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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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고(故) 허암(虛菴) 김홍전(金弘全)
1914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 출생. 2006년 7월 6일 소천.
[편집] 일제시대
1932년에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에서 음악 개인 수업을 받았다. 그 후 평양에서 Malsbary 박사에게 작곡학과 피아노를 배웠다. 1944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반대함으로 인해 일체의 직(職)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편집] 해방 후
1950년, 미국 델라웨어 주의 Faith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전쟁의 사정에 대해 미국 여러 곳에서 대중매체를 통해 강연을 하였다. 1951년에는 미국 미시간 주의 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작곡학을 연구하여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5년 6월 부터 11월 까지는 이스라엘 정부와 The Jewish Agency 초청으로 이스라엘로 가서 이스라엘 및 중동의 문화·인류학 그리고 언어 등을 연구하였다. 1955년에 미국 버지니아 주의 Union 신학교에 입학, 1957년에 사해 축서(死海軸書)를 연구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7년에 귀국하여 대전 기독학관 (현 한남대학) 학장 고문 겸 이사회 고문을 역임하였고, 1960년에는 민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이 되었는데 1962년에 민국일보사 해산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편집] 목회 활동
김홍전 목사는 어려서부터 전주 서문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도 있었지만 신학과 그 관련된 학문에의 깊은 조예 때문에 그의 가정 성경 공부에는 가족들 외에도 지인들이 종종 참석하길 원했다. 1963년에는 정기적인 성경공부 모임이 자리잡게 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WCC 가입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신학 노선에 큰 혼란이 있었던 시기였는데,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였다. 그런 가운데 표본적인 교회(model church)의 필요성을 성경공부 참석자들은 생각하고 있었고, 그 결과 1964년 '성약교회'라는 이름으로 서게 되었다.
성약교회는 신학적으로 역사적 개혁신학과 그 신앙을 표방, 즉 개혁교회의 모습을 띄고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몇 갈래로 갈라져 있던 교단 중 어느 한 곳에 남아서 활동하는 것이 득 보다는 제약이 많겠다고 판단하여 독립적인 교회로 출발하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독립개신교회(Independent Reformed Church) - 성약교회'라는 공식 이름이 갖게 되었다. 지금은 안양 강변교회, 대전 성은교회, 전주 한사랑교회와 더불어 독립개신교회 교단을 이루고 있다.
성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김홍전 목사는 해외 사역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1967년 5월 부터 1970년 10월 까지 도쿄 기독교대학 교수를 겸임하였으며, 1968에는 일본에서 영도(榮都)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에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 지역 교회를 시작하였으며 2006년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토론토에서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