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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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趙光祖, 1482년 - 1519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양절공(良節公) 온(溫)의 현손이다. 1510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부제학,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음력 11월에는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었다.
여러 요직을 거치는 동안 중종에게 늘 간언하여 바른 정치를 펴는 데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현량과를 시행하여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중용하는 데에 힘썼으며, 여씨(呂氏) 향약을 도입하였다.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중종반정 공신들 중 대다수가 거짓 공훈으로 공신에 올랐다 하여 이들의 거짓 공훈을 박탈하고자 하였으나, 자신들의 거짓 공훈이 삭제될 것을 두려워한 훈구파 신하들이 이에 반발하여 오히려 조광조를 무고하였다. 결국 남곤, 심정 등의 무고를 받은 조광조는 전남 능주(지금의 화순)에 유배되어 1519년(기묘년)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인종 원년에 복권되고 선조대에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1610)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5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묘는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에 있으며 묘소 왼편에 심곡서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