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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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
중국 국무원 총리
재임기간 1980년 – 1987년
전임 화궈펑
후임 리펑
중국 중앙 위원회 총서기
재임기간 1987년 – 1989년
전임 화궈펑
후임 장쩌민

자오쯔양(조자양, 중국어 간체: 赵紫阳, 정체: 趙紫陽, 병음: Zhào Zǐyáng, 1919년 10월 17일 ~ 2005년 1월 17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였으나,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되었으며, 그 후로 17년간 가택연금 중에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편집] 천안문사태와 자오쯔양

1989년 4월15일, 전 공산당 서기 후야오방(호요방, 胡耀邦)(1980-1987)이 사망하였다. 그는 실용적 개혁노선을 주장하던 개혁 개방파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마오쩌둥의 계급 투쟁론을 계승한 당내 보수파들과의 힘겨루기가 팽팽한 상황이었다. 당시 당내 최고권력자였던 덩샤오핑은 그를 개혁개방노선에 마음을 같이 하였으나, 1987년 덩샤오핑의 마음은 돌아섰다. 1987년을 전후하여 조짐이 있던 중국 내의 민주화 운동을 바라보는 후야오방의 자세는,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마음이 떠나도록 하였다. 그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용과 수용의 자세는 당시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었고(지금도 그러하지만), 덩샤오핑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보수파와 개혁파가 격렬한 언쟁을 벌였던 1989년 국무원 회의도중 후야오방은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당시 중국인민들은 마오저뚱의 죽음 이후 중국 지도부의 정치 개혁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가득 안고 있었다. 따라서 개혁개방을 주장하던 후야오방의 죽음은 그 당시 중국인민들에게 커다란 실망이었고,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올까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10년, 문화 대혁명을 거친 그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기대이고, 당연한 불안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후야오방의 실각 이후에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급격한 물가상승문제로 인민들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공산당 하위 간부들의 부정부패 문제도 불거져 나왔고, 무엇보다, 인민들을 불안하게 한 것은 그 어느 때 보다 급격히 상승한 실업률이었다. 중국경제가 순수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혼합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 중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던 것이다. (서진영, 불운의 지도자, 조자양, 2005, http://www.eastasianstudies.org, 고려대학교 중국정치연구실)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베이징 시민들을 천안문 광장으로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하였고, 동시에 당간부들의 재산 공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요구하였다.후야오방의 추모식은 4월 22일, 천안문 광장 서쪽에 위치한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200,000 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그들은 후야오방의 추모식 내용에 그의 복권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군중들의 당지도부에 대한 적개심은 표출되지 않았다. 당시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자리에 있었던 자오쯔양은, 4월 23일 방북(북조선) 일정 중에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계획된 출국이었기에 취소될 수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양으로 떠나자 마자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다. 4월24일, 베이징 시내 16개 대학들은 산발적으로 휴교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천안문광장으로 끊임없이 모이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천안문광장의 분위기가 뜨거워 지는 것을 곧 당의 위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언론은 광장의 군중편이였다. 정부가 시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모두가 주장했고, 인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시대적 변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시위대를 사회적 혼란으로 규정하였다. 그 성명서는 보수파의 리더였던 리펑(이붕, 李鵬, 1928~ )이 직접 공포하였다. 자오쯔양이 아직 평양에 있을 때였다) 그러한 당의 메세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그들의 요구를 관철 시키기 위해,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5월 중순까지도 중국의 주요언론들은 시위대를 민주화 요구시위라 보도하며 일체 비난적인 어조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전인대 위원이었던 원리는 캐나다를 방문하였을 때, 5월19일자 인민일보의 보도를 인용하여, 당시 북경의 상황을 애국적 민주화 운동이라고 당시 캐나다 총리에게 설명하였다. 5월17일, 평양에서 돌아온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자오쯔양은 천안문에서의 시위를 애국적 행동이라고 명확히 하였다. 리펑과 자오쯔양은 함께 천안문 광장에 나가 학생들의 건강위해 단식을 중단할 것을 청하였다. 이후 당지도부의 대응은 강경해졌다. 5월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월30일 인민일보는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그리고 당은 시위대를 철수시키려 군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결국 출동한 군대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6월 4일 천안문 사태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한 순간에 애국적 행동이 반정부 행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부는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 대표가 미국의 CIA홍콩의 반사회주의 조직과 같은, 국내외 반정부 조직에 조종당했다고 발표하였다.(벤자민 양, 등소평 평전 : 2004, 권기대 역, 황금가지, pp 345~360) 5월 19일 이후, 계엄령 선포에 반대했던 자오쯔양은 당 지도부 내에서 고립되었다. (서진영, 천안문 페이퍼에 대한 몇 가지 소개, 2005, http://www.eastasianstudies.org, 중국정치연구실, 고려대학교) 계엄령 선포저지에 실패했던 5월19일 새벽 4:45, 그는 천안문 광장으로 나와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쇼!”

이후 그는 당 중앙위 총서기 직에서 물러나길 바랐으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덩샤오핑과 보수파 지도부는 그를 체포하였고, 2005년 1월17일,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가택연금의 상태에 있었다. 심지어 그의 죽음 뒤에도 그는 복권되지 못하여 그의 장례식은 후진타오 정부의 철저한 감시 속에 가족끼리 조용히 치러 졌다.(서진영, 불운의 지도자, 조자양, 2005, http://www.eastasianstudies.org, 중국정치연구실, 고려대학교)

[편집] 생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맡았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무력진압에 반대하다가 실각했다. 2005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추가:2006.12.14)
자오쯔양은 1919년 10월18일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유층에 속하였지만 그는 이미 청년시절 신념에 의해 공산혁명에 가담하였다. 13세의 자오쯔양은 중국공산당 청년연맹에 가입하였고, 19세에 중국공산당원이 되었다. 1947년 까지 그의 고향인 허난성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남부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49년 중국 공산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는 당내 각종 요직을 거친 후, 1965년 광동성 당 서기가 되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1967년 문화대혁명 당시, 그는 가족의 출신성분 때문에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된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다시 복권되어, 내몽고자치구 당 서기를 거쳐, 1972년 광동성 당 서기로 돌아온다. 1974년 그는 다시 광동성 공산당 총서기로 승격되고, 그 다음해에 사천성 당 총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사천성 시절을 통해 그는 농업공동체 발전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계기로 당내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77년 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권력의 중심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1980년에는 국무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서진영, 불운의 지도자 조자양, 2005, http://www.eastasianstudies.org, 중국정치연구실, 고려대학교)

자오쯔양의 빠른 정치적 성장의 원인은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었다. 그의 개혁적 성향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의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같이 개혁개방의 노선을 같이 하고, 실용주의적 정책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야오방은 정치개혁의 임무를 부여 받았고, 자오쯔양은 경제 개혁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 자오쯔양은 사실상 1980년대 후반 중국 경제 개혁의 사상적, 실제적 방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개혁개방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주창한 인물이며,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을 제시하여 중국의 정치 개혁과 경제 개혁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인물이다. 천안문 사태 전까지만 하여도 덩샤오핑은 당내 권력 다툼에서 자오쯔양의 편에 있었다.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생각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중국의 모습은 자오쯔양이 생각하던 21세기 초 중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의 숙청과 관계 없이 그의 사상적 바탕을 기반으로 중국이 변화, 발전 해 왔음을 의미한다. (박현숙, 자오쯔양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중국정부, 2005.2, 미디어오늘)

[편집] Bibliography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중국 최고지도부 비밀대화록, (Feb 2001), 월간중앙, pp 449~459

☞Jaime Florcruz, Death of Zhao zi yang(Jan 17th 2005), CNN Beijing bureau

☞벤자민 양, 등소평 평전, 권기대 역, 황금가지, 2004

☞서진영, 불운의 지도자 자오쯔양, 2005, http://www.eastasianstudies.org, 중국정치연구실, 고려대학교

☞서진영, 천안문 페이퍼에 관한 몇 가지 소개, 2005, http://www.eastasianstudies.org, 중국정치연구실, 고려대학교

☞박현숙, 자오쯔양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중국정부, 2005.2, 미디어 오늘

☞민정기, 최건; ‘일무소유’와 1989년 북경: 중국 대도시의 하위문화, 2003, 중국현대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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