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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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텐펠트 전투 (30년 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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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이텐펠트 전장을 배경으로 그린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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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스웨덴 작센 |
신성 로마 제국 카톨릭 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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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 |
틸리 백작 요한 이자클라에스 | ||
병력 | |||
스웨덴군 23,000명 작센군 17,000명 대포 100문이상 |
신성로마제국+카톨릭동맹 3만 2천명 대포 34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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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상황 | |||
사상자 각 사이트 기록에 따라 2,100명~5,500명 |
전사 7,600명, 포로 6,000명 부상자 12,400명 |
브라이텐펠트 전투(영어: Battle of Breitenfeld; 독일어: Schlacht bei Breitenfeld; 스웨덴어: Slaget vid Breitenfeld)는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카톨릭 진영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 요한 이자클라에스을 격파하여 30년 전쟁 중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목차 |
[편집] 배경
30년전쟁은 처음 종교개혁에 의거한 신교세력과 구교 세력 간 종교전쟁이었으나, 점차 그 취지는 사라지고, 신성 로마 제국과 카톨릭 교회, 그리고 제국과 가까운 여러 선제후와 그 이외의 제후들간의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1629년 신교 제후는 황제군의 지휘관 틸리 백작 요한 이자클레에스와 보헤미아의 대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에게 압도당해 각지에서 패퇴를 거듭했다. 이것을 보고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시 바로 압력을 받게 될 위치에 있던 덴마크가 참전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또한 발트해 연안을 지배하에 두어 발트해 제국을 확립시켜 스웨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교측의 대열에 참가했다.
하지만 덴마크군이 패배하자 대신 대륙에 개입할것을 결정한 구스타프는 총 병력 1만 3,000명의 정예병과 함께 수송함에 몸을 실고 1630년 6월 포메른에 상륙했다. 독일에서 모집한 용병을 더해 2만에 달하는 군대을 갖춘 구스타프는 출발했다. 이 시기 발렌슈타인은 황제의 의심을 받고 사령관직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전황은 구교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우위는 구스타프가 참전했다고 해서 변하는것이 아니었다.
궁지에 빠졌던 신교측 여러제후들은 그러나 구스타프의 지원을 기뻐하지 않았다. 원래 자신들의 기득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신교동맹에 가입한 자들이라 스웨덴군이 개입해 승리를 얻는다면 구스타프는 그에 상응하는 영토을 요구할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그들에겐 구스타프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 불과했다. 제후들의 협력을 얻지 못한 구스타프는 계속 진격하면서도 보급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 난제를 해결한 것은 짖꿎게도 황제군이었다.
발렌슈타인의 해임으로 황제군 제일의 장군이 된 틸리 백작은 프랑크부르트-암-오델에서 마그데부르크까지 퇴각해 자군지배영역에 끌어들여 맞아싸운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교측 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의 방어는 견고해 틸리는 3개월을 포위공격에 허비했다. 그리고 철수사이에 기습공격을 가해 마그데부르크을 기어코 함락했다. 틸리백작 지휘하에 있던 용병은 약탈을 일삼은 끝에 마그데부르크는 완전히 불타버렸다. 3만명에 달하던 시민들 대부분이 살해당하고 일부 약탈한 여성들만이 살아남았다.
이 엄청난 약탈과 살육은 틸리 백작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렸고, 많은 제후들이 황제를 비난했다. 그리고 공포에 떨었던 여러 제후들이 구스타프 진영에 참가했다. 진격로을 확보한 구스타프는 동쪽으로 진격하자 틸리는 후퇴해 라이프치히에 이르렀다. 틸리의 후퇴로 인해 자신의 영지 수도 라이프치히가 마그데부르크처럼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두려운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는 급히 구스타프와 동맹했다. 총 숫자 4만여 달하는 스웨덴-작센 연합군은 라이프치히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
틸리 백작이 보기엔 예상외의 빠른 진격이었다. 그래도 목적하던 유인은 성공했다. 후속 결전을 노리던 두 영웅의 대결은 1631년 9월 17일 라이프치히에서 북쪽으로 4마일 떨어진곳에 위치한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구스타프의 나이는 37세. [북방의 사자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계몽군주로써 필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틸리의 나이는 72세의 고령이었다. 젊을적에 용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해서 대륙을 석권한 스페인류 전술을 장기로 보여준 자타공인 불패의 명장이었다. 근엄하고 정직했으며, 신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두터운 [갑옷의 성자]란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편집] 진행 과정
브라이텐펠트는 완만한 구릉이 연이어 있는 평원이었다. 틸리측은 전형적인 스페인류 테르시오 진형이었다. 전면 약 100명. 이것이 12열~15열로 이루어져 있고, 최전면에는 소총병, 중심에는 창병이 있다. 방진의 사각에는 각각 4개의 작은 소총대가 있으면서 이것이 1개 단위의 테르시오가 완성된다.
17개의 테르시오가 가로로 전개하면서 양익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틸리의 본진은 테르시오의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좌익의 기병을 지휘하는 인물은 파펜하임으로 용맹한 돌격과 [카라콜]이란 전법을 구사하여 용명을 떨치고 있었다. 또한 24파운드 중포 36문을 테르시오 전면에 배치했다.
구스타프 진형은 틸리와는 달랐다. 중앙엔 보병 4개여단을 배치하고 그 후방에 보병 2개여단과 기병 1개연대. 그리고 보병 3개여단과 기병 2개연대을 예비대로 배치했다. 우익에는 기병 6개연대. 후방에도 기병 1개연대. 예비대로는 기병 4개연대가 배치되었다. 좌익 기병대는 전면 3개, 후방 2개연대. 우익에 비해 얇은 진형이나 이것을 작센의 군대가 포진하여 지원해 주었다. 기병의 사이는 보병대가 메꾸고 있었다. 또한 각 부대는 1~2문의 소형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중앙 보병대 전면에는 구스타프군이 보유한 100문의 대포를 배치했다. 여기엔 중포도 50문이나 있었다. 포병대의 지휘는 도르스덴손이 맡았다.
이 진형은 테르시오를 연구하여 개량 발전시킨 마우리츠 공작이 고안한 진형으로 구스타프는 이걸 전수받아 보병,기병,포병이 결합하는 3병전술을 개발했다. 마우리츠 공작의 전술은 화력의 대량장비와 기동전이었다. 그래서 틸리진형에 비해 소총의 보유율이 월등했다. 틸리군의 소총병 비율은 30%지만 구스타프군은 70%였고, 또한 소총도 최신형이라 틸리군이 1분에 1발을 쏠때 구스타프군은 1분에 3발을 쏠수 있었다.
사실상 구스타프군의 화력은 틸리군의 3배나 월등했다. 거기에 연대포라는 3파운드의 소형포를 각 부대에 배치해 보병지원용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병사 3명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소형이었다.
[편집] 전투
먼저 양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2시간이상 계속되는 포격전 속에서 틸리군의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발사속도와 포문수에서 구스타프군에게 뒤지는 틸리군이었기에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좌익의 기병대의 피해가 심각했다. 틸리는 아군에게 전진명령을 내렸다. 부대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틸리군의 포병도 포격을 멈추고 전진했다. 하지만 구스타프군은 부대를 움직이지않고 포격을 계속했다. 틸리는 눈을 의심했다. 포격전에서 보병이 격돌하는 전 단계에서는 의례적으로 포격을 멈추는 것인데, 구스타프군은 보병을 전진시키지 않고, 포격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틸리군의 테르시오가 접근해 오자, 구스타프군의 포병대도 포격을 멈추었다. 보병대끼리 충돌할때 구스타프군 보병대에 있던 연대포가 불을 뿜었다. 연대포에는 대인살상용 작은 총알을 여러개을 담은 마포가 있었는데, 그걸 한꺼번에 대포에 넣고 쏘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연대포가 불을 뿜을때 마다 틸리군의 테르시오 전면에 있던 보병들이 우수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발포가 끝난후 뒤를 물러난 연대포가 재장전하는 사이 소총대가 그 시간을 메꾸며 사격을 계속했다.
테르시오의 소총병은 전투시 순식간에 괴멸당해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못하고 무너졌다. 이 상황에 틸리군 양익에 있던 기병대가 폭발했다. 좌익기병대을 맡고 있던 파펜하임이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돌격한 것이었다. 5,000기의 기병대는 스웨덴군 기병대 전열에 뛰어들어 공격했다. 제 1열이 단총을 쏘고 물러나면, 제 2열이 달려와 똑같이 발포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 행동이 [카라콜]이라는 전법으로 독일 승마보병이 만들어낸 전법이었다. 아군 기마병이 회전하면서 쉴세없이 사격을 가하기 때문에 적군은 혼란에 빠져 괴멸한다. 하지만 스웨덴군 기병대는 뒤이어 전원이 칼을 뽑고 돌격해 파펜하임의 기병대을 공격했다. 파펜하임 기병대는 순서대로 투입하려고 대열을 정비하던중 스웨덴군의 돌격앞에 무너졌다.
한편 틸리군 우익은 스웨덴군 좌익에 있던 작센군에 돌격했다. 작센군은 이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패주했다. 틸리군 기병은 퇴각하는 작센군을 추격해 산산조각냈다. 산산히 흩어진 작센군은 도주 도중 스웨덴군의 수송대에 약탈을 감행했다. 작센군은 전황에 아무 도움도 주지못하고 이렇게 모습을 감추게 된다.
스웨덴군 좌익이 무너진것을 본 틸리는 역전승리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틸리는 명령을 내려 무방비인 스웨덴군 좌익측면에 테르시오을 움직였다. 스웨덴군 좌익을 포위해 테르시오로 공격해 무너뜨려 승리한다는 기사회생의 전략이었다. 또한 작센군을 추격한 기병을 불러 스웨덴군 후방을 치게 하면 전황은 쉽게 판단할수 없는 상황이 될것이다.
그러나 구스타프도 이것을 보고 좌익을 움직였고, 후방에 남아있던 예비연대을 투입했다. 예비대는 나눠서 전진해 좌익부대의 사이을 지나쳐 전진하며 재집결하여 단시간에 견고한 진형을 만들었다. 전진하던 틸리군의 테르시오 지휘관은 새롭게 나타난 구스타프군의 진형에 경악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구스타프군은 곧바로 일제사격을 퍼부었고, 거기에 배후로 돌아간 틸리군 기병대도 스웨덴군 예비기병대에게 저지당했다.
구스타프는 직접 예비 기병 2개연대을 이끌고 이미 파펜하임을 격퇴한 우익에서 급파된 증원부대와 함께 반격에 나섰다. 구스타프 기병부대는 틸리군 기병대을 분쇄하고 처음 전투개시할때의 정면을 바라보던 구릉을 향해 돌진했다. 이곳에는 소수의 소총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황제군은 모든 전력을 일선에 배치했기에 전략구상이 붕괴되면 쉽사리 바꿀수가 없었다. 이에 비해 구스타프군은 횡대로 사다리처럼 편성하여 전황의 변화에 따라 자유자재로 투입할 수 있는 예비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순식간에 틸리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틸리군 측면에 공격을 가했다. 또한 스웨덴군 포병대는 첫 전투에서 사용후 후방에 방치했던 틸리군의 중포를 확보했다. 확포한 중포로 틸리군에 맹포격을 가하자 사방에서의 공격에 틸리군 테르시오는 급속히 무너지면서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패주했다.
틸리도 부하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지휘하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대군은 산산히 부서졌다. 이후 그의 명성은 두번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편집] 결과
이 전투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게 첫 승리을 안겨준 전투였다. 그 심리적 영향력은 대단하여 작센 공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는 9월 17일을 감사제로 지정하고 긴 축제일로 삼았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또한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1642년 11월 2일에 또 한번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때는 이미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죽고 없었다. 그러나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도르덴손장군에 의해 황제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제 2차 브라이텐펠트 전투로 불리고 있다.
[편집] 참고 및 참고문헌
영문판 위키에서의 참고문헌입니다.
- C.V. Wedgwood, The Thirty Years War (New York: Book of the Month Club, 1995)
- Richard A. Preston, et al., Men in Arms, 5th ed., (Fort Worth: Harcourt Brace, 1991)
- Archer Jones, The Art of War in the Western Worl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 역사군상 그래픽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사전>> 제 3권 <유럽근대편> 학연사 ISBN 4-05-6007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