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신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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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 / 다케다 하루노부
- (武田信玄 たけだ しんげん / 武田晴信 たけだ はるのぶ 1521년 12월 1일 ~ 1573년 5월 13일)
- 센고쿠 시대 무장겸 다이묘[大名]. 가이국 현 야마나시현 [甲斐国, 現 山梨県]의 슈고[守護]
- 법명은 신겐, 본명은 하루노부. 관위는 종사위하[從四位下]. 대선대부[大善大夫]
- 가이슈고[甲斐守護]를 대대로 역임한 가이겐씨다케다가[甲斐源氏武田家] 의 적자로서 태어났다.
- 이웃국인 시나노[信濃]를 침공,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川中島の戦い]를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 가이[甲斐],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니시 고우즈케[西上野], 도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와 미노[美濃]의 일부 영지로 했지만, 상경[上洛]도중에 미카와에서 발병해서 시나노에서 병사한다.
-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겐신과의 5번에 걸친 가와나카지마의 전투로 유명하다.
- 풍림화산의 군기를 사용.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리며, 그가 이끈 다케다군은 전국시대 최강이라고 평해진다. 다이쇼 시대[大正期](1912-1926)에는 종3위[從三位]에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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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가이슈고 (甲斐守護)
1521년 11월 3일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적자로서 가이국 요가이지산성[積翠寺城]에서 태어났다. 아명는 가쓰치요[勝千代]이다. 아버지는 가이겐씨[甲斐源氏]의 명문 다케다가의 제18대 도슈[当主] 다케다 노부토라로 가이를 통일한 전국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용장이다. 신겐이 태어난 1521년에 가이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명을 받은 구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가 이끄는 15,000명의 군에 공격을 받지만, 다케다군은 신겐의 탄생으로 사기가 올라 이마가와군을 격퇴시켰다고 전해진다. 1525년에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가 태어나자 아버지의 총애은 노부시게로 가고, 하루노부는 서서히 성격이 거칠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1536년에 이마가와 우지테루[今川氏輝]가 죽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대를 이어면서 이마가와씨와 화친하고, 요시모토의 알선으로 타로(신겐)는 산죠 긴요리[三条公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같은 해에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로부터 이름을 받아 하루노부로 개명한다. 첫 출진은 시나노의 운노구치성[海の口城]의 성주 히라가 젠신[平賀源心]을 공격한다.
1541년 하루노부 21살 때 슈쿠로[宿老]로 있는 자국내 유력한 영주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信方]와 아마리 도라야스[甘利虎泰]와 오부 도라마사[飯富虎昌]등으로부터 옹립되어 아버지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하고 다케다가 제19대 도슈로 가독을 상속한다. 노부토라 추방의 이유는 후세의 사료에는 악행때문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진위는 불명확하다. 노부토라는 각방면에서의 전쟁을 계속해서 자국내 영주 세력을 통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정책을 채택하는 하편, 안으로는 계속되는 전쟁과 가혹한 정책에 따라 부하들의 모반을 초래하게 된다. 하루노부의 가독상속, 그리고 아버지 노부토라의 추방으로 가이의 자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집] 시나노 평정
노부토라를 추방한 직후, 시나노의 스와우에하라성[諏訪上原城] 성주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와 하야시성[林城] 성주로 있는 시나노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가 가이에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이것을 격퇴한다. 그리고, 1542년 6월, 하루노부는 거꾸로 스와[諏訪]로 공격한다. 마침 스와씨 내부에서는 스와 요리시게와 다카토오 요리쓰구[高遠頼継]에 의한 스와종가를 둘러싼 정쟁이 일어 났기 때문에 하루노부는 이것에 개입, 다카토오 요리쓰구와 손을 잡고 스와 요리시게를 멸문시킨다. 그리고 스와를 평정한다. 계속해서 같은 해 10월, 스와령 분활문제로 다카토오 요리쓰구와 대립하고, 다카토오군을 고부치자와[小淵沢]에서 격파한다.
1543년 시나노 나가쿠보성[信濃長窪城] 성주 오이 사다타카[大井貞隆]를 공격해 자결로 몰았다. 1545년 4월, 우에이나[上伊奈]의 다카토오성[高遠城]을 공격해 다카토오 요리쓰구를, 계속해서 6월에는 후쿠요성[福与城] 성주 후지사와 요리치카[藤沢頼親]도 멸문한다.
1547년 시가성[志賀城]의 가사하라 기요시게[笠原清繁]를 공격한다. 그때 가사하라군에는 고우즈케[上野]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의 원군도 있었기에 고전하지만, 8월6일 오타이하라 전투[小田井原の戦い]에서 다케다군은 우에스기 가사하라연합군에 대승한다. 그런데 이때, 하루노부는 적병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3,000명의 적병을 전부 학살하고, 더욱이 여자아이를 인질 노예로 하는 등 과혹한 처분을 한다. 이 사건의 의해서 시나노국의 영주들은 하루노부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고, 시나노 평정을 크게 퇴보시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분국법으로 있는 신겐가법[甲州法度之次第(信玄家法)]을 정한다.
1548년 2월, 하루노부는 시나노북부에 세력을 자랑하는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와 우에다하라[上田原]에서 격돌(우에다하라 전투)[上田原の戦い]한다. 그러나 병력에서 우세로 있는 다케다군은 무라카미군에 패해 슈쿠로인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을 비롯 많은 장병을 잃는다. 하루노부 자신도 부상당해 고후[甲府]의 유무라온천[湯村温泉]에서 30일간 치료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4월 오가사하라 나가토키가 스와로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7월에 시오지리토우게 전투(가쓰쓰루토우게 전투)[塩尻峠の戦い(勝弦峠の戦い)]에서 오가사하라군에 대승한다.
1550년 7월, 하루노부는 오가사하라령을 공격한다. 이것에 대해 오가사하라 나가토키는 이미 저항할 힘이 없어 하야시성을 버리고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밑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해서 나카 시나노[中信濃]는 다케다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이 기세로 하루노부는 9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인 도이시성[砥石城]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후세에 도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고 전해지며, 다케다군은 대패를 경험하고, 요코타 다카토시[横田高松]와 오야마다 노부아리[小山田信有]를 비롯 1,000명 이상의 장병을 잃는다.
그러나 1551년 4월,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또는 사나다 유키마사[真田幸綱]의 책략으로 도이시성을 함락하자마자 다케다군은 순탄하게 우위에 서게 되고 1553년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쓰라오성[葛尾城]을 버리고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長尾景虎(上杉謙信)]의 밑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해서 히가시 시나노[東信濃]도 다케다가의 지배하에 있기 되고, 하루노부는 기타 시나노[北信濃]를 제외한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편집] 가와나카지마의 전투 (川中島の戦い)
1553년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요청을 받고 나가오 가게토라가 5,000명의 군을 이끌고 시나노 가와나카지마에 진출해 온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하루노부도 가게도라도 군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5월에 양군은 함께 철퇴한다.
8월, 가게토라의 지원을 받은 오이 오부히로[大井信広]가 모반을 일으키지만, 하루노부는 즉각 진압했다.
1554년 봄, 나가오 가게토라에 대항하기 위해, 하루노부는 장남 요시노부[義信]의 정실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맏이 한다. 또 자신의 딸은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장남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에 시집보낸다. 고호죠씨와도 동맹을 맺는다. 이마가와씨도 다케다가의 중개로해서 호죠씨와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3국동맹[甲相駿三国同盟]이다.
1555년 4월, 다케다군과 나가오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다.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전과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양국은 10월에 화친하고 철퇴한다. 하루노부는 나가오군이 에치고로 철퇴하자마자, 겸사겸사 가게토라를 통해서 반항하고 있는 기소 요시야스[木曽義康], 기소 요시마사[木曽義昌] 부자를 공격, 굴복시킨다.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진출한다.
1557년 나가오 가게토라가 가와나카지마로 진출해 옴에 따라, 재차 다케다군과 나가오군이 대치하기 시작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양군 모두 전과 없이. 더욱이 가게토라가 없는 사이에 가가[加賀], 엣츄[越中]에서 일향일발[一向一揆]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가오군은 철퇴한다.
1559년 5월 하루노부는 출가해서 신겐으로 개명한다.
1561년 9월10일, 다케다 신겐군 이만과 우에스기 마사토라(우에스기 겐신)군 만삼천이 4번째 가와나카지마에서 전투를 벌린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 전투는 지금까지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중 최대 규모의 전투로 된다. 양군 합쳐 6,000여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군은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 모로즈미 도라사다[諸角虎定],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사에구사 모리나오[三枝守直]의 유력무장을 다수 잃었다고 전해진다.
1564년에도 우에스기군과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지만, 충돌하는 일 없이 끝난다. (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편집] 이마가와, 호죠씨와의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후, 신겐은 공격방향을 고우즈케[上野]로 향하지만, 우에스기의 옛 신하로 있는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의 선전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나, 1561년 나리마사가 죽자 마자 다케다군은 대를 이은 나가노 나리모리[長野業盛]를 격렬하게 공격, 1566년 9월에는 미노와성[箕輪城]을 함락하고 고우즈케 서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1560년 5월, 다케다가의 맹우로 있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전사함에 따라, 이마가와가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렇기 때문에 신겐은 이마가와씨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駿河]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하지만, 요시모토의 딸의 남편으로 있는 적자 다게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飯富虎昌]가 격렬히 반대한다. 신겐은 1565년 오부 도라마사를 활복시키고, 1567년 10월에는 요시노부를 폐적시키고 자살로 몰고간다. (병사설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1568년 12월,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공동으로 스루가를 침공을 개시한다. 이마가와군도 저항했지만, 마쓰노산[松野山]에서 오기 기요타카[荻清誉]를, 삿타산[薩垂山]에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을 격파하고 슨부성[駿府城]으로 입성한다. 그러나, 이마가와씨와 친척관계로 있는 호죠 우지야스가 이마가와씨의 원군으로 온다. 더욱이 스루가 정복을 기획한 이에야스도 우지야스와 동맹을 맸고 신겐을 적대했기 때문에 호죠, 도쿠가와연합군과의 싸움의 불리함을 깨닫고, 1569년 요코야마성[横山城]에 아나야마 노부키미[穴山信君]를 남겨놓고, 4월 다케다군 본대는 일단 가이로 철퇴한다.
9월, 신겐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죠를 억누르기 위해 고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로 침공한다. 10월1일에는 오다하라성[小田原城]을 포위하지만, 4일후에 재빨리 포위를 풀었다. 호죠는 호죠 우지테루[北条氏照],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等]등을 다케다군의 가이에로의 퇴각로에 표진시키고, 오다하라부터는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를 출진시켜 양동작전하는 구상을 했지만, 10월8일 미마세토우게[三増峠]에 있는 다케다 신겐군과 우지테루 우지쿠니군이 격돌, 다케다군이 대승했다.(미마세토우게 전투)[三増峠の戦い]. 이렇게 호죠 우지야스를 억압한 후, 1570년 7월 재차 스루가를 침공, 완전히 평정한다.
[편집] 호죠씨와의 동맹 (甲相同盟)
1568년 9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봉한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上洛]를 달성했다. 그런데, 노부나가와 요시아키는 드디어 대립하고,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멸문하기 위해, 신겐에 노부나가 토벌 어내서를 발행한다. 신겐도 노부나가의 세력확대를 우려했기 때문에 1571년 2월 노부나가의 맹우로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도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를 침공한다. 신겐은 5월까지 오야마성[小山城], 아스케성[足助城], 다미네성[田峯城], 노다성[野田城], 니렌기성[二連木城]을 접수한 후에 가이로 귀환한다. 1571년 10월 3일, 호죠 우지야스가 오다하라에서 죽고, 대를 이어 적자 우지마사는 "다시 다케다와 화친해라" 라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동생 호죠 우지타다[北条氏忠], 호죠 우지노리[北条氏規]를 인질로서 가이로 보낸다. 그리고, 12월27일에는 신겐과 갑상동맹을 맺는다. 이 시기 다케다가의 영토는 가이[甲斐] 일국외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고우즈케[上野] 서부, 도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히다[飛騨], 엣추[越中]의 일부까지 약 120만석에 달한다.
[편집] 서상 (西上)
신겐은 노부나가와 1565년 히가시 미노[東美濃]의 영주 도오야마씨의 여자를 노부나가의 양녀로 해서 다케다 카쓰요리[武田勝頼]에 시집보내므로써 동맹이 맺어졌다. 그 양녀는 다케다 신겐의 적손을 출산한후 죽었지만, 계속해서 노부나가의 적자 노다 노부타다[織田信忠]와 신겐의 딸 마쓰히메[松姫]의 약혼으로 성립된다. 도쿠가와씨와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면서도 오다씨와 다케다씨는 계속 동맹관계에 있었다. 1572년 10월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의 호응해서 노부나가의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을 하기위해 고후[甲府]를 출발한다. (단, 신겐은 노부나가의 우호적 서찰을 계속 보내는 등, 더욱더 동맹관계를 계속유지 하는것과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 약 3만의 전군중, 3천을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에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 야마카타 마사카게[山県昌景]에게 5천을 주어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그리고, 스스로는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와 함께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아오구즈레토우게[青崩峠]로부터 도오토우미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것은 고호죠가의 원군 2천도 가세해 2만2천이었다.)
신겐이 이끄는 본대는 10월 13일 다다라이성[只来城], 아마카타성[天方城], 이치노미야성[一宮城], 이이다성[飯田城], 가쿠와성[各和城], 무카사성[向笠城]등 도쿠가와의 성들을 하루에 접수한다. 야마카타 마사카게군은 가키모토성[柿本城], 이다이라성[井平城]을 접수하고 신겐의 본대와 합류, 아키야마 노부토모군은 11월까지 히가시 미노의 요충으로 있는 이와무라성[岩村城]을 접수한다. 이에 대해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일향종[一向宗] 등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 3천의 원군을 보내는 정도에 그친다. 이에야스는 10월14일, 다케다군과 도오토우미의 히토코토자카[一言坂]에서 싸우지만, 병력차와 신겐의 교묘한 전술에 패한다. (히토코토자카 전투)[一言坂の戦い]. 12월19일에는 도오토우미의 요충으로 있는 후타마타성[二俣城]을 함락시킨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하마마쯔[浜松]에서 농성을 생각했지만, 다케다군의 움직임을 봐서 병사 만천을 이끌고 출진, 도오토우미의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12월22일 신겐과 일대 결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병력차와 함께 신겐의 전술앞에 대패를 경험하고, 도쿠가와군은 많은 장병을 잃고 패주한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이 때, 이에야스는 도주할 때 공포에 질려 말위에서 변을 봤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나, 여기에서 맹우 아자이 나가마사의 원군으로써 기타 오우미[北近江]에 진을 치고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철퇴를 알게 된다. 신겐은 격노하고, 요시카게에게 문서를 보낸다. (이노우 문서)[伊能文書]. 그러나 요시카게는 그 후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신겐은 군대의 움직임이 멈추어지게 되고 해를 넘기게 된다. 하지만, 다시 1573년 1월에 미카와를 침공하고 2월10일에는 노다성[野田城]을 접수한다. (노다성 전투)[野田城の戦い]
[편집] 말년
그러나 노다성을 접수한 직후부터 신겐의 지병이 악화하고, 다케다군의 진격은 돌연 멈춘다. 이 때문에 신겐은 나가시노성[長篠城]에서 요양하지만, 별진전이 없어 4월초순에는 결국 가이로 철퇴를 결의하게된다. 4월 12일, 가이로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국 고마바[駒場]에서 병사한다. 향년 53세, 묘소는 야마나시현 고슈시의 에린지[山梨県甲州市恵林寺]
[편집] 유언
신겐의 유언에 관해서는 신뢰할수 있는 동시대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세의 사서나 이야기등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질뿐이어서 정말 신겐의 유언인지 믿을수 없다.
가쓰요리에 대해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의지해라, 또 3년간 상을 비밀로 해라."라고 전해진다.
야마카타 마사카게에 대해서 "겐시로[源四郎], 내일은 세다[瀬田](비와호 남단)에 우리 다케다의 기를 세워라."라고 전해진다.
[편집] 정책
- 황무지 개간
다게다씨의 본거지로 있는 가이는 평야가 적고, 년공수입은 기대할수 없기 때문에 황무지 개간에 적극적으로 실시한다. 그때까지 하천의 범람으로 농지로 할 수 없었던 토지도 농경이 가능하도록 신겐쓰쓰미[信玄堤]라고 불리는 제방을 쌓고, 하천의 흐름을 바꾸어 개간했다.
- 금화의 제조
일본에 첫 금화인 고이시긴[碁石金]을 제조했다. 가이에는 풍부한 매장량의 금광이 존재하고, 포르투칼, 스페인인들의 왕래에 의해 굴삭기술과 정련수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막대한 양의 금을 산출하고, 이렇게 모은 금은 치수사업과 군사비로 충당했다. 또 오다 노부나가와 우에스기 겐신에 적대하는 세력에게 지원하는 등, 외교면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단, 고이시긴은 통상 유통에서 그다지 사용하지 않고, 또 금광의 채굴에 관해서도 다케다씨는 직접지배를 하지않았다. 금광채굴자라 불리는 기술자 집단에 소유권 명목으로 보상받았다.
[편집] 인물
[편집] 명언
"사람은 성, 사람은 돌담, 사람은 해자, 정은 우리편, 원수는 적이 된다."
- 성의 어떤곳만 견고하게 하면, 사람의 마음은 떠나버려서,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정은 사람을 결속시키고, 결과로써 나라를 번영게하지만, 원수를 많이 만들면 나라는 멸망한다.
이 말대로, 신겐은 그의 생애에 단 한번도 가이국내에 새로운 성을 만들지 않고, 해자 하나의 쓰쓰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에 살았다. 단, 배후에는 가까운 성인 세키수이지성[積翠寺城]이 있는 전형적인 전국무장의 거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이말은 후세의 창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능히 신겐의 이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릇 군의 승리를 5분 가지면 상이되고, 7분을 가지면 중이되고, 10분을 가지면 하가 된다. 그 이유는 5분은 격려를 낳고, 7분은 나태를 낳고, 10분은 교만을 낳기 때문이다. 또 전쟁에서 10분의 승리를 얻어 교만을 낳는다면 다음에는 반드시 패하게 된다. 모든 전쟁에 한하지 않고 세상속의 일에도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 승자에게 교만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신겐사후 연전연승을 한 가쓰요리가 나가시노에서 재기할수 없을정도로 된 것을 생각하면 실제 설득력이 있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고요군칸[甲陽軍鑑]의 각색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편집] 풍림화산
[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뒤부분 [難知如陰 動如雷震].
-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고요하기는 숲과 같다. 치고 앗을 때는 불같이 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한다. 숨을 때는 어둠 속에 잠긴 듯 하다가도, 움직일 때는 벼락치듯 적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한다.
손자에 기록된 말로, 종종 풍림화산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신겐은 그것을 군기로해서 싸웠다. 또, 그의 군기는 에린지[恵林寺]의 주지 가이센 죠키[快川紹喜]의 책으로 전해진다.
[편집] 그 외
- 신겐는 동성애자(?) 그 상대는 가스가 겐스케[春日源介]에게 바람핀 것을 규명하는 편지가 현존한다. 당시에는 남색은 일반적이었다고 전해짐에 따라 여색보다도 고상한 것이라고 인식되어졌다.(후에 가스가 겐스게는 가스가 도라쓰나[春日虎綱] >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로 개명한다.)
- 불교의 신앙은 독실했다. 그러나 신겐자신은 재가출가 하면서도 속세와의 관계를 끈지 못하는 등, 불교에 척을 지닌 행위를 했다. 단, 이것은 신겐뿐 아니라, 당시 다수의 무사들도 재가출가후에도 출가 이전과 대부분 같은 생활을 보냈다. 당시의 유력 사찰이나 신사의 존경받는 그들도 직위를 이용 여자에게 손을 대는 일이 많았다. 또, 속세에 관한 무장투쟁도 그치지 않았다. 신겐은 이런 종교세력의 일원 혹은 협력자로 말할 수 있는 관계로 있고, 이것은 불교를 통해 종교세력과 결탁 잇기를 조정하고, 이로 인해 다른 다이묘의 견제와 전력의 분산을 꾀했다, 그리고, 신겐은 히에이산[比叡山]의 승려로부터 다이소죠이[大僧正位]의 직위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겐은 자신의 지위향상에도 이를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또 혼간지의 겐료[顕如]의 부인 뇨슌니[如春尼]와 신겐의 정실 산죠노카타[三条の方]는 친자매관계이다. 이 같은 일과 가신들도 출가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때 신겐개인뿐만 아니라 다케다가는 종교세력과 관계가 깊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쓰쓰지가사키야카타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쓰쓰지가사키야카타의 안쪽으로부터 흐르는 물을 이용한 구조로 신겐은 여기를 산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용변외에 서재등으로도 사용했다. 가신이 "왜, 뒷간을 산이라 부릅니까?" 이에, 신겐은 "산에는 항상 초목(냄새)이 끊이지 않으니까."라고 기지 넘치게 대답했다고 한다.
- 고요군칸에 의하면, 노부나가로부터 평상복[小袖]를 선물받았을 때에는 신겐은 이것이 들어있던 옻칠된 상자를 살펴보면서, 이 옻칠은 몇 번이나 칠해져 있는지를 보고 "이는 오다가의 성의를 나타낸 것이니, 다케다가에 대한 마음이 진실이구나."라고 말했던 일로 부터, 노부나가의 진의를 특히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고 보여진다.
[편집] 일화
- 신겐은 꽤 오래전부터 병을 알았다고 보여진다. 신겐은 첫 상경을 개시한 날짜를 10월1일에서 10월3일까지 연기한 것은 신겐의 병이 일시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 신겐은 정보수집를 중시해서 미쓰모노[三ツ者]라고 불리는 비밀조직을 이용해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고요군칸에서는 미쓰모노외 素坡라는 표현도 있다.) 또 의지할 곳 없는 여자아이들을 모아 닌자술을 익혀, 밖으로는 아루키미코[歩き巫女]로써 전국에 배치 첩보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겐이 전쟁에 항상 승리를 계속했던 것은 항상 이같은 정보수집이 빨랐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이 때문에 신겐은 가이에 살면서 일본각지의 정보를 알고 있어서 마치 일본 안을 순시한 것 같은 인상을 풍겨 아시나가보즈[足長坊主]라는 이명도 있다.
- 상경때에 고요군칸에서는, 다음과 같이 신겐자신이 기술한 것 같은 기록도 있다.
엔슈,미카와,미노,오와리에서 출발해서 살아있는 동안 천하를 평정하고 수도에 기를 꽃는다. 그래서, 불법, 왕법, 신도, 여러무사의 작법를 정하고, 정치를 옳게 집해하는 것이 신겐의 바람이다.
[편집] 사인
지병은 폐결핵, 폐렴 혹은 위암 혹은 식도암에 의한 병사설이 유력하다. 도쿠가와군의 총탄에 의한 상처가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 것은 다케다군이 미카와국 노다성을 포위중 신겐이 성으로부터 들리는 피리소리에 취에 있을때 저격해서 부상을 입혔다는 것이다. 이 설은 마쓰다이라키[松平記]등 도쿠가와측 사료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 신겐을 도쿠가와 일족에서 전사시키고 싶어 창작하지 않았나라고 생각된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흡혈충의 기생에 의한 체력저하라는 설도 있다.
[편집] 수중묘 전설
다케다 신겐이 죽을때 [자신의 죽음을 3년간 비밀로 해라, 유해는 갑옷을 입혀 스와호[諏訪湖]에 수장해라.]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널리 확산되어 있고, 고요군칸에도 같은 기술이 있다. 이 때문에 스와호에 오래전부터 신겐의 수중묘전설이 있다. 1986년, 국토지리원의 해상자위대에 의해 해저지형조사에서 호수바닥 한쪽면에 25m정도의 마름모꼴형태의 물체가 발견되었다. 그것이 신겐의 수중묘가 아닐까 보여지고, 신슈대학[信州大学],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니혼텔레비[日本テレビ]등 복수단체가 10수년에 거쳐 조사를 했다. 전자파심지기에의해 묘라고 보여지는 물체가 확인되었다고 보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수수께끼의 마름모형태는 호수바닥의 움푹패인 땅의 그림자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문제의 마름모형태가 자연상태에서 만들어졌다는 볼수 없는 정도이고, 호수바닥의 진흙이 시야를 가려 현지조사가 곤란해서,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수중묘의 전설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현재에도 많다.
[편집] 아버지 추방에 관해서
최근, 신겐은 노신의 꼭두각시로 아버지추방은 가이국의 유력영주들의 쿠테타라는 설이 있다. 이 이유는 신겐이 16세에 처음 출진했다는 날은 고하쿠사이키[高白斎記]에 이마가와가의 가독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학회의 견해에 따르면 20세 처음 출진했다는 의견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국다이묘로써는 너무 늦은 시기라, 이와 같은 설이 나온 것 같다.
[편집] 계보
세이와겐씨[清和源氏]의 중 가와치겐씨[河内源氏]계의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시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郎義光])를 조상로 해서, 대대로 가이슈고를 역입한 가이겐씨[甲斐源氏]라고 불린다. 신겐의 이 다케다씨의 제19대 도슈이다. 다케다가는 겐페이시대[源平時代]에는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와 함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토벌의 명령을 받는 등, 예부터 무용이 출중한 집안이다.
신겐의 처는 사다이진[左大臣]으로 있는 산죠 긴요리[三条公頼]의 딸 산죠노 가타[三条の方]외,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의 딸 등, 다수의 부인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사료적으로 확실한 것은 산죠노 가타, 스와 고료우닌[諏訪御料人], 네쓰 고료우닌[禰津御寮人], 아부라가와 부닌[油川夫人], 이 네명이다. 현재로는 신겐의 처는 이 네명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 다케다가의 족보로는 사에구사케[三枝家]가 유명하다.
[편집] 다게다군 24장
다케다 신겐을 모신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평가 높은 24명의 무장을 가르켜 다케다24장이라고 말한다. 원전은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그림에서 있을뿐, 정식으로 다케다가의 24장이라고 구분짓는 호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된 장수들도 활약한 시대가 다르며, 전원이 동시대에 신겐을 모신일은 없다. 서민의 평가에의해 결정된것 같다. 자료에 따라 얼굴형태가 다를수 있지만, 일반적인 24장수는 이하의 장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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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다케다 오명신
다케다가의 아시가루대장을 가르킨다. (아시가루: 잡병으로 졸병을 가르킨다. 아시가루란 말은 발노림을 가볍게해 질주 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 오바타 토라모리 [小幡虎盛]
- 하라 도라타네 [原虎胤]
- 다다 미쓰요리 [多田満頼]
- 오코타 다카토시 [横田高松]
- 야마모토 간스케 [山本勘助]
[편집] 다케다 사천왕 혹은 사명신
대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를 지지했던 4명의 무장을 가르킨다.
- 바바 노부하루 [馬場信春]
- 나이토 마사토요 [内藤昌豊]
- 야마카타 마사카게 [山県昌景]
- 고사카 마사노부 [高坂昌信(春日虎綱)]
다케다 노부토라, 다케다 신겐 때
- 이타가키 노부카타 [板垣信方]
- 아마리 도라야스 [甘利虎泰]
- 오부 도라마사 [飯富虎昌]
- 오야마다 마사토키 [小山田昌辰]
전 임 다케다 노부토라 |
가이다케다가 역대도슈 1541년 - 1573년 |
후 임 다케다 가쓰요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