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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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朴東完, 1885년 12월 27일 ~ 1941년)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근곡(槿谷).
경기도 포천의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자랐다. 한성외국어학교와 배재학당에서 수학했으며, 배재학당 재학 중 기독교에 입교했다. 감리교의 전도사로 일하면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설립한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에는 박희도의 권유를 받아 자신이 전도사로 일했던 정동제일교회의 목사 이필주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그의 나이는 당시 35세로, 박희도, 이갑성, 김창준과 함께 청년 대표격이었다.
출소 후에는 신간회의 간사를 맡아 활동했고, 《기독교신보》 주필, 《신생명》 주간으로 언론 사업에 주로 종사했다. 이후 하와이로 파견되어 현지의 오아후 섬에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는 등 목회 활동을 하다가 현지에서 사망했다.
3·1 운동 이후 일본과 같은 시간을 쓰지 않기 위해 시계를 30분씩 늦춰놓고 사용할 정도로 반일 의식이 강했다는 일화가 있다.
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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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
분류: 1885년 태어남 | 1941년 죽음 | 한국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