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친링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르친링(? ~ 699년)은 티베트의 옛 왕조인 토번(吐蕃)의 명장이며 가르(Mgar) 가문 일족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그의 이름을 논흠릉(論欽陵)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토번의 전성기를 이끈 명재상 가르통첸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가르통첸이 667년에 사망한 후에 아버지의 군권을 이어받았다.


[편집] 대당전(對唐戰)에서의 연전연승

  • 대비천 전투

669년 당나라 고종(高宗)이 설인귀(薛仁貴)를 나살도 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고 소정방(蘇定方)등의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티베트를 공격하게 했다. 가르친링은 토번군을 이끌고 청해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맞서 싸워 당군을 궤멸시키고 설인귀 등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나라 장수들에게 더 이상 침공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당나라에 돌려보냈다. 이 전투를 대비천 전투라고 한다. 설인귀는 귀국 후 대비천 전투에서의 패전 책임을 지고 한때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대비천에서의 패배로 서역에서의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서역을 공격했다. 그 결과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한 중요한 4개 도시인 안서사진(安西四鎭), 즉 카라샤르〈(중국이름 언기(焉耆)〉ㆍ 쿠차〈중국이름 구자(龜玆)〉ㆍ 호탄〈중국이름 우전(于闐)〉ㆍ 카슈가르〈중국이름 소륵(疏勒)〉등의 주요 도시들이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이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 승풍령 전투

토번이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당나라는 678년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을 제군대총관(諸軍大總管)으로 삼고 공부상서(工部尚書) 유심례(劉審禮)와 함께 18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하게 했다. 가르친링은 역시 청해호 부근 지역인 승풍령(承風嶺)에서 뛰어난 지휘로 대승을 거두고 유심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당시 당군에 종군하던 백제 출신 장수인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당군의 위기 상황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 진영을 습격하는 바람에 가르친링은 이경현을 비롯한 일부 당군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승풍령에서의 대승으로 인해 오늘날의 청해성 지역이 완전히 토번 영토로 굳어졌고, 이 전투를 승풍령 전투라 한다. 685년 가르통첸의 다섯 아들 중의 맏형이자 재상인 가르친네가 죽자 그 자리를 물려받아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 소라한산 전투

당나라는 692년 서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장군 왕효걸(王孝傑)에게 토번이 점령한 서역을 공격하게 하여 가르친링의 아우 가르다고리가 이끄는 토번군을 격파하고 서역에 안서도호부를 부활시켰다. 일시 기세가 오른 당나라는 696년 왕효걸로 하여금 다시 티베트를 공격하게 했으나 가르친링은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다시 대승을 거두었고, 왕효걸도 목숨만 부지한 채 돌아가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편집] 실각과 죽음

토번은 가르친링의 연이은 대활약으로 전례없이 강성해졌다. 특히 가르 가문은 아버지 가르통첸과 아들 가르친링의 공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699년 토번의 35대 첸포(토번 군주의 호칭) 치둑송첸은 가르 가문을 왕권 강화에 방해되는 걸림돌로 여겨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가르 일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가르친링은 동생 가르첸바와 아들 가르궁린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도록 하고 자신은 자결했다.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