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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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1337년 ~ 1392년 음력 4월 4일)는 고려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삼은(三隱)의 한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목차

[편집] 출생

정몽주의 이름은 그의 부친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을 만나고 낳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편집] 일생

초년

정몽주는 1357년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이후 고려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다.

강학활동

외교활동

우왕 즉위 당시 (1375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으로서 “점점 강해지는 을 버리고 쇠퇴해가는 과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상소하였다가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큐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을 만나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편집] 죽음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드러눕자 기회를 노려 그 일파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이방원에게 저지당했다. 이어 이성계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그를 만나보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그 외 11개 서원에서도 제향되었다.

[편집] 후대의 평가

정몽주는 고려 말기 무신 세력의 몰락과 함께 세를 얻어가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지도자들 중 한명이었다.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고려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 말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나 고려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한 정몽주와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암살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형태로 탈바꿈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비록 실패했으나 정도전 등에 의해 그 뜻이 이어져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 조정을 탄생시켰다. 그의 학문은 새로운 사조로서 조선 초기 사림파에 영향을 미쳐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편집] 문집

  • 《포은집》(圃隱集)
고려의 삼은(三隱)
야은(冶隱) 길재 | 목은(牧隱) 이색 | 포은(圃隱) 정몽주 | 도은(陶隱) 이숭인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