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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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라틴어: croisade)은 교황령으로 조직된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함을 목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이때는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한 십자군 원정과 비교하여 십자군의 동방원정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종교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십자군 운동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자심왕 리처드등 유럽의 세 나라 군주가 함께 참가한(사실상 리처드 혼자 나댔지만) 3차 십자군이 가장 유명하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
[편집] 원인 및 배경
3세기 이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순례 여행이 안전하고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양쪽의 상황이 모두 안정되어 있어야 했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하킴은 11세기 초에 선임자들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자 및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성지 순례 여행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1050년 무렵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면서 순례 여행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또한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점점 쇠퇴하자 서유럽은 성지 회복을 빌미로 비잔티움 제국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했다. 거기에 교황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도 한몫 했다. 더구나 당시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대표적인 예가 1차 십자군에 참가한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그 동생 부용의 보두앵이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선동에 설득되었다. 곧 전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약 200여 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편집]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점.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라는 기록은 서유럽이 왜곡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세의 딸인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 《알렉시아드》와 서유럽 기록이 많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실 콤네노스 황제는 이슬람에 햇볕정책을 펴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슬람은 분열이 일어나 서로 싸우고 있어 일부 해적들을 제외하고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십자군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편집] 전개
[편집] 군중 십자군 (1096년)
- 이 부분의 본문은 군중 십자군입니다.
중세 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선동가)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한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럿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 회복(노략질)을 떠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발 앞서 떠난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하는데 군중 십자군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유태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헝가리의 기병에게 태반을 잃고,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또다시 거의 다 죽어 우여곡절 끝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이들이 약탈행위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다(사실 갖다 버린거나 진배없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하다 투르크의 강군을 만나 전멸,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은자 피에르는 목숨만 구해 달아난다.
[편집]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십자군입니다.
당시 이슬람교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레몽,고드프루아,보에몽 등 쟁쟁한 군웅들을 앞세우고, 총사령관으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데마르주교가 있었고 은자 피에르도 따라갔다. 정식 십자군, 즉 1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먼저 니케아를 공격하고 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에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는 가장 존재감 없고 중립적인 고드프루아가 되었으나, 얼마 못되어 죽었다. 보에몽은 아데마르의 후임인 다임베르트와 짜고 예루살렘을 노렸으나 다임베르트는 일찌감치 온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에게 밀려나고, 보에몽은 무슬림들에게 붇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다.
[편집] 1101년의 십자군 (1101년)
보에몽이 무슬림들에게 붇잡혀 감옥에 갇히자 보에몽의 자기 영웅화에 속아넘어간 순진한 기사들이 보에몽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레몽은 그들이 보에몽에게 속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이 순진한 기사들은 기어이 떠났다. 그러나 중간에 클르츠 아르슬란의 셀주크 투르크 군사들을 만나 전멸한다.
[편집]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년~11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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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 기독교도와 군소의 도시 등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측은 영웅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어떻게든 간신히 팔레스타인까지 도착했지만 다마스쿠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년~1192년)
- 이 부분의 본문은 제3차 십자군입니다.
1187년에 이슬람교 세계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 만에 예루살렘을 이슬람교 측에게 점령, 탈환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였다. 보통 십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3차 십자군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서 익사하고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아크레를 탈환한뒤 내 할일은 끝났다 하고 귀국하고 마는데, 리처드 1세가 없는 틈에 프랑스의 영국 영토를 침략하려고 한 속셈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3차 십자군은 ‘리처드의 십자군’이 되고 만다.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아크레를 확보한 것으로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리처드 1세는 돌아가던 중 미리 돌아가 있던 필리프 2세와 짠 귀족에게 감금당했다.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서야 풀려날수 있었고, 3차 원정 또한 얻은것 없이 끝났다. 리처드는 그 뒤 1119년 싸우다 갑옷을 잠시 벗었는데 운나쁘게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편집]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년~1204년)
- 이 부분의 본문은 제4차 십자군입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도항비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료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라틴 제국을 건국하였다.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족은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비잔티움 제국은 57년 후인 1261년에 부활한다).
[편집] 알비 십자군 (1208년)
- 이 부분의 본문은 알비파입니다.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알비(알비주아파라고도 함)라는 사이비 이단 교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세속의 일이 사악하며 인간의 영혼만이 선이라고 했으며 원죄에 대한 징벌로 절대선이 영혼을 자유로이 할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결혼과 임신, 육식을 반대햇으며 자살 특히 굶어 죽는것을 칭찬했다. 12세기 교회는 알비파를 이단으로 선언, 1028년 알비파 토벌을 위해 알비십자군을 일으켰다. 알비파는 1350년 사라졌다.
[편집] 제5차 십자군 원정 (1218년~1221년)
- 이 부분의 본문은 제5차 십자군입니다.
아크레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는데 실패하였다. 한편, 머나먼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대군을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 전 국토를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이때쯤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인 호라즘에서 영주 하이얼이 몽골 상인을 학살하여 분노한 칭기스칸이 호라즘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호라즘 왕 무하마드는 도망다니다가 카스피 해변에서 죽었고, 하이얼은 몽고군이 붙잡아 눈에 수은을 넣어 죽였다. 황금에 눈이 멀어 몽고 상인을 죽였으니 눈에다가 은을 넣어준 것이다.
[편집] 제6차 십자군 원정 (1228년~1229년)
- 이 부분의 본문은 제6차 십자군입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종종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 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그레고리오 9세는 교회로부터 파문된 채로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것을 구실 삼아,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황제군에게 격퇴되어 1230년에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풀어주었다.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편집]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년~1249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000명 남짓한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정을 하게 되지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편집]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
루이 9세가 재차 출병, 아프리카의 니스를 목표로 삼았지만, 도중에 서거하고 만다.
[편집] 어린이 십자군
어린이 십자군(또는 소년 십자군)은 10대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십자군에 가담한 광신적인 종교 현상을 말한다. 이 사건은 참으로 역사상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스테판이라는 10대 소년이 우두머리였다. 소년들은 출애굽 설화에 나오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자신만만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바다는 당연히 갈라지지 않았고,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수장되고 말았다. 이들 중 노예로 팔린 소년들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관용으로 해방되었다.
[편집] 결과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아마드 앗딘 잔기(통칭 '장기')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심지어는 적인 어린이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써 야기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 정교회 교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 역사 최초의 분열 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편집] 총론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건들로 발전했다. 십자군은 기독교가 아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근 1000년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근 사백여년 동안 우호적이던 기독교와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되는 시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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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주요 인물 목록 | |
군중 십자군 | 서유럽: 은자 피에르 - 고티에 생자부아 - 기사 르노 비잔틴: 알렉시우스 1세 - 안나 콤네나 이슬람: 클르츠 아르슬란 |
1차 십자군 | 서유럽: 고드프루아 드 부용 - 레몽 드 생질 - 보에몽 드 타란토 - 아데마르 주교 - 은자 피에르 - 탕크레드 - 보두앵 드 부용 비잔틴: 알렉시우스 1세 - 안나 콤네나 이슬람: 카르부카 - 클르츠 아르슬란 |
2차 십자군 | 서유럽:루이 7세 - 콘라트 3세 비잔틴:마누엘 1세 콤네누스 이슬람: 이마드 앗딘 장기 - 누르 앗딘 마흐무드 |
3차 십자군 | 서유럽: 사자심왕 리처드 - 존엄왕 필리프 -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이슬람: 살라흐 앗 딘 이븐 우슈브 아이유브 |
4차 십자군 | 서유럽:보두앵 1세 - 빌라르두앵 - 몽페라토백 보니파치오 이슬람:알 아딜 |
알비 십자군 | |
5차 십자군 | 서유럽: 장 드 브리엔느 |
6차 십자군 | 서유럽: 프리드리히 2세 이슬람: 알 카밀 |
7차 십자군 | 서유럽: 루이 9세 이슬람: 살라딘 2세 - 바이바르스 |
8차 십자군 | 서유럽: 루이 9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