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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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croisade)은 역사적으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의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한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

목차

[편집] 원인 및 배경

3세기 이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순례 여행이 안전하고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양쪽의 상황이 모두 안정되어 있어야 했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하킴은 11세기 초에 선임자들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자 및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성지 순례 여행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1050년 무렵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면서 순례 여행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따라서 유럽은 성지를 이슬람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였고 당시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권의 공격에 시달렸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잃을 지경이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고양시켰다. 곧 전 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약 200여 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편집] 전개

[편집] 제1차 원정

[편집] 제2차 원정

[편집] 제3차 원정

[편집] 제4차 원정

[편집] 알비 십자군

[편집] 어린이 십자군

[편집] 제5차 원정

[편집] 제6차 원정

[편집] 제7차 원정

[편집] 제8차 원정

[편집] 결과 및 실패의 원인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걸출한 지도자였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 인해 야기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편집] 십자군 전쟁이 끼친 영향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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