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성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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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고려 말, 함경남도 화주(현재의 영흥 근처)에 원나라1258년에 설치한 통치기구로서, 자비령 이북의 동녕부와 함께 고려를 압박했다. 이 두 기구 모두 고려인들의 배신으로 원나라가 취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100여년간 유지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자주권 회복 및 영토 회복을 위한 북벌 정책의 핵심으로 이 두 기구를 무력으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편집] 설치

1258년(고종 45년) 원나라의 별장 산길(散吉)과 보지(普只)가 동여진(東女眞)을 경유하여 장성(長城) 이남을 침공했다.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竹島)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및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원나라에 투항했다. 중앙정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사건으로, 원나라는 어쨌거나 새로 점령한 이 지역을 다스릴 기구로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것이다. 이때 초대 총관으로 조휘가 임명되었고, 탁청은 천호(千戶)에 임명되었다. 이후 총관은 한양 조씨 집안이 세습하여 조휘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림, 종증손 조소생이 세습하였고, 천호도 탁청의 후손들이 세습하였다.

한편, 10년 뒤인 1269년에 최탄은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원나라에 바쳤고, 원나라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때는 원나라의 침입과도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편집] 탈환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 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추밀원부사였던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공민왕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받고 대호군 공부보(貢夫甫), 종부령 김원봉(金元鳳),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출정했다. 이때 조휘의 증손자인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었다. 쌍성총관부는 함락되었고, 조소생은 도망갔다.

이후 유인우는 화주목을 설치하여 나머지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관할 지역을 수복했다.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인 조돈도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새로이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관여하여 개국 공신에까지 이르렀다. 이성계가 나중에 태종을 싫어하여 함흥으로 떠나버린 것도 그의 출신지가 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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