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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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

선사시대 유적지로는 암사동 유적지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백제, 고구려, 신라 모두가 한강 유역을 서로 차지하였다. 서울에 최초로 남경을 세운 것은 고려 문종 23(1068)년으로 보인다(《고려사》 세가 8권). 공민왕은 1356년 이후 남경천도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중단되었고,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의 하부 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1945년 다시 경성을 서울로 고치고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경기도 주변으로 서울의 행정구역은 점차 넓어져 1973년 현재의 시계(市界)가 완성되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목차

[편집] 선사시대

  • 암사동 유적지 - 약 기원전 4천 ~ 3천 년 경의 유적지로, 기둥과 들보를 세운 방형 집터와 농경.수렵용 석기,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되었다.

[편집] 고조선

  • 각지에 고인돌이 있었음이 확인되나, 대부분이 토지개발로 멸실된 상태이다.
  • 주암댐 및 남강댐 수몰지역에서 발굴한 고인돌이 고려대학교건국대학교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 한강의 양화도가 공무도하가의 배경이라는 주장이 있다.[1]

[편집]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백제, 고구려, 신라 모두가 한강 유역을 서로 차지하였다.

[편집] 유적

[편집] 백제의 유적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도읍지로 삼은 곳은 하북위례성으로, 현재 중랑천 일대로 비정된다. 이후 백제는 도읍을 하남위례성으로 옮겼으며, 일반적으로 몽촌토성에 비정한다. 이후 왕도조직을 갖추면서 한성으로 발전하는데, 한성의 왕성으로는 남북의 두 성이 있었는데 각각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으로 비정된다.

  • 풍납토성
  • 몽촌토성
  • 백제 적석총

[편집] 고구려의 유적

  • 아차산성

[편집] 신라의 유적

  • 이성산성 - 백제.고구려.신라 중 어느 나라의 유적인 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편집] 남경(고려)

[편집] 고려 숙종대

최초로 남경을 세운 것은 고려 문종 23(1068)년으로 보인다(《고려사》 세가 8권).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약 30년 뒤인 숙종대 1099년에도 건도 논의가 있었고, 1101년에는 실제로 집행된 것으로 보인다(《고려사》 세가 11권). 같은 곳에는 일관인 최사추 등의 상주가 수록되어 있다.

  • “‘저희들이 노원역(盧原驛), 해촌(海村), 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山水)를 살펴본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白嶽) 남쪽의 산수 형세가 옛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 “‘남경을 새로 건설하는 데는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고 백성들의 농토를 많이 빼앗아야 될 것이오니 청컨대 경위령(京緯令)의 말한 바에 근거하여 산에 의거하여 형세를 취하기도 하고 물로 지형을 표하기도 하되 우선 안으로 산수 형세를 따라 동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으로는 면악(面嶽)까지를 경계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고려사』 세가 제11 숙종 7년 3월의 기사).” 서울 600년사에 따르면 대봉은 낙산이며 기봉은 안산이고 사리는 신용산·이촌 일대라고 한다. 즉 남경은 조선조의 도읍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천도의 논리를 제공한 것은 김위제라는 일관으로 보인다. 김위제는 도선의 비기·답산가, 그리고 저자가 불명확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개성의 지덕이 그의 시기에 쇠하였음을 이야기했다(《고려사》122권 열전 35권). ‘건국한 후 1백 60여 년에 목멱벌에 도읍한다’고 하며, 그 근거로는 앞선 도참서들 말고도 오행설, 즉 존재자들에게 부여되는 속성들의 상응 체계 역시 그 뒷부분에서 인용되었다. 비기의 내용으로 인용된 문장가운데는 “11, 12, 1, 2월을 중경에서 지내고 3, 4, 5, 6월을 남경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가 포함되어 있고, 이는 묘청의 반란과 같은 고려조의 여러 사건들에서 여러 차례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편집] 공민왕~공양왕대

공민왕은 1356년 이후 남경천도 작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군주로, 고려사에 따르면 1357년 1월 "임진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전에 참배하고 한양(漢陽)에 천도할 데 대하여 점을 쳤더니 왕의 손에 정(靜) 자가 잡혔다. 다시 이제현에게 명령하여 점을 치라 하였더니 동(動) 자를 얻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대가 몸을 깨끗이 하고 제사하여서 길한 점괘를 얻었으니 참으로 나의 마음이 흡족하다(《고려사》39권 세가 39권)”라고 하"여 국왕의 천도 의지가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그 실행이 힘들었던 것 같다. 명확한 중단 기사는 없으나 공민왕 즉위 10년을 넘기면서 적극적인 천도 진행 기사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된다. 또한 유학자들이 공민왕을 제지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고려사》 제106권 열전 제19 윤해).

이러한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공민왕대와 동일한 이유로 인해 모두 기각되었다(《고려사》 제133권 열전 제46 신우 1 신우 원년, 제112권 열전 제25 박의중 등).

[편집] 한성부(한양)(조선시대)

경복궁 어좌의 모습
경복궁 어좌의 모습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군주인 이성계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수도를 옮기는 데에 대한 논의는 풍수·도참설에도 집중되었지만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편 풍수·도참설에 능했던 하륜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가 명당이었고, 이로 인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크게 논의가 일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러한 논거로 수도의 입지를 정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북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 《태조실록》3년 8월 13일조

따라서 풍수·도참설에 기반한 논의가 국왕의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사 자초(무학)가 인왕산에서 출발한 축을 따라 하여 도읍의 터를 잡자고 주장했다는 설은 야사로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간행된 《오산설림》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실록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이야기로, 신뢰할 수 없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가장 먼저 사직이 완공되었고 그 다음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었다. 조정과 시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다. 성곽은 궁궐과 종묘가 완공된 이후에 건설되었다. 정종이 즉위하자 2년동안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태종이 즉위하고부터는 다시 한양이 수도가 되었다. 태종대에는 태종의 즉위를 도와 강력한 권세를 지니고 있던 하륜이 다시금 무악천도론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개성까지 더해 세 개의 후보지가 다시금 조선조 수도가 입지할만한 곳으로서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태종은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척전(擲錢)으로 도읍을 결정하기로 했다. 척전의 결과는 "신도(新都)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고 한다(《태종실록》4년 10월 6일). 물론 태종은 태조의 결정으로 지어진 수도를 버리는 데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새로이 토목공사를 일으키는데 대한 부담감 역시 컸을 것으로 보인다(《태종실록》4년 10월 4일).

즉 1394년 - 1398년과 1400년 - 현재까지 두 시기로 한양의 수도시기를 나눠 볼수 있다. 1394년부터 4년동안 수도였다가 1400년부터 다시 수도가 된 것인데 맨 처음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때까지 합치면 610년이 넘고, 태종 즉위부터 따지면 600년 가량 된다.

[편집] 경성부(京城府, 1910년~1945년)

1900년대의 서울
1900년대의 서울

1910년 9월 30일 공포, 10월 1일 시행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의 하부 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경성은 수도가 있는 서울이라는 뜻이지만, 그 의미의 약화를 위해서 대개 일본 발음인 ‘게이조’로 불렀다.

[편집] 서울특별시

[편집] 광북후 및 한국 전쟁

  •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침.
  • 1946년 9월 28일 서울시를 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
  • 1949년 8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중 숭인면, 뚝도면,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 중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가 편입되었고[2],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같은 날 서대문구은평출장소, 성동구뚝도출장소, 성북구숭인출장소가 설치되었다[3].
  •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에서 서울특별시로 개칭

[편집] 서울의 확장 과 현대화

[편집] 서울 올림픽

[편집] 현재

[편집] 주석

  1. 김해웅.손주영, 묻혀있던 선유도의 비밀, 《서울사랑》
  2. 시·도의관할구역및구·군의명칭·위치·관할구역변경의건 (제정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159호)에 의함.
  3. 서울시구출장소설치에관한건 (제정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160호)에 의함.
  4.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제정 1962년 11월 21일 법률 1172호)에 의함.
  5. 서울특별시및경기도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제정 1973년 3월 12일 법률 2596호)
  6. 서울특별시송파구등13개구설치와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 (제정 1987년 12월 31일 대통령령 제12367호)
  7. 서울특별시광진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광역시·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 (제정 1994년 12월 22일 법률 제4802호)

[편집] 참고

[편집] 링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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