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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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 948년 - 1031년)은 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고려 시대의 명장이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 (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어릴적 이름은 은천이다.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의 (낙성대가 그의 출생지이다)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편집] 생애
- 948년 : 금주에서 태어남. 태어나던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짐. 지나가던 중국사신이 이를 보고 큰 인물이 날것임을 예언함(간혹 한국인 김장길이 지나가다 본 것으로 적혀있으나 사실은 중국사신이 지나가다 본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귀주대첩 후 다시 중국사신이 와서 강감찬을 보고 북두칠성 중의 문곡성이라 칭하였습니다.)
- 954년 : 아버지에게 학문과 무술을 배우기 시작(7세)
- 964년 : 17세 이후 3여년간 세상을 두루 다님.
- 983년 : 3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제술과에 장원으로 급제함.
- 992년 : 정4품 벼슬인 예부시랑에 오름.
- 993년 : 거란의 소손녕이 쳐들어 옴. 서희의 외교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함.
- 1010년 : 거란 왕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옴. 신하들이 거란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홀로 반대하고 현종을 남쪽으로 피난하게 함.
- 1011년 : 한림학사 승지로 승진함.
- 1012년 : 동북면 행영병마사로 취임
- 1014년 : 중추사로 승진함. 군사훈련에 힘씀. 이따금 고려로 쳐들어오는 거란군을 물리침.
- 1016년 : 이부상서로 승진함.
- 1018년 : 서북면 행영병마사가 되어 거란에 침입에 대비함.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옴. 상원수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강물을 이용하여 거란군을 크게 무찌름.
- 1019년 : 뛰어난 지략으로 개경 함락을 단념하고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찌름(귀주대첩). 영파역까지 나온 고려 현종의 뜨거운 환영을 받음.
- 1020년 : 벼슬에서 물러남. 특진 검교대사, 천수현 개국자의 벼슬과 작위 받음.
- 1030년 : 문하시중으로 임명됨.
- 1031년 : 세상을 떠남.
[편집] 주요 행적
1010년(현종 1년)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강감찬은 거란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여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고, 그의 진언에 따라 서희가 거란과 협상에 나서 강동 6주를 취하였다.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 것은 송나라 침략 시 고려가 배후를 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강동 6주도 고려와 전쟁을 오래 끌 경우 송이 자신들의 배후를 칠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전쟁을 종결할 필요성때문에 합의해 준 것이다. 서희도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하여 협상에 임했었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서경은 태조때부터 고려의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한 북진 전진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본래 평양이란 이름도 제2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서경으로 바꾸었던 것이다(이후에도 고려 역사에서 서경은 자주 등장한다).
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하자 서경유수로 재직중이던 강감찬은 거란이 3번째로 쳐들어 오자 상원수로서 고려 군사들을 총 지휘하게 되었다. 개경 점령을 포기하고 귀로에 오른 거란군을 귀주에서 기습 공격하여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입혔다.
안주에서 대기하던 고려군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의주 위원면)에 정예 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귀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이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지금의 의흥義興)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과 정식 외교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거란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당시 고려는 동북 아시아의 평화를 가늠하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 열쇠를 마지막으로 다듬은 사람이 강감찬이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 (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 (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