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자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배정자(裵貞子, 1870년 ~ 1951년)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일제 강점기에 밀정으로 활동한 친일 인물이다.

경상남도 김해 출생으로, 본명은 배분남(裵粉男)이다. 관가의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어릴때 처형 당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시각 장애인이 되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885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때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안경수를 통해 김옥균과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다. 미모가 빼어났다고 전해지는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그의 수양딸이 되었고, 승마와 수영, 사격, 변장술 등 스파이로서의 기본 교육을 받았다.

배정자는 스파이 임무를 띄고 귀국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고급 밀정으로 활동하다가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자 풀려나 다시 밀정으로 복귀했으며, 안중근에게 그가 사살된 이후로는 조선주둔 일본군의 헌병대 촉탁, 외무부 촉탁 등으로 근무했다.

1920년에는 조선총독부만주 지역에 설립한 첩보 단체 보민회에서 활동했고, 1922년부터 총독부 경무국의 촉탁으로 근무했다. 태평양 전쟁 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부로 구성한 군인위문대를 이끌고 동남아 전선에 위문을 가기도 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발효되면서 배정자도 구속되었다. 반민법에 의해 구속된 여성은 모두 6명에 불과했는데, 배정자는 이들 중 가장 먼저 구속된 사람이다. 그는 일본 정부와 모의하여 한일 합방에 적극 협력한 자를 처벌하는 반민법 제1조에 의해 최초로 구속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출옥했고, 한국 전쟁서울에서 사망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밀정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