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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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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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4년 9월 21일 일본 야마구치 현 나가토 시 |
거주지 | 일본 도쿄 |
국적 | 일본 |
학력 |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
직업 | 정치인 |
배우자 | 아베 아키에 |
부모 | 아베 신타로(부), 아베 요코(모) |
웹사이트 | www.s-abe.or.jp |
아베 신조(일본어: 安倍晋三, 1954년 9월 21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자 제9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제21대 자유민주당 총재이다.
조부는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아베 간이고, 외조부는 제56·57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 종조부는 제61·62·63대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 아버지는 외무대신을 지낸 아베 신타로, 남동생은 참의원 의원인 기시 노부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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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경력
1954년 9월 21일,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였던 아베 신타로와 그 아내 요코의 차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기시 노부스케가 입학하도록 주장한[1] 세이케이 계열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를 비롯해 아베 간과 기시 노부스케에 사토 에이사쿠, 가정교사였던 히라사와 가쓰에이, 친척들까지 도쿄 대학 출신이 많았지만 아베 신조는 무난하게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세이케이 대학으로 진학했다.
[편집] 정계 입문
졸업 이후 일시간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배우고, 1979년 4월에 귀국하여 고베 제강에 입사했다. 3년뒤인 1982년에는 아버지이자 외무대신이던 아베 신타로의 비서관으로 취임하고, 각국의 수뇌와의 회담에 동석하는 등 후계자 수업을 진행해갔다. 1987년에는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주선으로 모리나가 제과 사장 마쓰자키 아키오의 딸이던 아키에와 결혼했다.
1991년에 수상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급사하면서,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사망한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야마구치 1구(당시)에서 출마해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편집] 중의원 의원
소속 파벌의 영수였던 모리 요시로가 수상으로 조각한 2000년의 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에서, 나중에 총리가 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2] 내각관방 부장관에 취임한다. 모리 내각의 뒤를 이어 출범한 2001년의 제1차 고이즈미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2002년의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을 수행하고,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안이한 타협은 안된다’며 강경론을 주창했다. 이후 납치 피해자 5명은 귀국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납치문제의 타협에 난항을 거듭했다. 이후 아베는 나카야마 교코와 함께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무력행사를 포함한 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대화 등의 신중론을 취한 의원들이 많던 가운데, 언론은 아베를 두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미화하면서 이후 인기가 상승했다.
2003년 9월에는 고이즈미 총리에 의해 자민당의 간사장으로 발탁되었다. 3선의 국무대신 경력도 없는 젊은 의원이 간사장에 취임하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지만, 11월의 총선거를 앞두고 아베의 ‘인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후 자민당은 총선거에서 절대 안정 다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간사장으로는 자민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지급되던 떡값이나 얼음값(파벌의 영수가 소속원에게 지급하는 활동자금)을 폐지하고, 자민당 후보자의 공모제를 일부 도입하는 등 당내의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2004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목표치였던 51석의 확보에 실패하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한다’고 사임을 시사했고, 결과는 49석을 확보하면서 곧 사직했다. 같은해 9월부터는 후임 간사장이었던 다케베 쓰토무의 강한 요청으로 간사장대리에 취임했는데, 간사장 역임자가 간사장대리라는 낮은 직위로 가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간사장대리로 맞이한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여러 선거구에서 상대방의 낙선을 노린 고이즈미의 자객을 공천했다.
고이즈미 정권 말부터 ‘포스트 고이즈미’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일컬어졌고, 2005년 10월 31일에 발족한 제3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에서는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한다.
2006년 9월 1일에는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할 것을 발표하고, 일본국 헌법의 개정과 교육 개혁, 재정 건전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후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가 끝나고, 2006년 9월 20일 실시된 총재 선거 투표에서 전체 703표(국회의원 403, 당원 300표) 가운데 464표를 얻어 경쟁 후보인 아소 다로 외상과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을 큰 표차로 물리치고 일본 자유민주당 (자민당)의 21대 총재로 선출되어, 9월 26일 국회 중.참 양원 본회의에서 제90대 총리로 지명되었다. 아베는 첫 전후 세대 총리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총리 중에서 가장 젊다.
[편집] 내각총리대신
- 아베 신조 내각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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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중단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에 방문할 것을 밢하고, 10월 8일에는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주석을, 9일에는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을 가져 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그날 북조선이 핵실험을 실시하자 아베 총리는 “(핵실험은) 일본의 안전보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평하고, 국제연합의 제제결의보다 엄격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이후 12월에는 교육기본법의 개정과 방위청의 성 승격을 강행했다. 같은 달 혼마 세제회장이 공무원 기숙사의 애인 문제로 사임하고,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대신이 사무소 운영비 계상 문제로 사임했다.
2007년에 열린 제166회 통상국회에서는 많은 주요 법안들을 강행 표결하여 잇달아 통과시켰다.

5월 초순에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고이즈미 내각 이후 일미관계가 지속적으로 굳건한 것을 어필했다. 같은 달, 이전부터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된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이 자살하고, 연금 기록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런 와중에 6월초의 지지율이 고이즈미 정권 이래 최저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규마 후미오 방위상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두고 ‘어쩔 수 없다’고 발언하는 일까지 일어나자, 처음에는 문제가 없다는 자세를 취한 아베 총리는 이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규마 방위상에 대해 주의를 부탁했다. 다음날에는 규마 방위상이 사임했다.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는 자살한 마쓰오카의 후임 아카기 노리히코 농림수산상의 사무소 비용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어 니가타 현 주에쓰 오키 지진이 발생하면서 유세를 중단하고 현지로 향했다. 선거에서는 연금 문제의 해결과, ‘개혁할 수 없는 야당보다, 책임정당 자민당이 개혁의 실행력을 가지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결과는 연립 정권의 공명당과 합쳐도 과반수가 되지 않는 역사적인 대패를 맞이했다.
7월 30일 오전, 아베 신조 총리는 “유감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지지해 준 사람에게는 미안하다. 국민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면서 앞으로도 책임을 수행해 가겠다”고 정권을 계속할 방침을 발표했다. 이어 나카가와 히데나오 자민당 간사장은 “총재·총리의 결의를 일원이 되어 지지하고 진행하자”고 발표해,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방침을 결정했다.[3]
그러나 새로 조직한 아베 신조 내각 개조내각이 출범하자마자 각료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구심력을 잃자, 아베 총리는 9월 9일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개최된 APEC 수뇌회의의 종료에 즈음해 열린 기자회견에서 ‘9월 10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을 연장할 수 없을 때에는 내각총사직’을 한다고 공언했다.
[편집] 갑작스런 사의 표명
그러나 2007년 9월 12일 오후 2시, “내각총리대신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내각총사직을 표명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로 인해 같은 날로 예정되었던 대표 질문이 불가능해졌다.
아베 총리는 사직의 이유로 “테러특별조치법의 재연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민주당의 오자와 대표와의 회담을 타진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고, 이대로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보다는 새 총리가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내가 총리인 것이 장해가 되고 있다”고 발언했다. (다만 언급된 오자와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타진을 받은 것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부정.) 자신의 병이 악화되어 몸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요사노 가오루 내각관방장관이 회견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국회가 개막해 내정과 외교에 중요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소신을 표명한 이틀 만에 물러난다는 뜻을 발표한 것은 무책임하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한편 아소 다로 간사장은 같은 날의 회견에서 기자의 “총리는 언제 사임을 결심한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이틀 정도 전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제라고 하기도 그렇고…”라고 발언해 이틀 전쯤에는 이미 아베 총리가 조만간 사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밝혔다.
사의를 표한 다음 날인 9월 13일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검사 결과 위장 기능 이상의 소견이 보이며 상당히 쇠약해진 상태라고 의사단이 발표했다. 이를 두고 BBC에서는 “어제 관저에서 체크아웃한 아베 총리는 오늘 병원에서 체크인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편집] 가족 관계
1987년 모리나가(일본어: 森永)제과 사장의 큰딸 아키에(일본어: 昭恵)와 결혼하였다. 부인 아키에는 열렬한 한류팬으로 알려졌다. 아베 부부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는데, 아키에 여사는 2006년 11월 문예춘추에 기고한 수기에서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1]
[편집] 참고 문헌
- ↑ 《아베 신조가 경애하는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미야자키 마나부 저.
- ↑ ‘인간・아베신조의 실상’(2), 라이브도어 뉴스, 2006년 9월 19일자.
- ↑ 자민·공명, 연립 유지에 내각 개조, 8월 말에서 9월에, 아사히 신문, 2007년 7월 30일.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전 임 고이즈미 준이치로 |
제90대 일본 총리 2006년 9월 26일 - 2007년 9월 12일 |
후 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