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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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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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일본어: 加藤淸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년 ~ 1611년)는 일본의 장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외가 쪽으로 6촌이 된다. 다른 6명의 무사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賤ケ岳の戰い)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카무라 출생으로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좀더 커 보이기 위해 모자를 애용했다고 한다. 축성술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편집] 생애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家臣)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크고 작은 전공을 많이 세웠다. 특히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뛰어난 무훈을 선보였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 규슈의 히고(肥後) 남부에서 25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임명되고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의 영지를 고니시 유키나가와 더불어 분할 통치를 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출병하여 함경도로 진격, 조선의 두 왕자들(임해군,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잡는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이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해지자 서생포로 일시 후퇴하였고, 정유재란 때 다시 칼을 들어 선봉으로 진격하였으나 울산성 전투(蔚山倭城)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식량과 물 부족으로 병사의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망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겪었다. 가토 자신도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는 것으로 죽을 고비를 겨우 넘었다.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문치파(文治派) 측과 항상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東軍) 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다. 한편, 가토는 축성에 일가견이 있어 전국 시대 3대 명성(名城) 중 하나라는 구마모토 성을 1607년 축조하였는데,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자신의 성 안에 많은 우물을 만들었다. 가토는 이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 등을 장려하여 현재의 구마모토 시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