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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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 (李彦適, 1491-1553) 은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유학사상가였다. 이름은 원래 이적(李適)였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자를 덧붙였다. 호는 회재, 자계용이고, 자는 복고이었다. 경주 출생이며 여주 이씨 집안에 태어났다,
1514년 을과에 생원으로 급제했어, 천관랑을 비롯해서 장령, 밀양부사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30년에는 사간이 되었다. 그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해서 한양에서 쫒겨 물러나서 경주 자욕산에서 성리학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1537년에 다시 올라 여러 관직을 지냈다 1545년에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관직에서 곧 물려났지만, 1547년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서 유배당했다. 다시 오라가지 못 해 배소에 죽고 말았다.
무극태극 논쟁에 크게 기여했다. 유배 때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조선의 유명한 성리학자인 이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대학장구보유, 속혹문, 군인록 등이 있다.
죽은후 시호인 문원(文元)을 받아 1573 자옥산에 옥산 서원이 건립되어 거기 제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