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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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劉淵 251년? ~ 310년;재위 308년~310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한(漢;훗날 전조)의 창건자이다. 자(字)는 원해(元海)이고 묘호는 고조(高祖)이며 시호는 광문황제(光文皇帝)이다.

목차

[편집] 생애

신흥(新興;현재의 산서성 흔주(忻州)사람이다. 일설에는 서하습성(西河隰城;현재 산서성 분양(汾陽)사람이라고도 한다. 남흉노의 선우일족 출신으로 어부라(於夫羅)의 자손인 좌현왕 유표(劉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호연황후로써 원훈(元勳)이었던 대사공 호연익(呼延翼)은 외가의 숙부로써 사위였기도 했다.

어릴적에 최유(崔遊)에게 가르침을 받아 한족의 문화에 정통하고 문무을 겸비했다. 삼국 시대말기 인질로써 나라의 낙양에 들어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서진의 초기 아버지 유표가 고령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계승하여 흉노의 좌부사(左部帥)가 되었다.

서진이 외척 양준(楊駿)이 섭정을 맡자, 유연은 건위장군-오부대도독이 되어 한광향후에 봉해졌다. 이윽고 팔왕의 난이 일어나 진 왕조가 혼란에 빠지자 좌현왕(左賢王) 유선(劉宣;유연의 사촌)의 추대로 비밀리에 대선우가 되었다. 성도왕 사마영의 환심을 사서 북선우-참승상군사에 임명되었다. 304년 이석에서 거병하였다. 곧 좌국성으로 이동하여 스스로 한씨일족임을 자임하며 국호를 [한]이라고 정하고 한왕을 칭했다. 308년 10월 황제을 칭하고 영봉으로 개원하였다. 다음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하서라고 개원했다. 낙양공략을 노렸으나, 지반에 이르러 병사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유연이 임종시에 조카 태재(太宰) 유환락(劉歓楽)과 태부(太傅) 유양(劉洋), 태보(太保) 유연년(劉延年)을 불러들여, 자신의 셋째아들이자 대사마(大司馬),대선우,녹상서사(録尚書事)였던 초왕(楚王) 유총과 힘을 합쳐 태자 양왕(梁王) 유화을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향년 60세였고, 큰뜻을 품었던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

더해서 이러한 일화가 있다. 종제(従弟)이며 동시에 유연의 처남이었던 호연유(呼延攸)는 숙부이며 악부였던 호연익의 아들이었다. 유연은 그의 무능하고 속물적인 인격을 꺼리고 싫어하여 결코 요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연의 장남인 유화는 숙부 호연유와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숙부 호연유을 재상직에 앉혔다. 유화는 숙부의 조언에 따라 배다른 동생 초왕 유총을 숙청하려는 정책을 실시하다가 파멸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유연이 현명하다는것이 알려졌고, 호연유는 정치가로써는 무능하다는것이 증명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의 이세민의 명에 따라 편찬된 [진서](晋書)에서는 당나라의 고조 이연의 휘을 피해 "유원해"라고 표기하였다.

[편집] 종실

[편집] 후비

  • 무원황후 호연씨(武元皇后呼延氏)
  • 광헌황후 장씨(光献皇后張氏)
  • 선귀비(単貴妃)(선휘의 딸)(単徽)

[편집] 자녀

  • 양왕(梁王)유화(劉和)(厲王)
  • 모왕(某王)유공(劉恭)
  • 초왕(楚王)유총(劉聡;劉聰)(유  ;劉戴, 소무제(昭武帝)
  • 제왕(斉王)유유(劉裕)
  • 노왕(魯王)유륭(劉隆)
  • 북해왕(北海王)유애(劉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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