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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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庾黔弼; ?~941) 고려의 무신. 평주(평산)출생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며 또한 평산 유씨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시호는 충절이다. 920년 3월 북계의 골암진이 거듭하여 북방의 오랑캐에게 침략당하자 개정군 3,000명을 거느리고 가 골암진의 동산에 성을 쌓고 북번의 추장 300명을 굴복시켰다. 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후백제의 연산진(충남 문의)을 공격하여 그 곳의 장군 길환을 죽이고 또한 임존군(충남 예산)을 공격하여 후백제군사 3,0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조물성(경북 안동방면)방면에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던 왕건을 돕는데 노력했다. 928년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다가 후백제군사가 청주에서 태조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쳐부수고 독기진까지 추격하여 300여기를 살획하였다. 929년 말에 견훤이 고창군(경북 안동)을 포위, 공격하자 많은 장수들이 진군을 망설였으나 홀로 결사적인 태도로 임하여 저수봉으로부터 돌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931년에 참소를 입어 곡도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후백제의 해군장 상애 등이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략하므로 귀양지의 장정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하니, 태조가 그 충성에 감동하여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 933년에는 정남대장군이 되어 의성부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후백제군사로부터 신라의 서울을 구하라고 하므로 장사 8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라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후백제의 신검 등을 만나 싸워서 크게 승리하고, 장군 금달 ·환궁 등 7인을 사로잡고 살획함이 매우 많았다. 934년 태조가 운주(지금의 홍성)를 칠 때에는 기병 수천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000여명을 살획하였으며, 후백제의 군사 종훈과 군의관 훈겸, 용장 상달·최필 등을 사로잡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항복하게 하였다. 935년에는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929년 초에 후백제에 빼앗겼었던 금성(전남 나주)을 탈환하였으며 같은해에 금산사를 탈출해 나주로 들어와 고려의 귀부의 뜻을 밝힌 견훤 일행을 크게 환대하였다. 이듬해 936년 9월, 고려와 후백제의 왕 신검이 일선군(지금의 구미 선산)에서 결전을 벌일 때 중군장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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