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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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 때 무신(武臣)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는 면오(勉吾)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편집] 생애

157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다. 이 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1583년 여진족이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임명되어 성채 보수 및 총통 대량 생산을 하고 사천과 고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로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겸하게 되었다.

1592년 10월 5일 일본의 2만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3,800명의 군대과 진주 시민들을 지휘하여 철통같이 대응하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켰으나 성을 사수하던 조선군 역시 많은 사상자를 냈었고, 김시민 자신도 전투 도중 이마에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훗날 이 전투를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라 불리는 진주 대첩이라 일컫게 된다. 이 진주대첩의 승리 덕분에 일본군의 호남 지역 침공을 좌절시켜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을 온전히 보존하얐고, 그 결과 일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편집] 사후(死後) 관작(官爵)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