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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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손씨는 신라 6부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가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재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32년(유리왕9)에 그의 손자 직이 손씨로 사성받은 것이 시작이다. 그후 세계가 실전되고 후손 순이 효행으로 835년(흥덕왕10)월성군에 봉해졌고, 순의 손자 익원이 또한 월성(경주고호)군에 봉해졌으므로 순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월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의 아들이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와 의논하기를 아들은 다시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한번 죽으면 다시 모실 수 없다하고 아들을 취향산으로 데리고 가서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석종이 나오므로 기이해서 아들을 업고 석종을 가지고 돌아왔다. 왕이 그 사실을 듣고 집 한채와 연사미 50석을 하사했고, 그 집은 흥효사라 하고 석종을 걸게 하였다. 그후 백제군의 침입으로 종과 절은 없어지고 홍효사의 유허만 전한다. 유허지는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에 있으며 문화재 115호로 지정됨. 유허지내에 문효사가 있다. 시조 순의 자는 사구 시호는 문효이며 묘소는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효자능이다. 손씨시조문효공손순 춘향제는 문효사에서 매년 음 3월 3일 봉향하고 묘제는 음 10월3일 시조묘소에서 봉향한다. 유적관리 및 행사관리는 손씨시조문효공유적보존회에서 관리 집행한다,
유적보존회 총무이사 손진목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