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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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사건은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14년 6월 28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가장 맑게 갠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남슬라브 운동).
세르비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외교사 최대 실수로 평가되는 "백지수표"를 빌헬름 2세가 약속한다.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른 것이긴 하였으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의 주도를 오스트리아가 따르는 구조였으나,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때부터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찌기 이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킨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건네준 백지수표를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답변 시한은 48시간이었다.
- 모든 반오스트리아단체를 해산할것
- 암살에 관련된 모든자를 처벌할것
- 반오스트리아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것
-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데 오스트리아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것
이 조항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최후 통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각 조항들이 세르비아의 주권과 자존심을 짓밟는 항목들이었고, 그 목적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런 오스트리아의 속셈을 세르비아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은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는 1,2,3 항까지는 굴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 최후 통첩을 거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러시아에 대한 최후통첩은 “총동원령을 해제하라. 안그러면, 전쟁상태로 간주한다. 12시간내 답변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만일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상태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18시간내 답변하라.”라고 발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답변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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