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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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일본어: 戦国時代, せんごくじだい)는 일본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의 사회적, 정치적 변동 및 계속되는 내란의 시기이다. 한자어를 음차한 전국 시대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아시카가 쇼군 치하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 존재하고 있었으나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고 화폐의 사용이 늘어났으며 상업도시들이 탄생하였으며,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방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특히 15세기 초의 지진과 기아와 같은 자연재해들은 채무와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

경제적 문제에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 전쟁(1467년-1477년)은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된다. 이 전쟁에서 호소카와씨가 주축이 된 동군과 야마나씨가 주축이 된 서군은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하였으며 다른 구니들로 곧 전쟁이 확산되었다.

목차

[편집] 하극상

이러한 전쟁의 확산은 중앙 정부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이 권력의 공백을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이 메꾸었다. 이 권력 이전 과정 속에서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아래에서 이미 성장을 이룩한 다케다이마가와 등과 같이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능력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찬탈당한 다이묘들도 많았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풍조 하에서 능력있는 가신들이 봉건 영주들을 무너뜨리는 게코쿠조(下克上) 현상은 1493년 본래 하급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호조 소운이 이즈를 점거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교단 역시 이 시기에 다이묘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결집, 봉기를 유도하여 정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정토종은 무수한 농민 봉기를 이끌었으며 가가에서 성공적으로 다이묘를 제거하여 100여년간 독립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편집] 통일

1세기에 달한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에 이어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에 가까워졌다. 오다는 현 아이치 현의 일부인 오와리의 이름 없는 영주에서 일본 중부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1582년 부장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죽었다. 오다 가의 졸병으로 출발하여 노부나가의 신뢰받는 부장으로 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도요토미는 남은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를 확립했으며, 천한 출신 때문에 정이대장군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관백으로서 다스렸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다시금 정치적 혼란에 접어들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도쿠가와, 우키타, 마에다, 우에스기, 모리의 다섯 장수를 5대로(五大老)로 임명하여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섭정으로 삼았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기 전까지 5대로의 견제 속에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후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에 불충하다는 탄핵으로 내란이 재개, 세키가하라의 전투로 이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승리자가 된 이야에스는 도요토미 지배를 끝내고 스스로 정이대장군의 직위에 올라 일본의 마지막 막부가 된 에도 막부를 건설하였다. 에도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되었다.

[편집] 센고쿠 시대의 문화

[편집] 사형

센고쿠 시대에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형이었다. 죄인을 십자가에 묶은 다음 고도로 훈련된 고문기술자를 이용해서 3M길이의 창을 허리 아랫부분부터 찔러넣어 반대편 어깨로 나오게 했다. 이렇게 양쪽을 다 찌른 후 다른 부위에도 창을 하나하나 찔러 넣었는데 절대 내부장기가 손상되지않아 죄인은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다. 또한 다른 사형방법으로는 긴 장대를 양쪽에 세운 후 그 위에 다른 장대를 놓은 뒤 죄인을 바비큐처럼 손과 발을 장대에 묶어 매단다. 그 다음 무거운 추를 허리에 올려 허리가 서서히 끊어지게 해서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1]

[편집] 사무라이의 칼

센고쿠 시대는 사무라이들의 전성기였다. 이들은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잘 드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시체를 이용했다. 죄인은 대개 처형당한 후 그대로 방치되는데 이 시체를 가지고 사무라이들은 칼날을 시험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길거리에는 시체가 여기저기 방치되어있는 경우가 흔했고 이는 칼날 시험용으로 사용되었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정도로 난도질을 해가며 시험해본 뒤 더 시험해볼 필요가 있으면 잘린 살점을 꿰멘 후 다시 베어 칼날을 시험했다.[1]

[편집] 주요 센고쿠다이묘

그 외에 센고쿠 시대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편집] 주요 센고쿠 시대 전투

  • 이쓰쿠시마 전투(1555년)
  • 이마야마 전투(1570년)
  • 미미가와 전투(1578년)
  • 오키타나와데 전투(1584년)
  • 다카마쓰성 전투(1582년)
  • 돗토리성 전투(1581년)
  • 아네가와 전투(1570년)
  •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 데도리가와 전투(1577년)
  • 고마키 나가쿠데 전투(1584년)
  • 미카다가하라 전투(1572년)
  • 나가시노 전투(1575년)
  • 오케하자마 전투(1560년)
  • 스즈가타케 전투(1583년)
  • 야마자키 전투(1582년)
  • 가와나카지마 전투(1561년)
  • 우에하라 전투(1548년)
  • 우에다성 전투(1585년)
  • 제 2차 고쿠부다이 전투(1564년)
  • 가와고에성 전투(1546년)
  • 미마세 전투(1569년)
  • 오다와라 전투(1590년)
  • 진토리바시 전투(1585년)
  • 스리아게하라 전투(1589년)
  • 오사카 전투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 문헌

  1. 1.0 1.1 Samurai William: The Adventurer Who Unlocked Japan; Giles Milton (UK 2002: ISBN 0-340-794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