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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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
1805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우스터리츠(현재의 체코 브르노 시)에서 동쪽으로 6.4km 떨어진 지점에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또는 삼제(三帝)의 대결이라고도 한다)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제 3차 대불 동맹(프랑스에 대항하여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시칠리아, 스웨덴이 맺은 동맹)기에 벌어진 중요한 접전이었다. 이 분쟁에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육군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최초의 프랑스군이 참여하였다. 9시간 동안의 전투 후, 나폴레옹 I세 지휘하의 프랑스군은 알렉산더 I세가 지휘한 러시아 -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명백한 승리를 거두었다. 동시다발적인 어려운 전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종종 ‘전술의 걸작’ 으로 불리어진다. 아우스터리츠는 제 3차 동맹을 와해로 몰고 갔다. 1805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캄포 포미오-뤼느빌 조약의 내용을 강화한 프레스부르크의 화약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독일에 영토를 할양할 것과 합스부르크가 4천만 프랑을 보상할 것 등의 내용에 합의했다. 러시아군은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조치되었다. 또한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로 독일의 각 주(州)가 연합하여 프랑스와 동유럽 간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 라인 강 연방(Confederation of the Rhine)이 결성될 수 있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 자리만을 보전할 수 있게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유럽 대륙의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프로이센은 1806년 제 4차 대불 동맹의 결성을 자극한 프랑스의 중유럽에 대한 간섭을 경계하게 되었다.
전투의 서막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 유럽은 1792년 이래 계속된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5년 동안의 전쟁 후, 프랑스 공화정부는 1797년 제 1차 대불 동맹을 제압하였다. 1798년 제 2차 대불 동맹이 결성되기는 했지만 이 역시 1801년 와해되었다. 오직 영국만이 새로운 프랑스 집정 정부(French Consulate)에 대적할 수 있는 상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아미앵 조약에서 제 3차 대불 동맹까지
1802년 3월,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앵 화약에서 양자 간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는 데 합의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전 유럽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존재하였고 아미앵 조약을 이행하는 과정은 또 다른 난제를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영국은 1793년 이후에 획득한 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었고, 프랑스는 영국군이 몰타 섬에서 철수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나 있었다. 이 긴장된 정세는 나폴레옹이 아이티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해 진압군을 파견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1803년 3월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1804년 12월, 영국과 스웨덴의 동의에 따라 2차 대불 동맹이 결성되었다.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는 1804년과 5년을 새로운 대불 동맹 결성 계획에 따른 외교적 업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다. 영국과 러시아 간의 불신은 프랑스 내부에서 일련의 정치적 실수가 드러나면서 다소 완화되었다. 그리고 1805년 4월 양자는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최근 두 차례나 프랑스에 패배하여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오스트리아 역시 몇 달 후 이 동맹에 참가하였다.
불로뉴 기지와 위대한 군대
3차 대불 동맹의 결성에 앞서,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영국의 군대’ 를 창설하고 북프랑스의 불로뉴에 6개의 거점을 삼았다. 비록 그들이 영국 본토를 한 번도 밟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나폴레옹의 군대는 어떠한 군사행동에도 대응할 수 있을 신중하고도 값진 훈련을 받았다. 병사들은 종종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겠지만, 나폴레옹은 수많은 부대시찰을 행했으며 사기 진작을 위한 호화로운 사열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불로뉴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나폴레옹이 후에 칭한 ‘위대한 군대(La Grande Armée)’ 의 주력이 되었다. 처음에 이 프랑스군은 36~40기의 야포가 소속되고 다른 군단의 지원이 오기 전까지 독자적인 작전행동을 할 수 있는 7개의 보병군단에 도합 20만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나폴레옹은 이 군단 위에 다시 예비대로 2개 퀴러시어(흉갑기병) 사단과 4개의 승마 드래군 사단, 그리고 2개의 도보 드래군 및 경기병 사단 등 도합 2만 2천의 기병대를 두고 이를 24기의 포로 하여금 지원하게 하였다. 1805년 무렵에 위대한 군대는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 잘 훈련되었으며, 유능한 장교의 지휘를 받는 35만의 강병(强兵)으로 성장하였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군대
1805년의 러시아군은 여전히 많은 앙시앙 레짐(구체제) 기의 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 연대급 이상의 영구적인 단위가 존재하지 않았고, 고위 장교는 여전히 귀족층의 전유물이었으며, 18세기의 관습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병사는 상습적으로 구타당했고 엄한 규율에 적응하기 위해 처벌받았다. 게다가, 많은 하급 장교들은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전장에서 요구되는 필수적이고 때로는 복잡할 수도 있는 작전행동을 지휘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경험 많고 용감한 군사들이 담당하는 강한 포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이었던 카를 대공은 1801년부터 오스트리아 육군의 정책 결정 기구였던 Hofkriegsrat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군제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카를 대공은 오스트리아 제일의 야전 지휘관이었으나, 오스트리아 황실에서의 평판이 좋지 못하였고 그의 제안과는 달리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정하게 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새로이 칼 마크 장군이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으로 내정되었고, 그는 전쟁 직전 종전의 3대대 6중대였던 군제를 4대대 4중대로 개편하는 작업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장교의 훈련 수준은 이 일련의 급격한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새로운 단위는 과거의 군제에 비해 나아진 것이 거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기병 전력은 유럽 최강으로 여겨졌었지만, 다양화된 보병의 진형과 연계되지 못한 점은 그들의 상대였던 프랑스에 대한 효과적인 전략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전 행동
1805년 8월, 작년 5월에 즉위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새로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그의 군대의 칼날을 도버 해협에서 라인 강 너머로 돌렸다. 9월 25일, 극비리의 불안한 행군 끝에 20만 프랑스군은 라인 강 전방 260km 지점에서 도강을 시작하였다. 마크 장군은 바바리아의 울름 요새에 대부분의 오스트리아군을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우회하여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치는 전략을 구사했다. 울름 전투는 성공적으로 치러졌으며, 6만 명의 포로가 사로잡힌 뒤 10월 20일 마크 장군과 2만 3천의 오스트리아군은 울름에서 항복하였다. 비록 이 대단한 승전이 같은 날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참패함으로 인해서 다소 빛이 바래기는 하였지만, 프랑스 육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11월에는 비엔나를 함락하고 10만 정의 머스킷과 500문의 대포를 노획하였으며,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온전한 다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뒤늦게 당도한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구원에 실패하였고, 결국 북동쪽으로 퇴각하여 본국으로부터의 추가 지원과 오스트리아군의 잔여 병력과의 연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이를 추격하였지만 곧 그들이 바라지 않는 전략적 상황에 직면하였다 : 프로이센군의 의도가 불분명했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의 연계가 이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져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전력의 낭비가 심해져 버린 것이다. 나폴레옹은 울름 전투의 승리를 지속적인 기회로 이어 나가기 위한 단 하나의 실질적인 방법은 동맹군을 전장으로 끌어내어 격파하는 것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도 러시아의 차르는 전투를 갈망하고 있었다.
전투
나폴레옹은 임박한 전투에 대비하여 7만 5천의 병력과 157문의 화포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다보 장군 휘하의 약 7천은 여전히 비엔나 방면에 산재해 있었다. 동맹군은 약 7만 3천의 병력을 보유하였는데, 70%가 러시아군이었으며 318문의 화포가 이를 지원하였다. 12월 1일 양측은 진지를 구축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장
전장의 북쪽에는 210m 높이의 샌튼(Santon) 고지와 260m 높이의 추란(Zuran) 고지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올무츠-브르노를 동서로 잇는 중요한 길목이 있었다. 두 고지의 서쪽에는 벨로비츠 마을이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골드바흐 강과 만나서 남쪽의 코벨니츠, 조콜니츠, 그리고 텔니츠 마을에 걸쳐 흘러가는 보세니츠 강이 있었다. 전장의 중심부에는 고도 11~12m에 완만한 경사를 한 프라첸 고지가 있었다. 한 부관의 증언에 따르면 황제(나폴레옹 I세)는 장교들에게 ‘제군, 이 고지를 잘 보라.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제군은 이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동맹군의 전략과 배치
동맹군 수뇌부는 12월 1일에 전투 계획에 대한 논의를 위해 소집되었다. 대부분의 동맹군 전략가들은 두가지의 기본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 적과의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비엔나로 통하는 남쪽 측면을 확보하는 것이다. 비록 차르와 그의 측근들이 강한 전투의지를 내비쳤지만,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는 좀 더 신중하였으며, 그의 의견이 러시아 사령관 쿠투조프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전투에 대한 러시아 귀족과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의 열망이 지나치게 강하여, 동맹군은 결국 오스트리아의 주장 보이로터의 작전을 채택하게 된다. 이작전은 동맹군측이 방어가 취약할 것으로 판단한 프랑스군의 우측면에 대해서는 강한 압박을 함과 동시에 좌측면에 대해서는 견제성의 공격만을 가하는 것이었다. 동맹군은 이에 따라 대부분의 부대를 전개시켜 프랑스군의 우측면을 칠 4개의 종대로 편성하였다. 러시아의 친위대는 예비대로 편성하였으며 바그라톤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에게는 동맹군의 우측면을 엄호하게 하였다.
프랑스군의 전략과 배치
전투 전날, 나폴레옹은 동맹군에게 그의 군대가 약해져 있으며 자신은 평화를 원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그는 동맹군측이 먼저 공격을 감행하여 그가 일부러 약화시켜 놓은 우측면의 미끼를 물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11월 23일, 나폴레옹은 그의 장교들과 사령부에서 회동을 가졌다. 거기서 장교들은 다가오는 전투에 대한 그들의 불안감과 공포를 호소하였고 심지어 일부는 후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들의 불평을 일축하고는 자신의 업무를 계속하였다. 나폴레옹은 그의 계획에서 동맹군이 그의 우측면에 지나치게 병력을 집중한 나머지 그들의 중앙이 허약해질 것임을 예상하고, 술트 장군의 4대대 1만 6천의 병력으로 하여금 동맹군의 중앙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우위를 점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의 허약한 우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비엔나에 있던 다보 장군의 3대대에게 급행을 명하여, 우측에서 동맹군의 가장 매서운 공세를 버텨내야 할 르 그랑 장군의 병력에 합류하게 하였다(실제로 다보 장군과 그의 군사들은 48시간 만에 110km을 행군하여, 사상 유례가 없는 행군 기록을 남겼다). 이들의 지원 시점이야말로 프랑스군 작전의 성패 여부와 직결될 결정적인 시점이 되는 것이었다. 친위대와 베르나도트 휘하의 스웨덴군은 예비대로 편성되었으며 랑느 장군의 5대대는 전장의 북편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투의 시작
전투는 오전 8시경 프랑스군 3연대가 수비하고 있던 텔니츠 마을에 대한 동맹군 1종대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지점은 프랑스군을 텔니츠 마을에서 몰아내어 골드바흐 강 너머로 쫓아버리기 위한 동맹군의 대규모 돌격전으로 인해 한동안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때 다보 장군의 선발대가 도착하여 오스트리아 경기병의 공격을 받고 마을을 포기할 상황이 되기 직전 동맹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진 동맹군의 공세는 프랑스군의 포병에 의해 역시 저지되었다. 동맹군의 종대는 프랑스군의 우측에 대한 공격을 쏟아 붓기 시작했지만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그 속도가 훨씬 느렸고,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이 공세를 막아냈다. 실질적으로, 동맹군의 전력 배치는 명백한 실수였으며 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 동맹군 좌측에 배치되었던 리히텐슈타인 휘하의 기병대는 우측면에 배치해야 했는데, 그들이 동맹군의 좌측(프랑스 우익)에서 돌격함으로써 정작 프랑스군 우익 공략의 주력이었던 종대 일부의 기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었다. 그 순간 (동맹군의)전략가들은 이것을 재앙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것은 동맹군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한편, 2종대의 주력 부대는 프랑스군 26연대와 척후 부대인 티레이뤼어가 수비하고 있던 조콜니츠 마을을 공격하고 있었다. 처음에 동맹군의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하였음이 드러났으며 이에 랑에론 장군은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포격을 명령했다. 이 집중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시각에 3종대는 조콜니츠의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마을을 탈환하였고, 마을 쟁탈전이 계속되던 이 지역에서의 접전은 프라이언트의 소대(3대대의 일부)가 최종적으로 마을을 탈환하면서 일단 종료되었다. 조콜니츠는 이 전장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었으며 마을의 주인이 수차례나 바뀌었다.
“한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이 끝나는구나”
8시 45분경, 나폴레옹이 원했던 만큼 동맹군의 중앙이 약해졌고 그는 술트 장군에게 프라첸 고지까지 진격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장군은 ‘20분 이내에 해낼 수 있습니다, 폐하’ 라고 대답하였다. 15분 후, 나폴레옹은 공격 명령을 내리고는 “한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이 끝나는구나” 라고 덧붙였다. 짙은 안개가 St. 힐라이르의 소대의 행군을 위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들이 고지를 오르면서 ‘아우스터리츠의 태양’ 이 안개를 걷어 그들의 진격을 독려했다. 고지에 있던 러시아군과 장교들은 그들을 향해 진격하는 대규모의 프랑스군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동맹군 장교들은 뒤늦게 4종대의 일부를 이 괴로운 저항을 위해 배치했다. 좌익에서의 한 시간 동안의 끔찍한 전투 후 4종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경험 없는 오스트리아군이 대부분이었던 2종대의 잔여병력 역시 이 저항에 투입되었고 그들은 프랑스군에서 가장 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와 접전을 치른 결과, 그들을 고지 아래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St. 힐라이르의 부대가 필사적으로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동맹군을 몰아내고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북쪽에서는 반담 장군의 소대가 스타레 비노라디라고 불린 지역을 공격하였고, 뛰어난 척후 활동과 위력적인 일제 사격 전술로 동맹군의 대대 다수를 격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세는 이제 완전히 프랑스군 편으로 돌아섰으나, 아직 많은 전투가 남아 있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군에 명령하여 반담 장군이 맡고 있던 좌익을 지원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그의 사령부를 추란 고지에서 프라첸 고지의 성 안토니우스의 예배당으로 옮겼다. 동맹군의 나쁜 전황은 예비대였던 러시아 친위대의 투입을 결정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었던 콘스탄틴 대공의 지휘 하의 친위대는 반담 장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겨우 프랑스군을 몰아 냈다(프랑스군의 불운한 희생자는 4연대에서 발생하였다). 좌익에서의 열세를 감지한 나폴레옹은 그의 직속 중장기병 부대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이 부대는 그들의 상대인 러시아군을 강하게 몰아붙였지만 이 대규모의 기병전의 최종적인 승자는 아직도 불분명한 상태이다. 러시아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이점을 안고 있었지만 곧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군 소속이었던 드루에의 소대가 도착하여 프랑스 기병대를 엄호하게 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친위대의 기병 지원용 포병대 역시 러시아의 기병과 머스킷 총병 부대에 대한 포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군은 패배하였고 활기를 되찾은 프랑스군 기병대에게 400미터를 추격당하면서 많은 수가 전사하였다.
전투의 종결
한편, 전장의 북쪽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리히텐슈타인 왕자의 중장기병대가 집결지에 도착하여 켈러만의 경기병 부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전황은 프랑스군에 좋게 흘러갔으나 러시아군의 수적 우세가 드러나자 켈러만의 부대는 카파렐리의 보병대의 엄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파렐리의 보병들은 러시아군의 공격을 잘 저지하였으며 무랏의 2개 퀴러시어 소대가 전장에 투입되어 러시아군의 기병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잇따른 난전은 참혹했고 지루했지만 프랑스군은 궁극적으로 승리하였다. 랑에 장군은 그의 5대대로 바그라톤의 부대를 공격하여 이 노련한 러시아 지휘관의 부대를 전장에서 내쫓았다. 그는 추격하고 싶었지만 이 지역의 전투를 총괄하고 있던 무랏 장군은 이를 반대하였다. 나폴레옹의 관심은 이제 조콜니츠와 텔니츠를 놓고 치열한 접전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던 전장의 남쪽 끝으로 옮겨 갔다. 두 부대의 동시 공격 결과 St. 힐라이르의 소대와 다보 장군의 3대대는 조콜니츠에서 적을 몰아냈고 처음 공격을 시작했던 동맹군 두 종대의 지휘관인 키엔마이어와 랑에론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동맹군 우익의 사령관이자 공격을 주도할 책임이 있었던 벅스하우덴 장군 역시 퇴각하였다. 키엔마이어는 그의 후위대로 오-렐리의 경기병을 배치하였고, 이들은 퇴각하기 직전까지 용맹하게 싸워 대여섯 개의 프랑스군 기병 연대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지휘관들의 공황 상태는 이제 동맹군 병사들에게로 옮겨가서 그들 모두 전쟁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유명하지만 소름끼치는 일화가 이 후퇴 중에서 나왔다 : 프랑스군 우익에서 격멸당한 러시아군은 잣찬의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서 비엔나로 퇴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포병대는 이들을 향해 맹포격을 퍼부었으나 나폴레옹은 공병대에게 얼음을 녹이라는 명령을 재차 내렸다. 러시아군은 그 차가운 물에 빠져 익사했으며 수십 문의 화포 역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군이 노획한 화포의 수에 대해서는 추측이 다양한데 적게는 38문에서 많게는 100문까지 추정되고 있다. 익사자에 대한 추측에서도 그 숫자는 200에서 2천까지 다양하다. 나폴레옹이 그의 전후 보고서에 이 사건을 과장하여 기술하였기 때문에, 비록 의심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적게 잡은 쪽이 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이들은 이 사건이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저지른 최대의 악행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결과
아우스터리츠와 그 인근 지역에서의 전투는 유럽 정세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3달만에 프랑스군은 비엔나를 점령하고 두 군대를 격멸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꺾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유럽의 주요국 수도가 적에 함락된 적이 결코 없었던 18세기의 경직된 역학 관계와 완전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아우스터리츠에서의 승리에서 프랑스는 근 십여 년 간의 유럽 대륙 지배의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이 사건의 즉각적인 영향은 1806년 프로이센의 참전 결정에서 나타났다.
군사적, 정치적 결과
전체적으로, 동맹군의 사상자는 7만 3천의 병력 중 2만 7천, 전체의 37%의 비율이었다. 프랑스군은 6만 7천의 병력 중 9천을 잃어 전체의 13% 비율이었다. 동맹군은 또한 180문의 화포와 50개의 군기를 잃었다. 이 승리는 단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재정 붕괴로 휘청거리던 나라의 수도 파리를 놀라움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두 사람의 황제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소. 나는 조금 지쳤소. 당신을 사랑하오’ 라고 쓰고 있다. 차르 알렉산드르 I세는 아마도 동맹군이 겪었던 몸서리치는 경험을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일 것이다 : ‘우리는 거인의 손 안에 있었던 어린애에 불과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12월 4일 정전 협정을 조인했고 전투 후 22일이 지난 12월 24일 프레스부르크 화약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점령한 캄포 포미오(1797)와 뤼느빌(1801)에 대한 프랑스의 영유권을 인정했으며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독일의 옛 영토인 바바리아와 부르템베르크, 그리고 바덴을 독일에 반환하고 전쟁 배상금으로 4천만 프랑을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베네치아 역시 이탈리아 왕국에 반환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에게는 가혹한 처사였지만 완전한 파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군은 본국으로 철군하도록 조치되었으며 프랑스군은 남부 독일에 주둔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1806년은 제국의 마지막 해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완충 지대가 될 라인 강 연방을 결성하였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중앙 유럽에 대한 지배력 강화의 일환으로 보고, 1806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논공행상
나폴레옹이 전투 후 그의 병사들에게 한 말은 치하 그 자체였다 : ‘Soldats! Je suis content de vous(제군!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어 행복하다.)’ 황제는 금화 2백만 프랑을 상급 장교에게 하사하였고 참전병사에게는 각각 200프랑씩이 지급되었으며 전사자의 미망인에게는 넉넉한 연금을 주어 위로하였다. 부모를 잃은 자식들은 나폴레옹 자신이 입양하였고, 자신의 세례명과 성에 ‘나폴레옹’을 붙일 수 있게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나폴레옹은 결코 휘하의 지휘관에게 대승 후에 으레 따르는 명예로운 칭호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를 전적으로 자신만의 승리로 여긴 나머지 어느 누구의 공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에도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종종 “나폴레옹 최대의 승리” 라고 불리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