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인용집 kowikiquote https://ko.wikiquote.org/wiki/%EC%9C%84%ED%82%A4%EC%9D%B8%EC%9A%A9%EC%A7%91:%EB%93%A4%EB%A8%B8%EB%A6%AC MediaWiki 1.47.0-wmf.19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인용집 위키인용집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행사 행사토론 이순신 0 2009 35333 35328 2026-09-14T09:38:29Z Galaxy486 7251 /* 《난중일기》 */ 35333 wikitext text/x-wiki [[파일:Bust of Yi Sun-sin 01.jpg|섬네일|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w:임진왜란|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월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31 * 3월 29일. 맑음. 나라(정희왕후 윤씨)의 제삿날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3 * 4월 15일. 맑음. 나라(공혜왕후 한씨)의 제삿날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순찰사(이광)에게 보낼 답장과 별도 기록을 적어서, 곧바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가 보낸 통첩에,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부산 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각 장계를 보내고 겸하여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5 * 4월 16일. 밤 10시경에 영남 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의 지휘 군영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함을 참을 수가 없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공문을 보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5 * 4월 18일.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 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임시 장수를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오후 2시경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조영규), 울산(이언함)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했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경상 좌병사(이각)와 경상 좌수사(박홍)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급히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원통했다. 저녁에 순천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석축 성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인도하지 않으므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p.45~46 * 4월 20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김수)의 공문이 왔다. "큰 적들이 맹렬하게 몰려와 그 날카로운 기세를 대적할 수가 없으니, 그 승승장구함이 마치 무인지경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 "전함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구원해 오도록 장계로 청했다."고 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6 * 5월 2일. 맑음.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남해 현령(기효근), 미조항 첨사(김승룡), 상주포, 곡해(남해 화계리), 평산포 만호(김축) 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의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매우 놀랄 일이다. 정오경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 군수(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원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가능하겠는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세 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장의 공문이 내려왔다. 창평 현령이 부임하였다는 편지가 와서 바쳤다. 이 날 저녁의 군대 암호는 용호(龍虎)이고, 복병은 산수(山水)라고 하였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p.47~48 '''1592년 5월 7일~28일 옥포 해전.''' * '''오직 나가서 싸우다가 죽을 뿐이요. 감히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 * 5월 7일. '''경거망동하지 말라. 산처럼 침착하게 하라.''' * 14일. 맑음. (중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아직 봉함을 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해지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悅)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마음으로 면(葂)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처럼 인자하지 못한 것인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난 것인가,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도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p.380~381 == 《이충무공전서》 == *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自壬辰至于五六年間。賊不敢直突於兩湖者。以舟師之扼其路也。今臣戰船尙有 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今若全廢舟師。則是賊之所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此臣之所恐也。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232A_0120_010_0010&solrQ=query%E2%80%A0%E4%BB%8A%E8%87%A3%E6%88%B0%E8%88%B9%20%E5%B0%99%E6%9C%89%E5%8D%81%E4%BA%8C$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MO_AA$solr_toalCount%E2%80%A02$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MO_0232A_0120_010_0010 한국고전종합DB 원본] *19일. 새벽, 공(公)이 한창 전투를 독려하던 중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맞았다. 공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 十九日。黎明。公方督戰。忽中飛丸。公曰。戰方急。 愼勿言我死。言訖而逝。 :* 《이충무공전서》. 이분. 行錄[從子正郞芬]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232A_0120_010_0010&solrQ=query%E2%80%A0%E6%88%B0%E6%96%B9%E6%80%A5%20%E6%84%BC%E5%8B%BF%E8%A8%80%E6%88%91%E6%AD%BB$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MO_AA$solr_toalCount%E2%80%A08$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MO_0232A_0120_010_0010 한국고전종합DB 원본] == 관련 언사 == [[파일:2012-05-06 Seoul Downtown.jpg|섬네일|가운데|500px|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5wg6cl6s7us1jh3l8bpwsvpx21xa87q 35334 35333 2026-09-14T09:47:49Z Galaxy486 7251 /* 《난중일기》 */ 35334 wikitext text/x-wiki [[파일:Bust of Yi Sun-sin 01.jpg|섬네일|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위키백과}} '''[[w:ko: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조선 인종|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조선 선조|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이다. 22살에 무예를 배우고 10년 뒤인 32살에 식년 무과시험에서 합격하였다. 1591년,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종4품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도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확신해서 왕이 내린 특령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w:임진왜란|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많은 성과들을 발휘하면서 일본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1597년 정유년에서 이순신은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먼저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은 파직되어 옥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되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어난 군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12척의 배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음력) 전라도 진도의 울돌목 해안에서 총합 333척 규모의 일본군과 명량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정유재란 전체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바꾼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섬멸을 위해 노량 해전을 벌이고,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전사한다. 같은 해 12월 21일 남해왜성 소탕전으로 정유재란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 《난중일기》 == 이순신. 노승석 옮김. (2025). 《난중일기》. 여해. ISBN 9791197378270 * 1월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마절도사(이광)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긴 화살과 짧은 화살 등 여러 가지 물건(임금 진상용)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31 * 3월 29일. 맑음. 나라(정희왕후 윤씨)의 제삿날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3 * 4월 15일. 맑음. 나라(공혜왕후 한씨)의 제삿날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순찰사(이광)에게 보낼 답장과 별도 기록을 적어서, 곧바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가 보낸 통첩에,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부산 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각 장계를 보내고 겸하여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5 * 4월 16일. 밤 10시경에 영남 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의 지휘 군영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함을 참을 수가 없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공문을 보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5 * 4월 18일.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 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임시 장수를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오후 2시경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조영규), 울산(이언함)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했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경상 좌병사(이각)와 경상 좌수사(박홍)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급히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원통했다. 저녁에 순천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석축 성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인도하지 않으므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p.45~46 * 4월 20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김수)의 공문이 왔다. "큰 적들이 맹렬하게 몰려와 그 날카로운 기세를 대적할 수가 없으니, 그 승승장구함이 마치 무인지경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 "전함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구원해 오도록 장계로 청했다."고 했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46 * 5월 2일. 맑음.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남해 현령(기효근), 미조항 첨사(김승룡), 상주포, 곡해(남해 화계리), 평산포 만호(김축) 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의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매우 놀랄 일이다. 정오경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 군수(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원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가능하겠는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세 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장의 공문이 내려왔다. 창평 현령이 부임하였다는 편지가 와서 바쳤다. 이 날 저녁의 군대 암호는 용호(龍虎)이고, 복병은 산수(山水)라고 하였다.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p.47~48 '''1592년 5월 7일~28일 옥포 해전.''' * '''오직 나가서 싸우다가 죽을 뿐이요. 감히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 * 5월 7일. '''경거망동하지 말라. 산처럼 침착하게 하라.''' * 10월 14일. 맑음. (중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아직 봉함을 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해지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悅)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마음으로 면(葂)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처럼 인자하지 못한 것인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난 것인가,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도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 **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pp.380~381 == 《이충무공전서》 == *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自壬辰至于五六年間。賊不敢直突於兩湖者。以舟師之扼其路也。今臣戰船尙有 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今若全廢舟師。則是賊之所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此臣之所恐也。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232A_0120_010_0010&solrQ=query%E2%80%A0%E4%BB%8A%E8%87%A3%E6%88%B0%E8%88%B9%20%E5%B0%99%E6%9C%89%E5%8D%81%E4%BA%8C$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MO_AA$solr_toalCount%E2%80%A02$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MO_0232A_0120_010_0010 한국고전종합DB 원본] *19일. 새벽, 공(公)이 한창 전투를 독려하던 중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맞았다. 공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 十九日。黎明。公方督戰。忽中飛丸。公曰。戰方急。 愼勿言我死。言訖而逝。 :* 《이충무공전서》. 이분. 行錄[從子正郞芬]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232A_0120_010_0010&solrQ=query%E2%80%A0%E6%88%B0%E6%96%B9%E6%80%A5%20%E6%84%BC%E5%8B%BF%E8%A8%80%E6%88%91%E6%AD%BB$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MO_AA$solr_toalCount%E2%80%A08$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BD_ITKC_MO_0232A_0120_010_0010 한국고전종합DB 원본] == 관련 언사 == [[파일:2012-05-06 Seoul Downtown.jpg|섬네일|가운데|500px|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선조실록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5 기사 /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당시 조선 사관의 논평. ---- *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 신미(1631) 4월 5일(무신) 맑음.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9_04A_05A 한국고전종합DB 번역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의 건립기 <hr width="50%"/> *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대한민국 해군 복무신조 《해군의 다짐》 [[분류:16세기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장군]] 0k5uehlmn7hhcldhlkxnnbo5u7g40r0 데미안 0 3194 35332 35173 2026-09-13T14:31:46Z Galaxy486 7251 /* 카인 */ 35332 wikitext text/x-wiki [[파일:Demian Erstausgabe.jpg|섬네일|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10]] {{위키백과}} 《'''[[w:데미안|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llang|de|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는 1919년 독일의 소설가·시인인 [[헤르만 헤세]]가 발표한 소설이다. == 도입부 == *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br/>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 《데미안》. 문학동네. p.7 *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자기들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이야기를 완전히 꿰뚤어보고 파악할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마치 신이 직접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는 듯 언제 어디나 가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묘사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들도 물론 그렇게는 못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데미안》. 문학동네. p.7 == 두 세계 == *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인데 이 세계가 더 좁다. 실제로는 오직 나의 부모님만이 있는 세계였다. 내가 잘 아는 그 세계는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름,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온화한 광채, 명료함과 깨끗함이 이 세계의 것이었고, 부드럽고 친절한 이야기, 깨끗이 씻은 손과 옷가지, 좋은 습관이 여기 속했다. (중략) 삶을 분명하고 깨끗하게, 아름답고 질서 있게 하려면 이 세계에 머물러야 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p.10~11 * 또다른 세계는 우리 집 한가운데서 시작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였다. 냄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약속이나 요구도 달랐다. (중략) 거기에는 귀신 이야기와 추잡스러운 소문들이 있었고 끔찍한 것, 유혹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 수수께끼 같은 온갖 것이 있었다. 도살장이며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말다툼하는 여자들, 새끼를 낳는 암소들, 쓰러진 말들이 있었고 강도질, 사람을 때려죽인 일, 자살 등의 이야기들도 있었다. (중략)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우리 방들만 빼고는 사방 어디서나 이 두번째의 격한 세계가 쏟아져들어와 냄새를 풍겼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1 * 가장 이상한 일은 그 두 세계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었던가! ** 《데미안》. 문학동네. p.12 == 카인 == * 얼마 전에 우리 라틴어 학교에 새로운 학생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 도시로 이사온 부유한 과부의 아들이었는데 소매에 상(喪)을 당했다는 표시를 달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몇 살 위라서 상급 학년에 들어갔지만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내 눈에도 금방 띄었다. 이 특이한 학생은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들어 보였다. 그애는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우리 어린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돌아다닐 때 그는 어른처럼, 아니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해 보였다.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놀이에 끼지 않았으며, 싸움질에는 더욱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들 앞에서도 자의식이 분명하고 단호한 말투가 다른 애들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p.34~35 * 그는 과제를 하는 학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한 학자처럼 보였다. 그가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어딘가 거부감을 주는 요소가 있었다. 내겐 너무 우월하고도 차가웠고, 도전적일 정도로 확고하게 자신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눈길에는 어른의 표정이 담겨 있었는데-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표정이었다-약간의 조소가 어린 조금은 슬픈 모습이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35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 *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 곁의 안전함, 부모님을 향한 사랑, 온화하고 밝고 좋은 환경에서 충분히 놀면서 보낸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멋지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일이 되리라. 하지만 내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내디딘 삶의 발걸음들뿐이다. ** 《데미안》. 문학동네. p.59 * 인간은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고 넘어간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자기 삶의 요구와 주변세계가 가장 심하게 갈등하는 지점,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장 힘들게 쟁취해야 하는 삶의 지점이다. 어린 시절이 물러지면서 천천히 붕괴하는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우리의 운명인 죽음과 재탄생을 경험한다. ** 《데미안》. 문학동네. p.61 *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그 이상을 보았는데, 어른의 얼굴도 아닌 전혀 다른 무엇을 보았다고, 아니면 알아챘다고 믿었다. (중략) 어쩌면 그는 아름다웠고, 어쩌면 내 마음에 들었고, 어쩌면 역겹기도 했다. 그 어느 쪽인지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본 것은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p.63~64 == 베아트리체 == * 갑자기 내 앞에 다시 하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모습—아, 내 안의 그 어떤 갈망이나 충동도 존경과 숭배를 향한 소망만큼 그렇게 깊고 격렬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주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p.95~96 * 그 시절을 어떤 감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다시 가장 내적인 수고를 다하여 부서진 삶의 시기의 파편들을 모아 '밝은 세계'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내 안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완전히 밝은 데서 머물려는, 신들 앞에 무릎을 꿇으려는 단 한 가지 소망에 묻혀 살았다. ** 《데미안》. 문학동네. pp.96~97 ==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 * 내가 그린 꿈속의 새는 제 갈 길을 가서 내 친구를 찾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방식으로 답장이 왔다. (중략)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데미안》. 문학동네. pp.109~110 *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말이 여전히 귓가에 울렸다. 나는 여기서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우정의 맨끝 무렵에 데미안과의 대화에서 친숙해진 생각이었다. 데미안은 당시 우리가 숭배하는 하느님이란 멋대로 나누어놓은 세계의 절반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공식적으로 허용된 '밝은' 세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갖든가,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나란히 악마에 대한 예배도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프락사스는 바로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신이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12 * 사랑은 두 가지 모두였다. 두 가지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의 모습이며 악마이고, 하나가 된 남자이며 여자이고, 인간이며 동물이고, 최고의 선이며 극단적인 악이었다. 이를 겪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고, 이를 맛보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 나는 운명을 향해 동경과 공포를 품었지만, 운명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언제나 내 위에 있었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14 *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 《데미안》. 문학동네. p.115 * 나는 불꽃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꿈과 고요 속에 빠져들어 연기의 형상들과 재의 그림들을 보았다. 한번은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함께 불을 보고 있던 그가 잉걸불 속에 송진 한 조각을 던져넣자 작고 날씬한 불이 솟구쳐올랐다. 그 속에서 노란 새매의 머리를 한 그 새를 보았다. 스러져가는 벽난롯불 속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실들이 그물처럼 엉켜 철자와 그림들이 나타나고, 얼굴, 동물, 식물, 벌레, 뱀들에 대한 기억이 나타났다. ** 《데미안》. 문학동네. p.124 == 참고 문헌 == * 헤르만 헤세. 안인희 번역. (2013). 《데미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ISBN 9788954620147 [[분류:독일 소설]] [[분류:철학 소설]] [[분류:성장소설]] qmfbkj9jae9335qzaaxdwx97xvfxg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