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동명성왕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 ~ 19년, 재위 기원전 37년 ~ 19년)은 고구려의 초대 임금이다.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이다. 휘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도모(都慕),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목차 |
[편집] 탄생 설화
삼국사기는 동명성왕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동부여 임금 금와왕이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갔다가 유화(柳花)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딸이었지만,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한 죄로 그만 쫓겨났다. 게다가, 유화의 남편은 태양신 해모수(解慕漱)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고, 어느날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유화방에 들고, 유화는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유화가 낳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커다란 알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유화에게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다. 그 뒤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기도 했지만 소와 말은 알을 피해 갔고,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태생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모기를 쏘아 맞추었다. 이에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를 피해 주몽은 유화의 충고에 따라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수(淹水) 기슭에 이르렀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태양의 신의 아들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달라"고 하니, 곧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편집] 고구려의 건국
기원전 37년 22세일 때 졸본(卒本)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또 기원전 36년에는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왕(松讓王)의 항복을 받아내어 고구려의 한 행정구역인 다물도(多勿都)로 편입시키고 송양을 도주로 삼았으며,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고,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정복하여 멸망시킴으로써 초기부터 정복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었다. 이때 금와왕이 그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하고 신묘를 세웠다. 또 기원전 19년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세워 왕태자로 책봉했다. 그 후 5개월 뒤에 40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편집] 가계
[편집] 참고
앞선 왕 없음 |
제 1 대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
다음 왕 유리왕 |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고구려: | 동명성왕 | 유리왕 |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 태조대왕 | 차대왕 | 신대왕 | 고국천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봉상왕 |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 안장왕 | 안원왕 | 양원왕 | 평원왕 | 영양왕 | 영류왕 | 보장왕 | |
분류: 기원전 58년 태어남 | 기원전 19년 죽음 | 고구려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