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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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1337년 ~ 1392년 음력 4월 4일)는 고려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삼은(三隱)의 한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편집] 출생
정몽주의 이름은 그의 부친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을 만나고 낳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즉, 그의 부친이 어느날 해가 질 무렵 독서를 하고 있는동안 무척 졸음이 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어느 한 위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중국의 주공인데 천제의 명에 딸라 너의 집에 태어나기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부부의 도를 정성껏 하여라!고 했다.
이 소리를 들은 그는 잠에서 깨어나 안방으로 들어가 아내와 함께 부부의 정을 나누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반대를 했다. 비천한 자라면 몰라도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가 낮에 그와 같은 짓을 할수 없다는것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남편은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잠시 있자 다시 주공이 나타나 그렇게 내가 간곡히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결행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천명에 의한 재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곳으로 가거나 밤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지금 돼지가 새끼를 배려고 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돼지의 배를 빌려야겠다 고 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던지고 급히 규방으로 달려가 아내가 앞서 자신의 요구를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귀한 자식을 얻지 못한다고 몹시 꾸짖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한 연유를 이야기하지 않고 부부의 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신분을 잊어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되었기에 응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꿈속에 나타난 그 위인이 어느쪽으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남편은 암퇘지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부인은 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가지고 돼지우리에 가서 암퇘지를 죽이고 자궁을 들어내어 그대로 마셔 버렸다. 그후 임신을 하여 태어난것이 정몽주였다고 한다.
[편집] 일생
정몽주는 1357년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이후 고려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다. 우왕 즉위 당시 (1375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으로서 “점점 강해지는 명을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과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상소하였다가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 드러눕자 기회를 노려 그 일파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이방원에게 저지당했다. 이어 이성계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그를 만나보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그 외 11개 서원에서도 제향되었다.
정몽주는 고려 말기 무신 세력의 몰락과 함께 세를 얻어가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지도자들 중 한명이었다.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고려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 말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나 고려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한 정몽주와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암살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형태로 탈바꿈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비록 실패했으나 정도전 등에 의해 그 뜻이 이어져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 조정을 탄생시켰다. 그의 학문은 새로운 사조로서 조선 초기 사림파에 영향을 미쳐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편집] 문집
- 《포은집》(圃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