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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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金玉均, 1851년 ~ 1894년 12월 4일)은 구한말의 개화파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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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6세 때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187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려 옥당승지·정언(正言)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박규수·유대치·오경석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1881년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들을 비롯한 아시아의 개혁파들에게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은 하나의 개혁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동행하였던 이상재와도 교우를 쌓았고, 서재필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켰다.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신정부의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에 취임했으나, 갑신정변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탁하였다. 망명객 김옥균은 이와다(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이홍장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4년 12월 4일 본국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洪鍾宇)라는 자객에게 권총으로 살해되었다.[1]

[편집] 죽은 뒤

유해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시체가 찢기는 극형에 처해졌으나,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씻기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1]

[편집] 저서

  • 《기화근사(箕和近事)》
  • 《치도약론(治道略論)》
  • 《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편집] 참고 문헌

  1. 1.0 1.1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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