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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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개화파 무신이며 친일 인물이다.

본관은 해평이다. 185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80년 7월 별군관의 신분으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 함께한 이조연(李祖淵), 강위(姜瑋) 등과 함께 동양삼국의 합력을 취지로 하는 흥아회에 참석하였으며, 도쿄에 머물고 있던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의 소개로 일본 재야 인사들과 접촉하였다.

1881년 별기군 창설에 가담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면서 일본과 유착하였다. 별기군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임오군란 때는 군인들이 일본 공관을 습격할 계획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본 측에 미리 통보했고, 소요가 확대되어 운웅렬의 집이 부서지고 일본공관도 습격당하자 공사 일행과 함께 나가사키로 피신했다.

온건 개화파로 활동하며 갑신정변 때 형조판서를 맡았다가 유배되었고, 1894년 청일 전쟁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경무사를 거쳐 군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1]

을마사변 이후 친미파가 주도하여 발생한 춘생문 사건에 호응했다가 상하이 망명을 거친 뒤 대한제국에서 군부대신 등 요직을 맡았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을 받았다. 1911년 사망 후에는, 자작 작위가 장남인 윤치호에게 승계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6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일제 강점기 초기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편집] 가족 관계

[편집] 각주

  1. ^  "1856년에 무과에~ 자리에 올랐다.":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돌베게, 1993년) 160쪽(김도훈 집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