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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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쓴 공자에 대한 책

[편집] 줄거리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인 공방숙(孔防叔)이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백하는 숙양흘(叔梁紇)을, 흘은 안씨(顔氏)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이구(尼丘)에서 기도한 뒤 태어난 공자의 머리가 움푹 패어 구(丘)라고 이름했다.

노나라 대부 맹희자(孟희子)가 아들 의자(懿子)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유언했다. 공자의 선조가 왕손인데다가 공자의 나이가 어렸으나 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의자는 아버지가 죽자 동생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에게 예를 배웠다. 노나라 귀족인 계씨의 위리(委吏: 창고직이)가 되자 저울질이 공평했고 직리(職吏: 목장 관리)가 되자 가축이 번성했다. 그래서 승진하여 사공(司空: 공사 감독관)이 되었다.

공자는 관리를 사직한 뒤, 제(齊); 송(宋); 위(衛); 진(陳); 채(蔡)나라를 돌아다녔으나 받아주는 나라가 없고 곤궁에 빠지기만 하자 고국에 되돌아왔다. 남궁경숙이 노나라 임금에게 청해 임금의 후원으로 공자는 남궁경숙과 주나라 서울인 낙읍에 가서 문물을 견학하게 되었다. 이때 공자는 노자를 만났다. 낙읍 방문을 마치고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공자는 그 명망이 더욱 높아져 사방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노나라 소공(昭公) 20년, 공자 30세 때 제나라 임금인 경공(景公)이 안자(晏子: 제나라의 현명한 대부 안영(晏영))와 노나라에 왔다가 공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 정치를 물어보고 공자의 대답을 듣고 기뻐했다. 공자 35세 때 노나라의 실권자인 삼환씨(三桓氏)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공은 삼환씨의 하나인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 제나라에 간 공자는 경공을 만나 또 정치를 논하고 경공의 탄복을 받아 임용이 검토되었으나 유가(儒家)의 예의가 번거롭고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공자는 그때 악장을 만나 순임금의 소(음악의 이름)를 듣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음악으로 인해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

제나라에서의 임용에 실패한 공자는 2년만에 다시 노나라로 귀국했다. 그때에도 노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소공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계씨는 계씨대로 가신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배신(陪臣: 제후의 대부) 양호(陽虎 = 또는 양화)가 공산불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계환자의 계략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정치가 이처럼 문란했으므로 공자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 서; 예; 악(詩書禮樂)을 편찬했다. 먼 곳에서도 배우려는 자가 더욱 늘어났다.

양호가 세력을 잃고 물러난 뒤인 51세 때(B.C. 501년) 정공은 공자를 중도(中都) 땅의 재(宰: 지방 장관)로 임명했다. 중도 고을은 그가 다스린지 1년만에 치안과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다음 해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협곡에서 회맹하였다. 이 때 경공은 무력으로 정공을 위협해 음악을 연주토록 명했다.이에 공자는 경공의 야비한 처사를 꾸짖었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하는 뜻에서 이전에 빼앗았던 세 고을을 노나라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런 공로로 공자는 다음 해(B.C. 499년, 53세 때) 사공(건설부 장관)이 되었고 55세 때인 B,C. 497년 대사구(大司寇: 사법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곧 삼환씨의 세력 근거지인 세 도성을 허물기로 하였다. 이는 바로 삼환씨의 세력을 꺾어 노나라 공실(제후인 임금 가문)의 권위와 실권을 회복시키고자 한 조처였다. 이 일은 맹손씨 가신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B.C. 496년(56세 때) 정승의 일까지 겸직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잡아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되자 이웃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질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 여서의 책략에 따라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노에 보냈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좋아하여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 이처럼 임금인 정공(定公)과 계환자 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음락(淫樂)에 빠져버리자 공자는 이들과는 큰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버렸다.

이듬해인 B,C. 496년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로)/ 자공(子貢)/ 안회(顔回) 등과 함께 천하 유력(游歷)의 길에 올랐다. 먼저 위(衛)나라에 가서 위 영공으로부터 봉록을 받았으나 참소를 받자 10개월 후 진(陳)나라로 떠났는데 광(匡)을 지나다가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화를 모면하고 포(蒲)에 이르렀다. 한 달 후에 다시 위나라로 들어가 위나라 대부 거백옥(거伯玉)의 집에 머물렀으나 위나라에 실망하여 조(曹)나라를 거쳐 송(宋)나라로 갔다.

송나나의 어느 큰 나무 밑에서 제자들에게 예를 강론하는 도중에 송나라 사마 환퇴(桓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그곳을 떠나 정(鄭)나라에 갔다. 거기서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 헤어져 상가지구(喪家之狗)의 꼴이 되었다가 다시 만났다. 공자는 다시 진(陳)나라에 이르러 3년 쯤 유했다. 진(晉)/ 초(楚)/ 오(吳)나라들이 계속해서 진을 공격하므로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오고싶어 진을 출발했다. 그들이 다시 포(蒲)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곳 사람들이 공자의 앞길을 막았다. 마침 공자를 따라 주유하고 있던 공양유(公良儒)가 공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니 포 사람들이 공자를 풀어주었으므로 다시 위(衛)나라로 갔다. 그리고는 다시 진나라를 거쳐 채(蔡)나라에 갔다. 초나라 왕이 공자를 초빙했다. 그러자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이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고 사람들을 보내 들판에 있는 공자를 포위했다. 모두들 굶주리고 병이나 심각한 지경에 빠져있었으나 공자는 태연히 책을 낭송하거나 악기를 타면서 지냈다. 자로가 스승에게 불평을 했지만 공자는 이를 설득했다. 뒤에 초 소왕이 군대를 보내 공자를 보호하여 맞이했다. 초왕이 공자를 봉하려 하자 재상인 자서(子西)가 반대했다. 공자의 제자들이 너무 유능하여 그를 봉했다가는 오히려 공자에게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었다. 이래서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돌아왔다. 위나라에는 공자의 제자들로 관직에 있는 자가 많았고 위의 군주도 공자를 호평하였으므로 등용하려 했으나 위나라 공문자(孔文子)가 태숙(太叔)이라는 정적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계책울 묻자 이에 화가 난 공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14년 만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공자는 서경과 예. 시경, 역경 악경 등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를 교재로 삼아 문; 행; 충; 신(文行忠信)의 4방면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는 약 3000명에 이르렀고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나 되었다.

공자는 향당(鄕黨)에서는 공손하고 종묘나 조정에서는 언설이 뛰어나고 신중했으며 온화하고 태연했다. 항상 예의가 바르고 단정했다.

노 애공(哀公) 14년 봄에 대야(大野)에서 괴수를 잡자 공자가 보고 그것이 기린이라 말하고 세상에 도가 쇠해짐을 걱정했다.

공자는 군자가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며 춘추(春秋)를 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노 애공 16년 4월 73세의 춘추로 세상을 떠났다. 사수(泗水) 부근에 장사지내고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자공만은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6년을 지키다가 떠났다. 뒤에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그의 무덤가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100여 가구나 되어 공자마을이라 불리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던 내실은 뒤에 공자의 묘(廟)로 만들어 공자가 사용하던 의관과 악기, 수레, 서적 등을 소장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이곳을 지나다가 크게 제사지내고 그 후에도 제후, 경대부, 재상 등의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뒤에야 정사에 임했다.

공자는 이(鯉: 백어(伯魚))를 낳고 이는 급(伋: 자사(子思))를 낳았는데 송나라에서 고생하며 살았으며 중용을 지었다. 자사는 백(白: 자상(子上))을 낳았다. .........

태사공이 말했다. "나는 항상 그를 동경하고 있다. 공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에서 그의 유물들을 참관했는데 경모하는 마음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천하에는 수많은 군왕과 현인들이 있어 생존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죽으면 그뿐이었으나 공자는 포의(布衣)로 평생을 보냈지만 10 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모든 학자들이 다 공자의 언설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