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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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蔡秉德, 1916년-1950년)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구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으로 해방 후 장사를 하다가 새로 창설된 국군에 입대했고, 이승만에 의해 참모총장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야전군 지휘경험이 없는 병기장교 출신으로서 참모총장으로서는 문제가 있었으며, 한국전쟁 초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해임되었다.

[편집] 생애

  •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임관하고 같은 날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1연대장을 맡았다. [1]
  • 1948년 8월 16일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1949년 5월 9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제1사단장 김석원과의 갈등으로 1948년 9월 잠시 퇴역하였다가, 1949년 12월 14일 병기행정본부장으로 복귀하고 이어 1950년 4월 말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2]
  • 1950년 6월 26일 오후 국무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3]
  • 1950년 6월 30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 '경남지구 편성군 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좌천되었다. 맥아더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에서 날아와 잠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고 한다. 사태수습책을 묻는 맥아더의 질문에 채병덕이 200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시켜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답하자, 맥아더는 그 자리에선 칭찬한 뒤 이승만에겐 갈아치우라고 말했다.[4]
  • 1950년 7월 23일 신성모는 채병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5] 채병덕은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전사했다. 훗날 채병덕 살해 음모가 제기되기도 했다.[6]

[편집] 사후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선정되었다.

[편집] 각주

  1. 1946년 1월~제1연대장을 맡았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196~197쪽.
  2. 정해구,〈채병덕: 일본 육사 출신의 대한민국 참모총장〉,반민족문제연구소,《청산하지 못한 역사1: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청년사, 1994),236쪽.
  3. 1950년~호언장담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49쪽.
  4. 조지프 굴든, 김쾌상 옮김,《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월서각, 1982),112쪽.
  5. 1950년 7월 23일~: 정해구,〈채병덕: 일본 육사 출신의 대한민국 참모총장〉,반민족문제연구소,《청산하지 못한 역사1: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청년사, 1994),238쪽.
  6. 7월 27일~: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