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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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李創用, 일본식 이름:廣川創用[1])은 한국의 영화 촬영기사이며 영화 제작자이다.

1920년대 중반 나운규 사단에 합류하여 나운규의 영화에 촬영기사로 참가하기 전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학생 신분으로 영화판을 기웃거렸던 인물'로서 나운규의 촬영조수로 일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2]. 후에 일본의 신흥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다[3].

《풍운아》(1926)를 시작으로 《금붕어》(1927), 《잘 있거라》(1927), 《들쥐》 (1927), 《사랑을 찾아서》(1928) 등 나운규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를 촬영했다. 모두 가난한 식민지의 현실을 날카롭게 그리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제국주의를 우화적으로 풍자한 《들쥐》와 만주 독립군을 간접적으로 다룬 《사랑을 찾아서》에는 반일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들쥐》는 개봉 이튿날 상영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4].

1931년 이필우 등과 함께 영화동호인회를 결성한 후로 1930년대에 한동안 활동이 없다가, 1940년대 국책영화 시기에 영화 제작자로 영화계에 돌아왔다. 《승리의 뜰》 (1940), 《수업료》 (1940), 《복지만리》 (1941), 《집없는 천사》 (1941), 《풍년가》 (1942), 《망루의 결사대(일본어: 望樓の決死隊) 》(1943)를 제작했는데,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만 있는 친일 영화들이다. 《승리의 뜰》은 중국 침략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선무영화이며, 《망루의 결사대》도 만주 지역 국경지대에서 일본이 마적단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9년 친일 영화인 단체 조선영화인협회의 이사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고[5], 1940년 조선영화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총독부가 발족시킨 조선영화제작자협회에 고려영화협회 대표로 참여했다[6]. 2005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영화 부문과 전쟁협력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 좌익 계열이 중심을 이룬 영화인 단체 조선영화동맹에 가담[7]했고, 1946년 미군정 하에서 국립극장 설치 논의가 있을 때 부극장장으로 발표된 바 있다[8].

[편집] 참고자료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이창용
  • 편집부 (2003-02-03). 《한국영화사연구》. 서울: 새미, 195~196쪽. ISBN 8956280614.

[편집] 주석

  1. 우카이 사토시 (2005-12-30). 《반일과 동아시아》. 서울: 소명, 248쪽. ISBN 8956261989.
  2. 한상언, 한국영화스타6-②/ 영화배우 주인규 - 남북 모두에 잊혀진 존재로 남은 '주인규' 《오마이뉴스》 (2007.1.19)
  3. 편집부 (2003-02-03). 《한국영화사연구》. 서울: 새미, 72쪽. ISBN 8956280614.
  4. 예술의 전당, 들쥐
  5. 이효인, 영화계 친일행위의 논리와 성격 《디지털 웹진 Now Art》 (2002년 광복 57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 문화예술의 친일 논리와 성격)
  6. 1940년 조선영화령이~: 서울특별시, 한국영화의 수난 《서울 六百年史》
  7. 유민영, 8·15 해방과 문화예술 재건 운동 - 인습과 오명에서 벗어나려는 정치적 움직임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 (2003년 8월호)
  8. 1946년 미군정 하에서~: 국립극단, 국립극단의 화려하고도 짧았던 꿈 : 50년 전을 회고하며 (차범석) 《국립극단 5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