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좌안과 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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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드니프로 강을 기점으로 크게 좌안(左岸 우크라이나어: Лівобережний 리보베레주니[?], 러시아어: Левобережье 레보베레지예[?], 영어: Left Bank)과 우안(右岸 우크라이나어: Правобережний 프라보베레주니[?], 러시아어: Правобережье 프라보베레지예[?], 영어: Right Bank)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좌안, 우안의 구분은 단순한 지리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 역사적으로 판이한 우크라이나의 두 부분을 지칭한다.

우선 어느 쪽이 좌안이고 어느 쪽이 우안인가를 살펴보자면 드니프로 강이 흘러가는 흑해 쪽으로 보고 서서 왼쪽이 좌안(즉 우크라이나 동부), 오른쪽이 우안(우크라이나 서부)이다. 일부에서는 혼동이 없도록 좌안 대신 동안(東岸), 우안 대신 서안(西岸)으로 칭하기도 한다. 좌안의 거점은 키예프이고 우안의 대표 주자는 리비우다. 사실 드니프로 강은 키예프를 오른쪽으로 끼면서 지나가기 때문에(참고로 나중에 도시가 커지면서 키예프 자체도 좌안, 우안을 거느리게 됐는데 원래의 유서깊은 키예프는 우안 쪽이다) 지리상으로만 말하면 고도(古都) 키예프는 정확하게는 드니프로 우안에 속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좌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17세기 후반에 우크라이나에 진출하면서부터 다른 지역은 몰라도 키예프는 늘 수중에 넣어뒀기 때문이고 그래서 러시아가 개발한 하르키우(러시아어로 하리코프)등과 함께 좌안의 문화(즉 러시아 영향권)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안에서도 서쪽의 갈리치아(우크라이나어로 할리치나) 지방은 20세기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어 우크라이나의 타 지방과의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리비우는 갈리치아에 속한다.

따라서 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좌안은 러시아에 대단히 우호적인 한편 우안은 러시아에 적대적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편견이 존재한다. 이 두 지방의 입장 차이는 역사적 배경을 훑어보면 자연히 이해할 수 있다.

키예프의 모태는 키예프 루시이다 이 동슬라브인들의 첫 국가는 988년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유럽에 진입을 하고 유럽에서도 수준 높은 문명을 구가했다. 그러나 1240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는 초토화 되고 키예프와 우안은 한동안 허허벌판이었다(좌안은 거의 개발되지도 않았었음). 그러다가 키예프와 우안은 14세기 이후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고 17세기에 보흐단 흐멜니치키가 일으킨 코자크 반란이 얼마간 폴란드 지주들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주었지만 그 천하의 흐멜니치키마저도 폴란드와 러시아, 크림 한이라는 세 맹주의 틈바구니에서 도저히 우크라이나 독립(정확히는 무정부 상태)을 채 10년도 지켜낼 수 없었다. 그래서 흐멜니치키가 세 열강 중에 한 나라에 기대기로 하는데 신생 강국에다가 종교를 공유하는 러시아를 택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모든 열강이 그렇듯이 처음에 한 협정은 힘으로 폐기하면서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와 나눠먹고 (키예프와 드니프로 좌안 접수) 19세기에 들어서 폴란드가 망하자 폴란드 지분의 우크라이나 땅까지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리비우를 포함한 갈리치아는 폴란드가 망하고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밑으로 편입됐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러시아 하에 있던 우안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아래에서도 18세기까지 자치를 한 경험이 있던데다 18세기 말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온 옛 폴란드 영토에서 폴란드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폴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이 이곳의 지식인들에게도 자극을 준 것이다. 이들은 폴란드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 시기에 유럽에 번지기 시작했던 공화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접했다. 우안 동쪽의 도시 하르키우를 중심으로 한 하르키우 낭만주의 운동은 무식한 농민들이 쓰는 러시아어의 방언 정도로 간주되던 루시니어를 하나의 독립된 언어, 즉 우크라이나어로 인정하여 문학 활동에 사용하는 등 우크라이나 문화 발전에 힘을 썼다. 이렇게 싹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19세기 초 키예프를 중심으로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서로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는데 여기서 주요 인물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시인 타라스 셰우첸코이다.

한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서쪽의 갈리치아 지방에서도 점차 발달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서양의 합리주의를 문화에 깔고 있고 제국 안에서 다민족의 크고 작은 봉기를 다스리면서 각개 민족의 자주성과 고유성을 어느정도 인정해주는 정책을 취했고 바로 이 점이 갈리치아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인및 타민족과는 다른 자신의 우크라이나성을 자각하고 민족성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또 동쪽으로 러시아 지배하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결국 이들과 동족이라는 범우크라이나주의 노선을 취하게 된다. 즉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좌-우안의 통합을 모색한 것이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문제가 폭발한 1848년의 혁명 이후 황제에게 다양한 우크라이나 민족 문화 활동을 허용하라는 탄원을 제출한다. 이는 폴란드 등의 민족주의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입장과 맞아떨어져 받아들여지고 루시니 최고회의(Головна Руська Рада, Supreme Ruthenian Council)의 설립, 우크라이나어의 표준화와 학교 교육 등 활발한 우크라이나 문화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1905년의 혁명 이전까지는 기본적인 우크라이나 문화 활동도 금지되었던 동쪽의 동족들과 대비가 되는 대목이다. 이때부터 갈리치아 지방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발전의 선봉에 서게 된다.

제정 러시아가 1917년에 무너진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혼란 속에서 1918년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서(西)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령의 우크라이나인들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선언하여 이듬해 동-서 합병까지 선언하였지만 이는 실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갈리치아는 새로 독립한 폴란드에 편입되고 옛 러시아령 우크라이나도 볼셰비키 군에 무릎을 꿇어 독립의 꿈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소련에 편입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갈리치아 지방이 폴란드에서 소련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확립된 것은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17세기부터 러시아령이었던 좌안과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온 우안의 일부, 또 1945년까지 러시아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갈리치아 지방은 서로 판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언어 사용에 있어서 그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러시아의 지배를 오래 받은 좌안은 러시아어를 쓰는 이가 대부분인데 반해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한다. 좌안과 우안을 가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안은 종교 문제다. 좌안은 러시아와 같이 정교를 믿는데 우안은 폴란드 지배하에서 받아들인 합동 동방 가톨릭교(Uniate)가 주요 종교이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지배 초기에 자국의 가톨릭 사제들이 자꾸 살해당하는 등 반발이 심하자 절충책으로 의식은 정교회 예배를 지키지만 가톨릭의 교회 체계를 따르는 합동 동방 가톨릭교를 만들어냈고 시간이 흐르자 이게 우안 우크라이나의 전통 종교가 된 것이다.

소련 시대에도 좌안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비교적 우호적이었고 리비우를 중심으로한 우안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산실인만큼 러시아에 적대적이었다고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 글라스노스티 (Гласность), 페레스트로이카 (Перестройка) 시기에 리비우에서의 잦은 항쟁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좌우안의 성향을 단정짓는 것은 곤란하다. 결국 우크라이나의 독립 의지가 좌우안의 뿌리깊은 차이점을 극복한 것만 봐도 그렇다.

1991년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을 선언하여 사실상 소련의 해체를 주도했다. 이때 국민투표에서 전국민의 90% 이상이 독립을 지지했으며, 특히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 땅이 아니었던 크림 반도(독립 지지율 54%)를 제외하고는 전국을 통틀어 압도적인 지지율로 독립을 택해 좌우안이 일치된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다(키이우 96%, 리비우 97%). 그 후 우크라이나는 구유고 연방의 해체와 같은 분열을 예측했던 많은 관측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이제 독립 10주년을 넘기면서 한 나라로서의 일체감과 정체성을 발전시켜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