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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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독일어: 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1945년 4월 9일)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반 나치운동가이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유년시절과 신학교육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정신과의사인 아버지 칼 본회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궁정목사로 사목했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는 신앙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본 회퍼는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베를린대학교 졸업시《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성도의 교제는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논문이었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자 반 나치운동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신학자였던 것이다. 본 회퍼는 진보 신학의 명문으로 불리는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도 공부했는데, 이때 그는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들의 삶속에서 민중들과 어울린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편집] 반 나치운동
1933년 집권한 나치에 대해서 독일교회는 저항은 커녕, 오히려 히틀러를 구세주로 우상숭배하고 있었다. 이를 본 본 회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을 우상숭배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고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 방송은 중단당하고 말았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교회가 히틀러를 구세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본 회퍼처럼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고백교회를 결성하여 그들의 양심을 실천했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으로 고백교회 참여자들은 박해받았는데, 본 회퍼의 경우 1943년 4월 체포되어 2년간 수용소들을 전전해야 했다. 이때 그가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옥중서간》으로 출판되었고, 한국어판은 홍성사에서 번역했다. 이후 본 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하였다는 증거가 확보되면서, 1945년 4월 9일 새벽,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편집] 신학
디트리히 본 회퍼 신학의 첫번째 특징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이다. 디트리히 본 회퍼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었을때, 그는 미국으로 망명할수도 있었다. 개신교 신학자이자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일하던 라인홀드 니버가 신학교수 자리를 마련한 뒤,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회퍼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때 독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본 회퍼는 독일교회에 대해서 값싼 은총을 나누고 있다고 비평했는데 그가 말하는 값싼 은총은 "죄에 대한 고백이 없는 성찬례,죄에 대한 회개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설교,예식을 무시한 세례,회개가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1]교회의 성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너무 값싸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편집] 출처
- 서울신학대학교 이신건 교수의 홈페이지
- 박만교수의 현대신학이야기/박만 지음/살림
[편집] 바깥고리
[편집] 주석
- ↑ 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YER=2005&CTS_MON=9&CTS_ID=36756&CTS_CTG_COD=5 두란노 빛과 소금 2005년 9월호-열혈제자 본회퍼가 제시하는 제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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