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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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날짜 : 1944년 6월 6일
장소 : 북프랑스 노르망디
결과 : 연합군의 상륙작전 성공. 대륙 진공 교두보 확보
교전국
영국 영국
미국 미국
캐나다 캐나다
nazi 나치 독일
지휘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총지휘관)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 및 캐나다 지상군 지휘)
오마 브래들리(미국 지상군)
베르트람 렘지 (해군)
트래포드 르-말로리 (공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지역 총사령관)
에르빈 롬멜(B집단군 사령관)
병력
326,000명 (6월 11일 현재) 미상
피해 상황
전사 - 53,700 dead
실종 - 18,000명
부상 - 155,000명
전사/사망/부상 - 20만여명으로 추정
포로 - 20여만명으로 추정

노르망디 상륙 작전프랑스노르망디 반도로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 벌인 상륙 작전이다. 그동안 북아프리카와 시실리, 이탈리아 본토에서 경험을 쌓은 미군과 오랜동안 대륙 진공을 준비해온 영국이 본격적으로 벌인 유럽 진공의 시작이었으며, 소련 입장에서는 그들이 요구한 이른바 ‘제2전선(이 단어는 소련측 관점의 용어임)’의 시작이었다.

목차

[편집] 작전 개요

작전은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5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별로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이었다. 셀부르 항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으로부터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소오드 해변이라 명명되었다(이런 이름의 해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암호명으로 붙여진 것이다). 각 해변 별로 담당 부대는 다음과 같다.

영국 해안에서 실시된 상륙 훈련
실제 크기로
영국 해안에서 실시된 상륙 훈련
  • 유타 - 미국 4 보병사단, 미국 2 레인저 대대, 미국 5 레인저 대대
  • 오마하 - 미국 1 보병사단, 미국 29 보병사단, 미국 2 레인저 대대 (예하 8개 중대)
  • 골드 - 영국 50 사단, 8 기갑여단
  • 주노 - 캐나다 3 보병사단, 2 기갑여단, 48 코만도 대대
  • 소드 - 영국 3 보병사단, 27 기갑여단
  • 영국군의 상륙 지점 후방에는 영국 6 공수사단 (붉은 악마라는 별명으로 더 통했다)이 새벽에 강하하였다.
  • 유타 해안 후방에는 미국 101 공수사단과 미국 82 공수사단이 강하하기로 되었다.
영국에서 실탄을 사용한 훈련 장면
실제 크기로
영국에서 실탄을 사용한 훈련 장면

[편집] 작전 계획

[편집] 연합군의 공격 계획

상륙할 해안의 지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1944년 5월 6일 제31 사진정찰 비행대대 소속 비무장 P-38 라이트닝을 이용해 10m상공으로 비행하는 초저도 비행을 통해 해안의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이 노르망디 해안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와 나폴레옹 시대의 오래된 자료들을 제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BIGOT 지도이다.

상륙에 맞서 타이거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 작전은 모의상륙훈련으로서 1944년 4월에 있었다. 슬랩튼 샌즈에서 실시된 이 작전에는 300여척의 함선과 3만여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4월 27일의 훈련은 절정에 달했는데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상륙정이 상륙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수륙양용 탱크들이 바다속으로 침몰했다. 또한 공군이 보병을 엄호하는 것에 실패했다. 게다가 4월 28일 새벽 2시 독일군의 고속 어뢰정인 슈넬부트 9척이 LST 여덟 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공격하여 LST-531이 침몰하고 LST-289는 선미가 뚫렸다. LST-507은 연료탱크가 폭발해 불탔다. 이 사건으로 749명이 전사했다.

[편집] 독일군의 방어 계획

B집단군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인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지대와 해안 장애물, 벙커, 포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했다.

B집단군 공병사령관 마이제 장군의 1944년 3월 17일자 편지에서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 만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며서 매설할 양이 2억개가 넘는다는 내용을 적었다. B집단군 전사일지에 기록된 지뢰 매설 현황을 살펴보면,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가 4,193,167개 이며, 이중 2,672,000개가 롬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하기도 했다. 마이제 장군의 편지는 계속되어, 해안 장애물의 설치는 모두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B집단군 전사일지에는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롬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웠다. 그러나 말뚝만으로 글러이더에 타격을 줄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포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이런 노력도 노력이지만, 실상 독일군 방어 계획의 핵심은 해안에 적군이 상륙하면 후방에 대기하던 기갑부대로 다시 바다로 쓸어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쓸어버린다는 개념만 공감대를 형성했지 실제 배치문제에서 독일군 수뇌부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OKW의 알프레드 요들, 서부전역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기갑집단의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B 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의 견해가 모두 달랐거나, 애매했다. 이중에서 특히 갈등이 심했던 것은 슈베펜부르크와 롬멜이었다. 이전부터 롬멜을 경원시했던 슈베펜부르크를 비롯한 정통파 참모장교 출신들은 롬멜을 경원시하고 있었고, 그의 기갑부대 배치 전략에 반대하고 있었다. 거기에 롬멜의 B 집단군 예하인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 또한 롬멜의 견해에 반대 입장이어서 문제는 복잡했다.

롬멜은 안치오 상륙작전과 디에프 기습의 예를 들어 기갑부대를 가능한 한 해안가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베펜부르크도 살레르노 전투의 예를 들어 연합군의 공수사단, 항공력, 그리고 해군의 함포 사격에 기갑부대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괴멸할 것이라면서 롬멜의 주장을 반박했다. 두 주장 모두 실제 전투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어느 쪽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정권자는 히틀러와 룬트슈테트였지만 두 사람 모두 명확한 입장을 갖지 못했다. 이 상황은 당시 서부 전선 독일군의 이상한 지휘체계에 기인한 탓도 있었다.

결국 타협책이 나왔지만, 이 타협책은 미봉책에 가까웠고, 5월에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정작 상륙 당일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파 드 깔레로 상륙할 것을 예상한 어쩡쩡한 배치와 반년 가까이 계속된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반목으로 인한 지휘 체계의 혼란 탓에 신속한 투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서유럽 독일 기갑부대 배치 논란입니다.

[편집] 작전 개시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 미국 1 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테일러 대령이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보고 남긴 말.

연합군은 1942년부터 프랑스에 상륙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 몇 달간의 구상 끝에 1943년에 마침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병력을 수송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을 위해 연합군은 독일군을 속일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이것을 포티튜드 작전이라 명명했다. 이 작전을 위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연합군 장성들이 오버로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944년 6월 5일로 결정된 작전은 그 전날, 갑작스럽게 도버 해협에 태풍이 불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다. 그러나 6월 5일,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결단으로 상륙 작전이 강행되었고, 마침내 연합군은 6월 6일 새벽에 먼저 공수부대가 노르망디 일대에 공수 및 강하해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 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했다.

이어 6월 6일 새벽, 작전이 개시되었다. 소드 해변, 주노 해변, 골드 해변의 영국군은 밀물때인 오전 7시에,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의 미군은 아직 썰물인 오전 6시에 상륙했다. 두 나라의 상륙 시간이 다른 것은 밀물과 썰물에 대한 양국 지휘관들의 서로 다른 생각때문이었고, 장단점이 있었다. 독일은 상륙주정의 접안을 막고자 바다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한 상태였다. 미군은 이 장애물들이 드러나는 썰물때에 상륙하여 상륙 주정의 피해를 막아 최대한 백사장에 많은 병력을 올리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도저 부대를 상륙시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으나 불도저는 기초적인 장갑조차 없어서 대다수의 불도저는 파괴되어 임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불도저 운전수가 총 혹은 파편에 맞아 사망하게 되어 임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가 더 많았다. 썰물 때 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은 필연적으로 상륙한 보병들이 달려야 하는 거리가 길어져 벙커와 참호로부터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보병들이 벙커까지 달려야 했던 거리는 약 450M였다. 이에 반해 영국은 상륙주정들이 장애물에 걸려 뒤집히는 경우가 발생해도 최대한 해안 가까이에 접안하여 보병들이 달리는 거리를 줄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두 방법 중에 어떤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결국 영국군과 미군은 상륙 작전 개시 시간이 1시간 차이나게 되었다.

공군과 해군의 강력한 엄호 아래 오마하 해변을 제외한 모든 상륙 지점의 상륙부대는 순조롭게 상륙에 성공하고, 오마하 해변의 상륙부대도 이후 상륙에 성공한다.

[편집] 함대 지원

해안으로부터 1Km 떨어진 곳에는 구축함이 자리잡아 보병들을 엄호했다. 일부는 5.5-7km 떨어진 해상에서 120mm포로 지원사격을 했다. 5.5-11km 구간에는 사거리가 20km정도인 350mm포를 장착한 전함들이 정박하여 해안을 향해 연신 포격을 퍼보었다. 상륙 직전 30분간 집중포격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포격은 상륙하는 병력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4일과 5일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된 포격을 실시하지 못했고 6일에는 안개로 인해 해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함대는 아군 병력이 자신들의 포에 희생될 것을 우려해 목표지점보다 더 먼 거리로 포탄을 발사하여 독일군의 피해는 매우 미미했다. 특히 '피의 오마하'라 불리는 오마하 해변의 병력들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까지 함대 포격이 '해변의 모래를 두 번 뒤엎어 놓았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한 이들은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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