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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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왕후(端敬王后, 1487년~1557년)는 중종의 첫째 부인이자 폐비 신씨의 외질녀이다. 본관은 거창이며, 성은 신(愼)이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 최단재위기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편집] 생애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안동 권씨 권람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1499년(연산군 5년) 12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으나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인 데다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년(중종 원년) 9월 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앉힌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다(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짐).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함에 있어서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녀는 폐위된 이후 쓸쓸히 지내다가 1557년(명종 12년) 음력 12월 7일에 71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로 불리우다가,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1739년(영조 15년) 3월 28일 김태남 등의 건의로 복위되었다. 그 때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능호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온릉(溫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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