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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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농장(農莊)은 사료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분명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개념이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고려 시대에 대토지지배의 특수한 형태로서 지배의 거점인 莊舍를 거점으로 형성된 넓은 토지의 집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시과 체제로 일컬어지는 고려 전기의 토지제도는 12세기를 기점으로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다. 전시과제도 자체의 모순점과 이자겸의 난 이후 가중된 귀족간 세력 경쟁의 일환으로 대토지겸병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무신란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어떤 농장은 자연산천을 그 경계로 삼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몽골 간섭기에 원나라 황제가 그 시정책을 마련하라고 고려의 왕에게 지시할 정도였을까.
이러한 농장의 설립은 몇 가지 요소가 있다. 개간, 매득(買得), 사택, 탈점, 長利(고리대)등이다. 이중 개간을 통한 농장형성은 합법적인 것으로 정부의 권장사항이기도 했다. 개간은 사실상 부유한 자가 아니면 힘들었던 이유때문이다. 매득과 기증에 의한 농장형성도 있었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그리고 문제가 많았던 것은 탈점에 의한 농장형성이었다. 탈점 자체가 불법이었던 것이다. 수조권을 집적함으로써 형성되는 농장도 농장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도 있지만, 결국 수조권의 집적은 소유권의 집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는 점에 비추어 볼때 농장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농장은 그곳을 관리·경영하는 거점으로 莊舍 또는 農舍를 설치하여 관리인을 두었다. 이는 농장주들이 대부분 不在地主임을 의미한다. 농장주들은 대부분 중앙에 있고, 농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관리인을 통하여 전호들과 농장주는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사적인 지배·예속관계였다. 농장의 일꾼들은 노비들도 섞여 있었으나, 전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들은 수확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쳤다(병작반수제).
이러한 농장의 형성은 국가재정에는 치명타였다.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호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에 세금을 내느니보다는 차리라 전호가 되는 것이 덜 뺏겼다고 한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전호가 더 나앗다고 한다. 이것은 악순환의 연속이다. 국가는 줄어드는 재정수입을 타개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농민들로부터 거둬들이려 시도하고 농민은 이에 반발하여 떠나버리거나 전호가 된다. 전호가 되면 국가에 내는 세금보다 덜 뺏기니까. 결국 이렇게 해서 농장은 더욱 확대되고 국가 재정은 만성적으로 쪼들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언하면, 농장제는 농민의 부담 또는 경제적 지위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의 농장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때의 농장은 경제외적인 요소에 더 좌우되었다. 즉, 농장주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농장은 확대일로를 걷지만, 권좌에서 물러나면 금방 해체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농장 경영이 국가 권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어서 안정되지 못하고, 한계성이 뚜렷한 것이다. 또한 농장주들은 서양 중세의 봉건 영주처럼 불수불입권을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농장이 가지는 또 다른 미숙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전기의 토지제도가 전시과체제라면, 후기의 토지제도는 대토지겸병의 농장제였다. 무신난을 기점으로 시대가 구분되는 고려 후기의 경제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 농장의 문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