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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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수(鄭春洙, 일본어: 禾谷春洙, 1875년 2월 11일 ~ 1951년 10월 27일)는 한국감리교 목사로,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질되었다. 아호는 청오(靑吾)이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이다. 1904년 원산에서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한 뒤, 경성신학교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그는 부흥회 집도에 특히 능력을 보였고, 원산의 교회에서 근무 중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정춘수는 그해 2월 서울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원산으로 돌아가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조직한뒤 당일에 기차편으로 상경했으나, 태화관 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였기에 자수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개성의 교회에서 근무하고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서울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으로 피선되었고 내선일체에 철저히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신사참배에도 앞장서는 등 조선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서 광복때까지 친일 행각을 계속했다. 개신교 내부의 사상 검사 단체로 일제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를 독려한 총진회 회장, 전시 총동원 체제 건설을 위한 친일 단체들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 그리고 친일 종교인 모임으로서 개신교 교인들의 지원병 참전을 부추긴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1944년)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감리교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던 정춘수의 이러한 친일행적은 해방 이후 감리교의 재건파가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1947년)에서 폭로했으며,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두달간 구금되었다. 교단 내에서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거센 비판이 계속되자 정춘수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는 체 했을 뿐이라며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을 보였다. 1949년 명동성당에서 천주교로 교회를 옮겼으며, 한국 전쟁 발발후 고향에 피난해 있던 중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사망했다.[1]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인 손병희, 신석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과 함께 동상이 설치되었다가, 친일 행적과 관련된 항의로 현재는 철거된 상태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2005년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7.1). “7. 종교, 정춘수 :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승태 집필)”,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139.

[편집] 주석

  1. 일본개신교회사/김수정 지음/홍성사
민족대표 33인
그리스도교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천도교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불교 : 한용운 백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