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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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禹長春, 1898년 - 1959년)은 한국의 원예육종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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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유년시절
1898년에 일본에서 한국인 아버지이자 아관파천으로 망명한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우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수정당인 수구당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 남편의 사망으로 과부가 된 장춘의 어머니는 2명의 아들(우장춘, 우홍춘)을 키울 경제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큰 아들 우장춘을 고아원에 잠시 맡기는 일도 있었다. 당시 일본인 고아원생들은 조선사람인 우장춘을 모질게 대했고 우장춘은 마음속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복수심을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아버지는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에 그 장소에 그 동조자로 시위대를 이끌고 와 있었던 원인으로 일본으로 도망친 것이다.-우범선에서 인용- 하지만, 우범선이 죽은 이후, 가치가 없어져 일본 정부에게 버림받은 이들 가족은 배신자와 쓰레기라는 이중적 모욕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스스로 이겨나갔다. 이것은 우장춘 생애에 가장 핵심적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편집] 학창시절과 농학자로서의 삶
아들을 데려올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나아진 어머니는 우장춘을 열심히 가르쳤고, 덕분에 일본인들이 명문대학으로 동경하던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고원(雇員)으로 취직하였고, 근면성과 그를 아낀 데라오 박사의 도움으로 차별을 극복하여 농사시험장 기수(技手)가 되었다. 1936년 5월 4일에는 그의 모교로부터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7년 일본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그는 결혼을 위해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면서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지만, 논문작성 시 그 이름의 성(須永)을 사용하지 않았다.- 해임될 때까지 20여 편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1945년 아버지의 고향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다키이 농장장으로 일했다.
1949년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할 정도로 우장춘에 대한 정부의 기대가 높은 가운데, 1950년 3월 8일 대한민국에 귀국했다. 그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은 최선을 다해 봉사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여,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란 가있던 그는 기득권층들로부터 병역비리 청탁을 받자, 군복무로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면서 단호히 유혹을 거부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1959년 원예시험장 창립 10주년 기념식이 있던 날, 십이지장궤양 진단을 받을 정도로 그는 매우 성실했으며, 그의 유언은 동래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서 가져온 벼를 손에 쥐면서 한 말인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였다. 우장춘 박사가 근무하던 부산 동래 원예시험장 자리에는 그가 모친상 때, 이념문제로 출국금지당해 일본에 가지 못하자 어머니를 그리면서 만들었던 우물인 “자유천” 과 우장춘박사 기념관이 있고,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 농업진흥청 내 여기산에 있다.
[편집] 연구성과
-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강원도 감자 개량
-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
- 제주도 환경에 적합한 감귤 재배를 권하였다.
-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 수 있도록 개발
- 흔히 우장춘 하면 씨없는 수박을 만든 농학자로 유명하지만, 진짜 씨 없는 수박 개발자는 일본 교토대학교의 기하라 히토시(木原 均) 박사다. 우박사는 단지 육종학을 알리기 위해서 씨 없는 수박 이야기를 한 것이다. 물론 씨없는 수박의 개발의 근거가 된 이론은 종은 달라도 같은 속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한 우장춘 박사의 연구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