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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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한자: 庾黔弼, ?~941년)[1] 고려의 무신. 평주(평산)출생으로, 왕건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또한 평산 유씨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시호는 충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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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활약
처음 그가 기록에 보이는 것은 918년 개국 이후 청주의 반란을 우려한 왕건이 그와 홍유에게 군사 1500명을 주어 청주의 반란을 막게 하였다는 《고려사》 권92 열전 제5 홍유 열전 및 견금 열전의 기록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비록 개국공신목록에는 없지만 이전부터 태봉에 봉직하였으나 왕건 일파였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초반의 주요 활약 무대인 서부전선 일대에도 어느정도 영향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편집] 북방
평주 출신이지만, 920년 3월 왕건이 그를 중용할 때 “지금 남쪽의 흉적들을 박멸하지 못하였는데 북방의 미개인도 우려할 바 있으므로 나는 오매불망 근심하고 있다. 유금필을 파견하여 진수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으므로 유금필은 북방에 연고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 이 때는 북변의 골암진이 거듭하여 북방의 오랑캐에게 침략당하고 있던 때다. 그는 개정군 3,000명을 거느리고 골암진의 동산에 성을 쌓고 거처하며 북번의 추장 300명을 소집, 주연을 베풀었다. 그들이 모두 거나하게 취했을 때를 틈타 위협하니, 추장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후 부족들에서 귀순한 자는 천오백명이었고 또한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도 3천여명을 돌려받았다 한다. 북방을 평정한 이 때의 사건으로 인해 유금필은 이후 북방의 군대를 여러 차례 이끌었던 것 같다.
[편집] 백제와의 전투
초반에 유금필은 서부전선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후백제의 연산진(옥천 문의)을 공격하여 그 곳의 장군 길환을 죽이고, 또한 임존군(예산)을 공격하여 후백제 군사 3,0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 이후 조물성(김천 조마) 방면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던 왕건을 돕기 위해 군을 돌렸다. 이에 견훤이 화의를 청하였는데, 이 때 견훤이 왕건의 진으로 와서 화의를 하려 하였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알기 어려운데 어찌 경솔히 적과 접근하겠습니까?”라며 만류하였다. 이는 왕건의 진영이 그만큼 피폐해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후 927년 왕건이 백제와 신라의 연결선을 끊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고 또한 패배할 때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금필이 서부전선을 지키는 책임자였기 때문인 것 같다. 왕건의 남행 작전을 분쇄하고 오히려 경상도 일대를 왕건에게서 차단해 나가고 있었던 견훤은 서부전선에서도 공세를 취했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에게 928년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으라 명하였다. 직후 후백제의 김훤, 애식, 한장이 청주를 3천여 병력으로 공격하였다. 유금필이 이 침공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잠깐 졸면서 꾼 꿈에 나타난 큰 사람이 이 침공을 알려줬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 길로 유금필은 청주로 진군, 후백제군을 쳐부수고 독기진까지 추격하였고, 300여명을 살획하였다. 당시 왕건은 충주에 주둔해 있었고, 유금필이 이 승리를 충주로 가서 보고하자 왕건은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이 저으기 안심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로 미루어보아, 유금필은 아직 왕건의 중앙군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앞선 모든 활약이 왕건과 분리된 독자적 군사행동이었기 때문에, 1순위의 전장에서 싸우던 중앙군보다는 2순위, 3순위의 전장에 파견되던 장수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2]. 이를 통해 이후 유금필이 참소를 당하게 되는 장면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929년 말에 견훤이 고창군(경북 안동)을 포위, 공격하자 경상도에서 돌파구를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왕건도 대군으로 구원에 나섰다. 예안에 이르러 전략을 토의하였다. 왕건은 “싸움이 만일 불리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가 대답하기를 “만약 불리하게 되면 죽령(竹嶺) 길로 돌아 올수 없게 될 것이니 빠져 나갈 길을 사전에 수리하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으나, 유금필은“제가 들으니 ‘무기는 흉악한 도구요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죽자는 결심을 가지고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 비로소 결승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싸우기도 전에 먼저 패배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요?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古昌)의 3천여 명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절통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하였다. 왕건은 이를 쫓았고, 930년 1월 병산의 전투에서 유금필은 저수봉으로부터 돌격하여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견훤군은 전사자만도 무려 8천에 달하는 대패를 겪고 이후 경상도에서의 패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왕건은 고창군에 들어가“오늘의 승전은 그대의 힘이다.”라며 유금필을 격려한다.
그러나 931년에 참소를 입어 곡도로 귀양을 갔다. 이는 뛰어난 전공으로 갑작스럽게 군 내에서 그의 지위가 상승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알력으로 인해 일어난 일 같다. 이듬해 백제의 해군장 상애 등이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략하자 대광 왕만세등이 태조의 명으로 요격하였으나 패퇴당하였다. 그러나 유금필이 보고하기를, “저는 비록 죄를 짓고 귀양살이는 하고 있지만 백제가 우리의 해변 지방을 침략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이미 곡도와 포을도(包乙島)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또 전함도 수리하여 방어하게끔 되었으니 주상께서는 염려하지 마옵소서.”라고 하여 백제의 수군을 민병대로 저지하였음을 알렸다. 왕건은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쫓은 것은 나의 불찰이다”라고 하면서 사신을 보내 그를 소환하였다. 유금필을 위로하여 다음과 같이 왕건이 말하였다고 한다.“그대는 실로 죄 없이 귀양을 살게 되었건만 일찍이 원한하거나 울분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일만 생각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된다. 나의 소망은 장차 자손들에게까지 연장하여 상 주어 그대의 충절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933년에는 정남대장군이 되어 의성부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이 때 앞선 해의 수군작전으로 위세를 다시 얻은 백제가 신검을 통군으로 하여 신라를 다시 위협하며 경상도 일대에서 군사작전을 펼친 것 같다. 왕건이 이에 유금필에게 신라의 서울을 구하라고 명하였다. 유금필은 장사 8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사탄에 이르러 병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서 돌아 가지 못할 것인데 다만 그대들이 같이 희생당할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잘 강구하라.”그러나 병사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을 홀로 살아 돌아 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이에 사탄을 건넌 유금필의 결사대는 신검 등이 통솔하는 백제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백제군은 유금필 군의 대오가 정연한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고 한다. 곧 경주에 도착하자 신라인들이 늙은이부터 어린이까지 모두 성밖에 나와 영접하며 눈물을 흘리며 유금필을 맞이했다고 한다. “뜻밖에 오늘 대광(大匡)을 뵈옵게 됩니다. 대광이 아니시면 우리들은 백제군에게 살육당했을 것입니다.” 7일간 머무른 후 다시 돌아오는 길에 자도에서 후백제의 신검 등을 만나 다시 싸웠는데, 역시 크게 승리하였으며 장군 금달 ·환궁 등 7인을 사로잡았으며 살획한 자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왕건은 놀라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유금필이 개선하자 태조는 궁전에서 내려 가서 맞이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 같은 공훈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것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검필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으며 위급에 직면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께서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라고 하자 태조는 그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934년, 태조가 운주(홍성)를 치려고 그를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견훤이 이를 듣고 갑사 5천으로 운주로 진군하여 화의를 청하였다. 이에 관하여 의논을 하자 유금필은 역시 강경한 발언을 한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곧이어 유금필은 기병 수천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000여명을 살획하였고 후백제의 군사 종훈과 군의관 훈겸, 용장 상달·최필 등을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항복하여 서부전선에서도 고려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935년에는 3월에 폐위, 유폐되었던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보이는 4월 나주 공략이 있었다. 왕건은 “나주(羅州) 지방 40여 군은 우리의 울타리로 되어 오랜 기간 교화에 복종하였다. 일찍이 대상(大相) 견서(堅書), 권직(權直), 인일(仁壹) 등을 파견하여 안무하였는데 근자에는 백제에게 약탈당하므로 6년간에 바닷길도 통하지 않으니 누가 나를 위하여 안무하려 가려 하는가?”라며 파견할 장수를 고르려 하였다. 이에 홍유, 박술희(朴述熙) 등이 “제가 비록 용맹하지는 못하나 장수의 한 사람으로 보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왕건은 “대체로 장수로 되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다”라고 하였다. 공훤, 대광 제궁(悌弓) 등이 그러자 “유검필이 적임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건은 “나 역시 벌써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근자에 신라의 길이 막혔을 때 유검필이 가서 그것을 열었는데 나는 그 수고를 생각하고 감히 다시 명령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 유검필이 아뢰기를 “저의 나이는 이미 늙었으나 이것은 국사 대사인데 감히 있는 힘을 다 바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왕건이 기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이 명령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라며 유금필을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로 임명하여 예성강까지 가서 송별하였고, 그에게 왕의 함선을 주었다고 한다. 왕건은 유금필이 출정준비를 마칠때까지 3일동안 머무르며 유금필을 환송하였다고 한다. 그는 곧 후백제에 빼앗겼었던 금성(전남 나주)을 탈환하였으며 다시 유금필이 돌아올 때도 왕건은 예성강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곧이어 6월에는 금산사를 탈출해 금성으로 들어와 고려에 대해 귀부의 뜻을 밝힌 견훤 일행을 맞아들이는 군을 또한 통솔하였다.
936년 9월에는 고려와 후백제의 왕 신검이 일선군(지금의 구미 선산)에서 결전을 벌일 때에는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 등 외족들의 정예 기병 9천 5백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심지어 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을 정도로 모든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그의 군사적 기반은 초창기에 활약하였던 북방이었다는 점을 고려가 거의 모든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집결시킨 이 전투에서 그가 이끈 병력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의 딸은 왕건의 제9비 동량원부인이며, 왕건은 그에게서 효목태자 왕의義와 효은태자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941년 4월 사망하였다. 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아들은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유경(庾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