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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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대마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대마도

대마도 정벌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던 일본인 해적인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 창왕 1년 박위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 조선 태조 5년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 세종 1년에 이종무에 의한 정벌로, 조선에서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오에이노가이고(일본어: 応永の外寇)라고도 한다.

목차

[편집] 기해동정

[편집] 상황

1418년에 대마도는 흉년이 들고, 당시 대마도 도주인 사다시게가 죽고, 아들 사다모리가 뒤를 잇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식량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대거 명나라의 해안지방과 조선의 해안지방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사다모리가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대마도를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대마도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편집] 정벌과정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아직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하고 있었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고 우박, 이숙묘, 황상을 중군 절제사,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와 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6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1419년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사다모리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000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들을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대마도 도주가 물러갈 것을 애원하여 7월 3일에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편집] 결과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 도주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편집] 대마도의 복속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 도주 사다모리는 항복을 하고 신하로서 조공관계를 이루었으며 이후에는 조선에 복속되기를 청하였다. 조선은 이전에도 대마도를 신라시대 이후 국토로 보았으며 이때 대마도를 경상도의 관할 아래 두고 직접 서울에 보고하지 말고 경상도찰사를 통하여 보고하게끔 하였다.

이를 근거로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대마도의 관할권을 주장하였다.[출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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