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시민(金時敏) | |
---|---|
1554년 ~ 1592년 | |
![]() 김시민 장군의 영정 |
|
태어난 곳 | 목천현백전촌 |
죽은 곳 | 진주성 |
충성 | 조선 |
최종 계급 | 경상우도병마절도사 |
지휘 | 경상우도육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진주 대첩 |
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 때 무신(武臣)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편집] 생애
157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다. 이 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1583년 여진족이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임명되어 성채 보수 및 총통 대량 생산을 하고 있었는데 사천에서 일본군이 몰려들어오자 성만 지키고 있을 수 없어 정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십수교 위에서 일본군을 맞아 한바탕 싸워 무찌르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의주 행궁으로 묶어 보내고 빼앗겼던 고성과 창원도 탈환하였다. 그 공로로 김시민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겸하게 되었다.
한 번 대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 1592년 10월 5일 일본의 2만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으로 쳐들어왔는데, 1부대는 마재를 넘어오고 2부대는 불천을 넘어 들어오고, 3부대는 진양을 무찌르고 들어왔다. 그런 다음 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조직된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켰으나 성을 사수하던 조선군 역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 김시민은 전쟁터를 시찰하려고 군사들을 대동하고 성 밖으로 나섰다. 이때 시체 무더기 속에서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일어나 김시민의 이마를 총으로 쏘았다. 김시민은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에 진주성 안의 모든 사람들은 김시민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 전투를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라 불리는 진주 대첩이라 일컫게 된다. 이 진주대첩의 승리 덕분에 일본군의 호남 지역 침공을 좌절시켜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을 온전히 보존하얐고, 그 결과 일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편집] 사후(死後) 관작(官爵)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