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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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생(淵男生, 634년 - 679년)은 연개소문의 아들이다. 당나라에서는 당 고조의 휘인 ‘연’을 쓰는 것을 피해서 천남생(泉男生)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자 원덕(元德).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장남. 9세에 음보(蔭補)로 중리소형(中裏小兄), 후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맡고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승진하였다. 665년(보장왕 24) 연개소문이 죽자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고, 후에 대막리지에 올랐다.
두 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전국의 성(城)을 순시하러 떠난 사이에 형제간을 이간시키려는 무고(誣告)를 믿은 두 아우에 의하여 왕명으로 소환당하였으나 불응하자, 아우인 남건이 형의 아들인 조카 헌충(獻忠)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자 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으로 피신, 거란[契丹]·말갈(靺鞨)과 결탁하는 한편, 아들 헌성(獻誠)을 당(唐)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당나라에서는 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고, 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파견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남생은 당나라의 특진요동대도독(特進遼東大都督) 겸 평양주행군대총관(平壤州行軍大摠管)·지절안무대사(持節按撫大使) ·현도군공(玄菟郡公)에 임명되고, 가물성(哥勿城) 등 여러 성을 들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667년(보장왕 26) 당나라 조정에 소환되었다가 이적(李勣)과 함께 당나라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고, 이듬해에 신라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함락,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자신이 원했던 고구려 권력을 되찾지는 못하였다. 그후 당나라 조정에서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변국공(卞國公)등 큰 벼슬을 받고 안동도호부에서 머물다가 그곳에서 사망한다.
남생의 묘(墓)는 아우 남산(男産)의 묘지와 함께 중국 뤄양[洛陽] 남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지석(誌石)에는 관직(官職) ·품계, 조상에 관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동생 남건, 남산은 왕, 충신들과 함께 당나라로 붙잡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