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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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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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반대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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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리암 린치† 프랭크 에이컨 |
마이클 콜린스† 리처드 멀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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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15,000명 | 55,000명 | ||
피해 상황 | |||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음. 77번의 공식 처형을 포함해 약 2000 - 3000명이 사망했을거라 추측 | 아일랜드 정규군 800명 사망,더블린 전투에서 250명 가량의 민간인 사망 |
아일랜드 내전(Irish Civil War)는 아일랜드 자유국을 건국시키고 아일랜드를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로 분단시키는 대신 영국 지배하의 아일랜드의 자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전쟁이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에 대항해 싸웠던 IRA대원의 약 70%가 조약을 반대했다. 이들은 영국과 아일랜드간의 공식적인 법적 관계를 완전히 끊고 완전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뤄내야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아일랜드의 6개 카운티가 자유국 영토에 속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에도 반대했다. 조약반대파는 또한 빈부격차 문제보다는 영국에 대한 민족의 독립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영국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민족적인 상공인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약지지세력은 조약을 미래에 있을 완전독립의 발판으로 삼아야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가난한 농민, 노동자를 대변하고 영국과는 타협적인 입장에 있었다.
전쟁은 결국 IRA의 궤멸로 끝이 났다. 이 내전은 아일랜드 사회를 분열시켰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후 IRA는 과격한 소수의 테러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여러가지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영국으로 남은 북아일랜드 지역의 아일랜드 인들 중에는 종교적으로 영국의 성공회 신도가 늘어났다.
내전의 절정은 더블린의 오코넬 거리에서 벌어진 더블린 전투였다.
[편집] 배경
[편집] 조약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쟁은 아일랜드의 독립주의자들과 영국정부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치루었다. 이 조약은 아일랜드의 32개 군 중에서 26개 주의 자치를 내용으로 한다. 아일랜드 자체의 군대와 경찰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많은 독립주의자들이 독립된 공화국을 바랬지만 이 조약에서의 '아일랜드 자유 주'는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고, 대영제국 군주를 주의 수장으로 하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형태였다. 또한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은 충성서약을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 법에 의해 세워진 아일랜드 자유 주의 의회에 충성할 것을 진정한 신의로써 엄숙히 맹세한다. 또한 나는 대영제국과 함께하는 공통의 시민권과 영연방 구성국들과의 유대를 위해, 법에 의해 국왕 조지5세 전하와 그 상속자와 계승자에게 충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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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UBLICANIS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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