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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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618 – 907 무주 690 – 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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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 907 – 960 |
요 907 –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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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960 – 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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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 – 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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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 금 1115 – 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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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 – 1368 | |||||||
명 1368 – 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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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1644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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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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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907년~960년)은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화남과 화북의 일부을 지배했던 여러 지방정권(십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목차 |
[편집] 역사
오대십국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써의 당나라는 875년~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것이나 다름없고, 그 후 장안을 중심으로 관중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여 주전충과 이극용등 절도사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황소의 난 시점부터 설명하겠다.
[편집] 당나라 완전멸망때까지
당나라의 중앙정부는 755년~763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에 의해 많은 힘을 잃어버렸다. 이를 틈타 각지의 절도사 세력은 자립성이 강해져 자신들의 임지을 스스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먼 지방의 절도사중에는 중앙에 대한 납세마저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역대 황제들은 억제책을 고안해 부분적으로 절도사를 누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용했던 환관세력이 이번에 힘을 갖게되어, 정치에 참여하는것을 용인함으로써 황제의 폐립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폐단으로 중앙정부는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다시 절도사들은 고개을 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했다. 정부군은 추락할때까지 추락하여 별로 강하지 않은 황소군에 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그중에는 황소군을 전멸시키면 자신들의 입장이 위험해진다는것을 두려워해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했고, 황제 희종은 촉으로 도망쳤다. 당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황소군이 장안에서 폭정을 일삼아, 장안시민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와중에도 당나라 정부에서는 장안을 회복할만한 실력이 없었다. 여기서 활약한 이들이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한 주온(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으로 이 두사람의 활약으로 장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당나라의 실력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황제는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주의 동천(東遷)이후(춘추시대)나 후한말기 헌제등의 상황과 비슷하였다.
이 시기 중앙을 두고 다투었던 이들이 변주(汴州;현재의 카이펑)을 중심으로 산동,하남을 지배한 주전충과 태원을 중심으로 산서을 지배하던 이극용등 두사람 정도였고, 하북을 지배한 유인공이나 섬서일대을 지배한 이무정등이 있었다. 그외의 기타 지역에서도 자립한 이들이 많아 후에 10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극용의 군대는 검은색 의복으로 통일하여 이들을 통칭 [갈까마귀군(鴉軍)]이라 불렸고 전투에 매우 강했지만 횡폭한 행동을 많이 했었다. 주전충은 정략(政略)에 뛰어나 다른 누구보다도 한발 앞섰다. 당조정을 장악한 주전충은 황제을 꼭두각시화하고 907년 협박하여 선양을 받아 후량(국호는 단순히 양(梁)이었다. [후](後)의 글씨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을 건국하였다. 이로써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편집] 오대
[편집] 후량
주전충이 황제가 된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각지의 세력은 스스로도 황제을 자칭했다. 또한 후량과 대립하는것을 바라지 않는 화남의 여러 나라중에는 후량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주전충의 숙적이었던 이극용은 908년에 사망했고, 뒤를 계승한 이존욱(후당의 장종)은 후량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후량측에서도 주전충의 실정과 추락이 심해 차례로 영토을 빼앗겼다. 거기에다 주전충은 후계자을 선택하는것에도 실패해 내분을 초래했다. 이를 지켜본 이존욱은 연왕을 칭하던 유인공을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병합했다. 자신감을 가진 이존욱은 923년 당황제을 자칭하고 이후 후량의 수도을 함락시켜 후량을 멸망시켰다.
[편집] 후당
이극용들의 이(李)씨성은 공적에 의해 당나라로부터 국성(國姓)을 하사받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것을 이유로 장종은 스스로가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고 후당을 건국하게 되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뒤이어 기왕(冀王)을 자칭한 이무정, 사천을 지배한 전촉을 멸망시켜 영토을 확대했다. 그러나 장종의 생각은 당나라의 위광을 되살리는것으로 낙양으로 천도하고, 주전충이 폐지했던 군대에 환관을 감찰로써 파견하는 제도를 부활시켜 무장들의 불만을 샀다. 이 불만이 926년 무장들에 의해 이사원(후에 명종)이 옹립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사원의 군이 낙양에 육박하자 금군(근위병)들에 의해 장종은 살해당했다.
즉위한 명종은 환관의 배제와 절약등을 꾀하며 전국토지의 검사를 실시해 불공평에 대한 시정에 노력하였고, 새로운 재무기관으로 삼사사을 창설했다. 또한 자신같은 유력군인에 의한 제위탈취을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직속군인 시위친군을 창설해 금군의 강화을 꾀했다. 이 삼사사는 후에 송나라에도 이어지게 된다. 명종은 오대의 나라들중에 후주의 세종(시영)에 버금가는 명군이라 칭송받았다.
[편집] 후진, 후한
그러나 명종은 재위에 오른지 겨우 6년(933년)만에 붕어했다. 3남 이종후가 뒤를 이었으나 곧 양자인 이종가에 의해 찬탈되었다. 또한 이종가는 권력의 안정을 노려 명종의 사위이며, 실력자였던 석경당을 배제하기에 이른다. 석경당은 이에 대항했으나, 혼자 힘으로 대항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아 북쪽의 거란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의 할양을 약속했다. 이에 응답해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몰아냈다.
936년 즉위하여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고조)은 요나라에게 신종하여 후진은 요나라의 위성국가였다. 중앙의 상황을 본 지방세력은 등을 돌려 남쪽의 오에게 넘어갔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속출했다. 이 진압에 나섰던 고조는 942년에 병사했다. 후에 조카 석중귀가 이었으나 그의 즉위는 거란에 대한 강경파에 의해 이루어진것이기 때문에 강경외교에 의해 거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946년 거란(다음해 국호을 요나라라고 하였다)의 태종은 다시 친정에 나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이때부터 중국을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만족(蛮族)과 같이 천시하던 거란족에게 지배 당하는것을 싫어한 카이펑의 주민들은 저항하고, 또 거란의 본토에서는 중국지배에 대해 반대의식이 강하여 곤란함을 깨달은 태종은 북쪽으로 돌아갔으나 도중 병사했다.
이것을 방관했던 석경당의 예전 측근인 유지원은 자신의 임지였던 태원에서 947년에 즉위해 후한 을 건국하고 군대을 이끌고 남하하여 947년 카이펑을 점령했다.
그러나 유지원은 다음해 사망하고, 차남 유승우가 뒤를 계승했다. 유제을 보필하게 된 측근들은 후한의 유력자들을 배제하는데 노력하여 차례로 군인들을 주살했다. 반란진압에 나섰기에 이를 모면한 추밀사의 곽위는 스스로도 숙청을 피하는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병사을 일으켜 카이펑을 점령하고, 자신을 주살하려던 측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후 한때 유승우의 사촌이었던 유찬을 옹립하였으나 생각을 고쳐 유찬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했다. 유찬의 아버지 유숭은 북쪽에서 자립하여 북한을 건국하였다.
[편집] 십국
그럼 여기서 북한이외의 10국의 흥망을 살펴보자.
10국중 가장 강력한 국가는 중국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지대에 자리잡은 오 라고 할 수 있다. 건국자인 양행밀은 양주(揚州)일대을 장악하고, 북쪽의 후량과 호각지세을 이룰 정도로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오나라는 양행밀의 사후, 휘하의 서온(徐温)의 힘이 커지면서 최후엔 서온의 양자 서지고(徐知誥)에 의해 찬탈당한다. 서지고는 찬탈후 이름을 바꿔 이승이라고 불렀고,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국호을 당이라고 하였다. 후세 역가사들에 의해 이 나라는 남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같은시기 남쪽 절강지역에는 오월이 세력을 확장했다. 건국자인 전육(銭鏐)은 소금 밀매상의 신분에서 일어나 절강일대을 장악했다. 북쪽의 강력한 오나라, 남당과 대치했기에 항상 화북의 오대의 나라들에게 신종하면서 오나라, 남당에게 대항했다.
오월의 남쪽 복건성지역에는 절도사 왕심지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민(閩)을 건국했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써 복건지역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왕심지 사후 내분이 일어나 이 기회을 틈타 침략한 남당에 의해 945년 멸망하였다.
호북성에선 형남(남평), 호남성에선 초, 광동성에서는 남한 이 할거했다. 형남은 10국 중 가장 최소국으로 주변 여러나라 전부에게 신종하여 교역의 중계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초나라는 차의 교역으로 번영한 국가로 건국자 마은의 치세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나 사후 내분사태에 빠져 951년 남당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한의 통치자 유씨는 아랍계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궁정은 오대십국의 전란속에서 유일하게 문관의 힘이 강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의 정치도 몰락하고 환관정치로 변질되었다.
사천성은 양주와 함께 부유한 나라였기에 [천부](天府)라 불려졌다. 이곳에서 할거한 나라는 전촉, 후촉의 정권이었다. 전촉의 건국자 왕건은 원래 소금 밀매상이었으나 사천성에 들어와 이곳을 장악하고 이땅의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문인의 보호와 경서의 인쇄을 진행하는등 문화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전촉은 925년 후당에 의해 멸당한다. 그후 이 땅에 부임한 무장 맹지상이 자립하여 후촉을 건국했다. 후촉도 전촉과 마찬가지로 문화진흥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당나라말기부터 사(詞)을 모아 [화간집](花間集)을 편찬한 것은 이 시대의 문화을 전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중원의 오대왕조는 구 당나라 왕조 영역의 6할을 차지했으나, 국내정세의 불안정에 더해서 거란등의 외적이란 요소도 포함되어, 10국의 평정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불안정하게 세력균형이 유지되어갔다. 다만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가 형남, 남당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균형은 일거에 무너지게 되었다.
[편집] 후주
즉위한 태조 곽위는 내정에 뜻을 두고, 형벌의 완화와 자작농의 양성 및 세제의 불공평을 시정하는등의 정책을 펼쳐 연이은 전란에 황폐화된 중원의 부흥에 나섰다. 이런 축척된 힘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의 대망을 품게 된 이가 954년에 즉위한 시영(후에 세종)이었다. 세종은 오대의 국가중 가장 훌륭한 명군으로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세종이 즉시 실시한것은 자립성이 강한 군인들을 억누르는것 부터였다. 그 군인들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시위친군이 강대화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분할하여 전전군(殿前軍)을 창설하였고, 이를 강화하여 절도사 및 금군사령관도 황제에게 대항할수 없게 만들었다. 이 병력을 바탕으로 남당, 후촉, 북한, 요나라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을 빼앗았다. 그중에서도 남당에게서 빼앗은 토지는 소금의 산지로써 가장 중요한 지역도 포함되었기에, 이 땅을 차지한 것은 남당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한것이라 말해도 좋은 것이었다.
또한 군사비을 모으기 위해 폐불운동을 진행했다. 중국에서는 삼무일종의 법난이라 일컫는 폐불운동이 일어났었는데, 일종이 세종의 때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비과세인인 승려로 가장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을 가려내 징세을 실시한다면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당시는 화폐을 주조하는 동이 부족했었기에 불상등을 녹여 재이용해 [주원통보](周元通宝)라고 일컫는 동전을 주조하였다.
통일을 향해 착착 일을 진행시키던 세종이었으나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병사하고 말았다.
[편집] 송나라
세종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겨우 7살의 시종훈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북한은 요나라의 후원을 얻어 후주을 침공하였다. 이를 막기위해 나선 인물이 세종의 제일 측근이었으며, 전전도점검(殿前都点検;금군사령관)이었던 조광윤(후에 송나라 태조)이었다.
어린 황제을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조광윤을 강제로 옹립하였다.(진교의 변) 수도에 돌아온 조광윤은 시종훈을 보호하며 선양을 받아 송나라(북송)을 건국하였다. 오대에서는 선양(禅譲)은 언제라도 일어났었고, 그때까지 선양에서는 양위을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종훈은 무사히 생애을 보냈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때까지 두터운 보호을 받았다.
태조는 이때까지 군인이 정치을 맡았던 오대의 경향을 고치고 [문치주의]을 내세웠다. 과거의 정비 및 지방군대의 약체화와 중앙군의 강화, 절도사직의 무력화등을 진행해 내부을 튼튼하게 한 태조는 후주 세종의 노선을 물려받아 통일에 대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즉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그때 10국은 동서로 분열되어서 단결하여 송나라에 대항하는것이 어려웠다. 뒤이어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비용을 보충하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이제 남은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이것은 동생이며, 2대황제 태종이 된 조광의에 의한 독살의혹이 일어났다.(천극불결의 의) 태종은 태조의 방침을 이어받아 통일을 진행해 978년 오월을 멸망시키고, 979년 북한을 멸망시킴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멸망때부터 약 70년만의 일이었다.
[편집] 주요 국가들
[편집] 오대
나라명 | 시조 | 존속기간 |
---|---|---|
후량 | 주전충 | 907년 - 923년 |
후당 | 이존욱 | 923년 - 936년 |
후진 | 석경당 | 936년 - 946년 |
후한 | 유지원 | 947년 - 950년 |
후주 | 곽위 | 951년 - 960년 |
[편집] 십국
나라명 | 시조 | 존속기간 |
---|---|---|
전촉 | 왕건 | 907년 - 925년 |
후촉 | 맹지상 | 934년 - 965년 |
오 | 양행밀 | 902년 - 937년 |
남당 | 이승 | 937년 - 975년 |
형남 | 고계흥 | 907년 - 963년 |
오월 | 전육 | 907년 - 978년 |
민 | 왕심지 | 909년 - 945년 |
초 | 마은 | 907년 - 951년 |
남한 | 유은 | 909년 - 971년 |
북한 | 유숭 | 951년 - 979년 |
십국이외 기타세력
나라명 | 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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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이무정 |
연 | 유수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