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말 압델 나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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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 압델 나세르(아랍어: جمال عبد الناصر - Jamāl, Abd an-Nāsir)는 이집트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1954년부터 1970년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지냈다.
[편집] 생애
나세르는 1918년 1월 15일 이집트의 베니모르에서 태어났다. 우체국 사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이로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으며, 20살 때 영국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다. 보병 소위가 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알렉산드리아로 파견되어 영국군 전선 부대의 후방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독립국이었는데 나세르는 항상 조국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불타 있었다.
1948년 나세르는 소령이 되어 제1차 중동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였고, 그 전쟁은 적국 이스라엘의 승리로서 휴전이 되었다.
나세르는 부상당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쉬고 있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생각은 정부가 부패한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격멸이 문제가 아니라 국내 정치 지도자들의 부패 문제부터 해결하고 이집트를 개혁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이집트의 왕 파루크 1세의 정부를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육군의 청년 장교들을 모아 비밀 조직인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1952년 6월 23일, 무하마드 나기브 장군과 함께 쿠테타를 성공시켜 파루크 1세를 비롯한 구 정치인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영국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던 봉건적 세력, 즉 파루크 1세의 정부를 없애고 영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민족 해방의 주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구 정권 타도에 성공한 후 1953년 6월에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 후에 나세르는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운 나기브 밑에서 부수상 겸 내상으로서 정부의 실권을 쥐었다. 그러나 건설 정책과 혁명 방식에서 그는 나기브와 뜻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세르는 군부 및 민족해방전선을 장악한 뒤 나기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비(非)동맹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및 인도와 친교를 맺었고,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56년 6월에 드디어 영국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한 나세르는 새 헌법에 의거한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정치, 경제면에서도 자주적인 독립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해 7월에는 그 때까지 영국의 회사들이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가 수에즈 위기로 이어졌고, 제2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나세르의 수에스 운하 국유화 조치에 반대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무력 침공하였다. 정치적 혼란 등으로 준비가 덜 된 이집트군에게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결국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등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전쟁 후 중동의 국제 관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는데, 그때까지 중동을 담당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견제하던 영국 세력이 후퇴하고 그 자리를 미국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미국이 대신하게 된 시기와도 일치한다(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 후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였다).
1958년 시리아와 병합하여 아랍연합공화국을 만들었지만, 1961년 9월 시리아가 아랍연합에서 이탈하자 국내의 사회주의 건설에 힘을 쏟았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등의 문제로 인해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1962년 국민헌장을 작성함과 동시에, 그 실시 기관인 아랍사회주의연합을 창설했다.
그러나 그는 북예멘에서 일어난 내전에 공화파를 편들며 무력으로 개입, 결국 5년 이상이나 내전이 계속되어 이집트 경제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었다. 1967년 6월 5일에 일어난 제3차 중동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불과 6일 만에 패전하고, 이집트 영토의 일부인 시나이 반도가 점령되는 수모를 겪어 했다. 전력이 강한 아랍 민족이 미국과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것이다.
나세르는 책임을 느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자신의 결심을 국민들에게 발표하자 온 국민들은 그를 만류하였다. 하는 수 없이 나세르는 그 다음 날 물러나겠다던 뜻을 바꾸었다.
그 뒤 그는 패전이 초래한 정치·경제·사회적 곤경 속에서 재건을 위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군사적으로가 아닌 정치적·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 6월 미국의 중동평화안(案)을 수락, 곧 요르단에서 일어난 정규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 간의 충돌 사건을 수습하려고 활동하다가 1970년 9월 28일 심장병의 발작으로 카이로에서 죽었다. 그의 지위는 안와르 사다트가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