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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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이지는 ‘서울의 남대문’인 숭례문에 관한 것이다. 개성 성곽에도 남대문이 있다. 그리고 신의주시에도 남대문 (신의주시)가 있다.
서울숭례문(서울崇禮門)
대한민국국보
지정 번호 국보 1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
제작 시기 조선 초기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이다.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1394년(태조 4년)에 처음 지어졌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의 현판들은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知: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의 중앙통로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목차

[편집] 역사

  • 1398년(조선 태조 7년) - 숭례문 준공
  •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1479년)에 중수.[2]
  • 1592년 5월 3일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으로 진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함정일까봐 여러 번 정탐병을 보낸 후 조심스레 흥인지문으로 서울 진입.[2]
  • 1907년 - 일본 왕세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3]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4]
  •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5]
  •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6]
  • 1996년 11월 -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 서울 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문화재위원 49명,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7]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8]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9]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고 한다.
  •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 2005년 11월 -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 2005년 11월 - 유흥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금지된 숭례문이 99년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다.[10]

[편집] 국보 1호 변경 논란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함락한 문으로서, 일본군의 조선 정벌의 역사적 상징물이라는 이유로 일제시대 때 보존되었으며,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다. 아울러 조선총독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열지 못했던 문을 모두 철거하였다.[출처 필요] 해방 이후에도 국보 1호로 남대문을, 보물 1호로 동대문을 지정하였다.

[편집] 변경 반대론

  •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다.
  • 문화재 가치에 대한 우열을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한데다.
  • 교체시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혼란을 초래한다
  • 재지정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 남대문이 좋다

[편집] 변경 찬성론

  • 남대문은 국보로서 대표성이 없다
  • 역사적 예술적 가치부족
  • 일제가 일방적으로 지정했기 때문

[편집] 갤러리

[편집] 주석과 참고자료

  1.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2. 2.0 2.1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성벽의 추억]", 중앙일보, 2007-01-18. 2007년 8월 26일에 읽어봄.
  3. 8·15 56돌 / 왜색 여전한 숭례문-日帝돌담에 포위된 '국보1호' 세계일보 2001-08-06
  4. 남대문에 덧씌운 '일제 잔재' 올가미를 벗기자 오마이뉴스 2005-11-10
  5. “남대문 ‘국보1호’ 지정은 역사적 수치” 내일신문 2005-11-08
  6. 「서울의 상징」 남대문이 1위/「가나아트」지 설문 경향신문 1994-11-15
  7. 시민·학생 상반의견/국보 1호 어떻게 할것인가 한국일보 1996-11-23
  8. '남대문 근접 감상' 계획 무산… 문화재委 "안전위협" 불허 동아일보 2000-02-09
  9. “숭례문 일제때 파괴될뻔 했다” 경향신문 2003-09-02
  10. 숭례문 활짝 열렸다-99년만에 중앙통로 개방...3일부터 출입 경향신문 2006-03-01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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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서울 성곽
정문: 숭례문(남) 흥인지문(동) 돈의문(서) 숙정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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