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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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0세(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는 제217대 로마 교황(재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이다.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이탈리아어: Giovanni di Lorenzo de' Medici)이다. 화려한 볼거리와 흥겨운 무대로 로마를 치장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최후를 장식한 복안적 사고의 평화주의자였다.
[편집] 생애
1475년 12월 11일 ‘위대한 로렌초’라 불리었던 피렌체 공작 로렌초 마니피코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헌되어 13세에 추기경이 되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인문주의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494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고 사보나롤라의 광신적인 신권 정치가 수립되자 당시 19세였던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유럽 각 국을 여행하며 예술에 심취하고 연극을 보러 다녔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511년 10월 그를 볼로냐와 로마냐의 사절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피렌체가 피사의 이단적인 공의회를 지지하자 교황은 그에게 고향 피렌체를 공격하는 교황청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피렌체 시민들은 무조건 메디치 가문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므로 그는 무혈입성하여 명실 공히 피렌체의 실세가 되었다.
그는 치질로 심하게 고생한 나머지 151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선종하고 난 뒤 열린 콘클라베에 늦게 도착했다. 당시 추기경들은 전쟁을 좋아하던 율리오 2세가 선종하자 평화를 사랑하는 교황을 원했다. 회의 엿새째 되는 날 그는 종기를 잘라낸 다음, 실제보다 더 아픈 척 가장하고는 자신에게 표를 몰아달라고 라파엘로 리아리오 추기경을 설득하였다. 메디치의 계략에 넘어간 리아리오 추기경은 메디치는 평화를 사랑하는 데다가 곧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교황에 선출될 기회를 붙잡게 될 거라고 기대해 이에 동의했다. 이렇게 37살의 조반니 추기경이 새 교황에 선출되어 1513년 3월 19일에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교황에 선출된 직후 그는 “하느님은 나에게 교황직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니 이 선물을 마음껏 즐기자”라는 말을 하여 앞으로의 생활을 예고했다고 한다.
교황에 선출되고 난 후 레오 10세는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으로 가는 행차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다. 그 금액은 전임 교황 율리오 2세가 남기고 간 교황청 재산의 4분의 1가량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치는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교황청 재산의 탕진은 결과적으로 재정 고갈을 낳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레오 10세는 성직매매 및 대사 남용에 의존했다. 레오 10세는 성직과 대사 판매로 거두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유흥을 즐기고,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거금이 들어가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 사업을 계속 진행할 뿐 아니라, 십자군 원정을 추진하였다.
1513년과 1515년 사이, 교황청과 프랑스간에 사이가 나빠졌다. 프랑스는 베네치아와 연합군을 결성해 밀라노와 나폴리를 침공했다. 그렇지만 루이 1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패배 이탈리아 반도에서 퇴각해야 했다. 그러다가 루이 12세의 뒤를 이어 프랑수아 1세가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해 밀라노를 함락했다. 그 직후 레오 10세는 볼로냐에서 그를 만나, 교황청에 전적으로 유리하지만은 않은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내용 가운데 특히 주목할 대목은 프랑스 국내의 고위 성직자 선출시 후보자를 지명할 권한을 프랑스 왕에게 준다는 조항이었다. 얼마 후인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제위를 놓고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서로 제위계승권을 주장했다. 이때 레오 10세는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게 합병되면 이탈리아 역시 승자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을 우려해, 제3의 인물인 작센의 프리드리히를 지지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위는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에게 넘어갔고, 그는 카를 5세라는 이름으로 황제가 되었다. 곧이어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레오 10세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재빨리 카를 5세 편에 섰다. 이 같은 발 빠른 정치적 술수 때문에 그는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처리하기를 어지간히 좋아하는,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 또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부각된다.
1517년 5월과 6월, 레오 10세는 추기경 한 명 한 명과 개별 면담을 가졌다. 그는 개개인에게 “최근에 나를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고, 예닐곱 명이 실토했다. 곧 페트루치 추기경이 한 외과의를 고용해 교황의 고질적인 치질을 수술하게 한 뒤 독을 묻힌 붕대를 상처 부위에 맞댈 계획이었지만, 교황이 자신의 주치의를 고집해 불발로 그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페트루치 추기경은 즉시 체포되어 산탄젤로 성에 투옥되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을 포함한 다른 추기경들도 그들의 종복들을 고문해 증거를 확보하는 즉시 체포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레오 10세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추기경단을 자신의 심복들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그해 7월에 51명의 추기경을 새로 뽑았다.
한편 학문과 예술 분야에만 국학한다면, 레오 10세는 실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라파엘로에게 수많은 작품들을 의뢰했는데, 대표작으로는 교황 자신의 초상화와 바티칸 궁전 내 교황이 기거하는 방들의 프레스코화, 또 교회 축제 동안 시스티나 성당의 벽에 걸 테패스트리의 도안이 있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 10세의 후원을 받았다. 레오 10세의 후원을 받은 예술가 중에는 화가뿐 아니라 음악가도 포함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음악가들만 골라 바티칸으로 불러들여 구성한 교황청 성가대는 특히 유명했다. 또한 수많은 새 건물들로 아릅답게 장식하였으며, 수많은 고문서들을 수집했다. 이러한 레오 10세의 문화부흥책 덕분에 로마는 서구 예술의 중심지로서 바야흐로 르네상스 문화가 꽃을 피웠지만 동시에 반(反)로마 운동의 불길도 타올랐다. 이러한 종교적인 변화를, 특히 북유럽에 강하게 일고 있던 개혁의 바람을 레오 10세는 기질상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를 싫어했다. 게다가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계속 고집해 교황청 금고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대사를 남발하고 성직을 매매한 행위는 점점 더 큰 물의를 일으켜, 결국 종교개혁을 촉발했다. 1521년 1월 3일 칙서를 통하여 마르틴 루터를 파문하였다.
1521년 10월 25일 레오 10세는 갑자기 병에 걸렸다. 몇 주 동안 병세가 완화된 듯싶더니, 11월 말에 다시 악화되었다. 그 후에 한동안 나아지는 듯하더니 12월 1일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결국 그날 자정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색이 변하고 부풀어 오른 주검은 독살 의혹을 불러일으켰지만 실제 사인은 말라리아일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 바깥고리
전 임 율리오 2세 |
제217대 교황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 |
후 임 하드리아노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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