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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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성(姜弼成, 1885년 ~ 1939년)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 관료이다.
함경남도 덕원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고위 관료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강필성은 원산 원흥중학을 졸업하고, 강의록을 통해 독학으로 공부하여 일본의 와세다 대학을 두 번이나 졸업했을 정도의 노력파였다. 즉, 와세다 대학의 교외생으로 1909년 법률과를 졸업하고 1921년에 다시 정치경제과(교외생)를 졸업하였다.
그는 원산에서 대한제국 관리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로는 원산을 중심으로 함남 지역의 유지로 활동하면서 1907년 함경북도 경성(鏡城)농공은행 원산지점 고원(雇員), 한말 탁지부(度支部) 원산지부 직원을 거쳐 1908년 재무감독국 주사가 되었다. 1910년 병합과 함께 지방 관제가 개편될 때 함경남도 도서기가 되었다가 1914년 신설된 함경남도 풍산군수로 승진한 뒤 정평군수·안변군수 등을 지냈다. 1924년에 퇴관하여 향리에서 덕원금융조합장, 사립 덕성학교 교장, 함경남도 도평의원 등을 역임하고 1930년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다. 1932년에 전라남도 참여관(參與官) 겸 산업부장으로 관직에 복귀하였으며, 1937년 2월에는 고등관 2등인 황해도 지사에 승진, 임명되었다.
일제가 남긴 《조선공로자명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남 산업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주창한 자력갱생·농촌진흥운동 등 병참기지적 산업운동의 노선에 영합하여 다각 영농을 장려하여 박하 재배, 농촌 각 마을의 협동조합운동과 방적회사 유치를 위한 면화재배운동 등에서 성과를 거둔 공적이 있고, 황해도에서는 삼림의 조림과 계를 활용한 소의 조직적인 사육에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서보장을 서훈 받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수록되었다.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강인복(姜仁福)
- 아내: 양정숙(梁貞淑)
- 첫째 딸: 강용갑(姜龍甲, 1916년 ~ )
- 둘째 딸: 강구갑(姜龜甲, 1918년 ~ )
- 첫째 아들: 강정덕(姜定德, 1921년 6월 ~ )
- 둘째 아들: 강상덕(姜尙德, 1927년 2월 ~ )
- 셋째 아들: 강영덕(姜英德, 1931년 ~ )
- 셋째 딸: 강영자(姜英子, 1931년 ~ )
[편집] 참고 자료
-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 《총독부관보(總督府官報) 》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분류: 1885년 태어남 | 1939년 죽음 |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함경남도 출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