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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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元宗, 1219년 - 1274년)은 고려의 제24대 (재위: 1259년 - 1274년)이다. 는 식, 는 일신(日新), 시호는 원종충경순효대왕(元宗忠敬順孝大王). 고종과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의 맏아들이다.

[편집] 생애

원종은 고조의 맏아들이자 안혜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1219년 3월에 태어났다. 그는 1241년 정월에 왕태자에 책봉되어 1259년 4월에 몽골과의 화의조약에 따라 고종을 대신해서 몽골에 입조했다.

그가 몽골에 가 있던 1259년 6월 고종이 서거하자 실권자 김준은 고종의 둘째 아들 안경공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조신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결과 원종은 1259년 6월 4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몽골에 가 있는 동안은 김준 등의 무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태손 심이 왕위를 지켰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원종은 몽골에서 돌아와 비로소 왕위를 넘겨받았다. 이

해에 원나라는 쿠빌라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원나라로 고쳤다.

원종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은 쿠발라이와 아리패가가 제위를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종은 왕태자의 신분으로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쿠빌라이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그를 일국의 군주로 대접하였다. 이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몽골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을 하였는데, 오직 고려만이 30년 동안 항전하며 항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다.

쿠빌라이는 원종이 자신을 찾아오자 당나라조차도 정복하지 못했던 고려가 자기를 따르게 되었다면서 매우 기뻐하였고, 후에 자신의 딸과 왕태손을 결혼시켜 원종과 사돈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쿠빌라이는 고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수하 속리대로 하여금 원종을 호위하게 하였고, 이 같은 쿠빌라이의 호의적인 태도를 접한 원종은 그 후부터 다소 친몽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원종이 귀국하였을 때 개경에서는 한창 궁궐 신축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준을 위시한 조정 대신들은 내심 출륙환도를 거부하고 강화도에 머무르면서 힘을 키워 몽골과 대적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원종은 몽골측의 출륙환도 요구와 무신들의 강화도 고수 주장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내심 몽골의 힘을 이용하여 무신들에게 뺏긴 권력을 환수하여 왕권을 회복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요구에 따라 우선적으로 출륙환도를 단행하고 다음에 독자적인 힘을 키워 몽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의지는 무신들의 강한 반발로 한동안 실행되지 못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이후 왕은 형식적으로는 정권을 되찾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힘이 없었다.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김준이였다. 이 때문에 강화 궁궐에 도착한 원종은 나랏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궁녀들과 음란한 행각을 벌이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유대관계 강화에 주력했다. 원종의 이 같은 노력은 무신 정권을 몰아내고 동시에 왕권을 회복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원종은 친몽정책의 일환으로 1261년에 왕태자 심을 원나라에 보내 쿠빌라이가 아리패가를 평정한 것에 대해 축하 인사를 보냈다. 이때 파견된 전문윤은 쿠빌라이를 직접 만나 속리대가 없는 일을 꾸며 참소하는 바람에 여몽관계가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하여 쿠빌라이로부터 속리대를 다시는 고려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었다. 1264년에는 원나라로부터 왕의 친조 요구가 있자 그 해 8월에 김준의 동의를 얻어 연도로 떠났다. 그리고 9월에 연도에 도착하여 10월까지 머물다가 귀국하였다.

원종의 친조 이후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경계심은 대폭 완화되었다. 하지만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고려인들이 고려가 일본과 손을 잡고 원나라에 대항하려 한다고 참소하여 다시금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즈음 원나라는 일본이 자신들에게 입조하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고려가 일본을 설득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원나라에 조공할 것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원나라 내부에서는 일본정벌론이 대두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려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나라는 1268년에 고려에 송나라 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원나라는 김준 부자 및 동생 김충으로 하여금 원병을 이끌고 연도로 올 것을 요구했는데, 김준은 원나라에 가면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우려에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섬으로 들어가 항전할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원종은 김준의 그같은 의견에 반대했다.

원종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원나라 사신을 제거하지 못한 김준이 고민에 빠져 있자 장군 차송우가 원종을 폐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김준도 동의하여 도병마녹사 엄수안을 자신의 동생 김충에게 보내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엄수안은 김준의 생각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충을 설득하여 원종 폐립 계획을 저지시켰다. 그 후 김준 부자와 김충은 결국 원나라를 다녀왔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김준과 원조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김준은 원나라의 사신을 영접하지도 않았고, 원나라의 요구도 무시하였다. 오히려 원나라 사신에게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원종은 김준을 미워하게 되었고, 급기야 1268년 12월 임연을 시켜 김준과 김충을 살해케 했다.

김준이 살해되자 김창세, 허인세 등의 도당들도 함께 제거되었다. 이렇게 김준 세력을 제거한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며 친몽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게 된 임연은 원종의 이 같은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임연은 재상들을 모아 원종을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왕의 친서 형식을 빌어 원종의 병이 위독하여 안경공에게 선위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원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1269년 6월 22일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왕태자 심은 몇개월 전에 원나라로 떠나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왕태자 심은 원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개경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정주의 관노 정오부가 임연이 왕을 폐립한 사실을 밀고했다. 이에 왕태자는 원나라에 선위서신을 가지고 갔던 곽여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확인한 뒤 연경으로 되돌아가 쿠빌라이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왕태자의 요청을 받은 쿠빌라이는 즉시 알탈아불화를 보내 국왕 폐립 사건에 대해 추궁하였으나 임연은 원종이 병으로 선위했다고 둘러댔다. 이에 원나라측은 병부시랑 흑적을 파견하여 원종과 안경공, 임연 등을 연경으로 호출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임연은 그해 11월 재추들과 의논한 뒤 안경공을 폐위하고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렇게 원종은 원나라의 도움으로 쫓겨난 지 5개월 만에 왕위를 회복하였다.

그 며칠 뒤에 원종은 쿠빌라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원나라로 떠났고, 임연은 원나라의 추궁을 두려워한 나머지 병을 핑계삼아 자신의 아들 임유간과 심복들을 대신 보냈다.

쿠빌라이 앞에 선 임유간은 원종 폐립 문제를 추궁받자 이장용과 신사전, 원부 등의 탓으로 돌렸고, 이에 격분한 쿠빌라이는 임유간을 하옥하고 임연을 다시 호출했다. 하지만 임연은 원나라 입조를 거부하고 야별초로 하여금 백성들을 섬으로 이주토록 하여 원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임연은 1270년 2월 등창으로 죽고 만다. 그 즈음 원종은 연경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고, 임연의 교정별감직은 임유무가 계승하였다.

원종은 귀국하면서 바로 개경 환도를 시행하려 했다. 하지만 임유무는 방호사 및 각 산성별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육지로 나오지 못하게 하면서 원종의 개경 환도를 강력하게 저지했다. 이에 원종은 어사중승 홍문계와 직문하성사 송송례를 시켜 임유무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100년 동안 지속되던 무신정권은 종식되었고, 40년 가까이 머무르던 강화도 궁궐 시대도 끝이 났다.

원종이 개경에 환도하고 친몽정권이 들어서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원종은 우선 유경 등을 강화도로 보내 그들을 달랬다. 하지만 삼별초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반란의지를 분명히 하자 원종은 추밀원사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삼아 토벌작전을 명했다. 이때 원나라군의 원수 아해도 군사를 이끌고 연합군을 형성했다.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와 남해안 섬들에 거점을 세웠다. 그 후 삼별초는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1273년 2월 결국 토벌당하게 된다.

마지막 반몽 세력인 삼별초마저 몰락하자 고려는 거의 원나라에 복속되었으며, 1274년에는 원나라의 매빙사가 와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을 설치하고 독신녀와 역적의 아내, 노비의 딸 등을 뽑아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는 처지가 된다. 또한 이 해에 원나라와 사돈관계를 맺게 되면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입김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원종은 1274년 6월 왕태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56살에 승하하였다. 능호는 소릉이다.

[편집] 가족 관계

  • 정순왕후 김씨(靜順王后)
  • 경창궁주 유씨
    • 시양후
    • 순안공
    • 경안궁주
    • 함녕궁주
전 임
고종
제24대 고려 황제
1259년 - 1274년
후 임
충렬왕
고려역대 국왕
고려: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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