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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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1192년 - 1259년)은 고려의 제23대 (재위: 1213년 - 1259년)이다. 는 철, 는 천우(天祐), 시호는 고종충헌안효대왕(高宗忠憲安孝大王). 강종과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의 맏아들이다.

[편집] 생애

고종은 강종의 맏아들이자 원덕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1192년 정월에 태어났다. 그는 부왕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안악현에 유배되었으며, 강종 즉위 이듬해인 1212년 개경으로 돌아와 그 해 7월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213년 8월 정축일에 임종에 직면한 강종의 선위와 실권자 최충헌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고종이 즉위하던 시기에 중국대륙에서는 몽골이 일어나 금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갔던 거란족을 다시 동쪽으로 내몰았다. 이 바람에 금나라는 변방지역에 밀려든 거란족에 의해 위협받지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선무포선 만노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을 차지하고 천황을 자칭하며 진나라를 건국했다. 금나라는 이 때문에 누차에 걸쳐 고려에 식량원조를 요청했지만 고려는 그들의 내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관망 자세로 일관했다. 그때 뜻밖에도 동쪽으로 밀려오던 거란족이 요동을 돌파하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해왔다.

1216년 8월, 몽골군에 쫓긴 거란족을 통솔하고 있던 금산과 금시 두 왕자는 아얼과 걸노를 시켜 군사 수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도록 하였다. 이에 고려는 즉각 군대를 조직해 방어태세에 들어갔으나 밀려드는 거란군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지 못했다. 후군병마사로 임명된 대장군 김취려의 눈부신 전공으로 많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고려의 벙력은 결사적으로 남하하는 수만 명의 거란군을 상대하기엔 벅찼다. 그래서 한때 거란군은 개경 근처까지 밀려들어 혜종의 무덤인 순릉을 도굴하고 원주와 예천을 함락시키기까지 하였다. 이 같은 공방전이 무려 2년 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고려는 몽골과 만노의 동진, 금나라 등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 형성에는 몽골, 동진, 금나라 모두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1218년 12월 합진과 찰라가 이끄는 몽골군 1만명과 동진의 군사 2만명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화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무너뜨리고 거란의 본거지인 강동성으로 향하자, 김취려과 조충이 이끄는 고려군도 이들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에워쌌다. 이에 거란군은 한달간을 버티다가 1219년 정월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거란이 항복하자 몽골의 원수 합진은 고려에 강화를 청하였고, 고려가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몽골과 고려는 형제지국의 관계를 형성했다. 그 후 합진은 몽골로 돌아가면서 수하 40명을 의주에 남겨두었고, 이 때문에 고려 전역에는 ‘가을에 몽골군이 다시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또한 몽골군과 동진군은 변방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고려에 대해 공납을 독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회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219년 최충헌의 병이 악화되었고, 후계권을 놓고 최충헌의 아들 최이와 최향이 다툼을 벌였다. 최충헌의 측근인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 등 4명이 최이를 없애고 최향을 후계자로 세우려다가 되레 최이에게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이에게 모의 사실을 밀고한 김덕명을 제외한 3명의 장수와 최향,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이 유배되었으며, 그해 9월 최충헌이 죽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실권은 최이에게 넘어갔다.

최이는 정권을 장악하자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여 빼앗은 전답과 가택 및 물품 등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문신들의 등용폭을 넓혔다.

그해 10월 의주별장 한순이 낭장 다지와 함께 난을 일으켰다. 한순은 그 후 구주, 연주, 성주, 안북도호부 등을 제외한 북계의 성들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이에 조정은 이극서, 김취려 등을 병마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고, 정부군에 밀린 한순은 다지와 함께 금나라에 투항하였다. 하지만 금나라의 원수 우가하는 고려와 외교적인 문제가 생길까 봐 우려하여 그들을 죽여 시신을 개경으로 보냈다. 또한 1221년 정월에 한순의 수하 장수 윤장 등 2명이 체포됨으로써 한순의 난은 종결되었다.

한편 고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몽골은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고압적인 자세로 공물을 요구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최이는 몽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성을 수리 및 건축하였다. 그러던 중 1225년 정월에 몽골 사신 착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도적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은 고려 조정이 착고여를 살해했다고 단정하고 즉각 보복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양국간에 국교가 단절되고 긴장이 조성됐다.

최이는 이 시점에서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정방을 설치하여 나랏일을 처결하고 인사를 단행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단지 정방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형식적인 결재만 내렸다. 또 1227년에는 최이의 사제에 서방이 설치되어 유학자들로 하여금 3개 조로 나누어 그곳에 숙직토록 하였다. 이로써 최이는 정방과 서방을 통하여 문무신료들을 직접 건느릴 수 있게 되어 권력의 폭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

이때 경상도 지방에 자주 왜구들이 침입하여 민가를 괴롭히자 조정은 일본 조정과 우호관계를 맺고 왜구를 소탕하였다. 또 북쪽의 정주와 장주 등에는 동진군이 자주 출몰하여 침략을 일삼자 고려는 군대를 보내 방어벽을 구축하고 동진으로부터 화의조약을 얻어냈다.

이처럼 변방이 불안한 가운데 국교를 단절시키고 보복을 선언했던 몽골군이 1231년 8월 원수 살리타의 지휘 아래 압록강을 건너 내침을 감행해 왔다. 이는 7차례에 걸쳐 28년 동안 지속될 고려와 몽골 간의 전쟁의 서막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우선 함신진을 함락시키고, 귀주와 정주를 거쳐 평산에 이르렀고, 그해 12월에는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고려 조정은 몽골군 진영에 희안공 왕정을 보내 화의를 추진하였다.

화의 요청을 받은 몽골측은 착고여 살해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고려측은 착고여 살해는 금나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금과 은 등의 예물로 몽골군 지휘관들을 달래고 양국간의 평화를 지속시킬 것을 약속하여 화의조약을 성립시키자, 몽골군은 서경을 비롯한 서북면 지역의 40개 성에 다루가치(총독)를 남겨두고 1232년 정월에 철수하였다.

몽골군이 일단 철군하자 최이는 그들이 해상전에 약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백성들을 산성과 섬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몽골과의 전면전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때 환관 윤복창과 서경순무사 민희 등이 각각 서북면과 서경에서 다루가치를 습격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몽골은 1232년 다시 2차 칩입을 감행했다.

몽골은 개경 환도를 요구하며 경상도까지 남하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고려군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군사와 백성이 모두 단결하여 맞서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2월 수원의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몽골군 원수 살리타를 사살했고, 몽골군은 이에 당황하여 서둘러 철군하였다.

살리타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선언한 몽골은 1233년과 이듬해 연이어 동진과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1235년 3차 침입을 단행하여 다시금 고려의 전 국토를 유린하였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결속을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며 곳곳에서 처절한 항전을 지속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몽골 내부에 권력 암투가 벌어져 몽골군은 고려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서둘러 철군하였다.

하지만 몽골군은 1247년에 개경 환도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때도 몽골의 군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곧 철수하였다. 몽골군이 철군한 후 1249년 11월에 집정관 최이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뒤를 이었다.

철군한 몽골군은 1251년에 다시 개경 환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환도의 뜻을 품었지만 최항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때부터 개경 환도를 놓고 왕실과 최항간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종은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과 화친하기를 바랬지만 최항은 끝까지 강화도에 머물면서 항전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개경 환도를 결사반대하였다. 그래서 몽골군은 1235년 다시 제5차 침입을 강행했고, 고종이 몽골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승천부로 나와 몽골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다시 한번 몽골군은 철군하였다.

그러나 몽골측은 여전히 끈질기게 개경 환도를 주장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254년에 다시 침략하여 20만 명 이상의 고려인을 학살하였다. 하지만 별초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의 항전이 만만치 않아 몽골군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화의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김수강을 몽골 조정에 보냈고, 김수강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한 몽골의 군주는 고려 군주의 친조와 개경 환도를 다짐받고 철군을 단행했다.

몽골군이 철군한 뒤에도 최항은 고종의 몽골 군주 친조는 물론이고 개경 환도도 미루었으며, 심지어는 해마다 보내던 공물도 중단시켜버렸다. 이 무렵 최항은 중병이 들어 병상에 누었고, 1257년 서자 최의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죽었다.

하지만 최의는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최항의 심복인 최양백, 선인렬 등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한편에선 그들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 정권 전복을 꿈꾸게 하였다. 그런 와중에 다시금 1257년에 몽골군이 제7차 침입을 감행해왔다.

그동안 왕의 친조를 요구하던 몽골은 수위를 낮춰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양국간의 강화가 성립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고려에서 태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안경공 왕창을 대신 보내자 몽골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1258년 4월 유경, 김인준 등에 의해 최의가 피살됨으로써 그동안 몽골에 대해 강경자세를 취하던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 이에 따라 대몽강화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고, 그해 12월에 고려 조정은 사신을 몽골에 보내 최의의 죽음을 알리고 개경 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왕태자가 40명의 신하들과 함께 몽골에 입조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28년 동안 지솓되던 여몽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고종은 이처럼 재위기간 내내 숱한 전쟁을 겪다가 몽골과 화의조약을 맺은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68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때가 재위 45년 10개월째로 그는 고려의 모든 군주 중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능호는 흥릉이다.

[편집] 가족 관계

  • 안혜왕후 유씨(安惠王后)
    • 원종
    • 안경공(安慶公)
    • 수흥궁주(壽興宮主)
전 임
강종
제23대 고려왕
1213년 - 1259년
후 임
원종
고려역대 국왕
고려: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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