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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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상(李冕相, 일본어: 街村冕相, 1908년 ~ 1989년)은 일제 강점기부터 대중음악 작곡가로 활동한 북조선의 음악인이다. 이운정(李雲亭)이라는 예명도 사용했다.

[편집] 생애

함경남도 함주 출생이다.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원산시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민요와 동요를 연구했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벌교노동조합총회시 사상고취 사건에 연루[1]되어 교직을 그만두게 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니혼음악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1933년 서울로 돌아온 이면상은 이후 민요를 작곡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초기에는 주로 서정적인 내용에 민족 의식이 은근히 담긴 민요풍의 음악을 작곡했다. 1933년에 만들어진 〈폐허에서〉가 민족적 정서를 담은 현실 비판적 가사 때문에 금지곡 판정을 받은 것이 그 예이다[2] .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0년대 후반부터 시국 가요를 창작해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파 목록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1937년 열린 '황국위문조성 조선문예회 신작발표애국다교대회’에 시국 가요 네 편을 출품한 기록[3]이 있으며, 이후 〈종군간호부의 노래〉, 〈정의의 사여〉, 〈총후의남(銃後義男)〉등 군국 가요를 잇따라 발표했다.

광복후 곧바로 북조선에서 함남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을 지내 북조선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초대 대의원에도 뽑혔다.

이면상은 김순남남로당 계열의 월북 음악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평양음악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7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을 맡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묘지는 애국렬사릉에 마련되어 있다[4].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신민요 음악으로는 김상희가 다시 불러 널리 알려진 〈울산 큰애기〉가 유명하다. 북조선에서는 〈영광의 땅 보천보〉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를 다수 창작하고 혁명가극으로 발전한 가극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 벌교노동조합총회시사상고취사건 (1928년)
  2. 《연합뉴스》 (2006.12.6) 일제시대 `검열 통제 실태` 한눈에
  3. 한국 근대음악의 원형, 애국가곡 국민가곡으로 지칭한 시국가
  4. 《프로메테우스》 (2006.8.13) 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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