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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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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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 1898년)은 조선 말기의 왕족. 정치가로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 대부인 민씨이다. 영조의 5대손이자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편집] 생애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며,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7년 종친부의 유사당상에 임명되어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나, 큰 의미가 없는 직책이었으며, 왕족에 대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했다.

1863년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점점 노골화되었으나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1866년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워 없앴고(제너럴 셔먼 호 사건), 그 직후 프랑스(1866년), 미국(1871년)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프랑스 - 병인양요, 미국 - 신미양요)이 일어났으나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척화비까지 세웠다. 이에 대해서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침략전쟁(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등 서구열강의 횡포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서구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1869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과 왕정 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국내적으로 널리 전파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주교인 베르뇌와 친분을 갖는등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1866년 1만 명 가까운 신도를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전국 각지에서 대량 처형하는 강경정책으로 정책방향을 바꾸었다. 당시 천주교회의 교세 확산을 우려한 보수파들의 반발과 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였다. 역시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그 창도자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고, 비리의 온상 서원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겨 두었다.[1] 그의 사이비서원정리는 착취로 고통받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黨派)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73년 최익현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고종의 견제로 실각,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자신도 청나라톈진으로 압송되어 억류되었다. 이후 1885년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의 정치적 계산으로 귀국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3차 집권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시점을 전후하여 친일적 성향으로 변신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의 존호를 받았다.

[편집] 가족

  1. ^  서원도 ~ 두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 3월 20일; 정교(鄭喬), 《대한계년사》을축년(1865)고종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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