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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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申性模,1891년 10월 20일 의령 -1960년)

[편집] 생애

  • 국방부장관 재직 당시인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되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주장했다. [1]
  •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발언했다. [2]
  • 1956년 11월 28일 - 4·19 혁명 직후, 제8대 해양대학장을 역임하였다. [3]

[편집] 평가

국내에 전혀 기반이 없던 신성모가 대한청년단장,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에 국무총리 서리로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눈물이었다. 신성모는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고,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또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4] 눈물과 더불어 신성모의 강점은 영어였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우대했다.[5]

전 임
윤치영
제2대 내무부장관
1948년 12월 - 1949년 3월
후 임
김효석
전 임
이범석
제2대 국방부장관
1949년 3월 20일 - 1951년 5월 5일
후 임
이기붕
전 임
이범석
국무총리 서리
1950년 4월 21일 - 1950년 11월 22일
후 임
장면

[편집] 각주

  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25쪽.
  2.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 3권》(행림출판, 1992) 39쪽.
  3. 김종길,〈해양대학 신성모 학장〉(《해양한국》(2000.7.) 150~151쪽.)
  4. 한홍구, 《대한민국사02: 이라랑 김산에서 월남 김상사까지》(한겨레신문사, 2003)183~184쪽.
  5.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인물과 사상사, 2004) 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