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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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쿼도프스카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는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 퀴리로 잘 알려진,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의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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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867년 가난한 교육자의 딸로 태어났으며, 폐결핵을 앓던 어머니와의 사별, 장학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실직(폴란드 말로 된 답안을 묵인)등으로 혼란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른으로 성장한 마리는 가정교사로 일하여 번 돈을 집안살림과 파리 유학을 시작한 언니의 학비에 보태는 억척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기숙사 학교 사감으로 취직한 후 여유가 생기자, 마리는 둘째 언니와 형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였다. 이때 그녀는 형부 내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무리하게 자취생활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질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를 취득한 그녀는 같은 과학자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두 딸을 둔 어머니가 되었다. 퀴리라는 성(姓)은 결혼후, 남편의 성을 딴 것이다. 1902년 남편의 사별(교통사고)로 과부가 된 그녀는 남편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대학교측의 배려로 교수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녀의 두 딸 이렌과 이브는 어른이 된 후 각각 과학자와 작가가 되었다. 1934년, 요양소에 입원. 그 해 7월 4일 방사능으로 인한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편집] 업적
그녀와 그 가족은 역사에 이름을 떨쳤다. 1903년, 라듐의 연구로 그녀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인물로서의 최다 기록이다. (단체로서 적십자 국제위원회가 3회 수상하였다.) 또, 그녀의 딸 부부(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프랑스의 보수성과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공격('남편의 제자와 연애관계이다'라는 기사가 났다)으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수 없었다.
[편집] 함께 보기
- 피에르 퀴리
- 이렌 졸리오퀴리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 이브 퀴리
[편집] 바깥 고리
- ((영어)) Marie Curie – Biography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마리 퀴리 전기.
분류: 1867년 태어남 | 1934년 죽음 | 노벨 화학상 수상자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프랑스의 과학자 | 폴란드의 과학자 | 폴란드계 프랑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