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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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시오 6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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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6세(라틴어: Innocentius PP. VI,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VI)는 제199대 로마 교황(재위: 1352년 12월 18일 ~ 1362년 9월 12일)이다. 세속명은 에티엔 오베르(프랑스어: Étienne Aubert)이다.
[편집] 생애
프랑스 태생으로 툴루즈에서 민법 교수 생활을 한 후 1338년 노옹의 주교, 1340년 클레르몽의 주교, 1342년 추기경이 되었다.
아비뇽의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단은 누구든지 교황으로 선출되면 교황의 권한과 수입을 추기경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동의하였으나 1353년 인노첸시오 6세는 교황 선출 전에 한 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교황청 내의 여러 가지 남용을 시정하고 복수 성직록을 금지하였으며 아비뇽에서 업무가 없는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성직록을 받은 본고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대외 문제에 있어서 교황은 카스티야의 페드루 1세의 잔인성을 묵과할 수 없었고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이의 평화를 회복시킬 수도 없었다. 그러나 1360년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브레티니 평화 협정은 성사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가 황금 칙서를 발표하였을 때 황제의 선출에 교황이 개입한다는 교황의 권리를 무시하는 부분에 대하여 항의하지 않았다.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황령을 점령한 찬탈자들을 군대의 힘으로 패배시켰다. 교회 일치를 위한 그리스의 제안은 교황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군대를 편성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엄격한 재정 정책에도 불구하고 교황령을 복구할 전쟁은 인노첸시오 6세를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고 갔으며 교황령은 거의 지방 영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교황은 재위 중 족벌주의의 오점을 남기고 노쇠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비교적 훌륭한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로마로 되돌아가려는 교황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전 임 클레멘스 6세 |
제199대 교황 1352년 12월 18일 ~ 1362년 9월 12일 |
후 임 우르바노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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