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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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 1390년 - 1453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명장이다.
1433년(세종 15년) 함길도도관찰사로 부임받아 여진족을 토벌하고 6진을 개척했다. 용맹과 지혜가 뛰어나 여진족들이 그를 두려워하였으며 또한 그를 존경하였다.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후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그가 죽었는데, 단종을 잘 보호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정치적 야심이 큰 수양대군을 의식해서 그런 말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단종 즉위 후, 그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찬탈을 획책하려는 야망을 품던 수양대군에 의해 계유정난 중 그가 보낸 자객들에게 철퇴를 맞고 심한 부상을 입어 자기 며느리의 친정집으로 피신했으나, 양정과 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거사 다음 날 아침에 자신의 아들인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 인, 조극관, 민신 등과 함께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梟示)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한 여파는 매우 커서, 그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이 김종서의 죽음은 물론이고, 조정에서 자신이 김종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파직하고 박호문을 도절제사로 임명해 함길도로 보낸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박호문의 목을 잘라 대금황제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고, 이는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746년, 영조 때 신원되어 누명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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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시조
삭풍은 나모 끝헤 불고
- 삭풍(朔風)은 나모 끝헤 불고, 명월(明月)은 눈속에 찬데
-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집고 서서
- 긴 파람 큰 한 소리예 거츨 거시 업세라.
[편집] 6진 개척
세종은 김종서에게 명하여, 고려의 윤관이 쌓은 9성 중에 공험진이 어디인지를 실제로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하였고, 그것을 확인한 후에, 김종서로 하여금 공험진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 과정 중에 개척된 것이 6진인데, 다시 반환하자는 반대론이 상당했다고 당시 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