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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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Karl Barth, 1886년 5월 10일-1968년 12월 10일)은 스위스개신교 신학자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신정통주의 신학자라고 불린다.

그림:Karl Barth.jpg
칼 바르트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자유주의 신학과의 만남과 결별

신학자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의 장남인 칼 바르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냈으며, 1904년 베른 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 칼 바르트는 교수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럽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를 배웠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목사로 목회하면서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사회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속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로부터는 '공산주의 목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죄를 미워하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로운 심판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 그리고 성서그리스도교인들이 경전으로써 따라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은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느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반박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칼 아담은 '칼 바르트가 신학자들이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유럽신학계의 충격은 컸는데, 칼 바르트 자신도 '나는 우연히 잡은 교회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게 한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편집] 나치반대운동

칼 바르트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그리스도교인들과 개신교 신학생들까지도 히틀러를 지지하자, 나치에 반대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즘운동이 히틀러를 구원자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요, 유대인, 집시등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대중강의와 설교를 통해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반 나치이념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은 20세기 교회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불리는 바르멘 선언이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그는 독재자 히틀러에 반대하는 진보적 신앙실천때문에 독일밖으로 영구추방당하여,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이직했다. 칼 바르트의 나치반대운동은 칼 바르트연구의 핵심으로 불릴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회퍼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었다.

[편집] 전후활동

전쟁이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난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1948년에는 공산국가가 된 헝가리를 방문, 헝가리개혁교회와 대화하였다. 또한 1948년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결성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만들어지는데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주요 활동은 저술활동으로 《교회교의학》을 저술했으며, 인생의 말년인 1961년부터 1962년사이에는 자신의 강의내용을 정리한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저술하였다. 이중 교회교의학은 1968년 바르트의 죽음으로 일부내용이 저술되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며,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출판하였다.

[편집] 참고문헌

  • 현대신학이야기/박만 지음/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