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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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圓測, 613년 ~ 696년)은 본명은 문아(文雅)이고, 신라 왕족으로서 경주 모량부(牟梁部) 출신인 승려이다. 3세에 출가했고, 15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효소왕 5년(696)에 84세로 당에서 입적하였다. 《해심밀경소(海深密經疏)》를 후세에 남겼다.

당시 신라 왕손이 불가에 출가하는 것은 흔한 경우였으며, 이 전통은 고려에까지 이어졌다. 많은 신라 승려들이 그랬듯이 원측도 진평왕 49년(627년)에 15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고, 법상(法常), 승변(僧辨)에게서 유식학(唯識學)을 배웠으며, 645년에 현장이 인도구법여행에서 돌아오자 새로운 유식학을 배웠다.

유학 도중 당 태종이 도첩을 하사하고 원법사(元法寺)에 있게 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역경(譯經)과 저술 등에 종사하여 중국의 불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원측은 유식(唯識)학자였으며 후에 서명사에서 대덕(大德)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 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地婆訶羅:日照)가 인도에서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과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등의 불경을 가지고 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을 도울 대덕 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증의(證義)로서 참여했다. 693년에는 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보우경(寶雨經)》을 번역했다.

695년에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國)에서 가져온 《화엄경》을 새로 번역할 때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사리를 용문산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했고, 그 뒤 제자인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원측의 후계자 담광(曇曠)이 원측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를 둔황[敦煌] 지방으로 가지고 가자, 법성(法成)이 이를 티베트어로 번역하었다. 이 책은 티베트의 사상계와 종교문화 개혁에 크게 공헌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어로 된 책의 일부가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1992년중국 간쑤 성 둔황(焞惶) 유적지에서 티베트어로 쓰여진 책 전문이 발견되어 그것이 다시 중국어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원측 사상의 요체는 중국의 자은종(慈恩宗)과 달리 자종(自宗)을 고집하거나 타파(他派)를 배척하지 않고 융합하는 것으로서 원효의 사상과 비슷하다. 당시 중국 불교계는 법상종과 천태학 등 계파에 따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원측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양자의 융합을 주장하여, 법상종 정통파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승려 엔지의 기록에도 나오듯이 당에 많이 와있던 신라 출신 승려들이 원측의 사상을 계승하여 하나의 계파를 이루어 그의 사상을 계속 이어나갔고,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해심밀경소》 10권,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20권, 《주별장(周別章)》3권, 《유식이십론소(唯識二十論疏)》 2권, 《관소연연론소(觀所緣緣論疏)》 2권, 《인명정리문론본소(因明正理門論本疏)》 2권,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 1권, 《인왕경소(仁王經疏)》 6권 등이 있다.

현재 중국 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후대에 송복(宋復)이 지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