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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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0세
그림:Pope Pius X.jpg
세속명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임기 시작 1903년 8월 4일
임기 종료 1914년 8월 20일
전임 레오 13세
후임 베네딕토 15세
탄생 1835년 6월 2일
사망 1914년 8월 20일

교황 비오 10세(라틴어: Sanctus Pius PP. X, 이탈리아어: San Pio X Papa)는 제257대 교황(재위: 1903년 8월 4일 - 1914년 8월 20일)이다. 속명은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이탈리아어: Giuseppe Melchiorre Sarto)이다. 검소한 생활과 사목적인 열성, 전례 강조, 로마 가톨릭 활동 분야에 내린 지침 등으로 명성이 높았다.

[편집] 생애

1835년 6월 2일 이탈리아의 리에세의 가난했지만 좋은 집안에서 출생하여 로마 가톨릭 교육을 받고 파도바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58년 9월 18일 신부로 서품되어 9년간 톰볼로에서 보좌 신부, 8년간 살차노에서 본당 신부를 맡은 후 트레비소 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와 교구의 상서국장을 지냈다. 1884년 만토바의 주교가 된 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교구를 활성화시켰고 1893년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설교 시간마다 근대주의를 비판하고 교황에게 복종할 것을 강조하였다.

1903년 교황 레오 13세가 선종하고 난 후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20세기 첫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0세로 명명하였다. 비오 10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비(非)정치적이고 내면적이며 경건하고 종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결코 능수능란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1904년 프랑스대통령이 이탈리아 왕궁을 방문해 교황청에 적대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이후로 대통령과의 접견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비외교적인 교황은 로마 가톨릭에 필수적인 폐쇄성을 부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은 세계 정치에서 새로운 역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오 10세는 로마 가톨릭의 진리와 법을 가르치고, 특히 이를 바탕으로 현대의 새로운 학문의 공격에 대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사회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였다.

근대주의는 비오 10세가 대항할 큰 관심거리였다. 비오 10세는 근대주의를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당시에는 철학, 신학, 성서 주석에도 근대주의 사고가 침투해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 발행된 간행문에도 그 흔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경멸하는 듯한 모더니즘이라는 낙인을 찍어가며 비오 10세는 검사성성을 통하여 교령을 발표하여 방대한 규모로 근대주의를 단죄하였고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신앙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였다. 1907년 발표된 새로운 《근대주의의 오류에 관란 교서요목》과 반근대주의적인 회칙, 그리고 1910년에 발표되어 모든 성직자들에게 강요되었던 장문의 교서 등은 모든 근대주의자들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문서들이었다. 그리하여 지성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프랑스, 독일, 아메리카, 이탈리아 등지에서 금서 목록, 파문, 면직 등 여러 가지 제재 조치가 취해져 사방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특히 독일이 가장 심했으나 비오 10세는 끝까지 근대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며 거의 독재자처럼 가혹하게 밀어붙였다.

더불어 진화론은 현대주의의 한 오류이며, 물질주의(유물론)와 범신론과 무신론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진화론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모든 동물적인 욕구를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로 정당화한다고 보았다. 그럼으로써 진화론에 기초한 프로이트의 성이론의 영향으로 현대 서구사회가 점차 성이 문란하고 상품화되고 성범죄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중세 종교재판 때나 있었던 교회 내부의 이단자 고발제도가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오 10세는 로마 문제와 연관을 지어 교황청의 세속권을 주장하였다. 특히 로마 시장 에르네스토 나탄의 반(反)교권주의적 행위에 대해서는 맹렬히 반대하였다. 비오 10세는 모든 민주적이고 의회적인 경향을 배척하고 전국의 주교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신도들이 이탈리아의 투표에 참여하지 않게 하였다. 또한 세속의 다른 국가들이 교황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교황제도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고히 했다.

이러한 순수한 반(反)근대주의자인 교황의 치세동안 성직자와 수도회가 늘었고, 해외에서도 선교활동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재임기간 말기에는 1만 2천명의 선교사와 2만 명의 수녀가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남아메리카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19세기에 일했던 사람들보다 나은 교육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은 유럽 중심의 조직에서 전세계적인 조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유럽의 열강 세력이 후퇴했음에도 교회만은 여전히 건제하였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분명하다. 에스파냐포르투갈의 식민지 점령이 종결된 후 100년이 지나도록 에스파냐어 혹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로마 가톨릭 조직은 그곳에서 비할 수 없이 강력한 문화적·정치적 권력을 행사한다.

1954년 5월 29일에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전 임
레오 13세
제257대 교황
1903년 8월 4일 - 1914년 8월 20일
후 임
베네딕토 1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