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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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Sir Thomas More, by Hans Holbein the Younger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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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Sir Thomas More, by Hans Holbein the Younger (1527).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년 2월 7일 - 1535년 6월 6일)는 영국 르네상스 시기의 법률가, 사상가, 카톨릭 성인이다. 정치,사회를 풍자한 "유토피아"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편집] 생애

런던의 법률가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법률가가 된다. 1504년 하원의원이 된다. 1515년부터 국왕 헨리 8세 하에 일하였으며 네덜란드 사절등을 역임하였다. 1529년 관료로는 최고위직인 대법관이 된다. 헨리8세가 이혼문제로부터 로마교황과 반목하자 대법관에서 물러났다. 1534년의 국왕지상법(수장령, 국왕을 영국국교회의 장으로 한다는 내용)에 카톨릭신도의 입장에서 반대하여 사문위원회의 심사를 받고 그 해 런던탑에 유폐, 1535년 7월에 처형되었다. 1935년에 카톨릭교회의 순교자로서 열성되어 기념일은 6월22일이다. 정치가와 변호사의 수호성인이다.

[편집] 사상

토마스 모어는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저작에 영향받은 인문주의자로서 신학자 존 콜레트와 친구가 되었다. 또 1499년 이래 에라스무스와도 친교를 가졌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촉발되어 "유토피아"의 처음 부분을 쓴 것이 외교관이었던 1516년 경이다. 그 후 대법관 시기의 경험에 의하여 영국에서는 지주나 장로가 플랑드르 지방과의 양모거래를 위하여 농장을 둘러싸고 양을 기르고, 촌락공동체를 파괴하고, 농민들을 방축하는 현상을 알고 깊이 개탄하였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유토피아" 제1권)이라는 의미의 말을 남기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모어를 인용하여 본원적 축적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를 여행한 기록 "신세계"를 깊이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모어는 자연에 따라서 살고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는 공동사회가 실재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연법과 자연상태가 선이라는 증명으로서 씌여져 있는 그의 이 주저는 유토피아라는 가공의 나라를 무대로 자유, 평등으로 전쟁이 없는 공산주의적인 이상사회를 묘사하였다. 유토피아(Utopia)는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이다. 토마스 모어는 마르틴 루터복음주의를 부정하고 카톨릭교회에 의한 평화주의와 사회정의를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