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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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2세 또는 소 루트비히 2세 (독일어:Ludwig II, 이탈리아어:Ludovico II, 825년 – 875년 8월 12일)은 855년부터 약 20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로타르 1세의 맞아들로 839년부터는 이탈리아 왕으로 봉해졌고 844년 6월 15일 로마에서 교황 세르지오 2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정식 대관식을 치루었다.
그는 로마에서 황제의 권리를 주장했으나 교황 세르지오는 단호히 거절했고 이후 세르지오가 죽고 후임이 된 교황 레오 4세에 의해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치루어 아버지 로타르 1세와 공동황제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엥겔베르가와 결혼했고 이탈리아를 직접 경영하기 위해 원정을 나섰다. 그는 남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베네벤토의 공작과 경쟁자 사이의 평화협상을 강제로 하게 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분쟁을 조정하고 853년 반란을 일으킨 살레르모의 공작을 인정해 주었고 사라센 용병들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855년 아버지 황제 로타르 1세가 죽자 그는 단독황제가 되었으나 그의 영토는 이탈리아에 한정되어 불만이 많았고 삼촌 독일왕 루트비히와 연합하여 친동생인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와 또 다른 삼촌인 대머리왕 카를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858년 니콜라오를 새로운 교황에 임명하는데 성공하자 동생 로타르와 화해하고 동생의 이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영토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863년 막내동생 샤를이 죽자 루트비히는 프로방스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동생 로타르 2세의 이혼과 관련하여 교황 니콜라오와 충돌을 빚었다. 그는 로타르의 이혼을 합법화한 독일 대주교들을 지지하였고 이를 반대하는 교황 니콜라오를 응징하기 위해 로마를 침공했다. 그러나 곧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교황과 휴전하고 로마를 떠나야 했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다툼과 사라센의 침략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866년 그는 사라센 침략군을 격퇴하려고 했지만 함대가 부족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3세와 바실리우스 1세의 도움을 요청했다. 871년 그는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우스의 지원군에 힘입어 사라센족의 거점인 바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869년에 동생 로타르 2세가 죽었는데 루트비히는 로타르의 영토인 로타링기아를 자기의 땅으로 만들지 못하고 870년는 두명의 삼촌 루트비히와 카를가 메르센 조약으로 그 땅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우스와도 사이가 벌어졌는데 바실리우스는 루트비히를 단순히 프랑크 왕이라고만 불렀고 루트비히는 스스로를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orum)로 칭하여 갈등이 있었다.
871년 루트비히는 베네벤토의 공작인 아델키스와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다시는 공작령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그 서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힘입어 그는 카푸아의 사라센족을 몰아내고 베네벤토 공작을 응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북 이탈리아로 물러났다. 그는 875년 8월 12일 브레시아에서 죽었고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 교회에 묻혔다.
전 임 로타르 1세 |
이탈리아 왕 / 신성로마제국황제 844년-875년 / 855년-875년 |
후 임 카를 대머리왕 |
분류: 825년 태어남 | 875년 죽음 | 이탈리아의 군주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