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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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蚩尤)는 먀오족 신화 속 인물이며, 전쟁의 신이다. 삼황(三皇)의 시대를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중국 사학계와는 달리 한국 사학계는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치우나 한민족과의 계승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목차

[편집] 신화

중국 신화에 따르면 치우는 염제(炎帝)의 후예로, 81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고 소의 뿔와 발굽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다. 그는 처음으로 창과 방패 등의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였다.

산해경에 따르면 치우는 탁록의 들에서 황제(黃帝)와 당시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여러 차례 싸우다 결국 응룡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산해경 대황북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가 이에 응룡으로 하여금 기주야에서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응룡이 물을 모아 둔 것을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부탁하여 폭풍우로 거침없이 쏟아지게 했다. 황제가 이에 천녀인 발을 내려 보내니 비가 그쳤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자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1]

[편집] 역사

동아시아에서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모셔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유방이 항우와의 마지막 전투 전에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 전투에서 이겼다고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군영을 대표하는 대장기로서 치우의 형태를 한 ‘둑’이라는 깃발을 둑소에 두고 매년 갑옷을 입고 제를 지냈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이 둑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편집] 문헌

[편집] 사마천의 《사기》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능히 벌할 만한 자가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 이었는데, 모두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편집] 상서(尙書) 여형(呂刑)

옛날 훈계(古訓)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킨다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앗긴 탓이라고 했다.

[편집] 운급헌원기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가리켜 말했다.

[편집]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치우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壽長縣) 관향성(關鄕城) 가운데 있다고 나온다.

[편집] 한국에서의 치우

[편집] 환단고기

환단고기에서는 치우가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으로 나오며, 황제(黃帝)를 무찔렀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그는 중국 지역의 공손헌원과의 수십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모조리 승리하였다고 한다.

[편집] 규원사화

규원사화에는 치우씨(蚩尤氏)라 한다. 치우씨는 한 시대의 인물이 아닌 우리 민족을 구성하는 주요 부족 중 하나로 설명되고 있다.

고조선 이전 신시씨가 다스리는 1만 1천 년 간 고시씨, 신지씨와 함께 신시씨(환웅천왕)의 신하였으며, 중국과의 경계인 발해 연안에 자리잡고 침입을 경계하였다. 주로 나라의 방어와 병기 제작을 담당했고, 집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탁록의 전투에 참여했던 치우씨는 1만 2천 년 간의 기간 중 한 시대의 지도자에 해당되며, 중토에 진출하여 천왕의 지위에 올랐다.

단군조선 이후에는 단군왕검에 의해 남국의 국왕, 단군의 제후로서 웅가(熊加)의 직책을 얻어 고조선의 서쪽인 발해 연안에 봉(封)하여졌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그 후손인 남후가 제후들을 이끌고 중토로 진출, 엄국, 서국, 선모국 등의 나라를 세웠다. 이후에는 은나라 사람들과 섞여살게 되었다고 한다.

[편집] 기타

붉은악마의 트레이드마크 도안으로 쓰이고 있으며, 2002년 축구 월드컵 때 유명해졌다.

[편집] 참고 문헌

  1. 산해경, 정재서 역주, 민음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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