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7.0-wmf.17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해석 해석토론 초안 초안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행사 행사토론 봄봄 0 2036 458651 245881 2026-08-26T04:05:41Z ~2026-46581-41 19680 458651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 봄 · 봄 |저자 = [[저자:김유정|김유정]] |부제 = |이전 = |마음 = |설명 = }} {{위키백과|봄봄}}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 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 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 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채서, “어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 들어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 지레 펄펄 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싱겁기도 할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볼까 했다. 마는 우리는 장인님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마디 하는 법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에미 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 말락 밤낮 요 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다귀가 움츠라드나보다, 하고 내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 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되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그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모를 붓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는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난 몰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그대루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오른 풀 한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쑥쑥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참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자식아.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자식 저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세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참봉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번히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생기길 호박개같애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 됐다. 장인에게 닭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던 놈이 그 땅을 슬쩍 돌라 안는다. 이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실굽실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소리할 계제가 못된다. 뒷생각은 못하고 뺨 한 개를 딱 때려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그속을 퍽 잘 안다. 조금 있으면 갈도 꺾어야 하고 모도 내야 하고, 한참 바쁜 때인데 나 일 안하고 우리집으로 그냥 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때도 트집을 좀 하니까 늦잠잔다구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놨다. 사날씩이나 건숭 끙끙, 앓았더니 종당에는 거반 울상이 되지 않았는가…… “예,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갈에 벼 잘되면 너 장가 들지 않니.” 그래 귀가 번쩍 띄어서 그날로 일어나서 남이 이틀 품들일 논을 혼자 삶아 놓으니까 장인님도 눈깔이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에 와서 혼인을 시켜 줘야 온 경우가 옳지 않겠나, 볏섬을 척척 들여쌓아도 다른 소리는 없고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는 점순이를 담배통으로 가리키며, “이 자식아, 미처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구 그러니 원!”하고 남 낯짝만 붉혀 주고 고만이다. 골김에 그저 이놈의 장인님, 하고 댓돌에다 메꼰코 우리 고향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꼴하고는 집으로 차마 못 간다. 장가를 들러갔다가 오죽 못났어야 그대로 쫓겨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논둑에서 벌떡 일어나 한풀 죽은 장인님 앞으로 다가서며, “난 갈 테야유. 그동안 사경 쳐내슈.” “너 사위로 왔지 어디 머슴살러 왔니?” “그러면 얼찐 성례를 해줘야 안하지유. 밤낮 부려만 먹구 해준다, 해준다……” “글쎄, 내가 안하는 거냐, 그년이 안 크니까.”하고 어름어름 담배만 담으면서 늘 하는 소리를 또 늘어놓는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언제든지 늘 나만 밑지고 만다. 이번엔 안 된다, 하고 대뜸 구장님한테로 판단 가자고 소맷자락을 내끌었다. “아, 이자식이 왜 이래 어른을.” 안 간다구 뻗디디구 이렇게 호령은 제맘대로 하지만 장인님 제가 내 기운은 못 당한다. 막 부려먹고 딸은 안 주고, 게다 땅땅 치는 건 다 뭐야……. 그러나 내 사실 참 장인님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날, 왜 내가 새고 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 않았느냐. 밭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 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병을 아직 모르지만)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어러이! 말이! 맘 마 마……”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소를 부리면 여느때 같으면 어깨가 으쓱으쓱한다. 웬일인지 밭을 반도 갈지 않아서 온몸이 맥이 풀리고 대구 짜증만 난다. 공연히 소만 들입다 두들기며…… “안야! 안야! 이 망할 자식의 소(장인님의 소니까) 대리를 꺾어들라.” 그러나 내 속은 정말 안야 때문이 아니라 점심을 이고 온 점순이의 키를 보고 울화가 났던 것이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참외가 제일 맛좋고 예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다란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톡톡히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냐. 헌데 한 가지 과가 있다면 가끔가다 몸이(장인님이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없이 풀밭에서 깨빡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 할까봐서 이걸 씹고 앉았느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루 밭머리에 곱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내에 부쩍 (속으로) 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 아직 어리다구 하니까……. 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구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죽히 삐치고 그걸 애헴, 하고 늘 쓰담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애헴을 한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츰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하고 첫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리 골을 내려고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구 일상 당조심을 받아오면서 난 그것두 자꾸 잊는다. 당장두 장인님, 하나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말에 장인님이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져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년 동안에도 안 자랐더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빙모님은점순이보다도 귓배기가 작다)" 장인님은 이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 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니 차마 못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러웠다. 그러나 이밖에는 별반 신통한 귀정을 얻지 못하고 도로 논으로 돌아와서 모를 부었다. 왜냐면 장인님이 뭐라구 귓속말로 수군수군하고 간 뒤다. 구장님이 날 위해서 조용히 데리고 아래와 같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뭉태의 말은 구장님이 장인님에게 땅 두 마지기 얻어부치니까 그래 꾀엿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않는다) "자네 말두 하기야 옳지, 암 나이 찼으니 아들이 급하다는 게 잘못된 말은 아니야. 허지만 농사가 한층 바쁜 때 일을 안한다든가집으로 달아 난다든가 하면 손해죄루 그것두 징역을 가거든!(여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났다) 왜 요전에 삼포말서 산에 불좀 놓았다구 징역간 거 못 봤나. 제 산에 불을 놓아도 징역을 가는 이땐데 남의 농사를 버려두니 죄가 얼마나 더 중한가. 그리고 자넨 정장을(사경 받으러 정장 가겠다 했다) 간대지만 그러면 괜스리 죄를 들쓰고 들어가는 걸세. 또 결혼두 그렇지. 법률에 성년이란 게 있는데 스물하나가 돼야지 비로소 결혼을 할 수가 있는걸세. 자넨 물론 아들이 늦을 걸 염려하지만 점순이루 말하면 이제 겨우 열여섯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까 빙장님의 말씀이 올 갈에는 열일을 제치고라두 성례를 시켜주겠다 하시니 좀 고마울겐가. 빨리 가서 모붓든 거나 마저 붓게, 군소리 말구 어서 가."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끽소리 없이 왔다.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전혀 뜻밖의 일이라 안할 수 없다. 장인님으로 말하면 요즈막 작인들에게 행세를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돈 있으면 양반이지 별게 있느냐!" 하고 일부러 아랫배를 쑥 내밀고 걸음도 뒤틀리게 걷고 하는 이판이다. 이까진 나쯤 두들기다 남의 땅을 가지고 모처럼 닦아놓았던 가문을 망친다든가 할 어른이 아니다. 또 나로 논지면 아무쪼록 잘 봬서 점순이에게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자면 결국 어젯밤 뭉태네 집에 마슬간 것이 썩 나빴다. 낮에 구장님 앞에서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빈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구두 그걸 가만 둬?" "그럼 어떡허니?" "임마, 봉필일 모판에다 거꾸로 박아놓지 뭘 어떡해?"하고 괜히 내 대신 화를 내가지고 주먹질을 하다 등잔까지 쳤다. 놈이 번히 괄괄은 하지만 그래놓고 날더러 석유값을 물라구 막 찌다우를 붙는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잠자코 앉았으니까 저만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밤낮 일만 해주구 있을 테냐?" "영득이는 일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년이나 살구두 더살아야 해?" "네가 세번째 사윈줄이나 아니? 세번째 사위"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자식아, 우물에 가 빠져 죽어." 나중에는 겨우 손톱으로 목을 따라고까지 하고, 제 아들같이 함부로 훅닥이었다. 별의별 소리를 다해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 줄거리는 이렇다……. 우리 장인님 딸이 셋이 있는데 맏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그 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즉 십년 동안에 데릴사위를 갈아들이기를, 동리에선 사위부자라고 이름이 났지마는 열네 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 때까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방 바꿔들였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째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 담으로 네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일도 잘하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록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세째딸이 인제 여섯살, 적어두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 테므로 그 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리고 장가를 들여달라구 떼를 쓰고 나자빠져라, 이것이다. 나는 겉으로 엉, 엉, 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뭉태는 땅을 얻어부치다가 떨어진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 먹어서 으릉거린다. 그것도 장인님이 저 달라고 할 적에 제 집에서 위한다는 그 감투(예전에 원님이 쓰던 것이라나, 옆구리에 뽕뽕 좀 먹은 걸레)를 선뜻 주었더면 그럴 리도 없었던 걸……. 그러나 나는 뭉태란 놈의 말을 전수히 곧이듣지 않았다. 꼭 곧이들었다면 간밤에 와서 장인님과 싸웠지 무사히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딸에게까지 인심을 잃은 장인님이 혼자 나빴다. 실토이지 나는 점순이가 아침상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는 오늘은 또 얼마나 밥을 담았나, 하고 이것만 생각했다. 상에는 된장찌개하고 간장 한 종지, 조밥 한 그릇, 그리고 밥보다 더 수부룩하게 담은 산나물이 한 대접, 이렇다. 나물은 점순이가 틈틈이 해오니까 두 대접이고 네 대접이고 멋대로 먹어도 좋으나 밥은 장인님이 한 사발 외엔 더 주지 말라고 해서 안된다. 그런데 점순이가 그 상을 내 앞에 내려 놓으며 제 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구장님한테 갔다 그냥 온담 그래!"하고 엊그제 산에서와 같이 되우 쫑알거린다. 딴은 내가 더 단단히 덤비지 않고 만 것이 좀 어리석었다, 속으로 그랬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들어가지 않느냐, 이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은 황새새끼처럼 가여 웁다 했을 것이다. 사실 이때만치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밥을 먹은 뒤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려 하다 도로 벗어던지고 바깥 마당 공석 위에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생각했다. 내가 일 안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하고 결국 농사 못 짓고 만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다 날 보고서, "이자식아, 왜 또 이러니." "관격이 났어유, 아이구 배야!" "기껀 밥 처먹구 무슨 관격이야, 남의 농사 버려주면 이자식아 징역간다 봐라!" "가두 좋아유, 아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해서 징역 가도 좋다 생각했다. 일후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열쪽이 난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저편으로 힝하게 가더니 지게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돌 떠넘기듯이 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밥을 잔뜩 먹어 딱딱한 배가 그럴 적마다 퉁겨지면서 밸창이 꼿꼿한 것이 여간 켕기지 않았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배를 지게 막대기로 위에서 쿡쿡 찌르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했다. 장인님은 원체 심청이 궂어서 그러지만 나도 저만 못하지 않게 배를 채었다. 아픈 것을 눈을 꽉 감고 넌 해라 난 재밌단 듯이 있었으나 볼기짝을 후려갈길 적에는 나도 모르는 결에 벌떡 일어나서 그 수염을 잡아챘다. 마는 내 골이 난 것이 아니라 정말은 아까부터 벽 뒤 울타리 구멍으로 점순이가 우리들의 꼴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 한마디 톡톡히 못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 게 아닌가. 또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하곤 아무것도 안되니까 막 때려도 좋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채고(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때 점순이는 퍽 기뻤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참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갈겼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밭 있는 넝알로 그대로 떠밀어 굴려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하지유!" 나는 이렇게 호령했다. 허지만 장인님이 선뜻 오냐 낼이라두 성례시켜 주마, 했으면 나도 성가신 걸 그만두었을지 모른다. 나야 이러면 때린 건 아니니까 나중에 장인 쳤다는 누명도 안 들을 터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한번은 장인님이 헐떡헐떡 기어서 올라오더니 내 바짓가랭이를 요렇게 노리고서 단박 움켜잡고 매달렸다. 악, 소리를 치고 나는 그만 세상이 다 팽그르 도는 것이, "빙장님! 빙장님! 빙장님!" "이자식!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하고 두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로 죽나보다 했다. 그래두 장인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눈엔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이를 꽉 움키고 잡아나꿨다.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를 얻어맞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또한 우리 장인님이 유달리 착한 곳이다. 여느 사람이면 사경을 주어서라도 당장 내어쫓았지, 터진 머리를 볼솜으로 손수 지져 주고, 호주머니에 희연 한 봉을 넣어 주고 그리고, "올 갈엔 꼭 성례를 시켜 주마. 암만 말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얼른 갈아라." 하고 등을 뚜덕여 줄 사람이 누구냐.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 점순이를 남기고 인젠 내쫓기려니 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빙장님! 인제 다시는 안그러겠어유!" 이렇게 맹세를 하며 부랴부랴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갔다. 그러나 이때는 그걸 모르고 장인님을 원수로만 여겨서 잔뜩 잡아당겼다.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장인님은 헷손질을 하며 솔개미에 챈 닭의 소리를 연해 질렀다. 놓긴 왜, 이왕이면 호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짖궂이 더 댕겼다. 마는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것을 알고 좀 겁도 났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라." 그래도 안되니까, "애 점순아! 점순아!" 이 악장에 안에 있었던 장모님과 점순이가 헐레벌떡하고 단숨에 뛰어 나왔다. 나의 생각에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순이는 내 편을 들어서 속으로 고수해 하겠지---. 대체 이게 웬 속인지(지금까지도 난 영문을 모른다) 아버질 혼내 주기는 제가 내래 놓고 이제 와서는 달겨들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고, 귀를 뒤로 잡아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꺾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도 덤벼들어 한쪽 귀마저 뒤로 잡아채면서 또 우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도 못하게 해놓고 장인님은 지게막대기를 들어서 사뭇 내려조졌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해도 그 속 알 수 없는 점순이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이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div> == 라이선스 == {{PD-old-70}} [[분류:단편소설]] rzpgdqomad6mmq10le2rg32pgojyfss 458652 458651 2026-08-26T05:48:43Z ZornsLemon 15531 [[Special:Contributions/~2026-46581-41|~2026-46581-41]] ([[User talk:~2026-46581-41|토론]])의 [[Special:Diff/458651|458651]] 판 편집을 되돌림 458652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제목 = 봄 · 봄 |저자 = [[저자:김유정|김유정]] |부제 = |이전 = |마음 = |설명 = }} {{위키백과|봄봄}}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 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 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 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채서, “어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 들어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 지레 펄펄 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싱겁기도 할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볼까 했다. 마는 우리는 장인님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마디 하는 법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에미 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 말락 밤낮 요 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다귀가 움츠라드나보다, 하고 내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 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되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그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모를 붓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는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난 몰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그대루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오른 풀 한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쑥쑥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참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자식아.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자식 저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세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참봉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번히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생기길 호박개같애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 됐다. 장인에게 닭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던 놈이 그 땅을 슬쩍 돌라 안는다. 이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실굽실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소리할 계제가 못된다. 뒷생각은 못하고 뺨 한 개를 딱 때려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그속을 퍽 잘 안다. 조금 있으면 갈도 꺾어야 하고 모도 내야 하고, 한참 바쁜 때인데 나 일 안하고 우리집으로 그냥 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때도 트집을 좀 하니까 늦잠잔다구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놨다. 사날씩이나 건숭 끙끙, 앓았더니 종당에는 거반 울상이 되지 않았는가…… “예,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갈에 벼 잘되면 너 장가 들지 않니.” 그래 귀가 번쩍 띄어서 그날로 일어나서 남이 이틀 품들일 논을 혼자 삶아 놓으니까 장인님도 눈깔이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에 와서 혼인을 시켜 줘야 온 경우가 옳지 않겠나, 볏섬을 척척 들여쌓아도 다른 소리는 없고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는 점순이를 담배통으로 가리키며, “이 자식아, 미처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구 그러니 원!”하고 남 낯짝만 붉혀 주고 고만이다. 골김에 그저 이놈의 장인님, 하고 댓돌에다 메꼰코 우리 고향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꼴하고는 집으로 차마 못 간다. 장가를 들러갔다가 오죽 못났어야 그대로 쫓겨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논둑에서 벌떡 일어나 한풀 죽은 장인님 앞으로 다가서며, “난 갈 테야유. 그동안 사경 쳐내슈.” “너 사위로 왔지 어디 머슴살러 왔니?” “그러면 얼찐 성례를 해줘야 안하지유. 밤낮 부려만 먹구 해준다, 해준다……” “글쎄, 내가 안하는 거냐, 그년이 안 크니까.”하고 어름어름 담배만 담으면서 늘 하는 소리를 또 늘어놓는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언제든지 늘 나만 밑지고 만다. 이번엔 안 된다, 하고 대뜸 구장님한테로 판단 가자고 소맷자락을 내끌었다. “아, 이자식이 왜 이래 어른을.” 안 간다구 뻗디디구 이렇게 호령은 제맘대로 하지만 장인님 제가 내 기운은 못 당한다. 막 부려먹고 딸은 안 주고, 게다 땅땅 치는 건 다 뭐야……. 그러나 내 사실 참 장인님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날, 왜 내가 새고 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 않았느냐. 밭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 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병을 아직 모르지만)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어러이! 말이! 맘 마 마……”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소를 부리면 여느때 같으면 어깨가 으쓱으쓱한다. 웬일인지 밭을 반도 갈지 않아서 온몸이 맥이 풀리고 대구 짜증만 난다. 공연히 소만 들입다 두들기며…… “안야! 안야! 이 망할 자식의 소(장인님의 소니까) 대리를 꺾어들라.” 그러나 내 속은 정말 안야 때문이 아니라 점심을 이고 온 점순이의 키를 보고 울화가 났던 것이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참외가 제일 맛좋고 예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다란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톡톡히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냐. 헌데 한 가지 과가 있다면 가끔가다 몸이(장인님이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없이 풀밭에서 깨빡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 할까봐서 이걸 씹고 앉았느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루 밭머리에 곱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내에 부쩍 (속으로) 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 아직 어리다구 하니까……. 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구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죽히 삐치고 그걸 애헴, 하고 늘 쓰담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애헴을 한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츰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하고 첫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리 골을 내려고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구 일상 당조심을 받아오면서 난 그것두 자꾸 잊는다. 당장두 장인님, 하나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말에 장인님이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져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년 동안에도 안 자랐더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빙모님은점순이보다도 귓배기가 작다)" 장인님은 이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 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니 차마 못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러웠다. 그러나 이밖에는 별반 신통한 귀정을 얻지 못하고 도로 논으로 돌아와서 모를 부었다. 왜냐면 장인님이 뭐라구 귓속말로 수군수군하고 간 뒤다. 구장님이 날 위해서 조용히 데리고 아래와 같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뭉태의 말은 구장님이 장인님에게 땅 두 마지기 얻어부치니까 그래 꾀엿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않는다) "자네 말두 하기야 옳지, 암 나이 찼으니 아들이 급하다는 게 잘못된 말은 아니야. 허지만 농사가 한층 바쁜 때 일을 안한다든가집으로 달아 난다든가 하면 손해죄루 그것두 징역을 가거든!(여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났다) 왜 요전에 삼포말서 산에 불좀 놓았다구 징역간 거 못 봤나. 제 산에 불을 놓아도 징역을 가는 이땐데 남의 농사를 버려두니 죄가 얼마나 더 중한가. 그리고 자넨 정장을(사경 받으러 정장 가겠다 했다) 간대지만 그러면 괜스리 죄를 들쓰고 들어가는 걸세. 또 결혼두 그렇지. 법률에 성년이란 게 있는데 스물하나가 돼야지 비로소 결혼을 할 수가 있는걸세. 자넨 물론 아들이 늦을 걸 염려하지만 점순이루 말하면 이제 겨우 열여섯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까 빙장님의 말씀이 올 갈에는 열일을 제치고라두 성례를 시켜주겠다 하시니 좀 고마울겐가. 빨리 가서 모붓든 거나 마저 붓게, 군소리 말구 어서 가."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끽소리 없이 왔다.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전혀 뜻밖의 일이라 안할 수 없다. 장인님으로 말하면 요즈막 작인들에게 행세를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돈 있으면 양반이지 별게 있느냐!" 하고 일부러 아랫배를 쑥 내밀고 걸음도 뒤틀리게 걷고 하는 이판이다. 이까진 나쯤 두들기다 남의 땅을 가지고 모처럼 닦아놓았던 가문을 망친다든가 할 어른이 아니다. 또 나로 논지면 아무쪼록 잘 봬서 점순이에게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자면 결국 어젯밤 뭉태네 집에 마슬간 것이 썩 나빴다. 낮에 구장님 앞에서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빈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구두 그걸 가만 둬?" "그럼 어떡허니?" "임마, 봉필일 모판에다 거꾸로 박아놓지 뭘 어떡해?"하고 괜히 내 대신 화를 내가지고 주먹질을 하다 등잔까지 쳤다. 놈이 번히 괄괄은 하지만 그래놓고 날더러 석유값을 물라구 막 찌다우를 붙는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잠자코 앉았으니까 저만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밤낮 일만 해주구 있을 테냐?" "영득이는 일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년이나 살구두 더살아야 해?" "네가 세번째 사윈줄이나 아니? 세번째 사위"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자식아, 우물에 가 빠져 죽어." 나중에는 겨우 손톱으로 목을 따라고까지 하고, 제 아들같이 함부로 훅닥이었다. 별의별 소리를 다해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 줄거리는 이렇다……. 우리 장인님 딸이 셋이 있는데 맏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그 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즉 십년 동안에 데릴사위를 갈아들이기를, 동리에선 사위부자라고 이름이 났지마는 열네 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 때까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방 바꿔들였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째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 담으로 네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일도 잘하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록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세째딸이 인제 여섯살, 적어두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 테므로 그 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리고 장가를 들여달라구 떼를 쓰고 나자빠져라, 이것이다. 나는 겉으로 엉, 엉, 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뭉태는 땅을 얻어부치다가 떨어진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 먹어서 으릉거린다. 그것도 장인님이 저 달라고 할 적에 제 집에서 위한다는 그 감투(예전에 원님이 쓰던 것이라나, 옆구리에 뽕뽕 좀 먹은 걸레)를 선뜻 주었더면 그럴 리도 없었던 걸……. 그러나 나는 뭉태란 놈의 말을 전수히 곧이듣지 않았다. 꼭 곧이들었다면 간밤에 와서 장인님과 싸웠지 무사히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딸에게까지 인심을 잃은 장인님이 혼자 나빴다. 실토이지 나는 점순이가 아침상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는 오늘은 또 얼마나 밥을 담았나, 하고 이것만 생각했다. 상에는 된장찌개하고 간장 한 종지, 조밥 한 그릇, 그리고 밥보다 더 수부룩하게 담은 산나물이 한 대접, 이렇다. 나물은 점순이가 틈틈이 해오니까 두 대접이고 네 대접이고 멋대로 먹어도 좋으나 밥은 장인님이 한 사발 외엔 더 주지 말라고 해서 안된다. 그런데 점순이가 그 상을 내 앞에 내려 놓으며 제 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구장님한테 갔다 그냥 온담 그래!"하고 엊그제 산에서와 같이 되우 쫑알거린다. 딴은 내가 더 단단히 덤비지 않고 만 것이 좀 어리석었다, 속으로 그랬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들어가지 않느냐, 이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은 황새새끼처럼 가여 웁다 했을 것이다. 사실 이때만치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밥을 먹은 뒤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려 하다 도로 벗어던지고 바깥 마당 공석 위에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생각했다. 내가 일 안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하고 결국 농사 못 짓고 만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다 날 보고서, "이자식아, 왜 또 이러니." "관격이 났어유, 아이구 배야!" "기껀 밥 처먹구 무슨 관격이야, 남의 농사 버려주면 이자식아 징역간다 봐라!" "가두 좋아유, 아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해서 징역 가도 좋다 생각했다. 일후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열쪽이 난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저편으로 힝하게 가더니 지게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돌 떠넘기듯이 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밥을 잔뜩 먹어 딱딱한 배가 그럴 적마다 퉁겨지면서 밸창이 꼿꼿한 것이 여간 켕기지 않았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배를 지게 막대기로 위에서 쿡쿡 찌르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했다. 장인님은 원체 심청이 궂어서 그러지만 나도 저만 못하지 않게 배를 채었다. 아픈 것을 눈을 꽉 감고 넌 해라 난 재밌단 듯이 있었으나 볼기짝을 후려갈길 적에는 나도 모르는 결에 벌떡 일어나서 그 수염을 잡아챘다. 마는 내 골이 난 것이 아니라 정말은 아까부터 벽 뒤 울타리 구멍으로 점순이가 우리들의 꼴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 한마디 톡톡히 못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 게 아닌가. 또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하곤 아무것도 안되니까 막 때려도 좋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채고(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때 점순이는 퍽 기뻤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참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갈겼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밭 있는 넝알로 그대로 떠밀어 굴려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하지유!" 나는 이렇게 호령했다. 허지만 장인님이 선뜻 오냐 낼이라두 성례시켜 주마, 했으면 나도 성가신 걸 그만두었을지 모른다. 나야 이러면 때린 건 아니니까 나중에 장인 쳤다는 누명도 안 들을 터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한번은 장인님이 헐떡헐떡 기어서 올라오더니 내 바짓가랭이를 요렇게 노리고서 단박 움켜잡고 매달렸다. 악, 소리를 치고 나는 그만 세상이 다 팽그르 도는 것이, "빙장님! 빙장님! 빙장님!" "이자식!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하고 두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로 죽나보다 했다. 그래두 장인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눈엔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이를 꽉 움키고 잡아나꿨다.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를 얻어맞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또한 우리 장인님이 유달리 착한 곳이다. 여느 사람이면 사경을 주어서라도 당장 내어쫓았지, 터진 머리를 볼솜으로 손수 지져 주고, 호주머니에 희연 한 봉을 넣어 주고 그리고, "올 갈엔 꼭 성례를 시켜 주마. 암만 말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얼른 갈아라." 하고 등을 뚜덕여 줄 사람이 누구냐.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 점순이를 남기고 인젠 내쫓기려니 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빙장님! 인제 다시는 안그러겠어유!" 이렇게 맹세를 하며 부랴부랴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갔다. 그러나 이때는 그걸 모르고 장인님을 원수로만 여겨서 잔뜩 잡아당겼다.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장인님은 헷손질을 하며 솔개미에 챈 닭의 소리를 연해 질렀다. 놓긴 왜, 이왕이면 호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짖궂이 더 댕겼다. 마는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것을 알고 좀 겁도 났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라." 그래도 안되니까, "애 점순아! 점순아!" 이 악장에 안에 있었던 장모님과 점순이가 헐레벌떡하고 단숨에 뛰어 나왔다. 나의 생각에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순이는 내 편을 들어서 속으로 고수해 하겠지---. 대체 이게 웬 속인지(지금까지도 난 영문을 모른다) 아버질 혼내 주기는 제가 내래 놓고 이제 와서는 달겨들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고, 귀를 뒤로 잡아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꺾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도 덤벼들어 한쪽 귀마저 뒤로 잡아채면서 또 우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도 못하게 해놓고 장인님은 지게막대기를 들어서 사뭇 내려조졌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해도 그 속 알 수 없는 점순이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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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곳 없다니? 우리 때문 아니냐? 네가 질른 공 때문이 아니냐?" "뭐 어깨? 저 돌 때문, 저 해(日光) 때문야, 무어 어쩌고 어째?" 하고 {{u|영길이}}는 허연 돌산을 가르킨다. {{nop}}<noinclude><references/></noinclude> btvilpuwcza4ogn2999vyma8yg7w3sa 페이지:소학생 75호.pdf/8 250 97011 458654 367022 2026-08-26T06:02:47Z ZornsLemon 15531 45865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Jjw" /></noinclude>{| style="background-color: #efefef; border: 1px solid #000000; padding: 2px; margin: 0 0 1em 1em; width:400px; float:right; " |- |{{가운데|{{더크게|수학놀이 <br /> 1}}}} 수남 "이번에는 1 2 3 4 5 6 7 8 9 (8은 없애고) 가운데서 어떤 수든지 고르십시오. 그러면 {{u|영혜}}님이 골른 수만 가지고 답을 꾸며 볼터이니." 영해 "그건 더 재미 있는데요. 그러면 7을 골랐읍니다.” 수남 "어떻게 되나 잘 보아두십시오." ㅤㅤㅤ1 2 3 4 5 6 7 9<br /> Xㅤㅤㅤㅤㅤㅤㅤㅤ 6 3<br /> ————————————<br /> ㅤ ㅤ 3 7 0 3 7 0 3 7<br /> +ㅤ 7 4 0 7 4 0 7 4<br /> ————————————<br /> ㅤ 7 7 7 7 7 7 7 7 7<br /> 수남 "어떱니까. 가즈런히 7이 놓이었지요?" 영해 "어쩌면! 그럼 5!" 수남 "알았읍니다." ㅤㅤㅤ1 2 3 4 5 6 7 9<br /> Xㅤㅤㅤㅤㅤㅤㅤㅤ 4 5<br /> ————————————<br /> ㅤ ㅤ 6 1 7 2 8 3 9 5<br /> +ㅤ 4 9 3 8 2 7 1 6<br /> ————————————<br /> ㅤ 5 5 5 5 5 5 5 5 5<br /> {{가운데|{{더크게|2}}}} 이번에는 이 1 2 3 4 5 6 7 8 9라는 수에 8을 곱하고 다시 거기다가 9를 보태봅니다. 그렇게 한즉 다음과 같이 먼저 수가 거꾸로 되어 나옵니다. 123456789 x 8 + 9 = 987654321 |} "너 어째 그리 비겁하냐? 그래 안됐다, 가엾다는 말은 못해두, 그렇게 말을 해야 좋겠니?" "이 자식, 누가 비겁하다는 거야? 너같은 동무두 모르구, 동무가 욕을 먹어두 좋아라 하구, 거리의 깍쟁이나 줏어 가지구 동무라구 노는 놈하군 이야기가 안돼! 우리는 일 없어!" {{u|영길이}}는 겁도 나기는 났다. 겁이 나느니 만큼 아랑곳을 아니 하려고 꽁무니를 빼는 것이지마는, 그 사단 때문에 싸움까지 하고 난 끝이니, 내친 걸음에 한창 더 뻗대버리는 것이었다. "응. 잘은 주절댄다마는 인제 그 애 어머니 아버지가 약값 내고, 내 자식 살려 놓라구, 너의 집에 당장 간다더라." {{u|규상이}}가 한마디 찔러 주고, {{u|봉수}}더러 가자고 끌려니까, "{{u|봉수}}야, 넌 뭣하러 가는거야?" 하고 위협하듯이 눈을 흘긴다. "우리는 일 없어!"라고 한, 그 우리란 {{u|봉수}}까지 끌고 들어간 말인데, {{u|봉수}}가 {{u|규상이}}의 편으로 붙는 눈치를 보니, {{u|영길이}}는 자기만 외톨로 따돌려 세는 것같아서 서운한 생각도 들거니와, 심사가 와락 나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u|봉수}}는 둘의 사화를 붙이기는 고사하고, 어느 편으로 붙어야 좋을지 난처하다. {{u|규상이}} 편을 들고, {{u|규상이}}를 따라가면 나중에 {{u|영길이}}에게 들볶일 일이 걱정이다. 그 주먹이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u|영길이}} 말이 틀리고, {{u|규상이}}의 하는 일이 옳은 데야, {{u|규상이}}를 배척할 수 도 없다. "그럼 넌 먼저가 있거라. 잠간 이야기를 들어보구 갈께." {{u|봉수}}는 사정을 들어다가 알려 주마는 듯이, {{u|영길이}}를 좋게 달래며, {{u|규상이}}를 따라 섰다. "흥, 넌 약 가방을 든 조수(助手)냐? 돈 가방을 든, 자선심 많으신 부잣댁 도련님의 병정이더냐? 어디 두구 보자!" {{u|영길이}}는 이렇게 놀리고 위협을 하면서 큰 길로 떨어져 가버렸다. 두 아이는 채석장으로 들어가며 뜨거운 별이 쨍쨍 우리는 벌판의, 한 중턱을 멀리서부터 눈으로 찾아보니, 눈대중을 친 그 자리에, 그 아낙네가 앉아있다. 오늘도 쓸쓸히 혼자서 장도리질 하고 있다. {{u|규상이}}는 어쩐지 반가운 생각이 들며 발씨가 재어졌다. 이 아낙네를 처음 볼 때부터, 그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인자스러운 눈과 낯빛이 많이 보던 사람같이 반갑고, 얼마쯤 존경하는 마음도 느꼈던 터이지마는, 그동안 이 아낙네가 간혹 머리에 떠오르면, 모{{upe}}<noinclude><references/></noinclude> 0w33wsfkfwflqqqn7m0lg6xo7g88nra 페이지:소학생 75호.pdf/9 250 97012 458655 367023 2026-08-26T06:07:43Z ZornsLemon 15531 45865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Jjw" /></noinclude>습은 그렇지도 않지만, 종용한 말소리라든지, 조고마한 몸집이며, 아무리 급한 지경이라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히 몸을 쓰는 거동이, 돌아간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어느덧 머릿속에 백여져서, 떼를 만나거나 하리라는 겁은 사라지고 도리어 반가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겠죠?" {{u|규상이}}는 모자를 벗으며 웃어 보였다. "응, 또 놀러 왔어?" {{u|완식이}} 어머니는, 그리 반가을 것까지는 없으나, 저번에는 {{u|완식이}}를 데려다 준 아이요, 이렇게 지날결에라도 인사를 하는 것이 기특하다고 생각하였다. {{u|완식이}}의 말을 들으면, 그렇게 크낙한 집의 부잣집 아이라면서, 자기네 같은 사람을, 넘보지 않는 그 심뽀가 무던하다고도 좋은 낯으로 대해 주는 것이었다. "그 애 어디가 앞아요? 괜찮아요?" "응, 그 날부터 몸이 끓구, 벌써 사흘짼가 몸져 누웠는데…" {{u|완식이}} 어머니는 눈쌀이 저절로 찌푸러졌다. 두 소년은 자기들을 칭원하는 기색이 없는 데에, 우선 안심이 되었었으나 그 눈쌀이, 아들의 병걱정으로 찌푸려졌는지, 자기들을 나무라는 뜻인지 어쨌든 송구스러웠다. "머리가 여전히 흔들린대요? 의사가 뭐래요?" "그야 감기니까 머릿골이 쑤시겠지 마는, 그 날 너머진 탓두 있는거야." {{u|완식이}} 어머니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잠간 찌푸렸던 눈쌀이 피어지는 것을 보니, 그날 넘어진 탓을 조금도 이 아이들에게 하려는 기색은 아닌 것 같다. "그래 의사가, 공에 맞고 너머저서 그렇다지는 않아요?" {{u|규상이}}는 어디까지든지 분명한 대답이 듣고 싶었다. 단순한 감기인지, 그때 쓸어져서 뇌진탕(腦震蕩)을 일으킨 것이 원인인지 마치 재판소의 검사(檢事)처럼 분명히 알고 싶었다. 그야 감기거나 뇌진탕이거나, 그 아이가 마음에 들고 동정이 가는바에는 앓아 누워서,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이렇게 힘드는 일이나마 못하게된 것이, 가엾기는 일반이지마는, 만일 뇌진탕 때문이라면, {{u|규상이}}는 한칭 더 가슴이 쓰라리고 그 책임이 저의들에게 있거나 하는 생{{upe}}<noinclude><references/></noinclude> bxaxu6hz6tuot3ewc86a8skjkezkh7m 페이지:소학생 75호.pdf/10 250 97015 458656 367026 2026-08-26T06:15:28Z ZornsLemon 15531 45865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Jjw" /></noinclude>{| style="background-color: #efefef; border: 1px solid #000000; padding: 2px; margin: 0 0 1em 1em; width:400px; float:right; " |- |{{가운데|{{작게|37페이지에서 계속}}}} 한즉, 도둑은 마음이 조급하여 "빨리 또 점이나 쳐 보아.” 하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주막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은 죽을 번하였다. 이 주막을 나온 두 사람은 곧 말을 달려 강가에 이르렀다. 이런 때 점장이가 점을 쳐 보고는, "빨리 달려가야 하겠읍니다. 지금 막 강 가에 다달았읍니다.” 하니 도둑은 또 말을 달려 강 가에 이르르게 되었다. 강 가에서 두 사람은 뱃사공을 불러, "이 강을 좀 건느게 해주세요." 하고 애원을 하였으나, 사공도 역시 도둑으로 말미암아 먹고 살기 때문에 못하겠노라고 거절을 하였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또 전과 같이 다시 애원을 하며 금 덩어리를 하나 내어주고 강을 건느게 해달라고 하니 그제야 뱃사공은 이 말에 못이기는 체하고는 배를 내어 강을 건네주고 배를 끌어 강 가에 올려놓고 있으려니까, 도둑이 저편 강 가에서 뱃사공을 불렀다. 이 소리에 그들의 형제도 뱃사공도 모두 숨고 있으려니까 큰 소리로, "사공아 배 대어라." 하고 수차 사공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으므로 도둑은 고함을 질러 "이놈의 말이 강을 못건너느냐." 하고 채쭉을 치니, 말은 껑충 뛰어 건느다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 도둑은 죽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길이길이 잘 살았다고 한다. |} 각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라도 바삐 그 책임감-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u|완식이}} 어머니는 이 아이가 자꾸 의사를 보였느냐는 말에 대답하기 어렵고, 어이가 없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의사를 불러다가 보일 형편이 아닌, 자기 처지를 모르는 이 아이들에게 대답이 막히고 말았다. "응, 첩 약을, 두어 첩 먹였으니까, 인제 낫겠지. 어서들 가서 놀지." 어서들 가서 놀라는 말에, {{u|규상이}}는 눈물이 스며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아들은, 뉘 탓, 무슨 탓이든지 간에, 지금 이 더위에 방 속에서 끙끙 앓고 누웠을 터인데, 너의 때문에 우리 자식 죽게 되었다는 칭원 한마디 없이 우리더러는 어서 가서 놀란다! 하는 생각을 하면, 이 아낙네가 어디까지 어진지 알 수가 없을만큼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아니, 아즈머니! 우리가 놀러온 것이 아니라, 그 애가 그 후부터는 보이지 않더라기에, 앓는가 싶어 걱정이 돼서 왔읍니다. 댁이 어디얘요?" {{u|규상이}}의 이 말에, {{u|완식이}} 어머니는 눈이 똥그래졌다. 너무나 고마워서, 그 똥그래진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날결에 말을 붙이는 줄로만 알았고, 또 그만만 하더라도 선모슴들이 제법이고나 생각하였던 {{u|완식이}} 모친은, 일부러 아들의 병 위문을 왔다는 말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자기 집을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잘산다는 이 아이가 자기 집을 찾아 오다니 말이 되는가 싶어서 덤덤히 앉았다. 그것은 황송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런 아이들에게라도 부질없이 자기의 비참한 살림살이를 보이기가 싫고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u|완식이}}만 하더라도, 이러한 잘사는 집 아이들과는 동무도 아니 되겠지마는, 잘사는 집 아이들과 놀리기도 싫였다. 남에게 지지는 않으려는 그 애 성격에, 잘사는 아이가 부러워서 불평만 늘어가고 성미가 나뻐가거나, 눈만 높아져서, 나중에는 사람이 못 되어질가 보아서, 이 아이들의 고맙고 기특한 마음은 모르는 것이 아니나, 그 동정을 막아내고 물리치고 싶었다. "우리 집? … 우리 집에까지 올거 없어. 인제 일어나서 일하러 나올거니 염려 말구 어서 가서 놀라구." {{u|완식이}} 어머니는 돌 깨는 마치를 다시 든다. "아냬요. 우리 땜에 그렇게 됐는데, 우리 집 동넨데, 좀 가보면 어때요." "응, 한 동네라지? 하지만 우리 집은 학생들이 올데가 못 돼.” {{u|완식이}} 어머니는 웃음의 소{{upe}}<noinclude><references/></noinclude> bzr1dxlmo31pbadu3oj64alm06jx65p 페이지:소학생 75호.pdf/11 250 97019 458657 367031 2026-08-26T06:22:50Z ZornsLemon 15531 45865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Jjw" /></noinclude>{| style="background-color: #efefef; border: 1px solid #000000; padding: 2px; margin: 0 0 1em 1em; width:400px; float:right; " |- |{{가운데|{{더크게|정말일까}}<br />{{크게|별에서 온 사람}}}} {{u|미국}} {{u|뉴우욕}}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제 이차 세계대전 때 {{u|아메리카}}의 종군 기자였던 {{u|푸렛차·뿌랏트}} 씨는 어떤 과학 잡지 주최로 열어진 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합니다. "하늘을 달리는 원반(圓盤)"은 이것이 우리들의 상상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 실상, 다른 유성(遊星)에서부터 내려온 손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u|아메리카}} 정부 당국에 수용했던 "하늘을 달리는 원반”에는 거기에 승무원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승무원들은 원반이 지구 주변을 싸고 있는 대기권내(大氣圈內)에 들어갔을 때 죽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기의 압력으로 해서 그들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증명 되었읍니다. 지금 그 사람들의 시체를 해부하여 연구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 유성에서 온 사람들의 키는 약 1m에 지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읍니다) |} 리처럼 대꾸를 하며, 여전히 마치 든 손을 놀리고 있다. "전차길에서 라디오 상회를 꼽들여 다리를 건너 서면 십자거리가 되죠? 거기서 좀 더 마주 올라가면 댁이 되죠?" {{u|규상이}}는 저번에 {{u|완식이}}가 자기집 앞에서 헤어져서 올라가던 방향을 짐작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u|완식이}} 어머니는, 잠자코 손만 놀린다. "거기서 어디쯤 돼요?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안 가르쳐 주실게 뭐얘요?" {{u|규상이}}는 대답을 기다리고 섰다가, 시비하 듯이 또 캔다. 어째서 이 아낙네가 자기 집을 아니 가르쳐 주는지 알 수 없는 일이요, 답답한 노릇이다. "번지만 가르쳐 주세요. 네!" 저편이 대답을 안하니, 더욱이 아무래도 알고야만 떨어지겠다는 일념에 또 조른다. "우리 집은 번짓수두 없구." {{u|완식이}} 어머니는, 실없은 말처럼, 혼자 한탄하 듯이 입밖에 내었다. 어린 아이가 조르기는 하고, 그렇다고 가르쳐 줄 수도 없고... {{u|완식이}} 어머니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번짓수가 없다는 말에, {{u|규상이}}는 귀가 번쩍하였다. 일전에 그 애도 저의 집은 번짓수가, 없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그 동네로 올라가면 크낙한 새 집들도 많지마는, 그 맞은편 산에는 방공굴도 많고, 그 방공굴에는 전재민들이 우굴우굴한 것이다. 거기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 오르자, {{u|규상이}}는 더 캐어 물을 용기도 나지를 않아서, 멀거니 섰으려니까, 옆에 이때까지 입을 다물고 섰던 {{u|봉수}}가 귀에다 대고, “아마 그 동네 방공굴인게지.” 하고 속삭인다. {{u|완식이}} 어머니는 벌써 알아 들었는지, {{u|봉수}}를 힐끗 본다. 입 가에는 웃음을 머금어 보였으나, 그 눈은 방공굴이라는 말에 모욕이나 느낀 듯이 정반대로 흘겨 보는 것이었다. {{u|규상이}}는 다 알아 차렸다. 그러나 그대로 가는 수도 없어서 또 한번, "그 애 이름이 뭐던가요!" 하고 말은 들리니까, {{u|완식이}} 어머니는 거기에는 대답ㅎ지 않고, 어린아이의 열성에 감동이 되어, 뭉쳤던 마음이 풀렸는지 상긋 웃으면서, "그래, 그렇게 꼭 가 보구싶어?" 하고 귀여운 듯이 두 아이를 다시 쳐다본다. "네, 어서 일러 주세요." "아까 학생이 말하던, 그 길로 올라가느라면, 중턱에 방공굴이 셋이 있는데, 한가운데 방공굴 앞에 참외 가게가 있지. 거기 가서 {{u|김 완식이}}를 찾어 보라구." 하며 {{u|완식이}} 어머니는 일러주고 말았다. "네, 고맙습니다!" {{u|규상이}}는 모자를 벗고 꾸벅하며, 참아 방공굴을 가르쳐 주기가 부끄러워 하는 그 낯빛을 마주 보기가 미안쩍어서 뺑소니를 쳐 돌아 나왔다. (계속)<noinclude><references/></noinclude> maqkzobl6vg7513ica1qi8bf421u2p4 페이지:소학생 75호.pdf/12 250 97022 458658 367043 2026-08-26T06:28:38Z ZornsLemon 15531 45865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Jjw" /></noinclude>{{nop}} {{앵커|생물수수께끼}} {| style="width:380px; float:right; " |- |[[파일:소학생 75호 생물의 수수께끼 덩이줄기.svg|오른쪽|380px]] |- | {| style="background-color: #efefef; border: 1px solid #000000; padding: 2px; margin: 0 0 auto; width:376px;" |- |{{가운데|기다리던 책 나온다!<br />{{크게|이성표 지음·정현웅 그림}}<br />{{더더크게|신라}}{{크게|의}} {{더더크게|별}}}} {{들여쓰기/시작|2}}잡지 {{u|어린이 나라}}에 연재되어 갈채를 받던 명작장편 모험소설이 드디어 책이 되어 나옵니다. {{u|김 유신}}장군의 용감 무쌍한 역사 소설 입니다.{{들여쓰기/끝}} {{가운데|발매중 250원}} {{가운데|{{크게|기플링 지음·작은돌 번안}}<br />{{더더크게|모오구리}}{{크게|의}} {{더더크게|모험}}}} {{들여쓰기/시작|2}}{{u|소학생}}에 연재되었던 전편에다가 새로 후편울 붙여서 {{u|모오구리}}이야기는 모조리 들어간 책입니다. 씩씩하고 슬기로운 {{u|모오구리}}의 아기자기 한 모험은 후편에 많이 있읍니다.{{들여쓰기/끝}} {{가운데|{{더크게|삽화는 김의환 선생}}<br />이달 그믐께 발매<br />북성당 발행 ★ 각서점 발매}} |} |} {{가운데|{{크게|⭑로란드⭑지음}}}} {{가운데|{{더더더크게|'''생물 수수께끼'''}}}} {{가운데|{{크게|신환 옮김⭑}}}} {{가운데|{{더크게|봄 꽃}}}} {{들여쓰기/시작|2}}"사프란" " "수선화" "히야신스”들, 봄에 피는 꽃은 다 덩이뿌리에서 자라납니다. 이런 꽃물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읍니다. 쓸쓸한 겨울 날을 뒷이어 피어 나오는 이 꽃들은 우리의 마음을 명랑하게 하여 줍니다. 멍이뿌리라는 것은 식물의 자양분을 듬뿍 지니고 있는 통통하게 살찐 덩어리입니다. 겉을 싼 거죽은 물을 막고, 식물을 키울 물은 다만 덩이뿌리에 붙은 실뿌리로 빨아 들이는 것입니다. 속에는 물기를 많이 품은 테 모양들로 되어있읍니다. 때로는 덩이뿌리 한 가운데에 꽃봉오리가 보이는 수도 있읍니다. 꽃을 이울며는 덩이뿌리는 다시 자양분을 빨아 들이어 이듬해 것으로 간직해 둡니다. 덩이뿌리의 꽃을 따서 헤쳐 보면, 새가지 조각으로 나눠져 있읍니다. 장난구러기 띵띵보 풀잎 꼭지에 앉았네 줄기는 눌려 오글고 풀잎은 둘둘 말리고 뿌리에 꽁꽁 뭉쳤네 아뿔사 덩이뿌리 되었네. {{들여쓰기/끝}} {{가운데|{{더크게|'''다음 달에는 나팔수선 이야기'''}}}}<noinclude><references/></noinclude> snlp46fwt3nkks6oehptiiw014nt29q 위키문헌:소식지/보존/2026년 4 112916 458649 456920 2026-08-26T03:01:26Z Revibot I 18776 봇: [[위키문헌:소식지]]에서 문단 1개를 보존합니다 458649 wikitext text/x-wiki {{보존}} == 보편적 행동 강령 및 시행 지침 연례 검토 == <section begin="announcement-content" /> 보편적 행동 강령 및 집행 지침에 대한 연례 검토 기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드리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2026년 2월 9일까지 변경 제안을 제출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연례 검토를 위한 여러 단계 중 첫 번째 단계입니다. [[m:Special:MyLanguage/Universal Code of Conduct/Annual review/2026|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고 참여할 토론을 찾으려면 메타의 UCoC 페이지를 방문하세요.]] [[m:Special:MyLanguage/Universal Code of Conduct/Coordinating Committee|보편적 행동 강령 조정위원회]](U4C)는 보편적 행동 강령의 공정하고 일관된 시행을 위해 헌신하는 글로벌 그룹입니다. 이 연례 검토는 U4C에서 계획하고 시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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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註}}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mf06s5797jltk4ui5w5g8j4uohhbtwo 458643 458642 2026-08-25T23:08:56Z Ryuch 512 458643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회덕현지도(懷德縣地圖) | 지은이 = 미상 | 부제 =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 — 지도 주기(注記) 판독문 | 설명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고종 9). 저작권 만료(PD-old-100). }} [[File:KYKH002 0000 0046 충청도 회덕현지도.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지도의 방위''' — 이 지도는 '''위쪽이 대체로 東(동)'''이다(위=동, 아래=서, 왼쪽=북, 오른쪽=남). 조선 후기 군현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지 않은 사례로, 지도에 표시된 경계와 지물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옥천계(동남)가 오른쪽 위, 신탄시(신탄진, 북)가 왼쪽, 문의계(북서)가 왼쪽 아래, 공주계(남서)가 오른쪽, 읍치 동쪽 3리의 계족산이 위쪽에 있다. '''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註}}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qos8oh55yy5m5xzuv2geprhyn2ued0k 458644 458643 2026-08-25T23:10:04Z Ryuch 512 /* 미판독 사항 */ 458644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회덕현지도(懷德縣地圖) | 지은이 = 미상 | 부제 =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 — 지도 주기(注記) 판독문 | 설명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고종 9). 저작권 만료(PD-old-100). }} [[File:KYKH002 0000 0046 충청도 회덕현지도.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지도의 방위''' — 이 지도는 '''위쪽이 대체로 東(동)'''이다(위=동, 아래=서, 왼쪽=북, 오른쪽=남). 조선 후기 군현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지 않은 사례로, 지도에 표시된 경계와 지물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옥천계(동남)가 오른쪽 위, 신탄시(신탄진, 북)가 왼쪽, 문의계(북서)가 왼쪽 아래, 공주계(남서)가 오른쪽, 읍치 동쪽 3리의 계족산이 위쪽에 있다. '''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각주==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tue32qwh08eql6lbz8ehs3xcc4lojrq 458645 458644 2026-08-25T23:35:17Z Ryuch 512 /*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 458645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회덕현지도(懷德縣地圖) | 지은이 = 미상 | 부제 =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 — 지도 주기(注記) 판독문 | 설명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고종 9). 저작권 만료(PD-old-100). }} [[File:KYKH002 0000 0046 충청도 회덕현지도.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지도의 방위''' — 이 지도는 '''위쪽이 대체로 東(동)'''이다(위=동, 아래=서, 왼쪽=북, 오른쪽=남). 조선 후기 군현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지 않은 사례로, 지도에 표시된 경계와 지물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옥천계(동남)가 오른쪽 위, 신탄시(신탄진, 북)가 왼쪽, 문의계(북서)가 왼쪽 아래, 공주계(남서)가 오른쪽, 읍치 동쪽 3리의 계족산이 위쪽에 있다. '''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각주==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e145lu1zs2rofa1rf0b7f5zsve8sxdl 458646 458645 2026-08-25T23:35:35Z Ryuch 512 /* 경계 */ 458646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회덕현지도(懷德縣地圖) | 지은이 = 미상 | 부제 =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 — 지도 주기(注記) 판독문 | 설명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고종 9). 저작권 만료(PD-old-100). }} [[File:KYKH002 0000 0046 충청도 회덕현지도.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지도의 방위''' — 이 지도는 '''위쪽이 대체로 東(동)'''이다(위=동, 아래=서, 왼쪽=북, 오른쪽=남). 조선 후기 군현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지 않은 사례로, 지도에 표시된 경계와 지물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옥천계(동남)가 오른쪽 위, 신탄시(신탄진, 북)가 왼쪽, 문의계(북서)가 왼쪽 아래, 공주계(남서)가 오른쪽, 읍치 동쪽 3리의 계족산이 위쪽에 있다. '''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 ===봉수대 주기 풀이===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각주==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paugtcceyhcpk088c29eevxtq8worhp 458647 458646 2026-08-25T23:36:07Z Ryuch 512 /* 미판독 사항 */ 458647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회덕현지도(懷德縣地圖) | 지은이 = 미상 | 부제 =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 — 지도 주기(注記) 판독문 | 설명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고종 9). 저작권 만료(PD-old-100). }} [[File:KYKH002 0000 0046 충청도 회덕현지도.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지도의 방위''' — 이 지도는 '''위쪽이 대체로 東(동)'''이다(위=동, 아래=서, 왼쪽=북, 오른쪽=남). 조선 후기 군현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지 않은 사례로, 지도에 표시된 경계와 지물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옥천계(동남)가 오른쪽 위, 신탄시(신탄진, 북)가 왼쪽, 문의계(북서)가 왼쪽 아래, 공주계(남서)가 오른쪽, 읍치 동쪽 3리의 계족산이 위쪽에 있다. '''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 ===봉수대 주기 풀이===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각주==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isn2i3tabijq8ze3qj3m6glrwsy52uz 458648 458647 2026-08-25T23:36:21Z Ryuch 512 /* 각주 */ 458648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회덕현지도(懷德縣地圖) | 지은이 = 미상 | 부제 =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 — 지도 주기(注記) 판독문 | 설명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고종 9). 저작권 만료(PD-old-100). }} [[File:KYKH002 0000 0046 충청도 회덕현지도.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지도의 방위''' — 이 지도는 '''위쪽이 대체로 東(동)'''이다(위=동, 아래=서, 왼쪽=북, 오른쪽=남). 조선 후기 군현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지 않은 사례로, 지도에 표시된 경계와 지물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 옥천계(동남)가 오른쪽 위, 신탄시(신탄진, 북)가 왼쪽, 문의계(북서)가 왼쪽 아래, 공주계(남서)가 오른쪽, 읍치 동쪽 3리의 계족산이 위쪽에 있다. '''일러두기''' — 아래는 지도 위에 적힌 글(建置沿革·거리·산천·봉수·방리·창고·시장·교량·사찰·누정·사우·경계)을 세로쓰기·우(右)→좌(左) 순서로 판독하여, 항목마다 원문을 먼저 싣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붙인 것이다. 【 】는 원문 속 세주(細註), □는 마모로 판독하지 못한 글자, 〔?〕는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이다. 지도 하단부의 주기는 남쪽에서 보도록 상하가 뒤집혀 적혀 있다. == 건치연혁·관원 == ;원문 縣本百濟雨述【一云朽淺】、新羅改比豊、高麗今名懷德。顯宗屬于公州、明宗二年置監務。本朝太宗大王十三年改爲縣監。官員縣監·訓導各一人【訓導今無】。 ;번역 현(縣)은 본래 백제의 우술현(雨述縣)이며【달리 후천(朽淺)이라고도 한다】,<ref>우술→(신라)비풍→(고려)회덕의 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지리지와 일치한다.</ref> 신라 때 비풍(比豊)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지금 이름인 회덕(懷德)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공주(公州)에 예속되었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대왕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은 현감·훈도(訓導) 각 1인이다【훈도는 지금 결원】. == 영(營)·거리 == ;원문 上營·巡營·右營·中營在公州、西距七十里。兵營北距七十里。水營西距二百三十里。統營六百六十里。 ;번역 상영(上營)·순영(巡營)·우영(右營)·중영(中營)은 공주에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이다. 병영(兵營)은 북쪽으로 70리, 수영(水營)은 서쪽으로 230리, 통영(統營)은 660리 떨어져 있다.<ref>서울(京)까지의 거리는 이 지도 주기에 별도로 적혀 있지 않다.</ref> == 산천·봉수 == ;원문 鷄足山。食藏山【自來全羅道珎山大芚山來脈】。甲川【源出珎山下流】。烽臺【自官東距三里。東應沃川環山峯燧三十里來應、北應文義夜味山峯燧四十里去應】。 ;번역 계족산(鷄足山).<ref>고을의 진산(鎭山)·주산(主山)이다. 《여지도서》·《충청도읍지》 등은 계족산에 「自珍山大屯山來 爲縣主脈」(진산 대둔산에서 와 현의 주맥이 됨)이라 하였다.</ref> 식장산(食藏山)【전라도 진산(珎山)의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온 산맥이다】. 갑천(甲川)【진산(珎山)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ref>'''珎'''은 珍의 이체자로, 식장산 주기와 갑천 주기에 같은 자형이 쓰였다. 珍山은 전라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갑천 본류는 진산면의 대둔산에서 발원하므로 이 기록은 실제와 부합한다. 다만 회덕에서 보이는 물줄기는 갑천에 유등천·대전천이 합쳐진 것이어서, 이 지도가 여러 하천을 하나의 '갑천'으로 뭉뚱그려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도는 산줄기(식장산)와 물줄기(갑천)의 연원을 모두 남쪽 진산에서 잡고 있다.</ref> 봉대(烽臺)【관아에서 동으로 3리. 동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의 봉수에 응하니 30리이며 와서 응하고, 북으로 문의(文義) 야미산(夜味山)의 봉수에 응하니 40리이며 가서 응한다】.<ref>계족산 봉수이다. 環山은 옥천의 산 이름으로, 그 위에 있는 봉수에 응한다는 뜻이다. 「峯燧」는 봉수(烽燧)를 가리킨다. 문의 쪽 봉수를 이 지도는 '''夜味山(야미산)'''이라 적었다. 봉수망 위치로 보면 이는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와 같은 곳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이래 문헌은 이 봉수의 산 이름을 일관되게 所伊山으로 적고 있어 夜味山이라는 표기는 이 지도의 특징적인 이명(異名)이다. 청주의 것대산(唟大山) 봉수는 소이산 북쪽의 별개 봉수이다. '來'는 이체로 쓰여 가로획이 未보다 하나 더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주해: 봉수대 주기 풀이〉 참조.</ref> == 방리·호구 == ;원문 【東面】…官洞·楊川·新垈·三政里·細川·各谷…、戶三百七十、口二千六百六十九。 【外南面】…興農里…、戶四百八十九、口二千三百三十。 【北面】自官西距十里、泥洞·紫雲·□…各里、戶三百□、口一千六百九十九。 【縣內面】戶三百八十三。 【西面】戶三百八十三、口一千五百九十九。 【內南面】…後谷里…。 ;번역 * '''동면(東面)''': 관동(官洞)·양천(楊川)·신대(新垈)·삼정리(三政里)·세천(細川)·각곡(各谷) 등 여러 리. 호 370, 구 2,669.<ref>세천은 현 대전 동구 세천동, 신대는 신대동에 해당한다. 마모된 리는 1914년 군면폐합 자료로 볼 때 마산·효평·직동·비룡·주산·신하·신상·용계·사성·내탑·주촌·오동·추동·신촌 등에 해당한다.</ref> * '''외남면(外南面)''': 흥농리(興農里) 등. 호 489, 구 2,330.<ref>흥농리는 송시열의 흥농서당(興農書堂)·흥농영당이 있던 興農洞으로, 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아래 '사우' 항목의 종회사가 이곳에 있었다. 이 면의 리는 1914년 자료로 신대·삼정·대성·호도·가양·소제·연효·산소·대동·가오·용방·외천 등에 해당한다.</ref> * '''북면(北面)''': 관아에서 서로 10리. 니동(泥洞)·자운(紫雲) 등 여러 리. 호 3백여, 구 1,699.<ref>면 이름은 근북면(近北面)의 약기(略記)로 보인다. 洋村·主音·阿內 등으로 읽히는 리가 더 있으나 초서·마모로 판독이 불확실하다. 호수의 끝자리도 마모되었다.</ref> * '''현내면(縣內面)''': 호 383. 읍치(관아·객사·향교)가 있는 면. * '''서면(西面)''': 호 383, 구 1,599.<ref>서면의 리 이름은 지도상 마모가 심하다. 1914년 자료의 구만(九萬)·노촌(魯村) 등이 이에 관련된다.</ref> * '''내남면(內南面)''': 후곡리(後谷里) 등.<ref>후곡리에는 제월당이 있었다. 송촌(宋村)·대양·신촌·비래(飛來) 등이 이 면 계통이다.</ref> == 창고·장시 == ;원문 北倉【自官北距十里】。新灘市【在北面、自官北距十里、開市三八日】。楊川市【在東面、自官東距二十里、開市五日十】。 ;번역 * 북창(北倉):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 신탄시(新灘市): 북면. 관아에서 북으로 10리. 3·8일에 장이 선다.<ref>지금의 신탄진(新灘津)에 해당한다. 지도는 신탄시·양천시를 일반 점(店)보다 큰 원(圓)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ref> * 양천시(楊川市): 동면. 관아에서 동으로 20리. 5·10일에 장이 선다. == 교량 == ;원문 三〔?〕川橋·二川橋·院川橋 ;번역 삼천교(三川橋)·이천교(二川橋)·원천교(院川橋).<ref>院川橋·二川橋는 판독이 확실하다. 三川橋에 해당하는 라벨은 하천 남안에 상하 반전으로 적혀 있는데 세 글자 가운데 '三'과 '橋'는 분명하나 가운데 글자는 확정하지 못하였다.</ref> == 사찰 == ;원문 高山寺【在外南面、自官南距三十里】 ;번역 고산사(高山寺): 외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30리. == 누정 == [[File:1872년 회덕현지도 (한글표시).jpg|center|800px|『1872년 지방지도』 「회덕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0425)]] ;원문 霽月堂【在內南面後谷里、自官東北距一里、文禧公宋奎濂建】。鳳隱菴【…宋奎濂別業】。飛來菴【在內南面、自官東距十里、宋文正公浚吉…】。挹灝亭【在內南面大禾里、自官西距三里、宋爾昌別業】。錦雲亭。同春堂。杞菊亭。南澗亭。雙淸堂。 ;번역 회덕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세거지로, 이 지도는 개인 별장인 누정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그렸다. * '''제월당(霽月堂)''': 내남면 후곡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북으로 1리. 문희공 송규렴(宋奎濂)이 지었다. * '''봉은암(鳳隱菴)''': 송규렴의 별업(別業).<ref>지도에서는 가옥형이 아니라 원형 표지로 그려져 있다.</ref> * '''비래암(飛來菴)''': 내남면에 있으며,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관련된다. * '''읍호정(挹灝亭)''': 내남면 대화리(大禾里)에 있으며, 관아에서 서로 3리. 송이창(宋爾昌)의 별업이다.<ref>'挹灝'는 송이창의 호이다. 大禾里는 현 대전 대덕구 대화동(大禾洞)에 해당한다. 기둥이 드러난 정자(亭)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 * '''금운정(錦雲亭)''': 박섬(朴暹)의 별장. 기국정과 쌍청당 사이에 그려져 있다.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지었다.<ref>본래 송이창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보물.</ref> * '''기국정(杞菊亭)''': 외남면.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의 별업.<ref>이 지도가 그린 곳은 원위치인 외남면 소제리(현 대전 동구 소제동)이며, 일제강점기에 남간정사 옆(현 동구 충정로 53, 우암사적공원)으로 옮겨졌다.</ref> * '''남간정(南澗亭)''': 송시열의 별업. * '''쌍청당(雙淸堂)''': 내남면 송촌리(宋村里). 관아에서 5리. 송유(宋愉)의 별장.<ref>1432년(세종 14) 창건 이래 원위치를 지켰다. 현 대전 대덕구 쌍청당로 17,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ref> == 사우 == ;원문 宗晦祠【在外南面興農里、自官南距十里、宋文正公時烈·權文純公尙夏…影幀奉安…令毁破】。崇賢祠【萬曆己酉建、賜額。鄭文翼公光弼·金文簡公淨·宋文忠公麟壽·〔金〕文元公長生·宋文正公浚吉·宋文正公時烈…令毁破】。詠敀樓〔敀=歸의 약자〕。 ;번역 * '''종회사(宗晦祠)''': 외남면 흥농리에 있으며, 관아에서 남으로 10리. 문정공 송시열·문순공 권상하(權尙夏)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가 훼철(毁破)되었다.<ref>'宗晦'는 주자(朱子)의 호 회암(晦庵)을 종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이 사우가 주자의 영정을 함께 모신 사실과 부합한다. 1697년 남간정사 옛터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흥농영당(興農影堂)에서 비롯하여, 1739년 동쪽 옛 능인암(能仁庵)터로 옮겨 사당·강당·재실을 짓고 종회사라 하였다. 기호계 사림의 거점 사우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터는 현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뒤편 언덕(우암사적공원 안)이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훼철 뒤 1936년 그 자리에 남간사(南澗祠)를 세웠고, 현재의 남간사는 1997년 우암사적공원 조성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종회사가 남간정보다 동쪽(위쪽)에 그려진 것도 '능인암터로 옮겼다'는 기록과 합치한다.</ref> *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萬曆己酉, 1609)에 세우고 사액(賜額)받았다. 문익공 정광필(鄭光弼)·문간공 김정(金淨)·문충공 송인수(宋麟壽)·문원공 김장생(金長生)·문정공 송준길·문정공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가 훼철되었다.<ref>지도의 편액은 '崇賢書院'이 아니라 「崇賢祠」로 적혀 있다.</ref> * '''영귀루(詠敀樓)''': 숭현서원의 문루(門樓). 숭현사 앞(동쪽)에 기둥이 드러난 누(樓) 형태로 그려져 있다.<ref>편액 셋째 글자는 敀(白+攵)로 歸의 약자(읽기 '귀', 표준자 詠歸樓). 처음 「永敏樓」로 판독하였으나 전문가 교정으로 바로잡는다. 1998년 복원된 현재의 숭현서원 문루 명칭과 일치한다.</ref> * 이 밖에 '''정절사(靖節祠)'''(박팽년·송유 등 배향)·'''미호사(美湖祠)'''(송규렴 배향)·'''용호사(龍湖祠)'''(강학년·강세구 등 배향)가 1869년(고종 6)에, 숭현사가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ref>미호사와 용호사는 금강 변 언덕에 그려져 있으며, 각각 현 대전 대덕구 미호동·용호동의 지명과 통한다.</ref> == 제단·학교 == * '''사직단(社稷壇)''': 읍치 서쪽에 소형 단(壇) 구조로 그려져 있다. * '''향교(鄕校)''': 관아에서 북으로 2리. 담장과 삼문(三門)을 갖추어 그렸고, 남쪽에 홍살문이 있다. * '''여단(厲壇)''': 원형 표지로 표시되어 있다. == 경계 == ;원문 沃川界二十里。文義界二十里。公州界十五里。 ;번역 옥천(沃川) 경계까지 20리. 문의(文義) 경계까지 20리. 공주(公州) 경계까지 15리. == 주해 == ===봉수대 주기 풀이=== 봉대 주기는 짧지만 봉수 한 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를 빠짐없이 담고 있다. {| class="wikitable" ! 구절 !! 뜻 !! 설명 |- | 烽臺 || 봉수대 ||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신호하는 시설. 회덕의 계족산 봉수. |- | 自官東距三里 || 관아에서 동으로 3리 || 읍치(현 대덕구 읍내동) 기준. 약 1.2 km. |- | 東應沃川環山峯燧 || 동으로 옥천 환산의 봉수에 응함 || 環山은 옥천의 산으로 고리산이라고도 한다. |- | 三十里 || 30리 || 약 12 km. |- | 來應 || 와서 응함 || '''신호를 받는 쪽'''. 來를 이체로 썼다(가로획이 하나 더 있어 未와 구별된다). |- | 北應文義夜味山峯燧 || 북으로 문의 야미산의 봉수에 응함 || 夜味山은 문의의 所伊山(소이산) 봉수에 해당한다. 문헌은 所伊山으로 적으므로 이 표기는 이 지도의 이명이다. |- | 四十里 || 40리 || 약 16 km. |- | 去應 || 가서 응함 || '''신호를 보내는 쪽'''. |} '''요지''' — 이 주기는 ①읍치로부터의 위치, ②양쪽 인접 봉수의 방향·이름·거리, ③'''신호의 전달 방향'''이라는 세 가지를 한 문장에 담았다. 특히 來/去를 나누어 적음으로써 계족산 봉수가 노선의 '''중계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봉수는 동쪽 옥천 환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문의 소이산(지도의 야미산)으로 넘겼고, 그 길은 다시 청주 것대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다. 방향과 거리만 적는 여느 읍지 기록보다 한 단계 자세한 표기이다. === 미판독 사항 === 다음은 원본의 마모·초서로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 북면 호수의 끝자리(戶三百□)와 구수 1,699의 끝자리. * 삼천교(三川橋) 세 글자 가운데 가운데 한 글자. * 서면·근북면·일도면 등 각 면에 열거된 리(里) 이름의 상당수. 완전한 목록은 《여지도서》·《충청도읍지》 회덕현 방리 원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 읍치 성곽 안 일부 소규모 건물의 이름. ===각주=== <references/> == 판독 저본·참고 == * 저본: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 회덕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425). 원도 이미지 7,564×10,353픽셀·300dpi의 원해상도 판독. * 지리지 대조: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 회덕현. * 연혁·지명 보완: 1914년 군면폐합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유산포털. * 연구: 권선정, 「고지도를 통해 본 대전」 등. [[분류:1872년 지방지도]] [[분류:조선의 지리서]] [[분류:대전의 역사]] {{PD-old}} nuw69obno9uael9wggmemumoj78hk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