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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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황제 | 카를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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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황제 | 요제프 2세 |
오스트리아 여대공 헝가리 여왕 크로아티아 여왕 보헤미아 여왕 파르마 여공 |
마리아 테레지아(독일어: Maria Theresia, 헝가리어: Mária Terézia, 체코어: Marie Teresie,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의 황후(1745년 ~ 1765년)이자,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재위 1740년 ~ 1780년)이며,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재위 1741년 ~ 1780년) 겸 보헤미아의 여왕(재위 1743년 ~ 1780년)이면서, 파르마 여공(재위 1740년 ~ 1748년)이다.
일반적으로 ‘여제’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여제나 다름없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가 아닌 황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상 여제시 되고 있었다. 정식으로는 황후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이처럼 다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남편인 황제가 프랑스 국경 주변의 로트링겐 공국(현 프랑스 로렌) 출신의 양자 출신이며, 실제 권한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것.
- 제위는 남편의 소유가 되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 당주권은 그녀에게 있다는 것. 즉, 실질적으로 군소국가의 독립체제로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신성로마제국보다는, 법적으로는 국가가 아닌 오스트리아 및 합스부르크 가 관할 구역 쪽이 사실상의 정체(합스부르크 군주국)라고 보여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란츠는 부군으로서의 이미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제적 이미지(실제로는 황후이며 여왕)로 세간에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국내 백과사전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를 여제(신성로마제국 여제)로서 게재하는 경향이 많다.
덧붙여,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여왕)과 Kaiserin(황후)의 머릿글자를 딴 ‘K.K’이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여대공시절
1717년 5월 13일,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장녀로 빈에서 태어났다.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황녀로서 널리 알려져,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1722년 빈에 유학하러 온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과 사랑에 빠졌는데, 항상 밤에는 그를 생각하며 꿈을 꾸었고 낮에는 궁녀들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을 정도였다고 그 당시 영국 대사가 적고 있다.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와의 결혼 이야기도 떠올랐지만, 아버지 카를 6세 역시 프란츠가 마음에 들어 1736년 2월 12일에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연애 결혼이기도 했지만 당시 로트링겐(로렌) 공령을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적 결합이기도 하였다.
합스부르크 가의 왕위 계승 방식은 살리카 법에 근거하여 남자계 상속으로 지정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가 요절한 이후, 카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윽고 차기 제위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세간이 주목하게 되었다. 카를 6세는 국사칙서를 발표하여 국내 및 각국에 자신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보헤미아·모라비아·헝가리 등 합스부르크 왕가 세습령의 상속을 인정하라고 하였다. 살리카 법에 의해 여성이 제위에 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는 사위인 로트링겐 공 프란츠 슈테판이 오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카를 6세는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 뿐, 정치가로서의 교육은 베풀지 않았다.
[편집]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하지만, 그녀의 장밋빛 인생은 카를 6세가 서거한 후 곧바로 깨지고 만다. 즉, 카를 6세가 죽자 주변 나라들이 그녀의 합스부르크 가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속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와 혈연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들이 서로 자신이야말로 합스부르크 가의 상속권을 물려받아야 한다며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쳐들어 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 - 1748년)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처음으로 전쟁 공포도 없이 합스부르크 가 영토인 슐레지엔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결사 방어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하여,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녀는 당시 23살이었던 데다가 네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1741년 3월 13일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 요제프를 무사히 낳아, 국내 사기가 치솟아 올랐다. 1741년 6월 25일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선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마저 오스트리아의 적으로 돌아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바이에른과 전쟁을 치르기로 결의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전비가 갈수록 줄어든 데다가 원군도 없고, 궁정의 중신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러자 그녀는 1741년에 헝가리로 가서 9월 11일 헝가리 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가 및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전황은 대역전을 거듭하며, 한때는 황제 자리도 카를 알브레히트(카를 7세)에게 빼앗기지만, 카를 사후에 탈환하여 1745년 10월 4일에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다시 제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로이센에게는 군대의 질 등의 격차로 인해 연패를 거듭하여 1745년 드리스덴 조약을 맺어 슐레지엔의 프로이센 영유를 승인하였고, 프랑스와의 전쟁은 한동안 더 계속되다가 프랑스와 대립하던 영국과 손을 잡아, 최종적으로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어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國本詔勅)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편집] 7년 전쟁
정치적으로 능력이 별로 뛰어나지 못했던 남편을 대신하여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녀는 슐레지엔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하우크비트를 등용한 내정 개혁과 다운에 의한 군개혁을 실시하면서도, 외교면에서는 카우니츠를 등용하여 프랑스에 접근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 이래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가와 적대해 온 프랑스는 당시 영국과도 대립 상태였는지라 프로이센이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것에 자극받아 오스트리아와 화해하고 동맹을 맺게 된다. 이것을 외교 혁명이라고 한다.
또,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애첩으로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 이 세 명의 여성들이 반(反)프로이센 포위망을 결성한 것을 빗대어 ‘3자매의 패티코트 작전’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175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훗날 7년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때와는 달리 프랑스 및 러시아와의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가 초반에 우세하였지만, 프로이센의 끈질기게 버팀에 따라 재정적 부담이 계속 커져갔다. 1762년, 러시아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해 온 옐리자베타가 서거하자, 그녀의 조카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신봉자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한 결과, 러시아가 종반에 전쟁에서 이탈하였고, 그 후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탈환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1763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강화하여,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가 최종 확정되었다.
[편집] 통치기간
7년 전쟁이 종식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선진국화를 위해 여러 가지 내정 개혁을 실행에 옮겨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그녀는 다른 나라보다 먼저 전국에 초등학교를 신설하여 의무 교육을 확립시켰다. 이에 따라 같은 내용의 교과서가 전국적으로 배포되어 각 지역마다 각각의 언어로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또한 그녀는 군사 행정 위원을 설치하여 군세 징수 등에 관한 외부의 개입을 배제시켰다. 1762년에는 군사 기구가 궁정의 군사청 아래로 통괄되어 궁정 군사청이 최고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 일반 징병제가 채용되었다. 이 징병제는 전국민의 무차별적인 병역을 의무화하고 있어(실제로는 신분 차별이 있지만),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을 수 있게 됨으로써,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은 현격히 급증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계몽주의적인 관료의 기세가 드세져, 그녀의 개혁 정책도 점차 계몽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의복의 자유화(1766년)나 예수회 탄압(1773년) 등이 대표적이지만, 그녀 자신은 점차 보수화해 갔다. 1765년 서거한 남편 프란츠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아들 요제프 2세의 급진주의적 개혁 성향에 자주 대립하여 견제하였다.
1780년 서거하였으며, 시신은 가장 사랑했던 남편 프란츠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의 묘소인 카푸치나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편집]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와의 사이에서, 5남 11녀(총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 마리아 엘리자베트 (1737-1740)
-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1738-1789) - 수녀가 됨
- 마리아 카롤리네 (1739-1741)
- 요제프 2세 (1741-1790)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
- 마리아 크리스티나 (1742-1798) - 작센-테셴 공작 알베르트와 혼인
- 마리아 엘리자베트 (1743-1808) - 인스부르크 수녀원장
- 카를 요제프 (1745-1761)
- 마리아 아말리에 (1746-1804) - 파르마 공작 페르난도와 혼인
- 레오폴트 2세 (1747-1792)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
- 마리아 카롤리네 (1748)
-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레 (1750-1762)
- 마리아 요제파 (1751-1767) - 나폴리 왕과의 결혼 직전에 사망
- 마리아 카롤리네 (1752-1815) -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와 혼인
-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1754-1806) - 모데나 공작
-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 -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혼인
- 막시밀리앙 프란츠 (1756-1801) -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
[편집] 가정 생활
마리아 테레지아는 첫사랑인 프란츠 슈테판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연애 결혼에 성공하였으며(비록 남편이 이 결혼을 위해 자신의 영지 로트링겐 공국을 포기해야 했지만), 금실이 좋아 부부 생활은 매우 원만했다. 결혼하기 4일 전에 프란츠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둔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미래의 남편에 대해 그녀가 얼만큼의 정열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 여러가지 언어로 쓰여있어 그녀의 교양의 깊이도 엿볼 수 있다. 프란츠는 때때로 다른 여성과 염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 탁월했던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눈치채고 있음에도 눈감아 주었다. 또 남편이 죽은 후 자신이 뒤따라 죽을 때까지 15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와의 사이에서 총 16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프로이센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막시밀리안 1세 이후 200년간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이유로 자녀들의 대부분을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의 부르봉 가 일족과 정략 결혼을 맺게 하였지만, 이는 나중에 독일 제후로서 합스부르크 가의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세기 이후의 독일 정세를 보았을 때, 이러한 결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아이들 각자에 대한 편애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에게만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 알베르트와의 연애 결혼을 1766년에 승낙해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은 후, 이 부부는 요제프 2세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된다. 또 몸이 불편하여 정략 결혼에 사용할 수 없었던 마리아 안나에게는 차갑게 대하는 등 이상적인 어머니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녀는 죽기 직전 프랑스 왕비가 된 11녀 마리 앙투아네트를 항상 염려하였다. 그녀는 활발하여 유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는 딸에게 프랑스 혁명의 발생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 츠바이브뤼켄 공자 카를과의 연애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고 파르마 공 페르디난도의 아내가 된 6녀 마리아 아말리에는 시집간 후 방약무인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녀의 귀국을 금지하였다.
[편집] 바깥고리
- Entry in aeiou.at
- Baroque Absolutism Country Studies - Austria
- Book by M. Goldsmith (1936) about Maria Theresia (eLibrary Austria Project - eLib 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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