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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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4일 - 1951년 1월 5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목차

[편집] 갑신정변 이전

1864년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해 자식이 없던 7촌 당숙 서광하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13살에 다시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동생 김성근의 서울 집에 보내져 과거를 준비하였다. 이 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김옥균과 교유를 하게 되었다. 1882년 18세에 정식으로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관인을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17명의 평민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게이오 대학 전신인 게이오기주쿠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를 다녔다. 1884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여 조련국 사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민씨 세력의 반대로 사관학교 설립은 무산되었다.

[편집] 갑신정변과 서재필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정강을 발표하였다. 갑신정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청파 민씨정권은 갑신정변 주역들을 역적으로 몰았고, 서재필의 부모, 형제, 부인, 어린 아들은 왕조체제하에서 역적죄를 다스리던 법에 따라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1년 간 일본에 피신해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기자,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편집] 1차 미국 망명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연히 만난 John Wells Hollenbeck 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인 Harry Hillman Academy에서 공부하였다. 한국 이름을 거꾸로 써서 만든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고유한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홀렌벡이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서재필은 거절하였다. 이 후 워싱턴으로가서 생계유지를 위해 미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 의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직업을 얻었다. 1890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Columbian University(지금의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야간학부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892년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894년 그는 James Buchanan 전 대통령의 조카딸인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하였고, 이 후 두 명의 딸 Stephanie와 Muriel을 낳았다.

[편집] 독립신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정권이 몰락한 후 개혁내각이 들어서자 박영효의 권유로 1895년 12월 조선으로 귀환한다. 외무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받았으나 거절하고, 형식적으로만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는, 내부적으로 교육을 확대하고 산업을 발전시킬 것과,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칠 것을 강조하였다.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 나가 이승만, 주시경, 송진우 등의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가르쳤고,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이 일을 집행하기 위해 이완용을 비롯한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 조직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8년 러시아 및 일본의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조선 정부의 권유로 미국으로 돌아간다.

[편집] 2차 미국 망명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월터 리드 박사를 따라 전쟁터를 다니며 세균학 연구를 하였다. 1900년 대 초 고등학교 동창과 동업으로 문구 및 인쇄 사업을 시작하였고, 10년 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Philip Jaisohn & Co. 를 운영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150여명의 한인대표들이 참석한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열었다. 1920년 Floyd Tomkins 목사를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2개의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Korea Information Bureau 를 설립하고 Korea Review 를 발간하였다. 1921년 이승만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대표로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군축회의에 파견되었다. 조선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Korea's Appeal 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서재필의 활동을 지원하던 구미위원부의 지원금이 중단되자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해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았다. 파산으로 생계가 곤란해진 서재필은 1926년 62세의 나이에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의업을 재개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였다.

[편집] 해방 후

이승만을 견제할 만한 인물을 찾고 있던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몇 차례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 최고고문 겸 과도입법의회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귀국하였다. 하지 중장에게 자문을 하는 일 외에는 주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이 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홍명희가 이끌던 중도 노선의 민주독립당과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념 대립을 딛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1948년 9월 11일 미군정을 따라 인천항을 떠났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87세의 여생을 마쳤다.

[편집] 뒷 이야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94년 국립묘지로 이장

[편집] 참고 자료

임창영, 서재필 박사 전기, 공병우 글자판 연구소, 1987.

이정식, 구한말의 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 출판부, 2004.

1995년········1996년 선정, 이 달의 독립 운동가 ········1997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송종익 신채호 신석구 서재필 신익희 유일한 김하락 박상진 홍진 정인승 전명운 정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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