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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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朴熙道, 1889년 8월 11일 ~ 1951년 9월 2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 인사로 전향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여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협성신학교,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수학했다.
감리교의 전도사로서 영신학교, 중앙유치원(1918년, 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종사하던 중, 1918년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간사로 일하면서 반일 기독교 청년들과 다수 교류하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는 비슷한 연배의 김창준, 이갑성을 비롯하여 이필주 등 감리교 인사들을 대거 끌여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 박희도는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한 뒤 중앙유치원 운영과 함께 잡지 《신생활》 창간(1922년) 등으로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 출판 사업 쪽에 뜻을 둔다. 그러나 김명식 등 좌파 계열과 기독교 계통의 연합으로 발간된 계몽 잡지 신생활은 1922년 말 러시아의 10월 혁명 5주년을 기해 기념호를 발간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기사들을 실었다가 필화 사건에 휘말린다. 사장인 박희도는 또다시 체포되어 2년여간 복역했다.
1926년 연정회 부활 운동, 1927년 신간회에 참가하였다. 이중 연정회는 우익 민족주의 인사들이 모여 독립의 차선책으로 자치론을 주장한 단체로, 부활 운동에는 조선총독부가 관여했다. 이때부터 박희도는 최린을 중심으로 한 자치론, 타협론에 기울기 시작했고, 1934년 한일 합동으로 조직된 친일 단체인 시중회(時中會)에 발기인과 회원으로 참가했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인 1939년 1월 《동양지광(東洋之光)》(일명 동광) 창간으로 본격적인 친일파로 전향했다. 동광은 일본어로 발행되는 친일 월간지로서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잡지였다.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많은 친일 논설을 게재한 것은 물론, 최린, 윤치호, 장덕수 등 친일 인사들을 동원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전쟁 협력을 주장하는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 잡지에 실린 친일 논설들은 매우 노골적인 것들로, 박희도는 〈총후 국민의 급선무〉(1941년),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1942년), 징병제 실시에 대한 공개 감사장(1942년), 〈진심을 헌납하라〉(1943년), 〈결전 비상의 때 - 궐기하라 반도 청년〉(1944년) 등을 직접 집필했다. 잡지사 전속으로 극단 협동예술좌를 창단하여 친일 연극의 순회 공연도 주선했다.
전쟁이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으며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평의원(1939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1940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으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고, 전시 체제 확보를 위한 친일 언론인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다.
광복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고,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병사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친일파 목록 중 언론분야, 친일단체, 전쟁협력 등 세 가지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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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
분류: 1889년 태어남 | 1951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