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폰 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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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폰 린네(스웨덴어: Carl von Linné ▶[?], 1707년 5월 23일 - 1778년 1월 10일), 스웨덴의 식물학자로서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귀족이 되기 전 이름은 칼 린네우스(Carl Linnæus)이고, 스스로 라틴어 이름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Carolus Linnæus)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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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린네는 목사인 아버지 닐스 잉에마르손 린네우스(Nils Ingemarsson Linnæus)와 목사의 딸 크리스티나 브로데르손(Christina Broderson) 사이에서 1707년에 스웨덴의 남쪽 스몰란드(Småland)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린네는 당시의 왕이던 칼(Carl)의 이름을 따서 세례를 받았으며, 귀족 이름에 붙는 ‘폰(von)’은 후에 얻게 된다. ‘린네(Linné)’라는 성은 그의 아버지가 보리수라는 뜻을 가진 스웨덴 낱말 ‘린드(lind)’에서 스스로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네의 아버지와 어머니 쪽의 가정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린네가 후에 식물학에서 깊은 열의를 갖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가 취미로 하던 정원 꾸미기에서 비롯된다고 린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린네는 소년 시절 주로 가정교사로부터 국민학교 과정을 마쳤으며, 17살이 되던 1724년에 인근 도시 벡셰(Växjö)의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칼은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매우 저조하여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를 근심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고등학교 선생인 요한 로트만의 개인교수에 덕분으로 린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717년 스웨덴 남부 룬드(Lund)에 있는 룬드 대학교의 의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에 역시 요한 로트만의 권고로 전통있는 웁살라 대학교(Uppsala)로 학적을 옮겨 의학과 식물학을 공부하였다. 1730년에는 올로프 루드베크(Olof Rudbeck)가 식물학 교수직을 물러나면서 린네를 강사로 추천하여 학부생으로서 식물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1732년 스웨덴 학술원의 지원을 받아 라플란드(Lappland) 지방으로 5개월에 걸쳐 현장답사와 식물채집 여행을 하였다. 1734년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의사의 딸인 사라 엘리사베트 모레아(Sara Elisabeth Moræa )와 약혼하였다. 당시 스웨덴의 대학에서 거의 박사과정이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의 강단에 서기 위한 필요 조건인 박사학위를 얻기 위하여 린네는 1735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다. 린네는 이미 스웨덴에서 쓴 학위 논문을 갖고 유학길에 올랐가 때문에 하르데르베이크 (Harderwijk) 대학의 박사 과정에 등록한지 4일 후 학위 심사를 받고, 1735년 6월 12일 《Hypothesis nova de febrium intermittentium caus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처럼 빨리 박사학위를 받은 후, 린네는 약 3년 반에 걸쳐 네덜란드의 여러 후원자의 도움으로 식물학 연구에 필요한 좋은 환경과 여가를 얻어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린네는 주저인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를 비롯하여 약 10여 편의 논문을 썼다.
1738년 초여름에 린네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개업 의사 때로는 공직 의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739년 오랫동안 기다린 약혼자 사라와 드디어 혼인을 한 후, 스톡홀름으로 주거지를 옮겨 1741년 웁살라 대학에 ‘의학’ 교수로 초빙되기까지 역시 의사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