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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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제프리 조던(Michael Jeffrey Jordan, 1963년 2월 17일 ~ )은 미국농구 선수이다.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1984년부터 NBA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2003년 은퇴하였다.

목차

[편집] 어린 시절

어린 시절 중고교 농구팀에서 뛰던 자신의 손 윗 형 래리 조던의 반만큼만 농구를 잘하고 싶어했다던 마이클 조던. 그래서 그의 등번호를 래리 조던의 등번호 45번의 절반인 23번으로 한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작고 마른 키로 고교 농구팀 선발자리에서도 탈락한 그였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졸업할 당시 지역 최고의 고교 농구 선수가 될 수 있었다.

[편집] 대학 시절

노스캐롤라이나 타르 힐스에 입학한 조던은 1학년 때 NCAA 결승전에서 조지타운 호야스와 맞붙는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조던 외에 제임스 워디(전 LA 레이커스), 샘 퍼킨스(전 시애틀 수퍼소닉스) 등이 뛰고 있었고, 상대팀 조지타운에는 그 유명한 패트릭 유잉(전 뉴욕 닉스)가 버티고 있었다. 승부를 가른 것은 조던의 첫 번째 '더 샷'. 조던인 이후 2, 3학년때 연속으로 전미 최고 대학 선수 선발로 뽑혔고, NBA로 진출하게 된다.

[편집] NBA 데뷔, 80년대

83년 1라운드 3번째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된다. 당시 드래프트는 1순위가 하킴 올라주원, 3순위 마이클 조던, 5순위 찰스 바클리, 12순위 존 스탁턴 등 역사에 남을 최고 선수들이 뽑힌 사상 최고의 드래프트였다. 데뷔 첫 해 NBA 코트를 강타한 마이클 조던은 프로 데뷔 경기인 워싱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와의 경기에서 저조한 야투율로 16득점에 그치지만, 이후 완벽하게 적응하여 시즌 평균 28.7점이라는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이며 신인왕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해 발목 부상으로 22경기 출전에 그치는등 약간의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해 PO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잠시 잊혀져 가던 그의 존재를 팬들 사이에 확실히 각인 시키게 되는 활약을 하게 되는데, 당 시즌 PO에서 당대 최강인 보스턴 셀틱스와 맡붙은 시카고 불스는 객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대활약으로 선전 하게 된다. 이 시리즈에서 보스턴의 전설 래리 버드는 자신의 팀을 상대로 63득점을 올리는등 신들린 듯한 활약을 펼친 조던에 대해 "신이 조던의 모습으로 변장 하였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뒤 87년부터 득점왕을 차지하기 시작한 조던은 80년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득점포를 선보이지만 그를 받춰줄만한 유능한 동료 선수의 부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편집] 90년대...한 번의 은퇴와 두 번의 3피트

팀을 조던 위주로 개편한 시카고 불스. 조던과 절친했고, 코트 위에서 조던의 보디가드였던 찰스 오클리를 내보내고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를 받아들인 불스는 전략 코치 텍스 윈터의 트라이앵글 오펜스가 완성되며 90년대 무적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91년 NBA 결승전에서 80년대를 주름잡던 LA 레이커스를 꺾고 팀 역사상 최초로 왕좌에 오른 불스는 92년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포틀랜트 트레일블레이저스, 93년 찰스 바클리, 케빈 존슨의 피닉스 선스를 꺾고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3연패의 기쁨도 잠시. 조던의 아버지가 10대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조던은 곧 농구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잠시 야구 외도에 나섰던 조던은 그러나 95년 여름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동부지구에서 불스의 위력은 많이 약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조던을 중심으로 다시 팀은 재편되고, 악동 데니스 로드맨을 영입한 불스는 여전히 위력적인 조던을 앞세워 96년 션 캠프와 게리 페이튼의 시애틀 수퍼소닉스, 97년과 98년에는 칼 말론, 존 스탁턴 콤비의 유타 재즈를 꺾고 두 번째 3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그중 시카고 불스는 95-96 시즌 87.8% 엄청난 승률을 기록하며 리그 역대 최고 기록인 72승을 달성하게 되는데 82경기 하에 치뤄진 리그 개편 이래 현재까지도 70승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해 팀은 리그의 상이란 상을 모조리 휩쓰는 괴력을 발휘하는데 시즌 MVP, 올스타전 MVP, 파이널 MVP 등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평균 30.4득점으로 득점왕에 오른 조던을 필두로 All-Defensive Team 에 조던,피펜,로드맨 3인방이 선정되며 리그 최강의 수비팀임을 입증 하였다. 또한 평균 14.9개로 리바운드 왕에 오른 로드맨과 식스맨상을 수상한 토니 쿠코치,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필 잭슨 헤드코치 등 그해를 완벽하게 시카고의 해로 만들게 된다. 또한 95-96 시즌부터 97-98 시즌 3연패 기간동안 72승,69승,62승등 3시즌 동안 도합 203승을 달성하는 괴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편집] 두 번째 은퇴, 복귀, 워싱턴에서의 선수 생활

두 번째 3연패 후 다시 은퇴를 선언한 조던은 그러나 2000년 또 다시 복귀를 선언하며 자신이 구단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워싱턴 위저즈에 선수로 들어가게 된다. 2000년대 조던은 득점력을 줄이고 어린 선수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했지만 팀은 생각만큼 정비되지 못하고, 조던은 2003년 마지막 은퇴를 발표하게 된다. 복귀한 2시즌 동안 비록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40살의 나이에도 젊고 빠른 선수들을 상대로 평균 20득점을 퍼붓고 한경기 40득점을 기록하는등 믿기힘든 경기력을 보여주어 역시 '농구의 황제' 임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편집] 조던 분석

공격: 조던은 NBA 60년 사상 최고의 공격수 두 명 중 하나이다. 다른 한 명은 윌트 채임벌린. 조던의 강점은 그가 활약하던 시기에 매치업 상대보다 큰 싸이즈를 갖췄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는 스피드를 갖추는 등 탁월한 신체 능력에 있다. 80년대 데뷔한 2번(슈팅가드)치고는 엄청난 198cm에 어마어마한 탄력을 바탕으로 항상 상대 수비수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이 내린 가장 완벽한 몸매와 공중에서의 완벽한 신체 밸런스 유지 능력 또한 그의 공격력을 배가시킨 요인이다. 둘 째로 조던은 역사상 가장 다양한 공격 루트를 뽐내는 선수였다. 기본적으로 내외곽에서 안정적인 점프슛을 날릴 수 있으며, 드리블 & 풀업 점프 슛, 드라이브 인 덩크 또는 더블 클러치, 환상의 뱅크 슛, 베이스라인 돌파와 페이드 어웨이, 턴어라운드 페이드 어웨이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공격 루트인데 조던은 이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던의 공격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스탭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폭발적인 퍼스트 스탭은 수비수들을 슬로우 비디오로 멈춘 듯한 모습을 띄게 한다. 한편 조던은 왼쪽으로 돌파하는것을 즐겼는데, 97년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스카우팅 리포트에 따르면 "왼쪽, 오른쪽 상관없이 수비를 제칠 수 있겠지만 왼쪽으로 돌파하는것을 상대적으로 선호하기 때문에 그를 불쾌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돌파하도록 강요하는것이 필요하다" 라고 한다.

수비: 조던이 인정받는 것은 공격력과 함께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은사인 딘 스미스가 항상 수비를 강조해 조던은 대학 시절 수비 기본기를 탄탄히 갖추게 됐고, 이것이 프로 시절에도 큰 자산이 됐던 것이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낮추고, 상대 눈과 손을 주시하는 그의 수비는 상대 공격수를 질식시킬 수준이다. 80년대 그와 함께 최고의 공격수였던 도미닠 윌킨스가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됐던 것은 형편없는 수비 실력 때문이었다.

그외: 조던이 강한 것은 육체적 강인함과 함께 정신적 강인함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사소한 내기에도 기필코 이기려고 하는 그의 승부욕은 프로에 와서 이겨야 하는 경기는 꼭 이기고야 마는 결과물로 나타나게 됐다. 여기에 코트 밖에서야 어떻든 코트 위에서는 동료들의 사기를 돋우는 그의 능력으로 시카고 불스는 장기간 최고의 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동시기에 플레이한 '먹시' 보그스는 "내 생각에 조던은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다. 조던만큼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라고 할 만큼 승부욕과 정신적인 강인함은 조던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