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르바로사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의 일부) |
|||
![]() |
|||
|
|||
|
|||
|
|||
교전국 | |||
![]() ![]() ![]() ![]() ![]() ![]() |
![]() |
||
지휘관 | |||
![]() ![]() |
![]() |
||
병력 | |||
약 320만명 전차 3,600대 항공기 4,389기(이중 2,598기는 전투기) |
약 260만명 전차 12~15,000대 항공기 8,000기 |
||
피해 상황 | |||
약 174만여명 사망 36,000여명 실종 60만 4,000여명 부상 |
알 수 없으나 추축군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짐 |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어: FALL Barbarossa)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기습공격한 작전명칭이다. 작전 기간은 1941년 6월 22일부터 1941년 12월까지였으며, 작전 이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일설에는 붉은수염은 스탈린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원래 목표는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부분(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정복이었으나 실패했다. 이 실패는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 전쟁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했고 결국은 나치 독일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목차 |
[편집] 배경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을 개시했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읽은 독자라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책 내용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이 필요하니 이를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는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히틀러는 슬라브인을 열등인종으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을 맺었다. 이것은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의 분할지배에 합의하고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절대 손을 잡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양대 적대세력이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에게 있어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독일 육군수뇌부는 영국을 후방에 두고 소련을 공격하여 2개의 전선을 만드는것을 염려했지만, 히틀러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작전개시을 명령했다. 히틀러는 서방전격전의 성공에 힘입어 적군(赤軍;소련군의 명칭)과의 전투에서도 승리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이 나라가 사라질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적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화평을 촉진시키길 기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국경에 250만명의 대병력을 이동시키고, 소련영토에 대한 수많은 공중정찰을 실시했지만, 소련은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않아 독일의 기습공격을 용인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독소불가침조약이 유효한 약 2년 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는 않을것이라고 스탈린이 확신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히틀러가 영국과의 전쟁을 종료시킨 후에도 자국을 공격한다는것을 믿지않았고, 정보기관으로부터 여러번 경고을 받았음에도 무시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 정보가 독일과 소련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게 하려는 영국의 음모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한다.
히틀러와 독일군지휘부는 3개의 집단군을 소련의 특정지방에 있는 대도시을 공격, 점령목표로 삼아서 각각 할당했다. 2개 군(軍)과 제 4기갑집단으로 구성된 빌헬름 폰 레프원수가 이끄는 북부집단군은 발트해연안에 있는 발트3국을 경유해 북러시아에 침입하여 레닌그라드(지금의 생트페테스부르크)의 점령 혹은 파괴을 목표로 했다. 2개 군과 제 2, 제 3기갑집단으로 구성된 페드로 폰 보크원수의 중부집단군는 현재의 벨라루시을 통과하여 러시아의 중서부을 진군하여 모스크바에 직접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3개군과 제 1기갑집단, 루마니아 2개군으로 편성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원수의 남부집단군는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이며, 거대한 공업지대이고, 인구밀도도 높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하여 키에프을 공략한 후 남러시아의 초원을 넘어 동쪽의 볼가강까지 진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적으로는 유럽부분(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까지 진출할 계획으로 그 때문에 동절기장비도 준비하였다. 다만 수량이 부족했고, 또 작전중 병참의 혼란으로 전선부대까지 동절기장비가 거의 도착하지 못했다.
[편집] 소련의 준비
개전시점 소련은 주요 군사장비 보유량과 공업생산력에 있어서 독일을 상회했다. 소련의 공업생산은 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대공황에 시덜리던 1930년대에 급속히 발전해 미국의 뒤를 이어 2위일 정도였다. 중점은 중공업, 특히 군수산업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또한 소련의 전차는 독일의 전차에 비해 성능면에서 많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공기의 발전도 눈부셔 독일등 서구제 항공기와 성능도 거의 비슷해 졌다.
그러나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부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공산당과 군내부에 있던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해 적백내전등을 통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육군지휘부을 포함한 수백만명을 숙청했기 때문에 적군은 약체화되었고, 지휘관 부족 등의 문제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외 1940년 독일이 프랑스을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속도을 경시했다. 소련군은 전방의 군이 독일군을 국경근처의 요새선에서 저지하는 사이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킨 뒤 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국경선에 구축된 요새 스탈린선은 같은해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근처의 요새는 구축중에 있었고, 겨우 위치만을 표시하는 존재였다. 새로운 요새선의 구축 완료까지 소련측의 방비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국경부근에 병력을 배치하는 방침은 변경하지 않았다. 정예부대 대부분을 시베리아의 만주국 국경에 배치하고, 공업생산의 중심은 독일국경에 가까운 유럽 러시아, 특히 우크라이나에 집중하였다.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의 유효성을 믿었고, 독일의 공격의도을 간과했다. 조약체결까지 소련은 파시즘의 위협을 선전하면서 국내의 숙청의 구실로 삼았으나 조약체결후에는 모습을 바꿔 반 독일적인 논조을 억압했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경고가 여러차례 있었는데도 스탈린은 그 정보을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정부도 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 전선부대로부터 경고가 잇달아 빗발쳤는데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편집] 공격개시
1941년 6월 22일(기묘하게도 이날은 나폴레옹이 러시아을 침공한 날과 같은 날이기도 했다.)독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작전에는 독일군을 주축으로 한 추축군 총 300여 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동원되는 역사상 최대 육상작전이었다.
2개 기갑집단이 배치되어 최강전력을 지닌 중부집단군은 민스크, 스몰렌스크 등에서 소련군을 포위격파하고 모스크바를 목표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지원하기위해 중부집단군에서 제 2기갑집단을 빼내 남부로 진격하여 키에프을 수비하던 소련군 배후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 덕분에 개전 후 우마니 포위전등의 한정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강력한 소련군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남부집단군에게 키에프에서 소련군 주력을 포위 격파할 수 있는 기회을 주었다. 하지만 이로인해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늦어지게 되었다.(독일군이 뒤늦게 모스크바로 진출하고자 했을 때는 가을비에 의해 땅이 진흙탕화 되었고, 뒤이어 겨울의 한기로 인해 진군이 정지되었다.)
다만 OKH(육군총사령부)등이 생각한것은 모스크바 공격작전을 개시하던 상황에서 보급이 제때 뒤따르지못한 상황이었고, 거기에 소련의 대도시와 자원이 존재하던 남부에서의 진격이 생각보다 곤란하다는 사실때문에 남부로의 전환이 정당한 판단으로써는 나쁘지않다고 생각했다. 10월 중순 남부집단군은 키에프을 점령하고 65만명을 넘는 포로을 붙잡았다. 이들 대부분은 나치 강제수용서에서 죽었다. 키에프는 그 방어전투로 인해 후에 소련정부로부터 영웅도시의 칭호을 부여받았다.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대조국전쟁을 선언한 소련의 저항은 독일이 예상한것보다 더욱 격렬했다. 벨라루시, 브레스트 국경 요새의 전투는 그 중요한 예이기도 했다. 독일침공 당시 요새는 수시간이내에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련 수비대는 포위당한 요새에서 1개월간 전투를 계속했다. 동시에 주요 전선에서는 많은 소련 징집병의 자살행위와도 같은 돌격을 감행했다. 보급선이 늘어나면서 유격대들의 공격이 빈번해지자, 독일군의 보급 문제가 심화되었다. 적군은 독일군이 점령지의 곡물, 연료을 비롯한 건축물의 사용을 방해하기위해 파괴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토지에 대한 초토전술을 실시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의지가 있었던 우크라이나지방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에게 협력하려는 제안이 있었으나, 가혹한 점령정책으로 인해 결국 그들을 적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군이 보유하고 있던 KV-1중(重)전차와 T-34중(中)전차는 독일의 당시 전차보다도 우수했기 때문에, 전차전술에서 자타가 공인하던 독일군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대책으로 독일군은 급히 신형전차(티이거-I급의 전차)의 배치와 기존전차의 개량을 추진하게 되었다.
발트해지역과 레닌그라드 점령이 목표였던 북부집단군은 1941년 8월까지 레닌그라드 남부 주변까지 진군했으나, 맹렬한 적군의 저항에 저지당했다. 독일군은 기갑부대가 레닌그라드에서 시가전에 휘말리는것을 두려워해 제 4기갑집단을 모스크바공격을 위해 중부집단군으로 전속시켜 레닌그라드에는 포위와 봉쇄에 의한 보급단절을 결정했다. 그러나 1944년 전반 독일군이 철수할 때까지 레닌그라드는 점령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는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소련도시가 되었다.
키에프공략후, 제 2기갑군(기갑집단에서 개칭)은 중부집단군에 복귀해, 최후 최대의 목표였던 모스크바 공략을 위한 태풍 작전이 개시되었다.
[편집] 더 읽기
Beevor, Anthony, 안종석(옮김),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서해문집, 2004, ISBN : 978897483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