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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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해전(漆川海戰)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 15일 칠천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여러 가지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이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의 양면작전을 펼쳐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지휘관인 원균이 수육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음에도 이를 묵살 당한데다가 도원수 권율로부터 해군참모총장격인 원균 장군이 곤장을 맞는다. 원균 장군은 육군과 수군이 연합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황을 잘 모르는 조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수군 단독으로 출전했는데 전투 결과는 원균 장군의 예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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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전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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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1597년 음력 7월 15일
- 참가 세력
- 결과 : 조선군 패배. 10척만이 살아 경상우수사 배설의 지휘로 탈출. 남해의 제해권이 다시 왜로 넘거가게 됨.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전사.
[편집] 전투 배경
임진왜란 중 왜는 명나라와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에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이때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었다. 재침에 앞서 가장 큰 걸림돌인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왜는 사전에 공작을 펼쳤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첩자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1월 21일에 가토가 조선에 도착할 터인즉, 해상에 매복해서 급습하면 생포할 수 있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이에 이순신에게 왜적을 기다렸다가 공격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적의 계략임을 간파한 이순신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때에 출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원균이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오르고 나자 원균도 상황의 위험함을 깨닫고 출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태형을 가해서야 원균은 겨우 함대를 억지로 출전시켰다. 그러나, 출전 전부터 분위기가 이렇게 가라앉은 조선 수군이 전처럼 잘 싸워주기를 바라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편집] 전투 경과
1597년 7월 왜군은 조선 수군에게 패했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 도키쓰라(要時羅)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원균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출전하였다. 음력 7월 7일에 다대포(多大浦)에서 왜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간신히 가덕도(加德島)로 도망쳤다가, 다시 왜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笞刑)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移陣)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왜군의 공격을 받았고, 도망갈 틈도 없이 대부분의 함선과 수많은 수군 장병들을 잃었고, 원균도 전사하였다.
[편집] 결과와 영향
- 이 전투의 결과로, 이순신이 복귀하게 되었다.
- 남해안의 제해권이 왜군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바람에 육군의 지원이 원할하게 진행되어 전라도까지 왜군이 침입하였다.
- 이때 뺏긴 남해안의 제해권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때까지 왜군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