그들을 덮쳤고, 다음 순간 모든 동물이 함께 마당 주위로 그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들이받히고, 차이고, 물리고, 짓밟혔다. 농장에는 자신만의 방식에 따라 그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은 동물이 없었다. 심지어 고양이도 갑자기 지붕 위에서 소 돌보는 사람의 어깨 위로 뛰어내려 그녀의 발톱을 그의 목에 박아 넣었으며, 이에 그는 끔찍하게 비명을 질렀다. 도망칠 틈이 열린 순간, 사람들은 마당 밖으로 돌진해 나와 큰길을 향해 달아날 수 있게 된 것을 충분히 기뻐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침략이 시작된 지 5분 만에, 그들은 거위 떼가 그들의 뒤에서 슉슉 소리를 내며 가는 길 내내 그들의 종아리를 쪼아대는 가운데, 자신들이 왔던 것과 똑같은 길로 수치스러운 후퇴를 하는 중이었다. All the men were gone except one. Back in the yard Boxer was pawing with his hoof at the stable-lad who lay face down in the mud, trying to turn him over. The boy did not stir.<br> 한 명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가버렸다. 마당 뒤편에서 복서는 진흙 바닥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는 마구간 머슴을 자신의 발굽으로 툭툭 치며 그를 뒤집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He is dead," said Boxer sorrowfully. "I had no intention of doing that. I forgot that I was wearing iron shoes. Who will believe that I did not do this on purpose?"<br> "그가 죽었어," 복서가 슬프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할 의도가 없었어. 내가 철제 편자(iron shoes)를 신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잊었어. 내가 이것을 고의로(on purpose)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누가 믿어 주겠니?" "No sentimentality, comrade!" cried Snowball from whose wounds the blood was still dripping. "War is war. The only good human being is a dead one." "I have no wish to take life, not even human life," repeated Boxer, and his eyes were full of tears. "Where is Mollie?" exclaimed somebody. <br> "감상주의는 버리시오, 동무!" 자신의 상처들로부터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던 스노볼이 부르짖었다. "전쟁은 전쟁이오. 오직 좋은 인간이란 죽은 인간뿐이오." "나는 목숨을 빼앗고 싶지 않아, 비록 인간의 목숨일지라도 말이야," 복서가 반복해 말했고, 그의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ref>인간을 향한 냉혹한 증오를 드러내는 스노볼과, 생명을 해친 것에 눈물을 흘리는 복서의 순수한 성품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단락으로 묘사되고있다.</ref> "몰리는 어디 있지?" 누군가가 외쳤다. Mollie in fact was missing. For a moment there was great alarm; it was feared that the men might have harmed her in some way, or even carried her off with them. In the end, however, she was found hiding in her stall with her head buried among the hay in the manger. She had taken to flight as soon as the gun went off. And when the others came back from looking for her, it was to find that the stable-lad, who in fact was only stunned, had already recovered and made off.<br> 몰리는 사실 사라진 상태였다. 잠시 동안 커다란 놀람(불안)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해를 입혔거나, 심지어 그녀를 자신들과 함께 실어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말구유 안의 건초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채 그녀의 마구간에 숨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총이 발사되자마자 도망 길에 올랐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그녀를 찾는 것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들이 발견하게 된 것은 사실 단지 기절해 있었을 뿐이었던 마구간 머슴이 이미 회복하여 달아나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The animals had now reassembled in the wildest excitement, each recounting his own exploits in the battle at the top of his voice. An impromptu celebration of the victory was held immediately. The flag was run up and 'Beasts of England' was sung a number of times, then the sheep who had been killed was given a solemn funeral, a hawthorn bush being planted on her grave. At the graveside Snowball made a little speech, emphasising the need for all animals to be ready to die for Animal Farm if need be.<br> 동물들은 이제 가장 격렬한 흥분 속에서 다시 모였고, 각자 목청껏 전투에서 자신의 공훈을 이야기했다. 즉석에서 승리 축하 행사가 즉시 개최되었다. 깃발이 올려졌고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이 여러 차례 불렸으며, 그러고 나서 죽임을 당했던 양에게 엄숙한 장례식이 주어졌고, 그녀의 무덤 위에 산사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다. 무덤가에서 스노볼은 짧은 연설을 하며, 필요한 경우 모든 동물이 동물농장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The animals decided unanimously to create a military decoration, "Animal Hero, First Class," which was conferred there and then on Snowball and Boxer. It consisted of a brass medal (they were really some old horse-brasses which had been found in the harness-room), to be worn on Sundays and holidays. There was also "Animal Hero, Second Class," which was conferred posthumously on the dead sheep.<br> 동물들은 군사 훈장인 '1급 동물 영웅(Animal Hero, First Class)'을 제정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고, 그것은 그 자리에서 바로 스노볼과 복서에게 수여되었다. 그것은 일요일들과 공휴일들에 착용하도록 하는 황동 메달(그것들은 진짜로는 마구실에서 발견되었던 몇 개의 오래된 말 장식용 황동 붙이들이었다)로 구성되었다. 또한 '2급 동물 영웅(Animal Hero, Second Class)'도 있었는데, 그것은 죽은 양에게 사후에(추서되어) 수여되었다. There was much discussion as to what the battle should be called. In the end, it was named the Battle of the Cowshed, since that was where the ambush had been sprung. Mr. Jones's gun had been found lying in the mud, and it was known that there was a supply of cartridges in the farmhouse. It was decided to set the gun up at the foot of the Flagstaff, like a piece of artillery, and to fire it twice a year--once on October the twelfth, the anniversary of the Battle of the Cowshed, and once on Midsummer Day, the anniversary of the Rebellion.<br> 그 전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다. 결국, 그것은 '외양간 전투(Battle of the Cowshed)'라고 명명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매복이 개시되었던(습격이 발발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존스 씨의 총이 진흙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농가에 탄약통(카트리지) 공급품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 총을 국기게양대 받침대에 대포 한 문처럼 설치해 두고, 1년에 두 번—한 번은 외양간 전투의 기념일인 10월 12일에, 그리고 한 번은 반란의 기념일인 하지(Midsummer Day)에—그것을 발사하기로 결정되었다. Chapter V 제5장 As winter drew on, Mollie became more and more troublesome. She was late for work every morning and excused herself by saying that she had overslept, and she complained of mysterious pains, although her appetite was excellent. On every kind of pretext she would run away from work and go to the drinking pool, where she would stand foolishly gazing at her own reflection in the water. But there were also rumours of something more serious. One day, as Mollie strolled blithely into the yard, flirting her long tail and chewing at a stalk of hay, Clover took her aside.<br>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몰리는 점점 더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에 늦었고 자신이 늦잠을 잤다고 말하며 변명했으며, 그녀의 식욕은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통증들을 호소했다. 온갖 종류의 핑계를 대며 그녀는 일로부터 도망쳐서 식수 구덩이(웅덩이)로 가곤 했고, 그곳에서 그녀는 물에 비친 그녀 자신의 모습을 바보처럼 바라보며 서 있곤 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무언가에 대한 소문들도 있었다. 어느 날, 몰리가 그녀의 긴 꼬리를 살랑거리고 건초 한 줄기를 씹으며 마당 안으로 쾌활하게 걸어 들어왔을 때, 클로버가 그녀를 따로 데리고 갔다. "Mollie," she said, "I have something very serious to say to you. This morning I saw you looking over the hedge that divides Animal Farm from Foxwood. One of Mr. Pilkington's men was standing on the other side of the hedge. And--I was a long way away, but I am almost certain I saw this--he was talking to you and you were allowing him to stroke your nose. What does that mean, Mollie?"<br> "몰리," 그녀(클로버)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할 아주 심각한 말이 있어. 오늘 아침 나는 네가 동물농장과 폭스우드를 나누는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어. 필킹턴 씨의 부하들 중 한 명이 울타리 반대편에 서 있었지. 그리고—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였지만, 내가 이것을 보았다고 거의 확신하는데—그가 너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너는 그가 네 코를 쓰다듬도록 허용하고 있었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니, 몰리?" "He didn't! I wasn't! It isn't true!" cried Mollie, beginning to prance about and paw the ground. "Mollie! Look me in the face. Do you give me your word of honour that that man was not stroking your nose?" "It isn't true!" repeated Mollie, but she could not look Clover in the face, and the next moment she took to her heels and galloped away into the field. <br> "그는 그러지 않았어! 난 안 그랬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 몰리는 껑충거리고 발자국을 내기 시작하며 외쳤다. "몰리! 내 얼굴을 똑바로 봐. 그 사람이 네 코를 쓰다듬고 있지 않았다고 네 명예의 명백한 약속을 내게 줄 수 있니?" "그건 사실이 아니야!" 몰리가 반복했지만, 그녀는 클로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고,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달아나 들판 속으로 다다다닥 내달려 질주하며 가버렸다. A thought struck Clover. Without saying anything to the others, she went to Mollie's stall and turned over the straw with her hoof. Hidden under the straw was a little pile of lump sugar and several bunches of ribbon of different colours.<br> 한 가지 생각이 클로버를 때렸다(뇌리를 스쳤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몰리의 마구간으로 가서 그녀의 발굽으로 짚을 뒤집어엎었다. 짚 밑에 숨겨져 있는 것은 작은 덩어리 설탕 더미와 서로 다른 색깔들의 리본 몇 다발이었다. Three days later Mollie disappeared. For some weeks nothing was known of her whereabouts, then the pigeons reported that they had seen her on the other side of Willingdon. She was between the shafts of a smart dogcart painted red and black, which was standing outside a public-house. A fat red-faced man in check breeches and gaiters, who looked like a publican, was stroking her nose and feeding her with sugar. Her coat was newly clipped and she wore a scarlet ribbon round her forelock. She appeared to be enjoying herself, so the pigeons said. None of the animals ever mentioned Mollie again.<br> 3일 후에 몰리는 사라졌다. 몇 주 동안 그녀의 행방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후 비둘기들이 자신들이 윌링던의 반대편에서 그녀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그녀는 선술집 외곽에 서 있던,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진 멋진 이륜마차의 끌채(샤프트)들 사이에 있었다. 체크무늬 승마 바지와 각반을 입은, 선술집 주인처럼 보이는 한 뚱뚱하고 붉은 얼굴의 남자가 그녀의 코를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설탕을 먹이고 있었다. 그녀의 털은 새로 깎여 있었고 그녀는 그녀의 앞머리 주변에 진홍색 리본을 매고 있었다. 비둘기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물들 중 그 누구도 다시는 몰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In January there came bitterly hard weather. The earth was like iron, and nothing could be done in the fields. Many meetings were held in the big barn, and the pigs occupied themselves with planning out the work of the coming season. It had come to be accepted that the pigs, who were manifestly cleverer than the other animals, should decide all questions of farm policy, though their decisions had to be ratified by a majority vote. This arrangement would have worked well enough if it had not been for the disputes between Snowball and Napoleon. These two disagreed at every point where disagreement was possible. If one of them suggested sowing a bigger acreage with barley, the other was certain to demand a bigger acreage of oats, and if one of them said that such and such a field was just right for cabbages, the other would declare that it was useless for anything except roots. Each had his own following, and there were some violent debates. At the Meetings Snowball often won over the majority by his brilliant speeches, but Napoleon was better at canvassing support for himself in between times. He was especially successful with the sheep. Of late the sheep had taken to bleating "Four legs good, two legs bad" both in and out of season, and they often interrupted the Meeting with this. It was noticed that they were especially liable to break into "Four legs good, two legs bad" at crucial moments in Snowball's speeches. Snowball had made a close study of some back numbers of the 'Farmer and Stockbreeder' which he had found in the farmhouse, and was full of plans for innovations and improvements. He talked learnedly about field drains, silage, and basic slag, and had worked out a complicated scheme for all the animals to drop their dung directly in the fields, at a different spot every day, to save the labour of cartage. Napoleon produced no schemes of his own, but said quietly that Snowball's would come to nothing, and seemed to be biding his time. But of all their controversies, none was so bitter as the one that took place over the windmill.<br> 1월에 혹독하게 힘든 날씨가 찾아왔다. 땅은 철과 같았고, 들판에서는 아무것도 행해질 수 없었다. 큰 대포간(헛간)에서 많은 회의가 열렸고, 돼지들은 다가오는 계절의 일을 계획하는 것에 전념했다. 다른 동물들보다 명백히 더 똑똑한 돼지들이 농장 정책의 모든 질문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데, 비록 그들의 결정들이 과반수 투표에 의해 승인되어야만 했을지라도 그러했다. 만약 스노볼과 나폴레옹 사이의 분쟁들이 없었더라면 이 합의는 충분히 잘 작동했을 것이다. 이 둘은 의견 불일치가 가능한 모든 지점에서 의견이 불일치했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 보리를 더 큰 면적에 파종하자고 제안하면, 다른 한 명은 더 큰 면적의 귀리를 요구할 것이 확실했고, 만약 그들 중 한 명이 이러저러한 들판이 양배추에 딱 맞다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은 그것이 뿌리채소 외에는 아무것에도 쓸모없다고 선언하곤 했다. 각자는 자신만의 추종자들을 가졌고, 몇몇 격렬한 논쟁들이 있었다. 회의에서 스노볼은 그의 뛰어난 연설들로 종종 과반수를 설득해 이겼으나, 나폴레옹은 회의 사이사이 시간에 자신을 위한 지지를 호소(사전 포섭)하는 것에 더 능했다. 그는 특히 양들에게 성공적이었다. 최근에 양들은 철이 있든 없든(시도 때도 없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고 매헤헤 울어대기 시작했고, 그들은 종종 이것으로 회의를 방해했다. 그들이 특히 스노볼의 연설 중 결정적인 순간들에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를 갑자기 터뜨리기 쉽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스노볼은 농가에서 발견한 '농부와 축산인' 잡지의 몇몇 과월호들을 면밀히 연구했었고, 혁신과 개선을 위한 계획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배수구, 사일리지(담금먹이), 그리고 토마스 인비(염기성 슬래그)에 대해 박식하게 이야기했으며, 운반의 노동을 아끼기 위해 모든 동물들이 매일 다른 지점에, 들판에 직접 그들의 똥을 누도록 하는 복잡한 계획을 짜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만의 어떤 계획도 내놓지 않았으나, 스노볼의 계획은 아무것도 되지 못할(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조용히 말했고, 그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논쟁 중에서도, 풍차를 두고 일어난 논쟁만큼 격렬한 것은 없었다. In the long pasture, not far from the farm buildings, there was a small knoll which was the highest point on the farm. After surveying the ground, Snowball declared that this was just the place for a windmill, which could be made to operate a dynamo and supply the farm with electrical power. This would light the stalls and warm them in winter, and would also run a circular saw, a chaff-cutter, a mangel-slicer, and an electric milking machine. The animals had never heard of anything of this kind before (for the farm was an old-fashioned one and had only the most primitive machinery), and they listened in astonishment while Snowball conjured up pictures of fantastic machines which would do their work for them while they grazed at their ease in the fields or improved their minds with reading and conversation.<br> 농장 건물들에서 멀지 않은 긴 목초지에, 농장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작은 둔덕이 있었다. 땅을 측량한 후에, 스노볼은 이곳이 풍차를 위한 딱 알맞은 장소라고 선언했는데, 그것(풍차)은 발전기를 작동시켜 농장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마구간들을 밝히고 겨울에 그것들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이며, 또한 원형 톱, 작두(여물 절단기), 비트 절단기(사료용 무 채 써는 기계), 그리고 전기 착유기를 가동할 것이었다. 동물들은 이전에 이런 종류의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왜냐하면 그 농장은 구식이었고 오직 가장 원시적인 기계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들판에서 편안하게 풀을 뜯거나 독서와 대화로 정신을 향상시키는 동안 자신들을 위해 일을 해 줄 환상적인 기계들의 그림들을 스노볼이 마법 부리듯 불러내는 동안 깜짝 놀라서 경청했다. Within a few weeks Snowball's plans for the windmill were fully worked out. The mechanical details came mostly from three books which had belonged to Mr. Jones--'One Thousand Useful Things to Do About the House', 'Every Man His Own Bricklayer', and 'Electricity for Beginners'. Snowball used as his study a shed which had once been used for incubators and had a smooth wooden floor, suitable for drawing on. He was closeted there for hours at a time. With his books held open by a stone, and with a piece of chalk gripped between the knuckles of his trotter, he would move rapidly to and fro, drawing in line after line and uttering little whimpers of excitement. Gradually the plans grew into a complicated mass of cranks and cog-wheels, covering more than half the floor, which the other animals found completely unintelligible but very impressive. All of them came to look at Snowball's drawings at least once a day. Even the hens and ducks came, and were at pains not to tread on the chalk marks. Only Napoleon held aloof. He had declared himself against the windmill from the start. One day, however, he arrived unexpectedly to examine the plans. He walked heavily round the shed, looked closely at every detail of the plans and snuffed at them once or twice, then stood for a little while contemplating them out of the corner of his eye; then suddenly he lifted his leg, urinated over the plans, and walked out without uttering a word.<br> 몇 주 안에 풍차를 위한 스노볼의 계획들은 완전히 짜였다. 기계적인 세부 사항들은 대부분 존스 씨의 소유였던 세 권의 책—'집안일에서 해야 할 일천 가지 유용한 일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벽돌공', 그리고 '초보자를 위한 전기'—에서 나왔다. 스노볼은 한때 부화기용으로 사용되었고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매끄러운 나무 바닥을 가진 창고를 자신의 서재로 사용했다. 그는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돌멩이로 책을 펼쳐 누르고, 그의 앞다리 족발 마디 사이에 분필 조각을 꽉 쥔 채, 그는 줄 뒤에 줄을 그려 나가고 흥분으로 작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앞뒤로 움직이곤 했다. 점차 그 계획들은 바닥의 절반 이상을 덮는 크랭크들과 톱니바퀴들의 복잡한 덩어리로 커졌는데, 다른 동물들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매우 인상 깊게 여겼다. 그들 모두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스노볼의 그림들을 보러 왔다. 암탉들과 오리들마저 왔고, 분필 자국들을 밟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오직 나폴레옹만이 거리를 두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은 풍차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계획들을 조사하기 위해 예기치 않게 도착했다. 그는 창고 주변을 무겁게 걸어 다녔고, 계획들의 모든 세부 사항을 면밀히 보았으며 그것들에 대고 한두 번 킁킁거린 다음, 그의 곁눈으로 그것들을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그는 그의 다리를 들어 올려 계획들 위에 오줌을 누었고,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은 채 걸어 나갔다. The whole farm was deeply divided on the subject of the windmill. Snowball did not deny that to build it would be a difficult business. Stone would have to be carried and built up into walls, then the sails would have to be made and after that there would be need for dynamos and cables. (How these were to be procured, Snowball did not say.) But he maintained that it could all be done in a year. And thereafter, he declared, so much labour would be saved that the animals would only need to work three days a week. Napoleon, on the other hand, argued that the great need of the moment was to increase food production, and that if they wasted time on the windmill they would all starve to death. The animals formed themselves into two factions under the slogan, "Vote for Snowball and the three-day week" and "Vote for Napoleon and the full manger." Benjamin was the only animal who did not side with either faction. He refused to believe either that food would become more plentiful or that the windmill would save work. Windmill or no windmill, he said, life would go on as it had always gone on--that is, badly.<br> 농장 전체가 풍차라는 주제에 대해 깊게 나뉘었다. 스노볼은 그것을 짓는 것이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돌들을 운반하여 벽들로 쌓아 올려야 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풍차의) 날개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그 후에는 발전기들과 케이블들의 필요가 있을 것이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노볼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이 1년 안에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너무나 많은 노동이 절약되어 동물들이 일주일에 오직 3일만 일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그는 선언했다. 반면에 나폴레옹은 현재의 거대한 필요는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것이며, 만약 그들이 풍차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들 모두는 굶어 죽을 것이라고 논쟁했다. 동물들은 "스노볼과 주 3일 노동에 투표하라"와 "나폴레옹과 가득 찬 여물통에 투표하라"라는 슬로건 아래 두 개의 파벌로 자신들을 형성했다. 벤자민은 어느 파벌의 편도 들지 않은 유일한 동물이었다. 그는 식량이 더 풍족해질 것이라는 점도, 풍차가 노동을 아껴줄 것이라는 점도 믿기를 거부했다. 풍차가 있든 풍차가 없든, 삶은 그것이 항상 흘러왔던 대로—즉, 나쁘게—흘러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Apart from the disputes over the windmill, there was the question of the defence of the farm. It was fully realised that though the human beings had been defeated in the Battle of the Cowshed they might make another and more determined attempt to recapture the farm and reinstate Mr. Jones. They had all the more reason for doing so because the news of their defeat had spread across the countryside and made the animals on the neighbouring farms more restive than ever. As usual, Snowball and Napoleon were in disagreement. According to Napoleon, what the animals must do was to procure firearms and train themselves in the use of them. According to Snowball, they must send out more and more pigeons and stir up rebellion among the animals on the other farms. The one argued that if they could not defend themselves they were bound to be conquered, the other argued that if rebellions happened everywhere they would have no need to defend themselves. The animals listened first to Napoleon, then to Snowball, and could not make up their minds which was right; indeed, they always found themselves in agreement with the one who was speaking at the moment.<br> 풍차에 대한 분쟁들과는 별개로, 농장의 방어라는 문제가 있었다. 비록 인간들이 외양간 전투에서 패배했었을지라도 그들이 농장을 탈환하고 존스 씨를 복귀시키기 위해 또 다른, 그리고 더 단호한 시도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완전히 인식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이유는 더욱더 충분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패배 소식이 시골 전역으로 퍼졌고 이웃 농장들의 동물들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동요하게(반항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의견이 불일치했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동물들이 해야만 하는 것은 화기(총기류)들을 조달하고 그것들의 사용법을 스스로 훈련하는 것이었다. 스노볼에 따르면, 그들은 더 많은 비둘기들을 파견하여 다른 농장들의 동물들 사이에서 반란을 선동해야만 했다. 한 명은 만약 그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면 그들은 정복당할 수밖에 없다고 논쟁했고, 다른 한 명은 만약 반란들이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논쟁했다. 동물들은 먼저 나폴레옹의 말을 듣고, 그다음 스노볼의 말을 들었으며, 어느 쪽이 옳은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참으로, 그들은 항상 바로 그 순간에 말하고 있는 자에게 자신들이 동의하고 있음을 발견하곤 했다. At last the day came when Snowball's plans were completed. At the Meeting on the following Sunday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to begin work on the windmill was to be put to the vote. When the animals had assembled in the big barn, Snowball stood up and, though occasionally interrupted by bleating from the sheep, set forth his reasons for advocating the building of the windmill. Then Napoleon stood up to reply. He said very quietly that the windmill was nonsense and that he advised nobody to vote for it, and promptly sat down again; he had spoken for barely thirty seconds, and seemed almost indifferent as to the effect he produced. At this Snowball sprang to his feet, and shouting down the sheep, who had begun bleating again, broke into a passionate appeal in favour of the windmill. Until now the animals had been about equally divided in their sympathies, but in a moment Snowball's eloquence had carried them away. In glowing sentences he painted a picture of Animal Farm as it might be when sordid labour was lifted from the animals' backs. His imagination had now run far beyond chaff-cutters and turnip-slicers. Electricity, he said, could operate threshing machines, ploughs, harrows, rollers, and reapers and binders, besides supplying every stall with its own electric light, hot and cold water, and an electric heater. By the time he had finished speaking, there was no doubt as to which way the vote would go. But just at this moment Napoleon stood up and, casting a peculiar sidelong look at Snowball, uttered a high-pitched whimper of a kind no one had ever heard him utter before.<br> 마침내 스노볼의 계획들이 완료된 날이 왔다. 그다음 일요일 회의에서 풍차 작업을 시작할지 말지의 문제가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동물들이 큰 대포간(헛간)에 모였을 때, 스노볼은 일어섰고, 비록 양들로부터의 매헤헤 우는 소리에 의해 가끔 방해를 받았을지라도, 풍차 건설을 옹호하는 자신의 이유들을 설명했다. 그다음 나폴레옹이 답변을 위해 일어섰다. 그는 풍차는 터무니없는 짓이며 자신은 그 누구도 그것에 투표하지 말 것을 권한다고 매우 조용히 말하고는, 즉시 다시 앉았다. 그는 간신히 30초 동안 말했을 뿐이었고, 자신이 만들어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이에 스노볼이 벌떡 일어났고, 다시 울기 시작했던 양들을 소리쳐 잠재우며, 풍차를 지지하는 열정적인 호소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동물들은 자신들의 지지에 있어 대략 반반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순식간에 스노볼의 웅변이 그들을 휩쓸어 버렸다. 빛나는 문장들로 그는 고된 노동이 동물들의 등에서 들려 올려졌을 때(사라졌을 때)의 동물농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상상력은 이제 작두와 순무 절단기를 훨씬 넘어서 달렸다. 전기는 모든 마구간에 그것만의 전등, 온수와 냉수, 그리고 전기 히터를 공급하는 것 외에도, 탈곡기, 쟁기, 써레, 롤러, 그리고 수확기와 결속기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말을 마쳤을 때쯤에는, 투표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나폴레옹이 일어섰고, 스노볼에게 독특한 곁눈질을 던지며, 이전에는 아무도 그가 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종류의 높은 음의 끙끙거리는 소리(신호)를 내뱉었다. At this there was a terrible baying sound outside, and nine enormous dogs wearing brass-studded collars came bounding into the barn. They dashed straight for Snowball, who only sprang from his place just in time to escape their snapping jaws. In a moment he was out of the door and they were after him. Too amazed and frightened to speak, all the animals crowded through the door to watch the chase. Snowball was racing across the long pasture that led to the road. He was running as only a pig can run, but the dogs were close on his heels. Suddenly he slipped and it seemed certain that they had him. Then he was up again, running faster than ever, then the dogs were gaining on him again. One of them all but closed his jaws on Snowball's tail, but Snowball whisked it free just in time. Then he put on an extra spurt and, with a few inches to spare, slipped through a hole in the hedge and was seen no more.<br> 이에 바깥에서 끔찍하게 짖어대는 소리가 났고, 황동 징이 박힌 목줄을 착용한 아홉 마리의 거대한 개들이 헛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스노볼을 향해 곧장 돌진했는데, 스노볼은 그들의 딱딱 맞부딪히는 턱들을 피하기 위해 딱 맞춰 그의 자리에서 겨우 뛰어올랐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문밖으로 나갔고 그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너무 놀라고 겁에 질려 말도 못 한 채, 모든 동물들은 그 추격전을 보기 위해 문을 통과해 몰려들었다. 스노볼은 도로로 이어지는 긴 목초지를 가로질러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돼지만이 달릴 수 있는 방식으로 달리고 있었으나, 개들이 그의 뒤꿈치에 바짝 붙어 있었다. 갑자기 그가 미끄러졌고 그들이 그를 잡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때 그가 다시 일어나 그 어느 때보다 더 빨리 달렸으나, 그다음 개들이 그를 다시 따라잡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마리는 스노볼의 꼬리를 거의 물 뻔했으나, 스노볼이 딱 맞춰 그것을 휙 빼내어 벗어났다. 그러고는 그가 추가적인 질주(스퍼트)를 냈고, 몇 인치의 여유를 둔 채 울타리의 구멍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Silent and terrified, the animals crept back into the barn. In a moment the dogs came bounding back. At first no one had been able to imagine where these creatures came from, but the problem was soon solved: they were the puppies whom Napoleon had taken away from their mothers and reared privately. Though not yet full-grown, they were huge dogs, and as fierce-looking as wolves. They kept close to Napoleon. It was noticed that they wagged their tails to him in the same way as the other dogs had been used to do to Mr. Jones.<br> 조용하고 겁에 질린 채, 동물들은 헛간 안으로 기어 돌아왔다. 순식간에 개들이 껑충껑충 뛰어서 돌아왔다. 처음에 그 누구도 이 생명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으나, 그 문제는 곧 해결되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그들의 어미들에게서 빼앗아 사적으로 키웠던 강아지들이었다. 비록 아직 다 자라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거대한 개들이었고, 늑대들만큼 사나워 보이는 외모였다.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다른 개들이 존스 씨에게 하곤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나폴레옹에게 꼬리를 흔든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Napoleon, with the dogs following him, now mounted on to the raised portion of the floor where Major had previously stood to deliver his speech. He announced that from now on the Sunday-morning Meetings would come to an end. They were unnecessary, he said, and wasted time. In future all questions relating to the working of the farm would be settled by a special committee of pigs, presided over by himself. These would meet in private and afterwards communicate their decisions to the others. The animals would still assemble on Sunday mornings to salute the flag, sing 'Beasts of England', and receive their orders for the week; but there would be no more debates.<br> 나폴레옹은 개들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채로, 이전에 메이저가 그의 연설을 하기 위해 서 있었던 바닥의 돋우어진 부분(단상) 위로 이제 올라갔다. 그는 이제부터 일요일 아침 회의들은 끝이 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것들은 불필요하며 시간을 낭비했다고 그는 말했다. 미래에는 농장의 운영과 관련된 모든 질문이 자신이 주재하는 돼지들의 특별 위원회에 의해 해결될 것이었다. 이들은 사적으로 만날 것이고 나중에 그들의 결정들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것이었다. 동물들은 깃발에 경례하고, '영국의 동물들'을 노래하며, 그 주를 위한 그들의 명령들을 받기 위해 일요일 아침에 여전히 모이곤 할 것이었지만, 더 이상의 논쟁들은 없을 것이었다. In spite of the shock that Snowball's expulsion had given them, the animals were dismayed by this announcement. Several of them would have protested if they could have found the right arguments. Even Boxer was vaguely troubled. He set his ears back, shook his forelock several times, and tried hard to marshal his thoughts; but in the end he could not think of anything to say. Some of the pigs themselves, however, were more articulate. Four young porkers in the front row uttered shrill squeals of disapproval, and all four of them sprang to their feet and began speaking at once. But suddenly the dogs sitting round Napoleon let out deep, menacing growls, and the pigs fell silent and sat down again. Then the sheep broke out into a tremendous bleating of "Four legs good, two legs bad!" which went on for nearly a quarter of an hour and put an end to any chance of discussion.<br> 스노볼의 축출이 그들에게 주었던 충격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은 이 발표에 의해 당황했다(의기소침해졌다). 만약 그들이 올바른 논거들을 찾을 수만 있었더라면 그들 중 몇몇은 항의했을 것이었다. 복서조차도 모호하게 괴로워했다. 그는 그의 귀를 뒤로 젖히고, 그의 앞머리를 몇 번 흔들었으며, 그의 생각들을 정렬하기(모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 그는 말할 어떤 것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돼지들 중 몇몇은 스스로 더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앞줄에 있던 네 마리의 젊은 육용 돼지들이 반대의 날카로운 비명을 내뱉었고, 그들 네 마리 모두 벌떡 일어나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폴레옹 주변에 앉아 있던 개들이 깊고 위협적인 으르렁거림을 내뿜었고, 돼지들은 침묵에 빠져 다시 앉았다. 그다음 양들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엄청난 매헤헤 울음소리를 터뜨렸는데, 이것은 거의 15분(1시간의 4분의 1) 동안 계속되었고 토론의 어떤 기회도 끝내버렸다. Afterwards Squealer was sent round the farm to explain the new arrangement to the others.<br> 그 후 스퀼러는 농장을 돌며 다른 이들(동물들)에게 새로운 방침을 설명하라는 지시를 (나폴레옹으로부터 명령)받았다. "Comrades," he said, "I trust that every animal here appreciates the sacrifice that Comrade Napoleon has made in taking this extra labour upon himself. Do not imagine, comrades, that leadership is a pleasure! On the contrary, it is a deep and heavy responsibility. No one believes more firmly than Comrade Napoleon that all animals are equal. He would be only too happy to let you make your decisions for yourselves. But sometimes you might make the wrong decisions, comrades, and then where should we be? Suppose you had decided to follow Snowball, with his moonshine of windmills--Snowball, who, as we now know, was no better than a criminal?"<br> "동무들," 그가 말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동물이 나폴레옹 동무가 이 추가적인 노동을 스스로 떠맡음으로써 치른 희생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동무들, 지도자가 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그것은 깊고 무거운 책임입니다. 그 누구도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나폴레옹 동무보다 더 확고하게 믿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결정들을 내리게 함으로써 단지 너무나 행복할 뿐일 것입니다(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여러분은 잘못된 결정들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동무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스노볼과 그의 풍차라는 허튼소리(달빛)를 따르기로 결정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우리가 이제 알고 있듯이, 범죄자나 다름없었던 그 스노볼을 말입니다?" "He fought bravely at the Battle of the Cowshed," said somebody.<br> "그는 외양간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어." 누군가가 말했다. "Bravery is not enough," said Squealer. "Loyalty and obedience are more important. And as to the Battle of the Cowshed, I believe the time will come when we shall find that Snowball's part in it was much exaggerated. Discipline, comrades, iron discipline! That is the watchword for today. One false step, and our enemies would be upon us. Surely, comrades, you do not want Jones back?"<br> "용맹함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퀼러가 말했다. "충성심과 복종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외양간 전투에 관해서라면, 나는 우리가 그 안에서의 스노볼의 역할이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시간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규율입니다, 동무들, 철의 규율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위한 표어(좌우명)입니다. 한 번의 잘못된 발걸음이면,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설마, 동무들, 여러분은 존스가 돌아오기를 원치 않으시겠지요?" Once again this argument was unanswerable. Certainly the animals did not want Jones back; if the holding of debates on Sunday mornings was liable to bring him back, then the debates must stop. Boxer, who had now had time to think things over, voiced the general feeling by saying: "If Comrade Napoleon says it, it must be right." And from then on he adopted the maxim, "Napoleon is always right," in addition to his private motto of "I will work harder."<br> 이번에도 이 주장은 반박할 수 없었다. 확실히 동물들은 존스가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일요일 아침에 토론들을 개최하는 것이 그를 돌아오게 만들기 쉽다면, 그렇다면 토론들은 중단되어야만 했다. 이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가졌던 복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일반적인 감정을 대변했다. "만약 나폴레옹 동무가 그것을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옳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그의 개인적 좌우명인 "내가 더 열심히 일하겠다"에 더하여,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라는 격언을 채택했다. By this time the weather had broken and the spring ploughing had begun. The shed where Snowball had drawn his plans of the windmill had been shut up and it was assumed that the plans had been rubbed off the floor. Every Sunday morning at ten o'clock the animals assembled in the big barn to receive their orders for the week. The skull of old Major, now clean of flesh, had been disinterred from the orchard and set up on a stump at the foot of the flagstaff, beside the gun. After the hoisting of the flag, the animals were required to file past the skull in a reverent manner before entering the barn. Nowadays they did not sit all together as they had done in the past. Napoleon, with Squealer and another pig named Minimus, who had a remarkable gift for composing songs and poems, sat on the front of the raised platform, with the nine young dogs forming a semicircle round them, and the other pigs sitting behind. The rest of the animals sat facing them in the main body of the barn. Napoleon read out the orders for the week in a gruff soldierly style, and after a single singing of 'Beasts of England', all the animals dispersed.<br> 이 무렵에 날씨가 풀렸고(바뀌었고) 봄의 쟁기질이 시작되었다. 스노볼이 풍차에 대한 자신의 계획들을 그렸던 창고는 닫혔고 그 계획들은 바닥에서 문질러 지워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에 동물들은 그 주를 위한 그들의 명령들을 받기 위해 큰 헛간에 모였다. 이제 살점이 깨끗이 없어진 늙은 메이저의 두개골이 과수원에서 발굴되어 깃대 발치에 있는, 총 옆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올려졌다. 깃발을 게양한 후에, 동물들은 헛간에 들어가기 전에 경건한 태도로 그 두개골을 지나쳐 줄지어 걸어갈 것이 요구되었다. 요즈음 그들은 과거에 했던 것처럼 모두 함께 앉지 않았다. 노래와 시를 짓는 데 주목할 만한 재능을 가졌던 미니머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돼지 및 스퀼러와 함께, 나폴레옹은 돋우어진 단상의 앞쪽에 앉았으며, 아홉 마리의 젊은 개들이 그들 주변으로 반원을 형성했고, 다른 돼지들은 뒤쪽에 앉았다. 나머지 동물들은 헛간의 본체(본당)에서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나폴레옹은 퉁명스러운 군인 같은 스타일로 그 주를 위한 명령들을 낭독했고, '영국의 동물들'을 단 한 번 노래한 후에, 모든 동물은 흩어졌다. On the third Sunday after Snowball's expulsion, the animals were somewhat surprised to hear Napoleon announce that the windmill was to be built after all. He did not give any reason for having changed his mind, but merely warned the animals that this extra task would mean very hard work, it might even be necessary to reduce their rations. The plans, however, had all been prepared, down to the last detail. A special committee of pigs had been at work upon them for the past three weeks. The building of the windmill, with various other improvements, was expected to take two years.<br> 스노볼의 축출 후 세 번째 일요일에, 동물들은 나폴레옹이 결국 풍차가 건설될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을 듣고 다소 놀랐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바꾼 것에 대한 어떤 이유도 대지 않았고, 단지 동물들에게 이 추가적인 과업은 매우 힘든 일을 의미할 것이며, 그들의 식량 배급을 줄이는 것마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을 뿐이었다.<ref>스노볼을 쫓아낸 나폴레옹이 갑자기 말을 바꾸어 풍차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는, 뻔뻔한 독재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묘사되고있다.</ref> 하지만 계획들은 마지막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돼지들의 특별 위원회가 지난 3주 동안 그것들(계획들)에 매달려 일해 오던 중이었다. 다양한 다른 개선사항들과 함께, 풍차의 건설은 2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That evening Squealer explained privately to the other animals that Napoleon had never in reality been opposed to the windmill. On the contrary, it was he who had advocated it in the beginning, and the plan which Snowball had drawn on the floor of the incubator shed had actually been stolen from among Napoleon's papers. The windmill was, in fact, Napoleon's own creation. Why, then, asked somebody, had he spoken so strongly against it? Here Squealer looked very sly. That, he said, was Comrade Napoleon's cunning. He had SEEMED to oppose the windmill, simply as a manoeuvre to get rid of Snowball, who was a dangerous character and a bad influence. Now that Snowball was out of the way, the plan could go forward without his interference. This, said Squealer, was something called tactics. He repeated a number of times, "Tactics, comrades, tactics!" skipping round and whisking his tail with a merry laugh. The animals were not certain what the word meant, but Squealer spoke so persuasively, and the three dogs who happened to be with him growled so threateningly, that they accepted his explanation without further questions. <br> 그날 저녁 스퀼러는 다른 동물들에게 사적으로 나폴레옹이 실제로는 풍차에 반대한 적이 결코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처음에 그것을 옹호했던 사람은 바로 그였으며, 스노볼이 부화기 창고 바닥에 그렸던 그 계획은 사실 나폴레옹의 서류들 사이에서 도둑맞은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풍차는, 사실(이제), 나폴레옹 자신의 창작물이었다(되었다). 그러면 왜, 누군가가 묻기를, 그는 그것에 대해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하는 말을 했었는가? 이 지점에서 스퀼러는 매우 교활해 보였다. 그것은, 그가 말하기를, 나폴레옹 동무의 간계였다. 그는 단지 위험한 인물이자 나쁜 영향이었던 스노볼을 제거하기 위한 기동 작전(책략)으로서 풍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뿐이었다. 이제 스노볼이 방해되지 않게 치워졌으므로, 그 계획은 그의 간섭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은, 스퀼러가 말하기를, 전략(택틱스)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었다. 그는 유쾌한 웃음과 함께 주위를 껑충껑충 뛰고 그의 꼬리를 휙휙 흔들면서, "전략입니다, 동무들, 전략!"이라고 여러 번 반복했다. 동물들은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았으나, 스퀼러가 너무나 설득력 있게 말했고, 마침 그와 함께 있던 세 마리의 개들이 너무나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Chapter VI 제6장 All that year the animals worked like slaves. But they were happy in their work; they grudged no effort or sacrifice, well aware that everything that they did was for the benefit of themselves and those of their kind who would come after them, and not for a pack of idle, thieving human beings.<br> 그해 내내 동물들은 노예들처럼 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 안에서 행복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뒤에 올 그들 종류(동물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한 무리의 게으르고 도둑질하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노력이나 희생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Throughout the spring and summer they worked a sixty-hour week, and in August Napoleon announced that there would be work on Sunday afternoons as well. This work was strictly voluntary, but any animal who absented himself from it would have his rations reduced by half. Even so, it was found necessary to leave certain tasks undone. The harvest was a little less successful than in the previous year, and two fields which should have been sown with roots in the early summer were not sown because the ploughing had not been completed early enough. It was possible to foresee that the coming winter would be a hard one.<br> 봄과 여름 내내 그들은 주당 60시간 노동을 했고, 8월에 나폴레옹은 일요일 오후들에도 역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일은 엄격히 자발적이었으나, 그것(일요일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결석시킨(참가하지 않은) 어떤 동물이라도 그의 배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과업들을 완수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는 것이 (어쩌면)필요할수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수확은 지난 해보다 다소 덜 성공적이었고, 초여름에 뿌리채소들로 파종되었어야만 했던 두 들판은 쟁기질이 충분히 일찍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종되지 못했다. 다가오는 겨울이 힘든 겨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는 것이 가능했다. The windmill presented unexpected difficulties. There was a good quarry of limestone on the farm, and plenty of sand and cement had been found in one of the outhouses, so that all the materials for building were at hand. But the problem the animals could not at first solve was how to break up the stone into pieces of suitable size. There seemed no way of doing this except with picks and crowbars, which no animal could use, because no animal could stand on his hind legs. Only after weeks of vain effort did the right idea occur to somebody-namely, to utilise the force of gravity. Huge boulders, far too big to be used as they were, were lying all over the bed of the quarry. The animals lashed ropes round these, and then all together, cows, horses, sheep, any animal that could lay hold of the rope--even the pigs sometimes joined in at critical moments--they dragged them with desperate slowness up the slope to the top of the quarry, where they were toppled over the edge, to shatter to pieces below. Transporting the stone when it was once broken was comparatively simple. The horses carried it off in cart-loads, the sheep dragged single blocks, even Muriel and Benjamin yoked themselves into an old governess-cart and did their share. By late summer a sufficient store of stone had accumulated, and then the building began, under the superintendence of the pigs.<br> 풍차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제시했다. 농장에는 훌륭한 석회암 채석장이 있었고, 외채(바깥 창고)들 중 한 곳에서 많은 모래와 시멘트가 발견되었었기에, 건축을 위한 모든 재료가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동물들이 처음에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는 어떻게 돌을 적당한 크기의 조각들로 부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곡괭이들과 지렛대들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이것을 할 방법이 없어 보였는데, 어떤 동물도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 왜냐하면 어떤 동물도 자신의 뒷다리들로만 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주간의 헛된 노력 후에야 비로소 올바른 생각이 누군가에게 떠올랐는데—즉, 중력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사용되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게 큰 거대한 바위들이 채석장 바닥 여기저기에 누워 있었다. 동물들은 이것들 주변으로 로프들을 묶었고, 그다음 모두 함께, 암소들, 말들, 양들, 로프를 붙잡을 수 있는 어떤 동물이라도—심지어 돼지들마저도 때때로 결정적인 순간들에는 동참했다—그들은 그것들을 필사적인 느림으로 채석장 꼭대기까지 경사면 위로 끌고 갔으며, 그곳에서 그것들은 아래에서 조각조각 부서지도록 가장자리 너머로 굴러 떨어뜨려졌다. 돌이 일단 부서졌을 때 그것을 운반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했다. 말들은 그것을 마차 가득 실어 날랐고, 양들은 단일 블록들을 끌었으며, 심지어 뮤리엘과 벤자민마저도 구식 이륜마차(거버니스 카트)에 스스로 멍에를 메고 자신들의 몫을 했다. 늦여름 무렵에 충분한 양의 돌이 축적되었고, 그다음 돼지들의 감독 아래 건축이 시작되었다. But it was a slow, laborious process. Frequently it took a whole day of exhausting effort to drag a single boulder to the top of the quarry, and sometimes when it was pushed over the edge it failed to break. Nothing could have been achieved without Boxer, whose strength seemed equal to that of all the rest of the animals put together. When the boulder began to slip and the animals cried out in despair at finding themselves dragged down the hill, it was always Boxer who strained himself against the rope and brought the boulder to a stop. To see him toiling up the slope inch by inch, his breath coming fast, the tips of his hoofs clawing at the ground, and his great sides matted with sweat, filled everyone with admiration. Clover warned him sometimes to be careful not to overstrain himself, but Boxer would never listen to her. His two slogans, "I will work harder" and "Napoleon is always right," seemed to him a sufficient answer to all problems. He had made arrangements with the cockerel to call him three-quarters of an hour earlier in the mornings instead of half an hour. And in his spare moments, of which there were not many nowadays, he would go alone to the quarry, collect a load of broken stone, and drag it down to the site of the windmill unassisted.<br> 그러나 그것은 느리고, 힘든 과정이었다. 빈번하게 단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채석장 꼭대기로 끌고 가는 것에 온종일의 진을 빼는 노력이 소요되었고, 때때로 그것이 가장자리 너머로 밀려 떨어졌을 때 그것은 부서지는 데 실패했다. 그의 힘이 나머지 모든 동물들을 합쳐 놓은 것과 맞먹는 것처럼 보였던 복서가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위가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동물들이 자신들이 언덕 아래로 끌려 내려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하여 비명을 지를 때, 로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바위를 정지 상태로 가져온 것은 항상 복서였다. 그가 인치 단위로(조금씩 조금씩) 경사면을 힘들게 올라가는 것을 보는 것, 그의 호흡이 가쁘게 몰아쉬어지는 것, 그의 발굽 끝이 땅을 움켜쥐는 것, 그리고 그의 거대한 옆구리가 땀으로 엉겨 붙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모든 이를 감탄으로 채웠다. 클로버는 때때로 그에게 과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으나, 복서는 결코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두 가지 슬로건인 "내가 더 열심히 일하겠다"와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는 모든 문제에 대한 충분한 답변으로 그에게 보였다. 그는 아침에 30분 대신 45분(1시간의 4분의 3) 더 일찍 자신을 깨우도록 어린 수탉과 계약을 맺었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많지 않았던 그의 여유 시간들에도, 그는 혼자 채석장으로 가서 부서진 돌 한 짐을 모아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풍차 부지까지 그것을 아래로 끌고 가곤 했다. The animals were not badly off throughout that summer, in spite of the hardness of their work. If they had no more food than they had had in Jones's day, at least they did not have less. The advantage of only having to feed themselves, and not having to support five extravagant human beings as well, was so great that it would have taken a lot of failures to outweigh it. And in many ways the animal method of doing things was more efficient and saved labour. Such jobs as weeding, for instance, could be done with a thoroughness impossible to human beings. And again, since no animal now stole, it was unnecessary to fence off pasture from arable land, which saved a lot of labour on the upkeep of hedges and gates. Nevertheless, as the summer wore on, various unforeseen shortages began to make them selves felt. There was need of paraffin oil, nails, string, dog biscuits, and iron for the horses' shoes, none of which could be produced on the farm. Later there would also be need for seeds and artificial manures, besides various tools and, finally, the machinery for the windmill. How these were to be procured, no one was able to imagine.<br> 동물들은 그들의 노동의 혹독함에도 불구하고, 그 여름 내내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형편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만약 그들이 존스의 시절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식량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적어도 더 적게 가지지는 않았다. 오직 그들 자신만을 먹여 살리면 되고, 다섯 명의 사치스러운 인간들까지 함께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은 너무나 커서, 그것을 상쇄하려면 아주 많은 실패들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일을 처리하는 동물의 방식은 더 효율적이었고 노동을 절약했다. 예를 들어 잡초 뽑기 같은 작업들은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철저함으로 행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는 어떤 동물도 훔치지 않았기 때문에, 목초지를 경작지로부터 울타리로 격리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울타리와 문들의 유지 보수에 드는 많은 노동을 아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닳아가면서(지나가면서), 다양한 예견되지 않은 부족들이 스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느껴졌다). 등유, 못들, 끈, 개 사료(도그 비스킷), 그리고 말들의 편자를 위한 철의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들 중 어느 것도 농장에서는 생산될 수 없었다. 나중에는 다양한 도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차를 위한 기계류 외에도, 씨앗들과 인공 비료들의 필요 역시 있을 것이었다. 이것들이 어떻게 조달되어야 하는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One Sunday morning, when the animals assembled to receive their orders, Napoleon announced that he had decided upon a new policy. From now onwards Animal Farm would engage in trade with the neighbouring farms: not, of course, for any commercial purpose, but simply in order to obtain certain materials which were urgently necessary. The needs of the windmill must override everything else, he said. He was therefore making arrangements to sell a stack of hay and part of the current year's wheat crop, and later on, if more money were needed, it would have to be made up by the sale of eggs, for which there was always a market in Willingdon. The hens, said Napoleon, should welcome this sacrifice as their own special contribution towards the building of the windmill.<br> 어느 일요일 아침, 동물들이 그들의 명령을 받기 위해 모였을 때, 나폴레옹은 자신이 새로운 정책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제부터 앞으로 동물농장은 이웃 농장들과 무역(거래)에 참여할 것이었는데, 물론 어떤 상업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시급하게 필요한 특정 재료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풍차의 필요들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건초 한 더미와 당해 연도의 밀 수확물 일부를 판매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나중에 만약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면 윌링던에 항상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달걀의 판매에 의해 그것이 충당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말하기를, 암탉들은 이 희생을 풍차 건설을 향한 자신들만의 특별한 기여로서 환영해야만 했다.<ref>동물들의 생활 수준에 대한 냉정한 계산과 함께, 자체 생산할 수 없는 외부 물품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한계가 고개를 드는 대목으로, 인간들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혁명의 기본 원칙이 나폴레옹에 의해 처음으로 깨지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묘사하고있다.</ref> Once again the animals were conscious of a vague uneasiness. Never to have any dealings with human beings, never to engage in trade, never to make use of money--had not these been among the earliest resolutions passed at that first triumphant Meeting after Jones was expelled? All the animals remembered passing such resolutions: or at least they thought that they remembered it. The four young pigs who had protested when Napoleon abolished the Meetings raised their voices timidly, but they were promptly silenced by a tremendous growling from the dogs. Then, as usual, the sheep broke into "Four legs good, two legs bad!" and the momentary awkwardness was smoothed over. Finally Napoleon raised his trotter for silence and announced that he had already made all the arrangements. There would be no need for any of the animals to come in contact with human beings, which would clearly be most undesirable. He intended to take the whole burden upon his own shoulders. A Mr. Whymper, a solicitor living in Willingdon, had agreed to act as intermediary between Animal Farm and the outside world, and would visit the farm every Monday morning to receive his instructions. Napoleon ended his speech with his usual cry of "Long live Animal Farm!" and after the singing of 'Beasts of England' the animals were dismissed.<br> 다시 한번 동물들은 모호한 불안감을 의식했다. 인간들과 결코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는 것, 결코 무역에 종사하지 않는 것, 결코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것들이 존스가 쫓겨난 후 그 첫 번째 승리감에 넘쳤던 회의(Meeting)에서 통과된 가장 초기 결의안들에 속해 있지 않았던가? 모든 동물은 그러한 결의안들을 통과시켰던 것을 기억했다. 또는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회의를 폐지했을 때 항의했었던 네 마리의 젊은 돼지들이 소심하게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들은 개들로부터 들려온 엄청난 으르렁거림에 의해 즉각 침묵 당했다. 그러고 나서, 늘 그렇듯이, 양들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를 갑자기 부르기 시작했고, 순간적인 어색함은 부드럽게 넘어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은 침묵을 위해 자신의 앞발(trotter)을 들어 올렸고 자신이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발표했다. 동물들 중 누구도 인간들과 접촉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전체 부담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질 의도였다. 윌링던에 살고 있는 사무변호사(solicitor)인 와이퍼 씨(Mr. Whymper)가 동물농장과 외부 세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자신의 지시사항들을 받기 위해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농장을 방문할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늘 하던 외침인 "동물농장 만세!"로 연설을 끝냈고, '영국의 동물들(Beasts of England)'을 부른 후 동물들은 해산되었다. Afterwards Squealer made a round of the farm and set the animals' minds at rest. He assured them that the resolution against engaging in trade and using money had never been passed, or even suggested. It was pure imagination, probably traceable in the beginning to lies circulated by Snowball. A few animals still felt faintly doubtful, but Squealer asked them shrewdly, "Are you certain that this is not something that you have dreamed, comrades? Have you any record of such a resolution? Is it written down anywhere?" And since it was certainly true that nothing of the kind existed in writing, the animals were satisfied that they had been mistaken. <br> 나중에 스퀼러는 농장을 한 바퀴 돌며 동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는 무역에 참여하고 돈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결의안은 결코 통과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제안된 적도 없었다고 그들에게 확언했다. 그것은 순전한 상상이었으며, 아마도 처음에 스노볼에 의해 유포된 거짓말들로 추적 가능한(기인한) 것이었다. 몇몇 동물들은 여전히 희미하게 의심스럽게 느꼈으나, 스퀼러는 그들에게 기민하게 물었다. "동무들, 이것이 여러분이 꿈꾸었던 어떤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그러한 결의안의 어떤 기록이라도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어딘가에 적혀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도 서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히 사실이었기 때문에, 동물들은 자신들이 착각했었다는 것에 만족했다(납득했다). Every Monday Mr. Whymper visited the farm as had been arranged. He was a sly-looking little man with side whiskers, a solicitor in a very small way of business, but sharp enough to have realised earlier than anyone else that Animal Farm would need a broker and that the commissions would be worth having. The animals watched his coming and going with a kind of dread, and avoided him as much as possible. Nevertheless, the sight of Napoleon, on all fours, delivering orders to Whymper, who stood on two legs, roused their pride and partly reconciled them to the new arrangement. Their relations with the human race were now not quite the same as they had been before. The human beings did not hate Animal Farm any less now that it was prospering; indeed, they hated it more than ever. Every human being held it as an article of faith that the farm would go bankrupt sooner or later, and, above all, that the windmill would be a failure. They would meet in the public-houses and prove to one another by means of diagrams that the windmill was bound to fall down, or that if it did stand up, then that it would never work. And yet, against their will, they had developed a certain respect for the efficiency with which the animals were managing their own affairs. One symptom of this was that they had begun to call Animal Farm by its proper name and ceased to pretend that it was called the Manor Farm. They had also dropped their championship of Jones, who had given up hope of getting his farm back and gone to live in another part of the county. Except through Whymper, there was as yet no contact between Animal Farm and the outside world, but there were constant rumours that Napoleon was about to enter into a definite business agreement either with Mr. Pilkington of Foxwood or with Mr. Frederick of Pinchfield--but never, it was noticed, with both simultaneously. <br> 매주 월요일마다 와이퍼 씨는 약속되었던 대로 농장을 방문했다. 그는 구수나룻을 기른 교활해 보이는 작은 남자였는데, 매우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하는 변호사(법률 대리인)였으나, 동물농장이 중개인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점과 그 수수료가 챙길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그 누구보다 일찍 깨달을 만큼 충분히 날카로웠다. 동물들은 일종의 공포를 가지고 그의 오고 감을 지켜보았고, 가능한 한 그를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로 서 있는 와이퍼에게 네 다리로 서서 명령들을 내리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그들의 자부심을 깨웠고 새로운 합의에 그들을 부분적으로 화해시켰다(받아들이게 했다).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는 이제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동물농장이 번창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 미워하지 않았으며, 참으로 그것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미워했다. 모든 인간은 그 농장이 조만간 파산할 것이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풍차가 실패작이 될 것이라는 점을 하나의 신앙 조항(확고한 믿음)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선술집들에 모여 도표들을 수단으로 삼아 풍차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거나, 혹은 그것이 설령 서 있는다 해도 결코 작동하지 않을 것임을 서로에게 증명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그들은 동물들이 자신들의 일들을 관리하고 있는 그 효율성에 대해 어떤 존경심을 발전시켰다. 이것의 한 가지 증상은 그들이 동물농장을 그것의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매너 농장'으로 불린다고 가장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또한 존스에 대한 옹호를 철회했는데, 존스는 자신의 농장을 되찾을 희망을 포기하고 그 군의 다른 지역으로 가 살고 있었다. 와이퍼를 통하는 것 외에는, 동물농장과 외부 세계 사이에 아직 아무런 접촉이 없었으나, 나폴레옹이 폭스우드의 필킹턴 씨나 핀치필드의 프레더릭 씨 중 어느 한쪽과 확실한 사업 계약을 체결하기 직전이라는 지속적인 소문들이 있었는데—주목할 만하게도, 결코 양쪽 동시에 하지는 않았다. It was about this time that the pigs suddenly moved into the farmhouse and took up their residence there. Again the animals seemed to remember that a resolution against this had been passed in the early days, and again Squealer was able to convince them that this was not the case. It was absolutely necessary, he said, that the pigs, who were the brains of the farm, should have a quiet place to work in. It was also more suited to the dignity of the Leader (for of late he had taken to speaking of Napoleon under the title of "Leader") to live in a house than in a mere sty. Nevertheless, some of the animals were disturbed when they heard that the pigs not only took their meals in the kitchen and used the drawing-room as a recreation room, but also slept in the beds. Boxer passed it off as usual with "Napoleon is always right!", but Clover, who thought she remembered a definite ruling against beds, went to the end of the barn and tried to puzzle out the Seven Commandments which were inscribed there. Finding herself unable to read more than individual letters, she fetched Muriel.<br> 돼지들이 갑자기 본채로 이사를 가 그곳에 자신들의 거처를 잡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또다시 동물들은 이것에 반대하는 결의안이 초기에 통과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다시 스퀼러는 그들에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납득시킬 수 있었다. 농장의 두뇌들인 돼지들이 일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가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한낱 돼지우리보다 집에서 사는 것이 지도자의 위엄에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요즈음 그는 "지도자"라는 타이틀 아래 나폴레옹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물들은 돼지들이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거실을 오락실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침대들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동요했다. 복서는 늘 그렇듯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로 그것을 가볍게 넘겼으나, 침대들에 반대하는 명확한 규정을 기억한다고 생각한 클로버는 헛간 끝으로 가서 그곳에 새겨져 있는 칠계명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스스로 개별적인 글자들 이상은 읽을 수 없음을 발견하고, 그녀는 뮤리엘을 데려왔다. "Muriel," she said, "read me the Fourth Commandment. Does it not say something about never sleeping in a bed?"<br> "뮤리엘," 그녀가 말했다, "나에게 제4계명을 읽어줘. 침대에서 결코 자지 말라는 것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지 않니?" With some difficulty Muriel spelt it out.<br> 얼마간의 어려움을 겪으며 뮤리엘은 그것을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다. "It says, '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with sheets,"' she announced finally.<br> "그것은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깐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어," 그녀가 마침내 발표했다.<br> Curiously enough, Clover had not remembered that the Fourth Commandment mentioned sheets; but as it was there on the wall, it must have done so. And Squealer, who happened to be passing at this moment, attended by two or three dogs, was able to put the whole matter in its proper perspective.<br> 신기하게도 클로버는 네 번째 계명에 시트가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벽에 적혀 있었으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마침 그때 두세 마리의 개를 데리고 지나가던 스퀼러는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You have heard then, comrades," he said, "that we pigs now sleep in the beds of the farmhouse? And why not? You did not suppose, surely, that there was ever a ruling against beds? A bed merely means a place to sleep in. A pile of straw in a stall is a bed, properly regarded. The rule was against sheets, which are a human invention. We have removed the sheets from the farmhouse beds, and sleep between blankets. And very comfortable beds they are too! But not more comfortable than we need, I can tell you, comrades, with all the brainwork we have to do nowadays. You would not rob us of our repose, would you, comrades? You would not have us too tired to carry out our duties? Surely none of you wishes to see Jones back?"<br> "그렇다면 동무들, 여러분은 우리 돼지들이 이제 본채의 침대들에서 잔다는 것을 들었군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설마 여러분은 침대들에 반대하는 규정이 전부터 있었다고 가정하지는 않았겠지요? 침대는 단지 안에서 잠을 자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마구간에 있는 짚더미도 적절히 간주된다면 침대입니다. 그 규칙은 인간의 발명품인 시트들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본채의 침대들로부터 시트들을 제거했고, 담요들 사이에서 잡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매우 편안한 침대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무들, 요즈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그 모든 두뇌 노동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편안하지는 않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휴식을 빼앗지 않으시겠지요, 동무들? 우리의 직무들을 수행하기에 우리가 너무 피곤해지도록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설마 여러분 중 그 누구도 존스가 돌아오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시겠지요?" The animals reassured him on this point immediately, and no more was said about the pigs sleeping in the farmhouse beds. And when, some days afterwards, it was announced that from now on the pigs would get up an hour later in the mornings than the other animals, no complaint was made about that either.<br> 동물들은 이 점에 대해 그를 즉각 안심시켰고, 돼지들이 본채의 침대들에서 자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이제부터 앞으로 돼지들은 아침에 다른 동물들보다 한 시간 더 늦게 일어날 것이라고 발표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런 불평이 제기되지 않았다.<ref>'존스의 복귀'라는 협박에 동물들이 즉각 굴복하고, 계속해서 돼지들의 특권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씁쓸한 장면의 절정이 묘사되고있다.</ref> By the autumn the animals were tired but happy. They had had a hard year, and after the sale of part of the hay and corn, the stores of food for the winter were none too plentiful, but the windmill compensated for everything. It was almost half built now. After the harvest there was a stretch of clear dry weather, and the animals toiled harder than ever, thinking it well worth while to plod to and fro all day with blocks of stone if by doing so they could raise the walls another foot. Boxer would even come out at nights and work for an hour or two on his own by the light of the harvest moon. In their spare moments the animals would walk round and round the half-finished mill, admiring the strength and perpendicularity of its walls and marvelling that they should ever have been able to build anything so imposing. Only old Benjamin refused to grow enthusiastic about the windmill, though, as usual, he would utter nothing beyond the cryptic remark that donkeys live a long time.<br> 가을 무렵에 동물들은 지쳤지만 행복했다. 그들은 힘든 한 해를 보냈었고, 건초와 곡물 일부를 판매한 후여서 (물론)겨울을 위한 식량 비축량은 전혀 풍족하지 않았지만, 풍차가 모든 것을 보상해 주었다. 그것은 이제 거의 절반쯤 지어진 상태였다. 수확기 이후에 맑고 건조한 날씨가 한동안 이어졌고, 동물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벽을 또 1피트 높일 수만 있다면 온종일 돌덩이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터덜터덜 걷는 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고되게 일했다. 복서는 심지어 밤에도 나와서 추석 달(수확달, harvest moon)의 불빛 아래에서 혼자 한두 시간 동안 일하곤 했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동물들은 반쯤 완성된 풍차 주위를 돌고 또 돌며, 그것의 벽이 가진 튼튼함과 수직성(perpendicularity)에 감탄했고 자신들이 그토록 당당한 것을 건축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오직 늙은 벤자민만이 풍차에 대해 열광하기를 거부했는데, 비록 늘 그렇듯이 당나귀들은 오래 산다는 그 수수께끼 같은 말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려 했지만 말이다. November came, with raging south-west winds. Building had to stop because it was now too wet to mix the cement. Finally there came a night when the gale was so violent that the farm buildings rocked on their foundations and several tiles were blown off the roof of the barn. The hens woke up squawking with terror because they had all dreamed simultaneously of hearing a gun go off in the distance. In the morning the animals came out of their stalls to find that the flagstaff had been blown down and an elm tree at the foot of the orchard had been plucked up like a radish. They had just noticed this when a cry of despair broke from every animal's throat. A terrible sight had met their eyes. The windmill was in ruins.<br> 사나운 남서풍과 함께 11월이 왔다. 이제는 시멘트를 섞기에 너무 축축했기 때문에 건축은 중단되어야만 했다. 마침내 돌풍이 너무나 격렬하여 농장 건물들이 그들의 토대 위에서 흔들렸고 헛간 지붕으로부터 몇 장의 기와가 날아갔던 어느 밤이 왔다. 암탉들은 자신들이 동시에 멀리서 총이 발사되는 소리를 듣는 꿈을 모두 꿨었기 때문에 공포로 꼬꼬댁거리며 깨어났다. 아침에 동물들은 자신들의 마구간(우리)에서 나와 깃대가 바람에 쓰러졌고 과수원 발치에 있던 느릅나무 한 그루가 무처럼 뽑혀 나간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막 이것을 알아차렸을 때, 모든 동물의 목구멍으로부터 절망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끔찍한 광경이 그들의 눈에 맞닥뜨려졌다. 풍차가 폐허로 변해 있었다. With one accord they dashed down to the spot. Napoleon, who seldom moved out of a walk, raced ahead of them all. Yes, there it lay, the fruit of all their struggles, levelled to its foundations, the stones they had broken and carried so laboriously scattered all around. Unable at first to speak, they stood gazing mournfully at the litter of fallen stone. Napoleon paced to and fro in silence, occasionally snuffing at the ground. His tail had grown rigid and twitched sharply from side to side, a sign in him of intense mental activity. Suddenly he halted as though his mind were made up.<br> 한마음 한뜻으로 그들은 그 현장으로 돌진했다. 걸음걸이 밖으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거의 뛰지 않던) 나폴레옹이 그들 모두의 앞을 질러 달렸다. 그랬다, 그곳에 그것이, 그들의 모든 투쟁의 결실이 그것의 토대까지 평평해진 채(완전히 주저앉은 채) 누워 있었고, 그들이 그토록 힘들게 부수고 운반했던 돌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들은 떨어진 돌의 쓰레기더미(잔해)를 슬프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폴레옹은 가끔 땅을 킁킁거리며 냄새 맡으면서 침묵 속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의 꼬리는 빳빳해져 있었고 좌우로 날카롭게 경련하듯 흔들렸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강렬한 정신적 활동의 징후였다. 갑자기 그는 마치 그의 마음이 결정된 것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Comrades," he said quietly, "do you know who is responsible for this? Do you know the enemy who has come in the night and overthrown our windmill? SNOWBALL!" he suddenly roared in a voice of thunder. "Snowball has done this thing! In sheer malignity, thinking to set back our plans and avenge himself for his ignominious expulsion, this traitor has crept here under cover of night and destroyed our work of nearly a year. Comrades, here and now I pronounce the death sentence upon Snowball. 'Animal Hero, Second Class,' and half a bushel of apples to any animal who brings him to justice. A full bushel to anyone who captures him alive!"<br> "동무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누가 이것에 책임이 있는지 여러분은 압니까? 밤중에 와서 우리의 풍차를 무너뜨린 그 원수를 여러분은 압니까? 스노볼입니다!" 그가 갑자기 천둥 같은 목소리로 포효했다. "스노볼이 이 짓을 저질렀습니다! 순전한 악의에서, 우리의 계획들을 뒤로 미루고 자신의 수치스러운 축출에 대해 스스로 복수하겠다고 생각하며, 이 반역자가 밤의 장막을 틈타 이곳으로 기어 들어와 우리의 거의 1년간의 노작을 파괴했습니다. 동무들, 여기 그리고 지금 나는 스노볼에게 사형 선고를 언도합니다. 그를 심판대 앞으로 데려오는(생포하거나 사살하는) 어떤 동물에게든 '동물 영웅, 제2급' 훈장과 사과 반 부셸을, 그를 산 채로 잡는 누구에게든 온전한 한 부셸을 마땅히 지급하겠습니다!" The animals were shocked beyond measure to learn that even Snowball could be guilty of such an action. There was a cry of indignation, and everyone began thinking out ways of catching Snowball if he should ever come back. Almost immediately the footprints of a pig were discovered in the grass at a little distance from the knoll. They could only be traced for a few yards, but appeared to lead to a hole in the hedge. Napoleon snuffed deeply at them and pronounced them to be Snowball's. He gave it as his opinion that Snowball had probably come from the direction of Foxwood Farm. <br> 동물들은 스노볼조차도 그러한 행위의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측정할 수 없을 만큼(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분개한 외침이 있었고, 모두가 만약 스노볼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를 잡을 방법들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거의 즉각적으로, 그 언덕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풀밭에서 돼지의 발자국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오직 몇 야드 동안만 추적될 수 있었으나, 울타리에 있는 구멍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은 그것들을 깊게 킁킁거리며 냄새 맡았고 그것들을 스노볼의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스노볼이 아마도 폭스우드 농장 방향에서 왔었을 것이라는 점을 자신의 의견으로 제시했다. "No more delays, comrades!" cried Napoleon when the footprints had been examined. "There is work to be done. This very morning we begin rebuilding the windmill, and we will build all through the winter, rain or shine. We will teach this miserable traitor that he cannot undo our work so easily. Remember, comrades, there must be no alteration in our plans: they shall be carried out to the day. Forward, comrades! Long live the windmill! Long live Animal Farm!" <br> "더 이상의 지체는 없습니다, 동무들!" 발자국들에 대한 조사가 끝났을 때 나폴레옹이 외쳤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 우리는 풍차를 재건하기 시작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날씨가 좋든 흐리든) 겨울 내내 건축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참한 반역자에게 그가 우리의 노작을 그렇게 쉽게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동무들, 우리의 계획들에는 어떤 변경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당일에(예정된 날짜에 딱 맞춰) 완수될 것입니다. 앞으로, 동무들! 풍차여 영원하라! 동물농장이여 영원하라!" Chapter VII 제7장 It was a bitter winter. The stormy weather was followed by sleet and snow, and then by a hard frost which did not break till well into February. The animals carried on as best they could with the rebuilding of the windmill, well knowing that the outside world was watching them and that the envious human beings would rejoice and triumph if the mill were not finished on time.<br> 그것은 혹독한 겨울이었다. 폭풍우 치는 날씨 뒤에 진눈깨비와 눈이 이어졌고, 그다음에는 2월 안으로 꽤 들어설 때까지도 꺾이지 않았던 심한 서리(강추위)가 이어졌다. 동물들은 외부 세계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과 만약 풍차가 제시간에 완공되지 않는다면 질투심 많은 인간들이 기뻐하고 의기양양해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풍차의 재건을 계속해 나갔다. Out of spite, the human beings pretended not to believe that it was Snowball who had destroyed the windmill: they said that it had fallen down because the walls were too thin. The animals knew that this was not the case. Still, it had been decided to build the walls three feet thick this time instead of eighteen inches as before, which meant collecting much larger quantities of stone. For a long time the quarry was full of snowdrifts and nothing could be done. Some progress was made in the dry frosty weather that followed, but it was cruel work, and the animals could not feel so hopeful about it as they had felt before. They were always cold, and usually hungry as well. Only Boxer and Clover never lost heart. Squealer made excellent speeches on the joy of service and the dignity of labour, but the other animals found more inspiration in Boxer's strength and his never-failing cry of "I will work harder!"<br> 앙심(원한) 때문에, 인간들은 풍차를 파괴한 것이 스노볼이라는 것(그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나폴레옹의 말을)을 믿지 않는 척했습니다. 그들은 벽이 너무 얇았기 때문에 풍차가 무너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동물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벽의 두께를 이전의 18인치 대신 3피트 두께로 짓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훨씬 더 많은 양의 돌을 모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채석장은 눈더미로 가득 차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건조하고 매서운 추위의 날씨 속에 약간의 진척이 있었지만, 그것은 가혹한 노동이었고, 동물들은 이전만큼 그것에 대해 희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추웠고, 대개 배가 고프기도 했습니다. 오직 복서와 클로버만이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스퀼러는 봉사의 기쁨과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훌륭한 연설들을 해댔지만, 다른 동물들은 복서의 힘과 "내가 더 열심히 하겠다!"라는 그의 절대 멈추지 않는 외침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In January food fell short. The corn ration was drastically reduced, and it was announced that an extra potato ration would be issued to make up for it. Then it was discovered that the greater part of the potato crop had been frosted in the clamps, which had not been covered thickly enough. The potatoes had become soft and discoloured, and only a few were edible. For days at a time the animals had nothing to eat but chaff and mangels. Starvation seemed to stare them in the face.<br> 1월에 식량이 부족해졌습니다. 옥수수 배급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추가적인 감자 배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발표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감자 수확물의 대부분이 저장 더미 속에서 얼어버렸다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저장 더미들이 충분히 두껍게 덮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자들은 부드러워지고(물러지고) 변색되었으며, 오직 극히 일부만이 먹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번에 며칠 동안 동물들은 왕겨와 사료용 무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굶주림이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듯했습니다(굶주림이 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습니다). It was vitally necessary to conceal this fact from the outside world. Emboldened by the collapse of the windmill, the human beings were inventing fresh lies about Animal Farm. Once again it was being put about that all the animals were dying of famine and disease, and that they were continually fighting among themselves and had resorted to cannibalism and infanticide. Napoleon was well aware of the bad results that might follow if the real facts of the food situation were known, and he decided to make use of Mr. Whymper to spread a contrary impression. Hitherto the animals had had little or no contact with Whymper on his weekly visits: now, however, a few selected animals, mostly sheep, were instructed to remark casually in his hearing that rations had been increased. In addition, Napoleon ordered the almost empty bins in the store-shed to be filled nearly to the brim with sand, which was then covered up with what remained of the grain and meal. On some suitable pretext Whymper was led through the store-shed and allowed to catch a glimpse of the bins. He was deceived, and continued to report to the outside world that there was no food shortage on Animal Farm.<br> 이 사실을 외부 세계로부터 숨기는 것은 치명적으로(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풍차의 붕괴로 대담해진 인간들은 동물농장에 대한 새로운 거짓말들을 지어내고 있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그들이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동족 상잔(서로를 잡아먹는 짓)과 영아 살해(새끼를 죽이는 짓)를 일삼고 있다는 소문이 다시 한번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식량 상황의 진짜 사실들이 알려질 경우 뒤따를지 모르는 나쁜 결과들을 잘 알고 있었고, 정반대의 인상을 퍼뜨리기 위해 와이퍼 씨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 동물들은 매주 방문하는 와이퍼와 접촉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으나, 이제는 주로 양들로 구성된 엄선된 몇몇 동물들이 그의 귀에 들리도록 배급량이 늘어났다고 무심코 한마디씩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창고 건물의 거의 비어 있는 저장통들을 모래로 거의 맨 위 테두리까지 채우게 한 뒤, 그 위를 남은 곡물과 가루로 덮도록 명령했습니다. 적절한 어떤 구실을 대어 와이퍼를 창고 건물로 인도했고 그 저장통들을 언뜻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속아 넘어갔고, 동물농장에는 식량 부족이 없다고 외부 세계에 계속해서 보고했습니다. Nevertheless, towards the end of January it became obvious that it would be necessary to procure some more grain from somewhere. In these days Napoleon rarely appeared in public, but spent all his time in the farmhouse, which was guarded at each door by fierce-looking dogs. When he did emerge, it was in a ceremonial manner, with an escort of six dogs who closely surrounded him and growled if anyone came too near. Frequently he did not even appear on Sunday mornings, but issued his orders through one of the other pigs, usually Squealer.<br>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 말 무렵에 어딘가로부터 곡물을 좀 더 조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습니다. 이 당시에 나폴레옹은 대중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각 문마다 사납게 생긴 개들이 지키고 있는 농장 주택 안에서 그의 모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그를 밀착하여 에워싸고 누군가 너무 가까이 오면 으르렁거리는 여섯 마리 개들의 호위를 받는 의식적인(엄숙한) 방식이었습니다. 자주 그는 심지어 일요일 아침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돼지들 중 한 마리, 보통은 스퀼러를 통해 그의 명령들을 내렸습니다. One Sunday morning Squealer announced that the hens, who had just come in to lay again, must surrender their eggs. Napoleon had accepted, through Whymper, a contract for four hundred eggs a week. The price of these would pay for enough grain and meal to keep the farm going till summer came on and conditions were easier.<br> 어느 일요일 아침, 스퀼러는 이제 막 다시 알을 낳기 시작한 암탉들이 자신들의 달걀을 내놓아야(바쳐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와이퍼를 통해 일주일에 400개씩의 달걀을 제공하는 계약을 수락한 상태였습니다. 이것들의 가격(대금)은 여름이 오고 상황이 더 수월해질 때까지 농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곡물과 가루 값을 치러줄 것이었습니다. When the hens heard this, they raised a terrible outcry. They had been warned earlier that this sacrifice might be necessary, but had not believed that it would really happen. They were just getting their clutches ready for the spring sitting, and they protested that to take the eggs away now was murder.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expulsion of Jones, there was something resembling a rebellion. Led by three young Black Minorca pullets, the hens made a determined effort to thwart Napoleon's wishes. Their method was to fly up to the rafters and there lay their eggs, which smashed to pieces on the floor. Napoleon acted swiftly and ruthlessly. He ordered the hens' rations to be stopped, and decreed that any animal giving so much as a grain of corn to a hen should be punished by death. The dogs saw to it that these orders were carried out. For five days the hens held out, then they capitulated and went back to their nesting boxes. Nine hens had died in the meantime. Their bodies were buried in the orchard, and it was given out that they had died of coccidiosis. Whymper heard nothing of this affair, and the eggs were duly delivered, a grocer's van driving up to the farm once a week to take them away.<br> 암탉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끔찍한 비명을 질렀습니다(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이러한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았었으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들은 봄철의 부화를 위해 막 한 번에 낳는 알들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지금 달걀들을 빼앗아 가는 것은 살인이라고 항의했습니다. 존스가 쫓겨난 이후 처음으로, 반란과 유사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세 마리의 젊은 검은색 미노르카 영계(햇닭)들을 선두로 하여, 암탉들은 나폴레옹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단호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서까래 위로 날아올라 그곳에서 알을 낳는 것이었고, 그 알들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폴레옹은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암탉들의 배급량을 중단하도록 명령했고, 암탉에게 옥수수 한 알이라도 주는 어떤 동물도 사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포고했습니다. 개들이 이 명령들이 실행되는지 감시했습니다(확실히 해두었습니다). 5일 동안 암탉들은 버텼으나, 그 후 항복하고 자신들의 둥지 상자로 돌아갔습니다. 그동안 아홉 마리의 암탉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사체는 과수원에 묻혔고, 그들이 콕시듐증(가금류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와이퍼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달걀들은 정해진 대로 납품되었으며, 식료품점 화물차가 일주일에 한 번씩 농장으로 운전해 와서 그것들을 가져갔습니다. All this while no more had been seen of Snowball. He was rumoured to be hiding on one of the neighbouring farms, either Foxwood or Pinchfield. Napoleon was by this time on slightly better terms with the other farmers than before. It happened that there was in the yard a pile of timber which had been stacked there ten years earlier when a beech spinney was cleared. It was well seasoned, and Whymper had advised Napoleon to sell it; both Mr. Pilkington and Mr. Frederick were anxious to buy it. Napoleon was hesitating between the two, unable to make up his mind. It was noticed that whenever he seemed on the point of coming to an agreement with Frederick, Snowball was declared to be in hiding at Foxwood, while, when he inclined toward Pilkington, Snowball was said to be at Pinchfield.<br> 이 기간 내내 스노볼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웃한 농장들 중 하나인 폭스우드나 핀치필드 중 한 곳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무렵 다른 농장주들과 이전보다 약간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마당에는 10년 전 너도밤나무 숲을 개간할 때 쌓아두었던 목재 더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 건조되어 있었고, 와이퍼는 나폴레옹에게 그것을 팔라고 조언했습니다. 필킹턴 씨와 프레더릭 씨 모두 그것을 몹시 사고 싶어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둘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프레더릭과 합의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스노볼은 폭스우드에 숨어 있다고 선언되는 반면, 그가 필킹턴 쪽으로 기울 때면 스노볼은 핀치필드에 있다고 말해진다는 것이 주목되었습니다(동물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Suddenly, early in the spring, an alarming thing was discovered. Snowball was secretly frequenting the farm by night! The animals were so disturbed that they could hardly sleep in their stalls. Every night, it was said, he came creeping in under cover of darkness and performed all kinds of mischief. He stole the corn, he upset the milk-pails, he broke the eggs, he trampled the seedbeds, he gnawed the bark off the fruit trees. Whenever anything went wrong it became usual to attribute it to Snowball. If a window was broken or a drain was blocked up, someone was certain to say that Snowball had come in the night and done it, and when the key of the store-shed was lost, the whole farm was convinced that Snowball had thrown it down the well. Curiously enough, they went on believing this even after the mislaid key was found under a sack of meal. The cows declared unanimously that Snowball crept into their stalls and milked them in their sleep. The rats, which had been troublesome that winter, were also said to be in league with Snowball.<br> 갑자기, 이른 봄에, 놀라운(우려스러운) 일이 발견되었습니다. 스노볼이 밤마다 비밀리에 농장에 드나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물들은 너무나 동요하여(불안해서) 자신들의 외양간에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일 밤 그는 어둠을 틈타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 온갖 종류의 악질적인 장난(해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옥수수를 훔쳤고, 우유 양동이를 엎질렀으며, 달걀을 깨뜨렸고, 씨앗 침대(묘상)를 짓밟았으며, 과일나무의 껍질을 갉아 먹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스노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예삿일이 되었습니다. 창문이 깨지거나 배수구가 막히면, 누군가는 틀림없이 스노볼이 밤에 찾아와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고, 창고 건물의 열쇠를 분실했을 때는 농장 전체가 스노볼이 그것을 우물 속에 던져버린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참으로 기묘하게도, 그들은 잘못 놓아두었던 열쇠가 곡물 가루 포대 밑에서 발견된 후에도 이 사실을 계속해서 믿었습니다. 암소들은 스노볼이 자신들이 잠든 사이에 외양간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 자신들의 젖을 짰다고 만장일치로 선언했습니다. 그해 겨울 골칫거리였던 쥐들 역시 스노볼과 동맹을 맺고(한패가 되고) 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Napoleon decreed that there should be a full investigation into Snowball's activities. With his dogs in attendance he set out and made a careful tour of inspection of the farm buildings, the other animals following at a respectful distance. At every few steps Napoleon stopped and snuffed the ground for traces of Snowball's footsteps, which, he said, he could detect by the smell. He snuffed in every corner, in the barn, in the cow-shed, in the henhouses, in the vegetable garden, and found traces of Snowball almost everywhere. He would put his snout to the ground, give several deep sniffs, ad exclaim in a terrible voice, "Snowball! He has been here! I can smell him distinctly!" and at the word "Snowball" all the dogs let out blood-curdling growls and showed their side teeth.<br>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활동들에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포고했습니다. 그의 개들을 대동하고 그는 출발하여 농장 건물들을 주의 깊게 시찰하는 순복을 했으며, 다른 동물들은 경의를 표하는(조심스러운)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나폴레옹은 멈춰 서서 스노볼의 발자국 흔적을 찾기 위해 땅의 냄새를 맡았는데, 그 발자국들을 냄새로 감지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모든 구석구석, 즉 헛간, 외양간, 닭장, 채소밭에서 냄새를 맡았고 거의 모든 곳에서 스노볼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주둥이를 땅에 대고 몇 번 깊게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끔찍한 목소리로 "스노볼이다! 그가 여기 왔었어! 그놈 냄새가 분명하게 나!" 하고 외치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노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모든 개들은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소름 끼치는) 으르렁거림을 내뱉으며 그들의 송곳니(옆니)를 드러냈습니다. The animals were thoroughly frightened. It seemed to them as though Snowball were some kind of invisible influence, pervading the air about them and menacing them with all kinds of dangers. In the evening Squealer called them together, and with an alarmed expression on his face told them that he had some serious news to report.<br> 동물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마치 스노볼이 자신들 주변의 공기 속에 스며들어 온갖 종류의 위험으로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유령 같은 존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녁에 스퀼러는 그들을 한데 불러 모았고, 그의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스퀼러)이 (동물들에게) 보고할 심각한 소식이 있다고 그들(동물들)에게 말했습니다. "Comrades!" cried Squealer, making little nervous skips, "a most terrible thing has been discovered. Snowball has sold himself to Frederick of Pinchfield Farm, who is even now plotting to attack us and take our farm away from us! Snowball is to act as his guide when the attack begins. But there is worse than that. We had thought that Snowball's rebellion was caused simply by his vanity and ambition. But we were wrong, comrades. Do you know what the real reason was? Snowball was in league with Jones from the very start! He was Jones's secret agent all the time. It has all been proved by documents which he left behind him and which we have only just discovered. To my mind this explains a great deal, comrades. Did we not see for ourselves how he attempted--fortunately without success--to get us defeated and destroyed at the Battle of the Cowshed?" The animals were stupefied. This was a wickedness far outdoing Snowball's destruction of the windmill. But it was some minutes before they could fully take it in. They all remembered, or thought they remembered, how they had seen Snowball charging ahead of them at the Battle of the Cowshed, how he had rallied and encouraged them at every turn, and how he had not paused for an instant even when the pellets from Jones's gun had wounded his back. At first it was a little difficult to see how this fitted in with his being on Jones's side. Even Boxer, who seldom asked questions, was puzzled. He lay down, tucked his fore hoofs beneath him, shut his eyes, and with a hard effort managed to formulate his thoughts. "I do not believe that," he said. "Snowball fought bravely at the Battle of the Cowshed. I saw him myself. Did we not give him 'Animal Hero, first Class,' immediately afterwards?" "That was our mistake, comrade. For we know now--it is all written down in the secret documents that we have found--that in reality he was trying to lure us to our doom." "But he was wounded," said Boxer. "We all saw him running with blood." "That was part of the arrangement!" cried Squealer. "Jones's shot only grazed him. I could show you this in his own writing, if you were able to read it. The plot was for Snowball, at the critical moment, to give the signal for flight and leave the field to the enemy. And he very nearly succeeded--I will even say, comrades, he WOULD have succeeded if it had not been for our heroic Leader, Comrade Napoleon. Do you not remember how, just at the moment when Jones and his men had got inside the yard, Snowball suddenly turned and fled, and many animals followed him? And do you not remember, too, that it was just at that moment, when panic was spreading and all seemed lost, that Comrade Napoleon sprang forward with a cry of 'Death to Humanity!' and sank his teeth in Jones's leg? Surely you remember THAT, comrades?" exclaimed Squealer, frisking from side to side. Now when Squealer described the scene so graphically, it seemed to the animals that they did remember it. At any rate, they remembered that at the critical moment of the battle Snowball had turned to flee. But Boxer was still a little uneasy. "I do not believe that Snowball was a traitor at the beginning," he said finally. "What he has done since is different. But I believe that at the Battle of the Cowshed he was a good comrade." "Our Leader, Comrade Napoleon," announced Squealer, speaking very slowly and firmly, "has stated categorically--categorically, comrade--that Snowball was Jones's agent from the very beginning--yes, and from long before the Rebellion was ever thought of." "Ah, that is different!" said Boxer. "If Comrade Napoleon says it, it must be right." "That is the true spirit, comrade!" cried Squealer, but it was noticed he cast a very ugly look at Boxer with his little twinkling eyes. He turned to go, then paused and added impressively: "I warn every animal on this farm to keep his eyes very wide open. For we have reason to think that some of Snowball's secret agents are lurking among us at this moment!" Four days later, in the late afternoon, Napoleon ordered all the animals to assemble in the yard. When they were all gathered together, Napoleon emerged from the farmhouse, wearing both his medals (for he had recently awarded himself "Animal Hero, First Class", and "Animal Hero, Second Class"), with his nine huge dogs frisking round him and uttering growls that sent shivers down all the animals' spines. They all cowered silently in their places, seeming to know in advance that some terrible thing was about to happen. Napoleon stood sternly surveying his audience; then he uttered a high-pitched whimper. Immediately the dogs bounded forward, seized four of the pigs by the ear and dragged them, squealing with pain and terror, to Napoleon's feet. The pigs' ears were bleeding, the dogs had tasted blood, and for a few moments they appeared to go quite mad. To the amazement of everybody, three of them flung themselves upon Boxer. Boxer saw them coming and put out his great hoof, caught a dog in mid-air, and pinned him to the ground. The dog shrieked for mercy and the other two fled with their tails between their legs. Boxer looked at Napoleon to know whether he should crush the dog to death or let it go. Napoleon appeared to change countenance, and sharply ordered Boxer to let the dog go, whereat Boxer lifted his hoof, and the dog slunk away, bruised and howling. Presently the tumult died down. The four pigs waited, trembling, with guilt written on every line of their countenances. Napoleon now called upon them to confess their crimes. They were the same four pigs as had protested when Napoleon abolished the Sunday Meetings. Without any further prompting they confessed that they had been secretly in touch with Snowball ever since his expulsion, that they had collaborated with him in destroying the windmill, and that they had entered into an agreement with him to hand over Animal Farm to Mr. Frederick. They added that Snowball had privately admitted to them that he had been Jones's secret agent for years past. When they had finished their confession, the dogs promptly tore their throats out, and in a terrible voice Napoleon demanded whether any other animal had anything to confess. The three hens who had been the ringleaders in the attempted rebellion over the eggs now came forward and stated that Snowball had appeared to them in a dream and incited them to disobey Napoleon's orders. They, too, were slaughtered. Then a goose came forward and confessed to having secreted six ears of corn during the last year's harvest and eaten them in the night. Then a sheep confessed to having urinated in the drinking pool--urged to do this, so she said, by Snowball--and two other sheep confessed to having murdered an old ram, an especially devoted follower of Napoleon, by chasing him round and round a bonfire when he was suffering from a cough. They were all slain on the spot. And so the tale of confessions and executions went on, until there was a pile of corpses lying before Napoleon's feet and the air was heavy with the smell of blood, which had been unknown there since the expulsion of Jones. When it was all over, the remaining animals, except for the pigs and dogs, crept away in a body. They were shaken and miserable. They did not know which was more shocking--the treachery of the animals who had leagued themselves with Snowball, or the cruel retribution they had just witnessed. In the old days there had often been scenes of bloodshed equally terrible, but it seemed to all of them that it was far worse now that it was happening among themselves. Since Jones had left the farm, until today, no animal had killed another animal. Not even a rat had been killed. They had made their way on to the little knoll where the half-finished windmill stood, and with one accord they all lay down as though huddling together for warmth--Clover, Muriel, Benjamin, the cows, the sheep, and a whole flock of geese and hens--everyone, indeed, except the cat, who had suddenly disappeared just before Napoleon ordered the animals to assemble. For some time nobody spoke. Only Boxer remained on his feet. He fidgeted to and fro, swishing his long black tail against his sides and occasionally uttering a little whinny of surprise. Finally he said: "I do not understand it. I would not have believed that such things could happen on our farm. It must be due to some fault in ourselves. The solution, as I see it, is to work harder. From now onwards I shall get up a full hour earlier in the mornings." And he moved off at his lumbering trot and made for the quarry. Having got there, he collected two successive loads of stone and dragged them down to the windmill before retiring for the night. The animals huddled about Clover, not speaking. The knoll where they were lying gave them a wide prospect across the countryside. Most of Animal Farm was within their view--the long pasture stretching down to the main road, the hayfield, the spinney, the drinking pool, the ploughed fields where the young wheat was thick and green, and the red roofs of the farm buildings with the smoke curling from the chimneys. It was a clear spring evening. The grass and the bursting hedges were gilded by the level rays of the sun. Never had the farm--and with a kind of surprise they remembered that it was their own farm, every inch of it their own property--appeared to the animals so desirable a place. As Clover looked down the hillside her eyes filled with tears. If she could have spoken her thoughts, it would have been to say that this was not what they had aimed at when they had set themselves years ago to work for the overthrow of the human race. These scenes of terror and slaughter were not what they had looked forward to on that night when old Major first stirred them to rebellion. If she herself had had any picture of the future, it had been of a society of animals set free from hunger and the whip, all equal, each working according to his capacity, the strong protecting the weak, as she had protected the lost brood of ducklings with her foreleg on the night of Major's speech. Instead--she did not know why--they had come to a time when no one dared speak his mind, when fierce, growling dogs roamed everywhere, and when you had to watch your comrades torn to pieces after confessing to shocking crimes. There was no thought of rebellion or disobedience in her mind. She knew that, even as things were, they were far better off than they had been in the days of Jones, and that before all else it was needful to prevent the return of the human beings. Whatever happened she would remain faithful, work hard, carry out the orders that were given to her, and accept the leadership of Napoleon. But still, it was not for this that she and all the other animals had hoped and toiled. It was not for this that they had built the windmill and faced the bullets of Jones's gun. Such were her thoughts, though she lacked the words to express them. At last, feeling this to be in some way a substitute for the words she was unable to find, she began to sing 'Beasts of England'. The other animals sitting round her took it up, and they sang it three times over--very tunefully, but slowly and mournfully, in a way they had never sung it before. They had just finished singing it for the third time when Squealer, attended by two dogs, approached them with the air of having something important to say. He announced that, by a special decree of Comrade Napoleon, 'Beasts of England' had been abolished. From now onwards it was forbidden to sing it. The animals were taken aback. "Why?" cried Muriel. "It's no longer needed, comrade," said Squealer stiffly. "'Beasts of England' was the song of the Rebellion. But the Rebellion is now completed. The execution of the traitors this afternoon was the final act. The enemy both external and internal has been defeated. In 'Beasts of England' we expressed our longing for a better society in days to come. But that society has now been established. Clearly this song has no longer any purpose." Frightened though they were, some of the animals might possibly have protested, but at this moment the sheep set up their usual bleating of "Four legs good, two legs bad," which went on for several minutes and put an end to the discussion. So 'Beasts of England' was heard no more. In its place Minimus, the poet, had composed another song which began: Animal Farm, Animal Farm, Never through me shalt thou come to harm! and this was sung every Sunday morning after the hoisting of the flag. But somehow neither the words nor the tune ever seemed to the animals to come up to 'Beasts of England'. Chapter VIII 제8장 A few days later, when the terror caused by the executions had died down, some of the animals remembered--or thought they remembered--that the Sixth Commandment decreed "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And though no one cared to mention it in the hearing of the pigs or the dogs, it was felt that the killings which had taken place did not square with this. Clover asked Benjamin to read her the Sixth Commandment, and when Benjamin, as usual, said that he refused to meddle in such matters, she fetched Muriel. Muriel read the Commandment for her. It ran: "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WITHOUT CAUSE." Somehow or other, the last two words had slipped out of the animals' memory. But they saw now that the Commandment had not been violated; for clearly there was good reason for killing the traitors who had leagued themselves with Snowball. Throughout the year the animals worked even harder than they had worked in the previous year. To rebuild the windmill, with walls twice as thick as before, and to finish it by the appointed date, together with the regular work of the farm, was a tremendous labour. There were times when it seemed to the animals that they worked longer hours and fed no better than they had done in Jones's day. On Sunday mornings Squealer, holding down a long strip of paper with his trotter, would read out to them lists of figures proving that the production of every class of foodstuff had increased by two hundred per cent, three hundred per cent, or five hundred per cent, as the case might be. The animals saw no reason to disbelieve him, especially as they could no longer remember very clearly what conditions had been like before the Rebellion. All the same, there were days when they felt that they would sooner have had less figures and more food. All orders were now issued through Squealer or one of the other pigs. Napoleon himself was not seen in public as often as once in a fortnight. When he did appear, he was attended not only by his retinue of dogs but by a black cockerel who marched in front of him and acted as a kind of trumpeter, letting out a loud "cock-a-doodle-doo" before Napoleon spoke. Even in the farmhouse, it was said, Napoleon inhabited separate apartments from the others. He took his meals alone, with two dogs to wait upon him, and always ate from the Crown Derby dinner service which had been in the glass cupboard in the drawing-room. It was also announced that the gun would be fired every year on Napoleon's birthday, as well as on the other two anniversaries. Napoleon was now never spoken of simply as "Napoleon." He was always referred to in formal style as "our Leader, Comrade Napoleon," and this pigs liked to invent for him such titles as Father of All Animals, Terror of Mankind, Protector of the Sheep-fold, Ducklings' Friend, and the like. In his speeches, Squealer would talk with the tears rolling down his cheeks of Napoleon's wisdom the goodness of his heart, and the deep love he bore to all animals everywhere, even and especially the unhappy animals who still lived in ignorance and slavery on other farms. It had become usual to give Napoleon the credit for every successful achievement and every stroke of good fortune. You would often hear one hen remark to another, "Under the guidance of our Leader, Comrade Napoleon, I have laid five eggs in six days"; or two cows, enjoying a drink at the pool, would exclaim, "Thanks to the leadership of Comrade Napoleon, how excellent this water tastes!" The general feeling on the farm was well expressed in a poem entitled Comrade Napoleon, which was composed by Minimus and which ran as follows: Friend of fatherless! Fountain of happiness! Lord of the swill-bucket! Oh, how my soul is on Fire when I gaze at thy Calm and commanding eye, Like the sun in the sky, Comrade Napoleon! Thou are the giver of All that thy creatures love, Full belly twice a day, clean straw to roll upon; Every beast great or small Sleeps at peace in his stall, Thou watchest over all, Comrade Napoleon! Had I a sucking-pig, Ere he had grown as big Even as a pint bottle or as a rolling-pin, He should have learned to be Faithful and true to thee, Yes, his first squeak should be "Comrade Napoleon!" Napoleon approved of this poem and caused it to be inscribed on the wall of the big barn, at the opposite end from the Seven Commandments. It was surmounted by a portrait of Napoleon, in profile, executed by Squealer in white paint. Meanwhile, through the agency of Whymper, Napoleon was engaged in complicated negotiations with Frederick and Pilkington. The pile of timber was still unsold. Of the two, Frederick was the more anxious to get hold of it, but he would not offer a reasonable price. At the same time there were renewed rumours that Frederick and his men were plotting to attack Animal Farm and to destroy the windmill, the building of which had aroused furious jealousy in him. Snowball was known to be still skulking on Pinchfield Farm. In the middle of the summer the animals were alarmed to hear that three hens had come forward and confessed that, inspired by Snowball, they had entered into a plot to murder Napoleon. They were executed immediately, and fresh precautions for Napoleon's safety were taken. Four dogs guarded his bed at night, one at each corner, and a young pig named Pinkeye was given the task of tasting all his food before he ate it, lest it should be poisoned. At about the same time it was given out that Napoleon had arranged to sell the pile of timber to Mr. Pilkington; he was also going to enter into a regular agreement for the exchange of certain products between Animal Farm and Foxwood. The relations between Napoleon and Pilkington, though they were only conducted through Whymper, were now almost friendly. The animals distrusted Pilkington, as a human being, but greatly preferred him to Frederick, whom they both feared and hated. As the summer wore on, and the windmill neared completion, the rumours of an impending treacherous attack grew stronger and stronger. Frederick, it was said, intended to bring against them twenty men all armed with guns, and he had already bribed the magistrates and police, so that if he could once get hold of the title-deeds of Animal Farm they would ask no questions. Moreover, terrible stories were leaking out from Pinchfield about the cruelties that Frederick practised upon his animals. He had flogged an old horse to death, he starved his cows, he had killed a dog by throwing it into the furnace, he amused himself in the evenings by making cocks fight with splinters of razor-blade tied to their spurs. The animals' blood boiled with rage when they heard of these things being done to their comrades, and sometimes they clamoured to be allowed to go out in a body and attack Pinchfield Farm, drive out the humans, and set the animals free. But Squealer counselled them to avoid rash actions and trust in Comrade Napoleon's strategy. Nevertheless, feeling against Frederick continued to run high. One Sunday morning Napoleon appeared in the barn and explained that he had never at any time contemplated selling the pile of timber to Frederick; he considered it beneath his dignity, he said, to have dealings with scoundrels of that description. The pigeons who were still sent out to spread tidings of the Rebellion were forbidden to set foot anywhere on Foxwood, and were also ordered to drop their former slogan of "Death to Humanity" in favour of "Death to Frederick." In the late summer yet another of Snowball's machinations was laid bare. The wheat crop was full of weeds, and it was discovered that on one of his nocturnal visits Snowball had mixed weed seeds with the seed corn. A gander who had been privy to the plot had confessed his guilt to Squealer and immediately committed suicide by swallowing deadly nightshade berries. The animals now also learned that Snowball had never--as many of them had believed hitherto--received the order of "Animal Hero, First Class." This was merely a legend which had been spread some time after the Battle of the Cowshed by Snowball himself. So far from being decorated, he had been censured for showing cowardice in the battle. Once again some of the animals heard this with a certain bewilderment, but Squealer was soon able to convince them that their memories had been at fault. In the autumn, by a tremendous, exhausting effort--for the harvest had to be gathered at almost the same time--the windmill was finished. The machinery had still to be installed, and Whymper was negotiating the purchase of it, but the structure was completed. In the teeth of every difficulty, in spite of inexperience, of primitive implements, of bad luck and of Snowball's treachery, the work had been finished punctually to the very day! Tired out but proud, the animals walked round and round their masterpiece, which appeared even more beautiful in their eyes than when it had been built the first time. Moreover, the walls were twice as thick as before. Nothing short of explosives would lay them low this time! And when they thought of how they had laboured, what discouragements they had overcome, and the enormous difference that would be made in their lives when the sails were turning and the dynamos running--when they thought of all this, their tiredness forsook them and they gambolled round and round the windmill, uttering cries of triumph. Napoleon himself, attended by his dogs and his cockerel, came down to inspect the completed work; he personally congratulated the animals on their achievement, and announced that the mill would be named Napoleon Mill. Two days later the animals were called together for a special meeting in the barn. They were struck dumb with surprise when Napoleon announced that he had sold the pile of timber to Frederick. Tomorrow Frederick's wagons would arrive and begin carting it away. Throughout the whole period of his seeming friendship with Pilkington, Napoleon had really been in secret agreement with Frederick. All relations with Foxwood had been broken off; insulting messages had been sent to Pilkington. The pigeons had been told to avoid Pinchfield Farm and to alter their slogan from "Death to Frederick" to "Death to Pilkington." At the same time Napoleon assured the animals that the stories of an impending attack on Animal Farm were completely untrue, and that the tales about Frederick's cruelty to his own animals had been greatly exaggerated. All these rumours had probably originated with Snowball and his agents. It now appeared that Snowball was not, after all, hiding on Pinchfield Farm, and in fact had never been there in his life: he was living--in considerable luxury, so it was said--at Foxwood, and had in reality been a pensioner of Pilkington for years past. The pigs were in ecstasies over Napoleon's cunning. By seeming to be friendly with Pilkington he had forced Frederick to raise his price by twelve pounds. But the superior quality of Napoleon's mind, said Squealer, was shown in the fact that he trusted nobody, not even Frederick. Frederick had wanted to pay for the timber with something called a cheque, which, it seemed, was a piece of paper with a promise to pay written upon it. But Napoleon was too clever for him. He had demanded payment in real five-pound notes, which were to be handed over before the timber was removed. Already Frederick had paid up; and the sum he had paid was just enough to buy the machinery for the windmill. Meanwhile the timber was being carted away at high speed. When it was all gone, another special meeting was held in the barn for the animals to inspect Frederick's bank-notes. Smiling beatifically, and wearing both his decorations, Napoleon reposed on a bed of straw on the platform, with the money at his side, neatly piled on a china dish from the farmhouse kitchen. The animals filed slowly past, and each gazed his fill. And Boxer put out his nose to sniff at the bank-notes, and the flimsy white things stirred and rustled in his breath. Three days later there was a terrible hullabaloo. Whymper, his face deadly pale, came racing up the path on his bicycle, flung it down in the yard and rushed straight into the farmhouse. The next moment a choking roar of rage sounded from Napoleon's apartments. The news of what had happened sped round the farm like wildfire. The banknotes were forgeries! Frederick had got the timber for nothing! Napoleon called the animals together immediately and in a terrible voice pronounced the death sentence upon Frederick. When captured, he said, Frederick should be boiled alive. At the same time he warned them that after this treacherous deed the worst was to be expected. Frederick and his men might make their long-expected attack at any moment. Sentinels were placed at all the approaches to the farm. In addition, four pigeons were sent to Foxwood with a conciliatory message, which it was hoped might re-establish good relations with Pilkington. The very next morning the attack came. The animals were at breakfast when the look-outs came racing in with the news that Frederick and his followers had already come through the five-barred gate. Boldly enough the animals sallied forth to meet them, but this time they did not have the easy victory that they had had in the Battle of the Cowshed. There were fifteen men, with half a dozen guns between them, and they opened fire as soon as they got within fifty yards. The animals could not face the terrible explosions and the stinging pellets, and in spite of the efforts of Napoleon and Boxer to rally them, they were soon driven back. A number of them were already wounded. They took refuge in the farm buildings and peeped cautiously out from chinks and knot-holes. The whole of the big pasture, including the windmill, was in the hands of the enemy. For the moment even Napoleon seemed at a loss. He paced up and down without a word, his tail rigid and twitching. Wistful glances were sent in the direction of Foxwood. If Pilkington and his men would help them, the day might yet be won. But at this moment the four pigeons, who had been sent out on the day before, returned, one of them bearing a scrap of paper from Pilkington. On it was pencilled the words: "Serves you right." Meanwhile Frederick and his men had halted about the windmill. The animals watched them, and a murmur of dismay went round. Two of the men had produced a crowbar and a sledge hammer. They were going to knock the windmill down. "Impossible!" cried Napoleon. "We have built the walls far too thick for that. They could not knock it down in a week. Courage, comrades!" But Benjamin was watching the movements of the men intently. The two with the hammer and the crowbar were drilling a hole near the base of the windmill. Slowly, and with an air almost of amusement, Benjamin nodded his long muzzle. "I thought so," he said. "Do you not see what they are doing? In another moment they are going to pack blasting powder into that hole." Terrified, the animals waited. It was impossible now to venture out of the shelter of the buildings. After a few minutes the men were seen to be running in all directions. Then there was a deafening roar. The pigeons swirled into the air, and all the animals, except Napoleon, flung themselves flat on their bellies and hid their faces. When they got up again, a huge cloud of black smoke was hanging where the windmill had been. Slowly the breeze drifted it away. The windmill had ceased to exist! At this sight the animals' courage returned to them. The fear and despair they had felt a moment earlier were drowned in their rage against this vile, contemptible act. A mighty cry for vengeance went up, and without waiting for further orders they charged forth in a body and made straight for the enemy. This time they did not heed the cruel pellets that swept over them like hail. It was a savage, bitter battle. The men fired again and again, and, when the animals got to close quarters, lashed out with their sticks and their heavy boots. A cow, three sheep, and two geese were killed, and nearly everyone was wounded. Even Napoleon, who was directing operations from the rear, had the tip of his tail chipped by a pellet. But the men did not go unscathed either. Three of them had their heads broken by blows from Boxer's hoofs; another was gored in the belly by a cow's horn; another had his trousers nearly torn off by Jessie and Bluebell. And when the nine dogs of Napoleon's own bodyguard, whom he had instructed to make a detour under cover of the hedge, suddenly appeared on the men's flank, baying ferociously, panic overtook them. They saw that they were in danger of being surrounded. Frederick shouted to his men to get out while the going was good, and the next moment the cowardly enemy was running for dear life. The animals chased them right down to the bottom of the field, and got in some last kicks at them as they forced their way through the thorn hedge. They had won, but they were weary and bleeding. Slowly they began to limp back towards the farm. The sight of their dead comrades stretched upon the grass moved some of them to tears. And for a little while they halted in sorrowful silence at the place where the windmill had once stood. Yes, it was gone; almost the last trace of their labour was gone! Even the foundations were partially destroyed. And in rebuilding it they could not this time, as before, make use of the fallen stones. This time the stones had vanished too. The force of the explosion had flung them to distances of hundreds of yards. It was as though the windmill had never been. As they approached the farm Squealer, who had unaccountably been absent during the fighting, came skipping towards them, whisking his tail and beaming with satisfaction. And the animals heard, from the direction of the farm buildings, the solemn booming of a gun. "What is that gun firing for?" said Boxer. "To celebrate our victory!" cried Squealer. "What victory?" said Boxer. His knees were bleeding, he had lost a shoe and split his hoof, and a dozen pellets had lodged themselves in his hind leg. "What victory, comrade? Have we not driven the enemy off our soil--the sacred soil of Animal Farm?" "But they have destroyed the windmill. And we had worked on it for two years!" "What matter? We will build another windmill. We will build six windmills if we feel like it. You do not appreciate, comrade, the mighty thing that we have done. The enemy was in occupation of this very ground that we stand upon. And now--thanks to the leadership of Comrade Napoleon--we have won every inch of it back again!" "Then we have won back what we had before," said Boxer. "That is our victory," said Squealer. They limped into the yard. The pellets under the skin of Boxer's leg smarted painfully. He saw ahead of him the heavy labour of rebuilding the windmill from the foundations, and already in imagination he braced himself for the task. But for the first time it occurred to him that he was eleven years old and that perhaps his great muscles were not quite what they had once been. But when the animals saw the green flag flying, and heard the gun firing again--seven times it was fired in all--and heard the speech that Napoleon made, congratulating them on their conduct, it did seem to them after all that they had won a great victory. The animals slain in the battle were given a solemn funeral. Boxer and Clover pulled the wagon which served as a hearse, and Napoleon himself walked at the head of the procession. Two whole days were given over to celebrations. There were songs, speeches, and more firing of the gun, and a special gift of an apple was bestowed on every animal, with two ounces of corn for each bird and three biscuits for each dog. It was announced that the battle would be called the Battle of the Windmill, and that Napoleon had created a new decoration, the Order of the Green Banner, which he had conferred upon himself. In the general rejoicings the unfortunate affair of the banknotes was forgotten. It was a few days later than this that the pigs came upon a case of whisky in the cellars of the farmhouse. It had been overlooked at the time when the house was first occupied. That night there came from the farmhouse the sound of loud singing, in which, to everyone's surprise, the strains of 'Beasts of England' were mixed up. At about half past nine Napoleon, wearing an old bowler hat of Mr. Jones's, was distinctly seen to emerge from the back door, gallop rapidly round the yard, and disappear indoors again. But in the morning a deep silence hung over the farmhouse. Not a pig appeared to be stirring. It was nearly nine o'clock when Squealer made his appearance, walking slowly and dejectedly, his eyes dull, his tail hanging limply behind him, and with every appearance of being seriously ill. He called the animals together and told them that he had a terrible piece of news to impart. Comrade Napoleon was dying! A cry of lamentation went up. Straw was laid down outside the doors of the farmhouse, and the animals walked on tiptoe. With tears in their eyes they asked one another what they should do if their Leader were taken away from them. A rumour went round that Snowball had after all contrived to introduce poison into Napoleon's food. At eleven o'clock Squealer came out to make another announcement. As his last act upon earth, Comrade Napoleon had pronounced a solemn decree: the drinking of alcohol was to be punished by death. By the evening, however, Napoleon appeared to be somewhat better, and the following morning Squealer was able to tell them that he was well on the way to recovery. By the evening of that day Napoleon was back at work, and on the next day it was learned that he had instructed Whymper to purchase in Willingdon some booklets on brewing and distilling. A week later Napoleon gave orders that the small paddock beyond the orchard, which it had previously been intended to set aside as a grazing-ground for animals who were past work, was to be ploughed up. It was given out that the pasture was exhausted and needed re-seeding; but it soon became known that Napoleon intended to sow it with barley. About this time there occurred a strange incident which hardly anyone was able to understand. One night at about twelve o'clock there was a loud crash in the yard, and the animals rushed out of their stalls. It was a moonlit night. At the foot of the end wall of the big barn, where the Seven Commandments were written, there lay a ladder broken in two pieces. Squealer, temporarily stunned, was sprawling beside it, and near at hand there lay a lantern, a paint-brush, and an overturned pot of white paint. The dogs immediately made a ring round Squealer, and escorted him back to the farmhouse as soon as he was able to walk. None of the animals could form any idea as to what this meant, except old Benjamin, who nodded his muzzle with a knowing air, and seemed to understand, but would say nothing. But a few days later Muriel, reading over the Seven Commandments to herself, noticed that there was yet another of them which the animals had remembered wrong. They had thought the Fifth Commandment was "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but there were two words that they had forgotten. Actually the Commandment read: "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TO EXCESS." Chapter IX 제9장 Boxer's split hoof was a long time in healing. They had started the rebuilding of the windmill the day after the victory celebrations were ended. Boxer refused to take even a day off work, and made it a point of honour not to let it be seen that he was in pain. In the evenings he would admit privately to Clover that the hoof troubled him a great deal. Clover treated the hoof with poultices of herbs which she prepared by chewing them, and both she and Benjamin urged Boxer to work less hard. "A horse's lungs do not last for ever," she said to him. But Boxer would not listen. He had, he said, only one real ambition left--to see the windmill well under way before he reached the age for retirement. At the beginning, when the laws of Animal Farm were first formulated, the retiring age had been fixed for horses and pigs at twelve, for cows at fourteen, for dogs at nine, for sheep at seven, and for hens and geese at five. Liberal old-age pensions had been agreed upon. As yet no animal had actually retired on pension, but of late the subject had been discussed more and more. Now that the small field beyond the orchard had been set aside for barley, it was rumoured that a corner of the large pasture was to be fenced off and turned into a grazing-ground for superannuated animals. For a horse, it was said, the pension would be five pounds of corn a day and, in winter, fifteen pounds of hay, with a carrot or possibly an apple on public holidays. Boxer's twelfth birthday was due in the late summer of the following year. Meanwhile life was hard. The winter was as cold as the last one had been, and food was even shorter. Once again all rations were reduced, except those of the pigs and the dogs. A too rigid equality in rations, Squealer explained, would have been contrary to the principles of Animalism. In any case he had no difficulty in proving to the other animals that they were NOT in reality short of food, whatever the appearances might be. For the time being, certainly, it had been found necessary to make a readjustment of rations (Squealer always spoke of it as a "readjustment," never as a "reduction"), but in comparison with the days of Jones, the improvement was enormous. Reading out the figures in a shrill, rapid voice, he proved to them in detail that they had more oats, more hay, more turnips than they had had in Jones's day, that they worked shorter hours, that their drinking water was of better quality, that they lived longer, that a larger proportion of their young ones survived infancy, and that they had more straw in their stalls and suffered less from fleas. The animals believed every word of it. Truth to tell, Jones and all he stood for had almost faded out of their memories. They knew that life nowadays was harsh and bare, that they were often hungry and often cold, and that they were usually working when they were not asleep. But doubtless it had been worse in the old days. They were glad to believe so. Besides, in those days they had been slaves and now they were free, and that made all the difference, as Squealer did not fail to point out. There were many more mouths to feed now. In the autumn the four sows had all littered about simultaneously, producing thirty-one young pigs between them. The young pigs were piebald, and as Napoleon was the only boar on the farm, it was possible to guess at their parentage. It was announced that later, when bricks and timber had been purchased, a schoolroom would be built in the farmhouse garden. For the time being, the young pigs were given their instruction by Napoleon himself in the farmhouse kitchen. They took their exercise in the garden, and were discouraged from playing with the other young animals. About this time, too, it was laid down as a rule that when a pig and any other animal met on the path, the other animal must stand aside: and also that all pigs, of whatever degree, were to have the privilege of wearing green ribbons on their tails on Sundays. The farm had had a fairly successful year, but was still short of money. There were the bricks, sand, and lime for the schoolroom to be purchased, and it would also be necessary to begin saving up again for the machinery for the windmill. Then there were lamp oil and candles for the house, sugar for Napoleon's own table (he forbade this to the other pigs, on the ground that it made them fat), and all the usual replacements such as tools, nails, string, coal, wire, scrap-iron, and dog biscuits. A stump of hay and part of the potato crop were sold off, and the contract for eggs was increased to six hundred a week, so that that year the hens barely hatched enough chicks to keep their numbers at the same level. Rations, reduced in December, were reduced again in February, and lanterns in the stalls were forbidden to save oil. But the pigs seemed comfortable enough, and in fact were putting on weight if anything. One afternoon in late February a warm, rich, appetising scent, such as the animals had never smelt before, wafted itself across the yard from the little brew-house, which had been disused in Jones's time, and which stood beyond the kitchen. Someone said it was the smell of cooking barley. The animals sniffed the air hungrily and wondered whether a warm mash was being prepared for their supper. But no warm mash appeared, and on the following Sunday it was announced that from now onwards all barley would be reserved for the pigs. The field beyond the orchard had already been sown with barley. And the news soon leaked out that every pig was now receiving a ration of a pint of beer daily, with half a gallon for Napoleon himself, which was always served to him in the Crown Derby soup tureen. But if there were hardships to be borne, they were partly offset by the fact that life nowadays had a greater dignity than it had had before. There were more songs, more speeches, more processions. Napoleon had commanded that once a week there should be held something called a Spontaneous Demonstration, the object of which was to celebrate the struggles and triumphs of Animal Farm. At the appointed time the animals would leave their work and march round the precincts of the farm in military formation, with the pigs leading, then the horses, then the cows, then the sheep, and then the poultry. The dogs flanked the procession and at the head of all marched Napoleon's black cockerel. Boxer and Clover always carried between them a green banner marked with the hoof and the horn and the caption, "Long live Comrade Napoleon!" Afterwards there were recitations of poems composed in Napoleon's honour, and a speech by Squealer giving particulars of the latest increases in the production of foodstuffs, and on occasion a shot was fired from the gun. The sheep were the greatest devotees of the Spontaneous Demonstration, and if anyone complained (as a few animals sometimes did, when no pigs or dogs were near) that they wasted time and meant a lot of standing about in the cold, the sheep were sure to silence him with a tremendous bleating of "Four legs good, two legs bad!" But by and large the animals enjoyed these celebrations. They found it comforting to be reminded that, after all, they were truly their own masters and that the work they did was for their own benefit. So that, what with the songs, the processions, Squealer's lists of figures, the thunder of the gun, the crowing of the cockerel, and the fluttering of the flag, they were able to forget that their bellies were empty, at least part of the time. In April, Animal Farm was proclaimed a Republic, and it became necessary to elect a President. There was only one candidate, Napoleon, who was elected unanimously. On the same day it was given out that fresh documents had been discovered which revealed further details about Snowball's complicity with Jones. It now appeared that Snowball had not, as the animals had previously imagined, merely attempted to lose the Battle of the Cowshed by means of a stratagem, but had been openly fighting on Jones's side. In fact, it was he who had actually been the leader of the human forces, and had charged into battle with the words "Long live Humanity!" on his lips. The wounds on Snowball's back, which a few of the animals still remembered to have seen, had been inflicted by Napoleon's teeth. In the middle of the summer Moses the raven suddenly reappeared on the farm, after an absence of several years. He was quite unchanged, still did no work, and talked in the same strain as ever about Sugarcandy Mountain. He would perch on a stump, flap his black wings, and talk by the hour to anyone who would listen. "Up there, comrades," he would say solemnly, pointing to the sky with his large beak--"up there, just on the other side of that dark cloud that you can see--there it lies, Sugarcandy Mountain, that happy country where we poor animals shall rest for ever from our labours!" He even claimed to have been there on one of his higher flights, and to have seen the everlasting fields of clover and the linseed cake and lump sugar growing on the hedges. Many of the animals believed him. Their lives now, they reasoned, were hungry and laborious; was it not right and just that a better world should exist somewhere else? A thing that was difficult to determine was the attitude of the pigs towards Moses. They all declared contemptuously that his stories about Sugarcandy Mountain were lies, and yet they allowed him to remain on the farm, not working, with an allowance of a gill of beer a day. After his hoof had healed up, Boxer worked harder than ever. Indeed, all the animals worked like slaves that year. Apart from the regular work of the farm, and the rebuilding of the windmill, there was the schoolhouse for the young pigs, which was started in March. Sometimes the long hours on insufficient food were hard to bear, but Boxer never faltered. In nothing that he said or did was there any sign that his strength was not what it had been. It was only his appearance that was a little altered; his hide was less shiny than it had used to be, and his great haunches seemed to have shrunken. The others said, "Boxer will pick up when the spring grass comes on"; but the spring came and Boxer grew no fatter. Sometimes on the slope leading to the top of the quarry, when he braced his muscles against the weight of some vast boulder, it seemed that nothing kept him on his feet except the will to continue. At such times his lips were seen to form the words, "I will work harder"; he had no voice left. Once again Clover and Benjamin warned him to take care of his health, but Boxer paid no attention. His twelfth birthday was approaching. He did not care what happened so long as a good store of stone was accumulated before he went on pension. Late one evening in the summer, a sudden rumour ran round the farm that something had happened to Boxer. He had gone out alone to drag a load of stone down to the windmill. And sure enough, the rumour was true. A few minutes later two pigeons came racing in with the news; "Boxer has fallen! He is lying on his side and can't get up!" About half the animals on the farm rushed out to the knoll where the windmill stood. There lay Boxer, between the shafts of the cart, his neck stretched out, unable even to raise his head. His eyes were glazed, his sides matted with sweat. A thin stream of blood had trickled out of his mouth. Clover dropped to her knees at his side. "Boxer!" she cried, "how are you?" "It is my lung," said Boxer in a weak voice. "It does not matter. I think you will be able to finish the windmill without me. There is a pretty good store of stone accumulated. I had only another month to go in any case. To tell you the truth, I had been looking forward to my retirement. And perhaps, as Benjamin is growing old too, they will let him retire at the same time and be a companion to me." "We must get help at once," said Clover. "Run, somebody, and tell Squealer what has happened." All the other animals immediately raced back to the farmhouse to give Squealer the news. Only Clover remained, and Benjamin who lay down at Boxer's side, and, without speaking, kept the flies off him with his long tail. After about a quarter of an hour Squealer appeared, full of sympathy and concern. He said that Comrade Napoleon had learned with the very deepest distress of this misfortune to one of the most loyal workers on the farm, and was already making arrangements to send Boxer to be treated in the hospital at Willingdon. The animals felt a little uneasy at this. Except for Mollie and Snowball, no other animal had ever left the farm, and they did not like to think of their sick comrade in the hands of human beings. However, Squealer easily convinced them that the veterinary surgeon in Willingdon could treat Boxer's case more satisfactorily than could be done on the farm. And about half an hour later, when Boxer had somewhat recovered, he was with difficulty got on to his feet, and managed to limp back to his stall, where Clover and Benjamin had prepared a good bed of straw for him. For the next two days Boxer remained in his stall. The pigs had sent out a large bottle of pink medicine which they had found in the medicine chest in the bathroom, and Clover administered it to Boxer twice a day after meals. In the evenings she lay in his stall and talked to him, while Benjamin kept the flies off him. Boxer professed not to be sorry for what had happened. If he made a good recovery, he might expect to live another three years, and he looked forward to the peaceful days that he would spend in the corner of the big pasture. It would be the first time that he had had leisure to study and improve his mind. He intended, he said, to devote the rest of his life to learning the remaining twenty-two letters of the alphabet. However, Benjamin and Clover could only be with Boxer after working hours, and it was in the middle of the day when the van came to take him away. The animals were all at work weeding turnips under the supervision of a pig, when they were astonished to see Benjamin come galloping from the direction of the farm buildings, braying at the top of his voice. It was the first time that they had ever seen Benjamin excited--indeed, it was the first time that anyone had ever seen him gallop. "Quick, quick!" he shouted. "Come at once! They're taking Boxer away!" Without waiting for orders from the pig, the animals broke off work and raced back to the farm buildings. Sure enough, there in the yard was a large closed van, drawn by two horses, with lettering on its side and a sly-looking man in a low-crowned bowler hat sitting on the driver's seat. And Boxer's stall was empty. The animals crowded round the van. "Good-bye, Boxer!" they chorused, "good-bye!" "Fools! Fools!" shouted Benjamin, prancing round them and stamping the earth with his small hoofs. "Fools! Do you not see what is written on the side of that van?" That gave the animals pause, and there was a hush. Muriel began to spell out the words. But Benjamin pushed her aside and in the midst of a deadly silence he read: "'Alfred Simmonds, Horse Slaughterer and Glue Boiler, Willingdon. Dealer in Hides and Bone-Meal. Kennels Supplied.' Do you not understand what that means? They are taking Boxer to the knacker's!" A cry of horror burst from all the animals. At this moment the man on the box whipped up his horses and the van moved out of the yard at a smart trot. All the animals followed, crying out at the tops of their voices. Clover forced her way to the front. The van began to gather speed. Clover tried to stir her stout limbs to a gallop, and achieved a canter. "Boxer!" she cried. "Boxer! Boxer! Boxer!" And just at this moment, as though he had heard the uproar outside, Boxer's face, with the white stripe down his nose, appeared at the small window at the back of the van. "Boxer!" cried Clover in a terrible voice. "Boxer! Get out! Get out quickly! They're taking you to your death!" All the animals took up the cry of "Get out, Boxer, get out!" But the van was already gathering speed and drawing away from them. It was uncertain whether Boxer had understood what Clover had said. But a moment later his face disappeared from the window and there was the sound of a tremendous drumming of hoofs inside the van. He was trying to kick his way out. The time had been when a few kicks from Boxer's hoofs would have smashed the van to matchwood. But alas! his strength had left him; and in a few moments the sound of drumming hoofs grew fainter and died away. In desperation the animals began appealing to the two horses which drew the van to stop. "Comrades, comrades!" they shouted. "Don't take your own brother to his death!" But the stupid brutes, too ignorant to realise what was happening, merely set back their ears and quickened their pace. Boxer's face did not reappear at the window. Too late, someone thought of racing ahead and shutting the five-barred gate; but in another moment the van was through it and rapidly disappearing down the road. Boxer was never seen again. Three days later it was announced that he had died in the hospital at Willingdon, in spite of receiving every attention a horse could have. Squealer came to announce the news to the others. He had, he said, been present during Boxer's last hours. "It was the most affecting sight I have ever seen!" said Squealer, lifting his trotter and wiping away a tear. "I was at his bedside at the very last. And at the end, almost too weak to speak, he whispered in my ear that his sole sorrow was to have passed on before the windmill was finished. 'Forward, comrades!' he whispered. 'Forward in the name of the Rebellion. Long live Animal Farm! Long live Comrade Napoleon! Napoleon is always right.' Those were his very last words, comrades." Here Squealer's demeanour suddenly changed. He fell silent for a moment, and his little eyes darted suspicious glances from side to side before he proceeded. It had come to his knowledge, he said, that a foolish and wicked rumour had been circulated at the time of Boxer's removal. Some of the animals had noticed that the van which took Boxer away was marked "Horse Slaughterer," and had actually jumped to the conclusion that Boxer was being sent to the knacker's. It was almost unbelievable, said Squealer, that any animal could be so stupid. Surely, he cried indignantly, whisking his tail and skipping from side to side, surely they knew their beloved Leader, Comrade Napoleon, better than that? But the explanation was really very simple. The van had previously been the property of the knacker, and had been bought by the veterinary surgeon, who had not yet painted the old name out. That was how the mistake had arisen. The animals were enormously relieved to hear this. And when Squealer went on to give further graphic details of Boxer's death-bed, the admirable care he had received, and the expensive medicines for which Napoleon had paid without a thought as to the cost, their last doubts disappeared and the sorrow that they felt for their comrade's death was tempered by the thought that at least he had died happy. Napoleon himself appeared at the meeting on the following Sunday morning and pronounced a short oration in Boxer's honour. It had not been possible, he said, to bring back their lamented comrade's remains for interment on the farm, but he had ordered a large wreath to be made from the laurels in the farmhouse garden and sent down to be placed on Boxer's grave. And in a few days' time the pigs intended to hold a memorial banquet in Boxer's honour. Napoleon ended his speech with a reminder of Boxer's two favourite maxims, "I will work harder" and "Comrade Napoleon is always right"--maxims, he said, which every animal would do well to adopt as his own. On the day appointed for the banquet, a grocer's van drove up from Willingdon and delivered a large wooden crate at the farmhouse. That night there was the sound of uproarious singing, which was followed by what sounded like a violent quarrel and ended at about eleven o'clock with a tremendous crash of glass. No one stirred in the farmhouse before noon on the following day, and the word went round that from somewhere or other the pigs had acquired the money to buy themselves another case of whisky. Chapter X 제10장 Years passed. The seasons came and went, the short animal lives fled by. A time came when there was no one who remembered the old days before the Rebellion, except Clover, Benjamin, Moses the raven, and a number of the pigs. Muriel was dead; Bluebell, Jessie, and Pincher were dead. Jones too was dead--he had died in an inebriates' home in another part of the country. Snowball was forgotten. Boxer was forgotten, except by the few who had known him. Clover was an old stout mare now, stiff in the joints and with a tendency to rheumy eyes. She was two years past the retiring age, but in fact no animal had ever actually retired. The talk of setting aside a corner of the pasture for superannuated animals had long since been dropped. Napoleon was now a mature boar of twenty-four stone. Squealer was so fat that he could with difficulty see out of his eyes. Only old Benjamin was much the same as ever, except for being a little greyer about the muzzle, and, since Boxer's death, more morose and taciturn than ever. There were many more creatures on the farm now, though the increase was not so great as had been expected in earlier years. Many animals had been born to whom the Rebellion was only a dim tradition, passed on by word of mouth, and others had been bought who had never heard mention of such a thing before their arrival. The farm possessed three horses now besides Clover. They were fine upstanding beasts, willing workers and good comrades, but very stupid. None of them proved able to learn the alphabet beyond the letter B. They accepted everything that they were told about the Rebellion and the principles of Animalism, especially from Clover, for whom they had an almost filial respect; but it was doubtful whether they understood very much of it. The farm was more prosperous now, and better organised: it had even been enlarged by two fields which had been bought from Mr. Pilkington. The windmill had been successfully completed at last, and the farm possessed a threshing machine and a hay elevator of its own, and various new buildings had been added to it. Whymper had bought himself a dogcart. The windmill, however, had not after all been used for generating electrical power. It was used for milling corn, and brought in a handsome money profit. The animals were hard at work building yet another windmill; when that one was finished, so it was said, the dynamos would be installed. But the luxuries of which Snowball had once taught the animals to dream, the stalls with electric light and hot and cold water, and the three-day week, were no longer talked about. Napoleon had denounced such ideas as contrary to the spirit of Animalism. The truest happiness, he said, lay in working hard and living frugally. Somehow it seemed as though the farm had grown richer without making the animals themselves any richer-except, of course, for the pigs and the dogs. Perhaps this was partly because there were so many pigs and so many dogs. It was not that these creatures did not work, after their fashion. There was, as Squealer was never tired of explaining, endless work in the supervision and organisation of the farm. Much of this work was of a kind that the other animals were too ignorant to understand. For example, Squealer told them that the pigs had to expend enormous labours every day upon mysterious things called "files," "reports," "minutes," and "memoranda". These were large sheets of paper which had to be closely covered with writing, and as soon as they were so covered, they were burnt in the furnace. This was of the highest importance for the welfare of the farm, Squealer said. But still, neither pigs nor dogs produced any food by their own labour; and there were very many of them, and their appetites were always good. As for the others, their life, so far as they knew, was as it had always been. They were generally hungry, they slept on straw, they drank from the pool, they laboured in the fields; in winter they were troubled by the cold, and in summer by the flies. Sometimes the older ones among them racked their dim memories and tried to determine whether in the early days of the Rebellion, when Jones's expulsion was still recent, things had been better or worse than now. They could not remember. There was nothing with which they could compare their present lives: they had nothing to go upon except Squealer's lists of figures, which invariably demonstrated that everything was getting better and better. The animals found the problem insoluble; in any case, they had little time for speculating on such things now. Only old Benjamin professed to remember every detail of his long life and to know that things never had been, nor ever could be much better or much worse--hunger, hardship, and disappointment being, so he said, the unalterable law of life. And yet the animals never gave up hope. More, they never lost, even for an instant, their sense of honour and privilege in being members of Animal Farm. They were still the only farm in the whole county--in all England!--owned and operated by animals. Not one of them, not even the youngest, not even the newcomers who had been brought from farms ten or twenty miles away, ever ceased to marvel at that. And when they heard the gun booming and saw the green flag fluttering at the masthead, their hearts swelled with imperishable pride, and the talk turned always towards the old heroic days, the expulsion of Jones, the writing of the Seven Commandments, the great battles in which the human invaders had been defeated. None of the old dreams had been abandoned. The Republic of the Animals which Major had foretold, when the green fields of England should be untrodden by human feet, was still believed in. Some day it was coming: it might not be soon, it might not be with in the lifetime of any animal now living, but still it was coming. Even the tune of 'Beasts of England' was perhaps hummed secretly here and there: at any rate, it was a fact that every animal on the farm knew it, though no one would have dared to sing it aloud. It might be that their lives were hard and that not all of their hopes had been fulfilled; but they were conscious that they were not as other animals. If they went hungry, it was not from feeding tyrannical human beings; if they worked hard, at least they worked for themselves. No creature among them went upon two legs. No creature called any other creature "Master." All animals were equal. One day in early summer Squealer ordered the sheep to follow him, and led them out to a piece of waste ground at the other end of the farm, which had become overgrown with birch saplings. The sheep spent the whole day there browsing at the leaves under Squealer's supervision. In the evening he returned to the farmhouse himself, but, as it was warm weather, told the sheep to stay where they were. It ended by their remaining there for a whole week, during which time the other animals saw nothing of them. Squealer was with them for the greater part of every day. He was, he said, teaching them to sing a new song, for which privacy was needed. It was just after the sheep had returned, on a pleasant evening when the animals had finished work and were making their way back to the farm buildings, that the terrified neighing of a horse sounded from the yard. Startled, the animals stopped in their tracks. It was Clover's voice. She neighed again, and all the animals broke into a gallop and rushed into the yard. Then they saw what Clover had seen. It was a pig walking on his hind legs. Yes, it was Squealer. A little awkwardly, as though not quite used to supporting his considerable bulk in that position, but with perfect balance, he was strolling across the yard. And a moment later, out from the door of the farmhouse came a long file of pigs, all walking on their hind legs. Some did it better than others, one or two were even a trifle unsteady and looked as though they would have liked the support of a stick, but every one of them made his way right round the yard successfully. And finally there was a tremendous baying of dogs and a shrill crowing from the black cockerel, and out came Napoleon himself, majestically upright, casting haughty glances from side to side, and with his dogs gambolling round him. He carried a whip in his trotter. There was a deadly silence. Amazed, terrified, huddling together, the animals watched the long line of pigs march slowly round the yard. It was as though the world had turned upside-down. Then there came a moment when the first shock had worn off and when, in spite of everything-in spite of their terror of the dogs, and of the habit, developed through long years, of never complaining, never criticising, no matter what happened--they might have uttered some word of protest. But just at that moment, as though at a signal, all the sheep burst out into a tremendous bleating of-- "Four legs good, two legs BETTER! Four legs good, two legs BETTER! Four legs good, two legs BETTER!" It went on for five minutes without stopping. And by the time the sheep had quieted down, the chance to utter any protest had passed, for the pigs had marched back into the farmhouse. Benjamin felt a nose nuzzling at his shoulder. He looked round. It was Clover. Her old eyes looked dimmer than ever. Without saying anything, she tugged gently at his mane and led him round to the end of the big barn, where the Seven Commandments were written. For a minute or two they stood gazing at the tatted wall with its white lettering. "My sight is failing," she said finally. "Even when I was young I could not have read what was written there. But it appears to me that that wall looks different. Are the Seven Commandments the same as they used to be, Benjamin?" For once Benjamin consented to break his rule, and he read out to her what was written on the wall. There was nothing there now except a single Commandment. It ran: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After that it did not seem strange when next day the pigs who were supervising the work of the farm all carried whips in their trotters. It did not seem strange to learn that the pigs had bought themselves a wireless set, were arranging to install a telephone, and had taken out subscriptions to 'John Bull', 'Tit-Bits', and the 'Daily Mirror'. It did not seem strange when Napoleon was seen strolling in the farmhouse garden with a pipe in his mouth--no, not even when the pigs took Mr. Jones's clothes out of the wardrobes and put them on, Napoleon himself appearing in a black coat, ratcatcher breeches, and leather leggings, while his favourite sow appeared in the watered silk dress which Mrs. Jones had been used to wearing on Sundays. A week later, in the afternoon, a number of dog-carts drove up to the farm. A deputation of neighbouring farmers had been invited to make a tour of inspection. They were shown all over the farm, and expressed great admiration for everything they saw, especially the windmill. The animals were weeding the turnip field. They worked diligently hardly raising their faces from the ground, and not knowing whether to be more frightened of the pigs or of the human visitors. That evening loud laughter and bursts of singing came from the farmhouse. And suddenly, at the sound of the mingled voices, the animals were stricken with curiosity. What could be happening in there, now that for the first time animals and human beings were meeting on terms of equality? With one accord they began to creep as quietly as possible into the farmhouse garden. At the gate they paused, half frightened to go on but Clover led the way in. They tiptoed up to the house, and such animals as were tall enough peered in at the dining-room window. There, round the long table, sat half a dozen farmers and half a dozen of the more eminent pigs, Napoleon himself occupying the seat of honour at the head of the table. The pigs appeared completely at ease in their chairs. The company had been enjoying a game of cards but had broken off for the moment, evidently in order to drink a toast. A large jug was circulating, and the mugs were being refilled with beer. No one noticed the wondering faces of the animals that gazed in at the window. Mr. Pilkington, of Foxwood, had stood up, his mug in his hand. In a moment, he said, he would ask the present company to drink a toast. But before doing so, there were a few words that he felt it incumbent upon him to say. It was a source of great satisfaction to him, he said--and, he was sure, to all others present--to feel that a long period of mistrust and misunderstanding had now come to an end. There had been a time--not that he, or any of the present company, had shared such sentiments--but there had been a time when the respected proprietors of Animal Farm had been regarded, he would not say with hostility, but perhaps with a certain measure of misgiving, by their human neighbours. Unfortunate incidents had occurred, mistaken ideas had been current. It had been felt that the existence of a farm owned and operated by pigs was somehow abnormal and was liable to have an unsettling effect in the neighbourhood. Too many farmers had assumed, without due enquiry, that on such a farm a spirit of licence and indiscipline would prevail. They had been nervous about the effects upon their own animals, or even upon their human employees. But all such doubts were now dispelled. Today he and his friends had visited Animal Farm and inspected every inch of it with their own eyes, and what did they find? Not only the most up-to-date methods, but a discipline and an orderliness which should be an example to all farmers everywhere. He believed that he was right in saying that the lower animals on Animal Farm did more work and received less food than any animals in the county. Indeed, he and his fellow-visitors today had observed many features which they intended to introduce on their own farms immediately. He would end his remarks, he said, by emphasising once again the friendly feelings that subsisted, and ought to subsist, between Animal Farm and its neighbours. Between pigs and human beings there was not, and there need not be, any clash of interests whatever. Their struggles and their difficulties were one. Was not the labour problem the same everywhere? Here it became apparent that Mr. Pilkington was about to spring some carefully prepared witticism on the company, but for a moment he was too overcome by amusement to be able to utter it. After much choking, during which his various chins turned purple, he managed to get it out: "If you have your lower animals to contend with," he said, "we have our lower classes!" This BON MOT set the table in a roar; and Mr. Pilkington once again congratulated the pigs on the low rations, the long working hours, and the general absence of pampering which he had observed on Animal Farm. And now, he said finally, he would ask the company to rise to their feet and make certain that their glasses were full. "Gentlemen," concluded Mr. Pilkington, "gentlemen, I give you a toast: To the prosperity of Animal Farm!" There was enthusiastic cheering and stamping of feet. Napoleon was so gratified that he left his place and came round the table to clink his mug against Mr. Pilkington's before emptying it. When the cheering had died down, Napoleon, who had remained on his feet, intimated that he too had a few words to say. Like all of Napoleon's speeches, it was short and to the point. He too, he said, was happy that the period of misunderstanding was at an end. For a long time there had been rumours--circulated, he had reason to think, by some malignant enemy--that there was something subversive and even revolutionary in the outlook of himself and his colleagues. They had been credited with attempting to stir up rebellion among the animals on neighbouring farms.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Their sole wish, now and in the past, was to live at peace and in normal business relations with their neighbours. This farm which he had the honour to control, he added, was a co-operative enterprise. The title-deeds, which were in his own possession, were owned by the pigs jointly. He did not believe, he said, that any of the old suspicions still lingered, but certain changes had been made recently in the routine of the farm which should have the effect of promoting confidence still further. Hitherto the animals on the farm had had a rather foolish custom of addressing one another as "Comrade." This was to be suppressed. There had also been a very strange custom, whose origin was unknown, of marching every Sunday morning past a boar's skull which was nailed to a post in the garden. This, too, would be suppressed, and the skull had already been buried. His visitors might have observed, too, the green flag which flew from the masthead. If so, they would perhaps have noted that the white hoof and horn with which it had previously been marked had now been removed. It would be a plain green flag from now onwards. He had only one criticism, he said, to make of Mr. Pilkington's excellent and neighbourly speech. Mr. Pilkington had referred throughout to "Animal Farm." He could not of course know--for he, Napoleon, was only now for the first time announcing it--that the name "Animal Farm" had been abolished. Henceforward the farm was to be known as "The Manor Farm"--which, he believed, was its correct and original name. "Gentlemen," concluded Napoleon, "I will give you the same toast as before, but in a different form. Fill your glasses to the brim. Gentlemen, here is my toast: To the prosperity of The Manor Farm!" There was the same hearty cheering as before, and the mugs were emptied to the dregs. But as the animals outside gazed at the scene, it seemed to them that some strange thing was happening. What was it that had altered in the faces of the pigs? Clover's old dim eyes flitted from one face to another. Some of them had five chins, some had four, some had three. But what was it that seemed to be melting and changing? Then, the applause having come to an end, the company took up their cards and continued the game that had been interrupted, and the animals crept silently away. But they had not gone twenty yards when they stopped short. An uproar of voices was coming from the farmhouse. They rushed back and looked through the window again. Yes, a violent quarrel was in progress. There were shoutings, bangings on the table, sharp suspicious glances, furious denials. The source of the trouble appeared to be that Napoleon and Mr. Pilkington had each played an ace of spades simultaneously. Twelve voices were shouting in anger, and they were all alike. No question, now, what had happened to the faces of the pigs. The creatures outside looked from pig to man, and from man to pig, and from pig to man again; but already it was impossible to say which was which. November 1943-February 1944 THE END <Hr> entygcwzj7p2086g44ryx938jaw713z 페이지:리린젼 상권.djvu/56 250 113070 455016 2026-07-03T13:10:50Z Sori4825 17286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옛한글쪽 시작}} 각쳐의ᄉᆞᄅᆞᆷ으로수월젼에긔약업사이곳에모힌ᄌᆡ수ᄉᆞᆷ쳔에지나고주장ᄒᆞᄂᆞᆫ일은다름아니라방금승장조ᄌᆞ항이장호권과양회로더부러역모의ᄯᅳᆺ을두고북호와셔번을잠통ᄒᆞ야국가에큰화가밋칠지라우리장찻군ᄉᆞ를의모ᄒᆞ야역당을소멸ᄒᆞ고ᄉᆞ직을안보ᄒᆞᆯ마음이로되모힌ᄉᆞᄅᆞᆷ즁에ᄂᆞᆫ아직장수ᄌᆡ목이... 45501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Sori4825"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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