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오류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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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오류와 진실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역사를 모아놓은 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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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서양
[편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서양 최초의 역사가이기에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저술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 들은 이야기는 사실이든 아니든 모두 저술했다. : 여우만큼 큰 개미 이야기
- 페르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날조했다.
- 여러 자료를 표절했다.
- 짜맞추기 식으로 저술하여 완벽하게 거짓말을 했다.
[편집] 네로와 로마 대화재
-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대화재입니다.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기원후 60년) 당시 황궁에서 시를 노래했다는 전설은 후세의 기독교인들이 퍼뜨린 내용이다. 실제로 네로는 대화재 발생 당시 로마에서 5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고, 화재 소식을 접하자 즉시 로마로 달려와 화재 진압을 지휘했으며, 진압 후에도 서민들을 위한 갖가지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기독교인들이 네로에 대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은 네로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더라도 거짓말로 네로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서 네로만 기독교인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와 칼리굴라는 훨씬 더 기독교인을 박해했다.
[편집] 마그나카르타와 민주주의
- 이 부분의 본문은 마그나카르타입니다.
영국 민주주의는 흔히 1215년에 존 왕이 서명했다고 하는 마그나카르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마그나카르타가 모든 영국인의 권리를 보장해준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은 존 왕은 서명하지도 않았으며(인장을 찍었다), 보호의 대상은 영국 귀족이었다. 결국 영국인의 80% 이상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박해를 받았다.
[편집] 야만인의 문화 파괴
- 이 부분의 본문은 반달족입니다.
반달족은 이동하면서 해적질과 각종 약탈 및 파괴 행위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반달행위(Vandalism)란 말이 생겼다. 하지만 로마는 반달족보다는 오히려 로마제국 말기의 노예나 빈곤층 그리고 후대의 예술가와 로마의 보통사람이 더 많이 파괴했다. 고딕(Gothic)이란 말도 야만인이 문화 파괴를 한 듯이 쓰이고 있다. 이는 “고트족의” 또는 “고트풍의”라는 뜻으로, 교양 없고 야만스럽고 풍류도 없으며 촌스럽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곧 고트족이 그러했다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반달족과 마찬가지로 고트족도 로마 문화와 예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와 로마 문화의 융화를 꾀한 민족이었다.
[편집] 중세인도 지구는 둥글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믿을 만한 학자들 가운데 세계가 납작한 원반 모양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한 중세의 학식 있는 수도사들 또한 지구가 원반처럼 생겼다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비드(673년~735년, 앵글로색슨인 신학자, 역사가, 연대기 학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주요 성직자들은 지구가 원구(구체)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납작한 지구”에 관한 이론은 대부분 라틴어가 아닌 기록이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비주류이거나 또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기록이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에 갑자기 퍼지면서 중세에는 다들 지구가 납작한 원반이라고 생각했다고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편집] 무제한 잠수함 작전
- 이 부분의 본문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독일의 외무장관이었던 치머만이 멕시코에 보냈던 암호 전문(이른바 치머만 전보)이 해독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에는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영국에서 해독한 것이었고, 영국은 이를 의도적으로 언론 등에 흘려 미국이 알게 한 것이다. 1848년의 그 영토는 미국 전체 영토의 ⅓에 달하는 양이었기 때문에 미국민은 이것을 전쟁 도발로 간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또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말미암아 1,959명의 승객과 함께 가라앉은 루시타니아호가 비무장 상선이라는 말도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미 독일은 (1) 생필품이나 식량 등이 아닌 전쟁물자, 곧 무기, 화약 등을 싣고 가는 배 또는 (2) 무장을 하고 있는 상선은 침몰시키겠다고 미리 알렸다. 그러나 루시타니아호는 무기와 화약을 싣고 있었으며, 또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결국 루시타니아호의 침몰은 독일보다는 루시타니아 호의 선주 또는 선장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겠다. 게다가 독일이 펼쳤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앞서 말한 두 가지 경우에만 공격을 하였다. 오히려 영국의 북해 봉쇄 작전에서 파괴된 독일의 비무장 여객선이 훨씬 많고, 민간인 사망자도 더 많았다. 모름지기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다.
[편집] 독일 재군비
-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 재무장 선언입니다.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이유 조약의 파기와 함께 독일 재무장을 선언했었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의 재무장이 1935년 재군비 선언 후 시작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독일군의 재무장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새로운 총참모장이 된 한스 폰 젝트 장군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10만명 규모 내에서 가능한 재군비 작업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양봉을 배우는 군인들 사진을 선전용으로 배포하면서 각종 무기 개발과 실험을 소련과 협력하여 소련 영토 내에서 수행했으며, 공군 조종사는 글라이더 협회 등으로 위장했고, 구 프로이센 참모본부의 역할은 민간 정부의 각 관련 부처로 업무를 이관하는 식이었다(예를 들어, 참모본부에 존재하던 철도과를 교통부의 철도과로 이전하는 식이다). 걸작 기관총은 MG34도 이미 1930년에 독일이 아닌 스위스의 졸로틴이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것이었다. 이 회사는 독일의 군수산업체인 라인메탈사가 대주주로 경영권을 장악한 회사였다.
[편집] 나치 독일군의 전격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전격전입니다.
폴란드 전역 당시 선보인 독일군의 전격전은 완성된 체계를 갖춘 전술 교리로 오해를 받지만, 실제 이 전격전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은 없다. 당시 독일군의 놀라운 진격속도는 독일로써도 의외의 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독일군 수뇌부는 1차대전 당시 지루했던 참호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격전(Blitz Krieg)란 말도 군부에서 이름지은 것이 아니라 독일의 선전당국이 붙인 이름이다(아마 요제프 괴벨스가 지었을 것이다).
[편집] 폴란드 창기병대의 돌격
- 이 부분의 본문은 폴란드 창기병대의 돌격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군 포모로스케 창기병대가 독일 전차들은 종이와 합판으로 만들어진 껍데기일 뿐이라고 믿고 전차부대에 돌격했다는 것이 사실처럼 알려져왔다. 이 일화는 당시 폴란드군의 낙후성과 시대착오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되었지만, 사실은 그와 조금 다르다. 폴란드군 창기병대가 독일군 기갑사단을 상대로 돌격을 펼친 사실은 있으나(당시 독일군 전투일지에 기록된 내용이 발견됨), 전차가 종이와 합판으로 만들어졌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다른 아군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독일군의 시선을 끌고자 했던 작전이었다. 이것이 당시 이탈리아 종군기자에 의해 보도되면서 와전된 것이다.
[편집] 최연소 독일군 사단장
- 이 부분의 본문은 쿠르트 마이어입니다.
쿠르트 “판처” 마이어는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최연소 독일군 사단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제 독일군 최연소 사단장은 32세에 제78국민척탄병 사단장을 역임한 하랄트 폰 히르슈펠트 중장이다.
물론 백엽 검 기사십자장과 제3제국 3급(최고급) 무공훈장을 수훈한 쿠르트 마이어가 무척 젊은 나이에 사단장이 되었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또한 그의 별명인 Panzer(판처)는 기갑전의 달인이라서 붙여진 별명이 결코 아니다. 발뼈가 스무 조각 이상으로 쪼개지는 중상을 입은 뒤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마이어는 놀랍게도 완전히 회복했다. 이 놀라운 사건 뒤 그의 친구들은 마이어에게 “전차”(Panzer)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왜냐하면 마이어가 “전차”처럼 튼튼했기 때문이다.
[편집] 최악의 선박 참사
타이태닉호 참사나 루시타니아호 참사가 너무 유명하여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선박 참사가 그 둘 가운데 하나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사망자 수로 볼 때 역사상 최악의 선박 참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연합군 해군이 비무장 선박 빌헬름 구스틀로프(The Wilhelm Gustloff)호를 격침시킨 사건이다. 이때 6천 명 이상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 사건은 타이태닉호 참사(1513명)보다 거의 4배에 가까운 인명을 앗아갔으며, 루시타니아호 참사(1,959명)보다는 거의 3배에 가까운 목숨이 사라졌다.
[편집] 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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