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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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吳東振, 1889년 ~ ?)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송암(松菴)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생이다. 그는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민족주의 사학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 운동때는 일신학교 설립자인 유여대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면서 의주 지역에서 서울과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이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령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만주에서 윤하진, 장덕진, 박태열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안병찬, 김찬성, 김승만 등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였고,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를 갖고 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 참리부와 사령부를 조직하면서 무장 테러를 통한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1920년에는 광복군 조직이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어 오동진은 총영장을 맡았다. 그해에 미국의 의원단이 시찰단으로 국내에 입국할 때에는 이들에게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안경신, 정인복, 임용일 등을 국내 각지에 파견하여 기관 파괴 테러를 기도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22년 경부터는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 운동 단체들의 단체 통합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양기탁의 통합 제안에 찬성하여 연합 독립 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과 사령장을 맡았고, 1925년 통의부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 단체들이 연합 결성한 정의부에서 의용군 사령장으로 활동했으며, 1926년에는 양기탁과 천도교 혁신파, 소련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이 규합, 조직한 고려혁명당의 군사위원장, 총사령으로서 독립군을 총지휘했다.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1927년까지 오동진은 1만명이 넘는 부하 연인원을 이끌고 일제 관공서를 백여차례 습격하여 살상한 사람이 900여명에 달한다. 이런 전과로 인해 그는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독립 투쟁계의 3대 맹장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는 옛 동지인 김종원의 밀고로 신의주의 조선인 형사 김덕기에게 체포되었고, 정신병 진단과 함께 무기 징역형을 선고 받아 정신병자들을 수용하는 공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사망 시기에는 이설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92년········1993년 선정, 이 달의 독립 운동가 ········1994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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