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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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吳玄州, 1894년 2월 29일 ~ ?)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담했다가 이 조직을 경찰에 밀고한 친일 인물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세브란스의전의 첫 한국인 교장이며 사회사업가인 오긍선의 동생이다. 일찌기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운 오긍선의 영향으로 언니인 오현관과 함께 신교육을 받고 여성 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의 메리블렌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시위 운동 이후 투옥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수감자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한 자선 단체 혈성부인회를 조직했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가담한 혈성회에는 재령의 명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오현관도 참가했다.

부인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혈성회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요원인 임득산이 파견되어 오현주를 만났고, 이들은 최숙자 등이 조직한 애국부인회와 합동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오현주는 회장 겸 재무주임에 취임한 뒤, 조직을 지방으로 확대하면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상하이를 방문했던 오현주의 남편 강낙원이 돌아와 독립 운동에서 손을 떼기를 권유하면서 오현주는 회장직을 사임했다. 이 무렵 3·1 운동으로 구속되었던 김마리아, 황애덕이 출옥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담, 조직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오현주와 정신여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며, 혈성부인회가 한 축으로 참가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는 이들의 정신여학교 동창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1919년 11월 오현주는 강낙원과 함께 대구의 조선인 경찰인 유근수에게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밀고했다. 이 때문에 김마리아를 비롯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인사들이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재판 끝에 관련자들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김마리아는 구금 중 고문으로 병을 얻었으며 또다른 정신여학교 친구인 신의경의 어머니가 홧병으로 사망하는 등 체포된 이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때 애국부인회 지도부는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손병희 등 일부 인사만 받은 중형이다. 당시 일제가 이 조직이 잘 정돈되어 있고 전국으로 인원 및 조직이 확장되고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마리아가 추후 《삼천리》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오현주는 이들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공금을 가로챘다고 하며, 이와는 별도로 일본 경찰로부터 밀고한 공을 인정 받아 상금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광복후인 1949년 오현주는 남편과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 그는 남편이 데려온 유근수가 경찰인 줄 모르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에 대해 알려준 것 뿐이라고 증언했으나, 자신이 동지들을 밀고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못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밀정 부문에 남편 강낙원과 함께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