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 (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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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金羲善, 1875년 ~ 1950년 9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지낸 경력이 있어 변절자로 불리고 있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899년 노백린 등과 함께 제11기로 졸업한 뒤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근무했다.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드는데, 그도 중국으로 망명을 꾀하다가 강제로 귀국당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회유로 1913년 평남 개천군 군수, 1915년 평남 안주군 군수에 임명되어 총독부 관리를 지냈다.
1919년 안주군수 재직시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두 번째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셈인데, 이 망명이 미리 계획된 것이며 일종의 스파이로서 임시정부에 잠입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 일본육사 출신으로 군사 전문가인 그를 임시정부는 군무부 차장에 임명하고 육군무관학교 교장, 군무총장 대리 등으로 군사 부문에 중용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22년 다시 변절하여 전향하였는데, 이때 임시정부 측은 대단한 배신감을 느낀 듯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통해 "돼지", "송장놈", "죽은 개" 등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그를 비난했다. 이후 국내에 머물면서 1928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역시 일본육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류동렬과 김희선에게 귀순 공작이 들어갔을 때 류동렬은 거부했고 김희선은 투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세 차례 면회한 기록도 있다.
광복 후 월남하여 서울에 머물다가 한국 전쟁 기간 중 사망했으며, 오랫동안 친일 행적 부분이 밝혀지지 않아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에 의거하여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80년에는 건국훈장 국민장도 추서받았다. 특히 1920년대 무장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는 잘못된 자료[3]를 근거로 손자까지 독립유공자 연금을 수령했다. 잘못된 기록이 발생한 까닭은 김희선의 손자가 연금 수령 기간의 연장을 위해 조부의 사망날짜를 의도적으로 조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4].
1996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5명의 공적이 허위이거나 친일 혐의가 있는 것을 밝혀냈을 때 서춘, 박연서, 장웅진, 정광조와 함께 명단에 포함되어 서훈은 취소당했다[5][6].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편집] 참고자료
- 정운현,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19/ 두 차례나 변절한 김희선 - "이런 놈은 죽은 개, 육시처참 할까 말까" 《오마이뉴스》 (2004.9.28)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독립유공자가 된 친일파 - 서훈정책의 문제점과 그 명단을 중심으로-
[편집] 주석
- ↑ 정운현, 위의 글
-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위의 글 중 3·1 운동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일본어: 宇都宮太郞)의 암호문 해독 부분
- ↑ 1925년 만주에서 전사했다는 허위 기록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료의 예로 엠파스 백과사전 - 김희선이 있다.
- ↑ 정운현, 위의 글
- ↑ 김덕련, 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 《오마이뉴스》 (2005.8.31)
- ↑ 《헤럴드 경제》 (2007.6.2) 커버스토리/ 유공자, 훈ㆍ포장, 의전 집중탐구 - 영욕ㆍ반전… 논공행상도 시대 따라 다르다?
분류: 1875년 태어남 | 1950년 죽음 |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평안남도 출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