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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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姜甑山, 1871년 11월 1일 ~ 1909년 8월 9일)은 증산교의 교조로 본관은 진주(晉州), 이름이 일순(一淳), 자는 사옥(士玉)이고 증산(甑山)은 호다.

강증산은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태어났고 7세 때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이란 시를 지었으며 1894년에 정남기의 집에서 3년간 서당을 운영한 뒤, 3년간 여행을 떠났다. 그 동안에 김경수의 태을주와 김일부의 정역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1901년대원사에서 49일간 수도한 끝에 득도하여 자신의 교리를 정립했다. 여행 때 받아들인 태을주는 훗날 자신의 교단인 증산교의 주요주문으로 확립되었다고 전해진다. 1907년에 의병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며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그 뒤 1909년 8월 9일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였는데 그의 나이 39세였다.

어떤 설은 강증산의 사인이 독살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위암, 주독, 고문 후유증이며 그것이 공통적인 사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병사한 이후, 그의 교단은 수없이 분산되다가 거의 없어져 현재 증산도, 대순진리회, 태극도, 풍류도, 태을도, 음양쌍도태 등으로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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