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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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토지가 비옥하여
강원도가 어떻게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요? 강원도에서 말을 길렀다는것은 또 첨 듣네요. 일제시대때 연구한 일본사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현대 사학자들이 문제요 위치 잘못잡았아요. --Breathejustice 2007년 1월 1일 (월) 06:05 (KST)
- 아마도 함흥평야 부근을 중심으로 했을 듯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차 장식이 발굴됩니다. 지금은 말 대신 소를 키우는 듯 합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화) 23:55 (KST)
- 마차를 이용하는 곳에서 마차장식이 발견되지 마차를 키우는 곳에서는 마차장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함경도지방에서 마차장식이발견된다는 것은 고구려의 세력이 함경도까지 이르렀고 고구려의 마차가 함경도까지 많이 사용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원도에서 말이 생산된다면 왜 고구려가 말 생산이 많이 되는 내몽골지방을 차지하려고 그렇게 노력했을까요?--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수) 07:08 (KST)
- 환경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링크된 문서에서 그 일대가 '천연목장'이라는 글은 읽으셨겠죠. 규모가 크고 작고에 상관 없이, 특화되어 있으면 수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예의 말은 특별한 말이었죠. jtm71 2007년 1월 3일 (목) 15:51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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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가 비옥하였다하니... 함흥평야땅이 얼마나 넓고 비옥하여 사서에 그렇게 표현했을까 의심이 드는군요. 그리고 한국사학회에서 주장하는 동예의 위치는 함흥평야땅이 아닙니다... 함흥평야땅은 옥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동예의 위치는 지금의 강원도 북쪽땅입니다... 그땅이 사서에 비옥하다고 기록할만큼 농사가 잘될지는 의문이군요... [1] 이 링크는 동예와 옥저의 위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지도인데... 저 위치의 동예에서 과연 농사가 잘될지 의문입니다.
- 영흥평야까지는 동예의 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내의 예족은 함경도.강원도.경기도에 분포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동예'라는 명칭이 동해안에 자리잡은 예를 의미하여 그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는 듯하니다. 이의가 있으면 국사편찬위원회나 고대사학회에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7일 (일) 11:26 (KST)
[편집] 동예의 위치와 반어피
동예에서 반어피가 생산된다고 했는데... 과연 강원도에 있는 동해안에서 반어피가 생산될지 의문이군요. 반어가 어떤 물고기인지 정의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반어의 가죽을 생산한다는 것으로 보아서 반어는 식용으로 이용되는 작은 생선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아마 바다표범종류일것입니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반어피라 불릴수있는 것이 과연 생산되는지 궁금하군요.--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수) 07:16 (KST)
- 남아공 해안이 대표적인 '표범'의 서식지라는데, 남반구이지만 그 위도는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얼마 전에는 실제로 동해안에서 바다표범이 잡혔고요. 제 생각에는, 동해안에 명태, 청어, 오징어를 좋아하는 바다표범 종류가 대량으로 서식했는데, 일본 어민들이 남획했을 것 같습니다. 일본 어민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바다표범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jtm71 2007년 1월 3일 (목) 15:50 (KST)
- 독도를 시네마 현으로 편입을 주장한 어부가 바다표범을 잡았다고 했지, 독도에서 바다표범을 잡았다고는 안했는데요. 그리고 동예에서 바다표범이 잡혔다면,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등에서는 왜 바다표범을 강원도 등지에서 잡았다는 기록이 없을까요? 바다표범을 잡는것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까요?--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목) 18:29 (KST)
-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무엇인가 느끼는 점이 있기를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3일 (목) 18:52 (KST)
- 그렇군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목) 19:35 (KST)
- 독도에 바다사자가 잡혔다면 왜 동예만 반어피를 생산했다고 나오죠? 독도는 동예보다는 진한땅에서 가기 더 쉬웠을테고 반어피를 진한에서도 생산했어야하는데... 진한에서는 반어피를 생산했다는 말이 안나오는군요... 이말은 연안에서도 바다사자가 잡힐수있는 좀더 북쪽에 동예가 위치하였다는 말이지요. 즉 연해주쪽으로 올라가야한다는 말입니다. 연해주가 얼마나 토지가 비옥할지모르지만, 만약 연해주쪽이 토지가 비옥하지 않다면 동예(혹은 그냥 예)는 발해만쪽으로 가야되죠 왜냐면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됐다는 기록이 있으니깐요.
- 그렇군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목) 19:35 (KST)
- 토론을 하시려면 계정으로 로그인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면 답변이 더 쉬워질 것 같습니다. 독도에 바다표범이 있었다는 것도 증언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어느 바다에서 많이 잡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을 것이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동예의 사람들은 바다표범을 잡아 가죽을 활용할 줄 알았다는 것 뿐입니다. 그 일대에 바다표범이 살았다는 것은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고요. 동예의 위치를 함흥이라 하면, 인접한 낙랑을 통해서 중국에 수출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최리의 낙랑국이 이 곳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요. 동예의 활은 '낙랑단궁'이라 불렸습니다. 이는 동예의 단궁이 낙랑을 통해 중국에 수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기록에 의심을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 연해주가 발해가 되는 상황이 됩니다. jtm71 2007년 1월 5일 (금) 01:20 (KST)
- 의심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위치를 말해보자는 것이지요. 강원도 북부의 토지가 비옥하여 밭농사가 잘되고 반어피라고 불리는 바다표범의 가죽을 생산하였다고 하니 누가 이 사실을 믿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렸듯이 독도에서 바다표범이 잡혔다면 동예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의 진한에서도 바다표범을 잡았어야 했으나 그러한 기록이 없습니다. 즉, 동예에서 반어를 잡았다는 것은 멀리 나가서 잡았다는 말이 아니라 동예의 연안에서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독도에서 잡혔다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죠.
- 본문은 예와 동예를 구분을 하지 않고 적은 것 같습니다. 고조선멸망 후 열국시대에 대해서는 그 연구가 활발히 되고 있으니 최근의 연구들을 반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계정으로 로그인하시기 바랍니다. 첫머리에 기술되었듯이, '예'는 동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예'는 단지 조선의 동쪽에 자리잡은 예족을 의미할 뿐입니다. 위치의 추정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예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하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한 듯합니다. (문서의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한국사를 참조한 것입니다.) 새로운 연구 내용이 있다면, 본문 내용에 별도로 논문명과 내용을 제시해 주시면 될 듯합니다. 위키백과는 일반 게시판과는 달리 개인적인 연구는 허용하지 않으니 참조하시고요. jtm71 2007년 1월 5일 (토) 23:17 (KST)
- 반어피와 동예의 위치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강원도에서 바다사자같은 짐승이 잡히고 밭농사가 잘된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동예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했다는 기록을 해석할때 옥저가 과연 동옥저인지, 남옥저인지, 북옥저인지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에 따라서 예나라의 위치가 엄청나게 바뀝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6일 (토) 14:36 (KST)
- '예'는 조선의 동쪽 전부라 했습니다. 고구려의 위치가 정해져 있는데, 그 남쪽이 사할린 부근이나 발해만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jtm71 2007년 1월 6일 (일) 23:03 (KST)
[편집] 예가 강원도지방에 올수 없는 이유
후한서를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죠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
즉, 예의 군주 남여가 우거를 배반하고 이십팔만호를 거느리고 요동내에 이르러 속하자 무제가 이땅을 창해군이라하였다.
예가 강원도에 있다면 군주인 남여가 고조선을 배반하고 28만(명?)을 거느리고 투항하여 요동(이때 요동은 지금의 요동이 아님을 님도 아실겁니다. 중국의 동쪽 경계가 바뀜에 따라 요동도 바뀝니다. 즉 요동은 이시기의 중국과 조선의 경계지방입니다.)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는 예의 위치가 원래는 요서에 있었는데 조선이 망하고 예의 위치에 한나라가 사군을 설치하자 예의 무리가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당에 머물렀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윤내현 교수의 주장대로 원래의 예나라는 요서에 위치했는데 고조선이 망한 후에 한나라가 사군을 설치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동예라 부른것이라고 주장해야 사서의 기록과 적합하고 반어피의 기록도 무난하게 설명이 됩니다. 원래의 예의 위치와 한사군 설치후 동예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6일 (일) 16:17 (KST)
- '예'와 '동예'가 서로 다름은 한국사에서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한국사에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요동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윤내현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던가요 ... jtm71 2007년 1월 6일 (일) 23:01 (KST)
- 한국사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위키문서가 한국사대로 작성되어야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위키는 백과사전이므로 될수있는데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 너무장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예와 동예가 다르다면 삼국지의 예에 대한 설명을 왜 동예에 해 놓았나요? 아무래도 이 문서는 과거의 문서를 그대로 적어놓은것 같습니다. 중국사서의 예에 대한 설명은 예와 동예를 섞어 놓았습니다. 이에 맞게 본문도 고쳐야 할것 같군요.
- 고대사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는 다릅니다. 좀더 찾아보시면 아실거에요. 후한서에 나오는 요동이 지금의 요동이라면 저 기록은 님은 어떻게 해석하실수있나요. 지금의 요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조선을 피해 중국에 투항하는데 요동땅으로 들어갔다는 저 기록을 해석하실수있나요? 저 시대의 요동이란 지금의 하북정도 되어야 말이 됩니다. 요동이란 중국과 조선의 경계영역을 말하는 것이에요... 송종성씨의 책을 찾아보시면 도움이 될듯합니다.
- '위키백과'는 여러 사람의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만큼, 대한민국 사학계의 중론을 담고 있는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그 취지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송종성이라는 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책으로 출간되었다고 무조건 반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책은 여건만 되면 사회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누구나 출간이 가능하니까요. jtm71 2007년 1월 7일 (일) 11:11 (KST)
[편집] 본문의 윤내현 교수 주장 관련 ...
근거를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7일 (일) 11:29 (KST)
출처가 제시되지 않아 '기타의견'으로 따로 분류했습니다. jtm71 2007년 3월 25일 (일) 11:36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