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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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朴寅浩, 1854년 12월 25일 ~ 1940년 4월 3일)는 천도교 지도자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도호는 춘암(春菴)이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여 1883년 천도교에 입교했다. 1884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가섭사에서 직접 지도를 받은 몇명의 제자들 중 한 명이다. 고향인 예산에서 포교하던 중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충청도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이후 손병희의 갑진개혁운동에 동참했고, 1908년 제3대 교주 손병희의 뒤를 이어 제4대 천도교 교주가 되었다.

1919년 손병희의 주도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였다. 천도교의 자금을 최린을 통해 3·1 운동 경비로 지원하였고, 이종일, 이종린, 김홍규, 윤익선과 함께 《조선독립신문》의 발간과 인쇄 작업을 맡았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손병희 사후 최린의 신파와는 대립하여 일본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가 순종 사망으로 인한 국장을 계기로 6·10 만세운동을 연합 조직할 때 가담했고, 1936년에는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반일 기도를 지시한 무인멸왜기도사건이 드러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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