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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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韓國系美國人, Korean American)은 미국에 이민한 한국인및 그 자손을 말한다. 미국의 체류자도 포함해 재미한국인이라고 하는 표현도 있다. 인구는 200만명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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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편집] 제1기
조선과 미국과의 외교 관계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시작되어, 1903년 1월 13일에는 조선에서 미국으로의 최초의 이민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제1기의 하와이 이민은 한국내의 미국계 크리스트교회에 의해서 조직 되었기 때문에, 크리스찬이 대부분이고 일본인들과 같이, 대부분은 설탕 키비 농원에서 일했다. 그러나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 하면서 미국에의 이민은 규제되어 집단 이민은 정지되었다. 이 시기에 약 7천명이 하와이로 이주했고 대부분은 남성 노동자였다. 단지 1924년까지 사진 맞선에 의해서 약 1,000명의 여성이 개별적으로 미국에 도항했다(영어로 픽처·신부라고 한다.).
1904년부터 1907년에 걸쳐, 약 1,000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부터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이민의 물결은 미국 본토에까지 퍼졌다. 1909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의 한국인 정치 조직인 한인 협회가 설립되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되었다.
[편집] 제2기
한국 전쟁의 종결로 제2기 이민이 시작되었다. 1953년부터 1963년에 걸친 제2기 이민은 대부분이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이나 양자로 기른 전쟁 고아가 차지했다. 이 시기에는 양자를 포함해서 바다를 건넌 사람만 약 15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단지, 군인이 아내로 삼아도 양자로 삼아도 처음부터 미국인 부모의 피부양자로서 입국하므로, 이민으로서 다루어지지 않고, 정확한 통계는 잡을 수 없다.
해외에서 기른 한국인 양자의 문제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끌지 않았지만,1991년에 스웨덴의 한국인 양자를 다룬 영화 수잔 브링스 아리랑이 공개되어 한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1998년에 김대중대통령이 해외의 성인 양자 29명을 청와대에 초대하고,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던 것을 공식으로 사죄했다.
[편집] 제3기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에 의해서 한국 이민이 미국에 들어가기 쉬워진 현재까지가 제3기이다. 이민법 개정이후부터 미국은 한국을 동맹국으로서 취급하면서 미국의 한국인들은 비교적 큰 이민범위를 마련했다. 1965년의 한국계 미국인수는 약 2.5만명이었지만, 1970년에는 5만명,1980년에는 35.7만명, 1990년에는 70만명까지 올랐다. 특히 1980년대에는 약 35만명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 시기의 이민은 경제적 이유 뿐만이 아니라, 북한과의 전쟁 위험이나 국내의 군사 독재 정권을 싫어해 이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 이민은 비교적 고학력자 출신들이 많고, 또 단순 노동자 출신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가족 모두로 도항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미국 각지에 코리아타운을 형성하여 야채 가게나 약국 각종의 소매업, 세탁소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편집] 로스앤젤레스 폭동
- 이 문서의 본문은 로스앤젤레스 폭동입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금을 가지고 미국에 정착했기 때문에, 원래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장사에도 능숙해서 더욱 더 풍부해질수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내의 지위도 비약적으로 향상했다. 한편 사회적·경제적 성공이 다른 궁핍한 유색 인종이나 비워십들로부터의 격렬한 질투를 야기시켜, 또 한편으로도 한국인은 흑인에게의 차별 의식을 숨기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스 큐브의 BLACK KOREA가 나타내 보이도록하듯이 양자의 갈등은 늘어나 갔다. 갈등이 터진것은 1992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폭동(로스앤젤레스 폭동)으로 코리아타운이 흑인의 약탈을 받아 흑인의 약탈행위에 대해서 권총으로 응전하는 한국계 주민의 영상이 텔레비전 방영되는 등, 그 존재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로스 폭동의 피해의 과반을 한국인, 한국계가 감쌌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폭동의 피해자는 한국계 주민 뿐만이 아니라, 히스패닉이나 인도계 주민이 다수 포함되어 가해자측도 흑인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인도 상당수가 참가하고 있었다. 이 비극에 대해서는 미국 사회의 부의 편재가 종래의 백인 vs 비백인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구도에 머물지 않고, 비백인 중에도 존재하는 것을 부조로 하는 결과가 되었다.
[편집] 현재
2000년의 미국 국세조사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은 약 110만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뉴저지주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또2003년의 외교통상부의 발표로는 양자, 아내, 주재원, 유학생등을 포함해 재미 한국인수는 2,157,498명으로 되어 있다. 이민의 물결은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지만, 냉전 체제의 붕괴나 한국의 경제적 약진에 의해, 근년에는 한국의 교육제도를 싫어해 자제에게 조기 영어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민하는 교육 이민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 이민이 모이는 마을에는 크리스트교회가 지어지고 한인회가 조직 된다. 또, 자영업자출신이 많기 때문에 상공회의소에 한인 지부가 설치되기도 한다. 한국 이민의 대규모집중도시에서는 한국계 라디오·방송국이 설립되어 한국어 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편집] 저명한 사람
저명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연방 공소법원 판사를 근무한 허버트 최나 1992년에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 당선한제이 김, 1995년에 헤밍웨이상을 수상한 작가의제이 리등이 있다. 또 한국계 가수로서도 활약하는 박정현(영어이름: Lena Park)도 캘리포니아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이며 린킨 파크(Linkin Park)의 멤버인 조셉 한(Joseph Hahn)과 골프 천재소녀로도 유명한 미셸 위도 유명하다.
- 한국계미국인 리스트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