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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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사업 공사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명박(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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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사업 공사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명박(가운데).

이명박 (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하였다. 박근혜등과 함께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한나라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목차

[편집] 생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1964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후 굴욕적 한일조약에 대한 반대가 도화선이 된 6·3사태를 주도하여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12년만인 1977년에 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 받았다.

[편집] 기업인 시절

[편집] 정치입문기

[편집] 서울시장

2002년 7월 1일 서울시장 취임한다.

시장 임기 중에 한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편집] 최근

2006년 9월 현재, 한국의 내륙운하 건설계획을 1순위 공약으로 추진중이다.

[편집] 스캔들 및 비판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에게는 입지전적인 인생역정만큼이나 돈을 둘러싼 시비도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78년 무주택 사원용 아파트를 정 관계와 언론계 등에 특혜분양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과 15대 총선 때의 선거비용 허위신고이다.[1]

서울시장을 지내며 청계천 복원 사업과 같은 대형 사업을 추진하여 인기를 얻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개발지향적 사업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서울시장 재임중인 2004년 5월 31일에 '서울의 부흥을 꿈꾸는 청년연합'이 주최한 '청년·학생 연합기도회'에 참석해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을 해 여론의 비판을 받았고, 서울시장 퇴임을 얼마 안 남긴 시점인 2006년 3월에는 남산 실내 테니스장의 주말 독점 이용과 테니스장 이용대금에 대한 의혹을 받았다.

[편집] 미정리 정보

1976년에 현대건설 부사장, 1977년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다.[2]

종업원 100명인 현대건설에 처음 입사하자마자 태국으로 가서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지휘했다.[3]

1982년 이라크의 최대항인 바스라항에서부터 바그다드를 거쳐 시리아와 요르단을 잇는 이라크 횡단 고속도로를 수주했다. 현대는 13공구인 이라크 북부도시 루트바에서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을 잇는 210㎞ 구간을 맡았다. 공기는 당초 3년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착공후 6년만인 87년 9월에야 개통됐다. 공사에 진척이 없자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현장경험이 풍부한 임원들을 이라크에 긴급 투입했다.[4]

학생운동가 출신의 이명박씨는 1965년 7월 현대건설의 경리사원으로 입사한 뒤 입사 12년 만인 1977년 36세의 나이로 사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70년대 후반, 중동 건설시장에서 목숨을 걸고 ‘회사 금고’를 지켜 정주영 회장에게 인정을 받았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열정과 담력, 저돌성이 정회장과 ‘복사판’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현대건설 회장직을 마지막으로 정계에 투신, 2003년 현재 서울시장으로 활동하고 있다.[5]

“사담 후세인은 포악하지만 매우 유능한 사람이다.”이명박 서울시장은 이라크에서 건설사업을 할 때 만났던 후세인 대통령을 10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하는 복구 사업은 우리 경제가 도약할 수 있는 세번째 기회라고 진단했다.[6]

현대그룹의 1세대 전문경영인중 65년 7월 현대건설의 경리사원으로 입사한뒤 입사 12년만인 77년 36살의 나이로 사장에 오른 이명박씨는 현대건설 회장직을던지고 15대총선에 출마,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뒤 최근(2001년) 증권중개회사인 `e-뱅크'를 세워 재기를 준비하고 있다.[7]

이명박 전의원은 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나(한나라당·서울 종로)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잃을 위기에 몰리자 98년 2월,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이 전의원은 그 해 5월의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고, 99년 8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400만 원 벌금형이 확정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4월의 16대 총선에도 출마하지 못했다. 그는 98년 말 도미,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공부하다 지난해 초 귀국했는데, 난데없이 ‘이뱅크’라는 인터넷 증권회사를 설립하겠다고 나서 눈길을 끌었다.[8]

레닌그라드 알루미늄 제련소 건설, 연해주 임업 합자회사 설립 같은 소련 프로젝트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이 마지막으로 같이 했던 사업이다.[9]

TV 드라마 야망의 세월 주인공 중 한사람으로서 전문경영인 출신의 이의원이 민자당 의원중 11번째 재산가로 밝혀졌다. 이의원이 공개한 재산총액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소재 건물및 대지 44억 6천만원, 서초구 양재동 건물및 대지 5억9천만원,강 남구 논현동 주택 9억8천만원등을 합쳐 62억3천여만원이다. 기준시가및 시가로 부동산값을 평가,건물 전세보증금과 공사비 미지급금 78억7천여만원을 빼고 계산한 액수다.

3개 부동산중 양재동땅은 지난 1972년 현대건설 상무시절 310만 2천원어치의 지하철 공채를 샀다가 2년뒤인 1974년 12월 공채만기시 현금대신 체비지로 받은 것이라는게 이의원의 설명이다. 또 가장 큰 부동산인 서초동땅의 경우 지난 1976년 6월 현대건설 부사장이었을때 사우디 대형 항만공사를 수주한 공로로 회사에서 지급한 특별상여금 3천만원 중 약 2천5백만원을 들여 구입했다는 주장이다. 이의원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강남지역의 땅값폭등으로 가만히 앉은채 15년사이에 재산이 2백배로 불어난 셈이다.[10]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이명박 의원은 천억원대의 엄청난 재력가라는 소문과 달리 62억원을 신고. 그는 특히 기준시가 및 시가로 39억원 상당이라고 밝힌 서울 강남 서초동의 대지 3백77평,연건평 1천7백56평짜리 빌딩취득경위에 대한 일부 의혹을 의식, "지난 1977년 사우디 항만공사 수주 공로금으로 받은 3천만원을 당시 총무이사에게 맡겼는데 총무이사가 나도 모르게 땅을 사놨었다"고 해명했다. 친형인 이상득 의원(33억원)의 재산까지 합하면 이들 형제의원의 공개재산은 96억원대이다.[11]

1991년 걸프전이 발발하자,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건설은 개전직후 해외업무 본부에 설치한 비상대책본부를 본격 확대가동하는 한편 외신 및 해외지사로부터의 텔렉스를 지켜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회사측은 이날 상오 이명박 회장 주재로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이라크에 잔류중인 22명의 직원들을 인근 국가로 긴급대피토록 결정했다.[12]

쿠웨이트에는 당초 현대건설, 대림산업, 효성중공업 등 3사의 333명이 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효성의 1인 지사장이 지난 2일(1990년 8월 2일) 급거 귀국, 332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유일하게 쿠웨이트에 5개 공사현장을 갖고 있는 현대건설은 사태발생직후 정훈목 사장을 본부장으로 한 종합대책본부를 구성, 비상체제에 들어갔는데 특히 억류ㆍ실종된 김영호씨등 현장근로자 3명의 소재파악 및 귀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강릉에서 열린 신입사원 하계수련회에 참석중이던 정주영 명예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회장도 4일 회사로 돌아와 사태수습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 현대는 쿠웨이트와의 통신이 2일부터 끊김에 따라 제3국을 통한 간접교신등으로 현지상황을 파악중인데 억류중인 김씨의 귀환을 위해 이라크 고위인사와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13]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편집] 주석과 참고자료

  1. [6·13 후보검증 인터뷰] (1)서울시장 [동아일보]2002-05-30 05판 10면 3857자
  2. [민선 4기 새 단체장에게 듣는다]이영수 인천 남구청장 [동아일보]2006-06-29 41판 16면 1311자
  3. 이래서 그는 '王'이로소이다 ‥ 정주영 5주기 앞두고 책 2권 출간 [한국경제신문]2006-03-17 1960자
  4. [실록, 수출 40년] 3. 아, 중동!-(3)독재자 후세인과의 악연, 물없는 땅서 ‘모내기 공법’ 고속도로 건설 [문화일보]2005-08-19 03판 07면 3380자 특집 기획,연재
  5. [新온고지신] 정회장과 동고동락한 가신그룹 [파이낸셜뉴스]2003-07-16 01면 1425자
  6. “영접나온 관리 ‘총살’후세인 유능하나 포악” [한겨레]2003-04-11 06판 13면 936자
  7. 현대그룹 1세대 전문경영인 시대 마감 [서울경제]2001-12-26 01면 1097자
  8. <인터뷰> 이명박 전 한나라당 의원 "현대건설, 살아날 길은 있다" [신동아]2001-05-01 15974자
  9. 이명박 전 회장이 본 '기업가 정주영'... [시사저널]2001-04-04 4001자
  10. “내재산 이렇게 모았다”… 「물의 4인」의 라이프스토리 [국민일보]1993-03-24 04면 4049자
  11. 기준없는 평가액… 성실성 의문/민자당의원 재산공개 뒷얘기 [동아일보]1993-03-22 02면 4391자
  12. 불안·충격의 목요일/페만 전면전 터지던날/정부·업계·시민들 표정 [경향신문]1991-01-17 15면 1855자
  13. 최대타격 정유사“원유찾기”비상/업ㆍ관계 페만사태 영향최소화 안간힘 [경향신문]1990-08-04 07면 2646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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