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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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 1597년 음력 9월 16일 양력 10월 25일
장소 : 명량해협(울돌목)
결과 : 조선군의 승리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이순신 구루시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도라
병력
전선 13척 전선 133척
피해 상황
전선 피해 없음. 대략 100여명으로 추정 전선 31척 격침. 90여척 파손 및 대파.
8000여명 사상 추정

명량대첩(鳴梁大捷)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전투로, 13척으로 133척을 이겨 해전사의 대표적인 전투로 남아 있다.

목차

[편집] 배경

[편집] 조선 수군의 재건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원균과 이억기 등 숱한 장병들이 전사하고, 전선도 대부분 잃었으며, 조선은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때 남은 전선은 12척에 불과했다. 이순신이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어 13척으로 늘었지만, 적군에 비하면 어림없는 숫자였다.

하지만 워낙 칠천량의 패배의 손실이 커서 조정은 한때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今臣戰船尙有十二 - 신에게는 아직 전함12척이 있습니다>, <전함이 비록 작다고 해도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다소 오만할만큼 자신있게 수군폐지불가론을 펴는 바람에 폐지론은 잠잠해졌다. 그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과 병장기를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적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다.

[편집] 왜군의 기동

이때 어란포의 왜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330여척이었다. 이 중 명량해전에 참가한 부대는 구루시마와 도도가 이끄는 133척의 함대였다. 왜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얼마 안되는 조선 수군을 압박해서 물리친 다음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왜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2척의 전선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이무렵 왜군의 분위기였다. 이순신과 전투에서 패배 1호를 기록한 도도 다카도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칠천량 전투의 승리가 왜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이었다.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이번 기회에 이순신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완전히 승리로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한편, 이순신도 왜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출정하였다.

[편집] 울돌목

울돌목(명량해협)에는 현재 진도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가 흘렸다. 울돌목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이다.

조선수군은 이 울돌목에서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5km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적을 유인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 역시 그런 급류에는 이미 어느정도 적응돼어 있었고 오히려 그런 급류를 타고 수가 적은 조선 수군을 단숨에 밀어부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KBS역사스페셜팀에 따르면, 일본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지역은 왜 수군의 탄생지인데 이곳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을 근거로 했던 수군은 구루시마 수군이었다(원래 이들은 해적이었다고 한다). 명량해전의 왜군측 지휘관이었던 구루시마와 그의 수군은 이 시코쿠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물살을 이용해 능숙하게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수군에게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그것만으로는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오히려 왜수군이 울돌목으로 과감하게 진입한 것은 빠른 급류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것으로 추정한다.

[편집] 전투 경과

이순신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싸웠다. 이번에도 이순신은 일본이 조선 수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군의 소함대를 물리쳤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지난 전쟁 기간 동안 최대의 적이었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200여척이 울돌목으로 들어섰다. 이 중 70여척이 입구쪽에 남고 나머지 133척이 해협으로 진입했다. 이때 해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이 해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조선 수군 13척의 전선도 해협으로 들어서서 일본 수군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군 일부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10배가 넘는 적의 기세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km정도 물러나있던 전라 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특히 안위의 군함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 와중에 일본군 지휘관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발견되었다. 안위를 공격하다가 되려 탑승하고 있던 군함이 파괴되어 물에 빠진 것이다. 이 광경을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가 발견했다. 그는 안골포 해전 이후 귀순하여 이순신의 부하가 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구루지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령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어 올려진 구루지마는 격전의 와중에 그의 목을 잘랐다. 잘린 구루지마의 목은 기함에 높이 걸렸고, 조선군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을 잃은데다가 적군에 의해 참수당하고 그 목이 돛대에 매달리는 것을 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거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일본 수군을 덥쳤다. 오후가 되자, 해류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번에는 거꾸로 조선군이 순방향이 되었다. 지휘관을 잃고, 해류때문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너무 좁은 해역에 많은 배가 들어서는 바람에 뒤로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아 일본 수군의 군함들은 마구 엉키었다. 이 기회를 놓칠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아니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과 충파를 거듭했고, 판옥선에 비해 약하여 부딪히면 부서지던 일본의 아다케부네 등은 줄줄이 파괴되면서 일본 수군의 시체와 배의 잔해가 바다를 덮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배가 엉켜 있어서 대충 포를 쏴도 맞았다. 133척의 대함대를 13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되었던 것이다.

오후 4시경, 일본군은 사라졌다. 동서양을 통틀어 해전사에 찾아보기 힘든 13척 대 133척의 전투가 끝났다.

[편집] 결과

[편집] 결과

왜군은 133척 중 31척을 잃었다. 이로써 수륙병진전략은 또 한 번 좌절되었고 왜군은 내륙깊숙이 쳐들어가지 못하고 남해안 일대에 서로 지원이 가능한 거리 내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전략적 승리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가 왜군에 안겨준 심리적 타격은 더 컸을 것이다. 특히 칠천량에서 승리한 직후에 고작 13척의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잃은 배는 얼마 안되지만(파손된 90여척은 수리 후 사용가능하다)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은 예전보다 더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바뀐 전쟁 양상과 더불어 2년간 별다른 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질때까지 2년간 해전은 3회를 기록했고, 나머지는 수군도 육군과 협력하여 남해안 일대 왜성 공격에 참가한 것이었다(물론 명나라의 화평 노력으로 소강상태에 빠진 것도 한 이유다).

[편집] 승리의 원인

[편집] 늘 그랬던 것들

늘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전함과 함포였다.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다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다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덕분이었다. 다만 거북선이 없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효과 좋은 조선군의 무기였다.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였으며, 오늘날 다연장포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전, 박격포에 해당할 비격진천뢰, 대형 로켓 병기라 할만한 대장군전 등 신무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일본은 화포 주조 능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있는 화포도 갑판 바닥에 고정해서 사용하지 않고 상부 구조물에 매달아 사용했다. 배가 약해서 포의 반동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공중에 줄로 주렁주렁 매달린 화포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지휘관과 병사들의 의지 및 능력, 그리고 주변 지형 환경 등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다. 칠천량 해전과 명량해전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편집] 명량에서 승리 요인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과 병사들의 사기야 말로 명령 해전의 승리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은 울돌목에 철쇄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은 해협에 설치된 ‘철쇄’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포의 해양방어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미터 안팍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미터 안팎의 쇠사슬이면 충분하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여 4톤 정도로 추정했다.

<KBS 역사스페셜팀〉은 당시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재현했다. ‘수중 철쇄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왜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왜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왜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병사들의 사기 또한 중요한 요인이다. 제 아무리 병기가 좋고, 전략이 좋아도 이를 수행할 병사들과 중간 지휘관들이 이순신을 따라주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편집] 명량해전에 대한 다른 의견

명량해전 전투 위치와 철쇄 사용 문제에 대해 다른 주장이 있다.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현역 해군 소령)의 주장이다.

[편집] 전투 위치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亂中日記) 9월16일 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함대의 접근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 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편집] 철쇄 사용 문제

또, 명량에서 철쇄를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철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해전에서 철쇄는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철쇄는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랜동안 이순신의 신화를 벗겨내고 사실을 조명하겠다는 소장파 학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앞으로 관련 전사 전문가들이 보다 정확한 검증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편집] 기타

[편집] 명량대첩기념비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명량대첩기념비가 있다. 숙종 14년(1688년)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 보물 제 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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