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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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영어: 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5일 - 1970년 4월 16일)는 세계적인 수의학자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으며, 그가 만든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은 오늘날 Schofield라는 이름을 쓰는 외국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출생과 성장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윅셔(Warwickshire) 주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났다.

1897년 아홉 살 때 여름, 아버지가 근무하는 클리프 대학(Cliffe College)의 한국 유학생 여병현(呂炳鉉) 씨를 처음 만나다. 이날 그는 처음으로 코리아(Korea)라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 관하여 알게 되다.

1905년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성적은 좋지 못하였고 집안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못한다. 그는 체셔 주(Cheshire)의 어느 농장에서 세 끼를 먹는 것으로 노동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의 앞날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곤궁한 생활을 목격하고 더욱 그들의 편에 서게 된다.

1907년 그는 결국 자유와 일할 자리, 그리고 공부할 곳을 찾아 캐나다로 이민하여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자 대학에 들어갈 만큼의 돈을 벌게 되었다. 가축을 다루면서 수의학(獸醫學)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는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910년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음에도 졸업할 때에는 전과목 A의 수석 우등생이 되었다.

1911년 논문 <토론토 시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토>로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13년 9월에 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와 결혼하다.

[편집] 한국 생활

1916년 봄에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 박사(O.R. Avison; 한국 이름 ‘어승신(魚丞信)’)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다. 스코필드 박사는 가을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어렸을 때 만난 여병현(呂炳鉉) 씨를 다시 만난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衛生學)을 담당했으며, 근무 계약은 4년이었다. 그는 영어를 하는 목원홍(睦源洪) 씨로부터 한국말을 배워 한국말로 강의하였다.

1917년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또한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다.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제를 넓혔다. 그중에서 특히 이상재(李商在) 선생, 김정혜(金貞蕙) 여사를 존경하였고, 뒷날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로 섬겼다.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李甲成) 씨와 몰래 만났으며, 민족적 거사를 위한 해외 정세파악의 공작(工作)을 맡게 된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제의 시위자에 대한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으며, 4월에는 수원에 가서 사진촬영을 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한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1920년 3·1운동 견문록 원고의 제목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라고 붙였다. 그해 4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사건이 그의 숙소에서 일어났다. 그달 근무 계약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인 돕기에 열심히 하였다.

1926년 한국에 일시 방문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스코필드를 초빙하였다.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일하기를 자원하여 수의병리학을 맡았다.

1959년 한국일보에 2·4정치파동에 관한 소견을 기고하였다. 집안일을 정리하려고 캐나다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9월에 돌아왔다. 남북미와 유럽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스코필드 기금(The Schofield Fund)”을 설치하여 그를 돕니다.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 장려 활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4월 16일 대한민국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영면하셨다.

[편집] 3·1 운동의 제34인

3·1 운동의 제34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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