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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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세속명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
임기 시작 2005년 4월 19일
임기 종료
전임 요한 바오로 2세
후임
탄생 1927년 4월 16일

베네딕토 16세(라틴어: Benedictus PP. XVI,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I)는 제265대 교황(재위: 2005년 4월 19일-)이다. 세속명은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독일어: Joseph Alois Ratzinger)이다. 선출 당시 그의 나이는 78세로 275년 동안 선출된 가장 나이 많은 교황이며, 지금의 네덜란드 지방 출신인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이후 최초의 독일인 교황인 동시에 바티칸 역사상 8번째 독일인 교황이다. 2005년 4월 타임지의 ‘세계 100대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1927년 4월 16일 토요일 아침 8시 30분에 독일 바이에른 주마르크틀 암 인에서 경찰관의 2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같은 날에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정직했으며, 주일이 돌아오면 새벽 미사와 오전 9시 교중 미사, 오후 미사 등 하루 3차례 미사에 참례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따뜻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가 딱딱한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

라칭거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학교 일정이 겹치지 않으면 매일 미사에 참례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가 사다 준 미사경본 속에서 라틴어로 된 미사 전례의 신비스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훗날 “음악뿐만 아니라 장식과 그림이 들어가 있는 미사 전례가 나를 매혹시켰다. 이성적 관심이었겠지만 종교 안에서 언급되는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1951년 6월 29일 형인 게오르크 라칭거와 함께 가톨릭 신부로 서품받았다. 그가 대학교 강단에 섰을 때는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가장 잘 기울이는 젊은 성직자로 정평이 났다. 그는 , 뮌스터, 튀빙겐, 레겐스부르크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해도 개혁적 성향의 신학자로 통했다. 교의 신학과 기초 신학을 주로 강의했는데 강의실은 항상 초만원이었다. 솔직성과 관용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교황청의 관료들이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무명의 젊은 신학자였던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매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쾰른 요제프 프링즈 추기경의 신학 자문역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 독일어권을 대표해서 개혁과 쇄신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공의회가 쇄신의 씨앗을 뿌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독일 대학가를 휩쓴 네오마르크시즘 열풍, 즉 극렬 좌파 학생 운동은 그의 진보적이었던 사고를 보수적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진보적 인물로 찬사받던 신학 교수들까지도 학생들에게 강의 마이크를 빼앗기는 일이 일어났던 시절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이 분산되고 있는 것을, 신앙과 교회가 전혀 다른 생각과 이념에서 남용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이 일들이 벌어지는 수년 간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서서 저항해야 하며,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는 1977년 3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뮌헨과 프라이징의 대교구장을 맡았다. 1977년 6월 27일 대주교가 되었다. 1981년 11월 25일 교황청의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되어 교황이 될 때까지 그 지위에 머물렀다. 그 밖에 성서 위원회 위원장과 국제 신학 위원회 위원장도 맡았으며, 2002년에는 교황 선출 추기경단 의장을 맡았다.

그는 점차 보수적 입장을 취하면서 권력에 한층 더 가까워져져갔으며, 그에 따라 그의 교회 내 지위는 재빠르게 올라갔다. 이는 오랫동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 중 하나로서 교황청의 신앙과 교리 문제를 담당하면서 초보수적인 교리 해석으로 교회 수호의 강력한 집행관으로 활동하여 교황청 내에서도 ‘하느님의 로트와일러’, ‘전차 추기경(Panzer kardinal)’ 등의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강경 보수파 신학자로 꼽힘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의 치세 말기에는 중세기 이단심문소의 재현인 신앙교리성의 임무가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앙교리성을 교황청의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비판 세력으로부터 바티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부(副)교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동성애, 낙태, 이혼, 페미니즘, 안락사, 산아 제한, 인간 복제 등을 전통적 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의 길을 본받아서 민중의 편에 서야 함을 주장하는 해방신학, 종교 다원주의, 여성 사제 서품등의 개혁적인 흐름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한 참된 진리이고 그 외 다른 종교는 모두 불완전하다고 몰아세우기도 하는 등 종교적 관점에서도 보수적 시각, 즉 근본주의를 지니고 있다. 그는 제도로서 교회의 권위를 진리와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수많은 종교재판을 행하여, 이들을 집요하게 공격, 단죄하였다.

라칭거의 이러한 닫힌 종교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른 종교 및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정교회, 개신교)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였던 로마 가톨릭의 신학 방향이 보수화된 것을 의미한다.

추기경 시절의 문장
추기경 시절의 문장

특히 그는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스위스의 신학자로 교황청의 교권주의 등을 비판해 오던 한스 큉을 비롯한 상당수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에게 수업 및 저서 출판 금지, 심지어 파문까지도 서슴치 않은 장본인도 그였다. 한 교황청 관리는 “그는 모든 것의 마지막 점검 단계였고, 정통 교리의 최종적인 발언이었으며, 모든 것이 그가 관할하는 신앙교리성을 거쳐갔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이 세계 곳곳에서 세속주의 및 다른 종교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만큼 정통 원리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적인 신자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열성 지지자들은 라칭거를 ‘라치’로 애칭한다.

그는 극적인 카리스마는 없지만 명석하고 신념이 강한 학자이며 유능한 행정가이자, 7개의 명예박사학위와 모국어인 독일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에스파냐어포르투갈어 등 10개국 언어로 소통이 가능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21세기 최고의 신학자이며 유럽의 최고 지성’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부드러운 음성의 내성적인 사색가이며 베토벤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치는 수준급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황청의 대내외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요한 바오로 2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면서, 콘클라베가 시작되기 전 차기 교황의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어 왔다.

그 때문에 고령과 전체주의적 사고, 종교적 배타성 등의 반대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상황과 과도기 관리자가 필요한 시점에 보수적인 교황청의 분위기가 오히려 그의 풍부한 경험과 깔끔한 관리 능력, 탁월한 외국어 실력 등이 장점으로 부각되어 2005년 4월 19일 콘클라베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 24일 정식 즉위하였다.

라칭거는 자신의 교황명을 교황 베네딕토 15세누르시아의 베네딕토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고 본받기 위해 베네딕토를 선택하였다.

베네딕토 15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쟁국들 사이에서 열렬하게 평화를 주창한 교황이었으며,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시자였다.

[편집] 재위 기간

베네딕토 16세는 전통을 회복하고자 바오로 6세 이후로 폐지되었던 교황의 의복을 착용하고 있다. 하얀 담비의 털이 수놓인 붉은 외투 모제타를 입었으며, 2005년 12월 21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 나설 때 전통적인 교황의 모자였던 카마우로를 썼다. 베네딕토 16세가 현재까지 착용하지 않은 전통 의류 중 하나는 교황관인 삼층관이다. 그는 2명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즉위식 때 삼층관을 쓰지 않기로 했다.

베네딕토 16세가 즉위한 지 얼마 후에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2005년 6월 12부터 13일까지 이틀 동안 인간 배아에 대한 치료 복제와 실험의 타당성에 대해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번 국민 투표를 앞두고 배아 연구 규제 완화 법안을 저지하는 것이 향후 국가 및 사회의 생명 윤리 문제를 좌우할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인간의 배아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라며 이를 존중할 것을 촉구하면서 국민 투표 자체가 반(反)생명적인 무의미한 행위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아예 국민 투표를 보이콧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모든 신자들에게 투표에 기권할 것을 적극 호소하여 결국 13일 투표율 미달로 부결되었다.

2006년 1월 20일의 베네딕토 16세
2006년 1월 20일의 베네딕토 16세

2006년 7월 10일 에스파냐 동부 발렌시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양성 결혼을 토대로 한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에스파냐의 동성 결혼 합법화 조치를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어긋나는 몇몇 과학 연구 분야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2006년 9월 10일 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집전한 야외 미사에서 서방의 과학 기술은 더 이상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신앙에 대한 냉소주의를 만연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2006년 10월 22일에는 로마의 라테란 대학교에서 개강 연설을 통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비극적 운명을 거론하면서 현대 과학에 대한 맹신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특히 베네딕토 16세는 그리스도교의 본고장인 유럽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쇠퇴하고 세속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신앙의 회복을 강조해오기도 하였다. 그는 EU가 유럽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정작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유럽을 하나로 묶어온 그리스도교적 정신과 하느님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비판했다. 또 유럽의 급속한 노령화와 낮은 출산율 등에 대해서도 “불행하게도 유럽은 자칫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6년 2월 22일에 대한민국 로마 가톨릭의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대주교와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인 비서를 지낸 폴란드의 스타니슬라프 지위즈 대주교, 미국의 숀 오멀리 대주교 등을 비롯한 전세계 성직자 15명을 새 추기경에 임명했다.

베네딕토 16세는 무함마드 만평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서방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권의 거센 반발이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은 상황에서 2006년 9월 12일 고국인 독일 방문 당시 이슬람교의 지하드가 역사적으로 폭력과 결부되어 있다는 옛 고서의 내용을 인용한 그의 발언은 본의 아니게 그를 문명 충돌의 중심에 서게 하였다.

그 결과, 전세계 무슬림들로부터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비난과 사죄 요구가 쇄도했으며, 나아가 항의 집회와 시위, 수녀 피살 등 일부 유혈을 동반한 폭력 사태도 적지 않았다. 극단적인 경우 베네딕토 16세를 희대의 독재자인 히틀러스탈린, 그리고 조지 W. 부시에 비유하는가 하면, 그를 이해하려는 무슬림들도 그의 발언이 신중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뜻밖에 사태가 확산되자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면서 직접 유감을 표시하고 교황청 주재 이슬람 국가 대사들을 불러 나름대로 이슬람권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조치를 취한 데 이어,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나흘간 터키를 공식 방문해 화해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의 그 같은 행동으로 인해 악화됐던 이슬람권과 어느 정도 화해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아무튼 자신의 보수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고 세속주의 등과 싸우겠다는 그가 취임 초 목표는 자신의 실언에 따른 이슬람권의 반발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느라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고, 빛이 많이 바래는 결과를 낳았다.

동방정교회와의 화해도 터키 방문시 처음으로 시도되기는 했지만 교황의 권위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교회 간의 간극이 여전히 크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베네딕토 16세의 측근이 요직에 전면 배치된 점도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차관이었던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을 국무성성 장관에 임명했다.

베네딕토 16세의 문장
베네딕토 16세의 문장

문제는 베르토네 추기경이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외교 경험도 전무하다는 것이다. 교황의 이슬람 발언 파문도 경험이 부족한 교황청 외교팀이 미리 연설문의 문제점을 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편집] 문장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문장은 전통적으로 교황 문장에 사용하던 삼층관을 주교관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은색 주교관에 3개의 금색 줄무늬는 삼층관을 상징하고 있다.

성작 모양의 방패에는 과 조개 껍데기, 무어(Moor)인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짐을 지고 있는 갈색 곰은 바이에른 지역을 기독교화한 8세기의 성 코르비니아누스의 상징이다. 프랑스 출신인 코르비니아누스가 이 지역에 선교하기 위해 오던 중 곰의 습격을 받았는데 나중에 곰이 성인의 짐을 옮겨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노랑색의 조개 껍데기는 4세기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상징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연구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마지막으로 왕관을 쓴 무어인은 북아프리카 지역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 지역까지 차지했던 무슬림들인데, 이것은 8세기에 프라이징 교구의 상징이었다. 일부에서는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 세력을 쫓아낸 아라곤 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이한 것은 이전 교황들의 문장과는 달리 방패 아래로 늘어진 붉은색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팔리움을 첨가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그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는 사목자로서 주교의 역할을 상징한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Cooperatores Veritatis(진리의 협력자)’라는 말을 사목 표어로 삼았었다.

[편집] 주요 저서

  • 《전례의 정신》(Der Geist der Liturgie)
  • 《그리스도 신앙-어제와 오늘》
  • 《미래의 도전들》(Werte in Zeiten des Umbruchs)
  •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Gott ist uns nab)
  • 《신앙과 미래》
  • 《신앙의 현재 상황-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
  • 《이 땅의 소금》
  • 《하느님과 세상-우리 시대의 신앙과 삶》
  • 《시온의 딸》
  • 《하느님의 혁명》

[편집] 회칙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Deus Caritas Est), 2005.12.25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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