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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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재 위
1722년 ~ 17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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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황제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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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황제 건륭제
청나라의 제5대 황제

청세종 옹정제(淸世宗 雍正帝, 1678년: 강희(康熙) 16년 12월 13일 ~ 1735년: 옹정(雍正) 13년 10월 8일)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722년 ~ 1735년)이다. 성명은 애신각라윤진(愛新覺羅胤禛)이다. 강희제(康熙帝)의 4남이며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전성기로 만들어 놓은 청나라를 더욱 안정시키고 통치체제를 완성한 명군이다.

목차

[편집] 초기 생애

1678년북경 자금성에서 덕비 오아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윤진은 무예와 사냥을 좋아하였고 이를 안 강희제는 윤진을 데리고 원정에 나가기도 하였다. 부황인 강희제는 윤진을 엄격히 가르쳤으며, 모험심이 강한 윤진은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다.

1698년에 패륵에 봉해졌고 그 이듬해에 군왕에 봉해졌다. 강희 42년인 1704년양자강황하가 크게 범람하자, 강희제는 윤진과 13남 윤상을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세금을 걷어오게 하였다. 그 당시 청의 국고는 50만 냥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재민 구제와 치수를 위해 강남에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탐관오리 30여 명을 가차없이 파면하였다.

이로 인해 부황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1709년에 황자들 중 최고위직인 친왕을 제수받고 옹친왕(雍親王)이라 불리게 되었다.

[편집] 세력 형성

1708년에 강희제는 여색을 밝힌 황태자 윤잉(胤礽)을 폐위시킨다. 1709년에 강희제는 자신의 죽은 황후인 효성인황후에 대한 마음 때문에 결국 복위 시켜주지만, 윤잉은 반성하지 않고 심지어 부황의 비빈들까지도 노렸고 심지어는 일부 비빈을 범하기도 하였다. 이에 분한 강희제는 천인공노할 폐륜을 저지렀다 하며 윤잉의 작은외조부인 색액도를 사사시키고, 윤잉을 다시 황태자에서 폐위시켰으니 그 때가 1711년이었다.

정국을 읽는 눈이 빨랐던 4황자 옹친왕 윤진은 13황자 윤상(胤祥), 17황자 윤례(胤禮), 강희제의 죽은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대신 융과다(隆科多)와 연갱요를 자신의 세력 안에 두고 부황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가장 큰 경쟁자들은 서장자이자 황장자인 윤제, 8황자 염친왕 윤사, 14황자 순군왕 윤제였다.

그러나 황장자 윤제는 부황에게 폐태자 윤잉을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는 말을 하여 부황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당하였다. 윤사는 윤진과 함께 황자들 중 가장 영특하였으나 윤잉이 폐위당한 이후, 노골적으로 태자직은 물론 황위를 노렸고 이 소문이 들리자, 강희제는 윤사를 매우 싫어하였다. 14황자 윤제는 윤진의 동복 아우였으나 강희제와 같이 많은 원정을 다녀왔고 무원대장군직을 수여받았다. 강희제는 만년에 14황자인 윤제를 제일 총애하였다.

[편집] 강희제의 유조와 정변

1722년 12월 초, 강희제는 북경 창춘원(暢春園)에 있었다. 이 때 강희제는 모든 대신들의 출입을 통제시키고 황자들 역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창춘원에 들어오지 말라 명하였다. 그 당시에 대신들 중 유일하게 출입이 가능했던 자는 대신 융과다이다. 1722년 12월 20일 강희제는 황자들과 대신들을 불러모았고 후계자로 4황자 윤진을 지명한 후 붕어하였다. 그러나 강희제의 죽음과 후계자로 윤진을 지목한 것에 대해 많은 가설들이 있다.

그 당시 강희제의 침전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던 융과다는 윤진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가설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다.

윤진의 즉위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설로 나눌 수 있다.

[편집] 유조계위설(有詔繼位說)

청사고 성조실록에 강희제는 12월 20일 3남 윤지, 8남 윤사, 9남 윤당, 10남 윤아, 11남 윤도, 13남 윤상 등을 불러 후계자로 윤진을 지목하는 유조를 남기고 붕어하였다 했는데, 실제로 그 유조가 현재 중국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편집] 개조찬위설(改詔簒位說)

강희제가 붕어한 그 날에 후계자로 윤진을 지목하였으면 윤진이 당연히 와야 했다. 그러나 윤진은 부황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강희제는 죽기 전 윤진을 무려 3번이나 불렀는데도 정작 임종 시에는 부르지 않았다. 또한 강희제 붕어 이후, 대신 융과다가 황자들 없이 단독으로 강희제의 유조를 발표했다 하여 유조가 조작되었다고 했다. 원래 유조는 14남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子)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을 융과다가 교묘히 4남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子)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강희제 붕어 직전부터 북경의 9개 문은 6일 동안이나 잠겨 있었는데 이것이 윤진이 일으킨 정변으로 부황을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다고 했다.

[편집] 무조탈위설(無詔奪位說)

윤진이 즉위하게 된것은 재빨리 정국을 이용하여 즉위하게 된것이라 한다. 윤진이 비록 부황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계자까지는 아니었고 야심이 컸던 윤진이 군사들을 이용하여 부황과 형제들을 살육 또는 감금하여 황제에 올랐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강희제는 결코 황위계승의 유조를 남기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어쨌든 윤진이 강희제의 유조로 인하여 즉위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편집] 황제 즉위와 형제 숙청

강희제 붕어 후 3일 뒤인 1722년 12월 23일에 유조가 발표되고, 12월 27일에 4황자 옹친왕 윤진이 결국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이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에게 반대한 형제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13제 윤상과 17제 윤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황자들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8제 염친왕 윤사와 9제 윤당이 제일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윤사는 몰래 옹정제의 제위 계승에 대해 불만이 많았으며 이 말이 옹정제의 귀에 들어가서 윤사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하옥되었다. 윤당 역시 옹정제에 대해 크게 불평하여 하옥되었으며 둘 다 1727년에 옥사하였다.

윤사의 윤당의 죽음 이후 옹정제는 윤사를 아기나(阿其那), 즉 개로 이름을 바꾸었고 윤당을 새사흑(塞思黑), 즉 돼지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

[편집] 국내 정치

옹정제는 자신을 황제로 올리는데 크게 기여한 융과다와 연갱요를 죽였는데, 자신이 어떻게 황제에 올랐는지를 다 아는 두 사람을 죽여서 입을 막아 내막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정치의 최고 기관인 군기처(軍機處)를 설립하여, 대신들이 교대로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고, 아버지 강희제보다 대대적인 문자의 옥을 일으켜 학자들, 특히 반청 성향의 한족 학자들을 탄압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밤 12시에 자서 새벽 4시까지밖에 자지 않고 이외의 시간은 모두 정무에 할애하는 등 정치에 매우 의욕적인 황제였다. 또한, 지방 총독과 순무 등, 지방 관리들의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 의견을 다시 보냈는데 이 때, 옹정제는 붉은 글씨로 답장을 보냈다 하여 주필(朱筆)이라 부른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의 후계자 선출 문제 실패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능력이 뛰어난 황자의 이름을 각기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 안에 봉인된 상자와 자신의 품에 집어넣고 자신이 죽은 후에 그 이름이 맞으면 그 황자를 즉시 다음 황위에 올리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저위비건법이다.

아버지인 강희제가 세운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더욱 발전시키고 안정시켜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세금을 단일화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고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옹정제가 죽을 때, 국고에는 은자 6천만 냥이 있었다. 옹정제는 몽골 원정을 강행하여 23만의 팔기군으로 8만의 준가르 군사들을 쳐서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 원정으로, 물가가 약간 올라갔으나, 몇 달 뒤에 옹정제의 강력한 재정 정책으로 다시 안정되었다.

[편집] 의문의 최후

1735년 10월에 옹정제는 과로로 인하여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다. 그리하여 이궁인 원명원(圓明園)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급격히 기력은 쇠약해 갔으며 그리하여 옹정 13년인 1735년 10월 8일에 옹정제는 58세로 붕어하였다고 공식 발표되었으나, 이에 대해서 암살설과 독살설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그 중 문자의 옥으로 멸문을 당한 학자 여유량의 손녀 여사랑(呂四娘)이 무술을 배워 원명원에 잠입, 옹정제의 목을 베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고 유력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옹정제는 황위를 찬탈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부황 강희제가 묻혀있는 청동릉을 버리고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묻혔는데 이곳이 훗날 다른 황제들도 묻히면서 청동릉과 구별하기 위해 이 황릉군을 '청서릉(淸西陵)'으로 불렀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황제(憲皇帝)이며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편집] 황후, 후궁, 자녀

[편집] 효경헌황후

[편집] 효성헌황후

[편집] 돈숙황귀비

  • 복의
  • 복혜

[편집] 순숙황귀비

  • 홍서

[편집] 제비(齊妃)

  • 홍분
  • 홍시
  • 和碩懷恪公主-성덕(星德)에게 출가.

[편집] 겸비

  • 홍적

          제5대 청나라의 황제          

전 임
아버지 성조 강희제 현엽
1722년 ~ 1735년 후 임
4남 고종 건륭제 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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