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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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伽倻 혹은 加耶)는 가락(駕洛), 가라(加羅), 가량(加良), 구야(狗耶)라고도 하며 삼국시대 대부분동안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들의 연맹체였다. 동쪽으로 신라, 서쪽으로 백제를 접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왜와도 교류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된다.
목차 |
[편집] 건국 신화
《삼국유사》에는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 하나는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고 나와있다. 여기서 5가야란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이고, 수로왕이 남은 성이 가락국 즉 금관가야이다. 그러나 6가야에 대해서는 다른 전승도 많은데, 《고려사략》(高麗史略)은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의 다섯 가야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편집] 신라와의 투쟁
77년 가을 8월에 가야는 신라와 싸웠는데 신라의 아찬 길문(吉門)에 의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 1천여 명이 목베였다. [1]
가야의 소국들은 2~3세기경에 김해부근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구성했다. 그러나 전기 가야 연맹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쇠락기에 들어섰다. 5~6세기경, 고령부근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구성되었다. 후기 가야 연맹은 신라와 백제사이에서 압박을 받으며 차례로 무너졌고,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합되며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편집] 일본과의 관계
가야는 형성기에 일본 규슈 북부의 왜와 관계가 가까왔다.가야와 왜의 관계에 대해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일본어로 미마나)가 왜의 식민지나 속국으로 기록되어있다. 한국의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는 이런 설을 부정하고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야와 왜는 가까운 관계이나 지배관계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편집] 주석
- ↑ 77년~:《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탈해 이사금 條>,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 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