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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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모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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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1월 24일 ~ 1945년 4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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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히틀러의 소방수(Hitler's fireman) |
태어난 곳 | 독일제국 |
복무 | 독일제국(1918) 바이마르 공화국(1933) ![]() |
복무 기간 | 1910년 ~ 1945년 |
최종 계급 | 육군원수 |
지휘 | 3 기갑사단(1940년 11월) XLI Panzer Corps(1941년 10월) 제 9군(1942년 1월) 북부집단군(1944년 1월) 북부 우크라이나집단군(1944년 5월) 중부집단군(1944년 6월) B 집단군(1944 8월) OB West(1944sus 8월부터 9월)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동부 유럽 전선
서부 유럽 전선 |
서훈 내역 | 다이아몬드 검 백엽 기사십자장 |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 1891년 1월 24일 – 1945년 4월 21일) 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독일 장군중 방어전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편집] 생애
제 1차 세계 대전에 보병장교로써 종군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는 제 9군단 참모장, 1940년 서방전격전에서는 제 16군 참모장을 맡았다. 그후 제 3기갑사단장, 제 41군단장, 제 9군사령관을 역임하고, 특히 1941년부터 시작된 독소전에서는 1941년 겨울 모스크바 정면에서 소련군의 반격에 대항해 제 9군사령관으로써 교묘한 방어전을 벌여 전선을 안정화 시켜,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그후 동부전선 각지의 방어전에서 활약해 [히틀러의 소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그의 제 9군은 북쪽에서의 주 공격을 담당했으나 소련군의 견고한 수비에 의해 커다란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944년 1월에는 해임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원수의 후임으로 북우크라이나군집단(남부집단군)의 사령관에 취임하여 3월에는 원수로 승진했다. 6월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에 의해 붕괴된 중부집단군의 사령관을 겸임해 위태롭던 전선을 바로잡는데 성공했다. 같은해 8월 귄터 폰 클루게의 후임으로 서방군총사령관으로 B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서부전선으로 옮겼으나, 독일군은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에 의해 팔레즈 포위전에서 엄청난 타격을 받고 괴멸상태에 빠져, 상황은 그 대단한 모델의 손에도 어쩔수 없었다.
결국 9월 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원수가 서방군총사령관으로 재임되었고, 모델은 B 집단군사령관으로 전임되어 다음해 1945년까지 그 직을 수행하였다. 그사이 9월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을 실패로 끝마치게 했으며, 12월 벌지 전투에서 모델은 대규모 공세작전은 지금의 독일군 전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으나 히틀러을 설득하지 못했고, 결국 공세는 뮤즈강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임도 차차 잃어가게 되었다.
독일 패전직전 B 집단군은 루르지방에서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지휘하의 부대에 해산을 명령하고는 [독일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연합군의 포로가 되는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권총으로 자살했다.(기타 영미군에게 항복해도 소련군에게 자신을 라트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577,000여명과 노예 노동 목적으로 175,000여명을 이송한 것에 대해 전쟁 범죄자로 처형될것을 필연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괴벨스는 그의 집단군을 독일패전의 책임자로 비난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모델은 포젠나그에 있는 독일군인묘지(Der Soldatenfriedhof Vossenack)에 매장되었다.
분류: 1891년 태어남 | 1945년 죽음 |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군인 | 자살한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