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나가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덴분(天文) 9년(1540년)~덴쇼(天正) 19년 1월 22일(1591년 2월 15일)는 센고쿠 시대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동생으로 아버지가 다르다. 일설에는 아버지가 같다고도 한다. 보편적으로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라고 알려져 있다. 통칭은 코이치로우(小一郞)이고, 어릴적 이름은 코치쿠(小竹)이다. 야마토(大和;일본의 지방이름)을 중심으로 100만석에 가까운 대영지을 지배하며 다이나곤(大納言;일본 고대조정의 관직명. 현재의 차관급)으로 영전(榮轉)하였기에 야마토다이나곤이라고 불려졌다.

[편집] 생애

덴쇼 9년(1540년) 치쿠아미(竹阿彌)의 아들로 히데요시 양아버지의 동생으로 태어났다.(일설에는 친동생이라고도 한다.) 어릴적에는 히데요시가 집을 나가버렸기에 서로 잘 알지 못했을거라고 생각된다. 히데요시을 섬기기 시작한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히데요시와 네네가 결혼한 에이로쿠(永祿) 7년(1564년)후라는 설이 많다. 결혼후 히데요시가 아시가루 소두(小頭;부관이 아닐까?)로 출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가신을 고용할 정도의 녹봉은 없었다.

실제로 히데나가 이전에 의동생인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에게 가신에 대한 이야기을 꺼낸적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무사의 기본을 하나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수년만에 히데요시을 보좌할수 있는 상태에까지 도달한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히데요시의 직필은 도장이나 싸인이 많아 세심한 서류관계의 일에는 매우 약하다는 설도 있어 가신이 적었던 시기에는 히데나가 자신이 직필했었을 가능성이 높다.히데요시가 세밀한 지도나 작업을 히데나가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보좌역이란 이미지가 이때부터 부여된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겐키(元龜) 원년(1570년) 에치젠(越前;아사쿠라씨(朝倉氏)의 본거지가 있는 지방)토벌 도중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의 협공소식을 듣자 오다군은 퇴각을 결정했다. 히데요시는 후위군을 맡게 되었다.(카네가사키의 탈출로 불려진 전투) 히데나가는 제 1부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正勝)와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와 함께 전력을 다해 후방을 지켰다.

덴쇼(天正) 원년(1573년) 아자이 멸망의 공로로 히데요시가 성주가 되면서 이름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고쳤다. 또한 히데나가 자신도 어느때는 성주대리을 맡았고 그 시기 나가히데(長秀)라고 개명했던것으로 생각된다. 이름은 다른 오다가 가신들로부터 질시와 질투을 받았던 히데요시의 유일한 우방이었던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서라는 설이 강하다.

그로부터 몇년후 히데나가 자신의 오른팔이라 불리게 되는 도도 타카토라(藤堂高虎)가 등용되게 되었다. 이 주종관계는 히데나가의 양자였던 히데야스(秀保)가 일찍 세상을 떠날때까지 계속되었다.

덴쇼 2년(1574년) 히데요시가 에치젠 잇코잇키(一向一揆;일종의 농민반란.)와 대치하여 출진했기 때문에 형의 대리로써 나가시마(長島) 잇코잇키 토벌에 출진했다. 이 일은 신장공기(信長公記;노부나가의 생애를 적은 서적)에도 기록되어져 있어, 이미 무장으로써도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쥬고쿠(中國;일본의 서쪽지방을 일컫는말)방면 총사령관이 되어 다지마(但馬)평정의 지휘을 맡게 되었다. 이때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에게 보낸 히데요시의 직필 편지에는 신뢰의 대명사로써 코이치로우의 이름이 나올정도로 히데요시진영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덴쇼 5년(1577년)에는 다지마 타케다성(竹田城)이 사이무라 마사히로(齋村政廣)에 의해 함락되자 성주대리에 임명되었다. 덴쇼 8년(1580년) 히데요시군이 다지마 이즈시성(出石城)을 함락하여 이로써 다지마 평정은 완료되었다. 히데나가는 이즈시성의 성주가 되고, 또한 다지마 7군(郡) 10만 5,000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영주대역이 아닌 히데나가 개인의 전공으로 이루어진 포상이었다. 또한 영지내에 있던 이쿠노(生野)은광의 관리도 맡게 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의 변(變)에 의해 사망하자 히데요시의 거병에 따라 야마자키(山崎) 전투에 참전했다. 쿠로다 요시타카와 더불어 천왕산의 수비을 맡았고 전투 후 같은해 종 5위하 미노노카미(美濃守)에 서위(敍位), 임관(任官)하였다.

덴쇼 11년(1583년) 스즈카타케 전투에 참전하여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군과 대치했다. 대치상태가 계속되던 도중에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가 거병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를 제압하러 간 사이에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이 본진에 침공해 왔다.

전투도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淸秀)가 전사하였으나, 그 와중에 급히 회군한 히데요시군의 원군에 힘입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사료(史料)인 노인잡화(老人雜話)에 의하면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에게서 키요히데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질책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행동이 용의주도 했기때문에 작전이었다는 설도 있다. 작전이라면 수비을 맡았던 히데나가는 진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노인잡화는 사료로써 의문시 될정도 가치를 의심받고 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전투가 일어났다. 히데나가는 수산(守山)에서 진군해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을 감시했다. 이 전투에서 조카 하시바 히데츠구(羽柴秀次)가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받은것으로 유명하다. 그후 원정에는 히데나가가 히데츠구을 데리고 함께 종군하고 시코쿠(四國) 정벌에서는 큰 전공을 세우게 하여 히데요시에 대한 히데츠구의 신뢰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덴쇼 13년(1585년) 기이(紀伊)국 사이가씨(雜賀氏)공격에서는 히데츠구와 함께 히데요시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정벌후 형으로부터 기이, 이즈미(和泉)등의 64만석의 영지을 하사받았다. 같은해 와카야마성(和歌山城)의 축성시에 보청부쿄(普請奉行)에 토도 타카토라을 임명했다. 축성의 명수라고 이름높았던 토도 타카토라의 최초의 축성이었다.

같은년 6월 시코쿠정벌에서는 형의 대리로써 10만을 넘는 대군의 총대장에 임명되었다. 쵸소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을 항복시킨 공적을 칭찬받아 그 포상으로 야마토을 하사받아 코오리야마성(郡山城)을 거성으로 삼아 약 116만석의 대 다이묘가 되었다.

유유자적한 이미지을 갖고 있었던 히데나가의 영토인 야마토, 이즈미, 기이는 신사와 사찰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결코 쉽사리 통치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히데나가는 여러가지 문제해결에 있어서 가혹한 처벌을 피했기 때문에 후에 커다란 문제도 남아있지 않은것으로 보아 내정면에서도 큰 공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정벌에서는 별동대의 총대장으로써 출진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공적으로 인해 8월에 종 2위 다이나곤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1월경부터 병으로 쓰러져 오다와라(小田原)정벌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동생을 걱정하여 오다와라 정벌 이전에도 병문안으로 몇번이고 방문하였고, 나라의 신사에 동생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기원도 빌었다.

덴쇼 19년(1591년) 1월 22일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52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문은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야스(豊臣秀保)을 양자로 들여서 뒤를 잇게 하였다. 히데나가의 장례는 같은 달 29일 대덕사 고계화상의 인도하에 성대하게 치루었다. [들과 산에 사람들이 가득찼다]라고 말할정도로 추모객이 모여들었다고 고서에서는 전하고 있다.

계명(戒名)은 [대광원전전아상춘악소영대거사(大光院殿前亞相春岳紹榮大居士)]. 현재 야마토 코오리야마시에 [다이나곤무덤(大納言塚)]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오사카시 중앙구 호코쿠신사(豊國神社)에는 형 히데요시와 조카 히데요리도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편집] 일화

  • 형 히데요시의 오른팔로써 문무양면에서 활약을 보이며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온후한 인품으로 형을 받쳐주고 형을 도와주는 보좌역에 철저하여 후에는 각 다이묘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던 인격자였다고 한다. 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는 히데나가의 일을 [사적인 일은 센리큐에게 공적인 일은 히데나가에게 문의하라]라는 히데요시의 말을 기록한 오토모가문 문서록이 있다.
  • 그 인격과 수완으로 오다가신의 시대부터 내정과 사람간의 절충에 특히 커다란 힘을 발휘하여 불협화음이 많았던 토요토미 정권의 주석(柱石)같은 역할을 맡았다. 히데요시의 천하통일 후에도 지배가 어렵다고 알려진 신사와 사찰세력이 왕성하던 야마토, 사이가무리의 본거지였던 기이국, 거기에 이즈미까지 평화속에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것도 히데나가의 공적이었다.
  • 항상 형을 생각하고 동생의 신분을 넘지않으면서 형에 대한 걱정으로 조언과 간언을 그치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동생덕에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한 히데요시였기에 동생의 말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였다.
  • 히데나가는 형이 진행하였던 조선침공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병석에 있을때 그는 [지금까지 외국과의 싸움에서 인마와 병량을 소비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손실은 크나큰데, 어느것도 얻은것은 없다. 화친을 맺고 교역을 하는것만이 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조선침공을 위해 센 리큐(千利休) 할복, 토요토미 히데츠구 처벌사건등의 난행은 히데나가의 사후에 일어났다.

또한 히데나가가 진행하고 있던 체제정비도 히데나가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어 문치파 관료와 무공파 무장과의 대립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히데나가가 히데요시보다 더 오래 살았다면 히데요시 만년의 어리석은 행동은 일어나지 않았을수도 있었고,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찬탈을 방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이유로 히데나가의 죽음은 토요토미정권을 둉요하게 만든 크나큰 손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출병에 반대한 건에 대해서는 출처가 [무공야화(武功夜話)]의 것이기에 그 진실성에는 의문의 목소리도 많다.)

  • 덴쇼 16년(1588년) 기이국의 사이가에 있을때 대관(代官)으로써 명령받았던 목재 2만개을 팔고서는 그 자금을 착복하는등 축재에 열을 올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
  • 유력한 가신으로 앞에 얘기했던 토도 타카토라와 더불어 시마 사콘도 있다. 양자 히데야스의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 서군으로 서로 나눠서 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