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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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일본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일본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외교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일본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들이 있었다.

조선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쓰시마 번을 통해서 외교관계 회복을 요청해 오자 1607년에 강화를 맺었다. 1607년부터 1624년까지의 3회의 사절은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했는데, 이들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강화와 그 조건 이행의 확인, 일본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즉위할 때마다 막부의 요청으로, 즉위를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대륙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처음에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파견되었지만,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그 역할이 사라지는 대신 문화적으로 선진 문물의 전달 창구로서의 조선 통신사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향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하였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그 외에도 일본 민중 문화에 끼치는 영향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의 춤(唐人誦), 조선 가마, 필담창화(筆談唱和)의 시문(詩文)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 통신사 파견이었던 1811년의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이 불안하여 대마도에서 역지빙례(易地聘禮)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과 양국 내정의 악화와 더불어 양국에 적극적인 파견이나 요청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흐지부지되었다. 메이지 유신 등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하고 난 후에는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한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일본사학 일각이나 한국의 식민사학에서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 측 사절단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이래 개항 때까지 외교정책은 성리학적 외교원칙인 사대교린으로서, 중화에 버금가는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여진,일본,류큐등은 교린의 대상이었지,결코 사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신사파견에 대한 일본학계의 자의적인 해석은 나올 수 있어도, 당시의 조선이 사대의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통신사파견요청 자체가 도쿠가와 막부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에 대응할 만한 일본국왕사가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 침공군이 일본국왕사의 상경로로 침공한 것에 대한 응분의 조치로 일본 사절단의 상경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본 막부 측에서 조선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파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를 깎아내리는 경향은 에도 막부 당시의 국학파들 사이에 존재했으며, 조선에서는 조선의 국왕이 일본의 천황이 아닌 쇼군(당시에는 관백이라 불렀음)과 동등한 지위로 외교 관계를 맺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론이 일었다. 원중거등 파견된 통신사중 일부는 일본의 이중적인 권력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비록 실권없이 상징적이기는 하나, 형식상 쇼군을 임명하는 국가의 상징이 되어 있는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여, 후일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면, 형식상 천황의 신하인 쇼군과 동등한 지위를 맺고 있는 조선국왕에 대해서 외교의례적 문제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 예견은 실제로 메이지 유신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이 또한 19세기 들어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편집] 역대 통신사 내역

연도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인원
*1607년(선조 40년) 여우길 경섬 정호관 - 467
*1617년(광해군 9년) 오윤겸 박재 이경직 - 428
*1624년(인조 2년) 정립 강홍중 이계영 - 300
*1636년(인조 14년) 임광 김세렴 황상 권칙 475
*1643년(인조 21년) 윤순지 조형 신유 박안기 462
*1655년(효종 6년) 조형 유이 남용익 이명빈 488
*1682년(숙종 8년) 윤지완 이언강 박경준 성완 475
*1711년(숙종 37년) 조태억 임수간 이방언 이현 500
*1719년(숙종 45년) 홍치중 황선 이명언 신유한 479
*1748년(영조 24년)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박경행 475
*1764년(영조 40년) 조엄 이인배 김상익 남옥 472
*1811년(순조 11년) 김이교 이면구 - 이현상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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