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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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이광요, 영어: Lee Kuan Yew 또는 Lee Kwan-Yew, 중국어: 李光耀, 병음: Lǐ Guāngyào, 1923년 9월 16일 - )는 싱가포르의 정치인이자 초대 총리로,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두번째 총리인 고촉통 내각에서도 수석 총리로서 정치에 관여했다. 현재 그는 싱가포르의 세번째 총리가 된 그의 아들 리셴룽 총리를 조언하는 특별직에 재직하고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은 리콴유를 "해리"(Harry)라고 부르며,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해리 리콴유"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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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가족 환경
그의 자서전에서 리콴유는 그가 4세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라고 한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리복분(1846년 태어남)은 중국 광동성으로 부터 영국의 동남아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1862년 이민을 갔다.
리친쿤과 추아짐니의 가장 큰 아들인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캄퐁 자바 가의 92번지에 있는 큰 방갈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그의 할아버지 리훈렁이 가르쳐주신 영어로 인해 영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콴유라는 중국 이름에 덧붙여 "해리"라는 이름을 더해주었다.
리콴유와 그의 아내 과걱추는 1950년 9월 30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을 두었다.
그의 자녀들은 싱가포르 내에서 대부분 정부 고위관료로 재직하고 있다.
전 육군 장성이었던 큰아들 리셴룽은 2004년도부터 싱가포르의 총리이자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싱가포르 정부 투자 회사의 부의장을 맡고 있다. (리콴유가 의장) 역시 전 육군 장성인 둘째 아들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의 회사인 싱텔의 최고 경영자이다. 싱가폴 항공이나 DBS 은행과 같은 정부 관련 회사들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테마섹 지주 회사가 현재 싱텔의 지분 중 56%를 가지고 있다. 테마섹 지주 회사는 리콴유의 첫째 며느리인 호칭이 최고 경영자로 재직하고 있다. 국립 신경 학회를 운영하고 있는 리콴유의 딸 리웨이링은 여전히 미혼이다. 리콴유의 아내 과걱추는 예전에 법률 회사 리&리를 리콴유와 공동 운영했었다. 그의 동생 데니스, 프레디, 수산 유 또한 같은 회사의 파트너였다. 리콴유는 여동생 모니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리콴유 자신은 지속적으로 친척에 대한 특혜에 대해 부인해왔으며, 그의 가족들의 현재 위치는 그들의 성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편집] 유년 시절
리콴유는 텔록 쿠라우 초등학교와 래플즈 학교 및 래플즈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부터 1945년간의 일본의 지배로 인해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2년부터는 일본어와 중국어 수업을 듣고 동맹군의 전보를 번역하는 일과 일본의 호도부(정보 및 선전 부서)에서 영어 편집인으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캠브리지의 필즈 윌리엄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고 런던 경영 학교에 잠시 다녔다. 그는 1949년에 싱가포르로 돌아와 "래이콕과 옹"이라는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편집] 정치 생활 초기 – 1951 - 1959
[편집] 인민행동당 이전
리콴유의 정치인으로서 첫 경험은 친영국적 당인 진보당에서 후보로 나선 그의 상사 존 레이콕을 위해 선거인으로 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이 대중, 특히 중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리콴유는 결국 당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이것은 렌델 위원회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 확대했을 때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엄청나게 증감함으로 인해 더 명확해졌다.(1953년) 결국 무역 노조과 학생 조합에 법률적 조언을 해주면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그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의 인민행동당은 이 역사적인 연결 고리를 파업에서의 협상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편집] 인민행동당의 창당
1954년 11월 21일 리콴유는 "맥주 마시는 부르주아들" 이라고 그가 지칭하던 영어를 배운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을 결성하였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정략적인 연계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친공산주의자들의 대량의 지지가 필요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기 위한 지도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콴유를 이 정략적 연합을 편리를 위한 결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두 계층의 공동의 목적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영국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데 있었다. 창당식은 빅토리아 기념홀에서 1500명의 지지자와 무역 노조들로 가득찬 채로 이뤄졌다. 리콴유는 이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 직책을 1957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창당식에는 통일 말레이 국민기구(UMNO)의 툰쿠 압둘 라만과 말레이시아 중국인 연합(MCA)의 탄청록이 신당에 신뢰를 주기 위해 초청되었다.
[편집] 야당 활동
리콴유는 1955년선거에서 탄종 파가르 선거구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야당의 당수로서 데이비드 솔 마셜의 노동 전선 연립 정부와 대항한 그는 싱가포르의 미래 정세에 대한 런던에서의 두차례 회의에도 인민행동당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첫번째 회의는 마셜이 주최하였고 두번째는 마셜의 후임자인 림유혹에 의해 개최대었는데 이 시기에 리콴유는 이 두 라이벌들과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친공산주의적 측근들은 간혹 폭력적이기도 한 대중 집회에 활발히 참여하였기에 적절한 거리를 둔 반면, 여당의 연립 정부는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종종 그들을 무능력하다고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7년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에서의 위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림유혹은 친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구속하도록 명령하였고,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내 위협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리콴유는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이자 그가 플렌이라고 불렀던 퐁총픽(또는 팡추앙피)와 처음으로 비밀리에 만나게 된다.
[편집] 국무 총리, 독립 이전 -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편집] 자치 행정부 - 1959년부터 1963년까지
1959년 7월 1일 열린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51개 의석 중 43개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으며 리콴유는 1959년 7월 3일에 수석장관(Chief Minister)이었던 림유혹을 대신해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 국무 총리가 되기 전에 리콴유는 림유혹 정부 시절 구속되었던 림친시옹과 데반 나이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리콴유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이후 교육, 주거, 실업 등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리콴유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주택 건설을 위한 주거 및 개발 위원회(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HDB)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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