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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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인(天璋院/てんしょういん 1836년 ~ 1883년)은 에도 막부 말기 및 메이지 시대의 여성으로 도쿠가와 막부 1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미다이도코로 (정실부인)이다. 통칭 아쓰히메(篤姫). 아버지는 사쓰마 번의 영주집안인 시마즈가의 시마즈 나카오카(島津忠剛). 어릴 때 이름은 가쓰(かつ)이고 성년 이후 스미코(敬子)라고 했다.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의 양녀가 되어 아쓰코(篤子)라고 개명했다.
1853년,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되어, 동년 가고시마에서 영주의 에도저택으로 들어간다.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된 것은, 쇼군가에서 시마즈가로 혼담이 들어와 막부에의 출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시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들이 차례차례로 요절하고, 이에사다 자신도 병약하여 자식이 한명도 없어 시마즈가 출신의 정실을 맞아 장수하고 자식도 많이 두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본받기 위함이었다 한다.
한편, 아쓰코가 번주에게 정치적 임무를 받고 에도성에 갔다는 말도 전해진다. 당시 쇼군의 후계자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기슈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상황에서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아쓰코를 토쿠가와가에 출가시켰다는 것이다.
1856년, 우대신 고노에 다다히로의 양녀가 되어 그 해 11월에 쇼군과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1858 년 7월에 양부인 나리아키라, 8월에는 이에사다가 급사하고 14대장군에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취임하게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다. 이에사다의 죽음으로 삭발하여 이후「天璋院(덴쇼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막부는 공무합체론을 내세워 1862년 쇼군 이에모치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和宮) 공주의 혼인을 결정하게 된다. 사츠마 번은 덴쇼인의 귀향을 청하지만, 덴쇼인이 거부하였다. 한편 쇼군의 부인이 된 가즈노미야 공주와 덴쇼인은 일종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에의 관계에 있었지만, 황실출신과 무가출신의 관습 차이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가 후에 화해했다고 전해진다.

카츠 가이슈(勝海舟)도 참가한 회담에서 원래 자신이 옹립할 예정이었던 15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는 험악한 분위기에서 만났다고 하며 1866년에는 요시노부의 오오쿠(쇼군의 저택) 개혁에 카즈노미야(이에사다 사후 静寛院宮으로 불림)와 함께 저항한다. 한편, 1867년에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실시해 에도막부가 소멸하고 에도성에 정부군이 무혈 입성할 때, 자신의 친가인 시마즈가에 탄원하여, 조정에 탄원한 카즈노미야와 함께 도쿠가와가 구제 및 요시노부의 구명에도 힘썼다고 한다.


만년에는 도쿠가와 종가 16대 후계자인 이에사토의 양육에 힘썼다. 메이지 시대에는 도쿠가와가의 원조를 받았고, 메이지16년 (1883년)에 도쿄의 히토쓰바시 저택에서 향년 48세로 사망하였다. 도쿄 台東区上野의 절 寛永寺에 있는 남편 이에사다 무덤 옆에 매장되었다. 자신의 소지금을 절약해서라도 아랫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임종시에 소지금은 약 3엔(현대의3만-4만엔)밖에 없었다고 한다.

1853년 11월, 이미 大石寺에 귀의하고 있던 남부 南部八戸 번주 난부 노부유키(南部信順, 시마즈 가 출신)의 강한 권유를 받아 양부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함께 현재의 니치렌종파 총본산 大石寺에 귀의해, 同塔中遠信坊 흥성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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