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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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1949년 성결교회가 재건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로 대한예수교성결교회와 분열되었다. 신학교육기관으로는 서울신학대학교가 있으며, 언론기관으로는 신학잡지인《활천》,교회신문인《성결신문》이 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4중복음으로 자신들의 신학적인 성격을 설명한다.
[편집] 역사
1.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시대 (1907-1921)
(1) 복음전도관 설립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1907년 5월 30일, 정 빈(鄭彬)과 김상준(金相濬)이 동양선교회가 일본에 세운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서울 종로에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전도자들의 열정적인 설교는 많은 청중들을 감동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공동체에서 죄를 고백하였다.
(2)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와 성서학원 설립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미국인 카우만(C. E. Cowman) 부부와 그의 친구 길보른(E.A Kilbourne) 그리고 일본인 나카다와 사사오가 일본 도쿄에서 동양선교를 목적으로 세운 선교단체였다. 카우만과 길보른은 본래 미국 감리교회 신자였으나 복음을 동양에 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카고의 무디신학교를 졸업한 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카우만은 1901년에 일본 도쿄로 건너왔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부인과 함께 전도에 나섰다.이듬해 친구 길보른을 불러 선교사업을 확장하고,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성서학원을 개설하였는데, 1905년에 조선인 정빈과 김상준이 이 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동양선교회는 조선 성결교회를 잉태시킨 모체가 되었다. 동양선교회는 1910년, 토마스(John Thomas)선교사를 복음전도관 감독으로 파송함으로 대한제국 선교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초대감독이었던 토마스 목사는 1911년 3월 13일, 복음전도관 안에 임시로‘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에 토마스 목사, 교수 정 빈, 통역 이장하로 교수진을 구성한 후, 1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21년에는 전국에 33개소의 전도관이 설립되었다.
2.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3)
(1) 교회조직과 행정구조
복음전도관은 그 이름을 1921년 9월,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하고 1925년에는 '교리와 조례'를 제정 공포함으로 명실공히 성결교회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21년, 제3대 감독으로 부임한 길보른(E. A. Kilbourne) 선교사는 한국인이 감독의 행정에 자문하도록 고문회를 두었으나 1924년 길보른 감독이 귀국함에 따라 감독제와 고문제도가 폐지되고 이사회가 조직되어 최초의 의회제도가 시작되었다. 1929년 2월 27일에는 목사 19인의 정회원과 남전도사 48인을 준회원으로 하는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었고 이 연회를 통해 교회법을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사무국을 설치하였고 각 교회의 남자 집사 대표 1인으로 평신도회가 조직되어 성직자와 평신도의 협력체제가 시작되었다. 이후 총회(總會)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확대되어 1933년 역사적인 제 1회 총회가 경성성서학원 강당에서 개회되어, 총회장과 임원 및 각 부 부장을 선출하고 성결교회 규칙(헌법)을 통과시켰으며, 안건을 토의를 통해 처리하는 의회제도가 실시되었다.
(2) 교회발전 시대(1929-1937)
제 1회 총회장으로 피선된 이명직목사가 개회사를 통해 “조선에 1천 교회를 목적하고 돌진하는 것이 이번 총회의 목적이라”고 밝혔듯이, 총회 이후 1년 만에 신설된 교회가 50교회, 신세례인이 2천명이었으며 구도자가 1만 5천명에 달하였고, 신축한 교회당이 13교회, 주일학생이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크게 발전된 원인은 다음 세 가지 요인에 있다고 생각된다.
1) 자급자치(自給自治)
그 동안 모든 교역자는 동양선교회에서 외국의 후원자들로부터 모금한 생활비를 중앙의 감독이나 이사회로부터 매달 지급 받아왔으나 제1회 연회의 평신도회에서 월정헌금제도와 교역자의 생활비는 개 교회가 담당한다는 결의를 함으로써 자립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는 교회의 부흥을 자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2) 활발한 문서선교
성결교회는 문서선교운동의 중요성을 인식, 총회산하에 출판부를 두어 각종 신앙서적을 인쇄 보급하여 교단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910년에 한국 최초로 출판한 '부표성경’(附標聖經)과 1911년에 출판된 복음가, 1919년에 증보개정한‘신정복음가’그리고 1930년에 대폭 증보한 '부흥성가’를 발행하여 은혜로운 성경과 찬송을 통해 성도들의 심령을 변화시켰다. 또한 1922년에 창간된 월간지 활천(活泉)은 생명의 양식과 생수가 되었고 성서신학 교수들의 성서강해집, 신학연구집, 전도문서집, 설교집, 교회교육을 위한 주일학교 독본 등 30여 가지의 단행본이 쏟아져 나와 평신도와 교역자들의 자질 향상과 은혜생활을 돕는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뜨거운 전도활동의 확산
총회는 전도를 위해 도시전도대와 농촌축호전도대와‘전국순회전도대’를 조직하였다. 특히, 전국순회전도대는 대형트럭에 프랑카드를 걸고 악대를 동원하여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며 며칠씩 대형천막을 치고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그 효과가 커서 집회를 마친 곳에 교회가 개척되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이 살고 있는 만주, 중국, 일본 등지에까지 전도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성결교회는 이원근전도사를 동만주 선교사로 파송을 시작으로 만주의 용정, 할빈, 봉천, 목단강,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1927년 3월에는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윤낙영목사가 일본 동경에 성결교회를 설립하였고 오사까, 히로시마 등지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상해에도 이헌영씨가 성결교회를 창립했다.
(3) 교회의 수난과 해산 (1937-1945)
대륙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한일합방을 성취시키고 마침내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일본에 가장 무서운 세력이 기독교라는 인식하에 일본은 소위 신민회 사건, 105인 사건 등을 조작하여 기독교인을 탄압하였고, 민족자결을 외치는 3.1운동을 주동한 기독교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일제는 한국개신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다”라는 회유와, 총칼의 위협으로 대부분의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성결교회에서도 그들의 위협에 신사참배를 각자의 신앙양심에 맡기기로 했으나 철원교회 박봉진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모진 고문에 1944년 8월 15일에 순교했다. 또한 일제는 우리의 재림교리를 트집 잡아, 일본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사상으로 일본 국시에 위배된다고 판정하여 1943년 5월 24일 전국 성결교회의 교역자와 평신도지도자 300여 명을 일제히 검거하여 모진 심문과 고문으로 핍박했다. 뿐만 아니라 1942년 12월에는 기관지‘활천’을 강제 폐간시켰고, 1943년에는 교단신학교인 '경성신학교’를 폐교시키고, 1943년 9월에는 성결교회 예배 중지령을 내리더니 마침내 12월 29일에는 성결 교단을 강제 폐쇄시켜 버렸다.
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1945-현재)
(1) 해방과 교회의 재건 (1945-1950)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민족은 감격의 해방을 맞이했다. 가장 모진 시련을 당했던 성결교회는 누구보다도 해방의 감격이 벅찼다. 그리하여 성결교회 재흥준비위원회(위원장 박현명목사)를 발족하여 1945년 11월 9일에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흩어졌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 서로 얼싸안고 찬송가와 애국가를 눈물로 부르는 감격스런 총회을 개최하였다. 총회에서는 교단의 명칭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라고 개칭하였다가 1948년 8월 15일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되었으므로, 1949년 제4회 총회에서 교단명칭을‘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회는 일제에 의해 강매되었던 교회당을 다시 찾고, 신학교를 복교하고 활천을 복간하였다. 또한 성결교회의 헌법전면개정을 착수하여, 성결교회의 생활강령과 지도원리, 우리 교회의 사명, 성경의 권위, 생활규범 등을 천명하였다.
(2) 6.25사변과 교회의 재수난 (1950-1953)
해방을 맞았으나 연합군은 38선을 그어 남과 북을 갈라놓았다. 1950년 6월 25일 미군이 전면 철수해버린 남한 땅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불시에 남침을 감행하여 서울을 빼앗기고 부산에 임시수도를 설치하는 위기일발의 전황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였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국사회는 목불인견의 참상과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성결교회는 불타버린 교회가 27교회, 무너진 교회가 79교회였고, 순교한 교직자가 20여 명, 행방불명된 교직자가 20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부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서울에 남아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고 있던 당시 총회장 박현명 목사, 이 건 교장, 박형규 교단총무, 김유연 교수, 최석모 교수, 유세근 목사 등, 실로 교단의 중추인물들이 체포되어 북으로 납치당했고, 전남 도서지방의 전도의 어머니였던 문준경 전도사는 모래사장에서 학살당하였고,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 이판일 장로의 일가족 13명을 포함한 성도 48명과 전북 정읍 두암리교회 김용은 목사의 일가 23명, 충남 논산 병촌교회 성도 66명이 집단학살, 순교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3) 환도와 교회발전 (1953-1959)
성결교회는 피난지 부산에서도 신학교를 개교하여 전도자들을 양성하였고 1953년 수도가 서울에 환도함에 따라 신학교도 서울로 복귀하였다. 이 때, 철수했던 동양선교회(O.M.S)가 6.25사변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한국성결교회의 파괴된 교회당 재건사업과 구호사업으로 교회복구발전을 도왔다. 1957년은 성결교회가 창립된지 50주년이 되는 희년의 해이다. 전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성결교회는 희년기념사업 준비위원회를 1954년에 조직하고 총력을 기울인 결과 놀라운 기념사업이 완성되었다. 기념사업은 복음의 발상지인 무교동교회 대지에 2층으로 희년기념관을 건립하는 일과, 기념출판도서의 발행과, 희년기념전도대 구성이었다. 특히, 희년기념전도대 대장에 부흥사 이성봉목사를 선임하여 전국 순회하며 전도하게 하였고 이를 통하여 교세가 확장되어갔다.
(4) 교단분열 (1960-1965)
60년대 성결교회에 연합기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N.C.C(기독교연합회)와 N.A.E(복음동지회)에 함께 가입되어 있던 성결교회에 N.C.C 용공 문제 시시비비가 일어났다. 1961년 제16회 총회에 건의된 N.C.C 탈퇴안이 부결되자 이에 N.A.E 인사들이 퇴장하여 보수총회’를 조직했다. 총회는 연합기관(N.C.C) 탈퇴를 서면으로 결의를 했으나, 보수측은 마침내 그해 12월 19일에 부산동광교회에서‘예수교대한 성결교회’를 조직하고 I.C.C.C에 가입함으로써 교단은 분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성결교회는 기성과 예성이라는 두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5) 합동운동과 교회성장 (1965-1977)
교단의 분열을 마음 아파하던 이명직목사가 마침내 기성, 예성 양측 전국교회에 ‘성결교회 형제 자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송함으로써 합동운동의 불길이 당겨졌다. 그 요지는 기성이 우리의 요구대로 N.C.C를 탈퇴했으니 예성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무조건 합동하자는 뜻이었다. 마침내 1965년 7월 23일에 서울 아현교회에서 역사적 합동총회를 성취하였다. 그 후 1차, 2차 합동운동이 일어났고 꾸준히 교세가 신장됐다.
(6) 성결의 빛을 아시아에 (1977-1986)
1977년, 교단은 창립 70주년을 맞아 질적, 양적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1977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2박 3일 동안 연인원 37,900명이 모인 기념대회에서 선교백서와 교단교육 제1차 5개년 계획서가 발표되었다. 또한 1979년 9월 15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지하1층 지상10층의 연건평 1천평 규모의 기념회관인 성결회관이 봉헌되므로 총회본부는 물론 성결의 빛을 아시아에 비취게 하는 교육과 선교훈련 센터가 되었다. 교회의 성장에는 선교와 교육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본 교단은 1970년대에 구체적인 교육계획을 시도하여 계단공과와 각급 교재가 계속 발간되므로 교단 교육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교단 교육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86년에는 교육과정을 '성결한 삶’으로 전면 개편하였다. 교단 70주년 기념사업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국내 전도와 함께 해외 선교 확장 계획이 있는 선교백서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77년 4월 총회에서 해외선교위원회를 조직을 결의하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선교사 파송, 토착교회 및 신학교 설립, 현지 교역자 양성, 현지교회 지원정책 등을 채택하였고 1981년에는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40여국에 33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6개 현지인 총회(네팔, 필리핀, 러시아, 케냐, 카메룬, 멕시코)를 조직하였다. 1988년에는 선교사 훈련원을 개원하여 선교사를 훈련하고 있다.
(7) 세계 속의 성결교회 (1987-2000현재)
70주년 기념사업을 통해 선교와, 교육면에 괄목할만한 발전을 가져 온 본 교단은 80주년을 맞아 새로운 비약을 위하여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단행하였다. '80년의 사중복음, 세계 속의 성결교회'를 표어로 1987년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류관순 기념관(80주년 교회음악합창 연주회)과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기념대회 및 80주년 기념 연극제), 그리고 충무교회(교육대회 및 교역자 세미나)와 독립문교회(선교대회 및 평신도대회)와 성결회관(80주년 역사자료 전시회)에서 기념대회가 거행되었는데, 특히 교육대회에서는 교단 교육 제 3차 10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온누리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정책이 발표되었다. 또한 교단창립 90주년을 맞이하는 1997년에는 "90년의 사중복음 세계 속의 성결교회"라는 표어를 가지고 교단의 모교회인 중앙교회와 연합하여 기념예배를 드렸다. 1997년 국내선교위원회가 창립되었다. 교단 창립 100주년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성결교회가 세계적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한국성결교회의 안정적인 발전과 성장이 요청되며, 국내 교회 기반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인식아래, 1997년 9월 총회에서 "국내선교위원회" 조직이 허락되어 그 해 12월 중앙성결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이만신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국내선교위원회가 1998년 9월 총회에서 총회의 항존부서로 승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선교위원회의 헌의를 받아드려 국내선교 창구단일화가 가결되었다. 1999년 9월 제 3회 국내선교위원회 총회에서 임형재 목사가 제2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국내선교위원회는 국내선교 활성화를 통한 교단발전을 기하는 기구로서의 새로운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1998년 I.M.F의 여파로 국내가 혼돈에 빠지는 국난에 우리 교단은 민족과 한국교회의 대각성과 한국교회의 영적회복운동을 주창하였다. 1998년 3월 25일 "성결인대회"는 "이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라는 주제로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3만여 성결가족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통해서 모든 기독교인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고, 성결성 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중심이 되는 민족 대화합과 도약을 기원하고, 본 교단이 민족구원과 세계선교의 역할을 최대화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기로 하였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2007년 5월 30일로 교단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위해 100주년기념대회를 2007년 5월 27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하며 새로운 100년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