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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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준(安邦俊: 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과 우산(牛山)이다. 출생지는 보성(寶城)이다. 현재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牛山里)는 안방준의 호를 따 이름붙여진 것이다. 그의 다른 호 은봉은 그가 가장 존경했던 정몽주(鄭夢周)의 호 포은(圃隱)과 조헌(趙憲)의 호 중봉(重峯)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안방준은 원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중관(重寬)의 아들이었으나 문중 사람인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어릴 때는 박광전(朴光前) · 박종정(朴宗珽)에게서 배우고 1591년부터는 파주에 있는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가 되어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박광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도 의병활동을 했다. 그 외에는 생애의 대부분을 조용히 학문 연구를 하면서 지냈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등용하려 했으나 거절했으며, 인조 때 중몽교관(重夢敎官)과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를, 효종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효종 재위 초기에 좌의정이었던 조익(趙翼)의 청을 받아들여 한동안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 장령(掌令)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사헌부 지평일 때 김육(金堉)을 류성룡(柳成龍)에 비유하면서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안방준은 성혼 · 정철(鄭澈) · 조헌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서인으로 분류되었다. 죽은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 · 화순 동복면 도원서원(道源書院) · 화순 능주면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안방준 자신의 시문을 모은 《은봉전서(隱峰全書)》,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은봉야사별록(隱峰野史別錄)》, 그 외에 《호남의병록(湖南義兵錄)》, 《삼원기사(三寃記事)》, 《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 《혼정편록(混定編錄)》, 《매환문답(買還問答)》, 《기묘유적(己卯遺跡)》, 《항의신편(抗義新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