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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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일본어: 加藤淸正, かとう きよまさ,가등청정, 1562년 7월 25일 ~ 1611년 8월 2일)는 일본의 장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외가 쪽으로 6촌이 된다. 다른 6명의 무사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賤ケ岳の戰い)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카무라 출생으로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좀더 커 보이기 위해 모자를 애용했다고 한다. 축성술이 뛰어나고 호랑이 사냥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때 선봉장을 맡은 장수 였으며 일본으로 패퇴한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어 구마모토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편집] 생애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밑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게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테게의 7개의 창'중 한명으로서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3000석의 영지가 주어지게 된다.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되었으며 이후 규슈 정벌등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에는 규슈의 히고(肥後)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25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는 한반도 동쪽의함경도로 진격로를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 잡았다. 이후 명나라, 조선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반목과 조선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이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해지고 남쪽으로 후퇴하여 서생포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593년에는 서생포 왜성을 완성하고 중요거점으로 삼았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1596년 지진이 났을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150여척의 일본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도록 명령받았다. 정유재란시에는 주로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였다.[1] 그는 울산에 지구전을 펼칠 수 있는 성을 쌓고 울산 성 전투에서 농성을 벌였으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식량과 물 부족으로 병사의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문치파 측과는 계속 대립하여 내분을 빚었다. 1598년이 되자 서생포 왜성이 명나라의 마귀제독에 의해 함락되었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패전한 모든 병력을 일본으로 후퇴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 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그의 가신으로 나머지 여생을 보내게 된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 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편집] 구마모토와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후 그는 구마모토 번의 초대 영주가 되었다. 일본 3명성으로 유명한 성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구마모토 성을 1607년 축조하였는데,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성 안에 우물을 많이 만들었다. 이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 등을 장려하여 현재의 구마모토 시의 기초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본 3명성은 가토 기요마사와 도도 다카토라에 의해 축성된 성중에 구마모토 성, 나고야 성, 오사카 성을 말한다. 그리고, 나고야 성 천수대 밑에는 기요마사의 돌이라고 불리는 큰 돌이 있다.

[편집] 쾌지나 칭칭나네

북한의 통일신보는 대표적 경상도 민요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나네의 유래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2] 임진왜란 당시 패퇴하는 왜적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환호한 말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에서도 진주지방에서 가등청정을 몰아내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의 수록본이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