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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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李哲, 일본식 이름:靑山哲, 1903년 6월 9일 ~ 1944년)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으로, 한국 음반사업과 연예사업의 선구자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이억길(李億吉)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연희전문학교를 고학으로 다니다가 나중에 자신의 매부가 된 김성흠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연희전문 악대부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이철은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근무했다.
1927년에 서울에서 음반제작사 오케레코드사를 설립하였는데,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음반회사로 평가된다[1]. 오케레코드사에는 김성흠도 기술적인 도움을 주며 참가했다[2]. 특히 이철은 음반 발매 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조명암 등 수많은 인기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들을 그가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신드롬을 일으키는 등 탁월한 흥행감각으로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전시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사 사장으로서 〈이천오백만 감격〉 등 친일가요들을 제작, 유통한 총책임자이다. 친일 연극과 공연의 지방순회를 위해 친일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조직한 이동극단 제2대 대표도 맡았다[3]. 2005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부인은 배정자의 첫 남편인 현영운의 차녀 현송자이다.
[편집] 참고자료
- 《월간조선》 (2003년 7월호) 발굴비화/ 日帝시대「조국의 노래」를 지켜 냈던 이철의 삶과 예술 그리고 조국
- 《대전문화방송》 〈울려라 OK, 퍼져라 조선악극단〉 (2002년 6월 27일 방송)
[편집] 주석
- ↑ 대한민국 문화관공부 e뮤지엄, 박물관종합정보 - 레코드판
- ↑ 《문화일보》 (2007.4.7) “2002 한·일 월드컵이 교포-日사회 융합 길 터줘” - 전국체전 50년 ‘개근’ 김영재 在日대한체육회 상임고문
- ↑ 이재명, 〈조선연극문화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본 친일 연극〉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5년 하반기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