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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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정약용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정약용(丁若鏞, 1762년 경기도 광주 ~ 1836년, 호 茶山, 與猶堂)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으로,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기도 했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편집] 생애

1762년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난 후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1776년에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고,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학문을 접한 후 그를 사숙(私淑)하여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1783년에 생원이 되고 1789년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94년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년 등을 암행하고 이듬해 1795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자 천주교 신봉에 대한 소명 상소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그해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1799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으로 사퇴하였다.

1800년에 정조 임금이 승하하자 노론 벽파의 탄핵으로 귀양길에 올라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 유배되었다.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1818년 8월에 귀양이 풀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1836년 2월 22일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주요관직: 동부승지(1795년), 형조참의(1799년)

[편집] 저서

목민심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경세유표
흠흠신서
흠흠신서
  • 주요저서
    • 《목민심서》
    • 《경세유표》
    • 《흠흠신서》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마과회통》
  • 기타저서
    • 《맹자요의》
    • 《논어고금주》
    • 《춘추고징》
    • 《역학제언》
    • 《상서지원록》
    • 《주역심전》
    • 《사례가식》
    • 《상례사전》
    • 《악서고존》
    • 《상서고훈》
    • 《매씨서평》
    • 《모시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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