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고르넬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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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넬리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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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고르넬리오(라틴어: Sanctus Cornelius, 이탈리아어: Papa Cornelio)는 제21대 로마 교황(재위: 251년 3월/4월 - 253년 6월)이다.
로마의 유명한 고르넬리아 가문 출신이며 로마 황제의 데키우스가 고트족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로마를 떠났을 때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 파비아노가 순교한 후 계속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치열하였으므로 교회는 로마의 주교를 선출할 여유가 없었다. 로마 주교의 부재 중 교회는 노바시아노를 포함한 사제단에 의하여 임시 통치되었다. 고르넬리오가 선출된 후 노바시아노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다. 노바시아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세 주교들에 의하여 주교로 서품된 후 조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251년 10월 고르넬리오는 로마에서 수많은 성직자들로 구성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노바시아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뉘우치는 배교자들은 다시 교회로 받아들인다는 카르타고 교회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고르넬리오는 노바시아노의 파문과 카르타고 교회회의 결과를 안티오키아의 주교 파비아노에게 전달하였다.
한때 치프리아노 주교의 경쟁자 포르투나투스가 고르넬리오에게 치프리아노를 모함하여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 사이에 금이 갔으나 후에 화해하였다. 고르넬리오가 안티오키아의 주교 파비아노에게 보낸 편지는 역사적으로 로마 교회의 조직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그 당시 로마 교회는 46명의 신부와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종 42명, 엑소시스트 52명, 독경자와 수문자, 1500명 이상의 과부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3세기 중엽 로마 교회는 약 5만 명의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였다.
《리베리아노 목록》에 의하면 고르넬리오는 252년 6월 갈루스 황제가 재개한 기독교 박해로 인하여 첸툼첼레(오늘날의 치비타베키아)로 유배되어 선종하였다.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가 순교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4세기 《로마의 순교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갈리스토 묘지의 루치아나 지하묘지의 대리석에 '고르넬리오 주교 순교자(Cornelius Martyr Ep)'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 임 파비아노 |
제21대 교황 251년 3월/4월 - 253년 6월 |
후 임 루치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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