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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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년~1895년)는 고종의 황후이다. 아명은 자영(玆暎)[1], 본명은 자영(紫英)[출처 필요], 본관은 여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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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출처 필요](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1][2]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1]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 흥선 대원군(헌의 대원왕)의 뜻에 따라 1865년 고종의 아내가 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 미국(신미양요, 1871년) 등과 같은 강화도에서의 군사 분쟁으로 나타났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국내적으로도 경복궁을 중건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는 등 전제 왕권 강화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민씨 척신 정권의 후원 하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중도 개화파가 형성되었다.[출처 필요]
1882년 임오군란으로 한때 충주로 피난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군란을 진압하고 흥선 대원군을 압송해가자 서울로 돌아왔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조정의 실력자이기도 한 자신의 친척들 상당 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생살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고(민영익만은 미국의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건짐) 심지어 자신의 개인 비서인 내관 유재현까지 살해되는 바람에 급진 개화파에 다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횡포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접근했으나 이를 우려한 영국 군함이 1885년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장악하고(거문도 점령 사건) 청나라도 흥선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등 제어 조치를 취하여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를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입국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5년 청나라의 전쟁에서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명성황후는 다시 러시아에 접근하려 했다. 이는 일본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와 “여우사냥”[3]이라는 이름으로 미우라 고로우가 주동한 시해음모로, 경복궁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되었다(을미사변). 당시 미우라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다.[3] 이때 미우라는 공문을 물어 앞날 일어난 일을 외부에 물었고, 외부(外部)는 그에 대해 군부에 질의하여 조선인이 일본인처럼 변복한 것이고 진짜 일본인은 없다는 증언을 한다. 사건에 가담하고 새로 군부 대신에 임명된 조희연이 일본을 위해 거짓 증언을 하고, 외부 대신 김윤식은 정황을 모른 채 그대로 답변하여, 미우라는 한국 외부와 군부로부터 일본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받아냈다.[3] 김홍집 내각은 스스로 서압(곧 수결)하여 내린 ‘대군주폐하’의 이름으로 내린 가짜 조서에서 “옛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했다”라고 하며, 서인으로 폐위시켰다.[3] 이때 서압한 이는 김홍집,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며, 탁지부 대신 심상훈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3]
명성황후의 폐위에 태자가 양위하겠다며 저항하자 다음날 “왕후”를 “폐서인”에서 “빈”으로 승격시켰다.[3] 폐위 조서를 받은 외국 공사는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하니,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3] 그 뒤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인 12월 1일(음력 10월 15일)에 그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다.[4]
그러나 아관파천이 일어난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를 역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4] 고종은 2월 13일 각종 조세를 탕감하고, 내각의 호칭으로 다시 의정부로 바꾸었다.
1896년 3월 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하였다. 그 뒤 국상 일정을 몇 차례 더 연기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고종이 새벽 4시와 새벽 6시 사이에 환구단에 나아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환궁하여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낮 12시에 왕후를 “황후”로 책봉하고, 낮 2시에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튿날인 10월 13일 황제는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였고, 13개조의 대사령을 조칙으로 발표했다.[5]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왕후”에서 “황후”로 추존된 뒤에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편집] 사진 논란
명성황후는 익히 알려진 대로 비운의 황후이다. 1895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2년 전에 일본군에게 시해됐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은 위의 명성황후의 생애를 참고하라). 그래서 사진의 진위 여부가 논란거리가 되곤 했다. 2006년에도 궁중여인의 사진을 놓고 명성황후의 사진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궁녀의 사진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서양인들이 프랑스 잡지에 한국의 궁중여인이라고 실은 잡지의 사진이 명성황후라는 사진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편집] 외국인의 평가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이를테면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의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6]
[편집] 같이 보기
- 인현왕후 : 명성황후의 5대조
[편집] 바깥 고리
- Information about Queen Min
- Queen Min of Korea — The "Last Empress"
- Queen Min of Korea: Coming to Power
- Modern Korean opinion piece on the event
- 미우라/이노우에 생가 및 당시 보도신문 외,일본인 신문기자관련
[편집] 주석
- ↑ 1.0 1.1 1.2 한영우 (2001-10-2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판 1쇄, 서울: 효형출판, 20쪽. ISBN 89-86361-57-4.
- ↑ 정교(鄭喬), 《대한계년사》병인(1866)년 고종 3년 기사.
- ↑ 3.0 3.1 3.2 3.3 3.4 3.5 3.6 한영우 (2001-10-2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판 1쇄, 서울: 효형출판, 39~63쪽. ISBN 89-86361-57-4.
- ↑ 4.0 4.1 한영우 (2001-10-2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판 1쇄, 서울: 효형출판, 64~82쪽. ISBN 89-86361-57-4.
- ↑ 한영우 (2001-10-2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판 1쇄, 서울: 효형출판, 154쪽. ISBN 89-86361-57-4.
- ↑ "왕비는 마흔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중략)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왕비의 주위는 온통 적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었다. 왕비가 그녀의 재능과 권력으로 조정의 고위관직을 친인척을 등용하여 거의 석권해버렸으므로 그녀에 대한 대원군의 반감은 엄청났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이인화 옮김/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