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가게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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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코지 원년(1556년)-겐나 9년(1623년)은 전국시대에서 에도 시대 초기의 영주이다. 도요토미 정권의 5대로 중 한 명이며, 에도 시대 데와 요네자와번(藩)의 초대 번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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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가문 상속
코지 원년 11월 27일(1556년 1월 8일), 에치고(지금의 니이가타현)에서 우에다 나가오 가문의 지도자였던 나가오 마사카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겐신의 친누나였으므로, 겐신의 조카에 해당한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아버지 마사카게가 죽자 카스가야마성(겐신의 본거지)에 들어가 겐신의 양자가 되었다. 에이로쿠 9년(1566년)의 관동 공격 때 처음으로 출진했다고 한다.
텐쇼 3년(1575년), 이름을 나가오 아키카게에서 우에스기 카게카츠로 바꾸고, 겐신으로부터 단죠쇼히츠의 관직을 받았다.
텐쇼 6년(1578년), 겐신이 죽자 가문의 상속권을 둘러싸고 카게카츠와 마찬가지로 겐신의 양자였던 우에스기 카게토라(호죠 우지야스의 7남)과 대립했다. 겐신의 유언이라며 카스가야마성을 점거하고 오다테에서 저항하던 카게토라와 싸운다. 양자간의 화해를 도모했던 양할아버지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죽이고 텐쇼 7년(1579년) 카게토라를 자살로 몰아넣는다. 텐쇼 8년(1580년)에는 에치고의 호족들도 카게카츠를 따르게 되어, 겐신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편집] 오다 가문과의 싸움
텐쇼 9년(1581년), 북에치고의 시바타 시게이에가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데다가 시바타 카츠이에가 이끄는 오다군이 엣츄까지 쳐들어오는 등 우에스기 가문은 위기에 부딪혔다.
텐쇼 10년(1582년)에 오다군은 엣츄를 완전히 제패하여 우에스기 가문은 멸망 직전으로 몰렸지만, 6월 2일에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문 상속 분쟁과 오다 가문의 침공으로 우에스기 가문의 힘은 겐신 시대에 비해 크게 쇠퇴했다.
[편집] 도요토미 시대
노부나가가 죽은 후 당시 권력의 공백상태에 있던 북시나노를 침공하여 일부를 손에 넣었다.또 텐쇼 13년(1585년)에 사나다 마사유키를 일시적으로 종속시키기도 했다.
텐쇼 14년(1586년) 6월, 노부나가가 죽은 후 대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가문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 때 엣츄(우오즈와 마츠쿠라 등)와 코즈케 등의 영지를 포기했지만, 대신 사도와 데와를 공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또 이무렵 카게카츠는 오기마치 천황을 알현하여 좌근위소장에 임명되었고, 텐쇼 16년(1588년)에도 쿄토로 올라가 종3위 참의 중장에 임명되었다.
텐쇼 15년(1587년) 반역을 일으켰던 시바타 시게이에를 처단하고 텐쇼 17년(1589년)에 사도의 혼마 가문을 토벌하여 사도를 평정했다. 텐쇼 18년(1590년) 히데요시가 호죠 가문을 정벌할 때에도 참전했다.
텐쇼 20년(1592년) 6월 6일에서 9월 8일까지 가신 타카나시 요리치카 등을 보내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이 때 최전선기지로 웅천왜성을 축성했다.
케이쵸 2년(1597년) 5대로 중 한 명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5대로가 되었다. 케이쵸 3년(1598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이즈로 영지가 옮겨졌고, 120만석으로 녹봉이 올라갔다. 계속 영유할 수 있도록 인정받은 옛 영지는 사도와 에치고의 일부 그리고 혼죠 시게나가가 모가미 요시아키와 격렬한 쟁탈전 끝에 빼앗은 쇼나이 지방 등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다테 가문의 영지였던 데와의 오이타마 지방, 무츠의 다테군(郡), 시노부군, 캇타군, 다테 마사무네의 정복지였던 아이즈 지방 등이었다. 또 각 지방은 산지로 단절되어, 지금도 교통이 불편한 고갯길로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가장 마지막에야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의 영지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돌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카게카츠가 이곳에 배치된 것은 실각한 가모 가문 대신 일본 동북부의 여러 영주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카게카츠는 다테 가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중신 나오에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의 영지를 주어 요지 요네자와성에 배치하였고, 최전선이었던 시라이시성에 아마카스 키요나가, 후쿠시마성에 혼죠 시게나가, 토젠지성에 시다 요시히데를 각각 배치했다.
[편집] 아이즈 정벌
케이쵸 3년(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미츠나리와 이에야스 사이의 대립이 깊어지게 된다. 우에스기 가문의 가로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시다 미츠나리와 친밀했기 때문에 카게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하게 된다. 케이쵸 5년(1600년) 2월에 카게카츠는 여름까지 영지 안의 여러 성들을 보수하도록 명령했다. 3월에 와카마츠성(츠루가성)이 협소하다고 생각해, 아이즈 분지의 거의 중앙에 위지한 코자시에 새로 성을 쌓도록 했다.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쿄토로 올라와 영토 내의 여러 성을 보수한 것에 대해 해명하도록 소환명령(이 소환명령은 카게카츠를 제거하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을 내렸다. 이때 카게카츠는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에야스를 도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카네츠구의 편지를 받고 격노한 이에야스는 대군을 이끌고 카게카츠 토벌을 위해 출진했다. 카게카츠는 코자시성 공사를 강행하다가, 6월이 되자 공사를 중단하고 이에야스군에 응전했다. 7월 우에스기 토벌을 위해 이에야스가 쿄토를 비운 사이에 미츠나리가 거병하여, 이에야스가 미츠나리와 싸우기 위해 서쪽으로 가자 아이즈에서 출격, 동군(이에야스 편의 군대)에 가담해 있던 다테 마사무네나 모가미 요시아키 등과 싸웠다. 그러나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츠나리의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12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항복했다.
케이쵸 6년(1601년)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쿄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사죄하여 우에스기 가문은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영지의 대부분을 몰수당하고 그 중 요네자와군, 시노부군, 다테군의 3군(郡)만이 남겨졌다. 카게카츠는 데와 요네자와번(藩)의 초대 번주가 되어 30만석의 녹봉을 받게 되었다.
[편집] 에도 시대
카게카츠는 나오에 카네츠구와 협력하여 요네자와 번의 마을을 건설하고 법제를 정비하는 등, 지배체제 확립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무렵 우에스기 가문은 영지는 대폭 줄었음에도 가신 수를 거의 줄이지 않아, 이 때문에 이후 우에스기 가문은 몇번이고 재정난에 부딪혔다.
케이쵸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일어나자 도쿠가와군의 선봉이 되어 활약했다.
겐나 9년(1623년) 3월 20일 요네자와에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적자(嫡子)인 사다카츠가 뒤를 이었다. 묘는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 있다.
[편집] 인물됨과 일화
- 양아버지 겐신을 훌륭한 무장으로서 존경하고 있던 카게카츠는, 자신의 기량이 겐신에게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겐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행동했다고 한다. 카게카츠가 병석에 눕게 되었을 때, 출가하여 소신(宗心)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겐신이 일찍이 쿄토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는 법명이었다.
- 그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언젠가 기르던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제법 그럴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둥 카게카츠를 흉내내는 것을 보고, 그것이 너무 웃겨 카게카츠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가 평생 단 한번 보인 미소였다고 한다.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했을 때,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와서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한다.
- 꽤 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쿄토의 후시미성(또는 오사카성)에서 여러 영주들을 불러모아 저녁 만찬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 연회장에 별난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마에다 토시마스가 끼어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토시마스는 말석에서 일어나 원숭이 가면을 쓰고 천을 뒤집어 쓴 채, 부채를 펄럭이면서 온몸과 손발을 떠는 등, 영주들 앞에서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토시마스는 나란히 앉아 있는 영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릎 위에 앉아 원숭이 흉내를 냈다. 그러나 영주들은 연회의 여흥으로 여기고 꾸짖는 자도 화를 내는 자도 없었다. 그런데 토시마스는 카게카츠 앞에 오자 그 위풍에 압도되어, 도저히 무릎에 앉을 수 없었다고 한다. 토시마스는 그때 카게카츠의 의연한 인물됨을 순식간에 꿰뚫어보고, 훗날 '천하가 넓다고 해도, 진정 내 주군으로 모실 만한 분은 아이즈의 카게카츠님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외삼촌이면서, 양아버지이기도 했던 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다.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보는 시각으로부터, 실제로는 험악한 관계였다고 보는 시각까지 갖가지 견해가 있다. 겐신이 카게카츠, 카게토라 중 어느쪽도 후계자로 명확히 지명하지 않은 채 급사했기 때문에, 겐신이 어느 쪽을 후계자로 생각했는지와도 관련된 문제이다. 또 카게카츠의 친아버지 마사카게가 겐신과 대립하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겐신에 의한 마사카게 암살설이 있는데, 그와 비슷하게 카게카츠에 의한 겐신 암살설도 있다.
- 카게카츠가 단죠쇼히츠 직을 겐신으로부터 물려받을 때의 편지에, 겐신의 필적이 카게카츠의 필적과 같았기 때문에, 카게카츠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뒷날에 꾸며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 적도 있다. 그러나 우에스기 카게토라도 아시나 모리우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게카츠를 쇼히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카게카츠가 단죠쇼히츠 직을 계승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편집] 함께 보기
- 우에스기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