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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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375년 ~ 413년, 재위: 391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군주이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호태왕(好太王), 영락태왕(英樂太王)이라고도 불렸으며, 는 담덕(談德)이다. 묘호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외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이례적인 영토 확장을 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대왕이 사용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있으며,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편집] 생애

즉위 즉시 대방 탈환을 시작으로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석현등 10성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392년) 9월 북으로 비려를 점령하였으며 다시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백제 58성을 점령,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398년에는 숙신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하였고, 400년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신라에서 왜구를 격퇴함에 이어 가야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서쪽으로는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 지역을 확보하였고, 407년 고구려 출신 연나라인 고운(高雲)이 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하여 고구려와 상하 관계를 맺음으로서 서쪽 지역의 안정을 찾았다. 410년에 지배권 내에 있던 동부여를 재차 공략하여 64개성 1400개 촌을 완전 병합하였으며 같은 해 동예(東濊) 역시 완전 병합하였다.

413년 39살의 나이로 의문사하였다.

그의 사후 장수왕이 확장 영토를 기반으로 백제를 완전 점령하고 유연과 함께 현재 내몽골 지방의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였으며, 내치를 다져 나라 안으로도 안정을 꾀하게 되어 고구려는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초기 장군총으로 비정되었으나, 현재는 광개토대왕비와 더 가까이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보고 있다.

전 임
고국양왕
제19대 고구려 왕
391년 -413년
후 임
장수왕
고구려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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