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원 (황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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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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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황실 수장 (비정통) |
이해원(李海瑗, 1919년 출생)은 의친왕의 둘째 딸이자 고종의 손녀. 황실명은 이진, 아명은 길운이다. 생존해 있는 의친왕 자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며, 황실 가족사에 정통하다.
사동궁에서 태어나 종로소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운현궁에서 살았다. 1936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그 해 이승규(李昇圭)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일본 게이오대를 졸업한 인재였으나, 한국 전쟁 때 강제 납북되었다.
199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2002년 귀국하여, 현재 하남시 단칸방에서 차남 이진왕과 살고 있으며, 서울 연희동의 땅 17만평을 되찾기 위해 소송 중이다. 장남 진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택시 기사를 하고 있으며, 삼남 진홍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딸 진주는 미혼으로 강릉에서 살다 사망했다.
그녀는 2006년 9월 29일, 대한제국 황족회라는 단체에 의해 여황(女皇)으로 추대,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을 주장 하였다.
목차 |
[편집] 승계 논란
[편집] 찬성
찬성의 여론은 반대의 여론에 비해 우세하지 않다. 이해원을 황위 계승자로 올린 황족회의 입장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해원이 현재 생존한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 중에서 최고령이기 때문에 그녀가 황위 계승자가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둘째, 27대까지 이어진 조선왕조의 임금들이 모두 남성들이었던 것은 임금 사후 계승권 내에 남성들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기에 여성 임금이 없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즉, 계승 순위에 여성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이 황위 계승자에 오르는 것 또한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편집] 반대
위의 황족회에 다른 황실 가족의 참여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은 아직 뚜렷이 확인된 바가 없으며 2005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상임이사회의 의결에 따라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李源)이 이구의 양자로 입적, 이미 황사손(皇嗣孫)의 칭호를 받았던 것과 관련해 여황 추대에 대하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물론 우리황실사랑회, 대한황실재건회 등의 황실 관련 단체들은 이를 무효로 간주하며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대한제국 황족회 사무총장 이초남은 황손 이우의 자손을 칭하는 등의 행적으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단체에 어떤 황족이 소속돼 있는지에 대한 여부도 불분명해 대한제국 황족회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고, 의친왕의 서녀로서 옹주(翁主)를 칭하고 효령대군의 후손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는 등의 행동도 반대 여론을 낳고 있다.
더욱이 황족회는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하고 이해원을 여제로 모신후에도 그들의 논리상 여제의 아들이 황태자가 됨에도 모시지 않고 남양주에서 원래 생활을 하고 계신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황실을 복원하려 하는 것은 민주공화제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과, 10~20대의 젊은 찬성론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드라마 궁의 영향으로 황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전 임 이구 |
제5대 대한제국 황실 수장 (비정통) 2006년 9월 29일 - |
후 임 현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