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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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다.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시대에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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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약력
- 남북 분단에 맞서 좌우 합작을 추진했고, 토지 개혁을 외쳤다.
-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사법부장으로 선임되었다.
- 1945년 9월 21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중앙감찰위원장을 맡았다.
-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1957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 이승만 정권 하에서 사사오입 개헌의 불법성을 역설하고, 보안법 개악에 반대했다.
[편집] 권력견제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과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는 곧잘 부딪쳤다. 우남이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라고 물었는데, 장관이 말을 못 알아듣자 우남은 재차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2]
[편집] 1차 사법파동
미군정청 사법부장 출신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은 정치 권력과 심심찮게 대립각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의 국보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3]
[편집] 가족
[편집] 기타사항
2001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8∼1964)선생의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6]
한국법조삼성(三聖)기념사업회(상임공동대표 이치백.李治白)는 1999년 12월 3일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에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선생과 서울고검장을 지낸 화강(華剛) 최대교(1901∼1992)선생, 서울고법원장을 지낸 김홍섭(1915∼1965)선생의 동상 제막식 가졌다.[7]
‘부정을 행하기보다는 굶어서 죽는 편이 영광’이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평생 한복을 입고 지낸 그는 사법의 기초를 다졌고 법전 뿐 아니라 3심 제도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사법행정의 제반사를 정한 ‘사법부의 수장’이었다. 가인은 가구조차 없이 살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종원 치안국장의 손아귀로부터 김선태를 석방시켰다.[8]
법조계에선 가인(가인) 김병로(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정부의 압력과 간섭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법조인의 사표(사표)」로 꼽는 사람이 많다. 이승만 대통령이 56년 국회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하다.[9]
[편집] 주석과 참고자료
- ↑ 인권의 역사,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브레이크뉴스] 2003-12-09
- ↑ [동아광장]“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 [동아일보] 2004-11-24
- ↑ 대법관 10명 1년내 교체…대법원 변화中 3차례 사법파동 ‘영욕의 56년 [문화일보] 2005-07-16
- ↑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2001년)
- ↑ 탄핵 열쇠 쥔 헌재 재판관 9인 면면은 [조세일보] 2004-05-14
- ↑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선생 평전 나왔다 [서울신문] 2001-03-23
- ↑ 법조인 김병로-최대교-김홍섭선생 동상 건립 [세계일보]1999-12-03
- ↑ 만물상 [조선일보]1999-12-03
- ↑ 심층취재;한국의 대법원장 [조선일보]1999-08-19
전 임 초대 |
제1대 대법원장 1948년 8월 - 1957년 12월 |
후 임 조용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