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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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1894년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3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목차

[편집] 배경

1860년 경주 지방 출신 잔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東學)은 ‘동양의 학문’ 혹은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을 비롯해 당시 들어 오던 서학(西學)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최제우가 창시한 이 동학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에 뜻을 두어 일부 지식인과 일반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동학의 교세가 날이 갈수록 커지자, 정부는 혹세무민의 이유를 들어 교주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에 동학의 교세 확장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제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후 동학 교도들은 1892년1893년에 두 차례의 집회를 열어 처형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편집] 반외세 운동으로의 확대

동학의 지도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교단의 지도자들이고, 하나는 농민 지도자들이다. 교단 지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시형손병희 등으로 포교의 자유 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농민 지도자의 대표는 전봉준, 황하일 등으로 교단 지도자와는 달리 사회 변혁에 뜻을 두었다.

이들 중 농민 지도자였던 전봉준, 황하일 등은 전라도 금구에 동학 교도 및 농민 1만 여명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또 보은에 모여있던 동학 교도들 역시 금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전국적 봉기를 꾀하였다. 특히 보은의 동학 교도들은 지도부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양이를 처부수고자 의병을 일으킴)’, ‘보국안민’의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하려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정부의 탄압과 교단 지도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으나, 전봉준 등은 이에 굴하지 하고 기회를 노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부 봉기를 일으켰다.

[편집] 고부 봉기

전라도는 예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농민들은 항상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고부는 전라도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였다. 이러한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과 수백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나섰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고,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3월 11일 ~ 12일)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위 사건을 민란으로 규정하고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무장을 갖추고, 김개남, 손화중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봉기라고도 불리는 제1차 농민 전쟁이다.

농민군은 1894년 3월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2.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3.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4.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었고, 동학 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 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부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기로 했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에 따라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편집] 전주·광주 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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