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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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1390년? - ?,경상도 동래 출생, 본관은 아산(牙山))은 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이자 발명가이다.
[편집] 생애
아버지가 원래 원나라의 소항주(현재의 저장 성) 출신인 귀화한 중국인으로 알려져있고 어머니는 관기였다.
장영실은 어릴 때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취미와 재주를 가졌으며 청년 때에는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되었고 그의 훌륭한 재주가 세종대왕에게까지 알려져 궁궐로 불려 갔다. 세종은 장영실을 임인,계묘년(1423년) 무렵 상의원 별좌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이조 판서 허조의 반대로 하지 못했다가 이후에 신하들의 찬성으로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하였다. 그 후, 세종 대왕의 명에 따라 물시계인 자격궁루(1424년)등을 만들었으며 세종 대왕의 명을 받고 중국에 유학하여 천문을 공부했다. 1432년에는 이천과 함께 천문 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1437년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방향을 가르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
이의 공으로 세종 15년(1443년)에는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또한 세종 16년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20여만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장을 찍을수 있었다. 세종 20년(1438년) 1월 7일에는 옥루(玉漏)를 흠경각(欽敬閣)안에 만들었다.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였다.
세종 23년(1441년)에는 호조에서 서운관에 측우기를 설치할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만든 장영실의 측우기(높이 30.9 센티미터, 지름 14.4 센티미터의 개량 기구)는 서양의 카스텔리가 1639년에 만든것 보다 무려 200여 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1442년 대호군(大護軍) 장영실은 그 해에 세종 임금이 탈 가마인 안여(安輿)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묘로 행차하던 도중 교군 (가마 메는 사람) 한 사람이 넘어지면서 가마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장영실은 직첩을 회수당하고 곤장을 맞았다. 이후 1450년경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측된다.
[편집] 추모사업
- 과학선현 장영실 선생 기념사업회
- 장영실과학고등학교 (부산)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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