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용성(白龍城, 1864년 5월 8일 ~ 1940년 2월 20일)은 한국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震鍾).

전라북도 장수 출생으로, 10대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다.

1919년 3·1 운동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 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도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大覺寺)를 중심으로 왜색불교 추방 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화엄경》 등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일요 어린이 법회 개설, 거리 포교 및 찬불가 도입 등으로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1990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그리스도교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천도교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불교 : 한용운 백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