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첼레스티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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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스티노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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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첼레스티노 1세(라틴어: Sanctus Caelestinus I, 이탈리아어: Papa Celestino I)는 제43대 로마 교황(재위: 422년 9월 10일 - 432년 7월 27일)이다.
로마의 캄파냐 태생이며 프리스쿠스의 아들로서 로마 교구의 대부제였다. 재위 중의 활동은 여러 서간에 기록되어 있고 주로 이단자 네스토리우스와 논쟁을 벌였다. 로마 교회의 권위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첼레스티노 1세는 네스토리우스를 428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승인한 바 있었으나 네스토리우스가 펠라지아니즘에 빠진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와 가까운 것을 알고는 입장을 철회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신모설 교리를 강론과 편지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여기에 관한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첼레스티노 1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치릴로에게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조사 임무를 위임하였다. 치릴로의 조사를 근거로 하여 430년 8월 소집된 로마 교회회의에서 첼레스티노 1세는 네스토리우스를 장엄하게 단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10일 안으로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여 철회하도록 요구를 받았고 치릴로는 형 집행의 참관 책임을 맡았다. 전통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치릴로는 기꺼이 그 일을 하기로 하고 그 해 11월 이집트 교회회의에 네스토리우스의 오류 12개를 제출하였다. 이 일은 첼레스티노 1세의 승인을 받지 않은 치릴로의 호의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결과는 더 나쁘게 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사용하던 용어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치릴로의 소집이 끝나기 전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를 열었다. 첼레스티노 1세는 사절로 아르카디우스와 프로옉투스 주교, 필리포 신부를 파견하여 이미 결정한 바를 치릴로와 긴밀히 상의하여 성사시키게 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안티오키아의 요한네스를 사회자로 임명하였으나 사회자의 교황의 사절들은 회의에 늦게 참가하였다.
교황의 권위를 지닌 치릴로가 431년 6월 22일 공의회의 개회를 선포하고 이집트의 주교들, 에페소스의 주교, 예루살렘의 주교의 지지를 받아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 그리고 한 위격이 있으므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고 선포하였다. 첼레스티노 1세의 사절들이 7월 10일에 도착하여 치릴로에 의해 결정된 바를 승인하고 네스토리우스의 해임을 확인하였다.
첼레스티노 1세는 막시미아누스를 네스토리우스 대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전 임 보니파시오 1세 |
제43대 교황 422년 9월 10일 - 432년 7월 27일 |
후 임 식스토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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