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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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趙羲淵, 1856년 ~ 1915년)은 조선 말기의 군인으로 친일 인물이다.

1874년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으로 근무했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 때, 정토군(征討軍)을 조직해서 초토사 홍계훈,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 등에게 군량 및 군비 등을 지급하여 파송하였다.[1]

이때 그는 당시 집권당인 여흥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청해서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했고, 청군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실각시키고 흥선대원군을 추대할 때 여기에 가담했다. 이후 친일 정권이 설 때마다 계속 등용되었다. 갑오경장 때는 장위사에, 김홍집의 1차, 2차, 4차 친일 내각에서는 군무대신 서리, 군무대신, 군부대신에 각각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한 조희연은 10여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1907년 귀국하여 궁내부 특진관과 훈·포장을 담당하는 표훈원 총재를 지냈다. 1910년 한일 합병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망하면서 작위를 반납하여 작위가 세습되지는 않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1. ^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돌베게, 1993년) 152쪽 (오연숙 집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