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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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영어: The Napoleonic Wars, 프랑스어: Guerres napol oniennes, 1796년 ~ 1815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혁명시 혁명정부 아래서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시기와 이후 제1집정기(執政期), 제1제정기(帝政期)를 통해 유럽 여러나라와 벌인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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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혁명 후 혼란기에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반도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을 당했다. 1815년 11월 20일 제 2차 파리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전쟁부터 부분적으로 전쟁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일련의 전쟁을 합쳐 대(大)프랑스 전쟁(Great French War)라고 부른다. 독일에서는 대불(對佛)대동맹전쟁(Koalitionskriege)이라고 하고, 1813년 이후 독일 해방을 위한 전투를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대동맹전쟁 이래 100년이상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관계을 제2차 100년전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혁명전쟁과 나폴레옹전쟁 사이을 구분짓는 정설은 없다. 1803년 5월 아미앙 조약의 파기를 경계로 보는 측이 많으나 1796년 3월 나폴레옹에 의한 제 1차 이탈리아원정 개시을 경계로 보는 측과 1799년 11월 브뤼메 쿠데타을 경계로 보는 측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대륙과 세계각지의 식민지도 전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역사상 최초, 정확히는 7년 전쟁에서 이어진 2번째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편집] 영향
나폴레옹전쟁 이후 유럽은 다시 복고주의, 정통주의을 원리로한 빈체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혁명정신은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등 일부 식민지에까지 퍼져, 프랑스 혁명사상(민주주의, 근대법, 특권계급의 폐지등)이 심어졌다. 구체제의 부활후에도 나폴레옹법전을 기초로 한 여러 법전은 각국에 남게 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넓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유럽역사를 크게 바꿔 이후 100년간 유럽 여러나라는 봉건영주의 영토을 단위로 하던 영역에서 국민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의도하던 유럽 통일국가 구상은 와해되었다.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높아진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후 였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프랑스혁명 이전의 앙시앙 레짐(구체제)가 부활하였다. 국내에서는 왕당파와 보나파르트간의 심각한 대립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동적인 정치체제는 계속되지않고 7월 혁명에서 타도당했다. 또한 프랑스 영역은 루이 14세 이래 계속된 영토확장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한 사보와와 니스을 제외한 현재의 프랑스 본국영토가 결정되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포함한 다수의 해외영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프랑스, 에스파냐, 네델란드, 덴마크등의 해군을 격파하여 영국해군이 세계의 바다을 아우르는 제해권을 획득해 패권국으로써의 지위을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대륙봉쇄령에 대항해 해상봉쇄을 감행해 프랑스와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교역에도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어 영국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민족주의가 높아져, 독일연방이 결성되어 독일통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연방을 시작으로 많은 영토을 획득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나폴레옹의 공격을 견디고 전후 북이탈리아을 획득하여 대국으로써의 지위을 유지하였으나 서서히 프로이센과의 대립이 깊어져 갔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강력한 육군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까지 파견하고, 전후 신성동맹을 제창하며 자유주의운동을 봉쇄하여 유럽 구체제의 중심으로써 국제적인 지위을 높였다. 그러나 농노제의 특색이 남은 국내경제는 서구 여러나라에 비하여 뒤쳐졌다. 러시아가 뒤떨어진것이 명백해진것은 이후 크림 전쟁에서 증명되게 되었다.
[편집] 진행과정
[편집] 1차 이탈리아 원정(제1차 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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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등에 의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총재정부는 라인방면에 2개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을 포위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6년 3월 이탈리아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에 나섰다. 곧이어 그때까지 최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을 약 1개월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을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구원을 위해 반격에 나섰으나 나폴레옹과 대결하여 카스틸료네 전투(8월 5일), 아르코레 전투(11월 15일~17일), 리보리 전투(1797년 1월 14일)등에서 패배했다. 2월 2일 만토바는 항복하고 오스트리아는 정전협정을 나서 4월 18일 레오벤 조약이 성립되었다.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캉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는 남네델란드와 라인강 좌측해안을 병합하고, 북이탈리아에서는 치살피나 공화국등 프랑스의 위성국이 세워졌다.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편집] 이집트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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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에 대해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연대을 끊기위해 오스만 제국령인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총재정부에 요청했다. 1798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항구을 출발해 도중에 몰타섬을 점령하고 7월 2일 이집트의 아부키르만에 상륙했다.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8월 1일 나일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함대에게 프랑스 함대가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고만다.
또한 영국이 몰타섬을 점령하여 해상의 통상권을 침해당한 덴마크, 스웨덴과 영국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시하던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1800년 제2차 무장중립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801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공격했다.(코펜하겐 해전은 4월 2일에 벌어졌다.)그 결과 무장중립동맹은 해체되고 러시아, 스웨덴은 영국과 화해하고, 덴마크는 프랑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편집] 제정의 성립(제2차 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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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1월 스웨덴의 중재로 프랑스 혁명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라슈텐트 회의가 열렸지만 오스트리아는 회의을 연기하여 대프랑스 동맹의 재건이란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1798년 12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등이 참가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1799년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을 탈환했다. 다시 위험에 빠진 프랑스는 국민들 사이에 총재정부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상황속에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돌아와 11월 9일 브뤼멜 18일의 쿠데타을 일으켜 독재권을 장악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출하였다.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고 궁지에 빠졌다가 역습에 성공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방면군도 호엔리덴 전투(12월 3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하여 캄포포르미오의 조약 내용을 재승인하였다. 또한 7월 프랑스는 교황 피우스 7세와 콘코르다트을 맺어 프랑스 혁명이래의 대립관계을 해소했다. 영국이 홀로 전쟁을 계속했으나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으면서 강화하였다.
이후 평화는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유럽시장에서 영국제품의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을 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프랑스의 옛체제 회복에서 나폴레옹의 타도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3월 21일 나폴레옹에 대한 쿠데타계획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프랑스 왕족 앙강공이 처형당한 일이 벌어져 유럽 여러나라의 비난을 받으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을 선포했다.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편집] 제3차 대프랑스 동맹
[편집] 결과
[편집] 주요 전역(戰役)및 전투
- 1차 이탈리아원정(1796년~1797년)
- 이집트원정(1798년~1799년)
- 아부키르만(灣)해전 (1798년 8월1일)
- 2차 이탈리아원정 (1799년~1800년)
- 마렝고 전투 (1800년 6월14일)
- 오스트리아전역 (1805년)
- 트라팔가 해전 (1805년 10월21일)
-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2일)
- 독일,폴란드전역 (1806년~1807년)
-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14일)
- 아일라우 전투 (1806년 2월7일~8일)
- 프리트란트 전투 (1806년 6월14일)
- 반도전쟁(半島戰爭;영어:Peninsular War ; 1808년~1814년)
- 오스트리아전역 (1809년)
- 아스펠-에스링 전투 (1809년 5월21~22일)
- 바그람 전투 (1809년 7월5일~6일)
- 러시아원정 (1812년)
- 보로디노 전투 (1812년 9월7일)
- 독일-프랑스전역 (1813년~1814년)
- 라이프치히 전투 (1813년 10월16일~19일)
- 프랑스전역 (1815년)
-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편집] 국가별 인물
-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 시대의 인물입니다.
- 프랑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영국 : 웰링턴
- 프로이센 : 블뤼허
- 러시아 : 쿠투조프
-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
[편집] 군사부문
나폴레옹전쟁 이전에는 유럽은 절대주의 왕국을 중심으로 용병을 고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거친 프랑스군은 혁명의 성과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에 타올라 일반국민을 중심으로한 국민군으로 바꾸게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징병제도 실시에 있어 유리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전쟁의 과정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나라도 국가주의 운동이 높아지면서 전쟁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전 7년 전쟁에서는 20만명을 넘는 군대을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편 프랑스혁명전쟁 중 최대일때 프랑스군인수는 150만명에 달했고, 나폴레옹전쟁 기간중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력만 3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동원제도을 정비한것은 라자르 카르노였다.
거기에 산업혁명 초기단계에 있었기에 병기의 대량생산이 거대한 군대의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기간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 2위의 무기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그들의 도망율은 낮았기에 산병전술에 의한 병사 자율적 판단에 의존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화된 군대는 사단이라 불리는 1만명정도의 독립행동이 가능한 작전단위의 편성이 도입되어, 대부대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군제개혁도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빨랐다.
[편집] 군사기술
보병의 주력병기는 프린트록식 전장총이었다. 라이플도 사용되었지만, 당시 장진시간이 길고 탄환을 생산하는 공업기술도 낮았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병부대는 정밀하게 겨냥하지 않고, 적을 향해 탄막사격을 가했다.
포병은 그때까지 보병의 엄호만을 맡았기에 기동성이 낮은 부대였으나,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여 독립된 부대로써 편성하였다. 나폴레옹은 포탄의 사이즈를 표준화하여 포병부대간의 융통성을 쉽게 하였다.
병참은 아직 철도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의 군은 현지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유럽에서 손쉽게 조달하여 높은 기동성을 발휘하였으나 인구가 희박한 러시아나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동력이 둔화되었다. 원거리 사이의 통신에는 수신호 통신이 도입되고, 전쟁기간을 통해 사용되었다. 열기구에 의한 공중정찰이 1794년 6월 26일 블류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용화 되었다.
[편집] 나폴레옹의 전술
나폴레옹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것이 특기였다.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 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처럼 [황제는 우리들의 다리로 승리을 얻었다]라고 대륙군 병사들의 말처럼 이 사상이 나타났다. 카스틸료네 전투에서 분산해서 진격하여 2배의 병력을 가진 오스트리아군의 기선을 제압한 기동을 하여 각개격파했다. 울름 전투에서는 적 주력의 측면에서 배후로 크게 기동하여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포위해 항복으로 몰아 넣었다.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은 아군 일부을 적 주력의 공격을 상대하고, 그 사이 주력을 이끌고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작전을 특기로 삼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프리트란트 전투가 그 성공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편집] 참고 및 참조문헌
- 영문판 위키
- 일어판 위키
- 역사군상시리즈 제48권 <<나폴레옹:전쟁편>> 학연사 ISBN 4-05-6013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