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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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元均, 1540년 - 1597년 음력 6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는 평중(平仲)이다. 도일동의 무인 가문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편집] 생애

1567년 무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한 후, 조산보만호,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과정에서 북방 변방의 오랑캐인 여진족을 토벌에 참여하였다. 1591년에 전라좌수사에 추천되었으나 그 이전의 근무 성적이 매우 저조하여 취소되었으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592년 2월에 비로소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해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을 무찔렀으나, 이순신의 원균 자신보다 품계가 높아지고 삼도수군통제사에까지 오르게 되자 이를 시기하였다.

징비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원균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자신의 수하 함대 100여 척을 자침시켰다. 이후 원균은 전투 진행 과정에서 작전 수행, 공적 문제 등으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여러 차례 대립하여 서로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정유재란을 전후로 이순신이 신중한 태도로 작전에 임하자 조정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빗발쳤는데, 원균이 이에 가세하여 수군만의 단독 공격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조정에 개진하였으므로, 1597년 2월에 이순신이 파직된 직후 원균이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한 후 사망하였다.

전란이 종결된 후인 1604년 6월에 선무공신 1등으로 책봉되고 의정부좌찬성이 증직되었다. 또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어 흔히 원릉군 원균으로 호칭하게 된다.

하나뿐인 서자 원사웅(元士雄)이 대를 이었다.

전 임
이순신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1월 27일 - 1597년 6월 19일
후 임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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