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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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어: Regno di italia 레즈노 디 이탈리아)은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유럽에서 존재해 왔던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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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용어 | 이탈리아어 | ||||
당시 주요 민족 | 이탈리아인 | ||||
당시 수도 | 로마 |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 연합국으로 참전 |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 추축국으로 참전 | ||||
체제 | 국왕이 다스리는 군주제 | ||||
최후 국왕 | 움베르토 2세 | ||||
건국 년도 | 1861년, 통일 운동 | ||||
해체 | 1946년년 국민 투표로 해체. | ||||
國歌(국가) | Marcia Reale Italiana | ||||
통화 | 리라 | ||||
당시 종교 | 로마 가톨릭 |
목차 |
[편집] 역사
[편집] 건국에서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1861년, 사르데냐 왕국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먼트)로 인해 성립되어,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프랑스처럼 식민 계획에 나섰는데, 지배한 곳은 소말리아와 리비아, 에리트레아였다.
이탈리아 통일 후, 군대가 해체되어 많은 사람들이 실직 상태가 되어 실업난 가중 등으로 인해 국내가 불안정하였다. 그들은 크로코로 대표되는 비적이 되어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비적은 1861년의 크로코에 의한 메르피 침공에서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주로 지주로부터 재산을 약탈하는 활동을 하여 민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1862년 걸리버 루디에 의한 아스프로몬테의 변란을 기로 한 계엄령 선포나, 이어서 1863년 제정된 피카법에 의해 비적에 대한 압력이 높아졌다. 민중까지 피해를 입히게 된 비적은 점차 지지를 잃어가다가 1864년에 내통자가 정보를 실토하는 바람에, 단번에 진압되었다.
1865년, 수도를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천도하였다. 다음 해 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는 프로이센 측에서 참전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 중 트리엔트와 트리에스테를 제외한 베네치아를 병합하였다.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의해 교황령을 수호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함과 동시에 교황령을 점령하여, 다음 해 로마로 수도를 천도한다.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청의 지위를 보장하려고 하였지만 교황청측이 거부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국정에 참가하지 말 것을 호소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덧붙여 이 대립은 무솔리니 정권 시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영토 문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대립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 불이협상을 이유로 중립 선언을 하였다. 1915년에 런던 비밀 조약을 맺어, 달마티아의 할양을 조건으로 연합군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편집] 파시즘의 대두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으면서도, 이탈리아 왕국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토 확대 요구의 대부분이 거부되었다.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강화 회의의 패전국’이라는 비난이 높아졌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의 병합은 완수했지만, 전후의 민족자결주의의 기세가 높아짐에 따라 달마티아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정부의 저자세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의 경제에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되고 있었다. 전후 생긴 인플레는 빈민층의 불만을 일으켜, 북부의 토리노와 밀라노라고 하는 공업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등이 일어났다. 남부에서도 농사꾼, 소작인 등의 폭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물론 이러한 계급간의 갈등은 세계최초의 공산혁명인 러시아혁명의 영향이기도 했기 때문에, 유산 계급에게는 무산계급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불안한 정세하에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파시스트 전사를 조직했다. 그는 사회 정책의 충실한 이행을 주장으로 내걸면서 내셔널리즘을 옹호해, 기존 정당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완패당해, 무솔리니가 일시적으로 체포되는 등 그 활동은 당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쌍방에서 자본가와 지주, 노동자와 소작인 간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었으며, 빈민층을 옹호하는 사회당 정부에 불만을 품은 지주층은 파시스트 세력과 결탁하여 농촌부의 사회당과 노동 조합의 거점 등을 연달아 습격했다. 이것을 징벌원정이라고도 부른다.
당초에는, 농촌 지역의 각지에서 라스로 불리는 지역 지도자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무솔리니가 서서히 지방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파시스트 전사는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내어, 1921년까지는 당원을 10만 명 정도로까지 확대되어, 동년에 전국 파시스트당으로서 개편했다.
[편집] 세계 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승전 뒤에는 그로부터 영토를 얻었으나 실직자만 늘어갔다. 이 때 무솔리니가 로마 입성을 함으로써 등장했는데 왕의 권력은 사실상 추락되었다(사실 독립하기 전부터 총리의 권력은 막강했다).
이 때 나치 독일과 동맹하였으며, 일본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당시의 국제 연맹까지 탈퇴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는 패전국이 되었다. 1943년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다시 왕 노릇 할 수 있게 되었고 무솔리니는 체포, 처단되었다. 그러나 왕도 고령으로 퇴위, 황태자였던 움베르토 2세에게 넘겨주었으며 두 달 만에 공화정이 되었다.
[편집] 국기
이탈리아 왕국의 국기는 지금의 이탈리아 국기 중앙에 방패를 삽입한 것과, 방패와 왕관을 삽입한 것이 있었다. 삽입하지 않은 것은 민간용 국기로 사용하였다. 1946년에 공화정으로 바뀜에 따라 국기 중앙에 있던 방패와 왕관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