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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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文藝峰, 일본어: 林丁元, 1917년 1월 3일 ~ 1999년 3월 26일)은 한국의 영화배우이다. 본명은 문정원(文丁元)이다.
[편집] 생애
191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고향은 함흥이되 출생지는 서울이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유랑극단에 흘러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무성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주인공 뱃사공의 딸 역을 맡아 나운규와 공연한 것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후 청초한 이미지로 '화형(花形)', '백합꽃'이라는 별명을 달고 193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서 자리 잡는다.
남편인 극작가 임선규와는 1933년 결혼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임선규가 친일 활동을 하면서, 문예봉도 전쟁을 미화하거나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선동하는 어용 영화에 대거 출연함으로서 친일 예술 행위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목록 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는 친일 영화 단체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기과 사원이었고, 총 9편의 친일 영화에 출연했다[1].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에 가입했다가 1948년 월북하여 《내 고향》(1949)을 시작으로 《빨치산 처녀》, 《성장의 길에서》, 《다시 찾은 이름》 등 극영화에 출연했고, 한국 전쟁 때는 선무 공연으로 참전했다. 1952년 북조선 최초의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 사이에는 외부에 드러난 활동이 전혀 없는데, 이 기간 동안 숙청당한 상태였다는 설이 있다. 1965년 《조선영화》 4월호에 게재한 수필에서 스승이자 동료 배우였던 나운규를 지나치게 찬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복권되어 영화 《춘향전》(1980)에 '월매' 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8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묘지는 애국렬사릉에 마련되어 있다[2].
[편집] 참고자료
- 조영복 (2002-09-10). “임선규와 문예봉 - 극작가와 배우, 엇갈린 부부의 운명”,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1503.
- 조영복, 월북지식인들의 행로(6) - 임선규 《조선일보》 (2001.2.4)
[편집] 주석
- ↑ 《컬처뉴스》 (2005.9.2)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친일영화편/ 인민배우 문예봉, 〈자유만세〉 최인규도 포함
- ↑ 《조선중앙통신》 (2003.5.22) 조선영화의 력사적 인물 - 문예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