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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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남편도 독립 운동가인 김규식이다.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그의 집안은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인 개화 지주 집안으로, 독립 운동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낸 김마리아는 그의 종고모가 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인 서병호, 서재현 부자와 세브란스의전 제1회 졸업생으로 만주몽골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김필순이 한 집안이다.

그는 서울에서 북장로교 계열의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1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김순애는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 및 지리를 가르쳤는데, 이 일로 박해 조짐이 보이자 김필순과 함께 만주로 이동했고 1915년 난징의 명덕여자학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조선 지도의 제작과 보급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

1919년 첫부인과 사별한 김규식을 김필순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뒤 상하이로 이동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여운형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있었고, 서병호도 이 단체에 참여 중이었다.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김규식에게 맡기면서, 그가 결혼한지 보름만에 먼 길을 떠났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김규식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영어가 유창했으며, 김순애도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남편과 헤어진 그는 3·1 운동 참가를 위해 일시 귀국했다. 상하이에서는 지역별로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시위를 조직하도록 했으며, 그는 대구 지역을 담당하여 백남채 등 기독교 인사들과 만난 뒤 상경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이 재직 중이던 세브란스병원은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3·1 운동 준비 세력들이 연락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 곳에서 함태영과 접촉하여 평양에 파견되었다가 거사일 전날인 2월 28일 중국으로 탈출했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 상하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고, 대한적십자사도 조직했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독립 운동을 계속하여 1923년 한국국민대표대회에 참가하고, 1930년 한국독립당 산하 여성 조직인 한인여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는 주석에 추대되었다.

광복후 귀국하여 1946년 모교인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맡았으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다가 이승만과 대립하여 정계에서 밀려난 김규식이 한국 전쟁북조선으로 가면서 사망 시점까지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 사망 이듬해인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편집] 참고자료

1996년········1997년 선정, 이 달의 독립 운동가 ········1998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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