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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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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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12월 12일 ~ 1953년 2월 24일 | |
태어난 곳 | 아셰르슬레벤 |
죽은 곳 | 하노버 |
복무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지휘 | 남부집단군 A 집단군 OB.West |
서훈 내역 | 철십자훈장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독일어: 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년 12월 12일 ~ 1953년 2월 24일)은 프로이센 아셰르슬레벤 출생의 독일 군인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 및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참전한 역전의 군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체포되었으나 1949년에 석방되었고, 1953년에 사망했다. 그는 독일군 내 가장 우수한 장군중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목차 |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프로이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1893년에 사관후보생으로 카셀의 제 3보병연대에 입대했다. 1904년 육군대학에 입학해 3년간 참모장교과정(매년 160명의 신입생을 받지만 75%가 시험에 낙제한다.)을 수료후, 1907년 베를린의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1910년 카셀의 제 11군단 참모부에 배속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15군 참모장으로 참전하여 1914년 소령으로 승진했다.
[편집] 전간기(戰間期)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남아 1925년에 베더호른의 제 18보병연대 연대장에 취임. 같은 연대에서 명예연대장의 칭호을 수여받았다. 1927년 보병소장에서 1929년 중장으로 승진했다. 1932년에 베를린 제 3사단장이 되어 7월에 프란츠 폰 파펜 수상의 명령으로 프로이센 주정부의 청사를 제압해 혼란상태의 위기관리능력이 떨어지던 사민당 정권을 쓰러뜨렸다. 10월 보병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히틀러의 정권쟁탈전에는 군인으로써 톱캐리어에 도달했다. 1938년 11월에 상급대장으로 퇴역했으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현역으로 복귀한다.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남부집단군 사령관, 1940년 프랑스 침공전에서는 A집단군의 사령관으로써 아르덴 삼림지대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에 있던 영불연합군을 프랑스 본토와 단절시켜 신속한 승리를 얻었다. 1940년 7월 육군원수로 승진하여 프랑스 점령군을 통괄하는 서방군총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재차 남부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우크라이나를 점령했다. 하지만 여기서 일부 부대를 독단으로 퇴각시켜 12월에 히틀러로부터 해임당해 예비역이 되었다. 1942년 3월에 다시 서부전선 총사령관(OB. West라 약칭)이 되어 8월의 디에프 기습상륙을 격퇴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병력배치에 대해 히틀러의 방침을 비판하다, 상륙한 연합군을 격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944년 7월 해임되었으나, 9월에 다시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여 마켓가든 작전과 벌지 전투 당시 반격 작전을 지휘하였다. 이후 계속 서부전선에서 연합군과 싸웠고, 1945년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1949년에 석방되었다. 히틀러에 의해 다시 복귀한 장군으로써는 유일하게 룬트슈타트뿐이었다.
[편집] 룬트슈테트에 대한 평가
룬트슈테트는 육군내 최고참 인물로써 유연한 사고력으로 군내 급진파라 할 수 있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좋은 이해자여서 서방전격전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벨기에 전선에 있다가 투르크군의 군사고문으로 중근동에서 영국군의 공격에 대항하는 작전을 입안하는 작전참모로 활약할때 편견없이 투르크 군인의 성격이나 자질을 간파해 국정과 지세를 이용한 전략지도을 제안했다. 이것은 투르크에서 활약한 폰 젝크트장군의 주목을 끌어 이후 군내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프랑스 침공시 육군참모부의 작전에 만슈타인이 의문을 제기하자 그의 계획을 깊이 이해하여 그의 작전안을 육군총사령부에 제안했다. 또한 기갑부대 창설등에도 깊은 이해심을 발휘하여 부정적인 크라이스트 기갑집단사령관과 구데리안의 대립을 중재하기도 했다. 룬트슈테트의 공평하고 중립적이며 편견없는 자세와 신념을 관철하는 자세는 육군 상하을 막론한 독일장교단의 넓은 존경을 모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기갑부대 창설에는 깊은 이해심은 있지만 그 운용에 대해선 지식이 없어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서방군의 기갑부대 배치시 롬멜과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과의 다툼을 중재하지 못하고, 어쩡쩡한 태도로 일관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의 효과적인 반격이 어렵게 만든 주요문제점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