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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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眞聖女王, ? -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재위 887년 - 897년)이다. 성은 김, 피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의 여동생이다.
업적
신라 재정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은 48대 경문왕의 딸로 정강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의 왕위계승은 어린 효공왕의 성장을 기다리는 임시적 성격을 띠었다. 진성여왕은 당시 전해 오는 향가를 모아 삼대목을 편찬했다. 이는 어지러운 신라를 바로 세우고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최치원을 비롯한 6두품을 중심으로 중앙 정치 개혁을 이루고자 했으나 진골 세력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또한 선종 불교에 관심을 기울여 지방 세력을 회유하는 등 난국 타개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전대부터 누적된 반신라·반국가 세력의 확대로 결국 신라는 더욱 어지러워진다. 이에 진덕여왕은 헌강왕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평가..
‘귀족 피’ 보존 위해 근친혼 성행
드라마 ‘태조 왕건’의 도입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진성여왕과 삼촌 각간 위홍의 사랑. 세간의 눈은 이를 있을 수 없는 ‘悖倫’으로 재단하면서 신라 멸망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는 유교적 윤리기준에 따른 현대의 잣대이지 당시의 잣대는 아니다. 신라 왕실은 엄격한 골품제 신분을 유지하고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을 제외한 누구와도 혼인하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결혼하지 않은 진성여왕에게 각간 위홍은 공인받은 남편이었다.
KBS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은 진성여왕과 삼촌 각간(角干) 위홍(魏弘)의 이야기를 불륜으로 그리고 있다. 둘의 불륜이 신라 멸망의 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둘의 불륜 등으로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도적이 들끓어 신라가 망했다는 시각이다. 이 드라마처럼 신라의 멸망 요인을 진성여왕의 황음(荒淫)에서 찾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견해가 아니다.
그러나 막상 진성여왕과 위홍의 불륜관계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상당히 소략하다.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과 좋아지내더니 이 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그에게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케 하였는데, 그 책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이 외에 “삼국사기”에는 제49대 헌강왕조의 ‘(헌강왕이) 즉위하자 이찬(伊) 위홍을 임명하여 상대등으로 삼고’란 구절이 전부다. 이 기록만으로는 둘이 정말 삼촌과 조카 사이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더이상의 기록이 없지만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刹柱本記)에 위홍이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의 친제(親弟)라고 나오기 때문에 진성과 둘의 사이가 불륜이라는 비판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신라 사회에서 진성여왕과 삼촌 위홍의 관계는 정말 비판받을 일이었을까.
진성여왕의 치세를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려는 배경에는 여성이 왕위에 오른 것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유교적 남성우월주의 사고가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나라가 신라였다. 신라는 제27대 선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그리고 제51대 진성여왕이 여성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신라가 남녀평등주의 사회였기 때문은 아니다. 조선조때보다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녀가 평등한 사회는 결코 아니었다.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신라사회가 남녀라는 성별 구분보다 ‘뼈다귀’(骨)로 불리는 신분 구분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신라사회의 지배층은 스스로 성스러운 뼈다귀란 뜻의 성골(聖骨)과 진짜 뼈다귀란 뜻의 진골(眞骨)로 부를 정도로 신분을 절대적 분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성골인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진골인 남성 귀족들을 제치고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성여왕이 결코 훌륭한 임금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비난이 과도하다는 이유는 그 이후로도 제56대 경순왕까지 다섯명의 임금이 더 있었고,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기까지 왕조의 수명은 38년을 더 유지했다는 점에 이르면 명백해진다.
진성여왕은 겨우 11년을 재위에 있다 세상을 떴다. 그 뒤를 이은 다섯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그만이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각간 위홍이 사망한 후의 상황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위홍이 죽은 후에는 비밀리에 미소년 2∼3명을 불러들여 관계를 갖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니 이로 인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다.’
‘진성은 불륜’ 비난은 현재의 잣대
신라의 기강이 문란해진 이유가 진성여왕의 황음에 있다는 듯이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성을 천시하는 김부식의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된 사관일 뿐이다. 김부식은 잘 알려져 있듯 유교적 사관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김부식의 이런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신라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로 평가받는 제27대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선덕왕이 세가지 일을 미리 알다’라는 항목에서 선덕여왕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에 향기가 없는 것과 국경을 침입한 백제군이 어느 장소에 숨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죽을 날짜를 미리 안 현명한 임금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이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틈바구니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 다음의 ‘논하여 가로되’(論曰)라는 김부식 자신의 평은 바로 앞에 적은 사실과는 정반대의 부정적 기술 일색이어서 읽는 이를 당황하게 한다.
“논하여 가로되 내가 들으니 옛날에 여화씨(女禍氏)가 있었으나 그가 바로 천자가 아니라 복희(伏羲)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요. 여치(呂雉)와 무조같은 경우는 어린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했으나 사서(史書)에서는 왕(王)이라 공공연히 칭하지 못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라고만 기록하였다. 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에서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書經)’에 ‘암탉이 새벽에 운다’하였고, ‘역경(易經)’에 ‘암퇘지가 뛰어다닌다’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여화씨는 중국 상고시대의 전설적 임금인 복희의 누이동생이다. 여치는 한나라 고조의 부인이고, 무조는 당나라 고조의 부인이다. 특히 무조는 측전무후라 하여 여걸로 알려져 있는데 남성들에게는 줄곧 비난의 대상이었다. 김부식의 논리에 따르면 중국은 이런 여인들이 있었어도 임금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여성이 임금이 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또 다시 여성인 진덕이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망하기는커녕 불과 10여년 후 삼국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재위한 기간은 서기 632년부터 654년까지였다. 이 시기는 실로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삼국통일의 토대를 이룬 기간이었다. 김부식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사실은 외면한 채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라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진성과 위홍이 삼촌 관계였다는, 그래서 불륜이라는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김부식은 둘이 숙질 사이였음을 몰랐을 수도 있다. 따라서 둘의 관계를 근친혼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가 발견된 이후의 일이다. 문제는 둘의 근친관계를 당시의 잣대가 아니라 현재의 잣대로 바라보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근친혼 성행한 신라 지배층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를 비난하기 전에 당시 신라 지배층의 혼인 풍습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인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관계를 통해 당시의 혼인풍습과 관념을 알아보자. 태종무열왕의 부인을 “삼국사기”는 ‘서현(舒玄) 각찬의 딸’이라고 적고 있고 “삼국유사”는 ‘왕비는 문명왕후 문희니, 즉 유신공의 막내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춘추의 부인이 김유신의 막내누이란 말이다.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제30대 문무왕과 각간(角干)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 등으로서 서라벌과 신라 사회를 주름잡았다. 이것이 서라벌 시내를 오줌으로 잠기게 했던 꿈의 징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아들들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유신의 부인인 지소부인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매제이자 장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예는 단지 김유신과 김춘추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라 통일의 기초를 열었던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아우인 갈문왕 입종이었다. 그런데 갈문왕 입종의 부인은 법흥왕의 딸이다. 즉, 법흥왕의 딸은 숙부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진흥왕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흥왕에게 그 모친은 사촌누님이 되는 셈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제31대 신문왕(681∼692)의 부인은 당초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장인 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쫓아내고 새 왕비를 맞아들였으니 김흠운(金欽運)의 딸이었다. 김흠운은 바로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이 역시 족내혼의 한 모습이다.
이런 예는 또 있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갈문왕 입종의 딸이었다. 갈문왕 입종은 진흥왕의 아버지였으므로 동륜은 고모와 혼인한 셈이다. 또 진평왕의 부인 마야부인 김씨는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었다. 갈문왕은 보통 임금의 동생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니 진평왕은 첩첩으로 족내혼을 이룬 셈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ID:rbghksdk
[편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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