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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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근대 서구 신학계에 등장한 그리스도론이다. 교리적 예수는 예수의 죽음(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집중하는 반면, 역사적 예수는 역사인물로서의 예수의 삶을 주목한다. 즉,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 인물로 실재했던 "예수"가 누구이었는지를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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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복음서나 사도들 특히, 바울로 사도의 서신서가 예수에 대한 교리(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케리그마로서의 예수,교리적 예수)를 전할 뿐,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의 임박성을 선언했던 역사인물로서의 예수(역사적 예수)를 전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1]복음서나 사도들의 서신서속의 교리적 예수가 아닌,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관점의 경우 교리적 예수는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된 제물이라면,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에 의해 위험인물로 규정되어 십자가형으로 숙청된 순교자이다.[2] 20세기 이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마커스 보그, 가톨릭 수사인 도미닉 크로산등의 예수 세미나운동시작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연구에 대해 비판적이어서,독일의 루터교회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년-1976년)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인 에른스트 케제만과 귄터 보른캄 등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였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후 하나님(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가 된 예수는 이미 이 지상에서의 삶 속에서 부활이후의 고양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보고, 그 "발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3]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기독교 연구소(소장:김준우)에서 크로산등의 신학문서들을 출판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성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사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Old Quest(역사적 예수 연구 시작), No Quest(역사적 예수 연구 붕괴), New Quest(역사적 예수 다시 시작), Third Quest(최근)
[편집] 제1기 Old Quest
함부르크 대학교의 극동 언어학 교수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1694년-1768년)는 예수에 대한 교리가 아닌, 임박한 종말을 가르친 예수의 삶을 보아야 한다며 "역사적 예수" 문제를 제기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 방법론에 있어서 기여하였다. 그는 실제 예수와 복음서에 묘사된 교리속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고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을 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2] 그의 주장은 크게 3가지이다.
- 1. 사도들이 믿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교리적 예수)와 실제 역사적 예수의 선포는 구분해야 한다.
- 2. 예수의 선포는 그 시대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 3. 예수의 선포와 사도들의 그리스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객관적 사기-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시체를 훔쳤고, 거짓말로 부활을 선포했다는 이론)[4]
이 중 1,2 만 신학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5]
[편집] 제2기 No Quest
라이마루스 이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에게서 교리적 그리스도를 분리하겠다"는 시도에 따라 숱한 예수전을 쏟아냈지만, 예수를 도덕적인 모범으로 이상화하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이 투시되는데 그쳤으며, 수백개나 되는 예수전들을 분석한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예수전 연구의 첫 시작자는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이며, 슈바이처와 마찬가지로 독일 루터교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 회의와 신앙적 불필요성으로 인해 사실상 붕괴되었다. 특히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신앙적으로 불필요함을 강력히 주장하여, 그의 신학이 신약신학계를 지배한 시기 동안 어떠한 역사적 예수 연구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저자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했다. 그리하여 예수전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이미지일 뿐, 실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묵시적 종말론자 즉,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언한 인물이었다.[6]
- 신학자브레데는 마르코 복음서가 당시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의 내용을 표현한 것임을 밝혔다. 즉 예수가 고난받는 순교자적 메시아라는 신앙이 메시아적이지 않은 예수의 삶을 메시아적인 것처럼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7] 슈미트는 공관복음서가 원래 작은 조각들로 나뉘어진 자료로부터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어 긴 이야기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원래 자료들은 단편적이었는데, 그것을 복음서 기자가 플롯을 만들어 그 틀에 따라 끼워넣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를 연구해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있다는 희망이 붕괴되었다.
- 종교사 연구는 예수가 유대교인이며, 기독교는 예수 부활사건 이후에 유대교를 모태로 시작되었다고 규명했다.[8]루돌프 불트만은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 사실과 그 사실을 믿는데 있다고 보았다.[9]
[편집] 제3기 New Quest
불트만의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1953년 마르부르크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기가 시작되는 길을 열었다.[10] 이들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다.
- 1. 모든 원시 기독교 문헌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이후 신앙의 그리스도가 동일하다고 전제한다. 이 점은 복음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앙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물을" 책임이 있다.
- 2. 유대교와 원시 기독교에서 유래한 모든 것을 배제한다면, 진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담은 전승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11]
[편집] 제4기 Third Quest
대부분 역사적 예수 연구가 독일 내지는 유럽 대륙에서 진행되어 왔었으나, 최근에는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3기의 연구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이단으로부터 분리시켜서 그 예수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 4기의 연구자들는 예수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면서, 당시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영지주의 자료도 역사적 예수 연구에 활용하려고 했고, 각각 그 주장이 서로 달라 일반화하기 어렵다.
신학자들의 모임인 예수 세미나의 복음서에 대한 학문적인 비평이 주목받기도 했지만, 문제는 예수세미나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학자들이 주로 참여한데다가 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자였기 때문에 대표성과 신학적인 형평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의 신학자들과 독일 신학자들은 예수 세미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제4기 연구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를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편집] 주석
- ↑ 실제로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볼트만은 복음서를 예수에 대한 교리의 집산이라고 했다. 《미래에서 온 기독교》,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정강길 지음/에클레시안
- ↑ 신약성서학자 마커스 보그의 해석
- ↑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p38
- ↑ 정승우,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2005, p29
- ↑ 게르트 타이쎈,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pp31-32
- ↑ 《미래에서 온 기독교》,'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정강길 지음/에클레시안
- ↑ 신약성서학자인 김득중 전 감신대 총장도 마르코복음서의 예수의 수난이야기속에 예수는 고난받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즉, 마르코가 십자가에서 처참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받으며 하느님의 존재여부에 대한 회의로 고뇌한 예수를 묘사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는 마르코 교회의 교우들과 십자가의 예수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 ↑ 성공회 사제이자 신약성서학자인 박태식(요한) 신부는 《타르수스의 바오로》(바오로딸)에서 85년 유대교 라비가 기독교인들을 나자렛 도둑이라고 단죄했다는 문헌을 인용하였으며, 90년 유대교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을 유대교에서 추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나자렛 도둑 또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리는 유대교의 소종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 ↑ 4.게르트 타이쎈,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pp34-37
- ↑ 게르트 타이쎈,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p38 각주 14.
- ↑ ^게르트 타이쎈,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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