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1891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성수(金性洙, 호 仁村 1891년 ~ 1955년), 전라북도 고창이 고향인 한국 초기의 정치인, 교육가, 언론인이다.
목차 |
[편집] 생애
일제 강점기에 기업을 운영하여 부를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 행각을 했다는 말이 많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거부(巨富) 김경중의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중앙고보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고, 1919년에는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였다.
1920년에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1932년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를 설립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김성수는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1] 1947년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김성수의 특징은 자신이 직접 앞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성수는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어떠한 종교와도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기독교, 천주교, 그리고 불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참고 자료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43~44쪽.
- 한국의 명문가문 제 10편 "김성수가" 《서프라이즈》(2005.10.10.)
[편집] 주석
전 임 이시영 |
제2대 대한민국의 부통령 민주국민당 1951년 5월 - 1952년 8월 (1952년 6월 중도 사임) |
후 임 함태영 |
분류: 1891년 태어남 | 1955년 죽음 | 대한민국의 언론인 | 한국 사람 |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전라북도 출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