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량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량(前涼 301년~373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한족출신의 장궤(張軌)가 건국한 나라이다.

[편집] 역사

시조 장궤는 초한 시대 유방휘하의 장수 장이의 후손으로 서진을 섬기면서 상서랑(尚書郎), 산기상시(散騎常侍)등 중직을 역임했으나, 팔왕의 난의 혼란을 보고 중앙에 있는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301년에 호강교위(護羌校尉), 양주자사(涼州刺史)를 자청해 양주로 옮긴뒤 현지의 선비족을 토벌하고 하서(河西;황하의 서쪽)을 지배하며 반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장궤 자신은 진나라 신하로써의 입장을 고수하며 왕호는 주장하지 않고,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때는 장안에 원군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그의 행동에 진나라 왕실에서는 그에게 서안공(西平公)에 임명하였다.

장궤의 사후 그의 아들 장연(張宴)이 뒤를 이어 양주자사, 서안공이 되었다. 장연도 또한 진나라의 신하임을 고수하였기에 사마예가 동진을 부활시키자 그에게 복종했다. 다만 동진의 새로운 원호(元號)인 태흥(太興)을 사용하진 않고 서진의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였다.

그후 동쪽에서 전조(前趙)가 세력을 확대했기에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320년 유홍(劉弘)이 종교반란을 일으키자, 양나라 국내는 혼란에 빠졌다. 장연은 이 반란을 수습했으나 유홍의 신자의 활보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뒤를 동생 장무(張茂)가 계승했다. 323년 전조의 유요(劉曜)가 28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량을 침공하자 장무는 항복하여 전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장무는 전조로부터 양왕(涼王)에 봉해졌다. 장무는 324년에 병사하고, 그 뒤를 장연의 아들 장준(張駿)이 계승했다.

그 시기 전조는 후조(後趙)와 다툼이 격해져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고, 장준은 남쪽의 성한과 교류을 왕성하게해 하동의 권리을 둘러싸고 전조와 항쟁했다. 이윽고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당하고, 후조는 장준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으나, 장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다시 귀자(亀茲), (鄯善)이라 알려진 서역 여러나라을 지배하에 두게되어 전량의 최전성기을 이룩한다.

346년 장준은 죽고, 차남 장중화(張重華)가 뒤를 이어 같은해 후조의 추(麻秋)가 침공해오자 격퇴하고 다음해 다시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침공한 추을 사애(謝艾)에게 명하여 격파했다. 이 승리에 방심한 장중화는 정치에 흥미을 잃고, 참언을 신용하여 사애을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또 후조 멸망후 세력을 확대하던 전진의 부건(苻健)을 토벌하려다가 대패한다.

353년 장중화가 죽자 아들 장요령(張耀霊)이 뒤를 이었다. 어린 장요령의 후견인으로 숙부인 장작(張祚)이 정치을 보살폈으나, 곧이어 장요령을 살해하고 양왕을 칭하고 이윽고 황제를 칭했다. 장작은 사애가 장작을 경계하기 이전 상진에 있었던것을 위험시하여 그를 살해하고, 또한 자신에게 간언하던 자들도 살해하여 농민에게 가혹하게 대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장작은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에 의해 살해되고 장관에 의해 장중화의 서자였던 장현 (張玄靚)이 옹립되었다.

장관은 전권을 휘두르며, 서서히 찬탈을 기도했으나 다른 신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곧 이 신하도 살해되고 새로운 전권을 휘두르는 사람이 등장하기를 되풀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장준의 막내아들 장천탕(張天錫)에 의해 장현 는 죽고 장천탕이 즉위했다.

하지만 이때 전진의 부견에 의한 통일사업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376년 요장(姚萇)의 군에게 공격당해 항복하고 전량은 멸망한다. 이로써 전진의 화북통일이 완성된다. 장천탕은 전진에 의해 북부상서(北部尚書)에서 우복야(右僕射)가 되었으나, 비수의 전투(淝水之戦)중에 동진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죽었다.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의 왕조
오호십육국
전량 | 전조 | 성한 | 후조 | 전연 | 전진 | 후연 | 후진
서진 | 후량 | 남량 | 북량 | 남연 | 서량 | 하 | 북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