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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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거스 히딩크

거스 히딩크(네덜란드어: Guus Hiddink 휘스 히딩크[*]듣기 , 문화어: 구스 히딩크, 1946년 11월 8일 ~ )는 네덜란드 파르세벌트(Varsseveld) 출신의 축구 감독이다. 2006년에는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호주 국가 대표팀을 16강까지 올려놓은 바가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4위에 올린 것과 2002년 축구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4위에 올린 경력과 2006년 축구 월드컵에서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을 16강에 올린 경력이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2007년 2월 탈세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구형받았다.

목차

[편집] 선수경력

아마추어 클럽 SC 바세펠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며, 네덜란드 클럽 더 더흐라프스합(De Graafschap) 에서 1967년 이래 대부분의 선수생활을 보낸다. 1970년 PSV 에인트호벤에 들어가지만, 주전자리를 얻지 못하고 1년만에 다시 더흐라프스합으로 돌아가 1976년까지 선수로 활동한다. 이후 잠시 미국에서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 샌프란시스코 어스퀘이크스에서 활동한다. 이후 고향에 돌아가 NEC 네이메헌과 계약한다. 1981년 더흐라프스합으로 돌아가나 1년 후 은퇴한다. 선수생활 동안 그는 주로 미드필더로 뛰었으며 뛰어난 축구기술로 주목받지는 못했다.

[편집] 지도자 경력

[편집] 초기 클럽

더흐라프스합에서 보조 코치로 지도능력의 가능성을 보인 후 1983년부터 1987년까지 PSV의 보조 코치를 지냈으며, 결국 1987년에는 그곳의 감독이 된다. 1988년 팀 창단이래 최초로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안기며 팀을 아약스 암스테르담, 페예노르트 로테르담과 함께 네덜란드 축구 리그의 3강의 위치에 올려 놓는다. 또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팀에 Eredivisie 타이틀을 안긴다.

1990년 터키 프로팀 페네르바체(Fenerbahçe)의 감독으로 잠시 머무르지만 1년 후 그만두고 스페인의 강호 발렌시아 CF의 감독으로 간다. 히딩크는 여기서 의견을 서슴없이 말하는 성격을 드러낸다. 한 번은 경기 중 발렌시아의 메스탈라 스타디움에 인종차별적 구호가 적혀있자 경기 중에 그것을 없애도록 명령하였다. 그가 구사하는 공격 스타일의 축구는 발렌시아 팬들 뿐 아니라 스페인 리그의 다른 팀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편집]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및 이후 행적

히딩크가 1995년 네덜란드 국가대표 팀을 이끌었을 때 가장 큰 도전은 각기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팀 내의 분란이었다. 유로 1996 토너먼트에서 엣하르 다비츠는 그와 말다툼 끝에 고향으로 보내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히딩크는 그런 마찰을 피하고 네덜란드 팀은 가장 멋진 경기들을 선사했다. 미드필더가 받쳐주는 양쪽 윙들의 공격은 수비형 미드필더인 필립 코퀴나 엣하르 다비츠조차 득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조별리그에서 벨기에멕시코와 무승부, 대한민국에 5:0 대승을 거둬 16강에 진출한 뒤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4강까지 진출하였지만, 브라질에 승부차기끝에 패배하고 크로아티아와의 3, 4위전에서도 패해 4위에 머무르게 된다. 이후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바로 뒤이어 스페인 클럽 레알 마드리드, 레알 베티스를 맡았으나 성적 부진으로 인해 사임한 뒤 네덜란드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 말에 대한축구협회로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고, 고심 끝에 승낙하게 된다.

[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4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진출했었으나 본선에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하고 4무 10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게다가 월드컵을 2년 앞둔 2000년까지도 시드니올림픽 축구 조별리그 탈락에, 아시안컵 3위를 기록하는 등의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데 반해, 일본 축구 대표팀은 시드니올림픽 축구 8강과 아시안컵 우승을 기록하는 등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 우려가 증폭되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허정무 감독을 경질하고 외국인 감독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개최국 프랑스의 감독을 맡았던 에메 자케였으나 본인의 고사로 인해 영입에 실패하였고, 다음 순위는 바로 대한민국에 5:0의 참패를 안겼던 거스 히딩크였다. 마침 히딩크 본인도 1998년 이후 치욕에 가까운 부진한 성적을 안고 있던 터라,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감독직에 도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마침내 2000년 12월 정식 계약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2001년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정식 행보를 시작하였다. 첫 무대는 홍콩 칼스버그컵. 이 대회에서 한국은 노르웨이에 2:3으로 패배하고, 파라과이에 승부차기로 승리를 거두어 3위를 기록하였다. 비록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지는 못했지만 북유럽의 강호 노르웨이에 2골을 넣는 저력을 발휘하며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리보는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대륙간 축구대회가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개최되었는데, 대구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한국은 프랑스 팀에 5: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체력과 몸싸움, 스피드에서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상대였던 것이다. 특히, 히딩크 입장에서는 3년 전 프랑스에서 한국에 안겼던 그 수모를 이번에는 자신이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지단 등의 전력 멤버가 출동하지도 않았고 전날 입국한 탓에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2군격이었기 때문에, 팬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이후 멕시코에 2:1, 호주에 1:0으로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골득실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다.(공교롭게도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도 스페인에 큰 점수차로 패한 뒤 2경기를 연속으로 이겼지만 골득실차로 탈락했었다.) 반면 트루시에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조별리그를 통과한 뒤 호주를 꺾고 프랑스와 결승에서 만났다. 1:0으로 지면서 준우승에 머물게 되지만, 한국이 5:0으로 대패한 프랑스팀에 불과 1골만 허용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이것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강팀과의 경기를 함으로서 객관적인 실력차를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 일부 언론과 축구팬들 사이에서 서서히 히딩크 경질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8월 체코 원정 평가전에서 또 5:0으로 대패하면서 히딩크 경질론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한축구협회정몽준 회장은 히딩크 감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경질론을 일축하였다. 이후 2002 월드컵이 불과 반년밖에 남지 않은 2001년 11월, 마침내 주경기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이 개장되었고, 이 날 한국팀은 1998년 월드컵 3위팀인 크로아티아와 친선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한국의 패배를 점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2:0으로 승리하고 2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아직 문제점이 많았지만 유럽팀을 상대로 선전했다는 점에서 2002 월드컵에 대한 희망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2001년 12월에 있었던 월드컵 조추첨 결과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당혹 그 자체였다. 험난 그 자체인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동유럽의 강호 폴란드, FIFA 랭킹 5위의 강호 포르투갈, 그리고 북중미의 신흥 강호 미국과 D조에 편성된 것이었다. 미국은 어느 정도 해볼만하다고 치더라도 폴란드와 포르투갈은 객관적인 전력상 도저히 이기기가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조추첨을 지켜본 히딩크 감독은 포르투갈과 폴란드가 D조로 오는 순간 알 수 없는 의미의 미소를 띠며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 한국은 우루과이와의 원정 평가전과 북중미 골드컵에 초청팀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루과이전에서는 2:1 패배, 그리고 북중미 골드컵에서는 미국과 캐나다에 1:2로 패하고 최약체 쿠바와 득점없는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의 부진한 모습을 보여 또 다시 불안감을 갖게 했다. 이제 불과 월드컵 첫 경기가 4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로서는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여전히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그 여유있는 표정의 의미를 한국인들이 알게 된 것은 2002년 3월부터였다. 유럽의 강호 터키와 0:0 무승부, 핀란드에 2:0으로 승리한 이래로, 4월 코스타리카 2:0 승리, 중국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계속해서 무패 행진을 기록한 것이었다. 게다가 5월 16일에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무려 4:1의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16강에 대한 기대가 확신으로 바뀐 것은 5월 21일, 우승후보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이었다. 서귀포에서 벌어진 이 경기를 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잉글랜드의 승리를 확신했고 전반에 잉글랜드가 1: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후반 시작과 동시에 한국의 동점골이 터졌고 경기는 결국 1:1 무승부로 끝났다. 잉글랜드 감독과 선수들은 물론이고, 기자들조차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의외의 경기 결과였다.

그리고 5월 26일 최종 평가전 상대는 지난 대회 우승팀이자 1년 전 5:0의 치욕을 안겼던 프랑스였다. 객관적 전력상 프랑스가 당연히 우세하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지만 불과 5일 전 잉글랜드가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기 결과는 안개속이었다. 전반 15분 프랑스가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한국이 2골을 넣으며 전반을 2:1 역전한채로 끝냈고, 후반에는 프랑스가 다시 2골을 기록하여 2:3으로 패배했다. 한국은 7경기 무패행진 이후 처음 패배를 당한 경기였지만, 프랑스 선수들과 감독, 기자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정도로 한국이 사실상 이긴 경기였다. 이 경기를 통해 히딩크는 한국팀이 세계적 수준으로 올랐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제 월드컵 본선 경기. 6월 4일 폴란드전에서는 여유있게 2:0으로 승리했고, 6월 10일 미국전 무승부, 그리고 6월 14일 포르투갈 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여 2승 1무로 D조 1위를 기록해 16강에 진출하였다. 국민들의 열광이 대단했다. 그러나 히딩크 본인은 아직 배가 고프다는 말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였고, 일본의 탈락에 이어 치러진 6월 18일 16강전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전반 18분에 선제골을 허용한 뒤 이탈리아의 수비벽에 막혀 고전하자 히딩크는 후반 중반 이후 수비수 전원을 벤치로 불러들이고 공격수들만 투입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결국 이 작전이 성공하여 후반 종료 직전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 후반 12분에는 역전 골든골을 넣어 이 대회에서 아시아팀으로 유일하게 8강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승부차기끝에 이겨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시아팀이 4강에 진출하는 새 역사를 기록하였다. 아쉽게도 독일과의 4강전과 터키와의 3, 4위전에서 패배해 4위에 머물렀지만,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16강 진출조차 어려워보였던 한국팀을 4위에 올린 것은 히딩크 자신도 놀란 대단한 성과였다. 이런 공로로 히딩크는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국민이 되었고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다음 월드컵까지 그를 감독으로 앉히자는 말이 있었지만, 히딩크는 한국팀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편집] PSV 에인트호번

월드컵 이후 히딩크는 고향으로 돌아가 PSV 에인트호번의 감독을 맡는다. 그리고 그는 PSV 에인트호번박지성이영표를 영입한다. 2004년/2005년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에인트호번은 챔피언스 리그가 지금의 형태로 바뀐 1992년/1993년 시즌 이래 처음으로 준결승에 이른다. (PSV는 1988년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안컵을 차지했다.) PSV는 준결승에서 AC 밀란에 아깝게 패배한다.

[편집] 오스트레일리아 국가대표 팀

2005년 7월 22일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수락하고, PSV와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동시에 감독할 거라고 발표한다.

11월 16일 오스트레일리아는 우루과이와 플레이오프전에서 승부차기로 앞서 32년만에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호주는 일본을 3:1로 이기면서 16강에 대한 염원을 불렀고 마지막 경기인 크로아티아와의 경기를 2:2으로 비기면서 호주 축구의 소원이었던 16강에 올랐다.

[편집] 지도 경력

  • 1981 ~ 1983 : 더흐라프스합 (코치)
  • 1983 ~ 1987 : PSV 에인트호번 (코치)
  • 1987 ~ 1990 : PSV 에인트호번
  • 1990 ~ 1991 : 페네르바체
  • 1991 ~ 1994 : 발렌시아
  • 1995 ~ 1998 : 네덜란드 국가대표
  • 1998 ~ 1999 : 레알 마드리드
  • 2000 ~ 2001 : 레알 베티스
  • 2001 ~ 2002 : 대한민국 국가대표
  • 2002 ~ 2006 : PSV 에인트호번
  • 2005 ~ 2006 : 호주 국가대표
  • 2006 ~ 현재 : 러시아 국가대표

[편집] 바깥 고리

전 임
허정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 임
움베르투 코엘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02년 축구 월드컵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 7 김태영 | 8 최태욱 |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 감독 거스 히딩크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2006년 FIFA 월드컵

1 마크 슈워처 | 2 루커스 닐 | 3 크레이그 무어 | 4 팀 케이힐 | 5 제이슨 컬리나 | 6 토니 포포비치 | 7 브렛 에머턴 | 8 조십 스코코 | 9 마크 비두카 | 10 해리 큐얼 |
11 스탠 래저리디스 | 12 안테 코비치 | 13 빈스 그렐라 | 14 스콧 치퍼필드 | 15 존 알로이지 | 16 마이클 비첨 | 17 아치 톰프슨 | 18 젤코 칼라치 | 19 조슈아 케네디 |
20 루크 윌크셔 | 21 마일 스테료프스키 | 22 마크 밀리건 | 23 마르코 브레시아노 | 감독 거스 히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