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기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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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 1118년 ~ 1181년 3월 20일)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이다. 이세 헤이씨(伊勢平氏) 동량(棟梁;가문의 수장(首長)) 타다모리(忠盛)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헤이씨의 동량이 되었다.
호겐의 난(保元의 亂)에서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의 신뢰를 얻었고, 헤이지의 난(平治의 亂)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을 토벌하여 무사로써는 최초로 다이죠다이신(太政大臣)에 임명되어져 [헤이씨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광의 시대을 쌓았으나 불화을 일으킨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는등의 교만함을 부린 헤이케(平家)는 무사들의 불만을 사서 겐지(源氏)에 의한 헤이케 타도의 병사가 일어나던 시기에 기요모리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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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헤이케의 동량
겐에이(元永) 원년(元年;1118년) 이세 헤이씨의 두령이었던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의 장남으로 이세 産品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원여어, 그외 그녀의 누이라는 여러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서는 시라카와 천황(白河法皇)의 아들을 임신한 원여어을 법황이 다다모리에게 하사해 태어난 이가 기요모리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기요모리는 시라카와 법황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사실, 기요모리는 어린시절에 시라카와 법황에게 총애을 받았다는 경유도 있다.
다이지(大治) 4년(1129년) 종(從) 5위하(位下) 좌병위좌(左兵衛佐)에 서임되었다. 규안(久安) 2년(1146년) 부친 다다모리는 해적토벌의 공적으로 형부경(刑部卿)으로 승진하여 이전 벼슬을 기요모리가 물려받아 종 4위하 중무소보(中務少輔) 겸 아키노카미(安藝守)가 되었다. 세토내해(瀨戶內海)의 제해권을 손아귀에 쥐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며, 부친과 함께 서국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또 그 시기부터 미야시마(宮島)의 이즈쿠시마 신사(嚴島神社)을 신앙으로 삼았고, 닌페이(仁平) 3년(1153년)에는 다다모리의 사후 교토(京都)의 이세 헤이지 일문의 두령이 되었다.
[편집] 호우겐의 난, 헤이지의 난
호우겐 원년(1156년)의 호우겐의 난 시기에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함께 고시라카와 천황측에 가담하여 승리을 거두고 고시라카와 천황의 신뢰을 얻어 하리마 노카미, 다자이다이쇼(大宰大式)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기요모리는 후지와라노 노부사이(藤原信西; 혹은 미치노리(通憲)와 손을 잡고 권력강화을 꾀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賴)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159년의 헤이지의 난이라 불리는데, 이 난에서 기요모리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을 주살하고 거기에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을 시작으로 수많은 겐지일족을 처형하지만 요시토모의 3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살려주어 이즈국(伊豆國)에 유배시켰다. 이 난의 진압으로 인해 기요모리는 무가정권(武家政權) 수립의 기초을 쌓았다고 일컬어지게 된다.
[편집] 전성기
그후 처음에는 니죠(二條)천황의 친정(親政)을 지지했으나 아내 다이라노 도키코(平時子)의 누이동생이었던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후에 겐슌몬인(建春門院))와 시라카와 상황(上皇)사이에서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후에 타카쿠라(高倉) 천황)이 태어나자 헤이케 일족사이에서는 노리히토 친왕의 즉위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이에 반발하여 니죠 천황이 토키코-시게코의 오빠였던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을 유배형을 내렸기 때문에 기요모리도 차츰 고시라카와 상황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 니죠 천황이 급사하자 기요모리는 상황과 모의하여 노리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만들었다.
이후 얼마동안은 고시라카와 상황과의 밀월은 계속되었다. 관위도 1160년에 정(正) 3위 참의(參議), 1161년에는 검비위사(檢非違使)을 별도로 담당하고, 1165년에는 병부경(兵部卿)을 겸임하여 권대납언(權大納言), 1166년에는 정 2위 춘궁대부(春宮大夫)에서 내대신(內大臣)으로 승진을 계속하여 1167년에는 무사로써는 처음으로 유래가 없는 좌대신(左大臣), 우대신(右大臣)을 거치지 않고 이례적으로 종 1위 다이죠다이신이 되었다. 말하자면 기요모리는 무사로써는 처음으로 신분의 한계을 극복해 낸 것이다.
하지만 이후 중병에 쓰러져 한때는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 시기 병은 복통이 있다고까지 말하여 졌는데, 이것을 이유로 키요모리는 3개월정도 다이죠다이신을 사양하고 은거하여 입도(入道;입적)하여 이후에는 상국뉴도(相國入道)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권은 놓치않고,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했다.
그 사이 헤이케 일족은 융성이 극에 달해 일족이 주요관직을 독점하고, 전국에 500여개의 장원(莊園)을 보유하면서 송나라와 교역을 추진하여 막대한 재화을 손에 쥐게되었다. 다이라노 도키타다가 말한 [헤이씨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편집] 헤이케에 대한 불만
기요모리는 권세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카쿠라 천황에게 자신의 딸인 다이라노 도쿠코을 시집보내고 천황의 외척이 되었다. 거기에 기요모리는 딸 다이라노 모리코을 셋칸케(攝關家;가마쿠라시대에 성립된 최고귀족의 가문의 일부)의 후지와라노 모토자네(藤原基實)에게 시집보내는것을 시작으로 많은 자녀을 유력 공가(公家;귀족)집안등에 시집 보내는등 혼인정책을 구사하여 교묘히 권력을 확대해 나아갔다.
그러자 기요모리의 세력 확장에 대해 고시라카와 법황(1169년에 출가)을 시작으로 하는 원정(院政)세력은 불쾌감을 느끼게 되어 차츰 기요모리와의 대립이 깊어지게 되었다. 1177년 6월 시시가타니(녹 곡)의 음모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다다 유키쯔나(多田行綱)의 밀고로 발각되었으나 이것을 계기로 기요모리는 원정(院政)에 있어서 원근신(院近臣)의 배제을 꾀했다.
후지와라 사이코우(藤原西光)는 처형되고,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는 빗츄(備中)로의 유배형(유배지에서 절벽으로 떨어지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슈칸(俊寬)에게는 키가이시마에 유배형이 내려졌다. 다만 키요모리도 결국에는 법황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
지쇼우(治承) 3년(1179년) 이 해는 기요모리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즉 6월에 딸 모리코가 사망했다. 그런데 모리코가 사망하자 법황은 즉시 모리코의 장원을 기요모리와 상담도 하지않고 몰수하였다. 거기에 7월에는 기요모리의 장남이자 기요모리가 후계자로써 기대하고 있던 다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가 42세을 일기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는 기요모리도 정말로 낙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을정도로 슬픔에 잠겼으나, 법황은 시게모리의 사망과 동시에 기요모리에게 아무런 상담도 하지않고 시게모리의 지행국(知行國)이었던 에치젠국을 몰수하고 말았다.
기요모리는 법황이 자신을 무시하는 시책에 기어코 격노하여 11월 14일 후쿠하라(福原;현재의 코베시)에서 군세을 이끌고 직접 상락하여 15일에 쿠데타을 결행했다. 이것이 바로 지쇼우의 쿠데타라 불리는데, 기요모리는 이 쿠데타에서 원근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후사(藤原基房)을 시작으로 반 헤이케인 공가, 약 39명의 임관을 모두 해임시키고 대신하여 친 헤이케인 공가을 임관시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법황은 두려움을 깨닫고 기요모리에게 용서을 구했으나 기요모리는 이것을 용서하지 않고, 11월 20일에 법황을 鳥羽展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고시라카와 원정은 완전히 정지하고 기요모리의 완전 독재화에 의한 헤이케 정권이 성립되게 되었다. 곧 기요모리는 지쇼우 4년(1180년) 2월, 다카쿠라 천황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손자였던 안토쿠 천황을 즉위시켰다. 안토쿠 천황의 어머니는 말할 필요도 없이 기요모리의 딸 토쿠코였다. 이것으로 인해 헤이케는 전성기을 맞이하여 그 지행국은 일본 전국의 절반이상에 달하였다고 한다.
[편집] 반란의 불꽃
그러나 헤이케의 전횡에 대해 황족, 귀족은 물론 무사세력도 자신들의 이해(利解)에서 떨어져 나가 귀족화된 헤이케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첫번째 사건으로 1180년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 2황자(皇子) 모치히토(以仁)왕을 받들던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賴政)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기요모리의 재빠른 대책에 의해 4남 다이라노 도모모리(平知盛)을 총대장으로 삼아 대군을 파견하여 모치히토왕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을 패배시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에 기요모리는 모치히토의 반란에 협력했었던 온죠지(園城寺)을 5남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을 총대장으로 한 군세을 파견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사(寺社)세력, 특히 온죠지와 같은 천태종의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의 동향을 위험시하던 기요모리는 법황파의 공가무리의 불온한 움직임 때문에 헤이케의 체제을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1180년 6월 헤이지의 거점이며 국제교역항의 경유지을 바라는 후쿠하라(복원;현재의 효고현 코베시)로의 천도(遷都)을 강행했다.
그러나 모치히토왕의 영지(令旨)가 전국 각지에 퍼져나가 8월에는 이즈에 유배되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호죠씨와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켰다. 9월에는 시나노국에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나가(源義仲)가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기요모리는 요리토모의 세력확대을 방지하기 위해 적손(嫡孫)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을 총대장으로 한 대군을 관동으로 파견했으나 후지가와 전투(富土川合戰)에서 어이없게도 물새의 날개짓 소리에 놀라 철수를 하는 추태을 보여줘, 헤이케군의 약체화을 숨김없이 보여지고 말았다.
이 패전을 계기로 사사세력, 특히 모치히토왕의 반란에 협력적이었던 코우후쿠지(興福寺)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공가무리들의 천도에 대한 반감도 강경했기 때문에 11월에 기요모리는 교토로 환도(還都)하고 말았다. 그리고 12월에는 시게히라을 총대장으로 한 대군을 남도(南都; 지금의 나라(奈良))에 파견하여 남도을 불태우고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도모모리을 총대장으로 한 군세을 오우미국, 미노국에 파견하여 겐지세력의 반란을 진압시켰다. 확실히 이로인해 수도 주변의 반 헤이케세력의 움직임은 진정화되었으나, 남도을 불태우고 짓밟아 버린것에 대해 기요모리에게 불적(佛敵)의 오명을 씌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편집] 최후
다음해 요우와(養和) 원년(1181)에 들어서자 헤이케의 세력기반이었던 서국에서도 이요국(伊矛國)의 코우노 미치키요(河野通淸), 코우노 미치노부(河野通信) 부자, 분고국(豊後國)의 서방회능, 우스키 , 사가 등의 호족이 군사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거기에 동국에서도 헤이케측으로 있던 사타케씨(佐竹氏)등이 요리토모에 의해 토벌당하는등 반란이 서서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기요모리는 교토을 중심으로 새로운 헤이케체제을 구축하기 위해 물관, 총하사등이란 관제을 성립하게 하였다. 거기에 미나모토노 요시나가에 대해서는 에치고국의 죠 스케나가(成資永), 죠 스케모토(후에 나가모치)에게 맡겨 진압하게 하였다. 그런데 기요모리는 2월말부터 열병에 걸려 쓰러져 윤 2월 4일에 구죠카와하라구치의 타이라노 모리쿠니의 저택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향년 64세였다.
병명에 대해선 당시, 대륙에서 전래되어 유행되었던 풍토병에 의해 말라리아에 걸린게 아닌가 생각된다. 기요모리의 죽음으로 인해 헤이케의 신체제 구축은 계획으로 끝마치게 되고 말았다. 죽음에 이르러서 기요모리는 [장례는 할 필요가 없다. 요리토모의 머리을 나의 묘 앞에 놓아주길 바란다.]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헤이안시대 말기의 무사의 감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유언이라는 지적이 강하여 후년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었다. 기요모리는 자신의 사후, 헤이케 일족의 행방을 생각한 끝에 요리토모와 화의하라는 시준도 있었다는 말도 있다.
[편집] 사후와 평가
기요모리의 사후, 장남 시게모리는 이미 병사했고, 차남 다이라노 모토모리(平基盛)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헤이케의 동량의 자리는 3남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이 물려받았으나, 무네모리는 키요모리와 다르게 재능이 뒤쳐졌으며, 기요모리정도의 강렬한 개성도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차례로 일어나는 반란에 대처하지 못하고, 또한 법황을 중심으로 한 원정세력도 세력을 늘리는것을 막지못하는등 헤이케는 서서히 궁지에 몰리게 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기근(요우와의 대기근)이란 악조건등도 겹쳐서 헤이케는 1183년 쿠리카라토우케 전투(俱利伽羅)에서 헤이케군이 괴멸된 후 미나모토노 요시나가의 공세앞에 어떠한 준비도 없이 수도가 함락당했다. 그리고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하여 헤이케는 멸망했다.
이것을 유심히 살펴보면 헤이케의 번영은 기요모리란 한 개인의 비범한 재능과 강렬한 개성에 의해 지탱되어진 부분이 강하고 확고한 체제가 구축되지 못하였다. 기요모리도 이것을 만년에 이르러서야 느끼게 되어 체제확립에 노력하였으나 기요모리 자신이 체제확립의 준비중에 병사했기 때문에 계획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기요모리가 반란이 차례로 일어나는 악조건의 시기중에 서거한것도 헤이케의 멸망의 원인이었다.
또한 헤이케에서는 기요모리 이외에 뛰어난 인재가 거의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되어, 기요모리가 서거한 시점에서 헤이케의 번영도 끝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최초의 무가정권을 쌓아 올렸고, 해천산천의 조정과 사사세력을 상대로 호각이상을 뛰어넘었고, 거기에 여러 외국과의 교역에도 주목했던 키요모리는 일본에 있어서 대 정치가의 1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폭거, 비도, 비정의 묘사로 인해 키요모리는 옛부터 내려온 사람들중에서 폭군이란 평가가 정착되어져 왔다. 한편으론 정치적인 면에서는 송나라와의 교역에 관심을 기울여 재정기반의 개척, 쿄우가시마(經가島;항구의 풍랑과 비바람을 막기 위해 건설한 인공섬)축조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공사업의 추진등, 시대의 모순에 뛰쳐져 가고 있던 귀족정치에 새로운 면을 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