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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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方應謨, 1890년 ~ 1950년 8월)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아호는 계초(啓礎)이다.

[편집] 생애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광산업에 뛰어들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이 재력을 바탕으로 1933년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초대 사주로 활동했다.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을 맡기도 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어 끌려가다 1950년 8월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

한편,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친일 행위를 한 기록이 있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외희(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포함되었다.

방응모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이 일고 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2][3].

친형 방응곤으로부터 입양한 양아들 방재윤과 친아들 방재선을 두었으며, 이후 조선일보 경영을 맡았던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방재윤의 아들이다.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03-01). “방응모 :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편집] 주석

  1. 1950년 8월~알려져 있다.: 《오마이뉴스》(2002.7.8.) "누워서도 남쪽 하늘만 보십니다"6.25때 북으로 간 인사들의 최후
  2. 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
  3. "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신문》 (2001.3.30)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