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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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경(高羲敬, 1873년 ~ 1934년)은 일제 강점기에 백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인물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으로 활동한 고영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개화파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인을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친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1885년 졸업하고 1891년 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 업무를, 이후에는 황실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 축하 사절단(단장 이재각)의 일원으로 영국에 다녀왔다.
1906년 예식원 부경(副卿)과 제도국 의정관, 궁내부의 예식과장과 예식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일본 황태자를 맞는 봉영위원(奉迎委員)을 지냈다. 같은해 시강원에서 일하면서 영친왕의 강제 일본 유학 때 배종했다.
한일 합방 조약 체결 후에는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었고, 고희경은 이왕직 사무관으로 계속 왕실 관련 업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순종의 가족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 고영희가 1916년 사망하자 자작 작위를 물려 받았다가 1920년 백작으로 승급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고영희와 고희경 부자는 유일하게 2대에 거쳐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인물들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고영희와 함께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1934년 6월 1일 그의 작위를 습작 받은[1] 고흥겸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고희경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2].
[편집] 주석
- ↑ 1934년 6월 1일~:《조선총독부관보》(1934.6.6.)
- ↑ 이민정, 재산 환수되는 친일파 9인은 누구? 《오마이뉴스》 (200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