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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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프랑스의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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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출생과 학창시절
장 칼뱅은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뱅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여기서 토론방법을 배웠다.
[편집] 종교개혁 운동 참여
152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칼뱅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주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뱅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주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칼뱅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뱅과 같이 일하게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뱅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 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 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 하였다.
이 무렵 칼뱅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랑세스 1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도들을 일컫는 위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33년 칼뱅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문제는 그 연설문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념을 일부 추가했다는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자의 설교로 제소 하였으며, 국회는 이에 동의 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18일 밤에 열광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로마 가톨릭을 비난하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 하였다.
칼뱅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라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뱅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뱅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 칼뱅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 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이후 제네바로 옮긴 칼뱅은 한 차례 쫓겨나는 일을 겪으면서도, 제네바에서의 목회를 성실히 하였다. 그는 1536년으로 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다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제네바에 다시 부임해서 처음 14년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에 죽을때까지 최후적으로 9년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월급의 증액을 거부 하였으며, 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활동, 설교, 강의, 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 손님접대, 각종 자문, 탄압받는 개신교 신도들에 대한 위로(칼뱅의 대표적인 저서인 《기독교 강요》는 박해받는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을 칼뱅이 위로하기 위하여 저술한 책이다.==등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일을 했다. 그래서,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걸을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것을 부탁 하였다. 1564년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 4월 2일 에는 교회로 옮겨가서 베자로부터 마지막 성만찬을 받았다.
[편집] 죽음
그는 1564년 4월 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19일에는 개신교 목사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 칼뱅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준 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뱅의 임종을 보러 왔다. 칼뱅은 마지막 몇일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27일 동녁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간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소박하게 만들어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였다.
[편집] 칼뱅과 세르베투스
칼뱅의 생애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다.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고 칼뱅 역시 알고 있었다. 세르베투스는 1534년에 칼뱅과 파리에서 만나 토론하자고 제의했고 칼뱅은 수락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1] 그 당시 이교도들에 대해서 무자비했던 로마교회가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2]
1546년에 세르베투스가 칼뱅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약 2년간 계속된 서신 교환이 시작된다. 첫 편지에서는 세르베투스는 "Michel de Villeneuve"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논쟁은 뜨거워졌고 세르베투스는 갖은 모독을 하였다. 심지어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 준다면 칼뱅이 있는 제네바에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뱅은 거절했다. 한 편지에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칼뱅이 편지를 그만 쓰겠다고 전함으로써 서신 교환은 끝나게 된다.[3]
이 당시 칼뱅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기독교 강요)를 발표하였다 (라틴어 초판은 1536년, 프랑스어 초판은 1541년에 나왔다). 세르베투스는 이에 대한 반론격인 《Restitutio Christianismi》를 1553년에 출간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을 반대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는 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을 중심으로 훗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뱅에게 보냈다. 그는 책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라고만 적었다 (Michael Servetus, Villanovanus의 약자). 그러나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것임을 알았다.
그 당시에 제네바에는 Guillaume de Trie라는 프랑스인 개신교도가 망명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리용에 사는 Arneys라는 사촌이 있었다. Arneys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그는 Trie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개혁교회는 불의한 집단이며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Arneys의 편지에 대해 Trie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뜻을 전했다: "이곳보다는 그곳에 더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된다.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살라지는 마당에, 너의 있는 곳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이라고 하며 신앙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답했다. 그 당시 리용의 감옥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았다.
Villanovanus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세르베투스와 그의 책을 인쇄한 업자가 로마교회 종교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그들은 《Restitutio Christianismi》의 출판을 부인했다. Arneys는 Trie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했다. 세르베투스의 이설을 증명하기에는 칼뱅 보다 더 적합한 증인은 없었다; 그에겐 세르베투스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Trie는 칼뱅을 설득하여 세르베투스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Trie는 그것을 Arneys에게 보내며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편지들을 칼뱅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세르베투스는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장에서 끝까지 자신이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울면서 자신은 가톨릭 교인으로 살고 죽기를 원한다고 외쳤다. 그러던 가운데 감시의 틈을 타 그는 탈출하게 된다. 결국 그의 공석 상태에서 그의 초상만 놓은 채 재판이 진행되었고, "산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 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 날 그의 책들은 불살라졌다.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 찍힌 세르베투스는 몇 개월 후 제네바에서 발견되었고 거기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원래 숨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비엔나 또는 툴루즈(Toulouse)에서 칼뱅이 있던 제네바를 통해 가는 것은 크게 우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인데, 로마교회에 적발될 위험 외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세르베투스와의 서신 교환 시기에 그가 제네바에 오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전한 칼뱅이 바로 제네바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1946년에 칼뱅이 그의 동료 파렐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렇게 까지 단호한 말을 적고 있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 하여도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게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게 하는데 동조하지 않겠습니다."[2] 그런데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나타난 것은 아마도 그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자유당(Libertine)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당은 정치에 신학을 적용하려는 칼뱅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세르베투스의 글들을 이용해 칼뱅을 반대하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위해 다시 재판을 열었고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칼뱅에겐 증인의 자격은 있었지만 재판의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칼뱅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다. 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고 그래서 투표권도 없었으며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엔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뱅은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다.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 뿐이었고,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는 없었다.[4]
세르베투스는 재판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제네바에서의 재판은 비엔나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종교재판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제네바에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영향을 제거하려는 자유당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는 세르베투스에게 승산이 있었다. 재판 관련 기록들을 보면 세르베투스의 어조에서 강한 자신감을 볼 수 있다. 그의 종교적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뱅에게 던진 그의 공격들 중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장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4] 세르베투스의 이런 말을 갖고 그를 쉽게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런 강한 말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뱅은 특유의 차분함을 보였는데, 때론 반박할 차례가 와도 세르베투스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면서 세르베투스의 이설을 지적해 나갔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정통교리인 삼위일체를 계속 부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말을 보면 자신이 밟고 있는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도 신학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두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최종 단계에서 삼 일에 걸친 논의 끝에 "가장 고통스런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칼뱅은 의회 쪽에 감형을 요청하면서,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참수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5] 그러나 시의원들은 거절하였다.[6][1] 결국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7][4] 세르베투스의 형집행은 1553년 10월 27일에 이루어졌다. 그 전날 칼뱅이 파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편집] 평가
장 칼뱅은 종교개혁자로서 활약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 관철되는 방식으로 교회의 일치를 추구했다. 더욱이 자신도 가톨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면서, 재세례 파등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종교전쟁을 벌일 정도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교황"으로 불리워질만큼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제네바에서 정치적인 영향력 까지 발휘하였다. 세르베투스 재판 이후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제네바에서 관철시킬 수 있었다.[8]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를 통해 그의 신학은 교리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영국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편집] 참조문헌
- ↑ 1.0 1.1 Hugh Young Reyburn, John Calvin: His Life, Letters, and Work. Hodder and Stoughton, London, New York, 1914. pp. 168, 173, 175.
- ↑ 2.0 2.1 Hans J. Hillerbrand, editor, The Reformation, A Narrative History Related by Contemporary Observers and Participants. Baker Book House, Ann Arbor, MI, 1985. pp. 274, 203.
- ↑ Downton, An Examination of the Nature of Authority, Chapter 3.
- ↑ 4.0 4.1 4.2 Emanuel Stickelberger, Calvin - An Authentic Account of the Life & Ministry of John Calvin
- ↑ Bonnet, Jules (1820-1892) Letters of John Calvin, Carlisle, Penn: Banner of Truth Trust, 1980, pp. 158-159. ISBN 0-85151-323-9.
- ↑ Owen, Robert Dale, The debatable Land Between this World and the Next, New York, G.W. Carleton & Co.; [etc.] 1872, p. 69, notes.
- ↑ Alister E. MacGrath, A Life of John Calvin. Blackwell Publishing, Oxford, U.K, 2003. p. 116, 198. ISBN 0-631-18947-5
8.^ Williston Walker, [기독교회사]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Fourth Edition, 송인설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p537-538 "칼빈의 지위의 향상은 곧 명백해졌다...1555년 1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를 시킬 수 있는 교회 법원의 권리를 영구적으로 승인받았다...그 이후 칼빈파는 제네바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었다...칼빈의 영향력은 제네바를 넘어 멀리까지 미쳤다. 기독교 강요, 제네바교회의 정치 유형, 아카데미, 주석, 끊임없는 서신왕래 등을 통해 그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일글랜드 청교도들의 사고를 형성하고 이상을 고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