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 성 (아이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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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성 (일본어: 名古屋城, なごやじょう)은 오와리 국 아이치 군 나고야에 있는 성이다. 오와리 도쿠가와가 17대의 거성으로 긴코조(金鯱城: 금 샤치호코 성), 긴조(金城: 금 성)으로도 불린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아이치 현 나고야 시 나카 구=기타 구의 메이조 공원에 있다. 이세 민요에도 『이세는 나루를 품고, 나루는 이세를 품고, 오와리 나고야는 성을 품네』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사카 성, 구마모토 성과 더불어 일본 3명성이다. 천수에 놓인 긴샤치는 성뿐만 아니라 나고야의 상징이다. 이마가와씨, 오다씨의 나고야 성(那古野城)은 지금의 나고야 성의 니노마루에 위치한다. 옛 나고야 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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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구조
[편집] 입지
나고야 성의 성터는 쇼나이 강이 만들어낸 노비 평야에 서북단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북쪽에서 노비평야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축성전, 대지(臺地)는 서쪽면과 북쪽면이 깍아지는 절벽이였다. 그 절벽 밑에는 저습지가 있어, 천연의 방어라인을 형성했다. 또, 대지의 서쪽 끝에 접해있는 호리가와 강을 굴착해, 이세 만에 인접한 항구(아쓰타 신궁 앞마을)로부터 축성물자 수송과 나고야 성하 마을의 서쪽을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고야 성의 입지는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을 고려해 지어졌다고 보여진다. 오사카 성의 도요토미씨등의 서국 다이묘가 도카이도를 통해 에도로 진격했을 때, 그것을 저지하는 역할을 일정부분 기대했다고 보여진다.
[편집] 건물의 방어라인
나고야 성의 방어라인은 각각의 성곽이 곧게 뻗은 직사각형태인 성벽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각 모퉁이는 직각으로 단순하 되어있다. 따라서, 히메지 성과 같이 복잡한 굴곡을 많이 가진 구조를 좋아하는 에도 시대 군사학자에게는 썩 좋게 보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군사학자는「방어라인이 좋지않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현대의 성곽 연구자들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나타냈다. 즉, 나고야 성이 축성된 에도 시대초기는 공성전술, 기술이 성숙된 시기로 있고, 이 시점에서 볼때,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도카이도 방위의 최대 거점으로 나고야 성을 선정했던 것을 감안하고나서 방어라인을 평가해야 된다. 당시 성에서 농성전을 할때, 방어, 전략, 전술을 어떻게 기획, 분석, 판단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방어라인이 좋다 나쁘다라고 단언할 수 없다 점을 들수 있다.
구조는 전형적인 제곽식 평성으로 혼마루를 중심으로 해서, 남동쪽을 니노마루, 남서쪽을 니시노마루, 북서쪽을 오후케마루가 둘러 싸고 있다. 더욱이 남에서 동으로 걸쳐 산노마루가 덮어 싸고 있다.
혼마루의 3개의 호구(성곽의 출입구) 안에는 남쪽의 오테 입구와 니노마루의 2개소의 가라메테 입구가 있다. 그리고, 해자 안쪽에는 2중 성문으로 된 원통형으로 된 문이 있고, 해자 바깥쪽에는 우마다시(성곽의 호구 앞에 설치된 방어시설, 개구부를 성측으로 향해있고, ㄷ자 모양 또는 C자형의 벽으로 둘룬 구역)가 있어 입구를 2중으로 두텁게했다. 원통형내 통로를 굴곡시켜 주위를 다몬 망루로 둘려쳐 행군를 어렵게 했다. 또, 외성곽으로부터 토교(土橋)를 통해 우마다시로 들어오는 통로에는 장해가 되도록 직선형태의 작은 석축이 있으며, 혼마루 뒤쪽으로 향할수 없도록 되어있다. 우마다시의 배치도 정교해서, 일부 성곽을 점령하더라도 혼마루에는 쉽게 진입할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어느 호구를 공격하면, 다른 호구로부터 출격해 격퇴하도록 설계되었다.
서쪽과 북쪽에는 해자 및 저습지로 막혀있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산노마루가 니노마루와 니시노마루를 둘러싸 막고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폭이 넓은 물이 채워지지 않는 해자와 물이 채워진 해자로 방어된 외성곽으로 구성되었다.
더욱이 그 외측에는 소가마에 또는 소가 구루와라고 불리는 성과 성하 마을이 자리잡을 계획이었다. 서쪽에는 히와지마하시(枇杷島橋), 남쪽은 옛 후루와타리 성부근(古渡旧城下), 동쪽으로는 야다가와하시(矢田川橋)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을 가졌지만, 오사카 전투가 끝난후에 건설은 중지되었다. 이로 볼때, 나고야 성의 축성목적이 무엇이였는지 명확히 알수 있다.
[편집] 천수
천수는 혼마루 북서쪽 구석에 위치해 있다. 에도 시대초기 성곽을 대표하는 것중 하나이다. 대천수와 소천수를 연결하는 형태이고, 대천수 지붕위에는 도쿠가와가의 영화를 나타내는 긴샤치로 장식되어 있다.
대천수는 5층5계, 지하 1층으로 된 건물로, 높이 55.6m(석축 19.5m, 본체 36.1m)로 18층 고층건물에 상응한다. 높이야 말로 에도 성과 도쿠가와씨가 다시 축성한 오사카 성의 천수에는 미치지 않치만, 면적으로 치자면, 두 천수를 능가하는 4,424.5m2을 자랑한다. 그 내부에는 1,759장의 다다미가 깔려있다. 천수의 구조는 승탑형이라 불리며, 천수 받치는 아래층에 지붕은 팔짝 지붕이 아니다. 따라서, 천수 자체의 균형을 잡기위해, 천수 한층의 평면이 대체적으로 정사각형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소천수는 2층2계, 지하 1층으로 대천수의 현관 역활을 한다.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외견상으로는 대천수에 가려 소박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성의 3층 천수보다도 훨씬 크다.
천수는 1612년에 완성되었고, 이후 333년간 나고야에 그 위용을 뽑냈다. 도중, 몇 번의 지진과 화재로부터의 소실을 모면했고, 메이지 유신후 폐성의 위기도 벗어났다. 그리고, 진도 8.0의 노비 지진도 잘 견뎌냈지만, 1945년 공습에의해 석축만 남긴채 소실되었다.
천수의 재건을 시작한 것은 1957년 나고야 시 제정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 때, 대천수를 목조건물로 지을지를 결정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석축내에 케이슨기초를 설치하고, 그 위에 철골철근콘크리트(SRC) 구조로 대천수를 짓게되었다. 석축자체만으로 건물의 중량을 이겨낼지 우려도 있었기때문에, 기공식은 1958년 6월 13일, 준공식은 1959년 10월 1일에 했다. 그에 앞서 6일전에는 태풍 베라의 영향으로 나고야 시를 비롯 도카이도 지방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재건된 대천수 내부에 승강기를 설치했다. 외관은 충실히 재현했지만, 최상층에는 전망대로서의 역할 때문에 소실전보다 창이 더 커졌다. 그래서, 아랫층과 비교하면 약간의 위화감이 존재한다.
[편집] 역사
[편집] 센고쿠 시대
16세기 후반에 이마가와 우지치가가 오와리 진출을 위해 축성한 야나기노마루가 나고야 성의 기원이다. 이 성은 지금의 나고야 성 니노마루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덴분 원년(1532년) 오다 노부히데가 이마가와 우지토요로부터 탈취해 나고야 성(那古野城)이라고 개명한다.
우지히데는 일시 성에 거주해 그 곳에서 아들 오다 노부나가를 낳았다고 한다. 후에 노부히데는 후루와타리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나고야 성은 노부나가의 거성이 되었지만, 고지 원년(1555년) 노부나가가 기요스 성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폐성되었다.
[편집] 에도 시대
기요스 성은 오랫동안 오와리의 중심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정치정세와 수해에 약한 기요스의 지형의 문제등으로 거성으로써 부적합했기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홉 번째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거성으로써, 게이초 14년(1609년)에 나고야 성 축성을 결정한다. 게이초 15년(1610년) 서국(주고쿠, 규슈일대)의 여러 다이묘에 데쓰다이부신(대규모 토목공사일때 여러 다이묘의 노역을 동원하는 일)으로 축성을 개시한다.
축성 담당은 다키가와 다다유키, 사쿠마 마사자네외 5명, 작업 담당은 오쿠보 나가야스, 고보리 마사가즈외 9명에게 맞겼다. 건물의 입지와 배치은 도도 다카토라라고 전해지며, 석축은 여러 다이묘가 분담해서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천수의 석축은 가토 기요마사가 했다고 한다. 천수는 작업 담당인 고보리 마사가즈, 목수들의 수장인 나카이 마사키요가 했다고 전해 지고 있다.(오카베 마타에몬이 목수의 수장이란 설도 있다.) 게이초 17년(1612년)까지 대천수를 완성했다.
기요스로부터 이주는 나고야 성하 마을을 조성한 게이초 17년(1612년)부터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나고야 성으로 거처를 옮긴 겐나 2년(1616년) 동안 행했다고 사료된다. 이 이주를 기요스 고에시라고 한다. 가신, 마을 주민은 물론, 사찰 10사, 신사 3사, 기요스 성 소천수도 옮겨 철저하게 준비되었다고 한다.
간에 11년(163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상경할 때 들러기도 했다.
[편집] 근대
메이지 유신후, 1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는 신 정부에 대해 나고야 성의 파괴와 매각 그리고 긴샤치의 헌상하겠다고 주청한다. 그러나, 주일 독일공사 맥스 폰 프란트와 육군 제4국장대리인 나카무라 시게토 대령의 소송에 따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성곽 보존을 결정했다. 이 때 천수는 혼마루 어전과 함께 보존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 도쿄 진다이(군부대)를 성 안에 두었다. 메이지 6년(1873년) 나고야 진다이로 되었다가, 메이지 21년(1888년) 제 3사단으로 되어 종전까지 계속 있었다.
보존된 혼마루는 메이지 24년(1891년) 노비 지진에의해 혼마루의 사이난스미 망루와 다몬 망루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천수와 혼마루 어전은 큰 피해가 없었다. 메이지 26년(1893년) 혼마루는 육군성으로부터 궁내성(현재 궁내청)으로 이관되어 나고야 이궁이라고 불렸다. 그 후, 나고야 이궁은 쇼와 5년(1930년) 폐지되어 궁내성으로부터 나고야 시로 이관되었다.
나고야 시는 나고야 성을 시민에게 일반공개하였고, 이 즈음 건축물과 장벽화(칸막이에 그려진 벽화)는 국고(舊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쇼와 20년(1945년) 5월·14일 나고야 공습때 혼마루 어전, 대천수, 소천수, 도보쿠스미 망루, 정문, 긴샤치등이 소실되었다.
전후, 산노마루를 뺀 성터에는 북동쪽에 있었던 저습지 터와 함께 메이조 공원으로 되었다. 공원안에는 전쟁의 화를 피한 3개의 망루와 3개의 문, 니노마루, 정원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또, 일부 해자를 매워 많이 변했지만, 흙으로 쌓은 보루, 해자, 문등이 산노마루를 포함해서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다.
천수는 쇼와 34년(1959년)에 재건되어, 복원된 긴샤치와 함께 나고야 시의 상징이 되었다.
혼마루 어전도 천수에 이어 복원할 예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갈길이 멀었다. 버블경제의 붕괴등으로 자금난에 부딪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헤세 6년(1994년) 5월 14일에 시민봉사단체 혼마루 어전 포럼이 설립되었고, 헤세 14년(2002년)부터 재건기금을 모았다. 현재 헤세 20년(2008년) 제건공사를 착공하고, 헤세 22년(2010년)에 제1기 공사로 현관부분을 복원할 예정이다. 또, 일정에 맞추어 장벽화도 복원도 동시에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 나고야 성의 긴샤치
[편집] 긴샤치에 관한 에피소드
- 처음 만들어진 긴샤치는 한개당 게이초 오반(1분당 금이 약 671/1000) 1940분의 금을 사용했다. 두 긴샤치의 금의 중량은 약 320kg이다. 하지만, 그 후, 재정이 악화되어 3회에 걸쳐 금박을 개수해 금의 순도를 낮추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광택이 툰탁해져 버렸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긴샤치 주위에 금망을 둘러 위장했다. 이는 표면상으로 새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전화(戰禍)로 소실되기 전까지 긴챠치에 금망이 쳐져 있었다.
- 긴샤치는 바다를 건넌적도 있다. 1871년 정부에 헌상되어, 도쿄 궁내성에 납입되었다. 그 후, 수컷 샤치호코는 국내 박람회를 돌았고, 암컷 샤치호코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다. 긴샤치가 대천수로 돌아온 것은 1879년 2월이 되어서였다.
- 긴샤치의 비늘 도난사건은 몇 번 일어났다. 에도 시대 큰 연을 이용해 긴샤치에 접근한 가키노기 긴스케의 전설이 유명하지만, 긴스케는 실재 도둑이다. 메이지 시후에는 3번 도난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은 훔친 비늘을 녹여 매각하려다 체포되었다. 단, 3번째 사건이 있을 때는 하양기념사업중이였기 때문에 당시 나고야 시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는 결과가 되었다.
- 소이탄으로 소실된 긴샤치의 잔해는 전후, 연합군 사령부에 접수되었고, 후에 대장성(재무부)으로 이관되었지만, 1967년 나고야 시로 반환되었다. 나고야 시는 잔핵을 녹여, 나고야 시의 깃봉의 환두로 가공해 보존하고 있다.
- 현재 긴샤치는 오사카의 조폐국에서 복원한 것으로 두 긴샤치의 금의 사용량은 약 88kg이다. 수컷 샤치호코(북측)에 44.7kg, 암컷 샤치호코(남측) 43.4kg 을 사용했다.
[편집] 긴샤치의 외부시설 전시
2005년 3월 24일 열린 일본 국제박람회의 개회식전에서 긴샤치가 전시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나고야 성의 박람회 개최로 천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온적이 있었고, 메이조 공원내 박물관에 전시했었다. 하지만, 외부로 전시된 것은 1959년 재건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국제박람회가 있기 전날 3월 23일에는 나고야 시내 16구를 암수 둘로 나누어 퍼레이드를 했다.
[편집] 오호리 전차
나고야 성 산노마루를 둘러싼 바깥 해자의 밑에는 1911년부터 1976년까지 전철을 운행했고, 오랫동안「오호리 전차」라고 불리었다.
오조네에서 세토 간을 연결하는 세토전기철도가 나고야 성 서쪽의 호리가와 강의 수운을 이용해 세토모노(도자기) 운송과 나고야 관청로까지 열차가 올 수있도록 계획했다. 1911년 5월 23일 도이시타 ~ 오조네 구간, 10월 1일에는 호리가와 ~ 도이시타 구간을 개업했다. 도이시타 역은 산노마루 북동부의 바깥 해자에 위치해 있다. 그 곳으로부터 바깥 해자의 중간을 통과해 남하하고, 남동쪽 외진 곳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서진한다. 그리고, 남서쪽 외진부분의 호리가와 역까지 복선으로 되어있다. 성의 해자 가운데로 선로가 놓인 곳은 주오 본선의 요쓰야 역부근등에서 볼수 있지만, 해자의 원형을 그대로 둔채 선로가 놓인 예는 드물다. 그 대신에 해자의 각진 부분에 반경 60m의 급 커브가 있거나, 복선부분의 폭이 충분치 않아 단복선(협궤)이라는 구조도 있다. 선로설치에 애로사항을 볼수 있다.
세토전기철도는 1939년 나고야 철도로 병합되어 메이테쓰 세토 선으로 되었지만, 전후, 세토 선의 사카에마치 지역으로 노선이 결정되어 공사를 착공했다. 1976년 2월 15일에 호리가와 ~ 도이시타 구간의 폐선되었다. 현재, 대부분 철도시설이 철거되어 확인 할 수 없지만, 단복선의 흔적 위에 있는 혼마치 다리의 벽돌아치, 그리고, 옛 오쓰마치 역사터로 내려가는 계단(출입금지)등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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