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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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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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494년 ~ 1506년 | |
왕 비 | 폐비 신씨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앞선 왕 | 성종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다음 왕 | 중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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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0대 국왕 |
연산군(燕山君, 1476년 - 1506년,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휘는 융(隆). 성종과 제헌왕후의 아들이다.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으로 일컬어지며, 집권기 중 2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많은 인명을 죽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하는 등 전형적인 독재자로 군림했다.
목차 |
[편집] 생애
성종과 제헌왕후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모후가 왕비에 오르던 해에 연산군에 책봉되었다가 제헌왕후가 왕비에서 폐위되고 난 5년 후인 1483년, 8살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연산군의 친어머니 제헌왕후는 모함을 받고 폐위당해 사형을 당했으나 연산군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지냈다. 성종이 앞으로는 제헌왕후에 대한 일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래 폐위된 제헌왕후를 좋아하지 않았던 할머니 인수대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연산군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한 데 비해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을 무척 귀여워하였다. 이런 인수대비의 태도는 어린 연산군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다 주었으며, 그로 인해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연산군은 점차 고집스럽고 괴팍해졌으며,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심한 장난을 좋아했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19살에 성종의 승하와 함께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즉위 초에는 아직 성종 시대의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그대로 있어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었다. 연산군은 한동안 빈민들을 구제하고, 별시 문과를 실시하고, 《국조보감》 등 여러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국방도 튼튼히 하는 등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모습을 점차 표출하기 시작했다. 치세 4년 후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해 5~6년 동안에 2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1498년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과 유자광의 고발을 받아 연산군은 김일손 뿐 아니라 많은 사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 참시하였다(무오사화).
그러던 중에 일찍이 성종 때에 사림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던 훈구 세력인 임사홍 등이 자신들을 탄핵했던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에게 친어머니인 제헌왕후의 사사 내막을 폭로하였다.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1508년 제헌왕후 사사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살아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 참시하였다(갑자사화). 제헌왕후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들인 엄 귀인과 정 귀인을 궁중의 뜰에서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잔인함을 꾸짖었던 인수대비는 병상에서 머리를 들이맞아 죽었다. 연산군의 이러한 행위는 어머니의 복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신하들의 재산을 흡수하고자 한 개인적인 탐욕의 표출이기도 했다.
갑자사화는 사림뿐만 아니라 훈구 세력에게도 타격을 입혔으며 연산군의 전제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견제 세력이 없어진 연산군은 그 후 매일 잔치를 열고 기생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노는 등 쾌락에 빠져 국고의 자금을 낭비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장녹수를 가장 총애하여 그녀를 비방한 다른 측실들을 사지를 찢어 죽이고 머리를 뽑아 궁중에 전시하였다. 연산군은 거덜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공신전과 토지를 도로 거두어 들임으로써 백성들은 물론 공신들의 반발까지 샀다.
또한 전국에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하게 하였으며, 불교 선종의 본산 사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성균관은 유흥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냥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더불어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을 없애 학문을 멀리하였고, 사간원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온갖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계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금하는 문화적 오류도 저질렀다.
이러한 폭정이 극에 달하자 전국 각지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 성희안, 박원종 등 훈구 관료들이 1506년 9월에 거병을 하기로 결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다(중종 반정). 반정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강봉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에 그 곳에서 31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편집] 가족 관계
- 폐비 신씨
- 폐세자
- 창녕대군(昌寧大君)
- 휘신공주 수억(徽愼公主 壽億)
- 후궁 다수
- 양평군(陽平君)
- 돈수
- 옹주
[편집] 예술 속의 연산군
[편집] 같이 보기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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