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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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1536년 - 1584년)는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덕수, 는 숙헌(叔獻), 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성혼과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다.

[편집] 생애

1536년 강원도 강릉의 죽헌동의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이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어진 어머니이자 슬기로운 아내로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렇게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이이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이이는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 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책들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1551년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이 무렵 신사임당은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병세가 차츰 악화되어 죽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날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다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년만에 산에서 내려왔다.

1558년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 곳에서 2일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고는 하였다.

1564년 이이는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치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서거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외척 심통원이 등용되어 횡포를 일삼았다. 이 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1568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1569년에는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1571년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그러나 1573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지적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해 3월 이이는 대사간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시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 1만 9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558년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선조에게 갖다 바쳤으며,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49세를 일기로 새벽에 죽었다.

[편집] 유적지

경기도 파주시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인 자운서원과 여생을 보낸 누각 화석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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