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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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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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6년 7월 11일 대한민국 황해도 해주시 |
사망 |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서울 암살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독립운동가 |
자녀 | 김신 |
부모 | 김순영(부), 곽낙원(모) |
김구(金九, 1876년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다.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호는 창암(昌巖)이었고 19세 때 창수(昌洙)로 바꾸었다. 38세 때(1913년)에 이름을 구(九)로 바꾸었다. 그의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고 하였다.
목차 |
[편집] 생애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가난한 농사꾼 김순영, 곽낙원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한 주장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워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17세에는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였다. 이때 미리 합격자를 정해놓고는 형식적으로 치를 정도로 타락한 조선 말기의 과거제도는 김구에게 사회개혁의지를 심어주었다. 1893년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하고 그 이듬해에는 18세의 나이로 팔봉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결국은 패배하였다. 20세에는 압록강을 건너가, 만주에서 김이언이 지휘하는 의병단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896년에는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사형 확정일에 대한제국의 법부는 사형을 보류시켰다. 감옥 속에서 <태서신사> , <세계지리>를 읽고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탈옥 후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1899년 환속하였고,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교육 운동에 노력하였다. 1903년에는 감리교에 입교하였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수감되었다. 1915년 출옥한 후에는 동산평 농장의 농감으로서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였다. 김구는 그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던 임정을 개편하여 한인애국단이라는 무장독립운동조직을 만들어 1932년 1·8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40년에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44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로 분열된 독립운동가들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그 자신도 고려공산당원에게 총격을 받는 일도 있었다.
해방 후에 귀국하여 민족주의 입장에서 반민특위강제해산(1948년)으로 친일파를 감싸고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대립하였고, 남북한의 분단 및 단독선거 그리고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했다. 광복 후 1949년 6월 26일, 이승만 계열의 극우파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하지만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저서로 《백범일지》 등이 있다.
[편집] 이력
-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남.
-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
- 1895년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95년 만주로 피신,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
- 1896년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土田譲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강도살인죄(強盗殺人罪)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
- 1898년 복역 중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 1903년 감리교에 입교. 하지만 김구 자신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떠받들지 않고,실천의 대상으로 존경하였다.
-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
- 1910년 신민회(新民會)에 참가.
- 1911년 105인 사건 으로 체포되어 종신형 선고 받음.
- 1911년 복역 중 감형으로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 계몽 활동.
-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 [1]
- 1919년 3·1 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
-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됨.
- 1928년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 1932년 일본왕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櫻田門] 폭탄투척 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 지휘.
-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重慶)으로 이전.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
-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2]
-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함.
- 8.15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됨. [3]
-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 [4]
-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5]
-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그는 트루먼이 전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편집] 저서
- 백범일지(白凡逸志)
[편집] 가족 관계
[편집] 바깥 고리
[편집] 부록
[편집] 참고 자료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14~118쪽.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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