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치 기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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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키이치로(일본어: 樋口 季一郎 ひぐち きいちろう, 1888년 8월 20일 ~ 1970년 10월 11일)는 효고 현 아와지시마 태생의 구 일본육군의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중장이며, 보직은 제5방면 군사령관 겸 북부군관구사령관. 이스라엘 건국공로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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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경력

효고 현 미나미 아와지 시에서 오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세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쪽이 맡게 되었다.

18세때 기후 현 오오타니 시의 히구치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거쳐 고급군인이 되고 나서는 주로 만주러시아 방면의 부서에서 근무하였다. 하얼빈 특무기관장(소장)으로 재직했던 1938년에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온 2만명의 유대인에 대하여 부하인 야스에 노리히로 대좌와 함께 제반편의를 제공하고 이들의 만주국 및 샹하이 조계지로의 이동등을 도왔다. (오토볼 사건) 그후, 삿포로에 사령부를 둔 북부군(후에 북방군,제5방면군으로 개칭)사령관으로서 북동태평양육군작전을 지휘하였다. 애투 섬 옥쇄,키스카 섬 패퇴, 패전후의 슈무슈 섬, 사할린 섬에서의 전투를 지휘하여 슈무슈 섬에서는 소련군 치시마 침공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서, 홋카이도를 소련군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냈다. (사할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여 소련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일로, 스탈린은 히구치를 전범으로 지목하였다. 세계 유대인 협회는 나중에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후, 유대인 커뮤니티을 이용하여 로비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맥아더는 일본점령후 소련측의 전범인도요구를 거부하여, 히구치의 신병을 보호하였다.

전후, 부하인 야스에 노리히로와 더불어 이스라엘 건국의 공로자로서 황금의 비에 이름이 새겨지고 공적을 치하받았다.

[편집] 인물상

하시모토 긴고로와 함께 사쿠라카이(일본군부의 극우비밀결사조직)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나, 의견차이로 다툰후, 결별하였다.

또한 2.26사건을 일으킨 청년장교들과도 각별한 사이로 무력에 의한 실력행사를 조장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이자와 사건이 일어났을때는 사건 당사자인 아이자와 사부로의 직속상관이었다. 이시와라 간지, 아나미 고레치카와도 친구사이였다.

[편집] 평가

유대인을 도운 공적은 인정되었으나, 구 일본군부의 우익강강파로, 그의 평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는 공과론으로 대표되는 긍정론과 양면적 제국주의자로 대표되는 부정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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