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제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과거 제도(科擧制度)는 중국과 한국 등에서 과거라는 시험을 치뤄서 관리를 뽑는 제도이다.
목차 |
[편집] 과거 제도의 기원
중국에서는 이미 주나라 시기에 과거를 실시했다고 하나 실제 관리를 뽑기 위해 과거를 치르기 시작한 것은 수나라 때 부터이다. 과거 제도는 경전에 대한 이해와 학문의 정도를 가늠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서 유교와 관련이 깊다.
[편집] 중국의 과거 제도
수 문제는 한나라 멸망 이후 400여년간 계속 되었던 남북조 시대의 분립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중국을 재통일 하였고 새로운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를 시행하였다. 과거 제도는 지역별로 할거하고 있던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이후 당나라 시대에 정기적인 과거가 시행되었고, 송나라에 이르러 과거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던 것에서 보이듯 당나라는 외교관계 개선의 목적으로 주변 국가의 인재들에게 과거 시험의 응시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중국의 과거 제도는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편집] 한국의 과거 제도
[편집] 과거 제도의 도입
신라 하대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과거를 도입하였으나 신라의 신분 제도인 골품제의 유지로 관리 발탁에는 한계가 있었다. 본격적인 과거제도의 도입은 고려 광종 시기에 이루어 졌다.
[편집] 고려 시대의 과거 제도
고려의 건국 세력은 신라 하대에서 후삼국 시기에 형성된 지역 유력가인 호족들이었고 고려 건국 이후 귀족이 되었다. 이미 고려의 태조인 왕건 시기 부터 귀족은 왕권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이었다. 고려의 광종은 귀족들에 대한 견제를 위해 과거를 도입하였으나 결국 고위 귀족의 자식들을 과거 없이 관리로 등용하는 음서 제도를 병행하게 되었다. 고려 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유교적 이상에 의한 정치의 실현이 강조되었고 모든 관리를 과거를 통해 선발하자는 주장이 거세지게 되었다.
[편집]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
조선은 주자학을 이념으로 하는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되어, 이들의 이상대로 모든 관리를 과거를 거쳐 선발코자 하였다. 이 후 조광조의 주장에 의한 천거제인 현량과가 도입되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조선 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었다.
- 과거의 종류
[편집] 과거 제도의 폐단
과거 제도에 대한 폐단은 조선 중기 이후 지속적으로 거론되었다.
우선 과거를 치르는 장소와 응시자의 수가 문제가 되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학자였던 박지원은 자신의 글 <하북린과>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려니 응시한 사람만 수만 명인데 과거장에 들어갈 때부터 서로 밀치고 짓밟아 죽고 다치는 사람이 사람이 많았다"[1]고 기록하고 있다. 수만명의 답안을 서너명의 관리가 채점하다보니 늦게 재출하는 사람의 답안은 사실상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과제를 빨리 확인하고 재빨리 답을 써 내기 위해 서너명이 조를 짜서 전쟁 치르듯 과거 시험에 응했다고 한다. 먼저 하인들이 몸싸움을 불사하며 좋은 자리를 잡아내면 좋은 글귀로 글짓는 사람이 글을 짓고 함께온 대필가가 글씨를 써서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2]사실상 대리 시험이 성행했던 것이다.
지방 배분도 큰 문제거리의 하나였다. 서북(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 각주
[편집] 다른 나라의 과거 제도
중국에서 유래된 과거 제도는 유교와 함께 인근 지역에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