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바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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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바흐 전투
(7년 전쟁의 일부)

로스바흐 전투진행도
날짜 : 1757년 11월 5일
장소 : =틀:Flagicon 독일 작센지방의 라이프치히 근교 로스바흐
결과 : 프로이센의 완벽한 승리
교전국
=틀:Flagicon 프로이센 =틀:Flagicon 프랑스
>틀:Flagicon 신성 로마/오스트리아 제국
지휘관
프리드리히 2세 수비스 왕자 샤를
힐드부르크하우젠 작센공(公) 죠세프 프리드리히 윌리엄
병력
22,000명
대포 79문
42,000명
대포 45문
피해 상황
169명 전사
379명 포로
5,000명 전사및부상
5,000명 포로

로스바흐 전투(Battle of Rossbach 1757년 11월 5일)는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프랑스와 신성 로마/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침공을 작센지방 라이프치히 근교 로스바흐에서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의 주력을 우회하여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사선대형을 고안해 아군보다 몇배 많은 적군을 격파했다.

목차

[편집] 원인

1756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밝힌 슐레지엔 탈환계획은 오랜 숙적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을 접근시켜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프랑스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영국이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불렀고, 여기에 프로이센의 국력신장을 경계하던 러시아, 독일제후, 스웨덴이 오스트리아에 접근하여 프로이센은 대륙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대국의 협공 위험을 선제공격에 의한 각개격파로 벗어나고자 작센에 침공하였으나, 각 지역에서 패퇴하여 연합군은 베를린을 향해 집결했다. 그러나 주력인 프랑스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프리드리히는 그사이 보헤미아에서 움직이던 작센-오스트리아군을 맞아싸우기 위해 나섰다. 1757년 10월 8일 프리드리히는 일부병력을 수도방위을 위해 분리시키고, 나머진 돌려 연합군을 맞아싸울태세에 들어갔다. 11월 5일에 이르러 프로이센군은 작센으로 이동하였고, 연합군은 병력의 우세을 이용하여 일거에 프로이센군을 괴멸시킬 공격에 나섰다.

[편집] 경과

전장은 자르강 서쪽, 로스바흐 마을로 설정되었다. 연합군은 프리드리히의 좌우을 포위할 의도로 군을 움직였다. 동쪽에서 선회하던 프로이센군을 우회하여 가로를 공격하여 전 병력을 프로이센군의 측면에 집중시켜 격파하는 전법이었다. 연합군 6만 4,000명은 2부대로 나눠 한부대는 움직이지않고, 배후에서 기습을 받아 패주하게될 프로이센군을 본대와 함께 협공하여 괴멸시키는 역을 맡았다.

남은 다른 한부대 4만 1,000명은 3개종대로 로스바흐 동쪽을 우회하여 프로이센군에 대해 측면공격을 시도했다.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프리드리히는 급히 야영지를 버리고, 후퇴을 가장한 자이드리츠(von Seydlitz) 지휘하에 있던 기병 38개 중대을 동남쪽으로 이동시켜 연합군의 우회부대을 맞아싸우게 하는 한편 보병대을 급히 방향전환시켜 남쪽에서 전투대형을 만들었다. 프로이센군은 구릉위에 포병대을 배치하고 동시에 주력을 포진시켜 연합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숨어서 행동하여 우회기동중인 연합군을 포위대형을 완성하기전에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오후 2시경 행군중이었던 연합군 전선은 급히 진격한 프로이센군 기병대의 방해을 받아 격퇴되었다. 연합군은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노려 구릉쪽으로 진격하였으나, 이곳은 방향전환했던 프로이센군의 정면이었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밀집대형이 아닌 연합군 좌익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혼란에 빠뜨렸다.

그 사이 자이드리츠의 기병대는 재집결해 3개의 전투대형에 합세하여 연합군의 행동을 저지했다. 프로이센군의 중포 18문이 연합군 최 선봉부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선두을 공격받은 연합군에 대해 프로이센군의 주력 7개 대대가 화력을 집중하여 공격했다.

강력한 공격에 혼란에 빠진 연합군에 편승하여 자이드리츠는 기병을 선회시켜 우익에서 치고 들어갔다. 프로이센군 주력은 좌익에서 사단편성을 하던 연합군 중앙에 공격을 가했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전투끝에 연합군은 패주. 그 일부는 후방에 대기하던 부대들과 합류하였으나, 이미 전의는 상실한 상태였다.

[편집] 결과

프리드리히의 전술은 기동력을 발휘하여 적의 주력을 우회하여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여 승리을 얻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양군 모두 우회, 포위전법을 시도했으나 대형의 신속한 변환이 뛰어난 프로이센군의 압승이었다. 원래 포위전법은 큰 전과를 올릴 수 있는 한편, 행동중에 적에게 포착되면 방어력이 떨어지는 불리한 점이 있다. 프로이센군은 신속히 행동하였고, 거기에 급속히 방향전환을 통한 전투대형을 형성, 대승리을 얻었다.

프리드리히는 종래의 전투형식을 이용하면 피해가 승자측도 크다는것을 주목하여 가로 일선의 전열에 비스듬히 전진하는 사선대형의 기동전술을 고안했다. 이것에 의해 행군대형은 즉시 전투대형으로 변경되었고, 그사이 적은수의 선행종대가 적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측면을 공격해 피해을 최저한으로 낮출수 있었다.

이 승리로 인해 프로이센의 위기는 벗어났다. 프리드리히의 군제개혁, 국가총동원령체제의 새싹이라 볼 수있는 체제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이후 계속 개량되어 이 전략은 전사상의 일대개혁을 일으켜, 나폴레옹의 전술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편집] 참고 및 참조문헌

※ 역사군상 그래픽전사시리즈 <<전략전술병기사전>> 제3권 <유럽근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