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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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EB-66 디스트로이어 1대와 F-105 썬더치프 4대가 월맹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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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있는 베트콩 캠프
불타고 있는 베트콩 캠프
미군 병사가 베트콩을 찾아 가택을 수색하고 있다.
미군 병사가 베트콩을 찾아 가택을 수색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 찌엔짜잉 비엣남, 戰爭越南)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9년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조선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다시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정령하고 남베트남 정부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전쟁 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인 150만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사망자 6만여명,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출처 필요] 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고, 한국군의 전쟁범죄중 하나인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역사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지면서 그 피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목차

[편집] 배경

[편집] 1949년까지의 배경

한무제가 복파장군 마원을 보내 베트남 지역을 원정한 이래,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후 938년까지 천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938년 전쟁끝에 중국에서 독립한 이래 베트남은 재복속을 노리는 몽골, 명나라와 계속 전쟁을 벌여왔다. 1789년에 하노이까지 진격해 온 청나라 군대를 섬멸한 것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국수호의 일화이다. 그리고 1802년 그 동안 반목하던 남부의 찐 왕조가 북부의 응웬 왕조에 통합되어 현재 베트남의 영역을 이루게 되었다.

베트남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피해갈 수는 없어서, 185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는 무력을 통해 인도차이나 전체(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 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웠다. 그러나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은 끊이질 않았다.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한 베트남 청년 호치민은 종전회담이 열리던 베르사이유 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하려 했으나, 참석은 거절되었고, 그는 식민지를 고수하는 자본주의 열강보다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새롭게 탄생한 소련코민테른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의 비시 정권은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다. 1941년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성향의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이 창립되었고, 베트남 민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호치민은 보응웬지압을 군사적 지도자로 임명하여 일본군을 게릴라전으로 상대하고 촌락을 중심으로 베트민의 세력을 확장하는 전략을 폈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베트민의 훈련과 무장은 미국의 전략사무국(OSS)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 말기가 되자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세우고, 아예 비시정부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켜 자신의 괴뢰정부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바오 다이가 베트남왕국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고, 일본은 베트민에게 행정권을 넘겼다.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 다이는 즉각 퇴위하였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포츠담 회담의 결과에 따라 베트남은 중국과 영국에 의해 다시 분할점령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영국과 중국은 이전의 지배자였던 프랑스의 설득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프랑스는 바오 다이를 내세워 사이공에 괴뢰정권인 베트남왕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맞서 베트민은 북부의 하노이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곧 베트민과 프랑스군은 치열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편집] 1950년 이후

베트민 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해 제네바에서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맺은 휴전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프랑스군만 철수시킴으로써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를 틈타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55년 남베트남에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 정부를 세웠다. 남베트남 고딘디엠 정부의 부패가 계속되고 정부가 가톨릭 교도들로 구성된 테러조직을 만들어 불교를 탄압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사회주의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남베트남의 미군 주둔 병력도 계속 증가되었다.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전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것을 염려한 미국은 미군 주둔 병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비밀 군사작전을 통해 북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편집] 통킹 만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통킹 만 사건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 지역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64년 8월 4일 '통킹만 사건'을 만들어낸다.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 밖 공해를 순찰하던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건을 말한다. 2005년 10월 뉴욕 타임즈에는 통킹만 사건이 조작된 사건임을 시사하는 기사가 실린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의회의 인준을 받아 베트남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국의 구축함 선장은 어뢰정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통킹 만 사건 전날 미군이 북베트남 영토를 폭격했던 사실이 미국 국방성의 기밀문서를 통해 밝혀져 미국의 도덕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편집] 베트남 전쟁

베트남 지역에 미군이 상륙하기 시작하고 이에 맞춰 북베트남군이 남하하면서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제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참여했던 한국 전쟁과 달리 미군을 주축으로 대한민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 타이, 뉴질랜드 등의 몇개 나라만이 전쟁에 참가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주요지역을 폭격하고 삼림에 은거한 게릴라들을 찾아내기 위해 곳곳에 고엽제와 제초제를 살포했다. 이에 맞서 북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통해 미군에 대항했다.

[편집] 평화협정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40억 달러 (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북베트남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해방전ㅅ건(베트콩 또는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그리고 남베트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북베트남이나 해방전선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다.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73년 1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이 철수했다. 외견상 남베트남의 경제와 군사력은 북베트남을 앞서 있었으나, 그것은 미국의 지원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북폭때문에 거의 원시경제 상태에 있었으나, 프랑스, 일본, 미국등의 세력과 싸워온 역전의 노장들이 지휘하는 군대의 사기는 높았다. 이에 반해 남베트남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대체로 프랑스 식민군대 출신이어서 국민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정치 또한 군부의 잦은 개입과 부정부패로 계속 혼란상태에 있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우의 영부인은 그 와중에서도 해외에서 사치품 관광으로 민심을 이반시키는데 한 몫했다.

[편집] 사이공 정부의 항복

휴전협상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군측은 남베트남군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남베트남 정치계의 혼란과 부패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고 군부의 정치개입도 여전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군대출신의 남베트남 고급 장교들은 그 와중에서도 보급물자를 민간에 사사로히 불하하고 심지어 적에게까지 처분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사이공 정부는 산소마스크를 떼어넨 식물인간의 꼴이었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미국의 정계가 소용돌이쳐서,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군은 무력통일을 결심했다.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군이 중부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남베트남군은 곳곳 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북베트남군의 사이공 진격이 가까워옴에 따라 남베트남군이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구엔 반 티우가 이끄는 남베트남정부는 사이공 주변에 방어선의 구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북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241km 떨어진 다리아크 지방 중심지인 반 메 투오트를 공격한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저항없이 마을을 장악했으므로 남베트남의 북부 지역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수많은 탱크의 지원으로 북베트남군은 1973년 1월의 휴전선을 형성했던 타치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티우 대통령의 "전선사수"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없이 무질서한 퇴각만을 계속해온 남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부 절반을 북베트남군에게 포기했다.

3월말 현재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정보소식통에 의하면 군대의 절반이 도망중이고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공격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사이공은 패배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하노이측은 이런 와중에서 심리전을 병행하여 남베트남 정부의 권위와 지도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외면하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던 티우 대통령은 뒤늦게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남베트남을 지키자』고 호소했으나 이미 민심은 떠난지 오래였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북베트남군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계속된 반전운동과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띠엔둥이 이끄는 북베트남군이 중부남베트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남베트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1975년 3 월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북베트남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일사천리로 남하할때 부패했던 남베트남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조국을 탈출하고 있었다.

1975년 4월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한후 해외로 도피했고, 이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재야 정치인 두옹 반 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5년 4월29일 북베트남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중이던 남베트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사이공 정부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공격했다.이 와중에 남베트남군 제5사단은 북베트남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궤멸당했다.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 했다. 정오가 지나서 북베트남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9일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두옹 반 민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직후 해방전선이 중심이 되어 남베트남 공화국가 세워졌으나 (항복한 사이공 정부의 공식명칭은 베트남 공화국이었다), 이는 사실상 북베트남의 괴뢰정권이었다.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에 합의하여 베트남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편집] 결과

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접수한 후 대학살극이 벌어질 것이라는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양민학살혐의자를 제외하면 그다지 캄보디아와 같은 대규모 유혈보복은 없었다. 사이공 함락후 남베트남의 군인·경찰·공무원·지도층 인사들은 일정기간 수용소에서 사상개조학습을 받았을 뿐이었다. 사이공 정부의 최후의 대통령인 두옹 반 민은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다 후에 프랑스망명이 허용되었다. 1980년대에는 사이공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경제관료가 통일베트남의 부총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사이공 정부의 공군총사령관, 총리와 부통령을 지낸 응원 카오 키 (Nguyen Cao Ky)는 사이공 함락 이후 미국에 망명생활을하다 2005년 다시 고국에 돌아와 정착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라오스 또한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되었다. 이를 두고 도미노 이론이라고 한다.

한편 통일 이후 정치적 변화와 경제난이 겹쳐 많은 수의 보트피플이 생겨났다. 이들중에는 통일 후 베트남 민족주의의 고양에 따라 재산을 몰수당한 중국계 화교들이 다수 섞여있었다. 이들은 통일 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베트남을 탈출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많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 이유가 더 컸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중국캄보디아와 거듭된 전쟁으로 국방비부담이 증가한데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경제의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들을 정치적인 박해자라기 보다는 경제적 난민으로 보아 외면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 완화되고 개혁개방으로 베트남의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보트를 이용한 해외 망명자는 없어졌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명이라고 생각된다.[출처 필요]

[편집] 대한민국군 참전과 라이따이한 문제

대한민국은 1964년 베트남 지역에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의 요청 등에 따라 이뤄진 이 파병에서 대한민국은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실제 전투 경험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수많은 군인들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10만여명[출처 필요]이 넘는 사람이 부상과 고엽제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등 피해를 얻기도 했다. 한편 전쟁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군인들이 현지에서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 낳은 2세들인 라이따이한(Lai大韓, Lai Daihan)과 대한민국군 일부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부녀강간 [1]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양국 관계에 잠재적 문제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 단체에서는 그 이상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리도 있다.

1999년 이래 진보적인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편집] 주석

  1. http://www.hani.co.kr/h21/data/L000124/1pau1o65.html

[편집] 대한민국군의 참전과 문학

전쟁의 일반적인 참혹한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한반도의 역사적 유사성 때문에 참전했던 작가들에 의해 이 전쟁은 각종 문학, 영화, 만화의 소재가 되었다.


[편집] 문학

  • 《무기의 그늘》, 황석영
  • 《하얀 전쟁》, 안정효
  • 《머나먼 쏭바강》, 박영한
  • 《인간의 새벽》, 박영한
  • 《황색인》, 이상문


[편집] 영화 드라마

  • 《하얀전쟁》, 1992, 정지영 감독, 안정효 원작
  • 《머나먼 쏭바강》, 1994, SBS
  • 《알포인트》, 2004, 공수창 감독


[편집] 만화

  • 《저강은 알고 있다》, 이현세
  • 《황색탄환》, 김형배

[편집] 바깥고리

[편집] 참고문헌

  • 에세이 세계사, 현대편/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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