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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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金昌永, 일본식 이름:金光昌永, 1890년 ~ 1967년 4월 2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였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다.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의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했다.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법과를 1916년 졸업했다.
귀국한 후 강계에서 면장에 임명되면서 관직을 시작했고 1921년부터는 강원도 경찰로 옮겨 근무하면서 경시(警視)로 승진, 금산군 군수도 거쳤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직후 만주국의 치안부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만주국에 파견되었다. 무장 독립 운동 세력이 남아 있던 만주국에서는 치안부가 항일 군대의 귀순, 토벌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김창영은 이 곳에서 양정우 부대원 7백여 명을 귀순시키고, 임수산, 오성륜, 박득범, 김백산, 김재범 등 수백여 명의 항일 세력을 체포 또는 사살하는 공적을 기록했다.
1943년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영전하여 귀국했으며 이후 광복 시점까지 전라남도 광공부장 등을 지내면서 전남 지역에서 군수품과 전쟁 지원을 담당했다. 미군정 하에서도 서울시장 격인 경성부윤을 3개월간 맡았다[1].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거치면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 탄압 사실이 드러났고, 공민권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49년 반민법정에서의 김창영의 진술은 김일성 가짜설의 중요한 반박 근거로 사용된다[2].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시점에서 만주지역 항일 세력 귀순 공작 책임자로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김창영이 한 공식 발언이기 때문이다. 김창영은 재판정에서 지금 평양에 있는 김일성과 만주 항일부대의 김일성이 같은 인물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변했으며, 김일성 부대에 대한 귀순 공작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증언했다. 김창영의 귀순 공작은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자세하게 기술한 바 있다[3].
[편집] 참고자료
- 정운현, 특별기획-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6/ 만주 특무책임자 김창영 - 김일성부대 공작책임자... 미 군정하 서울시장 《오마이뉴스》 (2004.3.29)
- 전갑생, 기획리포트/ 변절, 투항, 배신...만주 항일군 잔혹사 - 항일군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9.13)
[편집] 주석
- ↑ 《한겨레신문》 (2005.8.29) ‘돌팔매’ 맞기도 전에 ‘친미 꼭두각시’ 변신
- ↑ 《민족21》 (2005.5.1) 김일성 항일논란, 이제 종지부를 찍자
- ↑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제1부 항일혁명편,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 - 8. 남패자의 수림속에서
분류: 1890년 태어남 | 1967년 죽음 | 한국의 경찰 |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평안북도 출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