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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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병도는 과연 친일사학자일까요?
다음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이병도' 항목 중 일부입니다만.
1934년 한국의 언어·문학·역사·민속·미술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진단학보≫를 간행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 발기인은 이윤재(李允宰)·조윤제(趙潤濟)·손진태(孫晉泰)·이상백(李相佰) 등이었다.
≪진단학보≫는 국문으로 된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지로, 일제에 대한 학문적·문화적 저항의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 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학회활동을 중단하기까지 14집을 간행하였다.
친일 사학자였다면 일제의 탄압으로 학회활동을 중단했다는건 말이 안되죠.. 이병도가 친일논란이 등장한 이유는, 조선사편수회 때문인데, 조선사편수회의 작품 '조선사' 에는 요서경락설 까지 포함될 정도로 역사왜곡을 직접적으로 행하기 위한 단체는 아니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내용이 중립성을 훼손한건 아닌지 고려해볼 문제인듯 합니다.
자료출처 : http://hkh336.egloos.com/519391 외
덧붙여서, http://mecry.com.ne.kr/introhistory/sagoan.htm 에서는 식민사관과 이병도의 '실증사관' 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랑케가 시작한 실증주의 사학은 식민지시기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관학 아카데미즘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역사연구 방법론으로 삼았다. 이후 일본인 학자들과는 일정한 차이를 두면서 실증적 연구로 식민사학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적 토 대를 마련해 나갔다.해방과 한국전쟁 후에는 남한 학계의 주된 학풍으로 성장하여, 현재 학계의 주류로 성장했다.
이병도가 비판받는 상대는 소위 '재야사학' 이라고 불리우는 환단고기 측 입니다만. 오히려 그들의 주장과 '식민사관' 이 비슷하면 비슷했지, 이병도와는 거리가 먼거 같습니다. 이병도가 위만조선인설을 주장한 것이라던가, http://orumi.egloos.com/1763156 위의 '진단학보' 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한것은 깡그리 무시하거나, 이병도가 주장한것이 아닌척 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도 주의해야 할 점일 것입니다.--Nunting 2006년 7월 27일 (목) 01:19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