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척식주식회사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줄여서 동척은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떠 1908년 대일본제국이 일본 농민들의 조선 이민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국책회사이다. 토지조사사업에 참가해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가는 지주가 되었다.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수탈에 앞장서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한국에 17개 지점을 두었다.
소작민들에 대한 수탈은 대규모 해외 이주를 불렀다. 1933년까지 일본으로 113만 5852명, 만주와 연해주로 150만여명이 이주한 것으로 집계된다. 조선에서도 소작민들의 동척에 대한 분노가 쌓여 1922년 황해도 재령군의 동척 소유인 북률농장에서 이몽서를 주동으로 한 첫 번째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흉작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동이나자 소작료 감면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는데, 동척에서 이를 거부하고 농민에게 엽총을 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소작농민들의 요구가 계속되자 동척은 소작권을 빼앗고 일본 이주농민에게 땅을 분배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농민들이 더욱 격렬히 투쟁해 일시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납 소작료 문제가 다시 불거져 교섭은 결렬되었고, 엽총을 쏘며 강제집행에 들어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지배하기위해 설립해졌다. 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근대역사관에 가면 자세히 알려준다.
한국인 간부로는 부총재 민영기(閔泳綺)와 이사 한상룡(韓相龍)이 있었다.[1]
1926년 나석주 의사는 동척 간부를 죽이고 동척에 폭탄을 던졌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꾼 것으로 이미 1945년 11월 12일부터 운영되고 있던 것에 새로운 이름만 붙인 것이었다.
- ^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146쪽.
![]() |
이 문서는 한국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