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6세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알렉산데르 6세
세속명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지아
임기 시작 1492년 8월 11일
임기 종료 1503년 8월 18일
전임 인노첸시오 8세
후임 비오 3세
탄생 1431년
사망 1503년 8월 18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는 제214대 로마 교황(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이다. 세속명은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지아(스페인어: Roderic Llançol-Borja i Borja)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세속화 한 교황의 대표적 존재이며, 호색과 탐욕 문제로 많은 비난을 샀다. 또,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지아를 오른팔로 삼아 일족의 번영과 교황청의 군사적 자립에 정력을 기울여, 이탈리아 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반적으로는 ‘사상 최악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기 쉽상이지만, 일부에서는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군주’라는 의견도 있다.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1431년 스페인 발렌시아의 하티바에서 출생하였다. 교황 갈리스토 3세의 조카로서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456년 2월 22일에 추기경이 되고 1458년 6월 30일 발렌시아의 주교가 되었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 교황 갈리스토 3세, 교황 비오 2세, 교황 바오로 2세, 교황 식스토 4세, 교황 인노첸시오 8세 치하에서 교황청 상서국 차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주교 관구들과 다른 성직록을 차지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때 당시는 물론이고 장차 그의 야심을 이루는데 매우 유용한 로마의 유력자들과 골고루 인맥을 쌓을 수가 있었다.

로드리고는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여 여러 명의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6명과 딸 3명을 두었다. 그의 자녀들 중 페드로 루이스와 이사벨라, 지롤라마, 조반니 그리고 로드리고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원 덕분에 높은 직택에 앉거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가장 유명한 자녀는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 등 4남매로, 모두 다 반노차 카타네이의 소생이었다. 1458년에는 단정치 못한 품행 문제로 교황 비오 2세로부터 질책을 받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면서, 다음 교황으로는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그리고 줄리아노 델라로베레 추기경 등 3명의 유력 후보가 내세워졌다. 초반에는 이탈리아인의 지지를 얻은 델라로베레가 유리하다고 보여졌지만, 로드리고는 아스카니오를 포함한 많은 추기경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1492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알렉산데르 6세로 명명하였다.

그가 교황에 당선된 콘클라베 전날 밤의 상황은 대략 이러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델라로베레 추기경도 차기 교황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는데, 델라로베레의 지지자였던 프랑스의 샤를 8세는 많은 추기경들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뿌렸다. 그 밖에도 밀라노 공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유력한 후보였다. 이탈리아 태생의 이 두 사람은 외국인을 교황으로 삼지 않으려는 많은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의 결의 때문에 초반에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반면에 보르지아는 스페인 태생이기 때문에 가장 불리하였다. 그렇지만 보르지아는 엄청난 부자였던 데다가, 이제까지 쌓아온 숱한 정치 경험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샤를 8세보다 더 많은 뇌물을 주었고, 그 덕분에 선거 네 번째 날에는 단 한 표만 더 있으면 교황직을 차지할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96살의 베네치아의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노인의 흐릿한 판단력을 적시에 공략하여 그의 표도 얻는데 성공하였다. 요컨대 그는 교황직을 돈으로 매수한 셈이다.

이 콘클라베에서의 뇌물 증여는 곧 세상에 널리 알려져 그가 삼층관을 돈으로 샀다고 세간의 비난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편집] 재위 기간

1492년 8월 26일, 알렉산데르 6세는 비록 무더위와 피곤으로 두 번이나 쓰러지긴 했지만 이례적으로 장려한 대관 미사를 치렀다.

보르지아를 숙지해, 그 위험성을 경고하던 몇몇 추기경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보르지아가 교황좌에 오르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 예측하지 못했다. 실제로, 알렉산데르 6세의 치세의 초반에는 교회법의 엄밀한 준수와 원활한 교회의 통치가 철저히 시행되어 그 이전의 교황들의 실적이 많았던 치세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곤궁한 재정을 위해 지출을 줄여 채워 솔선수범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추기경들로부터는 악평을 들었지만, 수년간 교황청의 재정은 호전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족벌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애인 반노차가 낳은 아들 체사레 보르지아를 불과 16살의 나이에 피사 대학교의 학생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사촌 조반니에게는 추기경직을 주었다. 외국인 출신으로 이탈리아에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보르지아 가문 사람만으로 5명의 추기경이 임명되어 많은 지인과 친구도 등용할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즉위한 후 처음 두 해 동안에는 외교적 난제가 속출했다. 밀라노베네치아를 비롯해 교황령 곳곳이 소요로 들끓었고, 나폴리 왕국의 스페인계 페르디난도 1세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샤를 8세에게 알렉산데르 6세가 접근한 일이 페르디난도 1세의 기분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팽창 속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빨라졌다. 국내 정국도 만만치 않았다. 교황 선거에서 패한 두 추기경, 델레로베레와 스포르차가 알렉산데르 6세의 퇴위를 주장하는 등 그의 자리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적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기 위해 알렉산데르 6세는 소매를 걷어부쳤다.

우선 그는 성 마르코 동맹을 결성하여 밀라노베네치아 공화국에서 교황 통제권을 강화하게 하였다. 또 나폴리 왕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 중 한 명은 아라곤 왕가의 딸과, 또 한 명은 나폴리 왕가의 딸과 혼인시켰다. 오스만 제국 문제에 관해서는, 오스만 대사를 극진히 대우하고 술탄과 일종의 암묵적인 동맹을 맺음으로써 긴장을 완화시켰다. 또 뇌물을 써서 델라로베레와도 화해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교황의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만한 여건을 마련했다. 그는 신대륙 발견에도 개입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다가 교황에게 중재를 청했다. 그러자 알렉산데르 6세는 지도 위에 세로로 선을 그어 신대륙을 양분했고, 얼마 후에는 그 선을 서쪽으로 더 옮겨 스페인에게 더 많은 땅이 돌아가게 했다. 이렇게 두 나라를 중재한 일을 계기로 교황은 아메리카 대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선교사들을 그곳에 파견해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게 했다.

1494년 1월,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가 죽자 잠잠하던 국제 정세가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두고 또다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를 왕위에 옹립하였다. 그러자 델레로베레를 비롯하여 친프랑스파가 샤를 8세야말로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알렉산데르 6세에게 맞섰다. 이러한 지지에 고무된 샤를 8세는 교황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당장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직에서 퇴위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정치적으로 고립된 알렉산데르 6세는 1494년, 샤를 8세가 실제로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 등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를 압박하였다. 샤를 8세는 그 의도를 알아채고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퇴각했다.

외세의 위험이 가시자 이번에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도미니코회 탁발 수사이자 열정적인 교회 개혁가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타락한 성직자들을 향해 열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사보나롤라는 연단에 서서 교회가 타락했다고 비난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또 피렌체의 통치자인 메디치 가문의 몰락도 예언하며, 시민들의 복지는 뒷전이고 정부 금고만 채우기에 혈안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그의 설교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어 곧 피렌체 전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또 1494년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사보나롤라는 프랑스군을 부패한 로마를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온 ‘하느님의 검’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얼마 후 샤를 8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알렉산데르 6세가 반(反)프랑스 동맹 결성에 피렌체의 참여를 촉구했을 때 사보나롤라가 이를 반대했으며, 이후 교황과의 다툼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먼저 알렉산데르 6세가 1495년 7월, 사보나롤라에게 서한을 보내 로마로 와서 직접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그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사보나롤라는 건강상의 이유와 피렌체 내의 시급한 문제를 핑계로 하여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교황은 오만불손하다며 태도를 바꿔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사보나롤라의 주장을 대놓고 비난하며 설교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에 사보나롤라는 답신을 보내 교황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두어 주 후에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교황의 성직 매매와 사생활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등 교황청에 대한 공격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교황은 격노했지만 피렌체를 반프랑스 동맹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자제하며 사보나롤라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교황은 사보나롤라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을 도미니코회 산하의 다른 단체와 통합함으로써 그의 권한을 없애려 했다. 1496년 11월 교황이 그러한 명령을 내리자 피렌체의 도미니코회 조직은 저항하며 불순종했다. 교황권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결국 1497년 6월 18일 사보나롤라를 파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사보나롤라는 당시 피렌체를 덮친 전염병의 확산을 막느라 여름 내내 교황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다. 또 교황의 분노로 불안해진 피렌체 정부도 그에게 자제를 부탁하여 그 해가 끝날 때까지 그는 수양에만 몰두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듬해인 1498년 2월 사보나롤라는 다시 연단에 서서 설교를 하였다. 교황청의 피렌체 탄압을 우려한 나머지 시민들은 그에게 설교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여기에 순순히 응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의 왕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공의회를 소집해 교황을 폐위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던 중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름으로써 사건은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사가 도미니코회에게 ‘불을 통한 신성 재판’으로 하느님이 두 수도회 중 어디를 옹호하는지 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다혈질이던 사보나롤라의 한 제자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여론도 신성 재판을 열자는 쪽으로 움직였다. 사보나롤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판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기적을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재판을 제안한 프란체스코회 수사가 나타나지 않자 재판은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보나롤라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당장 다음날 폭동이 일어났고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사보나롤라는 반대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법정에 세워지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다음에는 시신이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알렉산데르 6세는 15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여 전국의 수많은 순례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막대한 헌금을 챙겨 교황청의 금고를 넘치도록 해웠다. 또 희년 기념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성문(聖門, Porta Santa)을 설치하게 하였다. 이 문은 희년 첫날에 열고 마지막 날에 닫도록 했는데,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1503년 8월 11일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와 함께 열병으로 앓아누워 교황 당선 기념 미사에 불참했다. 주치의들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선종하였다. 그 날은 날씨가 매우 후텁지근해 시신이 금방 부패했다. 시신을 시스티나 성당에 안치해둔 동안 얼굴이 진한 자줏빛으로 변하고 군데군데 검푸른 점이 나타났으며, 벌려진 입술은 부풀어올라 흉하게 일그러졌다. 시신은 심하게 부풀어올라 관에 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관리들이 시신을 낡은 카펫으로 둘둘 말아 관 위에 걸친 다음, 쑤셔넣어야만 했다.


전 임
인노첸시오 8세
제214대 교황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
후 임
비오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