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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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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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의 초상화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르투갈어: Fernão de Magalhães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fɨɾ.'nɐ̃w̃ dɨ mɐ.ɣɐ.'ʎɐ̃j̃ʃ], 에스파냐어: Fernando 또는 Hernando de Magallanes 페르난도/에르난도 데 마가야네스, 1480년 봄 - 1521년 4월 27일)은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탐험가이다. 유럽인들에겐 새로운 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지중해중동지방을 거쳐가던 육상 무역로 외에 새로운 동방항로에 대한 탐구가 한참이던 시절, 역사서에서는 처음으로 대서양태평양을 횡단한 것으로 기록에 남은 인물이다.

[편집] 항해

1519년, 마젤란은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다섯 척의 배와 270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남아메리카의 대서양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제일 남단에 이르러 처음 들어가는 해협에서 폭풍우 등에 휘말려 배 2척을 잃는 고생 끝에 반대쪽 바다에 이르렀고, 너무 험난하게 해협을 건넌 직후에 마주한 잔잔한 바다에 감격하여 태평양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그가 지나온 해협은 후에 마젤란 해협으로 명명되었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배를 돌려도 되었지만, 마젤란은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태평양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에 태평양 횡단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108일간의 항해 끝에 마젤란 함대는 1521년 4월에 필리핀의 막탄(Mactan)섬에 도착하였다(이것이 필리핀에 가톨릭이 전파된 유래이다). 필리핀에서 마젤란은 원주민들간의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지도자를 잃었지만, 그의 살아남은 부하들은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고, 1522년에 출발할 당시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던 함대는 빅토리아호 1척과 18명의 선원으로 줄어들어 에스파냐로 겨우 귀환하였다. 이 항해로 마젤란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입증하게 되었다.

[편집] 유럽인의 눈

마젤란은 항해 내내 철저한 유럽인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럽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을 매우 하등시 여겼는데 이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있었던 일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캘커타에 머물고 있던 마젤란의 함대에 인도 외교관이 방문했다. 그러자 마젤란은 인도 사신을 꽁꽁 묶은 뒤 손과 발을 잘랐다. 그리곤 귀를 자른 후 그 자리에 돼지의 귀를 봉합해 붙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로 밧줄을 끊고 도망가지 못하게 이빨을 깨부셔서 사신의 목구멍으로 다 넘겨버렸다.

[편집] 식민지

에스파냐의 필리핀 제도 식민지화는 1565년에 로페스 데 레가스피(Lopez de Legaspi)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승 5명이 같이 와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뒤이어 1577년에 프란체스코 교단과 1578년에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수도승과 사제들이 차례로 필리핀으로 와서 전도를 시작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가톨릭이 국교인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