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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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마 시민인 보조병(Auxilaries,라틴어 Auxilia-보조하다)은 원수정 시대( 30BC - 254AD )에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단병과 같이 로마 군대를 형성했다. 2세기에 들어, 보조병은 군단병과 같은 수의 보병, 추가로 거의 대부분의 로마 기병과 경기병과 궁수와 같은 전문화된 부대를 제공했다. 그러므로 보조병은 당시에 로마 군사력의 2/3을 차지했다.
보조군은 카라칼라 칙령 이전에 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속주 거주민으로부터 모병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시대에는 야만족으로부터도 모집했다. 이것은 로마 시민으로만 구성된 군단병과 구분되는 점이다. 보조병은 기원전 3세기 이후로 로마 공화국이 군단을 보조하도록 구성한 기병을 포함한 비 이탈리아 군대로부터 발달하였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30BC - 68AD ) 시대에 임시적인 징집군들은 표준화된 구조, 무장, 근무 환경의 정규군 부대로 전환되었다. 이 왕조의 말기에는 군단병과 대다수 보조병의 훈련, 장비, 전투 능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
보조군은 주로 병사들이 모집된 속주에 주둔되었다. 대부분의 보조군 부대 명칭은 4세기까지 존속하였지만 이전 시대의 보조군과는 병력 수, 구조, 질적 면에서 차이가 났다.
[편집] 역사적 전개
[편집] 공화국 시대( ~ BC 30)
로마 군대의 핵심은 군단병이었다. 군단병은 수백년간 중보병으로서 적절한 지형에서의 근접전에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군단병은 기병의 부족 같은 몇몇 결점으로 기원전 3세기 경에 4,200명의 보병은 오직 300기의 기병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자기 말과 무장을 구입할 시민(기사 계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군단은 투석병(slinger)와 궁수(archer)같은 장거리 무기를 사용할 경보병도 부족했다.
기원전 3세기까지 로마 기병의 대다수는 라틴 동맹으로 알려진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으로부터 제공되었다. 이것은 기원전 91~88년까지의 동맹시 전쟁까지 유지되었다. 공화국 시기의 라틴 군대는 후의 아우구스투스 대의 보조병과 유사했는데, 그것은 군단병 표준으로 조직되고 무장된 군단병과 같은 수이고 대다수의 기병을 제공하는 비 로마 시민 군대라는 점이다.
라틴 군대는 Alae(날개)로 배치되었는데. 로마 지휘관이 지휘하는 동맹군 날개는 군단병과 보병 규모, 무장, 구조면에서 군단병과 유사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병에 대해 더 많이 의존했다는 점이다. 기병은 900기였고, 군단병의 3배였다. 동맹시 전쟁 이전에는 집정관 군대는 동맹군과 군단병을 같은 수로 유지했고, 기병의 3/4는 라틴 동맹 기병이었다. 전체 기병 규모는 많지 않았다. 보통의 집정관 군대는 2개의 군단과 2개의 동맹군 군단으로 16,800명이었고, 기병은 2,400기였다.(전체의 13%)
로마/라틴 기병은 산악지대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역시 기병이 약한 다른 국가와 전투할때는 효율적이었지만 로마는 곧 더 강한 기병을 가진 적들과 대면했고, 기병의 약함은 큰 패배로 이루어졌다. 이런 위협은 골족의 산발적인 대규모 이탈리아 침공과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의 원정(기원전 275)에서 보여졌다. 확실한 전환점은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년)이었다. 트레비아와 칸나에에서의 승리는 로마와 라틴 기병대를 압도한 스페인과 갈리아 기병과 로마군이 전혀 가지지 않았던 기민한 누미디아 경기병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전쟁을 종결지은 자마에서의 로마의 결정적 승리에서는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가 제공한 로마/라틴 기병대보다 2배가 많았던 누미디아 기병대가 큰 역할을 했다. 그때부터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 갈리아 기병같은 비 이탈리아 기병을 대동했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기원전 58~51)시에 갈리아와 게르만 기병들을 사용했다.
현지인 기병의 역할이 커지면서 로마/라틴 기병대의 역할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 초반에 로마 기병대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동맹시 전쟁 이후에 동맹시 시민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그리하여 라틴 동맹군도 폐지됐다. 게다가 로마 기사계급은 이때부터 기병으로 복무할 필요가 사라졌다. 그러므로 후기 공화국 군대는 완전히 현지인 기병에 의존했다.
한니발 전쟁 전에 로마 군단은 비 이탈리아 특수병들을 이용해 다른 결점을 보완했다. 리비우스는 시라쿠사의 히에론이 기원전 217년에 궁수와 투석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제공했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2세기 이후로 특수병들은 용병으로서 고용되었다 이들은 크레타 궁수,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이었고, 지중해 전역에서의 전쟁에서 로마 군단병을 호위했다.
비 이탈리아 군대의 주요한 공급원은 속주, 동맹시, 그리고 로마의 속국들이었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비 이탈리아 군 부대는 현지 지배자가 지휘했고, 그 군대의 조직은 지배자에게 맡겨졌다. 부대들은 복장, 장비, 무기에서 매우 다양했다. 이러한 부대들은 특정한 원정시에만 유지되었고, 그 이후에는 주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