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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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594년 6월 5일 - 662년 11월 26일)은 고구려의 정치인이다.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열전에는 고조 이름(李淵)의 연(淵)을 피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쓰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로 적혔고 중국 경극에는 '캣쉰'이라고 불리워 연개소문이 한자이름이 아닌 고구려 고유어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의 상고음 재구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이리캣쉰', '얼캐쉼'등의 주장이 존재한다.

아버지인 연태조는 동부대인 대대로(東部大人 大對盧) 직을 지냈고, 그의 사후 연개소문이 그 자리에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다.

연개소문은 이에 반대파들에게 한수 굽히며 대대로 자리에 간신히 올랐고, 즉위 즉시 재차 대당(對唐) 강경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영류왕과 대신들이 모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으나, 연개소문이 사전에 눈치를 채어 성 남쪽에 대신 1백여명을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초대하여 모두 죽여버리고 영류왕을 시해하여 보장왕을 옹립한 뒤 고구려의 최고 관직대막리지가 되었다.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그는 자신의 친족들과 심족들을 모두 요직에 앉혀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사신을 가두어버리는 일을 저질렀다. 이때 태종황제 이세민이 연개소문이 사신을 가둔 일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곧바로 당나라의 침공에 대한 결사항전을 하였다.

연개소문의 고구려 내 권위는 엄청났는데, 삼국사기 열전은 그가 몸에 일곱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고, 말을 오르내릴 때는 귀족이나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했다고 묘사했다.

연개소문은 662년 11월 26일에 죽었고 운산군 동림산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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