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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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 – 420
  서진
  동진 오호십육국
304–439
남북조 시대 420 – 589
581 – 619

618 – 907
무주 690 – 705

오대십국
907 – 960

907 – 1125

960 – 1279
  북송 서하
1038 – 1227
  남송
1115 – 1234
1271 – 1368

1368 – 1644


1644 – 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오호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는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북방 민족(5胡)이 회수(淮水)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前趙)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목차

[편집] 명칭의 유래

오호(五胡)는 흉노, 선비, 저, 갈, 강 등의 다섯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인데, 갈족은 흉노의 일파로서 따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갈족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을 건국한 것이나 선비족에서 탁발부, 모용부, 독발부, 걸복부가 각자 독립적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북방 민족의 구체적 수를 헤아리는 데 별 의미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5라는 숫자는 오행설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고, 오호는 “여러 민족”이란 말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16국이란 말은 북위 말엽의 사관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

근년에는 호(胡)라는 글자에 이민족에 대한 차별적 의미가 들어 있다는 생각에서 오호십육국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지양되고 있다. 그 대신 이 시기 강남에 병존하던 동진(東晉)과 강북의 16국을 아울러, 이 시대를 동진십육국 시대로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동진의 멸망이 북위의 화북 통일보다 20년 정도 이르기 때문에 완전히 적절한 용어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편집] 변천 과정

진나라 말기에 일어난 황위 계승 다툼은 엄청난 규모의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진나라는 황족을 왕으로 봉하며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그 결과 황위의 계승권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 여럿 존재하였다. 8명의 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벌인 이 내란을 팔왕의 난이라 부른다. 8왕의 난은 306년에 끝났지만, 이로 인하여 진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8왕의 난 당시 왕족들이 전투를 위해 중국 내지에 정착해 살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써 이들의 입지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때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진나라의 쇠퇴를 호기로 삼아 304년에 자립해 한나라를 세웠다. 같은해 사천에서도 이웅(李雄)이 자립하였다. 서북쪽의 감숙에서도 진나라의 양주자사였던 장궤(張軌)가 자립해 전량(前凉)이란 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오호십육국시대의 시작이었다.

유연은 갈족 출신의 석륵과 한인 출신 장군 왕미(王彌)을 시켜 산서 일대를 공략하고, 308년 황제를 칭했으나, 310년에 죽고 아들 유화가 이를 계승하였다.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 유총이 제위를 찬탈했다. 유총은 311년에 낙양을 함락해 진의 회제를 붙잡았으니, 사실상 진나라는 여기서 멸망하게 되었다. 이것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후 장안에서 [[서진 민제|민제]가 옹립되었으나, 이것마저도 316년에 멸망한다. 진나라의 왕족이었던 사마예가 남쪽의 건업에서 진나라를 재흥시키니 이 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나라는 유총 사후 후계자 쟁탈전에서 유요가 승리하여 즉위후 국호를 조나라라고 고쳤으니 이를 가리켜 전조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쪽 정벌에 나섰던 석륵이 자립해 하북과 하남을 영유하고 산동을 장악하니 낙양을 경계로 전조와 마주보는 형국이 되었다. 이 나라 또한 국호를 조나라라고 하여 구분해서 후조라고 불렀다. 328년 유요가 낙양을 탈환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석륵의 조카 석호에게 대패해 포로가 된 뒤 살해당하니, 약해진 전조를 후조가 멸망시켰다.

333년 석륵이 죽고 석홍이 즉위했으나 석호가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석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석호는 수도를 업으로 옮겼고, 이 시기가 후조의 최전성기였다. 349년에 석호가 죽자 석륵의 양자 석민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즉위했다. 석민은 이후 염민이란 이름으로 즉위하여 염위(염魏)를 세웠으나 워낙 단명한 왕조라 16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후조는 351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염민이 세운 위나라는 이민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였고 다수의 한인이 갈족을 상대로 대량의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때 요동에 근거지를 둔 모용부가 모용광을 중심으로 전연(前燕)을 세우고, 위나라의 혼란을 틈타 중원에 진출하였다. 전연군은 염위군에 연승을 거둬 352년에 염민을 사로잡아 죽였다. 같은 시기 협서 지방에서 저족의 부건이 장안에서 전진(前秦)을 건국하였다.

화북의 혼란을 틈타 동진의 환온(桓溫)이 성한을 멸망시켜 촉 지역을 장악하고 북진해 일시적으로 낙양을 점령했다. 환온은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전진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전진은 동진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를 계기로 전진의 국력이 증가해 360년에는 화북을 전연과 둘이 나눠 가진 형태로 서로 마주보는 상태가 되었다. 부건의 뒤를 계승한 부견은 뛰어난 인물로 한인 왕맹을 등용해 그의 조언에 따라 국력을 키우며 대대적인 정벌로 각 나라를 정벌해 376년 화북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진 정벌을 계획하여 100만이라 부르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가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군에게 대패한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은 단번에 쇠퇴하고, 각 민족이 제각기 독립하기 시작했다. 옛 전연의 영토에는 후연이 건국되고, 산서에는 대와 서연이 세워졌다. 협서에는 후진서진이 생겼고, 감숙에는 후량이 태어났다. 그후의 혼란 속에서 협서에는 하나라, 감숙에는 북량, 남량, 서량이 건국되고, 산동에는 남연 등이 난립하는 등 화북은 다시 혼란 상태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모용수가 건국한 후연과 요장이 건국한 후진이 제일 강력했다. 후연은 서연을 멸망시키고, 후진은 전진을 각자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하고 다시 동서 양분 상태를 보였으나, 대나라에서 국호를 바꾼 선비 탁발부의 북위와 흉노의 혁련발발이 건국한 하나라가 이들을 누르고 강대해졌다.

395년에 북위에 패한 후연은 남연과 북연으로 나뉘었으나 대부분의 영토를 북위에게 빼앗겼다. 후진 또한 하나라에게 공격을 당해 영토를 빼앗기다가 417년 동진의 유유에게 멸망당했다. 유유는 그에 앞서 410년에 남연도 멸망시켰고, 그 두 공적으로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한다.

하나라는 유유가 물러간 뒤 장안을 탈취해 북위와 함께 화북을 양분했으나, 427년 북위에게 패한 뒤 쇠퇴를 거듭하다 431년에 멸망당하고, 북위는 436년에 북연을, 439년에 북량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니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는 끝나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게 되었다.

[편집] 주요국가

오호십육국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전량 장궤 301년 - 376년 한족
전조 유연 304년 - 329년 흉노
성한 이특 304년 - 347년 파촉
후조 석륵 319년 - 351년 갈족

전연

모용황 337년 - 370년 선비
전진 부건 351년 - 394년 저족
후연 모용수 384년 - 409년 선비
후진 요장 384년 - 417년 강족
서진 걸복국인 385년 - 431년 선비
후량 여광 389년 - 403년 저족
남량 독발오고 397년 - 414년 선비
북량 저거몽손 397년 - 439년 盧水胡
남연 모용덕 400년 - 410년 선비
서량 이고 400년 - 421년 한족
혁련발발 407년 - 431년 흉노
북연 풍발 409년 - 436년 한족


오호십육국 이외의 국가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구지 楊茂捜 296년 - 506년 저족
탁발猗盧 315년 - 376년 선비
염위 염민 350년 - 352년 한족
서연 모용홍 384년 - 394년 선비
388년 - 392년 정령
후촉 초종 405년 - 413년 한족
우문부 우문막규 302년 - 344년 선비
단부 단일육眷 310년 - 357년 선비

[편집] 오호십육국 시대의 사회

[편집] 민족 융합설

화하족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민족적 자아의식은 없었다. 한대에 이르러 중원의 사람들이 국가 강역 내 일개 공동 민족이며, 그 외 지역의 민족은 오랑캐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한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생겨났다.

중국 사학자들은, 오호십육국 시대는, 중국의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대량 유입된 시기로서, 이후 중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대규모의 민족 융합이 일어난 시기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동북쪽에는 오래된 유목 민족 두 개가 존재하였다: 흉노족과 동호족이 그것이다. 흉노족의 한 갈래는 한대유럽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갈래(갈(羯) 포함)는 오호십육국 시기 철저하게 한족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편집] 사회 발전

중국 북방 유목 민족이 중국 중원으로 진출한 시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 당시 수 년간 이어진 전란 때문이었다. 익주(益州) 사천(四川) 지방, 전량의 하서주랑, 전연의 요하 유역으로는 대량의 중원 난민이 이주해왔다. 실크로드가 이어진 하서의 고장(姑臧) 지방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편집] 참고 문헌

  • 『五胡十六国 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三崎良章著(東方書店 『東方選書』36 2002年) ISBN 449720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