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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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한자: 李澄玉, ? ~ 1453년)은 조선의 무관이자 반란자이다. 본관은 인천이다.

[편집] 생애

지금의 경산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서 중추원지사 전생(全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징석(澄石)이고 아우는 징규(澄珪)이다. 그의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이 대단했는데, 그 중에서 징옥이 무예와 용맹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유년시절에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 때에 김종서를 따라 북방지역의 6진을 개척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1424년에는 경원진 첨절제사로서 야인의 침략을 격퇴했고, 1436년에는 회령부판사로서 여진족 추장을 처형하였으며, 그 해에 경흥도호부판사의 직위에 올랐다. 이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등을 참살(斬殺)하여 효수하고 정권을 탈취한 뒤 이징옥을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아무 죄도 없는데도 공직에서 파면시키고 박호문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자 크게 대노하여 박호문 부자(父子)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체포하여 목을 베고 난을 일으켰다.

그는 북방의 여진족과도 연락을 취했고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 남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이징옥의 반군을 돕기로 약속한 여진족의 소식이 없고, 또 군부 내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졌다. 급기야 그가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종성에 머물던 중, 반란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고 불안해 하던 종성부사 정종(鄭種)과 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이 변절하여 이징옥을 습격하는 바람에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막내인 셋째 아들 연원(淵源)만이 유모의 등에 업혀 경주로 간신히 피신하여 목숨을 건지고 이름을 태엽(台燁)이라 했으며, 본관은 초산(草山)으로 하여 맥을 이었다(훗날 이연원의 후손들이 본관을 초산에서 본래의 본관인 인천으로 환원한다).

이 난으로 자신의 형인 이징석, 아우인 이징규가 정난공신의 주청으로 한때 처형과 멸족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조의 극진한 대우로 그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그의 난은 계유정난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평소 김종서를 도와 북방을 개척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아 그를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또 그는 용맹하기가 범과 같아서 여진족들이 이징옥을 김종서만큼이나 두려워하여 감히 그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의 난 이후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고, 이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