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탁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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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탁 연합군(反董卓 聯合軍)은 후한의 조정을 장악한 권신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결성된 군대이다. 대략 군세가 20만 명이었다. 190년에 결성되어 191년에 와해되었다.

목차

[편집] 결성 개요

동탁 수하의 효기교위였던 조조(曹操)는 사도 왕윤에게 칠성검을 받아 동탁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진류로 가 병사를 모집하였다. 조조는 거짓 조서를 써서 각 주에 돌리고 그 조서를 받은 제후들은 모두 병사들을 데리고 조조가 있는 진류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17명의 제후들이 발해 태수 원소를 맹주에 앉히고 장사 태수 손견을 선봉으로 삼아 사수관으로 보내니, 이 때가 초평 원년(190년)이었다.

[편집] 사수관과 호뢰관

사수관 전투에서 동탁의 장수 화웅과 대치하던 손견은 맹주 원소의 아우인 원술과 군량 때문에 사이가 나빠졌고 그것을 알아챈 화웅이 기습공격하여, 손견은 대패하였다. 원소는 군사를 이끌고 사수관으로 나아갔으나 화웅이 잘 막아내어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대치하던 중 북평 태수 공손찬 휘하의 마궁수인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어 동탁군의 기세를 꺾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사수관을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동탁은 여포와 이유 등에게 군사 15만을 이끌고 낙양의 관문인 호뢰관(虎牢關)으로 출병하라 명하였다. 이에 맞서 맹주 원소도 제후 8명에게 호뢰관으로 가 여포와 대치하라 명하였다. 여포가 싸움을 걸자 방열, 목순이 나갔으나 여포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무안국도 여포에게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것을 본 공손찬 휘하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거의 100합을 겨루었고 여포는 호뢰관으로 퇴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호뢰관 전투이다.

[편집] 분열과 해산

동탁의 모사 이유는 동탁에게 수도를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것을 수용한 동탁은 황제인 헌제와 낙양의 백성 수십만을 데리고 갔다. 또한 황릉의 보몰을 파헤쳐 가져가고 낙양성에 불을 질렀다. 뒤늦게 도착한 연합군은 낙양성의 불을 끄고 낙양의 치안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조조는 원소에게 동탁의 뒤를 쫓자 했으나, 원소가 거부하자 조조가 독단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동탁을 추격하였다.

한편, 낙양에 들어온 손견도 불을 끄라 명령했다. 그 때, 부하가 낙양의 궁전 전각인 '건장전'(建章殿)옆 우물에서 수상한 빛이 난다 보고하였고 달려간 손견이 우물에서 뭔가를 끌어올리더니 궁녀의 시체가 나왔고 빛은 그 궁녀의 목에 걸려 있던 주머니에서 났다. 손견이 풀어보니 그것은 바로 옥새 중 최고의 옥새인 '전국옥새'(傳國玉璽)였다. 손견은 옥새를 감추고 군사들에게 단속을 시켰으나 그 광경을 본 한 병사가 원소에게 밀고하였다.

다음날, 손견은 몸이 좋지 않다 하여 강동으로 내려가겠다 했으나 손견에게 옥새가 있는 것을 안 원소가 저지하였다. 손견은 이를 무시하고 강동으로 내려갔고 원소는 형주 자사 유표에게 손견을 잡으라 명령하였다.

조조는 동탁을 뒤쫓았으나 이유의 계략에 빠져 패하였고 그렇게 처참하게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조조는 연합군에서 탈퇴, 진류로 돌아가버렸다. 조조와 손견의 탈퇴로 여러 제후들도 조금씩 탈퇴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해산되었다.

이렇게 반동탁 연합군의 해산은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의 시작이었다.

[편집] 연합군에 가담한 제후들

[편집] 삼국지연의에서 참가한 제후

  • 발해 태수 원소(袁紹) <맹주>
  • 조조(曹操)
  • 장사 태수 손견(孫堅)
  • 북평 태수 공손찬(公孫瓚)
    • 평원 현령 유비(劉備)
  • 남양 태수 원술(袁術)
  • 서량 태수 마등(馬騰)
  • 서주 자사 도겸(陶謙)
  • 북해 태수 공융(孔融)
  • 기주 자사 한복(韓馥)
  • 예주 자사 공주(孔伷)
  • 제북상 포신(鮑信)
  • 연주 자사 유대(劉岱)
  • 진류 태수 장막(張邈)
  • 하내 태수 왕광(王匡)
  • 동군 태수 교모(喬瑁)
  • 상당 태수 장양(張楊)
  • 광릉 태수 장초(張超)

[편집] 정사 삼국지에서 참가하지 않은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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