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애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천애(金天愛, 1919년 ~ 1995년 3월 30일)는 한국소프라노 성악가이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아버지가 감리교 목사였기에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무사시노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고,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를 불러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김천애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인 가곡 〈봉선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애환을 봉선화에 빗대어 표현해 국민적인 애창곡이 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금지된 노래였다는 주장[1][2]과, 관제 음악회에서 군국가요와 함께 불려진 이 노래가 항일 음악일 수 없다는 주장[3]이다.

김천애가 무사시노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시기는 태평양 전쟁으로 예술 전분야에서 어용 전시회나 공연이 강제적으로 열리던 때였다. 음악 분야에서도 1941년 조선음악협회가 음악보국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천애는 이 음악회에 참가했다. 또한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이 김생려를 중심으로 1942년 결성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지방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봉선화〉로 유명해진 김천애는 테너 이인범과 함께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성악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43년 현제명대화숙 안에 경성음악연구원을 설치했을 때는 성악 분야 교수로 임용되었다.

2005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김천애는 이 명단의 음악 부문에 포함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다. 광복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에 불과하여, 전체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들 중 가장 젊은 편에 속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교수와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한국과 미국에서 교회음악 관련 활동을 평생 꾸준히 벌였다.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자유아시아방송》 (2006.5.3)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 봉선화
  2. 《조선일보》 (2005.11.14) “악기잡혀 독립선언문 인쇄 홍난파가 어찌 친일파인가” - 원로·중진 음악인 세미나서 ‘親日명단’ 개탄
  3. 관제 음악회에서~: 방학진, 가곡 ‘희망의 나라로’를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 - 현제명과 홍난파 《우리힘》 (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