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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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閔泳徽, 1852년 ~ 1935년)는 친일파 인물이다. 초명은 민영준(閔泳駿)이다.
명성황후의 여흥 민씨 일족으로서 1877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뒤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게 되었다. 그는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많이 집중되어, 임오군란 때는 가옥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친일 이력 이전에는 청나라와 밀착한 수구파의 거두였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이용하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냈으며, 위안스카이와 결탁한 뒤 전권을 휘두르다가 청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개화파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를 탈출하여 청나라 군대로 피신하였고, 흥선대원군 측의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였다.
이후로는 정치권에서는 밀려나 1906년 휘문의숙(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하고 대한천일은행 설립에 관계하기도 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명성황후와 촌수가 먼 편이지만 민씨의 수괴가 되는 실력을 선보인 바 있듯이,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되었다. 초기에는 관직을 이용하여 수탈한 재물이었고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이 재산을 계속 불려서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선정되었다.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민두호(閔斗鎬)
- 부인: 안유풍 (풍문여자고등학교 설립자)
- 첫째 아들(적자): 민형식(閔衡植)
- 첩 소생
- 첫째 아들: 민대식(閔大植) (동일은행 두취)
- 둘째 아들: 민천식(閔天植)
- 셋째 아들: 민규식(閔圭植)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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