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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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황(李斗璜, 1858년 ~ 1916년)은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서울 출신으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3년 말단 무관직에서 시작하여 1889년 흥해군수와 1894년 장위영 참령관(정3품)에 임령되는 등 능력을 인정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함께 평양에 진군한 것을 계기로 친일파 무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하면서 양주목사로 승진했고, 일본의 입김으로 창설된 훈련대의 제1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일본과 대립하면서 갑오개혁을 무력화시킨 뒤 친러파를 등용하면서 훈련대마저 해산하려 하자, 일본은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두황은 경복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에 우범선 등과 함께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담했다.

을미사변 관련자 가운데 이주회와 박선 등은 사형 당했고,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가운데 우범선은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두황과 구연수는 14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살아남아 1907년 대한제국 순종 즉위 후 귀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중추원 부참의와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도 서훈 받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 중인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작성한 진중일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가 발굴된 바 있다[1].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주석

  1. 《예스TV》 (2007.2.1) 장흥동학 전사자 1,510명 새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