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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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關東軍)은, 일본 제국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에 상주(常駐)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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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설립

러일전쟁 후의 1906년,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남단의 관동주(關東州) 조차지(租借地)와 남만주철도 부속지(付屬地)의 수비를 위해서 조직된 "관동도독부 육군부"(關東都督府陸軍部)가 그 전신이며 이후 1919년, "관동도독부"가 "관동청"(關東廳)에 개편되었을 때에 관동군으로서 독립했다.

[편집] 역할

일본은 만주를 중국 침략과 대(對)소련 작전의 전진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동군은 그 주변지역에서의 일본의 권익 옹호, 지배 지역의 확대와, 일본 제국의 대륙 침략의 선봉으로서, 다양한 음모 공작과 작전을 수행했으며 중국, 한국,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100부대와 731부대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1928년에는 참모 고오모토 타이사쿠(河本大作)등이 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켰으며, 1931년에는 참모 이카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등이 9·18 사변(만주사변; 滿洲事變)을 획책 하고, 1932년 일제의 괴뢰 정권만주국의 건설을 성공시켰다. 1932년부터는 관동군 사령관이 주만대사를 겸하고 중국 동북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이 지배기간 동안 관동군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등과 함께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고 일본의 이익을 위한 철도사업등을 벌였다. 만주국의 주요한 정책 입안과 집행은 관동국사령관의 재가가 필요했다.

[편집] 군비

대소련전쟁준비와 중국대륙침략준비를 위해 관동군의 병력은 차츰 증강되었다. 1933년에는 10만명 규모였으나 1938년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과 1939년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도발하였으며 독일이 소련을 침략한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동쪽에서 이를 돕기 위한 1941년 관동군 특종 연습(關東軍特種演習, 관특연) 시에는 약 100만의 대군이 되었다.

[편집] 패망

그러나 1941년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 1943년 가을 이후에는 전력을 남방전선(동남아시아등)으로 이동하게 되어, 만주의 전력은 약체화됐다. 이후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을 때는 체계적인 반격을 하지 못하고 괴멸 하였으며 민간 일본인들을 방치한 채로 도망쳤다. 결국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후 1945년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편집] 관련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