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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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I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여 대서양으로까지 로마의 세계를 넓혔다. 로마의 장군인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치뤄 승리,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으며 사회와 정치 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라틴어: Dictator Perpetua)이 되어 이미 기울어진 공화국의 정부를 중앙집권화하였다. 카이사르가 살해되자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쓸려 공화정은 저물고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제정 로마 시대가 개막한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유소년 시절의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서깊은 로마의 귀족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1]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오래되고 유서깊은 가문임에도 지금까지 세명의 집정관만을 배출했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아들과 같은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는데 법무관을 지냈고 아시아 속주의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권력있는 처남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집정관이 수차례 배출된 역시 유서깊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의 집은 로마의 하층민들의 구역에 검소한 집이었고 카이사르의 가정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년시절에 대하여는 기록이 별로 없다.
기원전 85년 아버지가 죽자, 카이사르는 16살에 가장이 되어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재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의 양육에 힘썼다. 이듬해 그는 아버지때부터 약혼이 되었던 기사계급 출신의 코수티아와 파혼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인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다. 그때 술라가 그리스로부터 이탈리아로 돌아와 마리우스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술라는 종신독재관이 되었고 반대파에 대한 살생부를 만들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술라의 살생부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인 카이사르도 들어있었다. 술라는 카이사르도 처형하려 했으나 그가 아직 어리고 아무런 정치활동 경력이 없었기에 신전의 여사제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옹호를 받아 처형은 면했다. 그 대신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킨나의 딸과 이혼을 요구했으나 카이사르는 거절하고 로마에서 도망쳤다.
[편집] 청년기의 카이사르
로마에서 도망친 카이사르는 기원전 81년 소아시아 속주의 총독 미누키우스의 휘하에 지원입대하였다. 당시 레스보스 섬은 로마에 반기를 들었는데 카이사르는 레스보스 공략을 위해 비티니아에서 군선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는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의 궁정에서 한동안 머물었고 왕의 동성애 상대일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으나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레스보스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공을 세우고 "시민관"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기원전 78년 그는 킬리키아에서 잠시 복무하다가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귀환한 카이사르는 변호사로 나섰다. 뇌물과 부패로 유명했던 술라파의 전직 속주총독 돌라벨라를 고발하면서 정열적인 변론으로 유명해 졌지만 결국 실패했고 때마침 반-술라파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다시한번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학부중 하나였던 로도스 섬의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75년 로마를 떠났다.
로도스 섬으로 여행하던 중 카이사르는 에게 해에서 킬리키아 해적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었다. 이때 해적이 몸값으로 20달란트를 요구했는데 카이사르가 화를 내면 50달란트로 오히려 올린 일화가 유명하다. 몸값을 지불하고 해적에게 풀려난 카이사르는 밀레투스로가서 자비로 선단과 병사를 조직하여 해적을 모두 소탕하고 복수했다. 이때 소아시아의 총독은 해적의 처분을 카이사르에게 일임했는데 카이사르는 해적들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로도스에서 1년간 공부하고 카이사르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가 일으킨 전쟁으로 비티니아에서 잠시 복무하다가 얼마안가서 로마로 돌아왔다.
[편집] 대기만성의 카이사르
다시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로마신전의 제사장과 군단 대대장에 선출되었으나 이어서 벌어진 스파르타쿠스 전쟁이나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에도 전혀 참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전혀 무명의 대대장에 불관한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31세에 재무관에 선출되어 비로소 로마 공직의 첫걸음을 뗀 것인데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가 기원전 70년에 공동집정관으로 당선되고 키케로가 변호사로 명성을 날린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
기원전 69년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와 첫번째 부인 코르넬리아가 죽었는데 카이사르는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마리우스를 옹호하여 술라파의 적대감을 부채질했다. 이후 그는 히스파니아에서 복무하고 돌아와 기원전 65년 행정관에 취임했고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했다. 안찰관 시절 카이사르는 대규모 검투사 대회를 열고 마리우스의 승전기념비를 다시 세웠는데 이는 그가 점차 평민층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카이사르는 37세에 로마의 "최고제사장"이 되었고 원로원 의원인 라비리우스를 37년전에 일어난 호민관 사투르니누스살해사건으로 고발했으나 실패했다. 같은해 카틸리나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는데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에 의해 주동자로 몰렸으나 유쾌한 재치로 위기를 넘기고 카틸리나에 대한 사형을 반대했다. 당시 쟁점은 비상시국일 경우 로마시민에 대한 재판과 항소권없이 사형집행이 가능한 것인가 였는데 카이사르는 비상시국이라도 재판권과 항소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카토나 키케로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듬해 그는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이듬해에는 전직법무관으로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 총독으로 떠났다. 속주로 떠나기 전 보나여신의 제사스캔들이 일어나 폼페이아와 이혼했다.[2] 또한 카이사르는 막대한 부채로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서 히스파니아로 떠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당대 로마 최고의 부자인 크라수스가 보증을 서주어 겨우 떠날수 있었다고 한다.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 연안까지 로마에 복속시키고 합리적인 조세정책으로 총독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원로원에 개선식과 이듬해 집정관직에 입후보 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의 권력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우려한 원로원은 이를 둘다 허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직에만 출마했는데 원로원은 강력한 경쟁자를 내세워 카이사르를 반대했다.
[편집] 첫번째 집정관직과 삼두 정치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의 당선을 위하여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폼페이우스가 집정관 당선을 도와주면 카이사르는 퇴역병을 위한 토지배분을 추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크라수스도 협력관계에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제1차 삼두정치이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인 비불루스와 함께 무난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집정관이 된후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협약에 따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을 약화를 꾀했다. 카토와 키케로와 같은 원로원파는 이에 저항했으나 퇴역병과 민중을 선동하여 압력을 가한 삼두정치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공동집정관인 비불루스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카이사르는 사실상 남은 임기를 혼자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로마인들은 이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을 지냈다...로 표현할 정도였다.[3]
[편집] 갈리아 정복
- 이 부분의 본문은 갈리아 전쟁입니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일리리쿰의 두개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전쟁 자체는 8년째인, 기원전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52년 알레시아 공방전으로 실질적 마무리되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후 갈리아는 거의 완벽하게 켈트족적인 전통과 단절하고 로마화 되었고 500년동안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이 과정을 《갈리아 전쟁기》라는 걸작으로 남겼다.
[편집] 삼두정치의 몰락과 내전으로 치닫는 로마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와 다시 회합을 가졌다. 세사람은 삼두 정치의 전략을 재수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듬해의 집정관직 선출을 약속받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 속주의 속주 지휘권을 갖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그 이듬해에는 시리아 총독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다가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연결고리인 율리아가 죽고 삼두정치의 한축이 무너진 상태에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기 시작했다.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다시한번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을 마무리한 다음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에 취임할 계획이었으나 원로원파는 이를 막으려 했다.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에게 히스파니아 총독임기를 5년더 연장하고 카이사르보다 군사적으로나 권력적으로 더 우위에 두려고 했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머물면서 자신의 편을 최대한 이용해 원로원파에 맞서 법률투쟁을 벌였다. 기원전 52년에서 51년까지 카이사르는 자신의 임기를 연장해 줄 것, 최소한 폼페이우스도 자신과 동시에 군대를 해산하여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했으나 기원전 50년의 집정관직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원로원파는 강경했다.
기원전 50년 12월 1일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가 임기가 끝나는 날짜에 지휘권을 내놓아야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같은 날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그러자 카이사르파인 호민관 쿠리오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이튿날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고 있다고 선동하여 호민관 쿠리오의 결정을 뒤집은 다음, 원로원의 동의 없이 폼페이우스에게 칼을 넘겨주고 이탈리아의 군사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12월 10일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에 군대의 해산을 명하고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반역자로 간주한다는 법안을 내놓았고 이에 대해 호민관 안토니우스는 평민집회에서 연일 카이사르파를 선동하여 이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 양측의 긴장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발전해갔다.
해가 바뀌어 기원전 49년 1월 1일 카이사르는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세운 갈리아에서의 공적을 서술한 다음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지휘권을 내려 놓겠다는 제안을 원로원에서 발표하였으나 대다수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강압적으로 받아들여 거부했다. 1월 7일 원로원은 마침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했고 카이사르는 이제 공식적인 "로마의 반역자"가 되었다. 3일후인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1개 군단만을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넜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우들이여,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파멸한다. 하지만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전우들이여!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격하라! 루비콘 강을 건너서 신들의 땅으로!
[편집] 내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카이사르의 내전입니다.
루비콘 강을 건넌 이후 카이사르는 겨울을 숙영지에서 보낼 것이라는 "원로원파"의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이탈리아 반도를 남하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최종권고" 이후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쿠리오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아레초를 비롯한 거점도시를 공략하게 했다. 갑작스러운 카이사르의 진군에 놀란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는 확급히 로마를 버리고 도망쳤고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휘하에 13군단 밖에 거느리지 못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숫적으로 폼페이우스가 훨씬 우세함에도 그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회담제의를 모두 거부했다. 폼페이우스는 브린디시에서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뚫고 그리스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내전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이제 내전의 장기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본국의 일을 안토니우스에게 맡기고 서둘러 히스파니아로 떠났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동방에 걸쳐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행군하여 27일만에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휘하 군단과 합류하여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이 지휘하는 군대를 격파했다. 그동안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는 잠시 저항이있었지만 곧 진압되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를 쿠리오에게,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 장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에게 맡겼는데 모두 폼페이우스군에게 패해 실패하고 말았다. 쿠리오는 시칠리아를 평정하는데 성공했으나 북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군에게 패해 전사했다. 이로서 장차 폼페이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하려는 카이사르에게는 상당한 위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히스파니아에서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취임하여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고는 바로 사임했고 기원전 48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원로원파를 치기 위하여 그리스로 출발하였다. 카이사르는 제2진을 데리고 뒤따라 그리스에 상륙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대와 합류하여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맞아 싸웠다. 이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포위를 뚫었고 카이사르는 괴멸은 안당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두달후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을 완벽하게 분쇄했고 폼페이우스는 테살리아에서 이집트까지 도망쳤고 결국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폼페이우스를 추적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참수된 머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다투던 누나 클레오파트라 7세의 편에 섰고 그녀를 이집트의 통치자로 앉혔다. 두 사람은 두달동안 나일강을 유람하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나중에 클레오파트라는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기원전 47년에 카이사르는 아나톨리아의 폰투스에서 미트라다테스 6세의 아들인 파르나케스 2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를 원로원에 보고하는 승전보고서에서 또하나의 명언을 남겼다.[4] 그 다음 카이사르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남은 폼페이우스 잔당을 소탕했다.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전사하고 카토는 자살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갈리아 시절부터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관이었지만 결국 폼페이우스파로 전향한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히스파니아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 그는 히스파니아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나머지 잔당을 소탕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내전은 끝났고 로마는 카이사르의 손에 들어왔다.
[편집] 국가 개조 사업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제일먼저 유언장을 작성했다. 조카손자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상속자로 삼았고 만약 옥타비우스가 먼저 죽으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대신하도록했다. 그런 다음 4번에 걸친 개선식과 축하경기를 벌여 로마시민을 기쁘게 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반대파에 대한 관용정책으로 박해하지 않았다. 망명한 반대파를 돌아오게 했고 안토니우스가 압류한 반대파의 재산도 돌려주라고 했으며 술라와는 다른 정책을 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장악하자 열정적으로 대규모 국가개조 사업을 추진했는데 주요한 것은 아래와 같다.
- 달력 개정 : 율리우스력을 국가 공인 달력으로 정했다.
- 통화 개혁 : 화폐주조를 체계화하고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조폐권을 국립조폐소를 신설하여 관장하게 했다.
- 시민권의 확대 : 시칠리아와 남프랑스에도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고 해방노예를 주요 공직에 등용했다.
- 정치 개혁
- 사법 개혁 : 배심원을 일정 재산(40만 세르티우스)이 있는 모든 계급에 개방했다.
- 사회 개혁
- 복지정책 : 정치투쟁의 도구가 된 곡물법을 개정하여 곡물배급자의 수를 줄이고 심사를 엄격히 했다.
- 식민정책 : 카르타고와 코린트를 재건하고 퇴역병이나 실업자를 여러 식민도시로 이주하게 했다.
- 건설 사업 : 카이사르 포룸을 세우고 성벽을 허물어 수도 로마를 재개발했고 가도와 항구를 정비했다.
기원전 44년 2월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였고 동시에 안토니우스와 공동집정관이 되었다. 공화정을 옹호하는 원로원파는 점차 권력이 카이사르 단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에 불안이 가중되었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가 실패한 파르티아원정을 계획하였고 원정을 떠나기 전 원로원 의원들에게 카이사르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다.
[편집] 3월 15일, 카이사르 암살
그해 2월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렸는데 경기장에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바쳤고 카이사르는 즉시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 작은 헤프닝은 로마인에게 카이사르가 왕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더욱 증폭시켰다.
카이사르는 3월 18일에 파르티아로 2년간의 원정을 떠나기로 하였고 3월 15일 원로원에서 자신의 부재시에 이탈리아와 속주의 담당자를 발표하기 위해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대극장의 회랑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로 부터 충성서약을 받은 이후부터 카이사르는 자신의 개인 경호부대을 해산하였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호위병없이 무방비상태였다.
암살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14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토가 자락에 단검을 숨기고 카이사르에게 접근하여 마구 찔렀다. 카이사르는 불의의 습격에 토가로 자신의 몸을 가리면서 쓰러졌고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의 오랜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입상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암살자들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서로를 찌르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를 찔렸으나 치명상은 단 한군데였다고 한다. 암살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고 암살자를 제외하고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의 애인중에 하나인 세르빌리아의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돌아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연구자들은 카시우스가 실질적인 암살의 주도자였을 것이라고 본다.)등 예전부터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카이사르의 관용정책으로 사면받은 9명과 원래부터 카이사르파였던 데키무스 브루투스[5],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등 5명이었다.
[편집] 암살 이후
다음날인 3월 16일, 암살자의 얼굴격인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암살의 정당성을 옹호했으나 성난 카이사르파 군중들에게 공격당했고 안토니우스는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장에는 당시 18세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제1의 후계자로 되어있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제2의 후계자로 되어있었다.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을 제외하고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기로 합의하였고 3월 18일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다.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내려가고 그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게 되고 암살파들과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키케로, 브루투스등 암살파가 모두 제거된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내전이 벌어졌다.
[편집] 카이사르의 사생활
[편집] 카이사르의 건강
카이사르가 간질을 앓았고 발작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설이있다. 수에토니우스나 아피아누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간질 발작으로 몇번 공무중 쓰러졌다고 하고 있으나 이들의 자료는 모두 카이사르의 사후 100년이상의 간격이 있으므로 의심스럽다. 동시대의 사료중 카이사르 본인의 저술에는 물론 간질을 숨겼다고 하더라도 카이사르처럼 공공에 노출된 사람의 간질 발작이 완벽하게 숨겨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키케로같은 동시대의 반대파의 기록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카이사르의 간질설은 타당하지 않다. [6]
오히려 카이사르는 상당히 건강한 체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전쟁과 이어진 내전에서 보여준 카이사르의 놀라운 기동력과 로마에서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처리한 수많은 일들을 보면 카이사르의 건강상태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편집] 카이사르와 여자
카이사르는 세번 결혼했다. 첫째 부인인 코르넬리아와는 술라의 이혼명령에 따르지 않으면서까지 계속되었으나 사별했고 둘째 부인인 폼페이아와는 폼페이아의 외도의 의심으로 이혼했다. 세번째 부인인 칼푸르니아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초기부터 엄청난 바람기로 유명했고 수많은 로마 상류층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특히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을 뿌렸고 그의 아들이라고 보여지는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는 재혼을 거부하면서까지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남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삼두 정치의 상대자들인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부인도 카이사르의 외도상대였다.
[편집] 카이사르와 돈
카이사르는 평생 엄청난 액수의 빚을 졌다고 한다.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할 때도 채권자들 때문에 출발이 지연될 정도였다. 그의 최대 채권자는 크라수스였다. 카이사르는 빌린 돈을 공공사업이나 선거운동이나 검투사시합 같은데 썼고 개인적인 사욕을 위해 쓰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내전기》에서 쓴 다음과 같은 글은 그의 돈문제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대대장이나 백부장들에게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주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지휘관들은 돈을 못받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총사령관의 선심에 감격한 병사들은 전심전역을 기울여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7]
[편집] 카이사르와 동성애
카이사르의 초기 경력중 소아시아에서 복무할 당시 레스보스 섬 공략을 위해 비티니아에서 군선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는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의 동성애 상대일 것이라는 소문이었고 그의 정적들은 이 이야기를 되풀이 하면서 공격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 의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니코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정복했다"고 노래했다고 기록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맹세까지 하면서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고 한다.[8]
나중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을때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동성애 상대로 양자가 되었다고 공격했으나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중상모략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편집] 카이사르의 작품
카이사르의 저작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內戰記)》이다. 카이사르 이후 거의 모든 학자와 연구자들은 카이사르의 문장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저술은 간결한 문체와 객관적이면서도 세련된 라틴어를 구사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글에서 "나는..." 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카이사르는..."이라고 객관화 해서 썼으며 일체의 미사여구와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했다.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카이사르의 기록은 상당한 역사적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카토"에 대항한 논변인 "안티 카토"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시와 희곡을 썼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신격화 된 이후에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와 몇편의 편지 글외에는 대부분이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편집] 연표
-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 로마에서 태어남
- 기원전 86년 -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 킨닐리아와 결혼
- 기원전 83년 : 술라의 박해를 피해 도망
- 기원전 82년 - 기원전 81년 : 소아시아속주에서 미누키우스 총독 아래서 참모로 근무
- 기원전 80년 : 미누키우스의 레스보스 공략전 참전
- 기원전 76년 : 해적 퇴치
- 기원전 69년 : 첫번째 아내 코르넬리아 죽음
- 기원전 65년 : 행정관 선출
- 기원전 63년
- 기원전 62년 : 폼페이이와 이혼
- 기원전 61년 :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총독부임
- 기원전 59년
- 제1차 삼두정치 성립과 집정관직 선출
- 칼푸르니아와 결혼
- 기원전 58년 - 기원전 51년 : 갈리아 전쟁
- 기원전 53년 : 제1차 삼두정치 깨지다
- 기원전 52년 : 알레시아 공방전
- 기원전 49년 - 기원전 45년 : 카이사르의 내전
- 기원전 49년 : 루비콘 강 건너다
- 기원전 48년 : 파르살루스 전투와 폼페이우스 죽음
- 기원전 47년 : 이집트 원정 및 클레오파트라 7세 만남
- 기원전 45년
- 로마 귀환
- 네번째 집정관직 (단독)
- 기원전 44년
[편집] 주석
- ↑ 《황제열전》에 따르면 카이사르 라는 이름은 세가지 유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① [[|카르타고|무어]]말로 코끼리를 뜻하는 caesai: 전쟁에서 코끼리를 죽임 ② "두꺼운 머리카락"을 뜻하는 라틴어 caesaries ③ 밝은 회색 눈 을 뜻하는라틴어 oculis caesiis : 세가지 모두 카이사르 발음과 유사하다.
- ↑ 출산을 담당하는 보나 여신에 대한 제사는 여자만 참여할 수 있었고 마침 최고제사장이자 법무관인 카이사르의 집에서 제사가 열렸다. 그 때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와 불륜을 벌이던 클라우디우스가 여장을 하고 카이사르의 집에 몰래숨어들었다가 들키는 일이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곧바로 폼페이아와 이혼했으나 카이사르 반대파의 공세는 더욱 커졌다.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이를 무마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아내되는 여자는 의심조차도 받아서는 안된다."
- ↑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로마인 이야기》제4권:율리우스 카이사르.상, 한길사, 1996, 189쪽
- ↑ 이 보고서에는 단 세줄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 흔히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알려진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완전한 창작이다. 수에토니우스는 《황제열전》에서 카이사르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보고 그리스어로 "καὶ σὺ τέκνον"(번역하면 "아들아, 너도?" 라는 뜻)라고 마지막으로 말했다고 했으나 플루타르코스에는 마지막 말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많은 현대의 연구자들이 이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니라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말한 것으로 본다.
- ↑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로마인 이야기》제5권:율리우스 카이사르.하, 한길사, 1996, 295~6쪽
- ↑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로마인 이야기》제4권:율리우스 카이사르.상, 한길사, 1996, 157쪽
- ↑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카이사르 편, 49. (영문),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40.20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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