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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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기근 또는 우크라이나 대학살1932년-1933년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5백만에서 1천만 사이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어로는 "기아로 인해 사망으로 이르게 함"이라는 뜻에서 온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오스트레일리아·헝가리·리투아니아·미국·바티칸 시국의 정부·국회는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로 인정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매 11월 마지막 토요일은 대기근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일이다.

[편집] 원인과 결과

대기근의 피해는 도시 지역은 대부분 피해가고 주로 농촌 지역의 인구에 나타났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1921-22년에 이미 있었던 가뭄과 기근, 또 그 후인 1947년에 찾아올 기근과는 달리 1932-33년의 대기근은 사회 기반시설의 붕괴 또는 전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정치적·행정상의 결정으로 비롯되었다.

스탈린의 농장 집단화 정책은 소련의 농촌 지역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특히 농장 개인 경영의 전통이 깊은 우크라이나와 돈 강 유역에서 심했다. 이는 농산물 수출로 급속한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공급하려던 스탈린의 계획에 위협이 되었다. 농산물의 생산이 기대에 못미치자 정부는 그 책임을 이른바 부농(쿨라크, kulak)들에게 덮어씌우고 이들이 생산한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부농들의 농장을 습격, 식용 또는 종자용을 포함해서 보관된 곡물들을 가져갔다. 농민들은 집단농장에 농사일에 필요한 소들을 내놓느니 차라리 도살하였다. 일할 소들의 부족으로 농사 지을 수 있는 면적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는 참담하여 몇 달이 지나서 비옥한 토지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의 농촌은 대기근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기근에 대한 보고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외국 기자들이 기근 지역에 출입하는 것을 막았다. 정치국과 지역 당위원회에서는 "성실한 농부"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즉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으며 구역별 당위원회들은 모든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지급하도록 지시받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물자를 동원하는데 실패하거나 기아로 인한 환자들에게 입원을 거부하면 기소하게 될 것이라고 지시받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역부족이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굶어죽는 동안에도 소련의 농산물 수출은 증가했다.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기차를 통해 기아를 탈출하려던 수많은 어린이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농촌으로 되돌려져 곧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대기근에 대한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돈 강 유역, 우크라이나, 북카프카스, 쿠반 등지에서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는 한편 스탈린은 농장 집단화를 반대했거나 1920년대의 우크라이나화(Ukrainization) 정책을 지지했던 우크라이나 관리들을 숙청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수위를 높였다.

한편 외화벌이용 곡물 수탈은 계속되어 농민들의 반발이 잇따랐으나 당국은 마을을 통째로 강제이주 시키는 등 반발에 강력히 대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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