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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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남한산에 있는 산성이다. 행정주소 상으로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들어가서 청나라와 대항했던 곳이다.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가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 숙종과 인조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숱한 건물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 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제 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주변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이자, 건강을 위한 등산 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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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성의 역사
[편집] 조선 시대 이전
백제 시조 온조가 남한산성과 관련된 것은, 조선 초기 백제의 첫번째 수도 "하남 위례성"이 남한산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대동야승》(大東野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 관련 자료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고 주장했다. 한성으로 막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인 홍경모만이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참고로, 오늘날 학계에서는 최초의 백제 수도인 위례성으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을 강력하게 지목하고 있으며, 계속 연구 중이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해서 두번째 설은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주장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삼국사기에 주장성이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는 기록되어 있고,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 중이던 신라가 한강 이남에 대규모 성을 쌓을 필요 또한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산 지역 산성 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 또 조선 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3,993보 (《세종실록지리지》)나 선조때 포백척은 17,400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거리를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주장성에 관한 기록은 비슷하다. 인조 당시 개축할때 기록에는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다만, 몽고의 고려 침입 당시 1231년과 1232년 두 번 광주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당시 광주부사 이세화의 묘지 비석), 광주 지역에 소재하는 산성은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이지만, 6세기 중엽 축성된 이성산성은 규모가 작아 농성전용이라기보다 해미읍성처럼 행정 중심지의 성격이 강해 위의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을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이세화의 묘지명에는 몽고군이 침공했을때 성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침공했을때 공민왕이 개경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르자 광주 주변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고려 시대 기록이 전부다. 다만, (남한산성이 고려 시대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이라는 전제 하에) 기록 자료나 발굴된 고려 시대 유물이 적은 점을 들어 전쟁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농성전용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편집] 조선 시대
전략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조선 태종 때 본격화되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을 막론하고 고을 별로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도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때에 군사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태종 ~ 세종때에 남한산성이 개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세종실록지리지》에서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현황을 파악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남한산성을 이용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개축이나 수리는 안했어도 군사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에 서애 유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선조 36년인 1603년에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석성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이때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성을 보지 못했고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증축된 것은 조선 인조 대에 이르러서다. 일단 인조는 광해군이 못다한 것을 이어받아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공사 완료 후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도 6,927보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할 수 없었다. 인조와 조선군은 이곳에서 농성을 시작했지만, 결국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던 것이다.
조선 말, 남한산성은 의병 활동사에 다시 등장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2월 28일). 이후 한성 진공을 준비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가 관군에 남한산성 성벽 서쪽에 파손된 부분이 있음을 밀고했다. 관군은 이 파손된 부분으로 밀고 들어와 의병을 해산시키고 성을 장악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일본은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인수했는데, 남한산성 내 사찰에 보관 중이던 무기와 탄약도 회수하여 폭발시켰다.
[편집]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인근의 중부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를 남한산성을 중심지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해 괴멸되었다.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 조직도 마찬가지였으며, 해방 후에도 인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편집] 해방 후 현재
남한산성도 한국전쟁은 피할 수 없어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나, 4·19 혁명 후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이를 무효화시켰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되었고, 복원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7년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 현재 성남시와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1974년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옛 풍파를 간직한 채 서울 시민 및 경기도민들의 휴양처가 되고 있다.
[편집] 성의 자연환경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의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성벽 바깥은 급경사지만, 성 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넓은 구릉성 분지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할 뿐이다.
게다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장기간 농성에 유리하다. 하지만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은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지역과는 고도 차이로 인해 약 4도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맑은 날이 많다. 산간 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편집] 성의 시설 및 건축물
- 동문
-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성의 남동쪽에 위치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라우수영처럼 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통치하므로 이 기준으로 봤을때 동쪽은 왼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폭은 3.1m, 높이는 4m로서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으로, 지면이 성문보다 낮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쪽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의 철린으로 보강했다. 성문 위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 서문
-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했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기석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갈때,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 남문
-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남문은 정조 3년(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불렀다. 또 남무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 북문
- 성곽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세곡을 성안으로 운송할때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하며, 남문과 같은 시기에 신축되었다. 이때 이름을 전승문(戰勝門)이라고 붙였다.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 성곽
-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데,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 남쪽에 신남성이 있으며,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원성은 1624년(인조 2년) ~ 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대략 67만여평으로 측량되었다. 현재 원성은 남쪽과 북쪽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 장대
- 흔히 "수어장대"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본래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다. 현대의 달리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당시에 장대(지휘소)는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보통 한국의 성에서 장대는 단층 형태가 주류이나, 남한산성은 2층 누각형태다. 이와 같은 형태는 수원 화성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했다. 18세기 중후반에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지만, 현재 남은 것은 서장대다. "수어장대"란 이름은 이 서장대를 가리킨다.
- 옹성
- 주 성곽에서 바깥으로 길게 뻗은 작은 성곽이다. 성벽에 달라붙은 적군을 옆에서 공격하기도 하고, 남한산성의 경우 돌출된 옹성에서 봉화대 역할도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 관광 정보
[편집] 축제
- 산성문화재 : 매년 10월 열리는 축제. 대동굿과 숭열전 제향, 풍물놀이 등이 열린다
- 숭열제향 : 백제 온조왕과 축성책임자인 이서 장군에 바치는 제향. 음력 9월 5일에 열린다
- 현절사제향 :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과 김상헌, 정온에 바치는 제향
- 영월제 : 정월 대보름 행사
- 도당굿 : 청양당에서 이회 장군과 부인 송씨, 첩 윤씨를 기리는 굿 행사.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없어졌으나, 1991년에 복원되었다.
[편집] 요금
개인 | 어른 | 1,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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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및 군인 | 600원 | |
어린이 | 300원 | |
단체 (30인 이상) | 어른 | 700원 |
청소년 및 군인 | 300원 | |
어린이 | 200원 | |
차량 입장료 | 이륜차 | 500원 |
영업용 택시 | 면제 | |
자가용 | 1,000원 | |
12인승 미만 버스 | 1,000원 | |
12인승 미상 버스 | 2,000원 | |
영업용 버스 | 면제 | |
4.5톤 미만 화물차 | 1,000원 | |
4.5톤 이상 화물차 | 2,000원 |
단, 입장 후 30분 이내에 통과하는 차량에 대해서는 차랑 입장료를 환불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