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겐 셋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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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겐 셋사이(일본어: 太原雪斎 1496년 ~ 1555년)는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이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사(軍師)이다.
[편집] 생애
셋사이는 메이오(明應) 5년(1496년), 스루가(駿河)의 전국다이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중신 이하라 사에몽위 마사모리(庵原 左衛門尉 政盛)의 아들로써 태어났다. 모친은 오카츠 마사노부(興津正信)의 딸로써, 아버지측인 이하라씨는 스루가 이하라(현재의 스즈오카현 스즈오카시)주변을 다스리던 일족이었고, 어머니측 오카츠씨는 요코야마성(橫山城)을 본거지로 해운(海運)을 장악한 해적(수군)도 이끌고 있었다. 두 가문 모두 이마가와씨 중신으로 셋사이는 태어날때부터 이마가와씨에 충절을 다해야 하는 의무을 지닌듯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부친 이하라 마사모리는 셋사이를 가까운곳에 있는 젠토쿠지(善得寺)라는 절에 들여보냈다. 필시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절에 들여 보낸것으로 생각할수 있었으나, 어째서인가 셋사이는 그대로 선승(禪僧)으로써의 길을 걸을 각오을 굳혔다. 에이쇼(永正) 6년(1509), 셋사이의 나이 14살때 교토로 올라가 겐닌지(建仁寺)에 들어간뒤 그곳에서 스승 죠안류소(常庵龍崇)의 손에 의해 출가득도(出家得度; 채발염의;머리를 깍고, 법의를 입는것.)하여 큐에이쇼기쿠(九英承菊)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대로 겐닌지에서 수행을 계속하였다면 나중에는 겐닌지의 주지에까지 출세할수 있을거라 생각되었지만, 셋사이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부터 수재(秀才)로써 장래를 촉망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돌아와서 이마가와씨을 섬길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다섯번재 아들인 方菊丸의 교육계로써 셋사이을 임명한 것이다.
그 당시 셋사이의 기분은 [당혹스러움]그 자체였겠지만, 부친은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중신 중 1명이었다. 거절할 수 있는일이 아니었기에 스루가로 내려가 선득사(善得寺)에 들어갔던 4살의 方菊丸을 맡아 양육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요청을 2번이나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후 우지치카의 허락을 얻어 方菊丸을 데리고 교로쿠(享祿) 3년(1530) 다시 겐닌지에 들어가 수행을 계속하였으나, 겐닌지의 선(禪)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묘심사(妙心寺)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 시기 방국환은 스승 죠안류소(常庵龍崇)에 의해 출가득도하여 가쿠쇼호(承芳)라고 이름을 고쳤다.
또한 가쿠쇼호는 도호(道號)을 [바이(梅岳)]로 정해져 이후 바이가쿠쇼호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우지치카의 사후, 장남 우지테루(氏輝)가 가문을 계승하자 5남 방국환은 그대로 선승으로써 키워지면 되었다. 덴분(天文) 4년(1535년) 선득사의 주지였던 킨케이쇼슌(琴溪承舜)의 7회기법요 때문에 스루가에 내려가 다시 선득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덴분 5년(1536) 3월 이변이 일어났다. 우지테루와 동생 겐고로(彦五郞)의 두사람이 돌연 그것도 같은날에 급사하고 말았다. 이마가와가의 가독은 이미 절에 들어가 있던 3남 겐코에탄(玄廣惠探), 4남 쇼니센쇼(象耳泉장), 그리고 바로 방국환에서 바이가쿠쇼호(梅岳承芳)란 이름을 갖고 있던 5남 이들 3명중에서 선택해야했던 것이다.
셋사이에게는 다시없는 찬스였다. 곧 4남은 가독쟁탈의 레이스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3남 겐코에탄은 측실의 소생이었다. 셋사이는 바이가쿠쇼호의 어머니이자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정실 쥬케이니(壽桂尼)와 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에탄과 가쿠쇼호의 후계자다툼(하나쿠라(花倉)의 난)은 셋사이와 쥬케이니의 지지을 받은 가쿠쇼호의 승리로 돌아갔고, 가쿠쇼호는 가독상속을 위해 환속하여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보통 여기서 양육계로써의 임무는 끝나게 된다. 그런데, 요시모토는 셋사이을 놓아주지 않았다. 스루가의 이마가와관(今川館)의 근처에 사망한 형 우지테루의 보제사(菩提寺)로써 린자이지(臨濟寺)란 절을 짓고는 이곳의 주지로 셋사이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덧붙여서 셋사이라는 말도 이 린자이지 안에 지어진 건물의 이름으로 여기서 살았기 때문에 셋사이란 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휘(諱)을 타이겐(太原), 자(字)을 스후(崇孚)라고 하였다.
셋사이는 그간의 공적으로 인해 요시모토의 두터운 신뢰을 받아 정치, 군사에 이르러 최고 고문(顧問)으로써 중용되었다. 요시모토는 모든 일을 셋사이와 상담했다. 셋사이는 슨푸 린자이지의 주지로써 종교적인 영향력을 갖고 정치에 참여해 그를 가리켜 [집권(執權)] 혹은 [흑의(黑衣)의 재상(宰相)]이라고 표현하거나 불렸다. 이정도면 단순히 상담역에 불과한 위치라고 볼수 없었고, 셋사이는 이마가와가의 군사로써 정치, 군사, 외교에 뛰어난 수완으로 요시모토을 보좌하였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덴분 6년(1537) 타케다씨와 결혼동맹을 체결하고, 스루가 동쪽의 호죠씨와 절충하여 동쪽국경을 안정화시켰다. 이후 군략을 꾸며, 덴분 15년(1546) 미카와(三河)에 이마가와씨가 침공할시에 군사지휘권을 행사하여 덴분 16년(1547)에 타하라성(田原城)을 공략하고, 덴분 17년(1548) 오즈키자카(小豆坂)전투에서도 총대장으로써 오다씨(織田氏)와 싸워 우위을 차지했다.
덴분 18년(1549) 11월 미카와 안쇼성(安祥城)을 공격하여 수비하던 성주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廣;노부히데의 장남)을 생포한 뒤, 작년에 빼앗겨서 노부히데의 인질로 있던 마쓰다이라 타케치요(松平竹千代;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인질교환을 진행시킨것도 셋사이였다.
다만 요시모토의 장남 우지자네와 이마가와씨의 인질이었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견도 맡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셋사이가 슨푸을 떠난 기간(타케다씨, 후호죠씨와의 교섭과 미카와로의 원정등)과도 겹쳐지기 때문에 두 인물에게 큰 영향을 끼친것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셋사이는 내정,외교면에서도 활약하여 덴분 22년(1553) 이마가와씨의 분국법인 이마가와 가명목록 추가 21개조을 제정하고, 덴분 23년(1554) 이마가와, 호죠, 타케다의 3자간의 합의에 의해 이른바 [갑상준(甲相駿)3국동맹]을 실현시킨 프로듀서는 셋사이였다.
그외에 셋사이는 린자이슈(臨濟宗)을 중심으로 영내에 있던 사찰과 신사의 종교 통제및 재래상인을 보호하는 상업정책등도 진행하여 이마가와씨의 최전성기을 이룩하는데 공헌했다. 또한 풍부한 교양인으로써 [역대서략(歷代序略)]이란 저서을 남겼다.
셋사이는 스루가의 쵸케이지(長慶寺)에서 코우지(弘治)원년(1555) 윤 10월 10일에 입적하였다. 향년 60세였다.
요시모토의 오른팔로써 수완을 발휘해 이마가와씨 발전에 큰 기여을 한 그였기에 [만약 셋사이가 5년 뒤 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에까지 생존하였다면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앗을 것이다.], [이마가와씨의 쇠퇴는 셋사이의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등을 평가한 문헌도 매우 많았다.
[편집] 참고 및 참조문헌
※역사군상 그래픽전사시리즈 <<전략전술병기사전>> 제2권 <일본전국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