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차량제작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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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始發) 자동차는 1955년 8월부터 1963년 5월까지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에서 제작한 자동차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최초의 지프형 자동차이다. 대한민국 최초로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한자어 "시발"(始發)을 사용했으며, 상표는 한글시-바ㄹ로 표기했다.

시발 자동차는 국제차량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 최혜성 그리고 최순성 3형제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국산장려회가 주최한 산업박람회 때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시발 자동차는 주로 택시운송회사들이 관심을 가져, 판매 초기에는 30만환이라는 높은 판매가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자동차 증가로 석유파동을 우려한 당시 이승만 정부는 1957년 5월 8일 자동차의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인 5·8 라인을 발동하면서, 국제차량제작사는 시발 자동차 판매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일명 황색딱지라는 자동차 제작 허가서에 따라 시발 자동차를 제작하던 국제차량제작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정부 보조금 중단과 새나라자동차가 1962년 닛산 블루버드를 반제품으로 수입해 새나라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면서, 판매 급감으로 1963년 5월에 누적대수 2,235대를 생산한 후 시발 자동차를 단종한다.

[편집] 시발 자동차의 국산화 논란

시발 자동차의 엔진은 당시 자동차 정비 및 재생 업체였던 국제차량공업에 1953년 입사한 김영삼주도로 국산화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주로 미군의 지프를 개조하는 작업을 하다, 1955년 3월 실린더 헤드를 국산화 하는데 성공 하였고 변속기와 차축 등은 미군 지프의 부품을 재생해 사용한 시-발 자동차를 생산 하였다. 이후 김영삼은 실린더 블럭의 국산화에도 기여 하였다(1956년도까지 국제차량 근무). 국제차량공업은 이후 점진적으로 메탈 베어링, 밸브가이드, 클러치 디스크, 클러치 압력판, 배터리, 브레이크 라이닝등을 직접 제작하는 국산화 계획을 추진 하였는데 1958년 정부 제출용 자료에 따르면 1958년까지 차체 및 엔진을 포함한 시발 자동차의 국산화율은 약 56% 정도라고 되어 있으며 1960년까지 자체생산 84%에 국산부품 16%를 사용하여 100% 국산화를 달성할 계획이라 밝히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보면 1955년에 제작된 자동차는 엔진의 일부 부품 정도만 국산화된 엔진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시발 자동차의 엔진이 군용 지프에 사용되었던 고-데빌(Go-Devil)엔진을 복제하는 것으로 국산화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당시부터 시발 자동차의 엔진이 미군 지프의 엔진을 재생해 사용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이에 창업주인 최무성과 당시 공장장이었던 오원철은 1992년 월간 자동차생활과의 인터뷰에서 크게 카뷰레터(carburetor), 미션기어, 차동기어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을 점진적으로 국산화했다고 밝혔다. 당시 시발 자동차가 과연 최초의 대한민국 자동차인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리기 어렵지만, 수많은 대한민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다른 나라의 자동차들을 비교적 쉽게 조립 생산하여 판매 하면서 성장해 온 것에 비할 때,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자동차와 엔진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편집] 제원

  • 엔진 : 직렬 4기통 2,195cc 엔진
  • 변속기: 전진 3단, 후진 1단
  • 최고속도 : 시속 80킬로미터
  • 차중 : 1,500킬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