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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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6세
속명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지아
임기 시작 1492년 8월 11일
임기 종료 1503년 8월 18일
전임 인노첸시오 8세
후임 비오 3세
탄생 1431년
사망 1503년 8월 18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는 제214대 로마 교황(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이다. 속명은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지아(에스파냐어: Roderic Llançol-Borja i Borja)이다.

[편집] 생애

1431년 에스파냐 발렌시아의 하티바에서 출생하였다. 교황 갈리스토 3세의 조카로서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456년 2월 22일에 추기경이 되고 1458년 6월 30일 발렌시아의 주교가 되었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 교황 갈리스토 3세, 교황 비오 2세, 교황 바오로 2세, 교황 식스토 4세, 교황 인노첸시오 8세 치하에서 교황청 상서국 차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주교 관구들과 다른 성직록을 차지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때 당시는 물론이고 장차 그의 야심을 이루는데 매우 유용한 로마의 유력자들과 골고루 인맥을 쌓을 수가 있었다. 1492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알렉산데르 6세로 명명하였다.

그가 교황에 당선된 콘클라베 전날 밤의 상황은 대략 이러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도 차기 교황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는데, 델라 로베레의 지지자였던 프랑스 샤를 8세는 많은 추기경들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뿌렸다. 그 밖에도 밀라노 공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유력한 후보였다. 이탈리아 태생의 이 두 사람은 외국인을 교황으로 삼지 않으려는 많은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의 결의 때문에 초반에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반면에 보르지아는 에스파냐 태생이기 때문에 가장 불리하였다. 그렇지만 보르지아는 엄청난 부자였던 데다가, 이제까지 쌓아온 숱한 정치 경험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샤를 8세보다 더 많은 뇌물을 주었고, 그 덕분에 선거 네 번째 날ㅔ는 단 한 표만 더 있으면 교황직을 차지할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96세의 베네치아의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노인의 흐릿한 판단력을 적시에 공략하여 그의 표도 얻는데 성공하였다. 요컨대 그는 교황직을 돈으로 매수한 셈이다.

외국 선교, 특히 그린란드아메리카 선교에 열심이었고 문화와 예술을 증진시켰다. 핀투리키오에게 바티칸 궁전의 마루를 장식하게 하였고 미켈란젤로에게는 피에타상을 제작하게 하였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에스파냐포르투갈의 분쟁을 중재하였다.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알렉산데르 6세는 포르투갈에게는 대서양 동부지역(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보호권을, 에스파냐에게는 대서양 서부지역(아메리카)에 대한 보호권을 부여하였다.

1503년 로마에서 창궐하던 전염병에 걸려 선종하였다.

[편집] 정부들과 사생아들

알렉산데르 6세는 여러 명의 여인들 사이에서 아들 6명과 딸 3명을 두었다. 그의 자녀들 중 페드로 루이스와 이사벨라, 지롤라마, 조반니 그리고 로드리고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원 덕분에 높은 직택에 앉거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가장 유명한 자녀는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 등 4남매로, 모두 다 반노차 카타네이의 소생이었다.


전 임
인노첸시오 8세
제214대 교황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
후 임
비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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