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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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鄭栢, ?[1] ~ 1950년)은 일제 강점기사회주의 운동가로, 광복후 서울에서 결성된 장안파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본명은 정지현(鄭志鉉)이다.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휘문고보에 다니며 홍사용, 박종화와 교유했다[2].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인 김명식, 윤자영, 이영, 김사국 등이 1921년 결성한 서울청년회에 참가하면서 좌파 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명식이 주필을 맡은 《신생활》에도 참가했으나 신생활 필화 사건으로 잡지사는 폐간되었다. 이후 이영과 함께 서울파 공산주의 계파를 이끌었으며, 1927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2년 여를 복역하고 1931년 석방된 후로는 좌익 운동을 중단하고 1945년 광복 시점까지 광산업에 종사했다.

그는 전향 전력과 오랜 공백 기간에도 불구하고, 해방과 동시에 비슷한 입장이었던 화요파리승엽, 조일명과 손을 잡고 다시 공산주의 운동을 개시했다.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8월 15일 밤에 장안파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것이다. 구 서울파에서는 이영이 정백과 행보를 함께 했다. 하지만 곧 박헌영의 재건파에 리승엽 등 장안파 내의 구 화요회 계열이 흡수되었고, 정통성과 주도권을 빼앗긴 정백은 조선인민공화국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사로당 간부를 거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는 등 여운형, 백남운 등과 연대하여 남로당과는 별도의 독자적인 좌익 정치 활동을 벌였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조선에 머물다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소속으로 1949년 월남하면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사상 전향 선언을 하고 전향자들로 구성된 보도연맹 간부로 임명되어 반공 운동에 나섰다. 일제 때부터 좌파 운동가로 유명한 거물급 공산주의자 정백의 전격적인 전향과 보도연맹 가입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을 점령한 북조선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총살되었다.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안소영의 글에는 1896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납북자 명부 - 정백(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는 한국 전쟁 당시 나이가 49세로 기재되어 있어 이와 배치된다.
  2. 조완호, 동인지同人誌를 통한 문학의 현대성 구축작업(4) - 5.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향연, 동인지 백조, 《독서신문》 (2007.6.8) 그러나 안소영의 글에는 양정고보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