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디미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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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디미트로프(불가리아어: 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1882년 6월 18일 - 1949년 7월 2일)는 불가리아수상이자 코민테른서기장이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조국전선을 조직하여 싸웠으며 1946년 9월 15일 구체제가 쓰러지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디미트로프는 대한민국에는 별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며, 나치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도나 알려져 있다.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했을때 독일 경찰은 여행 중이었던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등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과 독일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 에른스트 토르글러를 현장에서 체포된 마리누스 판 데어 루페의 공범으로 체포하였다.

사실 디미트르프는 루페를 전혀 알지 못했고, 루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체포된 거물 공산주의자 디미트르프를 나치는 최대한 이용하여 정적 공산주의자 소탕을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수많은 "증인"들이 디미트로프와 루페가 범죄를 모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디미트로프는 재판 과정에서 괴링을 거꾸로 몰아붙여 괴링을 꼼짝못하게 했고(당시 괴링은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자격으로 증인으로 출석했다), 모든 증언들에 대해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그 "증언"들은 조작된 것이었므로 반박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디미트로프가 뮌헨에 있었을 당시, 베를린에서 루페와 만나는 것을 봤다는 식의 증언이었던 것이다.

결국 디미트로프는 오히려 공산주의자로서 명성을 더 키우게 되었고, 1933년 12월 독일 사법부는 루페를 제외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나치는 이러한 정치 쇼는 더 이상 열지 않았다.

목차

[편집] 초기 생애

소피아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한 인쇄식자공이었던 디미트로프는 1902년에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였고, 1903년에 Dimitâr Blagoev의 날개가 되어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당(소위 "넓은 당")에 가담했다. 이어 1919년에 볼세비즘과 코민포름에 가입했을때 불가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04년부터 1923년까지 그는 불가리아 노동조합전선의 서기장을 지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 불가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7년에 체포될때까지 새로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햇다.

1923년 6월, 독재적인 알렉산두르 스타볼리이스키(Aleksandûr Stamboliiski) 수상이 쿠테타로 실각했을때, 그의 공산계 지지자들은 알렉산더 챈코프(Alexander Tsankov)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하였다. 디미트로프는 혁명 활동가로서 탄압에 맞선 저항을 지도했다. 그와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로 달아났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여러가지 가명으로 1929년까지 소련에서 살았는데, 독일로 다시 이주햇고, 그곳에서 코민테른의 중유럽지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편집] 라이프찌히 재판과 코민테른 지도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공범으로 연루되어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디미트로프가 검찰의 고발에 맞선 자신에 대한 변호는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치 당국의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디미트로프와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마리누스 판 데어 루페가 모든 죄를 뒤집어 썼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 대체로 나치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디미트로프는 소련으로 출국이 허용되었고, 소련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가 누린 대중적 인기는 스탈린 체제의 재산이 되었고, 1934년에 코민테르 서기장으로 지명되어, 1943년 조직이 해체될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 동안에 기회있을때마다 자기 자신을 스탈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1935년, 에스파냐 내전 중에 개최된 7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이 반파시즘 운동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으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굳건히 하자고 했을때 스탈린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편집] 불가리아의 지도자

1944년 붉은 군대의 승리로 디미트로프는 불가리아로 돌아와 공산당을 세웠고, 1946년에는 서기장이 되어 키몬 게오르기에프(Kimon Georgiev)를 계승하였는데, 여전히 소련 시민권자였다. 1946년에는 스탈린의 압박을 받으며 디미트로프는 향후 마케도니아의 합병을 목표로 시작했다. 똑같은 강경론을 펼치는 반면, 디미트로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접근하여 "발칸 사회주의자 연맹" 창설 프로젝트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시작했다. 1947년, 두 사람은 여러 지역에서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디미트로프 자신이 줄곧 주장했던 소비에트 이념 논쟁에서는 의견이 맞았지만, 1948년 스탈린과 티토가 틀어진 후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점과 같은 해 초에 디미트로프의 루마니아 방문때 그가 연방에 참여하라고 루마니아 지도자들을 설득하고자 한 대중연설 때문에 이 태도는 새로운 동구블럭 전체에 대해하여 통제를 원했던 스탈린의 희망에 방해가 되었다. 티토의 이견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 연방 가입 협상과 마케도니아의 할양을 방해했다.

디미트로프는 소련에서 치료 도중에 죽었다. 그의 병세가 상당히 갑자기 악화되었지만, 방사능 치료를 받았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독살되었던지)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시체는 부패방지 보존처리가 되어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전시되엇다(1999년 철거되었다).

[편집] 외부 링크

[편집] 참고 문헌(한국어판)

다음은 한국어판에서 영문 번역 부분 외에 추가 작성을 위하여 참조한 자료이다.

  • 쟉크 드라류 저, 《독재자와 비밀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