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편집] 생애
- 사제서품을 받은 르네 뒤퐁 신부는 1954년 가톨릭 선교사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에 입국하면서 한국이름인 두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두봉 신부는 1955년 대전대목구 대흥동성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대전대목구 대목대리, 대전교구 상서국장을 지내면서 12년간 충청남도, 대전지역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1967년 파리외방선교회 한국지부의 지부장을 지냈다.
-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대구대교구에서 경북북부지역을 떼어 안동교구를 설정하였고,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두봉 신부를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1969년 7월 29일 두봉 신부는 주교수품을 받고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권위적인 사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두봉 주교는 주교문장을 정하지 않았고, 교구의 운영도 신부와 평신도들과 함께 해나갔다. 안동교구는 다른지역과 달리 농촌지역이 대부분이어서 두봉 주교는 농촌사목에 최선을 다했으며, 사회 정의에도 관심이 많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창설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여러가지 역할을 하였다. 두봉 주교는 전국에서 최초로 안동교구에 가톨릭 농민회를 조직하여 농민의 권익향상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 1979년 5월 5일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에서 농협에서 배급한 씨감자에 싹이 나지 않아 그것에 대해 항의했던 농민 오원춘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20일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던 사건인 오원춘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반발한 두봉 주교는 이 사실을 1979년 7월 17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공식적으로 폭로하였다. 그 일로 경상북도경찰청은 가톨릭 농민회 간부들과 신부들을 감금하였다. 8월 6일 두봉 주교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에서 전국기도회를 열고 항의의 뜻으로 20일간 단식농성을 펼쳤다. 이 일로 정부에서는 두봉 주교에게 추방명령을 내렸으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급서하자 추방령을 철회했다.
- 당초 교구의 기반이 잡히는 10년정도만 교구장으로 사목하겠다고 밝혔던 두봉 주교는 51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청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으며, 1984년, 1986년, 1989년에 각각 교황청에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다시 반려되었다. 1990년 10월 6일 마지막 사직서가 교황청에서 받아들여져 62세의 나이로 안동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박석희 신부에게 교구장직을 넘겨주었다.
- 은퇴 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행주산성성당에서 기거하면서 각종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은퇴 이후에도 J. O. C (가톨릭 농민회)의 지도 주교로써 성의를 다하였다. 80대의 나이인 두봉 주교는 요즘에도 각종 피정과 강론을 하면서 평신도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편집] 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