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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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김씨 (靈光金氏)는 김 씨 성의 본관 중의 하나이다. 시조는 김시언이다.

2000년 대한민국의 인구조사에서 9,974가구에 3만 2412명이 영광 김씨인 것으로 나타났다.

목차

[편집] 유래

시조는 김심언으로 고려 중기 문신으로 경순대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은열의 3세손이다.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우보궐 겸 기거주가 되었으며 990년(성종 9년) 봉사2조를 올려 성종의 정책수행에 큰 지침이 되었고 1014년(현종 5년)에는 내사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그 뒤 서경유수가 되었다고 한다. 또, 본격화되는 유교적 정치이념 구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현재는 당시의 정치적 정세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사2조에는, 내용에는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자사육조(刺史六條)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서경에 사헌 한 사람을 분견하자는 것이었다. 성종은 봉사 2조를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내용에는 ‘유향’이 『설원』에서 말한 ‘육정육사론’과 『한서』에서 인용한 ‘한자사’의 ‘육조정’을 요점으로 한 것이다. 육정육사는 신(臣)을 정신(正臣)과 사신(邪臣)으로 분류하고,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위한 관리의 도(道)를 논한 것으로 유교의 정치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육정은 ‘성신·양신·충신·지신·정신·직신’ 등 여섯 유형의 정신이며, 육사는 ‘구신·유신·간신·참신·적신·망국지신’ 등의 사신이다. 여기서 그는 현신은 육정의 도에 처하며, 육사의 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한다.

심언의 아들 윤보가 판소부시사를 역임했고, 현손 극검은 태자소사(종2품)를, 6세손 영부는 중서시랑평장사와 판병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특히 고려시대 중앙요직의 하나인 평장사를 많이 배출하여 이 마을을 평장동이라 불렀다. 그러나 영광 김씨는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등이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화를 당할 때 멸문위기에까지 몰렸다가 소수의 생존자들로 인해 간신히 혈맥을 이어왔다.

[편집] 파(派)

각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경파인 정부가 고려 충렬왕때 금오위별장을 역임했고, 후손들이 경기도 파주 및 화성군과 충청도 홍성군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태용을 파조로 하는 장흥파는 그의 증손 찬과 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과 이조참판을 각각 지냈는데, 이들 형제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린 후 장흥으로 낙향한 절신으로 후손들이 오늘날 장흥지방에 집중세거하고 있다.

연(衍)을 파조로 하는 영광파는 호남의 영광군과 정주군 지방에 집중세거하며, 연의 손자 해(該)가 세종 때 갑산 병마절제사와 보공장군을 겸하였으며, 해의 손자 개(漑)는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효행과 학문이 출중하여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

무장파조 효민은 고려에서 서경 유수를 역임하였고, 그의 16세손 성헌은 영조 때 이조정랑을 지냈다.

양사파의 광찬은 고려조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호는 조선때 한성부 우윤을, 손자 맹수는 현령을 역임하여 지평을 지낸 학중과 함께 가문의 대를 이었다.

용강파 에서는 파조 중보가 호조참판을 지냈고, 아들 효흥은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현손 희걸은 아들 몽학과 함께 통정대부에 올라 절충장군에 오른 무지와 더불어 가문을 빛냈다.

삼화파의 무수는 황해도 해주에 살다가 평안도삼화로 이거하여 삼화파를 이루었으며, 예부상서 문경으로 이어지는 강계파는 손자 홍이 목사를 지냈고, 현손 보원이 부사과를, 6세손 서는 공조전서를 역임했다.

[편집] 집성촌

  • 전남 장흥군 장흥읍, 용산면 일원
  • 충남 태안군 남면 원청리
  • 전남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
  • 경남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범서면 척과리
  • 전남 영광군 영광읍 월평리
  •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편집] 유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