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베일 항만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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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베일 항만공사는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을 건설하는 공사이다. 대한민국의 세계 최단기 경제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주요한 사업 중 하나이다. 이른바 중동신화를 시작한 사업으로 불리운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주베일 항만공사는 공사금액만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절반에 맞먹는 9억30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4,600억원)로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렀던 일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9억3114만달러로 낙찰 받았다. 공사를 진행해가던 정주영은 또 하나 아이디어를 구상해냈다.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해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오일쇼크로 침체돼있던 울산조선소에도 일거리를 주고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내놓은 극약처방이었다. 그리고 19번에 걸쳐 이 거대한 바지선 운반작업은 시행됐다. 이처럼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현대건설은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등 중동일대 대형 공사를 잇따라 수주하게 됐다. 1975년 중동 진출 뒤 1979년까지 현대는 약 51억64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1]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배일 항만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펼쳐진 중동건설 붐은 당시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한 중동지역을 발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기폭제가 됐다. 동아건설이 건설한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사업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동아는 1~3단계 수로 공사를 모두 수주하는 기염을 토했다.[2]
한국은 오일쇼크로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어들이는 중동지역에 대한 진출이 국가 경제 성장의 핵심이라고 판단,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1월 30일, 중동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이 지시에 따라 대기업에 대해 중동진출 명령이 떨어지고, 2월 14일에는 한국·사우디아라비아 민간경제 협력위원회를 설립. 4월 4일에는 민간기업가를 대동한 각료급 사절단을 중동에 파견했다. 그 결과 일부 공사를 수주받았다. 그러던 중 1974년 9월, 사우디 젯다시(市)의 미화공 공사를 수주받은 삼환(주)은 공기단축을 하기 위해서 철야작업을 했다. 이때 켜놓은 수많은 횃불이 일대 장관을 이뤄서 젯다시민에게는 구경거리가 되고 화젯거리가 되었다.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파이잘 국왕이 이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고는 “저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공사를 더 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코리아 넘버원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고 그후로부터 많은 공사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횃불신화다.[3]
76년에는 현대건설이 사우디에서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받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9억4천만 달러에 달해 우리나라 해외공사 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 주베일 항만 건설은 공사규모가 워낙 커서 이를 한국기업이 따낸 것 자체가 국제적으로 커다란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자 현대건설뿐 아니라 한국 건설업계가 세계로부터 인정받게 됐다.
이 공사를 설계한 영국의 윌리엄 할크로사는 사우디 정부의 요청에 의해 공사참가 업체를 선정하며 세계적인 건설회사 중 9개 업체를 점찍어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현대는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1975년 7월 뒤늦게 알고 뛰어든 현대는 총력을 기울인 결과 그해 12월 입찰에 초청됐고, 다음해 2월16일 실시된 입찰에서 최저가로 응찰했다.
그러나 경쟁자들은 재정보증 문제와 기술능력 등을 거론하며 집요한 방해공작을 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동 각국은 우리나라 은행의 지급보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제3은행의 복보증을 요구했으며 이것이 우리업체의 중동 진출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어 왔다. 현대는 사우디 정부요원을 한국에 초청, 현대조선소와 울산 및 창원공업기지 등을 시찰시켰다. 그 결과, 사우디 정부는 현대건설이 이미 울산조선소를 자체적으로 건설한 바 있으며 우리나라 은행이 한번도 국제사회에서 부도를 낸 일이 없다는 점과 한국의 중공업발전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야 주베일 항만공사에서는 복보증을 면제해 주었다.
이 공사는 결국 외환은행을 주축으로 한 국내 7개 은행의 보증만으로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 중동의 다른 나라에서도 점차 우리 업체에 대한 복보증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이 공사 수주는 우리나라의 대외신용도를 크게 높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드디어 1976년 6월16일 공사계약이 이루어졌다. 이 공사를 수주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온 국민은 국가적인 경사로 받아들였다. 9억4천만 달러는 당시 환율로 따져 4천5백억원으로, 당시 정부예산의 약 25%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외국 언론에서도 이를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라는 말로 표현했다.
당시 경제개발에 막 착수한 사우디에서는 항만이 태부족이었다. 주베일 일대에 산업항을 건설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우선 호안공사(7천9백m, 금액 1억3천9백76만 달러)와 방파제 공사(1천6백80m, 9천2백만 달러)를 실시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30만t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가 꼭 필요했다. 그렇다면 수심이 30m는 돼야 한다.
그래서 해안에서 12km나 떨어진 수심 30m의 바다 한가운에 30만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유조선정박시설(OSTT)을 건설하는 사업이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소요되는 자금은 총공사비의 34%나 되는 2억9천5백만 달러였다. 총 길이가 3.48km에 달하니, 그 모양은 꼭 대형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해상활주로 같았다.
이 공사를 하기 위해서 30m 수중에 직경 1~2m의 파일을 6백60개나 박았다. 그리고 나서 이 파일 위에 원통형 파이프를 설치하고 그 내부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주입해서 교각 비슷한 것을 만든 후 이 원통형 파이프에다 종횡으로 철제를 연결해서 보강하고는 그 위에다 콘크리트를 타설해서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역사를 1979년 12월까지 완성토록 계약했으니 실제 공사기간은 단지 3년 반밖에 없었다. 더욱이 완공일을 앞당길수록 보너스 상금을 많이 받으며 기간을 넘기면 지체보상금을 물도록 되어 있었다.
OSTT 사업이 가장 시간이 걸리는 부분이었는데, 여기서 한국형 돌관작업이 진가를 발휘했다. 당초 외국 기술자들은 울산조선소에서 부품을 만들어서 공사장에서 조립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그런데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시간은 돈이다. 시간을 단축해라』는 기본지침을 내리고는 시간단축 아이디어를 총동원했다. 우선 OSTT의 철구조물을 쪼개서 89개로 나눈 후(이를 재킷이라고 칭함), 비용을 싸게 하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울산조선소에서 만들기로 했다. 이 재킷 하나 하나 크기가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웬만한 10층 건물만 했으며, 중량은 4백~5백t이나 됐다.
다음은 이렇게 크고 무거운 구조물을 어떻게 운반해서 설치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구조물이 너무 커서 화물선 갖고는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만5천8백t급과 5천5백t급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서 그 위에 OSTT용 자켓을 4~5개씩 싣고, 예인선(터그보트)으로 끌고 간 것이다. 수송거리는 1만2천8백km나 됐으니, 무려 35일이나 소요됐다.
그리고 89개의 재킷을 운반하려니 19차례나 왕복해야 했다.
재킷을 실은 바지선이 태풍이나 풍랑에 휩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간부들은 수송에 들어가기 전 보험에 가입하려 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뭐 보험? 그런 것 필요 없어. 바다에 바지선이 빠지면 보험이 건져주나 문제는 공기단축과 경비절감이야. 보험에 들자면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설사 사고가 났다고 치자. 보험금은 즉각 나오는가, 조사니 뭐니 해서 또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 지금 우리에겐 시간이 돈이야』라고 했다. 그리고는 태풍으로 해난사고가 나더라도 재킷이 해면에 떠 있도록 하는 공법을 마련했다.
수송은 시작됐다. 그리고 성공했다. 재킷 수송작전은 말 그대로 상식을 뛰어넘는 일대 결단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터그보트 1척에 2대의 바지선을 연결, 항해한 것도 세계 최초의 일이었다. 현대가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동에 옮겼을 뿐이었다.[4]
OSTT용 자켓을 실은 선박이 출항하는 것이 확인되면, 막대한 돈이 사우디에서 입금되었고, 현대건설은 19차례의 OSTT용 자켓 수송 선박을 보내면서 매 차례마다 하나의 계열사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하여 현대그룹이 탄생하였다.
주베일 항만사업은 그 엄청난 규모 때문에 현대건설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았는데, 이 사업을 추진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 관철시킨 사람이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다.
[편집] 더 보기
[편집] 주석과 참고자료
- ↑ 정주영씨 별세 / 아버지 잃은 현대號…어디로 항해할까 [동아일보]2001-03-22 41판 04면 4296자
- ↑ [세기를 보내며-20세기 20선] 6. 재계사건 [서울경제]1999-12-19 00면 4422자
- ↑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 한국경제 회고와 전망한국경제 회고와 전망 [월간중앙]1998-05-01 7265자
- ↑ “중동 오일달러를 잡아라” [신동아]1997-07-01 19313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