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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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식(張憲植, 일본어: 張間憲植, 1869년 9월 21일 ~ ?)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의 친일 관료이다.

서울 출신으로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도쿄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5년에는 관립 외국어학교의 교장과 학부 편집국장,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였을 때는 훈삼등 팔괘장을 서훈 받았고, 한성부윤으로 근무할 때인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 당하자 이토 추도회를 여러 차례 여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한일 합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1917년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1924년에는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장헌식은 도 참여관, 도지사를 지낸 관료 가운데서도 1921년 총독부의 민정시찰 사무관을 맡는 등 총독부와 특히 유착된 행보를 보였다. 3·1 운동 후 신설된 이 직책은 독립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同民會, 1924)에 가담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이 있다[1]

그는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 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임전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 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 식민 통치에 많은 공을 세운 그는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의 참의를 지냈으며, 광복 당시에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포함되었다. 부인인 임정재도 애국금차회에서 활동한 친일 인물이다.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02-01). “장헌식 :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장세윤)”,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편집] 주석

  1.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