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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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長壽王, 394년~491년)은 고구려의 제20대 (재위: 413년 10월~491년 12월)이다. 는 거련(巨連, 巨璉)이며,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건립하였으며, 거의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장수왕은 1명의 왕후에게서 아들 조다(문자명왕의 아버지)와 공주 1명을 얻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으며, 436년에는 북연의 수도 화룡을 급습하고 북연 왕 풍홍을 데려왔다. 또한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아산만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일부를 차지하였다.

[편집] 생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09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413년 10월에 광개토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장수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 대륙의 북방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세력을 팽창하며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북연을 압박하고 있었다. 북연은 이때 내부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북연의 초대 왕인 고운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실권자인 풍발이 사태를 수습하고 왕위에 올랐다. 풍발은 원래 후연의 중위장군으로 있다가 군주인 모용희가 학정을 거듭하자 그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고운을 왕으로 추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스스로를 대왕으로 높이고 세력을 확대했다. 이 바람에 북위와 잦은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방이 이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남방에서는 동진이 남연을 병합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던 농민 봉기를 종결시켰으며, 서방에서는 서진이 남량을 압박하여 정복을 눈앞에 두었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우선 강남의 맹주인 동진과 화친을 맺고 북연을 견제하였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조정을 일신하기 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고구려 조정은 343년에 고국원왕이 동황성을 도읍으로 삼은 이래 84년 만에 다시금 평양성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듯 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은 여전히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1]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북위와 북연의 싸움은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싸움은 북연왕 풍발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대등한 양상을 보였으나, 430년에 풍발이 죽자 북위가 유리해졌다. 풍발이 병사하자 풍발의 아우 풍홍과 아들 풍익이 왕위 다툼을 벌였고, 결국 풍홍이 조카인 풍익과 그 형제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으며, 한편으론 북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 결과 북위의 힘에 밀려 몰락을 눈앞에 두었고, 마침내 풍홍은 435년에 고구려에 밀사 양이를 보내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북위의 기세로 봐서 도저히 더이상 버텨낼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고 잠시 고구려에 의탁한 뒤에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의 밀사에게 긍정적인 회신을 주었다. 그리고 풍홍의 예측처럼 북위는 436년 4월에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의 백남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 양이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풍홍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장수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북연의 밀사 양이와 함께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자신을 맞이하려 하자 풍홍은 도성인 용성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동쪽의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고구려 땅으로 향하였다.

북위는 이 소식을 듣고 사신 봉발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풍홍을 자신들에게 압송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장수왕은 풍홍이 북위로 갈 경우 고구려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북위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 때문에 북위에서는 한때 고구려를 공격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면서 재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풍홍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장수왕에게 함부로 대하였다.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438년 3월에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이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이 송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장수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손수와 고구는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을 참살했다. 하지만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호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 편에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한편, 이 무렵 북위는 북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남쪽엔 한족의 송 왕조가, 북쪽엔 선비족의 위 왕조가 성립되어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중국 대륙이 안정되자 장수왕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백제에 대한 복수전을 다시 전개한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백제는 이미 427년에 신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40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한반도 쪽 변경을 공격하여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는 군사적 대응을 검토했고,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사죄하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일단 신라의 사죄를 받아들여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더해갈수록 신라가 백제와 친해지자 장수왕은 454년 7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 10월에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2]

468년 2월에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에는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북위가 이를 거절함으로써 백제의 의도는 관철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도림으로 하여금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이 때문에 백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고구려는 475년에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도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사로잡았으며, 곧 아차성 밑으로 끌고 가 참수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하지만 신라의 원군 1만이 백제를 도움에 따라 고구려는 점령했던 한성을 버리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한성이 완전히 붕괴되어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3]

장수왕은 491년 12월, 98살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편집] 참고

[편집] 주석

  1.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304~305쪽.
  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306~308쪽.
  3.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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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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