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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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약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부대가 국내진공하여 함경북도 보천보(해방전 명칭:혜산군 보천면 보전리)에 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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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독립군과 중국공산당을 비롯한 항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독립군의 자취는 거의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던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속속 전향하여 일본에 협력함으로서 점차 광복에 대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지휘관이었던 김일성은 비록 작더라도 선전효과를 극대화하여 이런 패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1]
[편집] 전투경과
보천보 내의 지하조직으로부터 소수의 경찰병력이 느슨한 경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은 100여명의 병력으로 급습했다. 보천보에 진입한 유격대는 일본의 각종 행정기관과 경찰 주재소에 방화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식당과 부자집을 돌며 군자금을 강탈했다. 일본경찰은 모두 도주해서 쌍방의 피해는 없었고, 민간인 사상자로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유탄에 맞아 숨진 갓난하기 한명이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항일유격대는 토벌대가 출동하기 전에 보천보를 빠져나와 만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편집] 결과와 영향
보천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 소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김일성이 의도한 바와 같이 일제의 지배력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확산되어가고 있던 패배주의를 저지하는데는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김일성의 의도는 이 사건에 대해 두번이나 호외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도한《동아일보》에 의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26살에 불과하던 김일성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김일성 전설"이 생겨날 정도로 신화화 되었다. 중도파 여운형뿐만 아니라 김일성과는 노선이 달랐던 임시정부의 김구도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었다고 한다. [2]
일제 또한 김일성을 주시하게 되어 만주지역에 산재하던 항일유격대의 뿌리를 뽑기위해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국내에 잠입해 있던 김일성 세포조직을 일제검거했다. 1938-1939년에 일제의 토벌전은 절정에 달해서 김일성을 비롯한 많은 항일유격대들은 결국 만주지역을 포기하고 소련령 연해주로 도피하게 되었다.
북조선에서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신화의 절정으로 학습되고 있으며 정권의 정통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한동안 보천보전투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고,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이 주도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