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인용집 kowikiquote https://ko.wikiquote.org/wiki/%EC%9C%84%ED%82%A4%EC%9D%B8%EC%9A%A9%EC%A7%91:%EB%93%A4%EB%A8%B8%EB%A6%AC MediaWiki 1.47.0-wmf.19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인용집 위키인용집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행사 행사토론 이순신 0 2009 35278 35277 2026-09-10T12:15:28Z Galaxy486 7251 35278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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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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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hr width="50%"/>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3wxlv7in19srzd49no42ewnu7d7lwy0 35281 35280 2026-09-10T12:22:27Z Galaxy486 7251 /* 관련 언사 */ 35281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hr width="50%"/>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cdyt54i4e7o90apoboo7h6hg0wy0eml 35282 35281 2026-09-10T12:23:36Z Galaxy486 7251 /* 관련 언사 */ 35282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hr width="50%"/>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3zu51gr0025qx24e469hihkkrw165bg 35283 35282 2026-09-10T12:24:05Z Galaxy486 7251 /* 관련 언사 */ 35283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hjzpiwa7okigkmgwfxx24497703hi8k 35284 35283 2026-09-10T12:24:26Z Galaxy486 7251 /* 관련 언사 */ 35284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1icx5pbhg4kd4cphj1dpvt6rg55pjcu 35285 35284 2026-09-10T12:29:12Z Galaxy486 7251 35285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파일:2012-05-06 Seoul Downtown.jpg|섬네일|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1d5ilj2n9m3xam61upv41fl0uul0h2o 35286 35285 2026-09-10T12:29:36Z Galaxy486 7251 /* 관련 언사 */ 35286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파일:2012-05-06 Seoul Downtown.jpg|섬네일|380px|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mstixxva8gpzgy4f57amycul8noke2q 35287 35286 2026-09-10T12:30:11Z Galaxy486 7251 /* 관련 언사 */ 35287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파일:2012-05-06 Seoul Downtown.jpg|섬네일|가운데|500px|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fu0j2haydo5j20hgmt1w1tbp5thyskh 35288 35287 2026-09-10T12:33:50Z Galaxy486 7251 35288 wikitext text/x-wiki [[파일:Bust of Yi Sun-sin 01.jpg|섬네일]]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관련 언사 == [[파일:2012-05-06 Seoul Downtown.jpg|섬네일|가운데|500px|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aywcxzv80q2wzy5qjiu5uby3r8sy18u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0 2062 35301 35199 2026-09-11T07:17:02Z Galaxy486 7251 35301 wikitext text/x-wiki [[파일:Albert Einstein 1947.jpg|thumb|250px|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47]] {{위키백과}} '''[[w:알베르트 아인슈타인|알베르트 아인슈타인]]'''({{llang|en|Albert Einstein}}, [[w:1879년|1879년]] [[w:3월 14일|3월 14일]] – [[w:1955년|1955년]] [[w:4월 18일|4월 18일]])은 [[w:특수 상대성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과 [[w:일반 상대성 이론|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w:유대인|유대인]] 이론물리학자이다. == 어록 == * 나는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무엇을 가지고 싸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 4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아마 인류는 돌맹이와 나무를 가지고 싸울 것이다 *: {{llang|en|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 Liberal Judaism 16호 기사 중 알프레드 배너(Alfred Werner)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 좀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그런 철학은 정말로 관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주목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관찰할 수 있는 크기만을 토대로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실제로는 정반대니까요. 사실은 이론이 비로소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해요. **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의 대화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 《부분과 전체》. 서커스. pp.124~125 * 우리 의식 속에 결과가 확정되기까지의 이런 긴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가 뭔가를 관찰했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와 관련한 자연법칙을 알아야 하지요. 따라서 이론, 즉 자연법칙을 아는 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인상을 토대로 배후의 과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줘요. 따라서 뭔가를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기존의 자연법칙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정리해 내는 작업이라 해도, 관찰할 수 있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의식에 이르는 길에서 기존의 자연법칙이 정확히 기능하여 우리가 그 법칙을 신뢰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관찰에 대해 이야기해도 된다는 의미예요. **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의 대화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 《부분과 전체》. 서커스. p.125 * 이곳에서 저는 여러 책들 중에서 칸트의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를 읽고 있는데, 이 철학자의 엄청난 제시력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선험적 종합판단(synthetic a priori judgements)에 동의한다면, 그건 덫에 걸리는 겁니다. 저는 칸트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험적(a priori)'라는 말을 '관습적(conventional)'이라는 말로 대체해 그 의미를 희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도 세부적인 것들이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칸트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칸트에 앞선 흄(Hume)의 저작보다는 좋지는 않지만요. 흄은 좀 더 건전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날짜 미상(편지 05) (박인순 옮김) * (25년전 드브로이가 그랬던 것처럼) 봄(Bohm)이 자신은 양자 이론을 결정론적 용어로 해석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나요? 그의 방식은 제게는 너무 유치하게 보입니다. 물론 당신이 저보다는 그것을 더 잘 평가하실 수 있겠지만요. ** 《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1952년 5월 12일 (박인순 옮김) * 당신에게 바쳐지는 헌정 논문집을 위해 물리학을 위한 짧은 동요를 써봤습니다. 이 때문에 이미 봄과 드 브로이가 펄쩍 뒤집어졌답니다. 이 동요는 슈뢰딩거 또한 최근 회피하려고 했던 양자역학에 대한 당신의 통계적 해석의 불가결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마 당신에게 조그만 재미를 선사할 것 같습니다. ** 《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1953년 10월 12일 (박인순 옮김) * 내게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나 산물에 불과하다. 성경은 명예롭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 1954년에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Eric Gutkind)에게 보내는 편지 中에서 *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좀 묘하다. 우리 각자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6장 도덕의 뿌리 * 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명확히 표현해왔다. 내 안에 종교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관한 무한한 찬탄이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28쪽 * 나는 지극히 종교적인 불신자다. 이것은 다소 새로운 종류의 종교다. 나는 자연에 목적이나 목표 또는 의인화라고 이해할만한 것을 전혀 갖다 붙인 적이 없다. 우리는 자연을 매우 불완전하게만 이해할 수 있고, 이는 생각하는 인간이 겸손으로 채워야 하는 장엄한 구조다. 그것은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진정으로 종교적인 감정이다. 인격신이라는 개념은 내게 아주 이질적이며 심지어 소박하게까지 보인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29쪽 *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344쪽 ===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 * 신비는 우리의 경험이 허락하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다. 이는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이 잉태되는 자리에 있는 근본 감정이다. **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 한 인간을 향상시키고 그의 본성을 고양시키는 것은 과학 연구의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 〈선과 악〉 *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통찰을 그가 지녔는가, 그 해방감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 〈인간의 진정한 가치〉 * 카네기처럼 돈 가방을 둘러멘 모세나 예수, 간디를 상상할 수 있는가? ** 〈부에 대하여〉 * 모든 시대에 걸쳐 신앙심 깊은 천재란 이러한 우주적 종교 감정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었다. 그 감정에는 교리도 없고 인간의 형상을 한 신도 없기에, 그것에 기댄 교회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높은 경지의 종교 감정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이단자들 속에서 발견된다. ** 〈종교와 과학〉 * 나는 우주적 종교 감정이 과학 연구에서 가장 강력하고 숭고한 자극이라는 생각을 굽힐 수 없다. 이론과학 분야의 선구자에게 요구되는 한없는 노력과 헌신을 나는 사람만이 그런 강력한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오로지 우주적 종교 감정만이 실생활과 동떨어진 선구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힘인 것이다. ** 〈종교와 과학〉 == 출처 없음 ==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 {{llang|en|I am convinced that He does not throw dice.}} *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포상하고 징벌하거나, 우리와 이해할 수 있는 의지를 지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 {{llang|en|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or has a will of the type of which we are conscious in ourselves.}} * 사람이 있는 한 [[전쟁]]은 존재할 것이다. * 세상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소득세이다. : {{llang|en|The hardest thing in the world to understand is the income tax}} * 외웠는가? 그렇다면 따라할 수 있을 것이다. 외우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 [[성공]]보다는 인후지덕의 사람이 되라. : {{llang|en|Try not to be a person of success, but rather a person of virtue}} * 나는 신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이러저러한 원소의 스펙트럼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세부적인 것에 불과하다. * 나는 간소하면서 아무 허세도 없는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것. 육체를 위해서나 정신을 위해서나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평화주의자]]가 아닐 리 없다. :{{llang|en|He who cherishes the values of culture cannot fail to be a pacifist.}} {{잘못된 인용 시작}} == [[잘못된 인용문의 목록|잘못 알려진 인용]] == *[[사람]]은 누구나 [[천재]]다. 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적성]]이 있기에) 나무타기 실력 같은 것으로 [[물고기]]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만약 나무타기 실력으로만 물고기를 평가한다면, 그 물고기는 평생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 [https://www.usatoday.com/story/news/factcheck/2021/04/27/fact-check-einstein-never-said-quote-fish-climbing-trees/7384370002/ Fact check: No, Albert Einstein did not say famous quote about fish climbing trees] 2021년 4월 27일 작성, 2021년 8월 31일 확인. : {{llang|en|Everybody is a genius. But if you judge a fish by its ability to climb a tree, it will live its whole life believing it is stupid.}} {{잘못된 인용 끝}} == 관련 어록 == * 이내 아인슈타인이 우리의 양자역학 수업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우리 대학원의 교수들이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책을 교과서로 선택한 것을 수긍했고, 양자이론의 기이한 귀결들을 다루는 봄의 방식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교수들로부터 그 부분을 건너뛰고 '이론의 수학적 정식화'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에 집중하라고 지시받았었다. ** 브루스 로젠블룸, 프레드 커트너, 《양자 불가사의》 (2011), 1. '도깨비 같다'라는 아인슈타인의 그 말을 그땐 몰랐었네 (전대호 옮김) * [[밀레바 마리치]]는 썼다: «그들은 [[Villa Carlotta]] ([[코모 호수]]에 위치)로 가서 Canova의 "큐피드와 프시케" 복제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나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Lierna]]에서 [[Grigna]]까지 산행을 시작했으며, "최대 6미터 높이의 눈"을 만났다. 그들은 거기서 사용되는 종류의 썰매를 빌렸고, 이 썰매는 두 사람의 사랑하는 이에게만 간신히 공간을 제공하며, 운전사는 뒤쪽에 서서 플랫폼 위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 발화자: [[밀레바 마리치]], [[알버트 아인슈타인]]과의 여행 중 ** 출처: 밀레바 마리치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The Einstein Marriage: A Study in Biography]]''에서 발췌, 편집자 [[John Stachel]],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페이지 123. ISBN 0-691-08584-8 * 제게는 마치 선생님이 선생님 자신을 위해 아인슈타인이라는 인형 세워놓고 그 인형을 화려한 기술로 두들겨 패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아인슈타인은 자주 얘기되는 것처럼 '결정론' 개념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으며(그는 여러 차례 제게 이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그러한 개념(선생님의 편지 세 번째 문단)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즉, 그가 부인한 부분은 '그러한 조건들의 연쇄는 객관적이고 실재적이어야 한다, 즉, 자동적이고 기계와 같고, 결정론적이어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동일하게 아인슈타인은 자신은 어떤 이론의 증거 제시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그 이론은 엄밀하게 결정론적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는다고 논박하고 있습니다. ** 볼프강 파울리, 보른에게,《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편지 115, 1954년 3월 31일 (박인순 옮김) * 뉴턴 이래의 최대의 과학자라는 칭송이 아니라도 그는 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칸트]]의 생애를 흠모할 수 있듯이 상대성 이론을 모르고도 아인슈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의 아인슈타인은 우리 모두의 아인슈타인이기도 하다. ** [[피천득]], 〈아인슈타인〉 == 각주 == <references /> {{기본정렬:아인슈타인, 알베르트}} [[분류:20세기 죽음]] [[분류:독일 사람]] [[분류:미국 사람]] [[분류:물리학자]] [[분류:수학자]] [[분류:우주론자]] [[분류:평화주의자]] [[분류:유대인]] [[분류:난민]]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dfha12ki1dxe3005fnltg5avuu35bko 35302 35301 2026-09-11T07:19:38Z Galaxy486 7251 35302 wikitext text/x-wiki [[파일:Albert Einstein 1947.jpg|thumb|250px|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47]] {{위키백과}} '''[[w:알베르트 아인슈타인|알베르트 아인슈타인]]'''({{llang|en|Albert Einstein}}, [[w:1879년|1879년]] [[w:3월 14일|3월 14일]] – [[w:1955년|1955년]] [[w:4월 18일|4월 18일]])은 [[w:특수 상대성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과 [[w:일반 상대성 이론|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w:유대인|유대인]] 이론물리학자이다. == 어록 == [[파일:Albert Einstein photo 1920.jpg|섬네일|좀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그런 철학은 정말로 관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주목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관찰할 수 있는 크기만을 토대로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실제로는 정반대니까요. 사실은 이론이 비로소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해요.]] * 나는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무엇을 가지고 싸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 4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아마 인류는 돌맹이와 나무를 가지고 싸울 것이다 *: {{llang|en|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 Liberal Judaism 16호 기사 중 알프레드 배너(Alfred Werner)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 좀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그런 철학은 정말로 관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주목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관찰할 수 있는 크기만을 토대로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실제로는 정반대니까요. 사실은 이론이 비로소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해요. **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의 대화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 《부분과 전체》. 서커스. pp.124~125 * 우리 의식 속에 결과가 확정되기까지의 이런 긴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가 뭔가를 관찰했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와 관련한 자연법칙을 알아야 하지요. 따라서 이론, 즉 자연법칙을 아는 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인상을 토대로 배후의 과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줘요. 따라서 뭔가를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기존의 자연법칙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정리해 내는 작업이라 해도, 관찰할 수 있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의식에 이르는 길에서 기존의 자연법칙이 정확히 기능하여 우리가 그 법칙을 신뢰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관찰에 대해 이야기해도 된다는 의미예요. **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의 대화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 《부분과 전체》. 서커스. p.125 * 이곳에서 저는 여러 책들 중에서 칸트의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를 읽고 있는데, 이 철학자의 엄청난 제시력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선험적 종합판단(synthetic a priori judgements)에 동의한다면, 그건 덫에 걸리는 겁니다. 저는 칸트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험적(a priori)'라는 말을 '관습적(conventional)'이라는 말로 대체해 그 의미를 희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도 세부적인 것들이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칸트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칸트에 앞선 흄(Hume)의 저작보다는 좋지는 않지만요. 흄은 좀 더 건전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날짜 미상(편지 05) (박인순 옮김) * (25년전 드브로이가 그랬던 것처럼) 봄(Bohm)이 자신은 양자 이론을 결정론적 용어로 해석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나요? 그의 방식은 제게는 너무 유치하게 보입니다. 물론 당신이 저보다는 그것을 더 잘 평가하실 수 있겠지만요. ** 《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1952년 5월 12일 (박인순 옮김) * 당신에게 바쳐지는 헌정 논문집을 위해 물리학을 위한 짧은 동요를 써봤습니다. 이 때문에 이미 봄과 드 브로이가 펄쩍 뒤집어졌답니다. 이 동요는 슈뢰딩거 또한 최근 회피하려고 했던 양자역학에 대한 당신의 통계적 해석의 불가결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마 당신에게 조그만 재미를 선사할 것 같습니다. ** 《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1953년 10월 12일 (박인순 옮김) * 내게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나 산물에 불과하다. 성경은 명예롭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 1954년에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Eric Gutkind)에게 보내는 편지 中에서 *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좀 묘하다. 우리 각자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6장 도덕의 뿌리 * 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명확히 표현해왔다. 내 안에 종교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관한 무한한 찬탄이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28쪽 * 나는 지극히 종교적인 불신자다. 이것은 다소 새로운 종류의 종교다. 나는 자연에 목적이나 목표 또는 의인화라고 이해할만한 것을 전혀 갖다 붙인 적이 없다. 우리는 자연을 매우 불완전하게만 이해할 수 있고, 이는 생각하는 인간이 겸손으로 채워야 하는 장엄한 구조다. 그것은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진정으로 종교적인 감정이다. 인격신이라는 개념은 내게 아주 이질적이며 심지어 소박하게까지 보인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29쪽 *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344쪽 ===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 * 신비는 우리의 경험이 허락하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다. 이는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이 잉태되는 자리에 있는 근본 감정이다. **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 한 인간을 향상시키고 그의 본성을 고양시키는 것은 과학 연구의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 〈선과 악〉 *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통찰을 그가 지녔는가, 그 해방감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 〈인간의 진정한 가치〉 * 카네기처럼 돈 가방을 둘러멘 모세나 예수, 간디를 상상할 수 있는가? ** 〈부에 대하여〉 * 모든 시대에 걸쳐 신앙심 깊은 천재란 이러한 우주적 종교 감정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었다. 그 감정에는 교리도 없고 인간의 형상을 한 신도 없기에, 그것에 기댄 교회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높은 경지의 종교 감정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이단자들 속에서 발견된다. ** 〈종교와 과학〉 * 나는 우주적 종교 감정이 과학 연구에서 가장 강력하고 숭고한 자극이라는 생각을 굽힐 수 없다. 이론과학 분야의 선구자에게 요구되는 한없는 노력과 헌신을 나는 사람만이 그런 강력한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오로지 우주적 종교 감정만이 실생활과 동떨어진 선구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힘인 것이다. ** 〈종교와 과학〉 == 출처 없음 ==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 {{llang|en|I am convinced that He does not throw dice.}} *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포상하고 징벌하거나, 우리와 이해할 수 있는 의지를 지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 {{llang|en|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or has a will of the type of which we are conscious in ourselves.}} * 사람이 있는 한 [[전쟁]]은 존재할 것이다. * 세상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소득세이다. : {{llang|en|The hardest thing in the world to understand is the income tax}} * 외웠는가? 그렇다면 따라할 수 있을 것이다. 외우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 [[성공]]보다는 인후지덕의 사람이 되라. : {{llang|en|Try not to be a person of success, but rather a person of virtue}} * 나는 신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이러저러한 원소의 스펙트럼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세부적인 것에 불과하다. * 나는 간소하면서 아무 허세도 없는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것. 육체를 위해서나 정신을 위해서나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평화주의자]]가 아닐 리 없다. :{{llang|en|He who cherishes the values of culture cannot fail to be a pacifist.}} {{잘못된 인용 시작}} == [[잘못된 인용문의 목록|잘못 알려진 인용]] == *[[사람]]은 누구나 [[천재]]다. 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적성]]이 있기에) 나무타기 실력 같은 것으로 [[물고기]]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만약 나무타기 실력으로만 물고기를 평가한다면, 그 물고기는 평생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 [https://www.usatoday.com/story/news/factcheck/2021/04/27/fact-check-einstein-never-said-quote-fish-climbing-trees/7384370002/ Fact check: No, Albert Einstein did not say famous quote about fish climbing trees] 2021년 4월 27일 작성, 2021년 8월 31일 확인. : {{llang|en|Everybody is a genius. But if you judge a fish by its ability to climb a tree, it will live its whole life believing it is stupid.}} {{잘못된 인용 끝}} == 관련 어록 == * 이내 아인슈타인이 우리의 양자역학 수업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우리 대학원의 교수들이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책을 교과서로 선택한 것을 수긍했고, 양자이론의 기이한 귀결들을 다루는 봄의 방식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교수들로부터 그 부분을 건너뛰고 '이론의 수학적 정식화'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에 집중하라고 지시받았었다. ** 브루스 로젠블룸, 프레드 커트너, 《양자 불가사의》 (2011), 1. '도깨비 같다'라는 아인슈타인의 그 말을 그땐 몰랐었네 (전대호 옮김) * [[밀레바 마리치]]는 썼다: «그들은 [[Villa Carlotta]] ([[코모 호수]]에 위치)로 가서 Canova의 "큐피드와 프시케" 복제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나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Lierna]]에서 [[Grigna]]까지 산행을 시작했으며, "최대 6미터 높이의 눈"을 만났다. 그들은 거기서 사용되는 종류의 썰매를 빌렸고, 이 썰매는 두 사람의 사랑하는 이에게만 간신히 공간을 제공하며, 운전사는 뒤쪽에 서서 플랫폼 위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 발화자: [[밀레바 마리치]], [[알버트 아인슈타인]]과의 여행 중 ** 출처: 밀레바 마리치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The Einstein Marriage: A Study in Biography]]''에서 발췌, 편집자 [[John Stachel]],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페이지 123. ISBN 0-691-08584-8 * 제게는 마치 선생님이 선생님 자신을 위해 아인슈타인이라는 인형 세워놓고 그 인형을 화려한 기술로 두들겨 패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아인슈타인은 자주 얘기되는 것처럼 '결정론' 개념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으며(그는 여러 차례 제게 이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그러한 개념(선생님의 편지 세 번째 문단)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즉, 그가 부인한 부분은 '그러한 조건들의 연쇄는 객관적이고 실재적이어야 한다, 즉, 자동적이고 기계와 같고, 결정론적이어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동일하게 아인슈타인은 자신은 어떤 이론의 증거 제시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그 이론은 엄밀하게 결정론적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는다고 논박하고 있습니다. ** 볼프강 파울리, 보른에게,《아인슈타인-보른 서한집》, 편지 115, 1954년 3월 31일 (박인순 옮김) * 뉴턴 이래의 최대의 과학자라는 칭송이 아니라도 그는 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칸트]]의 생애를 흠모할 수 있듯이 상대성 이론을 모르고도 아인슈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의 아인슈타인은 우리 모두의 아인슈타인이기도 하다. ** [[피천득]], 〈아인슈타인〉 == 각주 == <references /> {{기본정렬:아인슈타인, 알베르트}} [[분류:20세기 죽음]] [[분류:독일 사람]] [[분류:미국 사람]] [[분류:물리학자]] [[분류:수학자]] [[분류:우주론자]] [[분류:평화주의자]] [[분류:유대인]] [[분류:난민]]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dzx5a3dlwc5cokfs9bei1bfnfb6f70b 전쟁 0 2178 35312 31194 2026-09-11T09:54:19Z Galaxy486 7251 35312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File:Dapperheidgrotepier.jpg|thumb]] '''전쟁'''에 관한 다음의 속담 및 명언이 있다. == 죽음 == * 만일 누군가가 이리로 와서 날 선 청동에 맞지도, 찔리지도 않고, :팔라스 아테네가 빗발치는 무기들을 막아주며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이 한복판을 돌아다녀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일을 두고 더는 무어라 할 수 없으리라. :그만큼 많은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아인들이 바로 이날 :얼굴을 흙먼지 속에 처박고 서로 나란히 누워 있었으니. :* 《[[일리아스]]》. 아카넷. p.141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날이 갈수록 적군의 포위공격은 더 거세지고 더 잔인해졌다. 무엇보다 아군 중에 부상자가 속출하여 소수의 병사들이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퀸투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서찰을 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아군 전령 가운데 몇 명은 붙잡혀 아군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당하다가 죽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169. 제5권 45장 1행 [[분류:전쟁]] qjcbzjszvm5a0xio619oxsnc5nh06pq 35313 35312 2026-09-11T09:55:02Z Galaxy486 7251 /* 죽음 */ 35313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File:Dapperheidgrotepier.jpg|thumb]] '''전쟁'''에 관한 다음의 속담 및 명언이 있다. == 죽음 == * 만일 누군가가 이리로 와서 날 선 청동에 맞지도, 찔리지도 않고, :팔라스 아테네가 빗발치는 무기들을 막아주며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이 한복판을 돌아다녀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일을 두고 더는 무어라 할 수 없으리라. :그만큼 많은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아인들이 바로 이날 :'''얼굴을 흙먼지 속에 처박고 서로 나란히 누워 있었으니.''' :* 《[[일리아스]]》. 아카넷. p.141. 539~544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날이 갈수록 적군의 포위공격은 더 거세지고 더 잔인해졌다. 무엇보다 아군 중에 부상자가 속출하여 소수의 병사들이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퀸투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서찰을 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아군 전령 가운데 몇 명은 붙잡혀 아군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당하다가 죽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169. 제5권 45장 1행 [[분류:전쟁]] cj5cb9zy589qu5xzbxv4xe3fz6vdx2g 석가모니 0 3115 35292 35272 2026-09-10T15:38:07Z Galaxy486 7251 35292 wikitext text/x-wiki [[파일:Buddha in Sarnath Museum (Dhammajak Mutra).jpg|thumb|싯다르타 고타마]] {{위키백과}} '''[[w:석가모니|석가모니]]'''({{llang|sa|सिद्धार्थ 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llang|pi|Siddhattha Gotama}}, 기원전 563 ~ 483년)는 고대 [[w:인도|인도]]의 종교 지도자로, [[불교]]의 창시자이다. == 숫타니파타 == 전재성. (2015). 《숫타니파타-붓다의 말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ISBN 9788989966937 * 뱀의 독이 퍼지면 약초로 다스리듯, :이미 생겨난 분노를 극복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1) * 연꽃의 그 꽃과 줄기를 모두 꺾듯이, :탐욕을 남김없이 끊어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2) * 거센 흐름이 연약한 갈대 다리를 부수듯, :자만을 남김없이 끊어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4) * 안으로 성냄이 없고, 그 때문에 :세상의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6) *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모든 희론을 뛰어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8) *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동요 없이, :의혹을 넘어 :화살을 뽑아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17) * 내 마음은 내게 온순하여 해탈되었고 :오랜 세월 잘 닦여지고 아주 잘 다스려져, :내게는 그 어떤 악도 찾아 볼 수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숫타니파타》, 제1장 뱀의 품, 〈뱀의 경〉 (Stn 23) [[분류:인도 사람]] [[분류:종교인]] [[분류:종교 창시자]] 3hfg03pay5a16w5hucx06hhxw4jihix 논어 0 3123 35303 35268 2026-09-11T08:06:12Z Galaxy486 7251 /* 계씨(季氏) */ 35303 wikitext text/x-wiki [[파일:Rongo Analects 02.jpg|350px|섬네일|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17]] {{위키백과}} {{위키문헌|번역:논어}} '''[[w:논어|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듯한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 학이(學而) == *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맞게 익혀 나가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1 * 듣기 좋게만 말하고 얼굴 표정을 잘 꾸미는 사람에게는 인덕(仁德)이 드물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 *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을 공경하며, 말을 삼가되 말하게 되면 미덥게 하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며, 어진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몸소 실천하고 여력이 있으면 문헌을 배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6 *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해야 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16 == 위정(爲政) == * 덕으로써 정치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뭇별이 그 둘레를 도는 것과 같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1 *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뭉뚱그린다면, 그것은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2 * 백성을 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질서 정연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형벌을 피하고자 할 뿐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게 된다.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질서 정연하게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또한 바르게 될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3 * 배운 것을 음미해 새로운 것을 터득해 나간다면 스승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11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어 터득하지 못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15 *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17 == 팔일(八佾) == * 사람이면서 인(仁)하지 않으면 예는 해서 무엇하며, 사람이면서 인하지 않으면 악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3.1 *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의를 차리되 공경스럽지 않으며, 상가에 가서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써 그를 보아 주리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3.26 == 이인(里仁) == * 인(仁)한 사람의 마을에 사는 것이 좋으니, 인한 사람의 마을을 가려서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1 * 오직 인한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3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함과 높은 지위는 누구나 원하는 바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가난함과 비천함은 누구나 싫어하는 바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디에서 명예를 이루리오? 군자는 밥 먹는 사이라도 인을 떠나지 않으니. 아무리 황급한 때에도 여기에 있으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반드시 여기에 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5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잘못은 각각 그 부류에 따라 다르다. 그 잘못을 보면 그가 인한가를 알게 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7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을 많이 사게 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12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지위를 맡을 만한 자질을 갖추었는지를 걱정하며,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려질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구하여라."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14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언행을 삼감으로써 실수한 사람은 드물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4.23 == 공야장(公冶長) == * 자공이 말했다. "내가 남이 나를 업신여기기를 바라지 않듯이, 나도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이것은 아직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5.12 == 옹야(雍也)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6.19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보통 사람 이상에게는 높은 가르침을 말해 줄 수 있지만, 보통 사람 이하에게는 높은 가르침을 말해 줄 수 없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6.20 * 번지가 지혜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을 올바로 이끄는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않으면 지혜롭다고 할 만하다." 인에 대하여 물으니 말씀하셨다. "인한 사람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이득을 앞세우지 않으니, 그래야 인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6.21 * 자공이 말했다. "만일 백성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뭇사람들을 구제할 사람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인(仁)하다고 일컬을 만합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에 그치겠는가? 틀림없이 성인이리라. 요임금과 순임금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인한 사람은 자신이 서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서게 해 주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남도 이루게 해 준다. 가까이 자기에게 비추어 보아 남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6.29 == 술이(述而)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선현의 제도를 전하되 창작하지 아니하며, 옛것을 밑고 좋아함을 가만히 우리 노팽에게 견주어 본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덕이 닦이지 않는 것과 학문이 익혀지지 않는 것과 의로운 일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3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도(道)에 뜻을 두며, 덕(德)을 지키며, 인(仁)에 의지하며, 육예(六藝)를 두루 익힌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6 * 선생님께서는 상을 당한 사람의 곁에서 음식을 드실 때에는 배부르도록 잡수신 적이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날 곡을 하셨으며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9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고,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하게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19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인(仁)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곧 인에 이를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29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치스러우면 겸손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해진다. 겸손하지 않은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7.35 == 태백(泰伯)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스러울 뿐이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려워하게 되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어지럽게 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상처를 입게 된다. 군자가 친척에게 돈독히 하면 백성들 사이에 어진 기풍이 일어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야박해지지 않을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8.1 *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의 실현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나 그만둘 것이니 멀지 아니한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8.8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시를 배우고, 예로써 입신하고, 음악에서 완성할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8.9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하는 것도 혼란을 일으킨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8.10 == 자한(子罕)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어떤 비루한 사나이가 무식하게 나에게 물어 올지라도, 나는 그 물음의 처음과 끝을 되물어 본 다음에 성의를 다해서 가르쳐 줄 뿐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9.7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혹하지 않고, 인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9.28 == 향당(鄕黨) == * 공자께서 마을에 계실 때는 공손하시어, 말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종묘나 조정에서는 분명히 말씀하시되, 반드시 삼가셨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0.1 == 선진(先進)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배들은 예악에 대해서 야인 같고, 후배들은 예악에 대해서 군자답다고들 한다. 만약 예악을 쓴다면 선배들 것을 따르겠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1.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언론이 독실하다고 칭찬한다면, 그 사람은 군자다운 사람인가? 얼굴빛만 장중한 사람인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1.21 == 안연(顔淵) == *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인하게 된다.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인으로 귀의할 것이다. 인하게 되는 것이 자기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 안연이 말했다. "그 조목을 여쭙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이 말씀을 받들어 실천하겠습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2.1 * 중궁이 인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을 나가서는 귀한 손님을 맞는 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드는 듯이 하며,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그렇게 하면) 나라 안에서도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고, 집 안에서도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중궁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이 말씀을 받들어 실천하겠습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2.2 * 자공이 정치하는 방법을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軍備)를 충실히 하며, 백성들이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만약 마지못해 버린다면,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겠습니까?" "군비를 버릴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만약 마지못해 버린다면,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겠습니까?" "먹을 것을 버릴 것이다. 예로부터 누구에게나 다 죽음은 있지만, 백성이 위정자를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하지 못할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2.7 == 자로(子路)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시 삼백 편을 외우되, 그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 잘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지 못하면, 많이 외울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5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고,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6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현인이 나라를 다스려도 100년이 되어야만 잔학한 사람을 이기고 사형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참으로 옮은 말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1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제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정사에 종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으며, 자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13 * 번지가 인(仁)에 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평소 거처할 적에는 공손히 하며, 일을 맡아 할 적에는 경건히 하며, 남과 사귈 적에는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비록 오랑캐 땅에 간다고 해도 그것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19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부질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2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강직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인(仁)에 가깝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27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데리고 전쟁한다면, 이는 백성을 버리는 짓이라고 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3.30 == 헌문(憲問) == * 헌이 부끄러운 일에 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하는 것이 괜찮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벼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1 * "남을 이기기 좋아하거나, 자기 공을 자랑하거나, 남을 원망하거나, 욕심내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인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한지는 나는 모르겠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2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도리에 맞는 말을 하지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반드시 인한 것은 아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5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려워도,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오히려 쉽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11 * 자로가 인격이 완성된 사람에 관해 물으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장무중 같은 지혜와 맹공작 같은 과욕과 변읍의 장자 같은 용기와 염구 같은 재주에, 예악으로써 격식을 갖추면 인격이 완성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씀하셨다. "오늘날 인격이 완성된 사람은 그렇게 할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신명을 다 바치며,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더라도 젊은 시절의 약속을 잊지 않는다면 인격이 완성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13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렵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2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해라."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3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기를 속일 것이라고 미리 넘겨짚지 말고, 남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지 마라. 그럼에도 남보다 먼저 알아채는 것이 현명할진저!"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32 *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은혜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다면 어떻게 은혜를 갚겠는가? 정직한 마음으로 원수를 갚고, 은혜로써 은혜를 갚아야 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4.35 == 위령공(衛靈公) == * 자장이 행(行)에 대하여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이 충성스럽고 신실하며,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일지라도 두루 통할 것이다. 말이 충성스럽고 실실하지 못하며,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하지 못하면, 자기 고장에서 일지라도 통할 수 있겠는가? 서 있으면 자기 앞에 그 말들이 빽빽이 이어져 있는 듯 보이고, 수레에 올라타면 그 말들이 끌채의 끝에 댄 횡목에 새겨져 있는 듯 해야 할 것이니, 그런 연후에 통할 것이다." 자장이 큰 허리띠에 이 말씀을 적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6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뜻있는 선비와 인한 사람은 자신이 살자고 인을 해치는 일은 없지만, 자신을 희생해서 인을 이루는 경우는 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9 * 안연이 나라 다스리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하 대의 역법을 쓰고, 은 대의 질박한 수레를 타며, 주 대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순임금의 소무(韶舞)를 사용한다. 정나라의 소리를 금지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나라의 소리는 음탕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1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12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많이 책망하고, 남에 대해서는 적게 책망하면, 원성이 멀어질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15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16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사람이 종일토록 모여 앉아서, 의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잔재주만 뽐내기를 좋아하면, 사람 되기는 어렵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17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를 바탕으로 삼고, 예를 갖춰 행하며, 겸손하게 표현하고, 신의 있게 완성하니, (이러해야) 군자답도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18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신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2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묘하게 꾸미는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그르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27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사람이 그를 미워한다고 해도 반드시 그를 잘 살펴보아야 하고, 여러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반드시 그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28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30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일찍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으니, 배움에 힘쓰느니만 못한 일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31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을 실천하는 일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36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40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뜻을 전달할 따름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5.41 == 계씨(季氏)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오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로부터 나온다. 제후로부터 나오면 대체로 10대 안에 나라를 잃지 않은 이가 드물다. 대부로부터 나오면 5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은 이가 드물다. 가신이 정권을 장악하면 3대 안에 잃지 않은 이가 드물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정권은 대부에게 있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민들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6.2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익한 친구가 세 가지요, 해로운 친구가 세 가지다. 정직한 사람과 벗하며, 성실한 사람과 벗하며, 견문이 많은 사람과 벗하면 유익할 것이다. 편벽한 사람을 벗하며, 앞에서는 복종하는 듯하면서 내심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벗하며, 말을 잘해 교묘하게 둘러대는 사람을 벗하면 해로울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6.4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지라 경계할 것은 여색에 있고, 장성하면 혈기가 바야흐로 굳세어지니 경계할 것은 싸우는 데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약해지니 경계할 것은 탐내어 얻으려는 데 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6.7 == 양화(陽貨) ==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에 의해서 서로 멀어진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7.2 * 자장이 공자께 인에 관하여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를 천하에 실행할 수 있다면 인한 사람이다." "삼가 그것을 여쭙겠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 관대, 신의, 민첩함과 은혜다.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신의가 있으면 사람들이 일을 맡기고, 민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남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7.6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 그의 일생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7.26 == 미자(微子) == * 미자는 떠나갔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에 어진 이 셋이 있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8.1 == 자장(子張) == * 자장이 말했다. "덕을 지키되 크게 넓히지 않고, 도를 믿되 돈독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있다고 해도 그만, 없다고 해도 그만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9.1 * 자하가 말했다. "날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달이 가도 그가 알았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9.5 * 자하가 말했다.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9.6 * 자하가 말했다.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 대려고 한다." * 자하가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변화가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장엄하고, 가까이 가서 보면 온화하고,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엄정하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9.9 * 증자가 말했다. "내가 선생님께 듣기를, '사람이 자기의 정을 극진히 표시한 적이 없었을지라도, 친상을 당하면 반드시 슬픔을 극진히 표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9.17 * 자공이 말했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게 되고, 그것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19.21 == 요왈(堯曰) == * 자장이 공자께 여쭈었다. "어떻게 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면 정치를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이 여쭈었다. "무엇을 다섯 가지 미덕이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백성들이 은혜를 입게 하되 자신은 허비하는 바가 없게 하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되 원망하지 않게 하고, 욕구하되 탐내지 않고, 너그러우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이 있어도 사납지 않은 것이니라." :"은혜를 입게 하되 자신은 허비하는 바가 없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백성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살펴 그들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은혜는 입게 하되 자신은 허비하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백성들 가운데 일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일을 시키면 또 누가 원망할 것이냐? 인을 이루고자 하여 인을 얻으면 또 어찌 탐낸다고 하겠는가? 군자는 재물이 많건 적건, 또 권력이 크건 작건 감히 태만하게 대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너그러우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착용하고 시선을 바르게 하면 장엄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니, 이것이 위엄이 있어도 사납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무엇을 네 가지 악덕이라고 합니까?" :"백성을 교화하지 않고 죽이는 것을 잔학하다고 하고, 평소에 타이르지 않다가 보자마자 완성을 요구하는 것을 포악하다고 하며, 소홀하게 명령하고 갑자기 기한을 정하는 것을 해치는 것이라 하고, 균등하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내주기를 아까워하는 것을 아전 같다고 한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0.2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모르면 남 앞에 나설 수 없고, 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가 없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0.3 == 참고 문헌 == * (2016). 《논어》.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ISBN 9788937433313 [[분류:책]] blsjcxsnudm447j7zpyzdzf2zsytjhz 헤르만 헤세 0 3124 35309 35035 2026-09-11T09:17:19Z Galaxy486 7251 35309 wikitext text/x-wiki [[파일:Hermann Hesse 2.jpg|thumb|250px|"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10]] {{위키백과}} {{위키문헌|글쓴이:헤르만 헤세}} '''[[w:헤르만 헤세|헤르만 헤세]]'''({{llang|de|Hermann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 활동을 시작한 뒤에는 인간 내면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창작하여 독일 문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 어록 == === 《데미안》(1919년) === {{본문|데미안}} 헤르만 헤세. 안인희 번역. (2013). 《데미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br/>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 《데미안》. 문학동네. p.7 *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자기들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이야기를 완전히 꿰뚤어보고 파악할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마치 신이 직접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는 듯 언제 어디나 가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묘사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들도 물론 그렇게는 못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데미안》. 문학동네. p.7 *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10 === 《싯다르타》(1922년) === {{본문|싯다르타 (소설)}} 헤르만 헤세. 권혁준 번역. (2025). 《싯다르타》. 문학동네. * 집의 그늘진 곳에서, 나룻배들이 떠 있는 강가의 햇살 속에서, 사라수 숲의 응달에서, 보리수 그늘 아래서, 브라만의 수려한 아들이자 어린 매 같은 싯다르타는 역시 브라만의 아들인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랐다. ** 《싯다르타》. 문학동네. p.11 * 싯다르타의 마음에서 불만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중략)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들을 부르는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하지만 그것이 전부란 말인가? 제사를 드리는 일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그게 신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세계를 창조한 이가 정말 프라야파티일까? 유일자이자 단독자인 아트만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아닐까? 신들도 너와 나처럼 시간에 예속된 존재, 무상한 피조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이 훌륭하고 올바르고 의미 있고 최상의 가치를 지닌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그분, 유일자인 아트만 외에 대체 어떤 존재에게 제사를 드리고 경배를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아트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분은 어디에 있는가? 그분의 영원한 심장이 각자의 자아,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불멸의 핵에서 고동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고동친다는 말인가? 이 자아, 가장 내적인 부분, 가장 궁극적인 부분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 《싯다르타》. 문학동네. pp.14~15 * "'''지식은 전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할 수 없다네. 지혜란 찾아낼 수 있고 체험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따를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 그러나 말로 표현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네.'''" ** 《싯다르타》. 문학동네. p.164 [[분류:20세기 죽음]]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독일의 소설가]] [[분류:인문주의자]] [[분류:신비주의자]]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ljc2rwtfelc279d7wdmwq5ica86gzjf 율리우스 카이사르 0 4532 35294 29952 2026-09-10T16:19:43Z Galaxy486 7251 35294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56. 제1권 40장 12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k3hdkbugl3y4592jc0jm6gelhzfrso6 35295 35294 2026-09-10T16:23:44Z Galaxy486 7251 /* 《갈리아 원정기》 */ 35295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 갈리아는 전체가 세 지역으로 나뉜다. 그중 한 지역에는 벨가이족이, 다른 지역에는 아퀴타니족이, 세 번째 지역에는 그들 자신의 말로는 켈타이족이라 부르지만 우리 말로는 갈리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살고 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2. 제1권 1장 1행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56. 제1권 40장 12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nsvasszuvonpy5xguouha8u92eq3kgw 35296 35295 2026-09-10T16:27:38Z Galaxy486 7251 35296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위키백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 갈리아는 전체가 세 지역으로 나뉜다. 그중 한 지역에는 벨가이족이, 다른 지역에는 아퀴타니족이, 세 번째 지역에는 그들 자신의 말로는 켈타이족이라 부르지만 우리 말로는 갈리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살고 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2. 제1권 1장 1행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56. 제1권 40장 12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snsfbtvxahv9u4luz6a82dab3vbf5xb 35298 35296 2026-09-10T16:29:34Z Galaxy486 7251 /* 《갈리아 원정기》 */ 35298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위키백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천병희 옮김. (2012). 《갈리아 원정기》. 출판사 숲. ISBN 9788991290440 * 갈리아는 전체가 세 지역으로 나뉜다. 그중 한 지역에는 벨가이족이, 다른 지역에는 아퀴타니족이, 세 번째 지역에는 그들 자신의 말로는 켈타이족이라 부르지만 우리 말로는 갈리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살고 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2. 제1권 1장 1행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56. 제1권 40장 12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9dwar9bgpg2z3pbgkklh9xukf41tizk 35310 35298 2026-09-11T09:32:16Z Galaxy486 7251 /* 《갈리아 원정기》 */ 35310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위키백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천병희 옮김. (2012). 《갈리아 원정기》. 출판사 숲. ISBN 9788991290440 * 갈리아는 전체가 세 지역으로 나뉜다. 그중 한 지역에는 벨가이족이, 다른 지역에는 아퀴타니족이, 세 번째 지역에는 그들 자신의 말로는 켈타이족이라 부르지만 우리 말로는 갈리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살고 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2. 제1권 1장 1행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56. 제1권 40장 12행 * 카이사르는 아이두이족인 디비키아쿠스에게, 적의 대군과 일시에 교전하지 않아도 되도록 적군의 여러 부대를 분산시키는 것이 로마를 위해서나 양국의 안전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자세히 설명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71. 제2권 5장 2행 * 카이사르는 필요한 명령만 간단하게 내린 뒤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싸움터로 무작정 달려 내려가다가 제10군단과 마주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들의 오랜 무공을 떠올리며 겁내지 말고 적군의 공격에 용감하게 버티라고만 격려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81. 제2권 21장 1~2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nwyba9yqfcsq30gdea6ltqw6prioe35 35311 35310 2026-09-11T09:48:48Z Galaxy486 7251 /* 《갈리아 원정기》 */ 35311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위키백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천병희 옮김. (2012). 《갈리아 원정기》. 출판사 숲. ISBN 9788991290440 * 갈리아는 전체가 세 지역으로 나뉜다. 그중 한 지역에는 벨가이족이, 다른 지역에는 아퀴타니족이, 세 번째 지역에는 그들 자신의 말로는 켈타이족이라 부르지만 우리 말로는 갈리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살고 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2. 제1권 1장 1행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p.55~56. 제1권 40장 12행 * 카이사르는 아이두이족인 디비키아쿠스에게, 적의 대군과 일시에 교전하지 않아도 되도록 적군의 여러 부대를 분산시키는 것이 로마를 위해서나 양국의 안전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자세히 설명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71. 제2권 5장 2행 * 카이사르는 필요한 명령만 간단하게 내린 뒤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싸움터로 무작정 달려 내려가다가 제10군단과 마주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들의 오랜 무공을 떠올리며 겁내지 말고 적군의 공격에 용감하게 버티라고만 격려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81. 제2권 21장 1~2행 * "전우들이여, 물속으로 뛰어내리시오. 아군의 독수리 기를 적군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면! 아무튼 나는 조국과 장군에 대한 내 임무를 다할 것이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130. 제4권 25장 3행 중. * 그곳에는 갈리아 전체에서 차출된 4천 명 정도의 기병들과 모든 부족의 지도자들도 집결해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들 가운데 충성심이 입증된 소수만 뒤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인질로 데려가기로 했으니, 자기가 떠나고 없는 동안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p.143~144. 제5권 5장 3~4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dnv5cq0nkiqxfjo1qxvtewsb92yzdjl 35314 35311 2026-09-11T09:59:06Z Galaxy486 7251 /* 《갈리아 원정기》 */ 35314 wikitext text/x-wiki [[파일:Julius Caesar Coustou Louvre MR1798.jpg|섬네일|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위키백과}} '''[[w: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llang|en|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인이다. 내전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 《갈리아 원정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천병희 옮김. (2012). 《갈리아 원정기》. 출판사 숲. ISBN 9788991290440 * 갈리아는 전체가 세 지역으로 나뉜다. 그중 한 지역에는 벨가이족이, 다른 지역에는 아퀴타니족이, 세 번째 지역에는 그들 자신의 말로는 켈타이족이라 부르지만 우리 말로는 갈리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살고 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2. 제1권 1장 1행 *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자 그들은 12개쯤 되는 자신들의 모든 도시와 4백 개쯤 되는 마을과 개인 소유의 다른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곡식도 가져갈 것 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야만 그만큼 더 기꺼이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26. 제1권 5장 2~3행 * 카이사르는 정찰병들에게서 헬베티이족이 자기들 군대의 4분의 3은 벌써 도하(渡河)시키고 4분의 1 정도가 아라르 강의 이쪽 강둑에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정 조금 지나 3개 군단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다수를 죽였다. 나머지는 달아나 가까운 숲에 숨었다. (중략) 우리 아버지 때 티구리니족은 독자적으로 고향을 떠나 집정관 루키우스 캇시우스를 죽이고 그의 군대가 '멍에'밑을 지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우연에 의해서든 불사신들의 계획에 의해서든 전에 로마 국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겼던 헬베티이족의 이 지파가 맨 먼저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국가적인 원한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풀었다. 그의 장인 루키우스 피소의 할아버지로 부관이었던 또 다른 루키우스 피소도 같은 전투에서 캇시우스와 마찬가지로 티구리니족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32. 제1권 12장 2~3행과 5~7행. *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군량 보급이 어렵다느니 행군로가 좁아 염려스럽다느니 핑계를 대는 자들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지휘관의 의무감을 의심하거나 지휘관에게 지시하려는 것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55. 제1권 40장 10행 *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도 군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며, 지난날 군대가 복종을 거부한 것은 그들의 장군이 전투에 패해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탐욕스러운 자로 드러날 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카이사르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헬베티이족과의 전쟁에서 밝혀졌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p.55~56. 제1권 40장 12행 * 카이사르는 아이두이족인 디비키아쿠스에게, 적의 대군과 일시에 교전하지 않아도 되도록 적군의 여러 부대를 분산시키는 것이 로마를 위해서나 양국의 안전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자세히 설명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71. 제2권 5장 2행 * 카이사르는 필요한 명령만 간단하게 내린 뒤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싸움터로 무작정 달려 내려가다가 제10군단과 마주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들의 오랜 무공을 떠올리며 겁내지 말고 적군의 공격에 용감하게 버티라고만 격려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81. 제2권 21장 1~2행 * "전우들이여, 물속으로 뛰어내리시오. 아군의 독수리 기를 적군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면! 아무튼 나는 조국과 장군에 대한 내 임무를 다할 것이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130. 제4권 25장 3행 중. * 그곳에는 갈리아 전체에서 차출된 4천 명 정도의 기병들과 모든 부족의 지도자들도 집결해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들 가운데 충성심이 입증된 소수만 뒤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인질로 데려가기로 했으니, 자기가 떠나고 없는 동안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p.143~144. 제5권 5장 3~4행 * 날이 갈수록 적군의 포위공격은 더 거세지고 더 잔인해졌다. 무엇보다 아군 중에 부상자가 속출하여 소수의 병사들이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퀸투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서찰을 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아군 전령 가운데 몇 명은 붙잡혀 아군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당하다가 죽었다. ** 《갈리아 원정기》. 천병희 역. p.169. 제5권 45장 1행 [[분류: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정치인]] [[분류:작가]] [[분류:장군]] n9nbbo21eam4cjcdhzcxjo9ssqcwqf5 수학 0 5340 35299 34985 2026-09-11T06:37:53Z Galaxy486 7251 35299 wikitext text/x-wiki [[파일:Mathematics.png|섬네일|내가 수학을 우리가 행성이라 부르는 한 쌍의 흙덩이에 적용하든, 순수한 산술 문제에 적용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만 후자가 나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줄 뿐이다.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위키백과}} '''수학'''은 수, 양, 구조, 공간, 변화 등의 개념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 수학적 아름다움 == * 모든 수학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이러한 확신은 연구하는 동안 우리에게 강력한 자극제가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찬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으니, 답을 찾아라. 순수한 사고를 통해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에는 알 수 없는 것(Ignorabimus)이란 없기 때문이다!" *: {{llang|de|Diese Ueberzeugung von der Lösbarkeit eines jeden mathematischen Problems ist uns ein kräftiger Ansporn während der Arbeit; wir hören in uns den steten Zuruf: Da ist das Problem, suche die Lösung. Du kannst sie durch reines Denken finden; denn in der Mathematik giebt es kein Ignorabimus!}} ** 다비트 힐베르트. Mathematische Probleme, 1900 auf dem internationalen Mathematiker-Kongreß zu Paris. In: Nachrichten von der Königl.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 Commissionsverlag der Dieterich'schen Universitätsbuchhandlung Lüder Horstmann, Göttingen 1900, S. 262 * 어떤 수학자들은 넓은 조망만을 좋아합니다. 어떤 결과를 마주하면 그들은 즉시 그것을 일반화하기를 꿈꾸며, 이웃한 결과들과 엮어 더 높은 피라미드의 기초로 삼아 더 멀리 바라보고자 합니다. 반면 이러한 지나치게 광범위한 시각을 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풍경이 아름다울지라도 먼 지평선은 언제나 다소 흐릿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부 사항을 더 잘 보고 이를 완벽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 스스로를 좁은 범위에 한정하기를 선호합니다. 그들은 세공사처럼 일하며, 시인보다는 예술가에 가깝습니다. *: {{llang|fr|Certains mathématiciens n’aiment que les larges aperçus ; en présence d’un résultat, ils rêvent immédiatement de le généraliser, cherchent à le rapprocher des résultats voisins pour en faire comme la base d’une pyramide plus haute et d’où ils verront plus loin. Il y en a d’autres auxquels répugnent ces vues trop étendues, parce que, si beau que soit un vaste paysage, les horizons lointains sont toujours un peu vagues ; ils préfèrent se restreindre pour mieux voir les détails et les amener à la perfection ; ils travaillent comme le ciseleur ; ils sont plus artistes que poètes.}} ** [[앙리 푸앵카레]]. 《학자와 문인들》(Savants et écrivains) chap. Introduction, p. VIII * 사람들은 왜 수학이 아름다운지 물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수학 이론은 처녀지 위에 기초를 두고, 세월을 거스르는 고적과도 같은 장엄한 궁전으로 치솟아 오른 잘 지어진 건축물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가치는 덜어내고 완벽한 논리를 더한 성당인 셈이다. 아름다운 이론이나 기발한 증명을 읽고 발견하는 것은 때로는 힘겨운 등반과도 같아서, 정상에 오른 끝에 출발점과 지나온 길을 아래로 굽어볼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수학적 추론은 바흐의 협주곡이나 조화로운 발레에 비견될 만하다. *: {{llang|fr|On peut se demander pourquoi les mathématiques sont belles. Une théorie mathématique achevée est un édifice bien construit dont les fondations reposent sur un terrain vierge et qui culmine en un palais majestueux semblable aux monuments qui défient le temps. Une cathédrale, la valeur religieuse en moins, la logique parfaite en plus. Lire, trouver une belle théorie ou une démonstration ingénieuse, c'est faire une ascension parfois difficile au terme de laquelle on peut, du sommet, contempler le point de départ et le chemin suivi. Un beau raisonnement mathématique est comparable à un concerto de Bach ou à un ballet harmonieux.}} ** 로랑 슈바르츠. 자서전 《세상과 맞붙은 어느 수학자》(Un mathématicien aux prises avec le siècle) partie I. Années de jeunesse, chap. 1. La révélation des mathématiques, p. 53-54 * 제 수학 연구 경험을 가장 잘 비유하자면, 어둡고 탐험되지 않은 저택을 통과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택의 첫 번째 방에 들어가면 안은 완전히 캄캄합니다. 가구에 부딪히며 이리저리 더듬거리지만, 서서히 각 가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마침내 6개월쯤 지나면 전등 스위치를 찾게 되고, 그것을 켜면 순식간에 모든 곳이 밝아집니다.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다음 방으로 이동해 또 다른 6개월을 어둠속에서 보냅니다. 따라서 이러한 돌파구들은 때로는 순간적이거나 하루이틀 사이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에 앞서 수개월 동안 어둠 속을 헤매던 시간들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그 노력의 정점입니다. *: {{llang|en|Perhaps I can best describe my experience of doing mathematics in terms of a journey through a dark unexplored mansion. You enter the first room of the mansion and it's completely dark. You stumble around bumping into the furniture, but gradually you learn where each piece of furniture is. Finally, after six months or so, you find the light switch, you turn it on, and suddenly it's all illuminated. You can see exactly where you were. Then you move into the next room and spend another six months in the dark. So each of these breakthroughs, while sometimes they're momentary, sometimes over a period of a day or two, they are the culmination of—and couldn't exist without—the many months of stumbling around in the dark that proceed them.}} ** 앤드루 와일스. [https://www.pbs.org/wgbh/nova/proof/wiles.html Nova Interview] 중. * Q: 수학의 매력이 뭘까요?<br/>A: 정치나 다른 분야에선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 소통이 안 되면 내가 사는 섬과 상대가 사는 섬의 거리를 좁힐 수 없어요. 수학은 답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과 방향은 사람마다 달라도 도달하는 정답은 하나예요. 내 의견을 설득하려고 언성 높일 필요도 없고요. 충분히 시간만 있으면 서로 한 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의견 대립하다가 지치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어물쩍 결론 내려버리는 세상에선 더 의미가 있죠. ** 허준이. 2022년 1월 1일.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663424?sid=102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 == 법칙 == * 수학 법칙이 현실을 참조하는 한 그것은 불확실하며, 그것이 확실한 한 현실을 참조하지 않는다. *: {{llang|de|Insofern sich die Sätze der Mathematik auf die Wirklichkeit beziehen, sind sie nicht sicher, und insofern sie sicher sind, beziehen sie sich nicht auf die Wirklichkeit.}}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21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강연 논문 《강연과 수필: 지오메트리와 경험》(Geometrie und Erfahrung)에서 * 유용해지려는 욕구도 전혀 없고, 그것이 어떤 분야에 유용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징후조차 없던 상황에서 발전한 수학의 상당 부분이 결국 유용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수학에서는 수학적 발견과 그것이 유용해지는 순간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언제나 참입니다. 이 시간차는 30년에서 100년, 때로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 시스템은 어떠한 방향성도 없이, 유용성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이, 그리고 유용한 일을 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 {{llang|en|A large part of mathematics which becomes useful developed with absolutely no desire to be useful, and in a situation where nobody could possibly know in what area it would become useful; and there were no general indications that it ever would be so. By and large it is uniformly true in mathematics that there is a time lapse between a mathematical discovery and the moment when it is useful; and that this lapse of time can be anything from 30 to 100 years, in some cases even more; and that the whole system seems to function without any direction, without any reference to usefulness, and without any desire to do things which are useful.}} ** [[존 폰 노이만]]. "The Role of Mathematics in the Sciences and in Society" (1954) an address to Princeton alumni, published in John von Neumann : Collected Works (1963) edited by A. H. Taub ; also quoted in Out of the Mouths of Mathematicians : A Quotation Book for Philomaths (1993) by R. Schmalz *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 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 허준이. 2022학년도 서울대학교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 [https://www.youtube.com/watch?v=OLDhaqosPtA&t=304s 필즈상 허준이 졸업식 축사 5:04] == 철학 == * 그러나 나는 모든 특정한 자연이론 속에 수학이 들어 있는 만큼만 진정한 과학이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llang|de|Ich behaupte aber, daß in jeder besonderen Naturlehre nur so viel eigentliche Wissenschaft angetroffen werden könne, als darin Mathematik anzutreffen ist.}} ** [[이마누엘 칸트]].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A VIII * 내가 수학을 우리가 행성이라 부르는 한 쌍의 흙덩이에 적용하든, 순수한 산술 문제에 적용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만 후자가 나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줄 뿐이다. *: {{llang|de|Ob ich die Mathematik auf ein Paar Dreckklumpen anwende, die wir Planeten nennen, oder auf rein arithmetische Probleme, es bleibt sich gleich, die letztern haben nur noch einen höhern Reiz für mich.}}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Gauß nach W. Sartorius v. Waltershausen 1856, Neudruck 1965, S. 101/102. == 역사 == * 제가 보기에 수학의 가장 큰 문제는 편견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수학을 건조하고 유클리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학문이라고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실상 수학은 엄청나게 활발한 분야이며, 지난 3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발전해 왔고 일상의 수많은 영역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 {{llang|it|Secondo me il grosso problema della matematica è che si sono molti pregiudizi, si pensa che sia una materia arida, che non è mai cambiata dai tempi di Euclide a oggi. In verità è una disciplina estremamente attiva, anzi non è mai stata così attiva come negli ultimi 30 anni ed ha applicazioni in molti campi della quotidianità.}} ** 알레시오 피갈리. [https://www.repubblica.it/tecnologia/2018/08/01/news/io_dalle_olimpiadi_della_matematica_alla_medaglia_fields_alessio_figalli_si_racconta_a_repubblica-300970883/ “Così ho vinto il 'Nobel' della matematica”] [[분류:수학]] ol5vgufjx3dkkpnog8sazk9d3rmqrav 35300 35299 2026-09-11T06:38:39Z Galaxy486 7251 /* 법칙 */ 35300 wikitext text/x-wiki [[파일:Mathematics.png|섬네일|내가 수학을 우리가 행성이라 부르는 한 쌍의 흙덩이에 적용하든, 순수한 산술 문제에 적용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만 후자가 나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줄 뿐이다.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위키백과}} '''수학'''은 수, 양, 구조, 공간, 변화 등의 개념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 수학적 아름다움 == * 모든 수학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이러한 확신은 연구하는 동안 우리에게 강력한 자극제가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찬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으니, 답을 찾아라. 순수한 사고를 통해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에는 알 수 없는 것(Ignorabimus)이란 없기 때문이다!" *: {{llang|de|Diese Ueberzeugung von der Lösbarkeit eines jeden mathematischen Problems ist uns ein kräftiger Ansporn während der Arbeit; wir hören in uns den steten Zuruf: Da ist das Problem, suche die Lösung. Du kannst sie durch reines Denken finden; denn in der Mathematik giebt es kein Ignorabimus!}} ** 다비트 힐베르트. Mathematische Probleme, 1900 auf dem internationalen Mathematiker-Kongreß zu Paris. In: Nachrichten von der Königl.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 Commissionsverlag der Dieterich'schen Universitätsbuchhandlung Lüder Horstmann, Göttingen 1900, S. 262 * 어떤 수학자들은 넓은 조망만을 좋아합니다. 어떤 결과를 마주하면 그들은 즉시 그것을 일반화하기를 꿈꾸며, 이웃한 결과들과 엮어 더 높은 피라미드의 기초로 삼아 더 멀리 바라보고자 합니다. 반면 이러한 지나치게 광범위한 시각을 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풍경이 아름다울지라도 먼 지평선은 언제나 다소 흐릿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부 사항을 더 잘 보고 이를 완벽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 스스로를 좁은 범위에 한정하기를 선호합니다. 그들은 세공사처럼 일하며, 시인보다는 예술가에 가깝습니다. *: {{llang|fr|Certains mathématiciens n’aiment que les larges aperçus ; en présence d’un résultat, ils rêvent immédiatement de le généraliser, cherchent à le rapprocher des résultats voisins pour en faire comme la base d’une pyramide plus haute et d’où ils verront plus loin. Il y en a d’autres auxquels répugnent ces vues trop étendues, parce que, si beau que soit un vaste paysage, les horizons lointains sont toujours un peu vagues ; ils préfèrent se restreindre pour mieux voir les détails et les amener à la perfection ; ils travaillent comme le ciseleur ; ils sont plus artistes que poètes.}} ** [[앙리 푸앵카레]]. 《학자와 문인들》(Savants et écrivains) chap. Introduction, p. VIII * 사람들은 왜 수학이 아름다운지 물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수학 이론은 처녀지 위에 기초를 두고, 세월을 거스르는 고적과도 같은 장엄한 궁전으로 치솟아 오른 잘 지어진 건축물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가치는 덜어내고 완벽한 논리를 더한 성당인 셈이다. 아름다운 이론이나 기발한 증명을 읽고 발견하는 것은 때로는 힘겨운 등반과도 같아서, 정상에 오른 끝에 출발점과 지나온 길을 아래로 굽어볼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수학적 추론은 바흐의 협주곡이나 조화로운 발레에 비견될 만하다. *: {{llang|fr|On peut se demander pourquoi les mathématiques sont belles. Une théorie mathématique achevée est un édifice bien construit dont les fondations reposent sur un terrain vierge et qui culmine en un palais majestueux semblable aux monuments qui défient le temps. Une cathédrale, la valeur religieuse en moins, la logique parfaite en plus. Lire, trouver une belle théorie ou une démonstration ingénieuse, c'est faire une ascension parfois difficile au terme de laquelle on peut, du sommet, contempler le point de départ et le chemin suivi. Un beau raisonnement mathématique est comparable à un concerto de Bach ou à un ballet harmonieux.}} ** 로랑 슈바르츠. 자서전 《세상과 맞붙은 어느 수학자》(Un mathématicien aux prises avec le siècle) partie I. Années de jeunesse, chap. 1. La révélation des mathématiques, p. 53-54 * 제 수학 연구 경험을 가장 잘 비유하자면, 어둡고 탐험되지 않은 저택을 통과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택의 첫 번째 방에 들어가면 안은 완전히 캄캄합니다. 가구에 부딪히며 이리저리 더듬거리지만, 서서히 각 가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마침내 6개월쯤 지나면 전등 스위치를 찾게 되고, 그것을 켜면 순식간에 모든 곳이 밝아집니다.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다음 방으로 이동해 또 다른 6개월을 어둠속에서 보냅니다. 따라서 이러한 돌파구들은 때로는 순간적이거나 하루이틀 사이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에 앞서 수개월 동안 어둠 속을 헤매던 시간들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그 노력의 정점입니다. *: {{llang|en|Perhaps I can best describe my experience of doing mathematics in terms of a journey through a dark unexplored mansion. You enter the first room of the mansion and it's completely dark. You stumble around bumping into the furniture, but gradually you learn where each piece of furniture is. Finally, after six months or so, you find the light switch, you turn it on, and suddenly it's all illuminated. You can see exactly where you were. Then you move into the next room and spend another six months in the dark. So each of these breakthroughs, while sometimes they're momentary, sometimes over a period of a day or two, they are the culmination of—and couldn't exist without—the many months of stumbling around in the dark that proceed them.}} ** 앤드루 와일스. [https://www.pbs.org/wgbh/nova/proof/wiles.html Nova Interview] 중. * Q: 수학의 매력이 뭘까요?<br/>A: 정치나 다른 분야에선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 소통이 안 되면 내가 사는 섬과 상대가 사는 섬의 거리를 좁힐 수 없어요. 수학은 답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과 방향은 사람마다 달라도 도달하는 정답은 하나예요. 내 의견을 설득하려고 언성 높일 필요도 없고요. 충분히 시간만 있으면 서로 한 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의견 대립하다가 지치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어물쩍 결론 내려버리는 세상에선 더 의미가 있죠. ** 허준이. 2022년 1월 1일.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663424?sid=102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 == 법칙 == * 수학 법칙이 현실을 참조하는 한 그것은 불확실하며, 그것이 확실한 한 현실을 참조하지 않는다. *: {{llang|de|Insofern sich die Sätze der Mathematik auf die Wirklichkeit beziehen, sind sie nicht sicher, und insofern sie sicher sind, beziehen sie sich nicht auf die Wirklichkeit.}}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21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강연 논문 《강연과 수필: 지오메트리와 경험》(Geometrie und Erfahrung)에서 * 유용해지려는 욕구도 전혀 없고, 그것이 어떤 분야에 유용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징후조차 없던 상황에서 발전한 수학의 상당 부분이 결국 유용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수학에서는 수학적 발견과 그것이 유용해지는 순간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언제나 참입니다. 이 시간차는 30년에서 100년, 때로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 시스템은 어떠한 방향성도 없이, 유용성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이, 그리고 유용한 일을 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 {{llang|en|A large part of mathematics which becomes useful developed with absolutely no desire to be useful, and in a situation where nobody could possibly know in what area it would become useful; and there were no general indications that it ever would be so. By and large it is uniformly true in mathematics that there is a time lapse between a mathematical discovery and the moment when it is useful; and that this lapse of time can be anything from 30 to 100 years, in some cases even more; and that the whole system seems to function without any direction, without any reference to usefulness, and without any desire to do things which are useful.}} ** [[존 폰 노이만]]. "The Role of Mathematics in the Sciences and in Society" (1954) an address to Princeton alumni, published in John von Neumann : Collected Works (1963) edited by A. H. Taub ; also quoted in Out of the Mouths of Mathematicians : A Quotation Book for Philomaths (1993) by R. Schmalz *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 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 [[허준이]]. 2022학년도 서울대학교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 [https://www.youtube.com/watch?v=OLDhaqosPtA&t=304s 필즈상 허준이 졸업식 축사 5:04] == 철학 == * 그러나 나는 모든 특정한 자연이론 속에 수학이 들어 있는 만큼만 진정한 과학이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llang|de|Ich behaupte aber, daß in jeder besonderen Naturlehre nur so viel eigentliche Wissenschaft angetroffen werden könne, als darin Mathematik anzutreffen ist.}} ** [[이마누엘 칸트]].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A VIII * 내가 수학을 우리가 행성이라 부르는 한 쌍의 흙덩이에 적용하든, 순수한 산술 문제에 적용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만 후자가 나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줄 뿐이다. *: {{llang|de|Ob ich die Mathematik auf ein Paar Dreckklumpen anwende, die wir Planeten nennen, oder auf rein arithmetische Probleme, es bleibt sich gleich, die letztern haben nur noch einen höhern Reiz für mich.}}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Gauß nach W. Sartorius v. Waltershausen 1856, Neudruck 1965, S. 101/102. == 역사 == * 제가 보기에 수학의 가장 큰 문제는 편견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수학을 건조하고 유클리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학문이라고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실상 수학은 엄청나게 활발한 분야이며, 지난 3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발전해 왔고 일상의 수많은 영역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 {{llang|it|Secondo me il grosso problema della matematica è che si sono molti pregiudizi, si pensa che sia una materia arida, che non è mai cambiata dai tempi di Euclide a oggi. In verità è una disciplina estremamente attiva, anzi non è mai stata così attiva come negli ultimi 30 anni ed ha applicazioni in molti campi della quotidianità.}} ** 알레시오 피갈리. [https://www.repubblica.it/tecnologia/2018/08/01/news/io_dalle_olimpiadi_della_matematica_alla_medaglia_fields_alessio_figalli_si_racconta_a_repubblica-300970883/ “Così ho vinto il 'Nobel' della matematica”] [[분류:수학]] s79bccw1sp5ppjmuhq1wywn17n0jivs 번역 0 5588 35290 35237 2026-09-10T15:24:50Z Galaxy486 7251 /* 긍정적 시각 */ 35290 wikitext text/x-wiki [[파일:Hannya shingyo.png|섬네일|300px|현장 법사가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반야심경"을 중국어로 옮긴 번역본]] [[파일:Rosetta Stone.JPG|섬네일|300px|내용의 칙령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로 그려진 비석 "로제타 석"]] {{위키백과}} {{위키낱말사전}} '''번역'''은 어떤 언어로 이루어진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을 의미한다. == 긍정적 시각 == * 진정한 번역이란 다른 언어로 말해진 것을 자기 언어의 어법에 맞게 녹여내는 것이다. -- [[마르틴 루터]]. "Tischreden" *: {{llang|de|Wirklich übersetzen heißt: etwas, das in einer andern Sprache gesprochen ist, seiner Sprache anpassen.}} * 번역이란 독자적이고 독특하며 독립적인 언어 예술의 한 형태라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해야 한다. 번역은 '파생적(2차적)' 예술이자, 다른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원작을 '재표현'하는 예술이다. 언뜻 보면 번역 예술은 음악가나 배우, 낭독자의 재현(연주·연기) 예술과 닮아 있다. 완전히 독창적인 무언가를 새로 창조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예술 작품을 재현해 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번역가의 창조적 자유가 원작에 의해 제한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면에서 번역은 그 어떤 재현 예술과도 명확히 구별된다... *: {{llang|ru|Нужно согласиться с мыслью, что перевод — это особый, своеобразный и самостоятельный вид словесного искусства. Это искусство «вторичное», искусство «перевыражения» оригинала в материале другого языка. Переводческое искусство, на первый взгляд, похоже на исполнительское искусство музыканта, актёра, чтеца тем, что оно репродуцирует существующее художественное произведение, а не создаёт нечто абсолютно оригинальное, тем, что творческая свобода переводчика ограничена подлинником. <…> В остальном перевод резко отличается от любого вида исполнительского искусства…}} ** 베네딕트 스테파노비치 비노그라도프. Виноградов B. C. Лексические вопросы перевода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прозы. — М., 1978. — С. 8. * 작가의 의무이자 과업은 곧 번역가의 그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Le temps retrouvé, Marcel Proust, éd. Pléiade, 1957, t. III, p. 895 *: {{llang|fr|Le devoir et la tâche d'un écrivain sont ceux d'un traducteur.}} * Q: 선생님께서는 말 그대로 '평생'을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에 바쳐오셨습니다. 혹자는 '집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무엇이 선생님을 고전 번역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지 궁금합니다.<br/>A: '''내가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에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번역도 창작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의 구마라습이나 현장법사의 한역(漢譯) 불경들은 동양의 대승불교 사상의 형성과 완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의 불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 라틴 고전도 우리의 사고 지평을 넓혀주고 심화해줄 훌륭한 영양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 문명은 서양 역사 전체를 통틀어 후대에 가장 빛나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공직자들을 투표로 선출하고, 민회에서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꽃피었고, 철학, 역사, 서사시, 드라마, 조각, 건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로마는 물론이고 서유럽이 빨리 야만을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 문화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르네상스’란 다름 아닌 그리스 문화의 부활 그 자체입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문화 전반에 적용하여 유럽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주석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 [[천병희]]. [https://www.aladin.co.kr/author/wauthor_interview.aspx?AuthorSearch=@44331&srsltid=AfmBOoouRgkapqfbE2zkgrp5PkZfDHOfIqRj7RSGM_D0ygHhBqMf-1FX 알라딘 커뮤니케이션 인터뷰]. *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배우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입학하자마자 취업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라틴 고전을 편역하는 수준을 넘어 원전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잘된 우리말 번역이 잘된 영역이나 독역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원전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어를 배운 지가 벌써 50년이 훨씬 넘었고 번역할 때면 영역 몇 가지와 독역 몇 가지를 참고하니까 계속해서 독일어와 함께하는데도,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잘된 독역이라도 읽어 보면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일 경우 말입니다. ** 천병희. (2009-07-06) [https://www.yes24.com/product/goods/2148271 yes24 "오뒷세이아" 만든 이 코멘트] == 부정적 시각 == * 과거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다.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매양 승예(僧叡)를 위하여 서방의 말투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漢字)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br/>“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br/>'''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 {{llang|zh|初沙門僧睿,才識高明,常隨什傳寫。什每爲睿論西方辭體,商略同異,云:“天竺國俗,甚重文製,其宮商體韻,以入絃爲善。凡覲國王,必有贊德,見佛之儀,以歌歎爲貴,經中偈頌,皆其式也。但改梵爲秦,失其藻蔚,雖得大意,殊隔文體。有似嚼飯與人,非徒失味,乃令嘔噦也。”}} ** 《고승전》(高僧傳) 002권. 1) 〈구마라집〉(鳩摩羅什) 중.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 '''번역은 반역이다.''' -- 이탈리아의 경구. *: {{llang|it|traduttore, traditore}} * '''시를 외국어로 번역할 때 의당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재주가 많아도 번역이 원작만큼 훌륭해질 수는 없는 것이야.''' ** 《[[돈키호테]] 1》. 박철 번역. 제6장. pp.102~103. * 수학자란 일종의 프랑스인과 같다. 그들에게 말을 걸면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해 버리는데, 그러고 나면 곧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 *: {{llang|de|Die Mathematiker sind eine Art Franzosen: Redet man zu ihnen, so übersetzen sie es in ihre Sprache, und dann ist es alsbald etwas anderes.}}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잠언과 성찰》(Maximen und Reflexionen) 중. * 번역이 헛된 일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비꽃의 색채와 향기의 형상적 원리를 알아내겠다고 제비꽃을 도가니 속에 던져 넣는 것이나, 시인의 창작물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려 애쓰는 것이나 무모하긴 마찬가지다. 식물은 제 씨앗에서 다시 싹을 틔워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 법이며, 이것이야말로 바벨탑의 저주가 지운 무거운 짐이다. -- 퍼시 비시 셸리. ''A Defence of Poetry'' (1821) *: {{llang|en|Hence the vanity of translation; it were as wise to cast a violet into a crucible that you might discover the formal principle of its colour and odour, as seek to transfuse from one language into another the creations of a poet. The plant must spring again from its seed, or it will bear no flower—and this is the burthen of the curse of Babel.}} * 번역은 언어의 영혼을 파괴한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Albaigès (1997), p. 73. *: {{llang|es|La traducción destroza el espíritu del idioma}} * 매번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글 번역서의 잘못된 부분을 '대충이나마' 지적하고 고치는 데에 한두 시간씩을 할애해야 했다. 그런데 이 일은 무척이나 짜증스럽고 소모적인 작업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게는 논리상으로나 구문상으로나 정확하지 못한 문장을 읽는 작업이, 차량이 빽빽하게 들어선 교통 혼잡 지역에서 차를 운전하는 것만큼이나, 짜증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강정인, 〈초판 번역본 역자 후기〉, [[마키아벨리]], 《군주론》(강정인, 김경희 옮김) [[분류:언어]] [[분류:직업]] 33mgq9gkmsno6ea6juhgjlfaitv68en 반야심경 0 5909 35306 26833 2026-09-11T09:04:54Z Galaxy486 7251 35306 wikitext text/x-wiki {{토막글}} {{위키백과}} == 어록 == * 사리자여, [[물질]]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이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며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과 의식도 모두 이와 같다. [[분류:책]] 5bid5tidf1plnny7zfwz4u9n5p6rjqj 오디세이아 0 7414 35308 35167 2026-09-11T09:14:35Z Galaxy486 7251 35308 wikitext text/x-wiki {{위키백과}}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다. [[호메로스]]가 창작했다고 추정된다. 《[[일리아스]]》와 함께 서양 문학 전반에 방대한 영향을 남긴 고전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 1권 == * 한 사람을 제게 말씀하옵소서, 무사 여신이시여, 숱하게 변전한 그이는<br />신성한 도시 트로이아를 무너뜨린 다음, 참 많이도 떠돌았습니다.<br />그는 허다한 사람들의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심성도 알아보았지요.<br />바다에서는 동료들의 목숨과 귀향을 지켜내려고<br />기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br />그러나 그토록 몸부림쳤음에도 동료들을 구해내지는 못했으니<br />그들이 저 스스로 택한 잘못으로 파멸해버린 탓이지요.<br />그 철부지들은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들을 잡아먹었고,<br />신께서는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앗아 가셨습니다. 이 중 어디서부터든 좋으니,<br />여신이시여, 제우스의 따님이시여, 저희에게 말씀하옵소서. ** 《오뒷세이아》. 이준석 번역. p.15. 1~10행 <hr width="50%"/> * 한편 텔레마코스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원에 있는,<br />높직이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리에 지어진 자기 방으로 향하였다.<br />그는 거기서 많은 것들을 심중으로 저울질해보며 침대로 걸음을 옮겼고,<br />사려 깊은 일들을 잘 알고 있는 에우뤼클레이아는 그와 함께하며<br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갔다. 그녀는 페이세노르의 아들 옵스의 딸로서<br />언젠가 라에르테스가 제 돈을 들여 황소 스무 마리 값을 내고<br />사들였을 때, 그녀는 아직도 막 피어오르는 나이였다. ** 《오뒷세이아》. 이준석 번역. p.37. 425~431행 == 2권 == * 이른 나절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의 에오스(새벽)가 모습을 드러내자,<br />오뒷세우스의 친아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br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어깨에 둘러맨 다음<br />윤기 도는 두 발 아래에는 아름다운 신발을 묶어 신었다.<br />그가 방에서 걸어 나오니, 그 모습은 신과 다를 바 없었다. ** 《오뒷세이아》. 이준석 번역. p.38. 1~5행 <hr width="50%"/> * 한편, 텔레마코스는 멀리 떨어진 바닷가로 가더니<br />잿빛 소금 물결에 두 손을 씻고 아테네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br />"제 말씀 들어주소서, 임께선 어제 저희 집에 신으로 오셨고,<br />제게는 배를 타고 안개 덮인 바다를 건너<br />떠난 지 오랜 아버지의 귀향에 대해 물어 알아 오라 명하셨나이다.<br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아카이아인들이, 인간 위에 서기를 자처하는<br />구혼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악랄하게 가로막고 있나이다." ** 《오뒷세이아》. 이준석 번역. p.51. 260~266행 <hr width="50%"/> * 빛나는 눈의 아테네가 그들을 위해 순풍을 보내주니<br />포도줏빛 바다 위에서 노호하는, 거센 제퓌로스(서풍)였다.<br />텔레마코스는 동료들에게 장비들을 단단히 움켜쥐라<br />격려했고, 그들도 그의 격려에 귀 기울였다.<br />그들은 전나무 돛대를 세워 올려 구레통 구멍으로 밀어 넣더니<br />앞버팀줄로 단단히 묶어놓았고,<br />잘 꼬아놓은 쇠가죽 마룻줄을 당겨 눈부신 돛을 올렸다. ** 《오뒷세이아》. 이준석 번역. pp.58~60. 420~431행 == 참고 문헌 == * 이준석 번역. (2023). 《오뒷세이아》. 아카넷. ISBN 9788957338865 [[분류:시]] awx1wklchteuhjiubjk17onyr1fzt14 아이네이스 0 7415 35307 35264 2026-09-11T09:13:02Z Galaxy486 7251 /* 참고 문헌 */ 35307 wikitext text/x-wiki {{토막글}} {{위키백과}} '''《아이네이스》'''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만든 서사시다. == 어록 == === 제1권 === *'''무기들과 한 전사를 나는 노래하노라.''' 그는 운명에 의해 트로이야의<br />해변에서 망명하여 처음으로 이탈리아와 라비니움의 해안에 닿았으나,<br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하늘의 신들의 뜻에 따라 숱한 시달림을 당했으니<br />잔혹한 유노가 노여움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에서도<br />많은 고통을 당했으나 마침내 도시를 세우고 라티움 땅으로<br />신들을 모셨으니, 그에게서 라티니족과 알바의 선조들과<br />높다란 로마의 성벽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 《아이네이스》. 출판사 숲. p.22 == 참고 문헌 == * 베르길리우스. [[천병희]] 번역. (2007). 《아이네이스》. 출판사 숲. ISBN 9788991290181 [[분류:시]] t3k1vzikwckcaaykd1smdiamxybpr0a 사용자:Galaxy486 2 7480 35289 35275 2026-09-10T12:45:09Z Galaxy486 7251 /* 보완이 필요한 문서 */ 35289 wikitext text/x-wiki 현재 100권이 넘는 고전 문학, 철학서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위키인용집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 완성된 문서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보완이 필요한 문서 == * [[공자]] ** [[논어]] * [[석가모니]] * [[이순신]] * [[구운몽]] * [[알렉산드르 푸시킨]]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죄와 벌]] * [[안톤 체호프]]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연습장 == * [[/연습장]] mh243qwslj6b17i8m5zr2oiqxs4p0yi 35291 35289 2026-09-10T15:31:03Z Galaxy486 7251 35291 wikitext text/x-wiki 현재 100권이 넘는 고전 문학, 철학서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위키인용집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 연습장 == * [[/연습장]] == 완성된 문서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보완이 필요한 문서 == * [[공자]] ** [[논어]] * [[석가모니]] * [[이순신]] * [[구운몽]] * [[알렉산드르 푸시킨]]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죄와 벌]] * [[안톤 체호프]]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문서 완성도 == === 최상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이마누엘 칸트]] * [[프리드리히 니체]] * [[플라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 === * [[공자]] ** [[논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중 === * [[안톤 체호프]] * [[헤르만 헤세]]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이순신]] * [[구운몽]] * [[볼테르]] * [[호라티우스]] * [[일리아스]] * [[오디세이아]] knn5yox8j3rwyn7w3yaq3jmvp7pj1mq 35297 35291 2026-09-10T16:28:12Z Galaxy486 7251 /* 중 */ 35297 wikitext text/x-wiki 현재 100권이 넘는 고전 문학, 철학서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위키인용집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 연습장 == * [[/연습장]] == 완성된 문서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보완이 필요한 문서 == * [[공자]] ** [[논어]] * [[석가모니]] * [[이순신]] * [[구운몽]] * [[알렉산드르 푸시킨]]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죄와 벌]] * [[안톤 체호프]]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문서 완성도 == === 최상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이마누엘 칸트]] * [[프리드리히 니체]] * [[플라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 === * [[공자]] ** [[논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중 === * [[안톤 체호프]] * [[헤르만 헤세]]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이순신]] * [[구운몽]] * [[볼테르]] * [[호라티우스]] * [[일리아스]] * [[오디세이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 9ybap2muq77578n2jxq4b8r1t0h473n 35304 35297 2026-09-11T08:11:18Z Galaxy486 7251 35304 wikitext text/x-wiki 현재 100권이 넘는 고전 문학, 철학서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위키인용집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 연습장 == * [[/연습장]] == 완성된 문서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논어]] == 보완이 필요한 문서 == * [[공자]] * [[석가모니]] * [[이순신]] * [[구운몽]] * [[알렉산드르 푸시킨]]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죄와 벌]] * [[안톤 체호프]]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문서 완성도 == === 최상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이마누엘 칸트]] * [[프리드리히 니체]] * [[플라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 === * [[공자]] ** [[논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중 === * [[안톤 체호프]] * [[헤르만 헤세]]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이순신]] * [[구운몽]] * [[볼테르]] * [[호라티우스]] * [[일리아스]] * [[오디세이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 mk3l0jf0wb7jauimob7k2hn08o5nfgn 35305 35304 2026-09-11T08:11:46Z Galaxy486 7251 /* 상 */ 35305 wikitext text/x-wiki 현재 100권이 넘는 고전 문학, 철학서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위키인용집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 연습장 == * [[/연습장]] == 완성된 문서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논어]] == 보완이 필요한 문서 == * [[공자]] * [[석가모니]] * [[이순신]] * [[구운몽]] * [[알렉산드르 푸시킨]]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죄와 벌]] * [[안톤 체호프]]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문서 완성도 == === 최상 === * [[수학]] * [[피아니스트 (2002년 영화)]] * [[번역]] * [[천병희]] * [[허준이]] * [[이마누엘 칸트]] * [[프리드리히 니체]] * [[플라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상 === * [[공자]]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중 === * [[안톤 체호프]] * [[헤르만 헤세]]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안네 프랑크]] * [[한나 아렌트]] * [[이순신]] * [[구운몽]] * [[볼테르]] * [[호라티우스]] * [[일리아스]] * [[오디세이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 frnq0p538kyee6jd8xg23nrodkyrq0y 카이사르 0 7484 35293 2026-09-10T15:49:29Z Galaxy486 7251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서로 넘겨주기 35293 wikitext text/x-wiki #넘겨주기[[율리우스 카이사르]] 2u4dy56vq5901k9f3d66d7hgcxj294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