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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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는 만주 가운데 특히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젠다오(중국어 간체: 间岛, 병음: Jiāndǎo)’보다는 ‘동북3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 사람 가운데 일부는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한중 영토분쟁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는 백두산을 경계로 서간도, 북간도, 동간도, 연해주, 심요지역 등으로 나뉜다.

[편집] 역사

간도는 고구려발해의 영토였다. 발해는 926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멸망해 936년 병합되었다. 뒤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들어섰을 때 고려의 윤관1107년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세웠다. 9성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서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를 참고하여 두만강 이북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성은 고려 예종 때 여진에 돌려주었다. 공민왕요동을 정벌하려 했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616년 누르하치는 요동에 후금을 세웠고, 뒤에 이름이 으로 바뀌었다. 1668년 청나라 정부는 봉금이라 하여 한족이 만주로 드나드는 것을 금했는데, 이는 한족이 다시 나라를 세워 청이 멸망하면 만주로 도망가서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조선도 만주로 사람이 다니는 것을 금하여 만주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1712년 조선과 청은 백두산 정상에 국경을 짓기 위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19세기 말 고종 때 한반도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몰래 간도로 이주했다. 청과 조선은 각각 1878년과 1881년에 봉금을 풀었다. 그 시기부터 청과 조선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토 문제가 생겼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청과 조선의 국경을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청이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는 한편 조선은 이를 비석에서 더 가까운 송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했다. 1902년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은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주축으로 하여 청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청나라는 서구 세력 때문에 이를 신경쓰지 못했다.

1906년 4월 18일 일본제국은 간도를 점령하였다. 1909년 일본과 청 사이에 간도 협약이 맺어져서 일본은 만주철도의 관리권을 갖고 청나라는 간도의 영유권을 가졌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이를 반대하였다. 1910년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뒤에 많은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는데, 일본 제국은 간도에 있는 조선인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 경찰을 두어 순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일제는 만주에 만주국을 세웠는데, 간도는 '간도성'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있었고 옌지가 성도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받아들여 간도 협약을 비롯하여 1941년 이전에 맺은 조약을 모두 무효로 했기때문에 간도는 대한민국과 중국간 미해결된 영토분쟁 지역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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