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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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1390년? - ?,경상도 동래 출생, 본관은 아산(牙山))은 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이자 발명가이다.
[편집] 생애
아버지가 원래 원나라의 소항주(현재의 저장 성) 출신인 중국인으로 알려져있고 어머니는 관기였다.
장영실은 어릴 때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취미와 재주를 가졌으며 청년 때에는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되었고 그의 훌륭한 재주가 세종대왕에게까지 알려져 궁궐로 불려 갔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역법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후 계묘년(1423년) 무렵 상의원 별좌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이조 판서 허조의 반대로 하지 못했다가 이후에 신하들의 찬성으로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하였다. 그 후, 세종 대왕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의 책임 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 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들은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방향을 가르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 등이었다.
이의 공으로 세종 15년(1433년)에는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또한 세종 16년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20여만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장을 찍을수 있었다.
천문기구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1442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중 기술자로서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있던 임금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450년경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측된다.
[편집] 추모사업
- 과학선현 장영실 선생 기념사업회
- 장영실과학고등학교 (부산)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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