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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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아랍어: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사담 후세인 아브드 알마지드 앗티크리티, 1937년 4월 28일 - 2006년 12월 30일, 문화어: 싸담 후쎄인)은 1970년대 말에서 2003년 이라크 전쟁 때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대통령이었다.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출신 지도자이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 전쟁을 일으켰으며 강압적인 군대식 통치를 하였다.
1937년 티크리트 지역에서 유복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담은 20살 때 민족주의 성격의 이슬람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당에 입당했다. 바그다드 법대를 졸업했으며, 한동안 이라크 독립운동을 하던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이라크내 소수종파 수니파(다수종파는 시아파) 출신인 사담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후, 미국의 지원하에, 소련의 지원하던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이란-이라크 전쟁을 치른다. 그리고 이라크를 아랍내 최고로 발전된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후에 쿠웨이트 침공을 감행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제조하는 등 미국과 대립하게 되면서, 미국의 공격을 받았으며, 마침내 이라크 전쟁중 미군의 붉은 새벽 작전으로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았다. 2006년 11월 5일 1심 재판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 사형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항소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년 12월 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로 인해 저항세력 계파중 하나인 후세인 지지파들의 반발이 더 심하게 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한편 이라크는 다수종파인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으며, 이로써 아랍권 국가들 중에서 시아파가 다수종파이면서 권력을 잡은 나라는 이란과 이라크 두 나라가 되었다.
[편집] 중동 권력 지도의 변화
중동의 아랍 국가 중에 인구가 1위인 이집트(7천만 명)의 인구 절대 다수가 수니파이나 이라크는 소수파가 수니파이다. 중동 인구 5위인 이라크(2천만 명)는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다수파인 시아파를 억압하면서 통치했다. 이라크의 동쪽으로는 중동 인구 2위인 이란(6천8백만 명)이 접경하고 있다. 이란은 시아파 국가이며, 중동에서 시아파가 다수파인 국가는 이란과 이라크 두 나라 뿐이다. 이란은 옛 접경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과 냉전시대에 관계가 돈독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 하에 국내 다수파인 시아파를 억압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과 연합한 인구 2위의 중동 대국인 시아파 국가 이란과 맞섰다. 그리하여 사담 후세인은 이란을 제치고 한 때 이라크를 중동에서 최고로 발전된 국가로 만들었다가, 미국과의 반목으로 미국에 의해 실각,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미군이 주둔하여 사실상의 통치를 간섭하고 있는 이라크는 수니파인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고 그 지지세력들이 숙청되면서, 러시아와 친한 대국 이란과 이라크가 모두 다수세력이 시아파이면서 권력도 시아파가 장악하는 권력 지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이라크에서 제대로 주둔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며, 후세인은 교수형 직전에, 이란과 협력하면 절대 안된다는 당부를 하고, 이라크는 하나로 뭉치고 분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고서 죽었다. 그가 처형된 재판 사건은, 시아파 마을을 방문한 후세인 대통령을 시아파 반군이 습격,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 마을 청년 전원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편집] 가족
1958년 이집트 망명 중에 사지다 탈파와 결혼하였으며, 두 아들(우다이, 쿠사이)과 세 딸(라나,라가드,할라)를 두었다. 1986년 사미라 샤반다르와 재혼하였으며, 이 후 니달 알함다니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사미라는 아들 알리를 낳았다. 우다이와 쿠사이는 2005년 7월 22일 모술에서 사살되었다. 우다이와 쿠사이가 묻힌 곳에 후세인도 함께 매장되었다.
[편집] 바깥 고리
전 임 아메드 바크 |
제5대 대통령 1979년 7월 16일 - 2003년 4월 9일 |
후 임 연합 임시 권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