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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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국기(1875년-1879년)
류큐 왕국 국기(1875년-1879년)

류큐 왕국(琉球王國, 류구국, 유구국)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류큐 제도에 있었던 왕국이다. 당시 정식 명칭은 류큐국(流球國)이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조선 등과의 무역으로 번영했으며, 무역에 참여한 류큐의 상인들은 결속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포르투갈 상인의 기록이 있다.

목차

[편집]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오키나와의 역사입니다.

류큐 왕국은 1429년, 제3대 쇼하시 왕의 미야마 통일(三山統一)에 의해 성립되었다.

[편집] 말기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다. 1879년 일본 제국은 무력으로 왕국 체제를 폐지,류큐왕국의 국왕 상소를 멋대로 일본 도쿄에 데리고 갔다. 류큐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쇼타이 왕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사실상 류큐를 몰락시켰다(류큐 처분, 琉球處分). 결국 류큐 왕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1945년 일본 제국 패망 후 별다른 논의 없이, 류큐 독립주의자의 의견조차 묻지 않고, 미국이 점령한 채 일본의 영토로 간주되었으나, 현재에도 류큐민족의 민족자결정신에 의거하여 류큐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편집] 종교

[편집] 고유 종교

옛날부터 류큐는 고유 종교가 있었다. 슈리에는 기코에오키미우둔(聞得大君御殿/きこえおおきみうどぅん), 슈리둔치(首里殿内/しゅりどぅんち), 마카베둔치(真壁殿内/まかべどぅんち), 기보둔치(儀保殿内/ぎぼどぅんち)가 있었다.

[편집] 기독교

류큐 왕국에서 기독교의 전래는 쇼호 왕의 치세인 1622년, 야에야마에 서양 선박이 도항하고 포교를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당시 일본에선 기독교가 이미 금지가 된 상태였지만, 자와 섬이나 루손 섬에서 왕래한 서양 선박이 가끔 류큐 제도에서 기항을 한 관계로 류큐 제도에서 포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편집] 문화

류큐 왕국의 문화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이곳에서 개발된 가라데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편집] 문학

쇼세이 왕에서 쇼호 왕의 통치 기간(1531년에서 1623년)에, 류큐 최고의 가요집(歌謡集)『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가 편찬되었다.

[편집] 한국과 류큐왕국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왕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또한 자주 류큐왕국(유구국)에서 표류하여 경상도나 제주도에 도달한 표류자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오며, 대부분의 경우는 인도적으로 처우하여 돌려보내도록 했는데, 몇몇의 경우는 육로로 중국을 경유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조선인이 류큐왕국에 표류하거나 가게된 경우도 있는데, 사신이 다시 데려온 경우도 있으며 몇몇은 정착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편집] 임진왜란과 류큐왕국

임진왜란 직전, 일본은 명나라를 치도록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조선에 하게 된다. 한편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협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마침 류큐왕국의 사신이 일본의 침략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보고하여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섬라와 류큐왕국, 조선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고 이후 명나라가 조선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게 된다.[1]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C%A0%EA%B5%AC&keyword=%EC%9C%A0%EA%B5%AC 조선왕조실록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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