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칠십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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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은 조선 전기에 새 왕조 조선을 섬기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껴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던 옛 왕조 고려의 충신 72인을 일컫는 말이다.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실제로는 74명이다.
조선 정조 때 왕명으로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配享)하였다.
일부에서는 전설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두문동’의 ‘두문(杜門)’이란 말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라는 뜻으로, ‘두문동’이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외부와 단절하며 사는 동리(洞里, 마을)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두문동이란 이름은 기존 존재하였던 지명이 아니라 고려의 절신(節臣)이 은거한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편집] 두문동칠십이인의 명단
호와 이름, 간략한 인물 소개를 함께 적었다.
-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 농은유집에 갑골문으로 된 천부경문을 남겼다.
- 방촌(厖村) 황희(黃喜) : 뒷날 출사
- 송은(松隱) 박익(朴翊) : 귀은제(歸隱第)에 은거
- 조영규(趙英珪) : 신창 조씨(新昌趙氏)의 시조. 평민 출신으로 여겨지며 호는 없다.
-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 정몽주(鄭夢周)의 제자.
- 송은(松隱) 구홍(具鴻)
-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 두문동에 든 다음해 평산(平山)의 다의현(多義峴)에 옮겨 집을 ‘다의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 : 조선 태조에게서 두문동에 들었다는 이유로 본향안치(本鄕安置)의 벌을 받았다. 뒤에 풀려나자 다시 두문동에 들었다.
- 양대(養大) 임선미(林先味) : 양대(養大)는 호가 아닌 자이다.
-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 : 정도전(鄭道傳)과 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 첩의 후손)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록한 까닭에 그들에게서 원한을 사서 가족과 일당 8십여 명과 함께 암살당했다.
- 한천자(漢川子) 신아(申雅) : 딸(창왕의 정비)의 행실과 지위 탓에 모함을 자주 받았다.
- 이석지(李釋之)
- 박심(朴諶)
- 이맹운(李孟芸)
- 조의생(曺義生)
鄭夢周, 金澍, 李存吾, 鄭樞, 崔瀁, 吉再, 南乙珍, 林先味, 元天錫, 曺義生, 孟裕, 陶東明, 都膺, 李思之, 金自粹, 張安世, 鞠 , 程廣, 韓哲沖, 羅天瑞, 趙 , 金若時, 鄭溫, 孟希道, 申德 , 徐甄, 崔文漢, 許徵, 趙承肅, 李思敬, 成溥, 李明誠, 李穡, 鄭地, 河自宗, 李養中, 金震陽, 安省, 金若恒, 裵尙志, 李釋之, 李行, 邊肅, 金先致, 李涓, 李種學, 李陽昭, 閔愉, 文益漸, 林卓, 曺希直, 宋寅, 郭樞, 趙鐵, 金士廉, 尹忠輔, 柳 , 蔡王澤, 宋皎, 崔七夕, 車原 , 金自進, 金承吉, 范世東, 成思齊, 朴門壽, 閔安富, 金忠漢, 具鴻, 蔡貴河, 趙瑜, 金濟, 田祖生, 田貴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