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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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うえすぎ けんしん, 1530년 음력 1월 21일 (2월 18일) - 1578년 음력 3월 13일 (4월 19일))

우에스기 겐신은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에치고의 센고쿠다이묘이다.

  • 출가전 이름은 나가오 가게토라, 우에스기 마사토라, 우에스기 데루토라. 아명은 도라치요이다.
  • 관위는 종사위하, 단정소필.
  • 에치고국의 슈고다이(슈고의 아래 직책)를 역임한 나가오씨 태생이다. 형은 하루카게의 양자로 해서 나가오씨의 가독을 승계받고,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우에스기성과 관동관령직을 양도 받는다. 그리고, 주변의 다케다 겐신, 호죠 우지야스, 오다 노부나가들가 전쟁을 벌인다.
  • 다케다 신겐과는 전국최상의 상벽을 이루고, 스스로를 비사문천의 전생이라 믿으며, 에치고의 호랑이 또는 에치고의 용이라고 불리었다. 무로마치막부의 최후의 관동관령이었다.
  • 그 예사롭지 않는 카리스마는 전국무장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수 있는 지휘통속력과, 전격적과 동시에 정확무쌍한 군전략 때문에 군신이라는 이명도 있다.
  • 메이지 시대(1868~1912)에는 종2위(從二位)로 추대되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가독상속

1530년 1월21일 에치고슈고다이[越後守護代] 나가오 다메카게[長尾為景]의 차남으로 가스가야마성[春日山城]에서 태어났다. 1536년 아버지 다메카게가 병사하고 가독은 형 나가오 하루카게[長尾晴景]가 이어받는다. 그리고 겐신은 성아래 린센지[林泉寺]에 입문하고 주지 덴시쓰 고이쿠[天室光育]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1543년 8월 15일에 성인식을 하고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라고 개명한고, 나카 에치고[中越後]의 나가오가의 영지 통치를 위해 도치오성[栃尾城]으로 들어간다. 당시 에치고에는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定実]가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를 양자로 들이는 일로 인해 내란이 일어났다. 가게토라는 성인식을 한 그해 병약한 형 하루카게를 보살피면서 반란이 일어난 에치고의 호족을 토벌하는 일로 그의 첫 출전을 장식한다. 1546년에는 구로타키성주[黒滝城主] 구로다 히데타다[黒田秀忠]가 나가오씨에 대한 모반을 일으키면서 가게토라는 형을 대신한 우에스기 사다자네부터 토벌명을 받고, 총대장으로서 구로다씨를 멸문한다. 1548년 사다자네의 조정을 바탕으로 하루카게는 가게토라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양도한 후 은거한다. 가게토라는 나가오씨의 본거지로 있는 가스가야마성에 입성하고 19세에 에치고슈고다이가 된다. 2년후 1550년에는 사다자네가 아이없이 죽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는 가게토라의 에치고 다이묘의 직위를 인정한다.

[편집]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관동관령보임 (川中島の戦いと関東管領補任)

1550년 같은 일족의 사카토성주[坂戸城主]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가 가게토라의 가독상속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가게토라는 다음해 1551년 이를 진압한다, 그 즈음에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의 공격을 받는 고우즈게히라이성[上野平井城]에 근거를 둔 관동관령[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에치고에 구원을 요청한다. 가게토라는 즉시 출병해 호죠군을 격파한다. 노리마사를 히라이성으로 돌려 보낸다. 에치고의 이웃국인 고우즈게로 힘을 뻣친 호죠씨는 에치고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551년 1월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에치고에 맞아들인다. 8월 종오위하 단정소필[従五位下弾正少弼]에 취임한다. 1553년 9월 상경해 고나라 천황[後奈良天皇]과 무로마치막부 제13대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한다. 같은 해, 가이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당시는 하루노부[晴信])의 시나노[信濃] 침공에 의한 영지를 뺏긴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 다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頼] (가게토라의 숙부)들의 시나노국 영주의 영지복권를 위해 가게토라의 밑으로 도망친다. 8월에는 그것에 호응해 시나노로 출병,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 신겐과 대치한다.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4년 가신 기타죠 다카히로[北条高広]가 다케다 신겐을 통해 모반을 일으키지만, 1555년에 직접 출진해 이를 진압한다. 4월 신겐과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시 대치하지만, 아무른 진척없이 5개월동안 대치한다. 결국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중개로 화친하고 철퇴한다.(제2차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런데, 돌연 1556년 6월 출가를 선언하고 고야산[高野山](일설에는 히에이산[比叡山])으로 향한다. 아마 다케다 신겐과의 전쟁과 가신으로 있는 나가오 마사카게, 기타죠 다카히로, 오쿠마 도모히데[長尾政景、北条高広、大熊朝秀]의 반란으로 심신이 피로 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덴시쓰 고이쿠, 나가오 마사카게의 설득으로 출가를 단념한다. 1557년 4월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다케다군과는 서로 대치 상태로 끝난다. 더욱이 엣추[越中]에서 잇코잇키[一向一揆]이 일어났기 때문에 철퇴하는 것외 다른 방도가 없었다. 1559년 4월 재차 상경해서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과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배알한다. 그 때, 요시테루로부터 관령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다.(우에스기의 칠면허[上杉の七免許]). 이 즈음에 요시테루는 가신 오다치 하루미쓰[大舘晴光]를 파견해 나가오 가게토라, 다케다 신겐, 호죠 우지야스 이 세사람이 화친해서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세력을 몰아 내주기를 바랬지만, 세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깊어 실현되지 못 했다.

1560년 3월, 엣추로 출진해 시이나 야스타네[椎名康胤]를 돕는다. 5월, 관동으로 출진해 마야바시성[厩橋城]에서 한해를 보낸다. 1561년 3월,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거느린 10만 대군으로 오다하라성[小田原城]을 포위한다. 그러나, 함락할수 없어, 1개월후에 가마쿠라[鎌倉]로 퇴거한다. 그 때 노리마사의 요청으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에 있는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山内上杉氏]의 가독과 관동관령직을 상속받아, 이름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로 바꾼다.

귀국후 8월, 만삼천의 병력을 이끌고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한다. (제4차 가와나카지와 전투). 결국, 다케다군과 대결전을 치루고, 다케다군의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등을 전사 시켰지만, 우에스기군의 사상자도 막대해 상처뿐인 전투라고 할수 있겠다.

11월, 다시 관동으로 나가 신겐, 우지야스와 겨룬다. 그러나 가와나카지마에서의 피해로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고, 나리타 나가야스[成田長泰], 사노 마사쓰나[佐野昌綱]들이 차례차례 호죠쪽으로 항복하게 되고, 관동의 세력권은 히가시 고우즈게에 그친다. 12월, 쇼군 요리테루의 이름을 받아 데루토라[輝虎]라고 개명한다.

[편집] 다케다, 호죠와의 전투

다케다 신겐과 기타 시나노를 둘러싼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했지만, 결말이 나지않고, 결국 시나노의 북쪽 일부만 장악, 무라카미씨와 다카나시씨등의 옛 영지는 회복할수 없었다. 1564년에도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시 대치한다. 그러나, 60일간 대치끝에 철퇴한다.

1568년 엣추의 잇코잇키와 시이나 야스타네가 다케다 신겐과 내통하고 있는 엣추를 제압하기 위해 마쓰쿠라성[松倉城], 모리야마성[守山城]을 공격했지만, 5월 신겐과 내통한 중신 혼죠 시게나가[本庄繁長]의 모반 때문에 에치고로 돌아간다. 11월, 시게나가의 모반을 진압, 12월, 다케다과 단교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가 구원을 요청한다. 12월에는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의 중개로 혼죠 시게나가의 적자 혼죠 아키나가[本庄顕長]를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해서 시게나가의 귀국을 허락한다.

1569년 3월, 다케다 신겐을 견제하기위해 데루토라는 호죠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월상동맹[越相同盟]). 1570년 우지야스의 7번째 아들로 있는 호죠 우지히데[北条氏秀]를 양자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우지히데가 맘에 들어 자신의 이름이었던 가게토라라는 주는가 한편, 일족으로써 후대했다고 한다. 12월에는 법명을 겐신[謙信]으로 정한다.

[편집] 엣추, 관동출병

1571년 호죠 우지야스가 죽고, 대를 이은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는 우에스기와의 동맹을 파기, 다케다 신겐과 다시 화친했기 때문에, 양 군대는 도네가와[利根川]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8월, 북국[北国](엣추, 가가, 노토, 에치젠, 와카사, 현재의 이시카와현, 도야마현, 후쿠이현)으로 공격 방향을 돌려 엣추의 잇코잇키세력으로부터 도야마성[富山城]을 빼앗는다. 11월, 신겐과 교전상황에 들어간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맹제의를 받는다. 그후 엣추로 출진하지만, 신겐과 내통 반란을 일으킨 잇코잇키에 괴로워하며, 연말까지 잇코잇키와 싸움끝에 그들을 제압한다.

1573년 숙적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다케다씨의 위협이 수그러들자 엣추의 과반을 제압한다. 같은 해 호죠 우지마사가 고우즈케를 침공하자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1574년 관동으로 출진 가나야마성[金山城], 키사이성[騎西城], 하뉴성[羽生城]등 관동의 여러성을 차례차례 공략한다. 연말에는 삭발을 하고 호인다이오쇼[法印大和尚]를 맡는다. 1575년 1월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게 단정소필을 양도한다.

[편집]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

1576년 2월, 노부나가와의 전투로 곤경에 처한 혼간지[本願寺]의 겐료[顕如]와 강화를 맺는다. 이 때,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와도 화친을 하고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파기, 새롭게 겐신을 맹주로하는 반 노부나가포위망이 구축된다.

1576년 9월, 엣추를 공격 진보 우지하루[神保氏張]지배하의 도야마성, 모리야마성을 접수한다. 다음엔 시이나 야스타네의 하수누마성[蓮沼城]을 함락하고 야스타네를 죽인다. 이렇게 해서 엣추를 평정한다. 11월, 노토[能登]로 진격 하타케야마씨[畠山氏]의 거성 나나오성[七尾城]을 포위한다(나나오성 전투). 그러나, 나나오성은 견고해서 공격하다 못해 해를 넘긴다. 1577년 호죠 우지마사가 에치고, 고우즈케를 침공했기 때문에, 가스가야마성으로 철퇴한다. 이 사이 하타케야마군에의해 우에스기군이 전년에 빼앗았던 노토의 여러성을 함락당하지만, 윤7월, 다시 노토를 공격하고, 나나오성을 포위한다. 이 때, 성내에서 전염병이 유행, 전쟁에 염증을 느낀 유사 쓰구미쓰[遊佐続光]가 겐신과 내통 반란을 일으킨다.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는 쵸 쓰구쓰라[長続連]을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나나오성은 함락되고, 노토도 완전히 우에스기의 지배하로 들어온다.

한편, 쵸 쓰구쓰라의 원군요청을 받은 오다씨는 시바다 가쓰이에[柴田勝家]의 선발대 3만, 노부나가가 이끄는 본대 만팔천이 가가[加賀]로 향한다. 겐신은 나나오성으로 오는 오다군을 쫓아 공격하기 위해 9월17일 스에모리성[末森城]을 함락하고, 9월18일에는 마쓰나미성[松波城]을 공격 함락한다. 9월23일,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군은 데토리가와[手取川]를 건널때 나나오성의 함락을 안다. 이에 당황한 가쓰이에는 철퇴명령을 내렸지만, 겐신은 강을 건너는데 허둥지둥대는 오다군을 추격 대승을 거둔다. (데토리가와 전투)

[편집] 말년

1577년 12월18일, 겐신은 가스가야마성으로 귀환하고, 12월23일에는 다음 원정을 위해 동원령을 발표한다. 1578년 3월15일에 원정을 개시할 예정인 것 같다. 그러나 예정일을 6일앞두고 3월9일, 원정 준비중 가스가야마성에서 쓰러져, 3월13일 급사한다. 향년 49세.

미완에 그친 원정에서는 상경해 오다 노부나가를 타도할려고 했는지, 관동을 다시 침공할려고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최근에는 관동침공설이 유력하다.)

[편집] 인물

  • 선천적으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서, 형으로부터 호명을 받아 성인식을 하자 나가오가가신들은 말할 것 없이 호족들의 마음도 휘어잡았다.
  • 겐신은 천재형인간으로 신속한 용병투입과 임기응변적 전술이 그의 생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다케다 신겐, 호죠 우지야스라는 당대 굴지의 무장과 전투를 계속하고, 한번도 패배가 없었던 능력은 높게 평가된다.
  • 전략가, 전술가로써뿐 아니라, 와카[和歌]에 능통하고, 명필이기도 했다. 고노에 다네이에[近衛稙家]로부터 와카의 비법을 전수받는 등, 황실쪽과의 교류도 싶은 문화인이었다. 특히 겐지모노카타리[源氏物語]를 비롯하여 연애물을 즐겨 읽었고, 상경했을 때에는 와카대회에서 참가해 뛰어난 가카[雅歌](렌카[恋歌], 남여간의 애정노래)를 낭독해, 참가자 전원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 나나오성 전투때, 겐신은 유명한 슈산야[十三夜]를 작시했다고 한다.
  • 비사문천[毘沙門天]의 열렬한 신자로, 자신의 기에도 비[毘]라는 문자를 사용했다. 이것은 비사문천을 닮기를 바라는 것으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 청년기까지는 소도슈[曹洞宗]의 고찰 린센지[林泉寺]에서 스승 덴시쓰 고이쿠로부터 선을 배우고, 상경때에는 린자이슈[臨済宗]의 고찰 다이토쿠지[大徳寺]에서 참선을 하고 [宗心]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만년에는 신곤슈[真言宗]쪽에 관심을 가져 고야산[高野山] 곤고부지[金剛峰寺]의 세인[清胤]으로부터 덴보칸죠[伝法潅頂](불법을 전수받는 의식)을 받는다. 그리고, 아쟈리겐다이소토[阿闍梨権大僧都]라는 직위를 받는다.
  • 일반적으로 [싸움에는 뛰어나고 내정에는 서툴다]는 인상이지만, 실제에는 영내의 물품의 유통관리를 정비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겐신이 사후, 가스가야마성에는 27,140량이 저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에스기군의 군자금은 통상교역에 의해서 얻었다고 한다. 라이 산요[頼山陽](에도시대 문장가)가 미담으로써 격찬했던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 이 에피소드도, 실제에는 군비조달의 필요성에 의해 가이상인에게 소금판매를 금지하지 않았던 것에 지나지않는다. 하지만, 에치고국 영주들의 이반에대해서는 자주 고민을 한 것 같다, 겐신도 신겐과 같이 영주들의 연합맹주라는 지위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 전쟁시에는 정보를 얻는 것을 중시하여, 노키자루[軒猿]이라는 닌자집단을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 육척(약180cm) 가까이되는 장부라고 말하는 유력설이 있지만, 외소하다는 기록도 문헌에 존재하고, 최근에는 유품의 갑옷의 크기로 미루어 오척이치(약 156cm)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남성의 평균신장(약159cm)보다 체격이 좋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편집] 일화

  • 스스로를 비사문천의 전생으로 믿는 겐신이지만, 올바른 길을 벗어난 행동도 했었다. 1559년 상경중 사카이[堺](현 오사카부근)에서 무례한 행동을 한 여관주인을 죽이고, 이에 항의하는 마을사람들을 쫓아버리고, 더욱이 마을을 불질렀다고 한다. 다른 것으로도 마야바시성의 성주의 가신 나가오 가네타다[長尾謙忠]를 아무런 대답없이 죽었다.(살해이유는 가네타다의 모반할 것같은 직감이었던 것 같다.) 그의 친척도 다수 살해되는등,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괴상한 성격의 일면을 나타내는 일화가 남아있다.
  • 비사문천의 전생으로 믿고 있는 나머지, 겐신은 자기행동에 대해서는 이유불문하고 정당화시키려는 것 같다. 그같은 이유로는 살인을 한 것은 사적인것이지만, 그는 후회나 반성을 하지않았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그것과 같이, 총탄이 두발에 스쳐도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믿고 두려움없이 싸우거나, 전투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글을 신사와 절에 봉납했다고 전해진다. 일종의 병적인 광기에 취한 일면을 가진 천재라 하겠다.
  • 1556년, 돌연 출가소동을 일으킨다. 직접적 원인은 불명확하지만, 끊이지 않는 가신들간의 정쟁과 이반으로 질리지 않나 생각되고, 한편으로는 인신장악을 위해 폭언을 했다고 한다. 혼란의 격화를 우려한 가신단은 겐신에게 [이후에는 감사 신을 따라 불충한 마음을 품치 않겠음[以後は謹んで臣従し二心を抱かず]]라고 적힌 글을 올려, 소동을 무마했다.
  • 1561년, 관동관령의 취임식에서는 오시성[忍城城] 성주 나리타 나가야스[成田長泰]의 무례에 격분해서 나가야스의 안면을 부채로 때렸다고 한다. 여러 무장들 앞에서 굴욕을 받은 나가야스는 즉각 병력을 이끌고 귀성했다. 원인은 여러 무장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는대 반해 나리타 나가야스만 말위에서 가볍게 인사를 했기때문이지만, 나리타씨는 후지하라씨[藤原氏](일본고대 귀족)의 뿌리를 두는 명가로 이것이 허락된 것이었다. 겐신은 이런 일을 몰랐다고 보여지지만, 이 사건에 의해서 관동의 여러 무장들이 겐신에 대한 반감이 급속 확산된다. 이후 관동진출에 장애가 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겐신은 격분하기 쉽고 신중치 않은 성격으로 보여진다.
  • 숙적 다케다 신겐의 죽음을 전해 듣고 식사중 겐신은 [아까운 사내가 죽었구나.]라고 수저를 놓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신겐이 죽은 지금이야 말로 다케다가를 공격할 호기]라고 공격을 권하는 가신의 의견을 [상을 당한 가쓰요리에게 그같은 일을 하는 것은 어른답지않다]라고 거절했다.
  • 신겐과의는 생애 인연이 깊지만, 그것으로 두사람간의 우정이 있다고는 할수 없다는 것이 현재로도 추측된다. 실제 겐신은 신겐을 쾌 증오한 것 같다. 신겐이 부친을 추방하고, 모략으로 적을 궁지로 몰고가는 것은 겐신의 입장에서의 말할 수 있는 도덕적 관점에서는 반하는 것이므로, 겐신은 신겐의 행동에 격노했다고 한다. 신겐과의 아무런 이익없이 수많은 전투도, 겐신이 순수하게 신겐을 증오해서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다.
  • 그의 부하는 겐신의 식사를 본것만으로 전쟁터로 가야되는지 말아야되는지를 알았다. 아마 그것은 보통 그다지 잘 먹지 않는 겐신이 전쟁을 하기 앞서 꽤 많은 양을 먹었다고 한다.
  • 미혼이다, 자식 둘 모도 양자(가게카쓰[景勝], 가게토라[景虎])이다. 미혼의 이유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남색설은 생각하기 어렵다. 전국무장의 남색은 일반적이었다해도 결혼해 자식을 가졌다. 겐신이 젊었을때 적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가신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헤어진후, 그녀는 출가할 때 자살했기 때문에 미혼을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 반음양설(중성)과 여자설도 존재한다.

[편집] 여성설

겐신은 살아 생전 여자 가까이 가본적이 없다. 이 때문에 체격이 좋은 여자라는 설이 있다.

  • 겐신의 사인으로는 일반적으로 뇌출혈이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갱년기장애에 의한 부인병의 일종인 [大虫]이라고 기록된 문헌이 몇 개 존재한다. 겐신이 가스가야마산성의 뒷간(변소)에서 쓰러졌다는 점, 쓰러진 시기가 3월9일이라는 점, 죽었던 때가 4일후인 13일이라는 점. 향년 49세라는 점도 납득할 수있다.
  • 전투중과 관계없이 매월 10일전후에 원인불명의 복통이 발생하고, 병사를 이끌고 방에서 두문불출한다. (매월 반드시는 아니지만, 빈번히 있었다.) 이 복통이 생리통인지도 모른다.
  • 요네자와번[米沢藩]에 설립된 우에스기 신사에는 겐신의 의류가 남아있지만, 그 옷은 진한 적색으로 현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남성의 것이라고는 생각할수 없는 것이다. 또, 겐신이 가부키[傾奇]를 했다고는 말할수도 없다.
  • 겐신이 쓴 서장등을 보면, 필체나 표현등이 여성적인 면이 너무 강해 남자로 생각할 수 없다.
  • 스페인의 곤잘레스라는 사람이 쓴 보고서에는 겐신을 가르켜 [가게카쓰의 백모]라고 기재되어 있다.
  • 당시, 백성들는 겐신에 관해서 [남자에 필적하는 무력무쌍]이라는 노래인 고제[瞽女](니가타를 중심으로 퍼진 샤미센을 끼는 맹인의 여성예능인)노래가 있다.
  • 각지의 하쿠산진자[白山神社]의 고신타이[御神体]는 남녀 한조이지만, 에치고의 하쿠산진자만 말을 탄 여성으로 있다. 더욱이 하쿠진자하쿠산토우[白山神社白山堂]에는 여신상이 있고, 비[毘]라는 기가 놓여있고, 가스가야마성쪽을 향하고 있다.
  • 당시, 여성성주는 드문 것이 아니다. (예를들어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 오쓰야노가타[おつやの方]등), 여성성주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서 무가제법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이전부터 도쿠가와가[徳川家]와 대립하고 있었고, 도자마다이묘[外様大名]로 입지가 약한 우에스기가는 대폭 토지가 몰수당했고,(실제 요네자와번 30만석으로 감봉당했다.) 이에 더하여 무가제법도에서 성주는 남자라는 공식에 따라 [겐신시기에서 가문이 단절되지 않겠나]하는 우려 때문에, 겐신이 여성이라는 증거를 처분하고, 무리하게 남성으로 만들 필요가 있지않았나라고 생각된다.
  • 우에스기 겐신의 초상화는 수염이 있는 남성이지만, 이것은 에도시대에 그려진것이다. 상기와 같이 겐신을 남성으로 할 필요가 있기때문에, 여태까지의 것은 처분하고 남성의 초상화를 그렸지 않았나 생각하면. 에도시대전까지 초상화가 없었던 점도 납득할 수있다.

[편집] 남성설

  • 린센지에 입문한 것, 린센지의 출가는 남성밖에 할 수 없다.
  •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고야산에 올라, 세인의 근원를 물어본 후 그의 제자가 된 점.

[편집] 사인

  • 일반적으로 애주가였고, 안주로는 우메보시[梅干]를 곁들여 먹었기 때문에 염분을 너무 많이 섭취, 고혈압이 원인인 뇌출혈로 죽었다고 한다.(눈이 오는날, 뒷간에서 쓰러졌다고 사료에 있기 때문에,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생각되는 이유이다.) 그 외에는 노부나가가 파견한 자객의 의한 피살설, [大虫]으로 죽었다는 설과, 술로인한 위암, 식도암이라는 설도 있다.

[편집] 평가

  • 군사에 관해서는 에치고의 용과 군신이라는 그를 찬양하는 통칭이있다.
  • 겐신과 그밖의 다른 다이묘와의 철포(조총), 활, 기마등의 군사편성를 비교하면 별차이가 없고, 전술적으로도 크게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우에스기군은 적과 적이 서로 부딪치거나, 직접적전투에서는 압도적 위력를 자랑한다. 그것은 겐신의 정확한 전술안목과 신출귀몰한 속공, 카리스마로 넘치는 지휘통솔력의 차이라 하겠다. 지휘관으로써 겐신의 재능은 비상하리 만큼 튀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정치명에 관해서는 결코 악정을 했다고 할수 없고, 면밀히 계획된 금광운영으로 많은 이익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싸움에는 뛰어나고 내정에는 서툴다]는 것은 명확히 오해이다. (보충해서, 겐신의 연공수입이 높을때 추정99만7000석, 다케다 신겐은 추정83만5000석으로 최전성기때는 100만석이 넘는다. 경제력은 양자모두 호각세를 이룬다.)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시대를 종언한 지도자지만, 전술적면에서는 겐신에 미치지 못한다. (실제, 오다군은 겐신에게 데토리가와 전투에서 완패했었다. 단 노부나가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 야전에서의 전광석화로 신(神)적인 지배를 하는데 비해, 공성전에서는 실패로 철퇴하는 일이 꽤 있다.(오다하라성[小田原城], 우수이성[臼井城], 가라사와야마성[唐沢山城]등), 겐신이 전국굴지의 전술가로 있더라도 전국최강이라고 까지 말할수 없다는 우에스기 겐신부정설도 있다.
  • 의(義)를 중시해서 겐신은 사리사욕으로 병사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전국다이묘로써는 있을 수 없는 금욕적인 것은 라이 산요가 격찬했고, 현재에도 겐신은 전국다이묘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이유이다. 한편 유명무실한 관동관령직을 계속 억매였다는 점부터 형식에 억매여있는 사대주의자, 혹은 대의명분을 방패로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과 관련, 자신을 비사문천의 전생이라고 믿는등, 자기애가 강하다고 할수 있겠다.
  • 겐신은 의리가 투텁고, 약속한 일에 대한 자세는 대단히 유명해서, 호죠 우지야스는 그에 관련해서 [신겐과 노부나가는 겉과 속이 항상 같지 않다, 부탁할만한 인물이 못된다. 겐신만은 보증을 선다면 백골이 되더라도 의리를 지키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속옷을 잘라서 젊은 장수의 부적으로 쓰고싶다.]라고 말했다 한다. 또 다케다 신겐은 죽음에 이르러 가쓰요리에게 [겐신은 의리가 깊은 장수로 사람이 부탁하면 결코 지나치는 일은 없다. 내가 죽은 후에 겐신을 의지해라.]라고 유언했다고 고요군칸[甲陽軍鑑]에 있다.
  • 관동관령직도 쇠퇴해버린 무로마치막부의 직위에 계속 억매여, 아무런 이익도 나오지 않는 관동출진을 하거나,(이것에 관해서는 최근 수년간 연구에서 겨울철에는 비교적 다뜻한 관동으로 남하해서, 약탈할 목적도 있다고 보여진다.) 생전에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 등로 본다면, 전략적인 평가는 결코 높지는 않다. 특히 후계자 결정이 되지 않았던 일로 인해 겐신 사후, 오타테노란[御館の乱]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에스기가로써 큰 손실이 되고,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겐신시대에 획득한 북국(가가, 노토, 엣추)의 대부분은 후에 시바다 가쓰이에에 의해 빼긴다.

[편집] 묘소, 영묘

  • 겐신의 유해는 갑옷을 입혀 항아리에 넣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 유해는 애시 당초 가스가야마성 아래의 린센지에 안치되었지만, 우에스기가의 전봉(영지가 바뀜)에 따라 아이즈와카마쓰성[若松城], 뒤이어 요네자와성[米沢城]내로 이장되었다. 더욱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후에는 요네자와번의 역대번주가 잠자고 있는 우에스기가 묘소(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山形県米沢市])로 이장했다. 이 외에 가스가야마 린센지(니가타현 죠에쓰시[新潟県上越市])와 고야산에도 묘가 있다. 1872년에 요네자와성 혼마루터에 우에스기진자[上杉神社]를 창건한다.
  • 에도시대에 가게카쓰의 가손이 번주로 있는 요네자와번에서는 겐신을 번의 시조해서 존경을 했고, 메이지유신후에는 요네자와성에 겐신의 제를 올리는 우에스기진자가 건립되고, 1908년 9월9일에는 종이위[従二位]로 추대된다.

[편집] 우에스기 25장

우에스기 겐신을 모셨던 무장들로, 특히 평가가 높은 25명을 선출되었던 것으로 1669년 막부에 제출된 [上杉将士書上]에 게재되어 있다.

  • 나가오 마사카게 [長尾政景]
  • 나가오 가게아키 [長尾景秋]
  • 우사미 사다미쓰 [宇佐美定滿]
  • 니이쓰 요시카도 [新津義門]
  • 가나쓰 요시(히사? 후사?) [金津義舊]
  • 기타죠 나가쿠니 [北条長国]
  • 이로베 나가자네 [色部長実]
  • 혼죠 요시히데 [本庄慶秀]
  • 혼죠 시게나가 [本庄繁長]
  • 아마카스 기요나가 [甘糟清長]
  • 스기하라 치카요리 [杉原親憲]
  • 사이토 도모노부 [斎藤朝信]
  • 야스다 노리야스 [安田順易]
  • 다카나시 요리카타 [高梨頼包]
  • 가키자키 가게이에 [柿崎景家]
  • 치자카 (기요카제?, 세이후?) [千坂清風]
  • 나오에 가게쓰나 [直江実綱]
  • 다케마타 도모쓰나 [竹股朝綱]
  • 이와이 (쓰네하야오?, 쓰네슌?) [岩井経駿]
  • 나카죠 후지스게 [中条藤資]
  • 산본지 다카나가 [山本寺孝長]
  • 요시에 사다나카 [吉江定仲]
  • 시다 (요시와케?) [志田義分]
  • 오쿠니 요리히사 [大国頼久]
  • 가지 하루쓰나 [加地春綱]


[편집] 우에스기 사천왕

  • 가키자키 가게이에 [柿崎景家]
  • 나오에 가게쓰나 [直江景綱]
  • 우사미 사다미쓰 [宇佐美定満]
  • 아마카스 가게모치 [甘粕景持]
전 임
우에스기 노리마사
관동관령
1556년 - 1578년
후 임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