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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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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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1608년 ~ 1623년
왕 비 문성군 부인
황 후 {{{황후}}}
왕 후 {{{왕후}}}
부 군 {{{부군}}}
앞선 왕 선조
앞선 황제 {{{이전 황제}}}
다음 왕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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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5대 국왕

광해군(光海君, 1575년 - 1641년)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는 혼(琿).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편집] 생애

1575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당시 선조는 몸이 약했던 의인왕후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자 14명이나 되는 후궁들의 왕자들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선조는 자신이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살에 이르자 더이상 왕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선조는 광해군을 추천한 신하들을 유배보냈다. 그 후 거론되지 못하던 왕세자 책봉 문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분조해야 할 상황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여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린 후 승하하였다.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임금이 된 광해군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여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여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억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준공했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

광해군은 파주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파주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또 광해군은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을 시켜 그에 응하게 하였다가 명나라가 후금에 패하자 후금과 화의를 맺도록 하는 등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폈다.

그러나 광해군은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해 오던 임해군을 유배시켜 죽이고,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인 후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으며 능창군을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반란의 명분을 제공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6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2002년에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惠宗)"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로 추숭하였으나,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하기는 힘들다.

[편집] 가족 관계

  • 문성군부인 유씨
    • 질(폐세자)

[편집]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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