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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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일본을 방문중이던 김대중1973년 8월 8일도쿄의 호텔 그랜드 팰리스 2212호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편집] 사건의 배경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7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대통령은 신승을 거두었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에게서 위기감을 느꼈다. 대통령 선거가 있은 얼마 뒤,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 시도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과 미국을 근거지로 하여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박대통령은 김대중이 해외에 있었던 1972년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 무렵 박대통령의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그 답례로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역사적인 회담 결과 한국에서는 이후락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했고, 박대통령의 후계자라는 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경비단장인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과의 대화중 "대통령이 나이가 드셨으니 후계자를 골라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알려졌고, 격분한 박정희는 두 사람 및 관계자를 체포하여 수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측근이 반역자로 지목되는 상황은 박정희 정권에 있어 불리하기 때문에 이후락은 석방되었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박대통령의 눈 밖에 난 이후락은 자신의 명예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하여 박대통령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편집] 사건 경위

김대중은 도쿄의 호텔 그랜드 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던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고 회담을 가졌다.

김대중은 오후 1시 19분쯤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나중에 "배를 탈 때 다리에 무게추를 달았다"고 말했다.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을 부산까지 데려가서 풀어주었다.

김대중은 납치사건 닷새 뒤,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되었다.

[편집] 사건 이후

1973년 8월 15일 우시로쿠 당시 주한 일본대사는 대한민국 외무부 차관과 대화 도중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납치수법이 매우 숙달돼 경찰을 능가하는 어떤 기관이 개입했다고 추측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일본에서는 경시청에 특별수사본부를 두고 수사한 결과 김동운 당시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이 납치사건에 관여되었다는 증거를 포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1973년 11월 1일 김용직 당시 외무장관은 김동운 1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납치사건을 공식 사과했다. 다음날에는 김종필 총리가 도쿄 수상 관저를 방문해 사건 공식 종결에 합의했다. 이로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었던 사건은 공식적으로 봉합되었다.

이후락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됐고, 일본에서는 반정부 운동이 격화됐다. 그 와중에 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이 박대통령 암살을 시도했고, 이로 인해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사망했다. 이번에는 경호실장인 박종규가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이후 차기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가졌던 반감이 발단이 되어 박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났고, 전두환 장군이 박대통령 암살 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다.

박정권 말기의 사건은 2005년에 방영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다뤄졌다.

2006년 2월,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을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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