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파크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자 리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 (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1913년 2월 4일 - 2005년 10월 24일)는 미국의 민권운동가이다. 이후 미국 의회에 의해 그녀는 "현대 민권 운동의 어머니"라 칭송되었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382일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아갔다. 이때마틴 루터 킹목사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 민권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목차

[편집] 초기의 생애

로자 파크스의 처녀적의 이름은 원래 로자 루이즈 맥콜리(Rosa Louise McCauley)이고 1913년 2월 4일에 알라바마 주 터스키지에서 태어 났다. 목수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 났다. 그녀의 부모가 갈라지게 되자 어머니와 함께 알라바마 주 몽고메리 근처의 파인 레벨로 이사를 오게 된다. 11살이 될때까지는 집에서 어머니에게 배웠으며 이후에 몽고메리에 있는 여자 산업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기를 마치고 알라바마 주 흑인교원대학에 입학 했으나 할머니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중퇴한다.

당시의 미국 남부에서는 짐 크로우법에의해 흑인과 백인은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어 생활하였다. 버스와 기차 같은 대중 교통수단도 마찬가지였는데 겉으로는 나눠있지 않으나 앉는 자리를 분리하도록 강제하였다. 또한 흑인 어린이들에게는 학교버스가 아예 제공되지 않아 걸어다녀야만 했다. 로자의 회고담에 따르면 "나는 매일 같이 그 버스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어요...그러나 네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이였고 이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지요. 그 버스는 네게 세상이 검은 세상과 하얀 세산으로 나누어져 있다는것을 실감하게된 계기였습니다."라고 한다.

1932년 로자는 레이몬드 파크스와 결혼하였다. 레이몬드는 유색인의 향상을 위한 국가 협회(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에 참여하고 있었다. 결혼 후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생활을 꾸려 나갔으며 그러던중 남편의 외조로 1933년에 고등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약 7%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만이 고등학교이상의 학력이였다. 또한 짐 크로우법에 의해 흑인들의 정치 참여를 방해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3번의 도전끝에 투표권을 등록하는데 성공하였다. 1943년 12월에 민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NAACP의 몽고메리 지부에 가입하였고 1957년까지 서기로 활동했다.

[편집] 민권 운동 활동

[편집] 버스안의 불평등

1944년에도 흑인 운동선수였던 재키 로빈슨이 비슷한 사건으로 법정에 제소된적이 있었다. 또한 10년전에도 이레느 모건이 비슷한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미국 고등법원에서 승소하였다. 이러한 승리로 각 주간을 을 연결하는 버스에서의 분리좌석은 철폐되었다. 1955년 3월 2일에는 당시 15살 소녀이던 클라우데트 콜빈이 백인 남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수갑이 채워져 체포되어 버스에서 쫒겨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헌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몽고메리에서는 버스의 앞에 4줄은 백인전용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흑인들은 주로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유색칸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버스이용인구의 약 75%는 흑인들이였다. 이 칸은 고정된 것은 아니고 표시를 옮길수 있었다. 버스가 다차기 전에는 중간에도 앉을 수 있었으나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했으며 버스가 만원이 되면 내려야만 했다. 수년동안 흑인사회는 이러한 불평등에 대해 불만을 표시해 왔다.

[편집]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하루일을 마친후 로자는 오후 6시쯤 클리브랜드 거리에서 버스를 탔다. 요금을 내고 유색칸으로 표시된 좌석들중 가정 첫줄의 빈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정류장을 계속 지나는 동안 앞에 있는 백인 전용칸의 좌석들이 점차 차게 되었고 엠파이어 극장앞의 세번째 정거장에서 몇명의 백인 승객들이 승차 하였다. 버스 운전기사인 제임스 F. 블레이크는 두세명의 백인 승객들이 서있게 되자 유색칸의 표시를 로사가 앉은 자리 뒤로 밀어내고 중간에 앉은 4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하였다. 세명의 다른 흑인들은 움직였으나 로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왜 안움직이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였다.

버스운전기사인 블레이크는 경찰을 불러서 로사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몽고메리 시의 규칙 6장 11절의 분리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원래 그녀가 앉을 때에는 유색칸이였으므로 혐의가 풀려 저녁때에는 풀려나올수 있었다.

그날 저녁 로자 파크스의 친구인 E.D. 닉슨은 알라바마 주립 대학 교수인 조 안 로빈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문의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밤을 세워 3만5천여장의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또한 여성 정치 위원회(WPC, Women's Political Council)은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12월 4일 일요일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각지의 흑인 교회에서 발표되었다. 버스안에서 충분히 평등하게 존중되고 흑인 운전사가 고용되고 가장 먼저 온사람이 중간 자리를 차지하는 때까지 투쟁하기로 하였다. 4일 후에 로자 파크스는 질서을 어지럽힌 행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유죄를 선고 받아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비용을 물도록 하였다. 그녀는 이에 항소하여 무죄와 인종 분리 법에 정식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5일 월요일에 성공적으로 하룻동안의 보이콧 운동을 마친후 지온 교회에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 하였다. 이 모임에서 "몽고메리 진보 협회"를 만들어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새로운 회장으로 당시에는 젊고 새로온 잘알려져 있지 않았던 덱스터 애비뉴의 침례교도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편집] 이후의 생애

로자 파크스는 이후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민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백화점에서의 직장을 잃었으며 남편 또한 직장에서 일을 그만두어야했다. 1957년 부터는 이사건에 대해 알리기 위해 여행을 하며 연설했다. 재봉사로 일을 계속했으나 1965년에 아프리카계인 미국 하원의원인 존 콘이어가 그녀를 비서로 고용하여 디트로이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녀는 1988년에 은퇴할때 까지 이일을 계속하였다.

1997년 자서전인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를 출간하였으며 1995년에는 회고록인 <조용한 힘>을 내놓았다. 2005년 10월 24일 92세로 운명하였다.


이 문서는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문서는 미국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