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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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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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년 1월 15일 일본 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
사망 | 1971년 3월 1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캘리포니아대학 상학석사 |
직업 | 사업가 |
배우자 | 호미리 |
부모 | 유기연(부), 김기복(모) |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기업가이다. 그는 유언에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했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부천시 괴안동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의 자동차 도로가 있다.
목차 |
[편집] 경력
[편집] 유년시절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자수성가한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침례교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3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유학을 보낸다. 큰 돈이 들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넒혀서 나라를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준 미국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서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팅스 소년병 학교에 1909년 입학한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나중에 어른이 되었을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때 일본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편집] 대학교생활
네브레스카 주립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선수로 활약한다. 이를 안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지, 운동부에서 활동하라고 보낸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 대학교에서는 공부를 못하면 운동을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편집] 식품사업가 시절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로닉스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편집] 유한양행
1926년 서울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회사 경영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사건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병이나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유일한은 동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푸라민), 혈청등을 판매했다. 특히 안티푸라민은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한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1]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하여간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의약품사업을 하던 유일한은 윤리경영을 실천한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음으로 물리친 일화가 있다.[2]
[편집] 재산의 사회환원
유일한은 제약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자신의 재산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를 세웠고, 1971년 별세하기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 즉, 손녀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별세당시 전재산은 낡은 구두와 아끼던 몇가지 양복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재 유일한이 살던 붉은 벽돌집은 성공회대학교 구내에 있는데, 그 이유는 성공회대학교가 학교법인 성공회대학교에 의해 건립되면서 유한공고의 부지를 일부 매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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