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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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金學成, 1913년 ~ 1982년)은 한국의 영화 촬영기사이다. 여배우 최은희의 첫 남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가세가 몰락하여 누나 손에서 자랐다. 그의 누나는 한국 전쟁 중 북조선으로 간 영화 배우 김연실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영화 촬영을 공부한 뒤, 1939년 방한준이 연출한 〈성황당〉 촬영을 맡으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기로 친일 영화가 대거 제작되었는데, 그도 국책 영화인 〈집없는 천사〉(1941), 〈풍년가 〉(1942), 〈거경전〉 (1944)을 촬영하여 잇따라 세 편의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목록 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광복 후 〈새로운 맹서〉(1947)로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이 영화는 연극 배우로 활동하던 최은희가 영화계에 데뷔한 작품이다. 김학성은 〈새로운 맹서〉를 찍으며 최은희와 만나 그해 결혼했다. 김학성에게는 재혼이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12년인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은희에 따르면 결혼 자체가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처 소생의 아이까지 키워야하는 힘든 여건 속에서 김학성이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삐그덕거리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최은희가 북조선으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해 돌아오는 파란만장한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종료되었다.
전쟁 중 그는 종군하여 미군 공보원의 촬영기사로 근무하면서 기록 영화를 찍었다. 한국 전쟁이 종전된 뒤 최은희가 신상옥과 결혼하자 간통죄로 두 사람을 고소하기도 했으나, 법적으로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간통죄는 성립하지 않았다. 다만 후배에게 부인을 빼앗긴 김학성은 영화계 선후배들의 동정을 받았고 신상옥과 최은희는 한동안 따돌림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2].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1958)[3]을 비롯하여 유현목 연출의 〈오발탄(誤發彈)〉(1961), 마지막 작품이 된 〈아리랑〉(1968) 등 1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편집] 참고자료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김학성
- 《신동아》 (2006년 6월호)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 《월간조선》 (2001년 7월호) 인물연구/ 다시 무대에 서는 崔銀姬의 진한 체험
- 《씨네21》 (2006.4.26)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재일한국인 영화인들의 작품 특별상영 ‘재일한국영화인의 발견’- 이병우, 김순명, 김학성을 소개합니다
[편집] 주석
- ↑ 《컬처뉴스》 (2005.9.2)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친일영화편/ 인민배우 문예봉, 〈자유만세〉 최인규도 포함
- ↑ 《CBS》 (2007.8.2)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사각 앵글의 예술가, 정일성 촬영감독 - 정일성 "부끄러운 영화, 대표작 못돼도 평생의 스승”
- ↑ 김준기, 김준기의 극장순례 - 한국 영화계의 산 역사, 스카라극장 《컬처뉴스》 (200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