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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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라틴어: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영어: Diocletian) (추정245년– 추정312년)는 284년부터 305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이른바 제3세기의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다.

제국의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했다. 한편 기독교를 탄압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초기의 생애와 권력의 장악

황제가 되기전에 그의 이름은 '디오클레스'라고만 알려져있고 자세한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345년을 전후해서 달마티아 지방의 스플리트 근처의 살로나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하층민 출신으로 보인다. 전임황제 누메리아누스의 경호 대장이었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군단에서의 경력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294년 누메리아스 황제가 니코메디아에서 죽자 휘하의 군단이 디오클레스를 황제로 옹립했고 나중에 누메리아스의 동생 카리누스가 죽은 후 제국의 유일한 통치가 되면서 이름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한다.

29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장군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고 이듬해에는 그를 다시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키고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한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나우 강 방위선과 동방의 방위선을 강화하는데 전념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몇번의 전투를 벌이고 휴전을 맺고 국경을 넘어서는 야만족을 격퇴하여 방위에 힘썼다. 이른바 제3세기의 위기동안 20명이 넘는 황제가 갈렸고 제국의 통치권은 굉장히 불안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외부의 적을 격퇴하고 방위선을 강화함으로서 국내의 권력을 강화해 통치권을 확립했다.

[편집] 로마제국의 개혁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른바 사두정치체제를 시작했다. 그것은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두명의 정제(Augustus)가 맡고 각각의 정제는 부제(Caesar)를 하나씩 두어 방위분담을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이다. 제국동방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제로 부제 갈레리우스를 임명하고 제국서방은 막시미아누스가 통치하면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부제로 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제국방위의 부담을 분산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각 황제와 부제의 담당지역은 아래와 같다.

사두정치체제 아래에서도 각각의 황제의 위치가 모두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방위의 분담이 가장 큰 것이고 사실상 디오클레이티누스는 자신을 세니오르라고 부르면서 다른 황제들과 구별하였고 제국 전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혼자 결정했다.

그는 내정개혁에 적극적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이미 유명무실해져 가고 있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원로원의 입법기능을 상실시켰다. 그는 집정관을 자신이 임명하도록하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면서 이를 보좌할 일종의 전문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로서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문관과 무관의 분리는 더욱 심해졌고 관료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미 그의 치세에는 황제속주와 원로원 속주의 구별도 사라졌다.

또한 로마군단도 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필요이기도 했지만 황제가 4명으로 늘어난 것에 따른 면도 있었다. 즉, 네명의 황제가 각각 자기 휘하의 병력을 증강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은 필연적으로 재정의 확대를 수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새로이 세금을 신설하여 이를 충당했고 당시에 세금면제혜택을 받아오던 본국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새로이 신설한 세제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 필요한 재정의 액수를 황제가 1년에 한번씩 결정하고 그것이 실질적인 수익과 관계없이 납세자에세 부과함
  • 모둔 세무는 통합하여 중앙정부가 관할
  •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atio)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로 양분하고 액수는 5년에 한번씩 사정함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축통화인 데나리우스 은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은화와 동화를 발행했으나 제국에 만연해있던 인플레이션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1년 가격통제칙령을 공포하고 모든 물품과 용역의 상한선을 정해 이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했으나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없었고 로마 경제는 위축되었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가격통제제도로 보여진다.

[편집] 기독교와의 관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303년 그는 기독교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고 기독교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기독교인의 모임을 불허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기독교가 만연해있던 제국동방에서 저항이 일어났고 소아시아에서는 기독교인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단호하게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또한 사제들과 주교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그들이 로마 신의 제의에 참석하면 풀어주었다.

304년의 마지막 칙령에는 기독교인은 고발이 없어도 추적하여 고문할 수 있도록하였고 모든 사람이 로마신의 제의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명령했고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역에 처했다. 이로서 기독교도인중에는 순교자가 많이 나온 반면 배교자도 많이 나왔다. 기독교측의 자료에는 약 3,000~3,500명이 순교했다고 되어있으나 정확한 순교자의 숫자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측에서 "대박해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임에도 순교자가 너무 적다고 하는 연구자들도 많다. [1] 이러한 기독교 박해는 대략 309년까지 지속되었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히 끝났다.

[편집] 은퇴와 말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의 상상도(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의 상상도(스플리트)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각각 니코메디아와 밀라노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후임으로는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의 정제로 승격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세베루스가 부제로 선정되었다. 이로서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달마티아의 스트라툼(현재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거대한 개인황궁을 짓고 그곳으로 은퇴하였다. 은퇴후 고립된 황궁에서 조용히 살면서 야채를 키우며 만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편집] 주석

  1.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제13권》 한길사, 141쪽
타고난 이름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Pius Felix Invictus Augustus)
재위 기간 284년 11월 20일 - 286년 (단독 황제)

286년 - 305년 5월 1일 (제국 동방의 정제, 제국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와 공통 황제)

앞선 황제 누메리아누스
다음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갈레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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