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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음력 12월 25일))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군인이다. 청산리 전투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편집] 생애
- 1889년 11월 24일(음력) - 충청남도 홍성군 길산면 행산리 출생
- 1904년 - 해주 오씨 오숙근과 결혼
- 1905년 -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 무상 분배
- 1907년 - 호명학교 설립.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 전개
- 1909년 - 기호흥학회 장학재단 설립. 한성신보 이사 역임.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
- 1911년 -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 1917년 -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취임. 노백린(盧伯麟), 신현대(申鉉大),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基中) 등이 중심이 된 단체임
- 1918년 - 만주로 망명.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 책임자가 됨.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 같은 해,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
- 1919년 - 북로군정서 사단장으로 취임. 사관연성소 소장 겸임
- 1920년 - 10월 21일 ~ 10월 26일, 청산리에서 일본군 3,000여명 (기병, 보병, 포병 혼성부대) 격파. 청산리 전투
- 1921년 - 대한독립군단 결성 (3,500여명)
- 1921년 - 6월 22일, 자유시 참변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만주로 퇴각.(이후 반공주의자가 됨)
- 1925년 - 신민부 창건(군사위원장 겸 사령관 직 겸임)
- 1928년 - 한국유일독립당 조직
- 1929년 - 한족총연합회 주석 취임
- 1930년 -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사회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
- 1957년 - 부인 오숙근 씨가 세상을 떠남
-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편집] 그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
- 중국측에서는 백야를 죽인 자가 조선공산당 아성총국에서 파견한 무장공작대원 공도진(박상실)이라고 함.
- 암살범 공도진은 최동범, 이복림, 박상실 등 여러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짐.
-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교사범 동거녀였다는 주장이 제기됨.
- 양환준은 김좌진이 자유시 참변 후 좌익인물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일경에 제공해 주고 그 대가로 활동대금을 받았기 때문에 청년단원에게 암살당했다고 증언함.
- 일제에 매수당한 김일성(金一星; 북조선 김일성[金日成]과는 별개 인물임)이 박상실을 끌어들여 김좌진 암살을 부탁하였다고 함.
- 조선공산당 ML파 조직에서 활동했던 지희겸(전 연변대교수)도 김좌진이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부장 마쓰시마와 밀담 후 좌익인 공산당원을 많이 죽였으니 만약 화요회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면 우리 ML파에서 죽였을 것이라고 증언함.
- 일본제국이 조선 민족세력의 분열을 꾀하기 위해 좌·우익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였고 그 때문에 와전된 낭설이 퍼져 공산당이 김좌진을 오해하여 죽였다는 설이 있음.
- 자신이 김좌진의 아들임을 주장한 김두한은 해방 후 공산당 단체인 조선청년전위대에서 활동하다가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피살당함을 듣고 전향, 대한민청 감찰부장이 되어 별동대를 이끔.
[편집] 가족 관계
- 김형규(金衡奎)의 둘째 아들이 김좌진이다.
-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논란이 있다.
[편집]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