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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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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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509년 ~ 1547년 | |
성 명 | {{{성명}}} |
별 명 | {{{별명}}} |
왕 비 | 아라곤의 캐서린 앤 볼린 제인 시무어 클리브즈의 앤 캐서린 하워즈 캐서린 파아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부 왕 | {{{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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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비 | {{{모비}}} |
모 후 | {{{모후}}} |
앞선 왕 | 헨리 7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다음 왕 | 에드워드 6세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잉글랜드의 왕 |
성공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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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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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교 개혁 사도 계승 로마 가톨릭 주교 행정 |
인물 |
토머스 크랜머 헨리 8세 리처드 후커 엘리자베스 1세 존 웨슬리 |
교회법 |
캔터베리 대주교 램버스 회의 자문 회의 주교 회의 |
전례와 예배 |
성공회 기도서 고교회파 · 저교회파 광교회파 옥스퍼드 운동 39개조 신조 설교집 신부 감사성찬례 성인 |
각국의 성공회 |
영국 성공회·미국 성공회 아일랜드 성공회·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 뉴질랜드 성공회·캐나다 성공회 대한 성공회·대만 성공회 일본 성공회·홍콩 성공회 |
헨리 8세(영어: 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튜더 왕가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재위 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 왕국의 국왕(1541년 - 1547년)이다.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차남이며, 본명인 헨리 튜더이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였으며, 영국 종교개혁으로 6세기 이후 로마 교황청의 지배를 받던 영국 성공회 즉, 영국 교회를 독립시켰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남매로는 형인 아서(웨일스 공), 누나 마거렛(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의 왕비), 여동생 메리(프랑스의 루이 12세의 왕비)가 있다. 1493년에 아직 젖도 못 뗀 헨리는 드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 1494년에는 요크 공작이라는 작위를 수여받았고, 그와 더불어 잉글랜드 문장원총재 및 아일랜드 총독으로 지명받았다.
1501년에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였던 아서가 급사하가, 헨리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웨일스 공이 되었다.
헨리는 잉글랜드 왕실 역사상 최고의 인재로서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를 완벽히 구사할 줄 알았으며, 무예와 마상 시합 등 스포츠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가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 악보(합창곡 Pastime with Good Company 등)도 현존하는 등 문화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편집] 재위기간
아버지가 승하하자 1509년에 18살의 나이로 헨리 8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아직 상중이었지만 에스파냐의 힘을 얻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로 형수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카타리나)과 결혼식을 올렸다. 둘 사이에는 딸인 메리가 태어났다.
헨리는 당초엔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아버지 치세부터의 중신이었던 윈체스터 주교 리처드 폭스를 중용하고 있었지만, 다음해에 폭스와 더불어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중신 에드먼드 더들리를 처형하였다. 1515년경부터 어린 시절의 개인 교사였던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의 저택 및 별장은 왕의 궁전에 필적할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건물들은 나중에 헨리 8세에게 몰수되어 각각 화이트홀 궁전과 햄프톤 코트 궁전이 된다.
한편,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감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그의 시녀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헨리 8세는 형수와의 결혼은 레위기에 어긋나는 비성서적인 결혼이라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혼인무효 허가를 요청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압력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헨리 8세 자신은 일찍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칭찬을 받아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지만, 캐서린과의 혼인무효 및 앤 볼린과의 재혼을 둘러싸고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대립하자, 1534년 《국왕지상법》(《수장령》)을 발포하여 스스로를 영국 교회 즉,영국 성공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였다. 덧붙여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는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아 현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나중에 영국 종교개혁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무르익어 마침내 성공회 고유의 신학성격인 중용(Via Media)을 확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앤 볼린과의 결혼을 위한 개인적 사건이 아닌, 영국 교회가 교황청의 정치적 간섭에 반대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사건이다.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과 손을 끊고 성공회를 세움에 따라 캐서린과 영국종교개혁에 반대한 토머스 모어 등의 측근들을 차례차례 처형시키는 것을 필두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탄압은 이후 약 200년간 계속되어, 가톨릭교도들은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령이 시행되기 전까지 공직 취임은 물론 왕위 계승 등에서도 각종 차별을 받았으며, 개인 재산도 소유하지 못했다. 이후에 즉위한 왕들의 종교가 공교롭게도 가톨릭→성공회→가톨릭→성공회로 이어지는 순환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앤 볼린이 엘리자베스라는 딸을 낳은 이후 영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그녀를 마녀로 몰아 사형시켰다. 그 뒤 헨리 8세는 제인 시무어와 결혼하여 아들인 에드워드를 낳았으나 제인 시무어는 출산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일부 루터파 신하들은 잉글랜드에 루터교를 퍼트리기 위해서 독일 루터파 왕족인 앤을 새로운 왕비로 추천했다. 두 사람은 결혼했으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얼마 후 이혼했으며, 헨리는 다시 캐서린 하워즈와 재혼했으나 과거 캐서린의 추문이 드러나자 헨리 8세는 그녀를 사형시켰다. 헨리 8세는 여섯 번째의 아내 캐서린 파아와 결혼했다.
헨리 8세는 1547년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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