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화(鄭和,Zhèng Hé 1371년 ~ 1434년)는 중국 (明)나라시대의 장군이자 환관이다. 영락제(永樂帝)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7차례의 대원정을 떠난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성씨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씨이고, 이름은 삼보(三保)였다.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이 되었기에 중국에서는 삼보태감(三保太監) 혹은 삼보태감(三寶太監)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해서 가장 멀리간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마린티(현재 케냐의 마린티)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寶船)은 전체길이가 120m 넘는 대형선박이었다고 한다.

목차

[편집] 생애

마삼보(후에 정화)는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윈난성(雲南省) 쿤양(毘陽)의 무슬림(이슬람교도)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씨인 마씨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이라는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도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을 순례한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존칭인 할지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징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때 몽골에 귀순하여 (元)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때 윈난성 개발에 노력했던 색목인 정치가 사이이드 아쟈르였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맘에 두게한 이유중 한가지가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을 건국한 후 원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윈난성을 공격하여, 아직 소년이었던 정화는 붙잡혀 거세를 당한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후에 영락제)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의 變)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씨란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편집] 남해원정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쪽바다에 대한 대원정을 준비하여 1405년 6월 제 1차 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의하면 전체길이가 44장(丈;약 137m), 폭 18장(약56m)에 이르는 대형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총승무원 2만 7,800명이 탑승했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120t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t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대함대였다.

소주(蘇州)에서 출발한 함대는 참파(지금의 베트남 중부)와 수마트라를 거쳐 팔렘방,말라카,실론(지금의 스리랑카)등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초쯤 인도 캘커타(Calicut)에 도달했다. 함대의 목적은 항해도중 만나는 나라에 대해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는 일과 남쪽에서 나오는 물물등을 가지고 돌아가는 일이었다. 말라카해협에서 해적질을 일삼던 진조의(陳祖義)란 중국인을 붙잡아 일시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이 항해로 인해 그때까지 명나라와 교류가 없었던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가 차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정화가 귀국한것은 1407년 9월로써 귀국후 얼마안있어 재출발 명령이 내려와 연말에 제 2차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항로는 예전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시암(타이)과 자바섬등을 경유하여 캘커타에 도착했다. 귀환중 스리랑카섬 가레란 곳에 중국어, 타미르어(현지어), 페르시아어(당시 국제어)등 3개국어로 쓰여진 비석을 세웠다.

1409년 여름에 돌아온 정화는 다시 출발명령을 받고 연말에 제 3차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캘리컷에 도달하고 돌아오던중 스리랑카섬의 현지 왕이 정화의 배에 실려있던 보물을 강탈하기 위해 공격했다. 정화가 반격에 나서 군대를 무찌르고 왕과 그 가족을 포로로 잡아 귀환하니 1411년 7월에 귀국했다.

3차례의 대원정은 거의 같은항로을 유지했지만 4번째 원정은 약간 시간을 두고 1413년 겨울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좀더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으로 준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컷에 도달한 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반도 남쪽의 아덴에 도달했다. 귀환중 수마트라 현지 국왕의 요청을 받아 병사를 움직여 반역자를 토벌하고 1415년 7월에 귀국했다.

5번째 원정은 1417년 겨울에 출발해 본대는 저번 원정과 같이 아덴까지 도달했으나, 도중 나눠진 분대는 아프리카대륙 동쪽해안의 마린티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1419년 8월에 귀국할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등 진귀한 동물을 데리고 돌아왔다.

6번째 원정은 2년후 1421년 2월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공을 바쳤던 각국의 사절을 돌려보내기 위한것이 임무였다. 항로는 동일했고, 1422년 8월에 귀국하였다.

7번째 원정은 영락제의 사후 그의 손자 선덕제(宣德帝)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1431년 12월에 출발하였는데, 이때 정화는 나이가 많아 지휘관직을 거절하려 했으나 그를 대신할만한 인재가 없었다. 이번 항해때 분대는 메카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433년 7월에 귀국하였지만 얼마 후 정화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정화의 사후 명나라는 다시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여 이후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화제(成化帝)때 다시 대항해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으나 항해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었다. 이 대항해에 대한 기록은 제 4차 원정과 제 7차 원정때 동행했던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과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嵯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등에 의한 견문지가 현재까지 남아있어, 그 시대 동남아시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간의 것이었고, 정화의 공식기록은 다시 대항해을 시작하는것을 두려워 한 관료에 의해 감춰지고, 그 이후 기록은 행방불명되었다.(일설에는 그 관료에 의해 소각되었다고도 한다)

[편집] 대원정을 한 이유

영락제가 막대한 비용이 드는 대원정을 기획한 것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었다.

  • 정난의 변때 남경에서 탈출한 건문제가 남해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라는 이유로 그 탐색을 위해 시작한 설
  • 서쪽의 티무르 왕조의 성장을 두려워 한 영락제가 티무르 제국의 주변 세력과 동맹을 맺고 협공을 하기 위한 설
  • 예전 주원장이 명나라 건국시 멸망시킨 진우량(陳友諒)휘하에 있던 수군세력이 반항할것을 두려워해 이들을 남해원정에 포함시켰다는 설 등이 있다.

첫번째 설은 믿지못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주목적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2번재설은 티무르가 제 1차 원정이 시작한 해에 죽었기때문에 믿을수가 없다. 3번재설은 주원장이 진우량을 격파한 시기가 너무 오래되었기에 납득할 수는 없다. 달리 생각할 만한 이유로는 찬탈이란 수단을 이용하여 즉위한 영락제가 국내의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 타국의 조공을 많이 받아 유교적 성왕이란 모습을 연출하여 스스로 계승의 정당성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일 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중국함대가 남지나해와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패권을 수립하는것으로 여러나라의 조공을 촉구하여 궁정에서 사용하는 해외의 사치품을 입수하기 위한것이 주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신등의 기록을 보더라도 여러나라의 물물과 통상교역에 대한 사정에 관심을 기울인것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동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집] 역사적 평가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 보다 70년이나 앞선 대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 채륜등과 함께 환관의 영웅으로 이야기 되었다. 또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에서도 정화에 대한 평판은 높아 자바, 수마트라, 타이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또한 정화함대는 당초부터 말라카해협에 건국된 말라카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써 중시하여 말라카국왕을 우대하였다. 그 때문에 말라카왕국은 정화함대의 보호아래 성장하여 중국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써 번영을 누렸다.

[편집] 참고 및 참조문헌

※ 일본어 위키를 참조 번역하였습니다. 아래는 일본어 참고 문헌입니다.

  • ルイーズ・リヴァーシーズ、君野隆久訳『中国が海を支配したとき 鄭和とその時代』新書館、1996年。
  • 宮崎正勝『鄭和の南海大遠征 永楽帝の世界秩序再編』中公新書、1997年。
  • ギャヴィン・メンジーズ 「1421—中国が新大陸を発見した年」ソニーマガジンズ、2003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