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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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 학자이다.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우리말 고문(古文)으로 된 천부경(天符經) 한문 번역본과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을 남겼다.

목차

[편집] 생애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 <삼국사기>권제46에 실린 최치원 열전에서는 지금의 857년 서라벌(경주)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으로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남쪽에 있는 옛 집터를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했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 味呑寺南 有故墟 云是崔侯古宅也) 그의 계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서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史傳泯滅 不知其世系)고 했고, 다만 그의 작품인 사산비명에서, 그의 아버지 이름이 견일(肩逸)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는 최치원의 탄생과 관련된 민간 전설에 따르면, 최치원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한지 4개월만에 '황금돼지'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나온 뒤, 최치원을 낳았다고 전하고 있다. 각 전설들을 종합해보면, 최치원의 아버지인 견일이 태수로 부임한 어느 고을에서, 해마다 새로 부임한 태수의 아내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고을 뒷산에 살고 있는 수천년 묵은 금돼지가 도술을 부려서 잡아간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고민끝에 견일은 아내의 치마주름 끝에 5천 다발이나 되는 긴 명주실을 매어두었는데, 해가 지고 밤이 되자, 명주실을 가지고 내실로 들어가 실 한끝을 잡고 아내의 곁에서 자는체 눈을 감고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한밤 자정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옆에 누워서 곤히 자던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사방을 두리번거려 살펴보고서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태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옆에 끼고 있던 명주실을 슬슬 풀어 주었다. 명주실은 계속하여 풀려 나갔다. 오천발이 다 풀리자 실은 더 당겨지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날이 밝자 견일은 그 명주실을 따라 집을 나섰고, 실은 뒷산 깊은 골짜기로 자꾸만 뻗어 나갔다. 한참 따라가니 명주실은 어느 작은 굴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컴컴한 굴 속을 조심스럽게 들어가니, 그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고, 촛불 아래 수십명의 여인들이 수심이 가득한 채 앉아 있는 가운데 자신의 아내도 보였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만약 금돼지에게 발각되면 큰일이니 어서 돌아가세요"하였다. 그러나 굴 속에 들어온 사람이 새로 온 태수라는 것을 알고, 먼저 잡혀왔던 여인들이 구하여 달라고 애원하였으므로, 견일은 궁리를 한참 하다가 오늘 금돼지가 들어오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라고 말하고, 즉시 몸을 피하여 숨었다.

얼마 안되어 금돼지가 오자, 여인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돌아오는 금돼지를 맞아 들여 무릎 위에 눕히고 금돼지의 허리며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등을 두드려주는 등 아양을 떨었다. 한창 기분이 좋은 금돼지에게, 한 여인이 "혹시 당신도 무서운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왜 물어 보느냐고 금돼지가 묻자 "이제 우리는 당신을 평생토록 모셔야 하는데, 혹시 모르고 당신이 싫어하고 무서워 하는 것이 있다면 멀리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금돼지는 웃으며 "내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만, 다만 한 가지, 사슴가죽만은 가장 무서워한다. 사슴가죽을 씹어서 내 목덜미에 붙이면 나는 죽고 만다"고 하고는 잠이 들었다.

마침 태수가 항상 허리끈에 차고 다니던 가죽주머니가, 바로 사슴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태수는 주머니를 찢어서 그것을 입에 넣고 씹은 다음, 그것을 금돼지의 목덜미에 붙이니, 정말로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태수는 금돼지를 처치하고 자기의 아내와 여인들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6개월 뒤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그것이 바로 최치원이었다는 것이다.

[편집] 당나라 유학(868)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그가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당시, 최치원의 나이는 고작해야 12살에 불과했다. 12살밖에 안된 최치원이 당나라로의 유학을 떠나야만 했던 이면에는, 당시 그의 가문이 신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당나라에 대한 동경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최치원이 살아있을 당시, 당나라에서는 신라뿐 아니라, 발해, 일본, 토번, 심지어는 페르시아에까지 과거응시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 국비유학생은 보통, 관리가 동행한 배를 타고 그의 인솔 아래 당나라에 건너가는데, 최치원에게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삼국사기>에는 그저 "수해(隨海)"해서 당나라에 갔다고만 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상선을 따라"라고 풀이한다. 말하자면 국비유학이 아닌 사비유학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만을 갖고 보자면, 그의 선조는 고허촌장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로, 고조선의 유민들이 모여서 만든 6부 마을의 하나인 돌산(突山: 지금의 경주남산) 고허촌(高墟村)의 우두머리로서,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를 처음 거두어 길렀으며, 훗날 그의 서라벌 건국을 도왔다고 전해지는 명문 귀족 집안이다. 신라에서 귀족의 서열을 결정한 골품제도에서 최씨 집안은 왕족인 진골 바로 아래인 6두품으로, 주로 국왕의 곁에서 글과 문장으로 시중드는 것을 가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왕족인 성골이나 진골에 비해, 6두품은 벼슬 승진이 6품인 아찬(阿飡)까지로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뛰어난 아들이 신라에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당시 12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당나라로 가는 유학길에 떠나보내면서, "만약 당나라에서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十年不第進士則勿謂吾兒)."라는 단호한 말까지 하게 된다. 당시 신라에서 중요한 벼슬은 왕경인(王京人)이라 불리는 중앙의 진골 귀척(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고, 비록 6두품이라고 해도 당나라에서 벼슬을 얻으면 그 능력을 신라에서도 인정받아 골품에 상관없이 벼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12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험한 바닷길에 실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신라 최고의 문장가로 거듭나게 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아버지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편집] 당나라에서의 성공

874년 최치원은 마침내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884년 10월 귀국했다.

[편집] 저서

  • 《금체시》
  • 《계원필경(桂苑筆耕)》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편집] 참고문헌

《최치원 신연구》, 당인핑 저/마중가 역/김복순 감수, 한림대학교 출판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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