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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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한국의 극작가인 이서구(李瑞求)에 관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사가시인 이서구(李書九)에 대해서는 이서구 (175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서구(李瑞求, 일본식 이름:牧山瑞求, 1899년 4월 5일 ~ 1981년 5월 25일[1])는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극작가이며 대한민국의 방송작가이다. 아호는 고범(孤帆), 필명으로 '남궁춘'도 사용했다.

[편집] 생애

경기도 안양 출신으로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했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초창기 연극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는 일본 니혼 대학 예술학과에서 수학했다.

1922년 토월회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연극계에 모습을 보인 뒤, 1931년 단막희곡 〈파계〉와 〈동백꽃〉을 발표하여 극작가로 등단했다. 이후 인기 극작가로 활동하며 상업 극단이 공연한 많은 연극의 대본을 썼다. 1937년 극단 호화선이 공연한 〈어머니의 힘〉은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연극은 기생 출신의 주인공이 남편을 잃고 온갖 고생을 한 끝에 명문가인 시댁의 마음을 돌린다는 내용의 전형적인 신파극이다. 소설도 발표했으나 희곡만큼 인정받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연극인 친일 단체인 조선연극협회 회장을 지내 연극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꼽힌다. 근로문화인부대, 조선문인보국회 등 예술인을 동원한 친일 단체에 참여하였고, 친일 희곡 〈곡산영감〉을 일본어로 집필하고 친일 연극평론인 〈금후의 국민극〉을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2].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친일 활동을 한 그는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파 목록 연극, 문학, 언론, 친일단체의 4개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광복 후 청춘극장에서 상업극 공연을 계속했으나 이전과 같은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47년 유치진과 함께 전국연극예술협회를 결성하여 대한민국 연극계의 대부로 활동했다. 한국무대예술원 원장, 대한연극협회 회장을 지냈다.

한편, 이서구는 1938년부터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었다. 광복 후 방송계에도 진출하여 방송극도 다수 집필했다. 동양방송 최초의 사극인 〈민며느리〉를 비롯, 〈장희빈〉 등 인기 사극의 방송대본을 써 대한민국 사극 드라마의 전형을 마련했다. 한국방송극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주제가로 큰 인기를 모은 대중가요인 〈홍도야 우지마라〉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경기도 시흥시에 〈홍도야 우지마라〉 가사를 적어넣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3].

[편집] 참고자료

  • 권영민 (2004-02-25).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712~713쪽. ISBN 8952104617.
  • 한산이씨 홈페이지, 이서구 노래비

[편집] 주석

  1. 《한국일보》 (1981.5.26) 劇作家 李瑞求씨
  2. 《컬처뉴스》 (2005.9.1) "사실을 알리고 역사적 교훈을 삼자는 것뿐" - 친일연극편/ 새로운 인물 다수 포함
  3. 시흥문화원,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