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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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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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기원전 63년 9월 23일 - 14년 8월 19일)이다. 카이사르의 양자로, 그의 후계자들도 '아우구스투스'를 자칭하여, '임페라토르'나 '카이사르' 등과 함께 황제를 나타내는 칭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편집] 생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지방 소도시인 벨레트리에서 기사 신분에 속하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질녀인 아티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옥타비아누스가 19세가 되던 해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공개된 유언장을 통해 그의 이름을 받고 양자가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그를 양아들로 지명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카이사르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카이사르에 이은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재산으로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성대한 잔치를 열흘 동안 벌였으며, 이 잔치에서 로마 시민 모두를 초대하여 각자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이라는 명목하에 돈까지 나누어 주었다. 이 일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로부터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공인받았다. 군대 또한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경쟁자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군단의 군단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군대가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감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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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버지인 카이사르와 비교해서 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은 그다지 없었지만, 정치적인 수완을 비교해보았을 때 양아버지와 동등 이상이었으며, 이미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던 원로원의 동정을 주시하면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착실하게 구축해나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은 그 분야의 전문가를 적극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군사와 내정은 아그리파에게, 외교와 문화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하였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7세 연합군을 악티움 앞바다에서 맞아 싸웠다.(악티움 해전)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와 함선들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는 동시에 그라쿠스 형제 이후 이어진 로마의 내전 종식을 의미했다. 그 공로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1월 16일에 원로원으로부터 '프린캡스(제일인자)',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자)' 등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병사들로부터는 개선장군이라는 뜻의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도 받았다.

BC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했다. 카이사르로 인해 어지렵혀진 로마 공화정을 계승하겠다는 의미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하지 않기 위해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속였을 뿐이고, 이후로도 로마의 모든 권위와 권력은 '임페라토르(황제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화함)'에게 종속되었다. 카이사르가 이루려고 하였던 새로운 정치, 넓어진 로마 제국을 좀 더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만들어낸 제정 로마의 시작이었다. 제정의 개시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날보다 전날인 1월 13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전시권을 원로원에 반환하여 속주의 지배권을 원로원과 서로 나눈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설 등이 있다. 이후의 제정 로마의 전기는 "원수정"으로 불린다.

[편집] 읽어보기


타고난 이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Gaius Octavianus)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재위 기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
다음 황제 티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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