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후쿠치야마 선 탈선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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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후쿠치야마 선 탈선사고(일본어: JR福知山線脱線事故)는,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8분경(일본 표준시)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 후쿠치야마 선(JR 다카라즈카 선) 쓰카구치(塚口)~아마가사키(尼崎)역 간에서 발생, 승객 106명과 운전기사 1명을 포함해 총 107명이 사망한 열차 탈선 사고이다.
사고열차는, 쓰카구치~아마가사키역 간의 곡선부에서 탈선하여 앞쪽 2량이 선로변의 맨션에 충돌했다. 이 열차는 시발역인 다카라즈카 역에서는 회송시에 ATS(자동 열차 정지 장치)가 작동하여 긴급 정지하는 일이 발생했었고, 사고현장 직전의 정차역인 이타미 역에서도 오버런에 의해 정차위치를 통과했었기 때문에, 사고 이후에는 다른 철도 사업자나 노선에서 발생한 열차의 오버런도 크게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JR 서일본은 사고 당일 있었던 발표에서 선로 위에 놓여져 있던 돌에 의한 탈선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이로 인해 유쾌범에 의한 악질적인 장난도 연달아 일어났다. 그 이외에도 사고에 편승한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보도에서는 사고가 발생한 노선명의 표기가 여러 가지로 나뉘어졌다. 아사히 신문과 고베 신문, SUN-TV는 'JR 다카라즈카 선'이라는 애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외의 매스 미디어에서는 정식 명칭인 '후쿠치야마 선'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나 발생한 현장의 지명에 의해 'JR 다카라즈카 선 탈선사고'·'아마가사키 사고'·'아마가사키 탈선사고'라고 불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해외에서는 보통 '아마가사키 탈선 사고'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이 사고의 정식 명칭은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사고(일본어: JR福知山線脱線事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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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상세
사고는 9시 18분경, 효고 현 아마가사키 시의 JR 후쿠치야마 선에 있는 반경 300m의 우측 커브 구간(쓰카구치 역에서 약 1km·아마가사키 역을 약 1.4km 앞둔 지점)에서 발생했다.
사고 열차는 다카라즈카 발 가타마치 선(片町線)도시샤마에(同志社前)행 상행 쾌속 전동차(7량 편성)로, 5량 전부가 탈선했다. 앞쪽의 2량은 선로 가의 9층 맨션 건물에 충돌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파되었다. 열차에는 사고 발생시 주변 열차에 비상사태를 알리기 위한 열차 방호 무선 장치가 탑재되어 있었지만, 탈선에 의해 전력공급이 끊겨 해당 열차 차장이 조작한 방호 무선은 동작하지 않았다. 그런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된 예비 전원 변환 수동조작 방법은 승무원에게 철저하게 교육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 사고 열차는 방호무선을 발령하지 못했다. 사고 당시, 하행선에는 신오사카 발 시로사키 온천(城崎温泉)행 특급 '기타킨키(北近畿)'가 접근 중이었지만, 사고를 목격한 인근 주민의 재치에 의해 옆에 있던 건널목의 비상버튼이 눌려 특수신호발광기가 점등되었고 이에 운전기사가 이상을 감지, 대략 100m 앞에서 정차하여 방호무선을 발령했기 때문에 이중 사고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이 비상버튼의 작동으로, 사고발생 직후 JR서일본은 역 구내 등에서 '건널목 사고'라는 안내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동차가 충돌한 지점의 가선 기둥은, 주행하고 있던 선로와는 반대측에만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붕괴되지 않았다.
덧붙여 현장의 커브는, 상행선은 원래 직선 구간이었지만(맨션 앞의 도로가 선로였음), JR 도자이 선 개업과 동시에 하행선과 같은 경로로 변경되었다.
사고 당시, 열차는 앞부분의 4량 편성과 도중역인 가타마치 선 쿄타나베(京田辺)역에서 분할할 예정인 3량 편성을 병결한 7량 편성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1·4·5·7량째에 열차의 운행상태를 기록(비상제동 작동 전후 5초간)하는 '모니터 제어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고 후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가 이것을 해석하였는데, 앞에서 5량째(후부 3 양편성의 선두 차량)와 7량째에 설치되어 있던 장치에 108km/h라는 기록이 표시되어 있었다. 다만, 이것이 곧 탈선시의 속도라고는 할 수 없다.
선두차량이 탈선에 의해 급감속하여 잭나이프 현상이 발생하였고, 재편성 작업의 용이성을 위해 볼트와 너트를 연결한 것 뿐인 구조로 되어 있던 연결기 부분이 꺾여 접히는 바람에 연쇄추돌이 발생하여 피해가 확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사고 차량 맨 앞의 선두차량은 편륜(片輪)주행으로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가선 기둥에 접촉하여 그대로 직진, 맨션 가의 입체 주차장과 거기에 있던 승용차와 함께 1층의 주차장 부분으로 돌진하여 벽에 충돌했다. 2번째 차량은 선두차량과 같이 편륜주행 끝에 맨션에 차체 측면으로 충돌하였고, 게다가 3량째에 추돌당해 건물 모퉁이에 달라붙은 모습으로 대파되었다. 3량째는 2량째와 4량째에 상행 방향(아마가사키 방면)을 앞뒤가 거꾸로 된 상태로 비스듬하게 차단하며 정지했다. 4량째도 3량째를 사이에 두고 하행 방향(후쿠치야마 방면)의 선로와 서쪽 길의 반을 비스듬하게 차단한 상태로 각각 정지했다.
사고 발생 당초에는, 사고 차량의 2량째가 1량째로 오인되어 있었고, 1량째는 발견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원래 있어야 할 차량의 수와 목시로 확인할 수 있는 차량수가 일치하지 않았고 1량째의 존재가 확인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색이 실시되어 발견되었다. 차량 가운데, 앞부분 Z16편성의 4량은 사고 당일 폐차수속이 완료되었다. 사고가 발생한 주차장 주변에 휘발유 유출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안전을 위해 버너나 전동 커터를 이용하지 못해 구조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3량째부터 차량 해체 작업을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모든 작업은 3일 후인 4월 28일 종료되었다. 사고 차량은 통근열차였기 때문에 탑승했던 정확한 승객 수는 확정되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반경 300m짜리 곡선 구간의 제한속도는 사고 후에 70km/h에서 60km/h로, 곡선구간에 직전의 직선 구간의 제한속도는 120km/h에서 95km/h로 각각 변경되었다.
[편집] 피해
주민에 대한 2차적 피해는 없었지만, 직접적인 사고의 희생자는 사망자 107명(운전기사 포함), 부상자 562명으로 전대미문의 대참사가 되었다. 이는 일본의 철도사고 사상 7번째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1량째와 2량째에서 발생했다. 운전기사는 압사, 승객 사인의 4할은 두부(頭部)손상이었으며 질식이나 다발 외상·좌멸 증후군도 확인되었다.
이후 사고로는 부상당하지 않았던 승객이나 맨션 거주자, 구조작업에 참가한 주변 주민들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사고 당시 맨션에는 47세대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붕괴 가능성을 고려하여 JR서일본이 준비한 호텔 등으로 피난했다. 이후에도 2세대가 남아 있었지만 2005년 8월 상순까지 모두 이주했다.
[편집] 대응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지진)의 경험이 활용되어 신속한 대응이 이루어졌다. 사고 발생 당시 가장 먼저 구조에 나선 것은 인근 주민이나 기업이며, 기업 중에는 공장 가동을 일시정지하고 참가한 곳도 있었다. 부상자의 반수 가까이를 주민이나 기업이 의료 기관에 반송하였으며, 후에 구조·구원 활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5년 7월 76개 기업·단체와 개인 1명에 대해 정부로부터 감사장이, 8월에는 48개 기업·단체와 개인 34명에 효고현경으로부터 감사장이, 9월에는 32개 기업·단체와 개인 30명에 대해 아마가사키 시로부터 감사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또, 11월에는 자사의 업무를 모두 정지시키고 구조활동·부지 내를 활동거점으로서 구조에 임한 기업과 2차 재해 회피를 위해 선로 내에 들어가 반대편 열차에 이상을 알린 개인 1명에 대해서 훈장이 수여되었다.
[편집]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에 의한 원인의 특정
일본의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이하 사고조)는, 2006년 12월 20일 사고의 원인은 '운전기사가 무선 회화에 정신을 빼앗겨 제동조작이 늦어 70km/h 제한인 오른쪽 커브에 116km/h로 진입했기 때문'이라는 사실 조사보고 제안서를 공표했다. 사실관계에 대한 기술만으로 300페이지를 넘어 일본의 사고 조사 보고서로서는 사상 최대의 분량이 되었다.
사고조는 JR 서일본측의 반론 등을 듣는 공청회를 연 뒤, 재차 사고 조사보고 서안을 제출하여 수리되었고, 이후 2007년 2월 최종보고서를 정리했다.
2007년 6월, 위원회는 운전기사가 사고 직전에 범한 오버런으로 징계 처분받을 것을 우려, 차장의 무선교신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현장의 커브에서 제동이 늦었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사고의 배경에 'JR 서일본의 운전기사에 대한 징벌적인 일근교육이나 징계가 있다'고 하여, JR 서일본의 기업체질을 비판하는 최종보고서를 공표하여 2년에 걸친 사고 조사가 종료되었다. 사고 조사위원회가 사고 원인에 대해 기업체질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종보고를 받아 사고 원인에 대해 사고조에 감정을 의뢰했던 효고현경은 형사책임 추궁을 위해 수사를 본격화했다.
[편집] 탈선의 원인
사고 열차는 이타미(伊丹)역을 오전 9시 16분경에 출발한 후, 70km/h 제한인 현장 오른쪽 커브(반경 304 m)에 116km/h 로 진입했다. 이 때, 운전기사는 커브 진입 직후 상용 브레이크 1단, 3~4단째를 약 0.2초, 5단을 약 0.8초, 6단을 약 0.2초, 7단을 약 2.4초째에 각각 사용하여 105km/h 로 감속한 단계에서 상용최대제동인 8단 브레이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벌써 우측 차륜이 원심력으로 공중에 뜬 상태가 되어, 9시 18분 54초경 1량째가 왼쪽으로 전도하듯이 탈선했다. 그리고 이어서 2~5량째가 탈선했다.
브레이크 레버가 비상제동 위치에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주행중에 비상제동을 조작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고 충격에 의해 레버가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JR 서일본은 당초 현장 커브의 전복한계속도가 133km/h 라고 공표했으나, 이것은 공차(空車)상태를 가정한 것이였으며 좌우동(左右動)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고조는 현장과 같은 반경 304m의 오른쪽 커브에서 당시와 같은 '1량째 93명, 2량째 133명 승차'라는 조건으로 시뮬레이션을 거듭한 결과, 열차의 좌우동도 고려할 경우 전복한계속도는 106km/h 였다고 판정했다. 이에 따라 사고는 단순한 속도초과에 의한 횡전(橫轉)탈선으로 판명되었다.
[편집] 운전사의 행동
사고조는, 당초부터 운전사의 심리가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보고서에서도 운전사와 차장의 행동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운전사는 전날 근무를 끝낸 후 방출 출장소(히가시오사카 시)에서 숙박하였고, 2005년 4월 25일 오전 6시 8분에 점호를 받아 승무를 개시했다. 8시 31분, 사고 차량인 아마가사키 발 다카라즈카 행 회송 전동차에 탑승했다.
- 8시 54분 , 다카라즈카 역 구내의 분기기(40km/h 제한)에 65km/h 로 진입하여, ATS(자동 열차 정지 장치)에 의한 비상제동으로 홈 앞에 정차한다. 진입선로를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재출발 후에 다시 ATS로 정차한다.
- 진행방향 전환을 위해 신속히 반대편 운전석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평균의 3배 가까운 2분 50초나 차내에 머물렀다. 교대를 위해 온 차장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운전기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낙담하고 있었다.
- 겨우 밖으로 나온 운전사에게 차장이 "P(ATS-P)로 멈춘거야?" 라고 묻지만 무시한다.
- 전동차의 재기동시, 시험 무선 버튼을 특수 조작(차장과 종합사령소 간의 교신을 들을 수 있는 비법으로서 운전사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다카라즈카 역 구내에서의 ATS 작동은 보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차장이 종합사령소에 보고하는 내용을 들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 도시샤마에 행 쾌속 열차로서 15초 지연된 9시 4분 00초에 다카라즈카 역을 출발.
- 이타미 역의 정차위치 643m 앞을 113km/h 로 주행 중에, ATS의 정차 안내 기능이 작동하지만 그대로 주행. 468m 앞에서는 2번째 경고 음성이 발동하여 브레이크 조작 위치를 통과. 72m 오버런.
- 이타미 역을 1분 20초 지연된 9시 16분 10초에 발차. 124~125km/h 까지 가속한 후 타성운전.
- 차장이 '다음은 아마가사키'라고 안내를 시작했을 때, 차내 전화로 "봐주실 수 없습니까"라고 의뢰. 이에 차장이 "조금 갔던 것으로?"라고 대답하는 순간 승객이 창문을 두드려 오버런의 사과 방송을 요구하여 회화가 중단된다.
- 사과 방송 후, 9시 18분, 차장이 종합사령소를 열차 무선으로 호출하여 오버런의 보고를 시작한다. 이 때 2단 제동이 잠깐 사용된다.
- 차장 "네,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대략 8m 더 가서…" 이 말 사이에 제동 개시 기준인 메이신 고속도로 고가교 아래를 통과하지만 제동 조작은 없음.
- 차장과 종합사령소 사이의 회화가 사고현장의 커브까지 계속된다.
- 종합사령소가 "그러면, (사고 열차의)운전기사 응답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 같은 시각, 열차가 사고현장의 커브에 116km/h 로 진입. 처음으로 제동조작을 시작하지만 탈선.
운전사의 심리적 영향은 다카라즈카 역 구내에서 ATS에 의해 정지한 8시 54분 무렵부터 이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카라즈카 발차 후 차장의 보고를 무선으로 청취하다가 이타미 역 앞의 두 번의 경보 음성을 듣지 못해 이타미 역을 오버런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운전기사는 사체 발견 당시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비닐 케이스로도 쓸 수 있는 특수한 빨강 연필을 꺼내고 있었다. 또, 운전기사는 특수한 무선 조작을 통해 차장의 회화를 몰래 엿듣고 있었으며, 무선 통화가 시작된 뒤 사고현장의 커브에 접어들 때까지 약 40초간 아무런 운전 조작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사고조는 운전사가 통화내용을 메모하려 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원래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지점에 접어들어서도 제동조작을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커브 진입시의 제동조작에 놀란 모습이 없이 평상시처럼 습관적으로 행했다고 생각되며, "운전사는 전동차가 기운 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라는 승객의 증언으로 보아 운전사는 사고 순간까지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고가 발생한 커브 구간도 사고 당시의 속도로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편집] 사고의 간접적인 원인
이 사고에 대해 많은 문제가 지적되었다.
[편집] JR 서일본의 경영상의 문제
- 제 2차 세계대전 전의 철도성 시대부터, 병행하는 간사이 사철 각사와 격렬한 경쟁관계에 있다. 그 후 국철 오사카 철도 관리국 시대에는 신쾌속 열차가 등장하는 등 경합하는 사철 각사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했다. 민영화 후에는 JR 서일본 사원 사이에서도 그 의식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사고 직후에는 사원에 대한 회사의 징벌적 일근교육(日勤教育,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실정이 보도되어 비난을 받았다.
- 사철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의식한 나머지, 운전시각표가 과밀하계 계획되어 속도 향상에 의한 소요시간 단축이나 편성 증가 등 여객에게 호감을 주는 서비스나 눈앞의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시각이 있다. 안전에 대해서는 개인의 경험칙에 의지하는 방법을 선호하여 신뢰성 설계(고장 안전(fail-safe))에 대한 투자가 시행되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 안전 설비 투자에 대한 움직임이 둔했던 배경에는 앞서 서술한 것 이외에도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나 산요 신칸센 콘크리트 낙하 문제 등으로 많은 돈을 지출했던 것이나, 동일본 여객철도(JR 동일본)나 도카이 여객철도(JR 동해)에 비해 수익성이 좋은 노선이 적었던 것, 적자 로컬선에 대한 공사와 그에 수반하는 낮 운휴(JR 동일본과 달리 운휴시의 대체수송은 없다)등을 들 수 있다.
[편집] 운전시각표 측면에서의 문제
- 사고 발생 노선인 JR 후쿠치야마 선(JR 다카라즈카 선)은, 한큐 전철의 주요 복수 노선(다카라즈카 본선·고베 본선·이타미 선)과 경합이 있어 다른 경합노선의 대항책과 같이 초(秒) 단위의 정시 운행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원래 전체적으로 여유가 없는 운전시각표인데다 정차역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초 단위로는 40초 정도 늘어났지만)소요시간은 운전시각표 개정 전과 같았기 때문에, 제한속도를 넘은 운행과 지연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 구간 뿐만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주행하다가 정차역 직전에 강한 제동을 거는 방법이 상시 행해지고 있었다. 특히 해당 열차의 경우 다른 시간대의 열차보다 빠른 시각표(다카라즈카~아마가사키 간에서는 후쿠치야마 선의 모든 쾌속열차 중 최고속도)로, 사고 발생 구간인 쓰카구치~아마가사키 간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또, 사고 조사위원회에 의한 운행 데이터 분석에 의해 다카라즈카 역을 사고 열차(당시 다카라즈카 9:03발)에 앞서 발차하는 신오사카 행 특급(당시 다카라즈카 9:02발)이 평균적으로 약 1분 정도 항상 지연된 상태로 운행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어 있다.
[편집] 노선 설비상의 문제
- 해당 노선은, 사고 발생 전에는 운행 편성수가 많고 속도도 비교적 높은 대도시 근교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속도 대조 조사용 설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해당 노선의 ATS-SW형의 경우 신호와는 독립된 속도 대조 조사 기능을 추가하여 필요개소에 지상자를 설치하면 속도초과시 긴급정지 기능이 동작된다.
- 선로 개수로 곡선반경이 작아졌다. 맨션 앞은 궤도 부지 내이지만, 이 장소는 원래 하행선만의 구간으로 상행선은 현장의 맨션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있었다. 그 후, JR 도자이선과의 직통에 대응한 아마가사키 역 개량에 수반하여, 하행선에 병설되어 있던 아마가사키 시장 화물선 철거지 등을 이용하는 형태로 현재의 상행선이 부설되었다. 이 시점에서, 신규 개업 구간인 JR 도자이선 구간에는 신형 ATS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후쿠치야마 선은 개수구간을 포함하여 설치되지 않았다. 또, 이 커브에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나고야와 코베 고속도로의 교각이 궤도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용지의 문제로 용이하게 개량할 수 없었다. 이것을 두고 선로 개수가 안전성을 무시한 것이었다고 비판한 미디어가 있었지만 이것은 완전한 오보로, 반경 300m 정도의 커브는 전세계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 곡선반경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어디까지나 탈선은 속도 초과에 의한 것이다).
- 철도의 경우 곡선 구간에서 고속운전을 하기 위해 캔트(선로를 기울이는 것)를 주는데, 현장은 완화곡선장이 짧아 상한 105mm보다 적은 97mm의 캔트가 주어져 제한속도가 5Km/h 적다. 이 경우(반경 300m에 캔트 105mm(상한치)) 제한 속도는 75Km/h 다. 종전의 원칙으로는 60km/h~65km/h.
[편집] 차량의 문제
[편집] 메커니즘 면
- 207계 7량 편성 앞 4량과 뒤 3량은, 주전동기(모터)의 출력 등의 성능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앞 4량은 155kW·뒤 3량은 200kW).
[편집] 브레이크 시스템 면
- 207계의 브레이크 핸들에는, 상용최대제동 위치~비상제동 위치 사이에 둘 중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는 범위가 있다. 사고를 낸 1량째의 차량도 포함하여 일부 차량은 이 범위가 특히 큰 경우가 있었다.
- 브레이크 핸들의 각 놋치의 감속도가(특히 회생제동 작동시에는) 설정 기준치에 비해 과대했다.
[편집] 차체 면
- 사고를 낸 207계 차량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스테인리스 강철제로, 이는 보통 강철제 차량에 비해 전면(前面)충격에는 강하지만 측면충격에 약하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 스테인리스는 녹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경년열화(經年劣化)가 적다는 장점이 있다. 또, 207계 차량은 보통 차량에 가까운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보통 강철제 차량과의 강도 차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 철도차량의 경우, 정면충돌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정면과 그 주변은 다른 부위에 비해 충격에 강하게 설계(맨션 1층 주차장으로 돌진하여 일부가 철판을 찢고 지하층까지 들어간 1량째도 정면은 그다지 변형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되어 있지만, 이번 사고의 경우 1량째를 제외하면 강도가 약한 측면으로 충돌하였으며, 특히 2량째는 수직 방향으로 압축되어 피해를 확대했다고 여겨진다.
- 2005년 12월 25일 발생한 JR 우에쓰 본선 특급 탈선전복 사고나 일본국철 시대에 제조된 보통 강철제 차량 일부가 "<" 형태로 꺾여진다는 실험결과 등을 고려할 때, 차체 측면 강도에 대한 비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 또 "최근 개발된 전동차의 경우 고출력의 전동기를 소수 탑재하고 부수차를 늘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앞서 서술한 경량 스테인리스 차체와 함께 탈선을 촉진시킨 원인이 되었으며 이것을 피드백하여 사고 이후에 영업운전에 투입된 321계는 전동차 비율을 올렸다"는 취지의 보도도 잇따랐다. 그러나, 전동차 비율을 올리는 대신 전동차 1량당 주전동기 수를 절반으로 하고 있는 점이나 설계·제조 시점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보도는 오보로 추측된다.
[편집] 보수 면
- 4년에 1번 속도계를 검사하도록 되어 있지만, 사고차량은 납차 후 한번도 검사되지 않았다. 7량째에 있던 속도계는 +4km/h 의 오차가 있었다.
- 사고차량과 같은 207계의 제동관을 사용기한이 지난 후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던 것이 밝혀졌다(※호스는 고무제로, 노후화에 의해 손상되면 비상제동이 체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편집] 사고 승무원의 문제
- 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운전 경력 11개월에 운전 기술이나 근무 태도가 미숙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배경에는, 일본국철 분할 민영화 후의 인원 삭감이 있다. JR 서일본은 다른 JR 각사에 비해 장기간에 걸쳐 신규 채용을 실시하여 정년퇴직자가 늘어난 것을 계기로 채용자를 늘렸기 때문에, 운전 기술을 가르치는 중견 및 베테랑 운전기사가 적어졌다.
- 운전기사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몇 번이나 오버런을 일으켰으며 사고 당시와 마찬가지로 그 때마다 허위보고를 해 상사에게도 지적당했다. 때문에 JR 서일본의 운전기사 적성 판단이 타당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 시발역인 다카라즈카 역 구내로 진입할 때, ATS(자동 열차 정지 장치)가 작동하여 올바른 정차위치보다 앞에 정차했다. 이것을 보정하기 위해 가속한 결과 이번에는 원래의 정차 위치를 지나쳐 오버런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또, 같은 역에서 차장과 마주쳤을 때, 차장이 2번의 실수에 대해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 후, 이타미역에서 일으킨 70m 오버런에 대해, 운전사가 차장에게 과주(過走)를 경감해 달라고 부탁. 이 무선교신 중에 승객이 차장에게 말을 걸어와 전화가 끊겼다. 이 때 운전사는 차장이 화가 나 전화를 끊은 것이라고 믿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차장은 운전사의 부탁을 승낙하여 8m 오버런으로 축소하여 신고했다. 운전사는 사고 발생 30초 전에 오버런에 대한 운전지령소와 차장 간의 무선 연락을 청취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타미 역 홈 끝의 건널목 유무 확인이었지만 운전사는 지연 회복을 재촉하기 위한 무선이라고 믿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 무선이 운전사에게는 심리적 압력의 하나가 되었다고도 지적되며, 기록에 의하면 커브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무선연락이 행해지고 있던 40초간 아무런 운전 조작이 행해지지 않았으며 사고 직전에 지령소가 운전사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있어, 이 무선연락에 대한 응답에 운전사가 정신을 빼앗겨 운전에 대한 집중력을 잃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운전사가 운전 중에 무엇인가 메모하려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서술하고 있다).
- 아마가사키 역에서 JR 고베선의 열차와의 상호연락을 위해 본인의 실수에 의한 약 2분 정도의 지연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 제한속도를 크게 초과하는 운전으로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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