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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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라틴어: Carthago, 페니키아어: Kart-Hadasht)는 현재 튀니지 일대에 위치해 있던 페니키아인 계열의 고대 도시로, 그 뜻은 페니키아어로 "신도시"를 의미한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와 패권 다툼을 벌였으며, 기원전 146년 제 3차 포에니전쟁에 패배하여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하여 북아프리카 일대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698년 다시 아랍인들에게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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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경제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그래서 3차 포에니 전쟁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주민들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를 거부했는데, 무역으로 번성한 카르타고에게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라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말이기 때문이다.결국 로마의 요구를 거부한 카르타고는 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카르타고 주민들은 이전의 통례와는 달리 군대의 전쟁수행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편집] 정부
카르타고의 정부형태는 로마의 것과 유사한 과두정이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의 원수는 "수펫", 즉 '법관'이라 불렸으며, 로마인들은 "레게스", 즉 왕이라고 불렀다. 수펫들은 군권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사법과 행정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매년 유력 가문중에서 선출되었다. 이 귀족가들은 로마의 원로원과 유사한 최고회의에 참석했다. 수펫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선출되었는지 최고회의에서 선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도서관장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모든 비그리스인을 야만적이라 매도한 것이 잘못되었다며, 카르타고와 로마인들이 모두 헌법을 가졌다고 기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르타고 헌법에 대한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내용의 일부만이 알려져 있다.
[편집] 종교
[편집] 역사
[편집] 건설
카르타고는 멜카트(Melqart) 신을 믿는 튀레로부터의 페네키아인 정착민들에 의해 기원전 814년 건설되었다. 카르타고의 설립자는 전통적으로 여왕 디도로 알려져 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 면해 있으면서 동시에 육지에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한 탓에 농업에 종사한 가문들과 상업에 종사한 가문들 사이의 오랜 갈등을 겪었다. 일반적으로 상업 중심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지중해 서부의 헤게모니를 확립시키기에 이른다. 기원전 6세기 초반, 항해자 한노가 아프리카 해안가까지 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시에라리온에까지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의 교역 중심지로 변모한다. 카르타고는 하드루메툼, 우티카, 케르코우아네 등 옛 페니키아 식민지의 영토와 리비아의 해안지대를 정복, 현재의 모로코부터 이집트의 해안지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지중해 내의 사르데냐, 몰타, 발레아르스 제도, 시칠리아 서편에까지 지배권을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