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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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1875년 9월 20일, 음력 8월 21일)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조선의 문호개방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늦어짐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자신들이 개항을 강요당했던 그 수법을 자신들이 조선에 써먹고자 한 것이다.
음력 8월 21일(양력 9월 20일)에 일본군은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인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면서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결국 1876년 2월 2일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되어 조선은 개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