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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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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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마 전투의 상상도 (15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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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로마 공화정 마실리아 (동 누미디아) |
카르타고 | ||
지휘관 |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마시니사 |
한니발 | ||
병력 | |||
34,000 로마 보병 3,000 로마 기병 6,000 누미디아기병 |
약 50,000 보병 4,000 기병 80 전투 코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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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상황 | |||
사망: 1,500 부상: 3,000 |
사망: 20,000 부상: 11,000 포로:15,000 |
자마 전투는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카르타고 남서 지방에 있는 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짓는 결정적인 전투로 로마 공화정 지휘관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고, 카르타고 측 지휘관은 한니발이었다. 전투는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이어 종전협상에서 카르타고는 항복하였다.
목차 |
[편집] 전투전의 상황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의 놀라운 전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의 봉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급기야 지원군으로 오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도 메타우로 전투에서 죽고 전선을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 다른 동생 마고네도 부상을 입고 제노바에 서 꼼짝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니발의 전략적인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승리에 이어 북아프리카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신중을 기하는 원로원의 반대로 카르타고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시니사와 함께 서부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물리치고 기병을 획득하자 스키피오는 자신감을 얻고 공세에 나섰다.
그사이 양쪽은 강화를 위해 협상이 오고 가고 있었다. 로마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의 포기, 5천탈란트의 전쟁 배상금, 그리고 카르타고 해군의 해체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니발과 마고네는 본국 카르타고로 부터 송환 명령을 받고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마고네는 돌아오는 항해중에 죽었다.)그러나 카르타고는 갑자기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협상을 결렬시켰다.
이제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각각 국가의 운명을 걸고 북아프리카에서 결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전날 두 사람은 단독으로 대면했다고 한다. 이 단독 회담에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운명은 알수 없는 것이니 위험한 도박을 피하고 여기서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로마의 강화조건을 거듭 주장하며 여기서 멈출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전은 피할 수 없었다.
[편집] 전투의 상황
[편집] 전투 포진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통상적인 포에니 전쟁 전투와 정반대의 상황에 있었다. 항상 로마군은 보병이 많았고 기병이 부족했으나 이번에는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군으로 넘어간 탓으로 카르타고군이 기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카르타고군은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선두에 배치하고 두번째 세번째 열에 비교적 전력이 약한 용병 혼성군과 카르타고 시민군을 배치했다. 후방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한니발 자신과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최정예 부대를 배치했다. 에 맞서는 로마군은 보통의 진영의 소대간벽보다 더 넓게 진영을 짜고 경무장 보병도 소대를 편성하였고 보병은 스키피오자신이 지휘하고 양쪽 날개에는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 기병을 각각 배치하였다.
[편집] 전투의 전개
한니발이 기병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준비한 80마리의 전투 코끼리가 먼저 로마군 진영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코끼리에 대비해 평소보다 넓게 소대간격을 벌이고 경무장 보병도 소대단위로 편성한 스키피오의 능숙한 대처로 인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누미디아 기병의 보강으로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우세한 기병으로 카르타고 기병을 분쇄한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우세한 중무장 보병을 세방향으로 나누어 카르타고의 용병 혼성 보병대를 포위하였고 카르타고 용병들은 포위망속에서 차츰 괴멸당했다.
[편집] 전투의 종반
한니발은 로마군이 지쳐있다고 판단하고 후방에 물러나있는 자신의 정예 보병을 전진시켰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나발의 정예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모든 병사를 재편성하여 맞섰다.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사용했던 전술로 활모양으로 진영을 개편하여 포위망을 구축하는 전술이다. 그리고 적의 기병을 추격하던 로마의 기병이 돌아와 포위에 가담하자 한니발의 주력부대는 완전히 괴멸당했다.
[편집] 전투의 결과
이 전투로 16년을 끌어온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결을 맞는다.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가 제시한 강화조건을 승인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후로 로마의 징벌적 휴전조항에 의해 카르타고는 다시는 지중해에서 군사강국이 되지 못했다. 약 70년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때도 카르타고는 자신의 영토를 간산히 지킬만한 군사력만 가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