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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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고려 말기의 원종부터 때부터 봉공한 명장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본연(本然)으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이며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고종 때 음서로 관직에 들어 산원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 감찰어사(監察御史)을 거쳐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고 이 시기에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위도(葦島) 방어의 공로가 있다.
1263년(원종4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어 진도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으나 문무겸직의 이유(문관이 무관의 벼슬을 겸함)로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다. 이 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복직,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1269년 임연(林衍)의 난으로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왕으로 내세우자 원나라 세조가 보낸 군사 2천과 함께 진압하려 하였다가 원종이 복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270년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자 추도사(追討使)가 되어 삼별초를 공격했고 1271년 몽고군과 합세하여 승화후 온을 죽이고, 남은 삼별초의 잔당이 탐라로 도망치자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몽고 장수 흔도와 홍다구와 함께 난을 모두 진압하고 시중(侍中)에 올랐다.
1274년 원나라의 왜 정벌에 고려군의 총대장 장군으로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 대마도를 쳤으나 태풍과 풍랑으로 실패한다. 본디 고려인인 홍다구와 의견 충돌이 잦았던 것으로 보아, 군사 작전의 문제로 실패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일본사 문영의 역)
1277년 위득유(韋得儒)에 의한 무고 사건이 발생하여 원나라의 홍다구의 중상모략으로 모반의 누명을 쓰게되어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元世祖)에 의해 수도 연경으로 압송되어간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충렬왕(忠烈王)을 위태에 빠뜨렸으나 충렬왕이 계속 무죄임을 항변하고 적극적으로 외교 활동을 벌여서 방면되었다.
1281년 제 2차 왜 정벌에 다시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 참전한다. 그러나 대폭풍이 있어났고 왜군은 해변에 흙으로 옹벽을 쌓고 저항하는 통에 나아가 싸우지 않고 선상 대치로 대기만 하다 큰 손해를 입고 돌아왔다. (일본사 홍안의 역)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일본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과의 전쟁 준비로 국력을 낭비하여 가마쿠라 막부 정권이 쇠퇴하고 분열되어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원나라는 추충정란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의 호를 주었고, 충렬왕으로부터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1300년에 별세했으며, 왜 정벌 중의 병사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책임과 왜 정벌 이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민심을 잃은 까닭으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인 안동에서 장례를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