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응규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계응규(桂膺奎, 1869년 2월 2일 ~ 1920년 9월 1일)는 일제 강점기 초기의 지방 관료이다.
1902년에 평안북도 관찰부의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으며, 이후 평북 선천과 용천 등지에서 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1909년 선천의 농림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각도대표 지방위원 추도회'를 거행하는데 참가했다. 이 무렵 의주와 선천에서 친일적 자문기관인 지방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 평북 태천군의 군수에 임명되었고,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부터 국경 지역인 후창군 군수로 재직하다가 1920년 이탁의 지시로 이 지역에 침투한 서로군정서 단원 이창덕에게 사살되었다. 계응규는 3·1운동 때 군내에서 만세 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자 시위대를 위협한 바 있고, 그가 독립군을 탄압한다는 정보가 독립군 측에 들어가 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1]. 이창덕은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고 계응규에게는 훈6등 서보장이 추서되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편집] 참고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414~419쪽: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 - 계응규 (2006.9.12)
- 민족정기선양센터, 독립유공자 공훈록 - 이창덕
[편집] 주석
- ↑ 전갑생, 반민특위 와해 후 첫 정부 발표 친일파 106명 《오마이뉴스》 (2006.12.8)
분류: 1869년 태어남 | 1920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총살된 사람 | 테러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