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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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張勳, 1940년 6월 19일 - )은 재일 한국인 프로야구 선수이다. 일본에서는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란 일본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4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될 때 큰 누나를 잃었다. 5세 때 후진하는 트럭을 피하다 화덕에 오른손이 들어가 화상을 입고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네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이 붙었다. 또한, 오른손의 다른 부분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본래 오른손잡이였지만,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왼손을 사용하였다. 이같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귀화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수많은 차별을 견디어 내면서 일본 프로 야구사에 길이 빛날 통산 3085 안타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프로 야구 위원회 고문으로서 한국 프로 야구 탄생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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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선수 경력
오사카 나니아 상고 시절 단 13회의 공식 경기에서 11 홈런과 6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면서 동갑내기인 왕정치와 함께 동 왕정치 서 장훈이라고 불리우며 초고교급 선수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미 고교 1학년 때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형의 충고로 입단하지 않았다. 고교 3학년 때에는 요미우리를 비롯한 여러 팀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와 전혀 무관한 야구부 후배 폭행 사건 때, 대표로 징계를 받은 사실을 빌미로 요미우리 구단 고위층이 감독의 스카우트 요청을 거부하면서 요미우리 입단은 무산되었다. 주니치 등이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직접 히로시마의 판자집에 찾아와 호소한 도이에 플라이어스 구단주의 정성에 감복하여 도이에와 계약금 200만 엔에 입단하였다. 당시, 일본 프로 야구는 구단별로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할 수 있었고, 2명만 출전시킬 수 있었다. 장훈은 한국 국적이었으므로,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의 적용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초고교급 선수라 해도 고교를 갓 졸업한 장훈이 미국인 용병과 출장 경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다. 이는 장훈 본인 뿐 아니라 구단에도 큰 손실이었다. 도이에의 구단주는 장훈에게 양자가 되면서 귀화할 것을 권했지만, 장훈의 어머니는 그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게 하였다. 도이에 구단주는 장훈을 놓칠 수 없었기에 도이에가 속한 퍼시픽 리그의 규약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선수는 국적을 불문하고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 삽입을 제안하여 관철하였다. 장훈 덕분에 이후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들이 귀화하지 않고도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좌투좌타였던 장훈은 1959년 데뷔전 첫 타석에서 3구 삼진으로 물러 났고, 곧 이은 외야 수비에서 평범한 뜬 공을 놓치고 바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데비 후 2차전인 4월 11일 고마자와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2루타를 치고, 이어진 타석에서 홈런을 날리면서, 향후 수립할 3085 안타라는 대기록에 시동을 걸었다.
데뷔 첫 해 타율 .275 (16위), 57 타점, 115 안타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데뷔 2년차인 1960년에는 19세에 4번 타자를 맡아 일본 프로 야구 최연소 4번 타자 기록을 세우면서, 타율 .302로 활약하였다. 데뷔 3년차인 1961년에는 타율 .336으로 수위 타자에 올라 서면서 소속 팀을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제패로 이끌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70년까지 4회 연속 수위 타자 기록을 세우는 등 총 7회에 걸쳐 퍼시픽 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1976년 소년 시절 꿈에 그리던,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왕정치-나가시마의 ON포 대신 장훈-왕정치의 OH포로 자이언츠를 무장시키고, 왕정치와 함께 2회에 걸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적 첫 해 .355의 타율을 기록하며 1모 차이로 타격왕 자리를 놓쳤다. 시즌 끝 무렵, 명백한 중전 안타를 실책으로 기록한 기록원과 장훈의 경쟁자를 수위 타자로 만들기 위한 다른 팀의 쇼 (불행히도 그 주역은 장훈의 수위 타자 경쟁자에게 배팅볼 수준의 치기 좋은 직구를 매 타석 던져 준 재일 교포 투수 김기태였다)가 없었다면,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양대 리그 타격왕과 최우수 선수에 뽑히는 최초의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1979년 시즌이 끝났을 때 장훈은 2961 안타를 기록 중이었고, 요미우리에서 3000 안타의 대기록을 달성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장훈을 롯데 오리온스로 트레이드하였다. 롯데 이적 첫 해인 1980년 5월 28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전 6회말 1사 2루에서 4번째 타석에서 야마구치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을 쳐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3000 안타의 대기록을 세웠다.
198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통산 2752 경기에 출장해, 504 홈런, 3085 안타, 타율 0.319, 1676 타점, 319 도루를 기록했다. 3085 안타 이외에도 수위 타자 7회 (4회 연속 수상) 역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이다. 또, 500 홈런 - 300 도루 클럽 가입도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는 2007년 현재 유일하다. 1990년 99번째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일본 야구 위원회는 올스타전 기간 중 헌액식을 성대하게 치러 주었다. 장훈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왕정치는 장훈보다 은퇴가 1년 빨랐지만, 명예의 전당 헌액은 더 늦었다.
[편집] 기록
연도 | 소속 | 경기수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누타 | 타점 | 도루 | 사사구 | 삼진 | 타율 |
---|---|---|---|---|---|---|---|---|---|---|---|---|---|---|
1959년 | 도에이 플라이어즈 | 125 | 418 | 48 | 115 | 18 | 5 | 13 | 182 | 57 | 10 | 34 | 54 | .275(16) |
1960년 | 106 | 384 | 49 | 116 | 25 | 3 | 16 | 195 | 56 | 15 | 29 | 56 | .302(4) | |
1961년 | 129 | 473 | 77 | 159 | 31 | 10 | 24 | 282 | 95 | 18 | 51 | 42 | .336(1) | |
1962년 | 133 | 472 | 89 | 157 | 24 | 4 | 31 | 282 | 99 | 23 | 90 | 46 | .333(4) | |
1963년 | 150 | 529 | 90 | 148 | 16 | 7 | 33 | 277 | 96 | 41 | 95 | 47 | .280(10) | |
1964년 | 129 | 461 | 85 | 151 | 21 | 6 | 21 | 247 | 72 | 31 | 79 | 42 | .328(2) | |
1965년 | 132 | 455 | 61 | 133 | 13 | 3 | 23 | 221 | 88 | 29 | 76 | 37 | .292(6) | |
1966년 | 122 | 443 | 67 | 146 | 13 | 2 | 28 | 247 | 90 | 10 | 45 | 31 | .330(2) | |
1967년 | 120 | 414 | 72 | 139 | 18 | 3 | 28 | 247 | 88 | 18 | 76 | 30 | .336(1) | |
1968년 | 114 | 363 | 70 | 122 | 12 | 2 | 24 | 210 | 65 | 13 | 65 | 20 | .336(1) | |
1969년 | 129 | 480 | 77 | 160 | 27 | 1 | 20 | 249 | 67 | 20 | 73 | 33 | .333(1) | |
1970년 | 125 | 459 | 92 | 176 | 16 | 2 | 34 | 298 | 100 | 16 | 72 | 36 | .383(1) | |
1971년 | 128 | 480 | 73 | 150 | 21 | 3 | 26 | 255 | 78 | 18 | 61 | 32 | .313(7) | |
1972년 | 127 | 472 | 93 | 169 | 25 | 4 | 31 | 295 | 89 | 10 | 72 | 37 | .358(1) | |
1973년 |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 128 | 441 | 77 | 143 | 18 | 0 | 33 | 260 | 93 | 12 | 99 | 32 | .324(2) |
1974년 | 니혼햄 파이터스 | 120 | 406 | 64 | 138 | 20 | 3 | 14 | 206 | 62 | 14 | 83 | 28 | .340(1) |
1975년 | 119 | 410 | 45 | 113 | 12 | 2 | 15 | 174 | 46 | 6 | 59 | 26 | .276(15) | |
1976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30 | 513 | 89 | 182 | 35 | 5 | 22 | 293 | 93 | 8 | 55 | 44 | .355(2) |
1977년 | 122 | 440 | 67 | 153 | 16 | 6 | 24 | 253 | 82 | 3 | 46 | 37 | .348(2) | |
1978년 | 115 | 424 | 53 | 131 | 17 | 1 | 21 | 213 | 73 | 1 | 28 | 39 | .309(12) | |
1979년 | 77 | 228 | 26 | 60 | 7 | 0 | 8 | 91 | 32 | 1 | 24 | 21 | .263 | |
1980년 | 롯데 오리온스 | 102 | 341 | 50 | 89 | 9 | 0 | 12 | 134 | 39 | 0 | 28 | 31 | .261 |
1981년 | 70 | 169 | 9 | 35 | 6 | 0 | 3 | 50 | 16 | 2 | 12 | 14 | .219 | |
통산 | 2752 | 9666 | 1523 | 3085 | 420 | 72 | 504 | 5161 | 1676 | 319 | 1352 | 815 | .319 |
[편집] 관련 항목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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